한시(漢詩)
오도송(悟道頌)
上來佛祖鈍痴漢상래불조둔치한 仄平仄仄仄平仄
安得了知慈變事안득료지지변사 平仄仄平平平仄
若人問我何所能약인문아하소능 仄平仄仄平仄平
路傍古塔傾西方로방고탑경서방 仄平仄仄仄平平
청담선사<靑潭禪師>
예로부터 불조가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길가상 고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리!
이 게송(게頌)은 근래(近來) 고승(高僧) 청담선사(靑潭禪師)의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式) 오도송(悟道頌)이다. 압운(押)은 한(漢)은, 거성(去聲) 한통(翰統) 운족(韻族)이고, 사(事)는 거성(去聲) 치통(寘統) 운족(韻族)이고, 방(方)은 상평성(上平聲) 진통(眞統) 운족(韻族)이다.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式) 운목(韻目)도 측성(仄聲) 거성(去聲) 운목(韻目)이 두 개이고, 상평성(上平聲)이 하나라 운목(韻目)도 기승전결(起承轉結) 평측(平仄)도 근체시(近體詩) 게송은 아니다. 청담선사(靑潭禪師)는 경남 진주(晉州) 출생이고, 진주 공립농업학교(公立農業學校)를 졸업(卒業) 했다. 1927년에 일본으로 가서 송운사의 아키모토에게서 불도를 닦아 득도하고 이듬에 귀국해서 개운사(開運寺)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을 졸업(卒)하고 1956년에는 대한불교조계종회의장(大韓佛敎曹溪宗宗會議長)이 되었고, 1957년도에는 합천해인사주지(陜川海印寺住持)를 역임했고, 1962년도에는 삼각산(三角山) 도선사(道詵寺) 주지(住持)를 하셨고, 1968년도에는 조계종총무원장(曹溪宗總務院長)을 지냈으며, 대한불교(大韓佛敎) 불교정화(佛敎淨化)에 크게 이바지하셨다. 정화 때 월주스님께서 그 당시 청담 선사님의 활동상을 회고 하는 것을 들어보면 전방위적으로 간부들을 대동하고 매일 같이 내무부 치안국과 문교부로 경무대로 언론 기관까지 방문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불교정화불사(佛敎淨化佛事) 필요성(必要性)을 설명하고 설득했다고 한다. 정화불사(淨化佛事) 대의명분(大義名分) 아래에서 원력보살(願力菩薩) 인욕보살(忍辱菩薩)로 사심(私) 없이 앞장을 서셨다고 한다. 법원에서 대처승(帶妻僧) 측에 유리한 판결(判決)이 나오자 6비구(比丘) 대법원(大法院) 할복사건(割腹事件)이 터지자, 판결문에 항의하며 380명이 대법원에 난입했다가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방식이 문제가 되어서 정화불사 총 지휘를 맡은 청담선사님께 비난이 쏟아졌다고 한다.
조계사에서 대책회의를 하였는데,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을 하자, 인욘보살(忍辱菩薩)이었던 청담선사(靑潭禪師)께서 폭발을 했다고 한다. 불단에 놓인 뇌쇠 촛대를 들더니, 한마디만 더하면 배를 쑤셔버리겠다고 호통을 치자, 좌중은 누구 하나 입도 뻥끗 못 했다고 한다. 선사님의 카리스마에 제동이 걸린 대중스님들은 조계사 공양간에 솥단지를 전부 마당에 내놓고 단식투쟁(斷食鬪爭)에 돌입했다고 정화당시(淨化當時)를 월주(月珠)스님께서 회고(回顧)하셨다. 청담선사님은 대법원(大法院) 난입사건(亂入事件) 주모자(主謀者) 혐의(嫌疑)로 체포(逮捕)가 되어 1주일간 서대문경찰서(西大門警察署)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총무국장(總務局長)이었던 월주(月珠)스님께서 매일 면회하고 사식을 넣어드리면서 옥바라지를 하였다고 한다. 젊은 수행자였던 월주스님의 눈에 비친 청담 선사님은 정화의 원력 화신이라고 역설하셨다. 이렇게 각고 끝에 이루어낸 정화불사 이후 한국 불교 조계종은 어떠한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수행은 뒷전이고 사판권승(事判權僧)들이 판을 치고 있다. 아마 청담선사님께서 오늘날 종단을 권승들의 하는 짓을 보신다면 통곡(痛哭)하지 않겠는가? 청담선사님은 1971년에 세수(歲數) 70세 법랍(法臘) 45세로 입적(入寂)하셨다. 오늘은 청담선사님의 오도송(悟道頌)을 근체시 작법 평측 운통(韻統)에 맞추어 반추해 보았다. 여여법당 화옹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