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절명” 박정희 소리내 엉엉 울었다 (59)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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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리만큼 싯누런 구름이 잔뜩 낀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나는 충남 서산의 삼화목장에 내려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별일 없을 테니 총리는 며칠 쉬고 오라”고 하셔서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TV로 중계됐다. 오전 10시23분 박 대통령이 기념사 중 “조국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대목을 읽어 내려가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탕, 탕” 하는 총소리가 나더니 중계 화면이 깜깜해졌다. TV를 지켜보던 나는 ‘어이쿠, 일이 났구나’ 싶었다.
초초하게 기다리는데 10시40분쯤 국무총리 정보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기념식 중 총격이 있었고, 대통령은 무사하지만 영부인이 총에 맞아 서울대병원에 실려갔으니 빨리 상경하시라고 했다. 궂은 날씨로 헬리콥터가 뜨기 어려웠다. 자동차로 비포장도로를 거쳐 올라오느라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병원에 도착했다. 육영수 여사는 조총련계 재일동포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머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였지만,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다섯 시간 넘게 수술했다. 병원에서 육 여사가 깨어나길 기다리던 박 대통령을 대신해 나는 그날 저녁 경복궁 경회루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연을 주재했다.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내빈들과 악수를 나눈 뒤 청와대로 올라갔다.
병원에서 돌아온 박 대통령은 청와대 2층에 서서 해질녘의 서울시내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뒤에 서 있는데 보고가 들어왔다. 오후 7시, 육 여사가 운명(殞命)하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에 박 대통령이 엉엉 큰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터져나오는 통곡이었다. 강인하고 속이 깊은 박 대통령이 그렇게 슬피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
박 대통령과 육 여사, 두 분은 사이좋은 부부였다. 육 여사는 결혼생활 24년간 한결같이 남편을 잘 받들고 섬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분도 남편 때문에 속상한 일이 없진 않았겠지만 겉으로 그런 기색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늘 자상하게 남편을 보필한 헌신적인 내조자였다. 사회의 불우한 이들에겐 따뜻한 봉사의 손길을 내밀었다. 육 여사가 만든 사회봉사단체 양지회(陽地會)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나환자촌 지원의 대명사였다. 이런 일들로 국민들에게 퍼스트레이디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를 처음으로 알린 분이었다.
🔎 현대사 소사전: 양지회(陽地會)
정부 장·차관 부인과 국영 기업체장 부인, 군 장성 부인들로 구성된 봉사단체. 육영수 여사가 주도해 1963년 결성했다. 재해민 구호와 전방 국군 위문, 고아원과 양로원 돕기 등 자선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매년 자선 바자를 개최하고 벽지·낙도 학교에 어린이 문고를 무료로 나눠주는 활동도 벌였다. 육 여사는 양지회원들과 함께 전국 77곳의 나환자촌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초기엔 육 여사가 회장이었지만 66년부터 국무총리 부인이 회장을 맡고 육 여사는 명예회장으로 활동했다. 김종필 국무총리 재임 시절(71~75년)엔 부인 박영옥 여사가 양지회 회장을 맡아 육 여사 서거 뒤에도 양지회를 이끌었다.
1971년 4월 15일 7대 대통령 선거 유세를 벌인 춘천 공설운동장에서 김종필 공화당 부총재가 고깔모자를 육영수 여사에게 씌워주고 있다.
육 여사는 내게는 처숙모가 된다. 우리 부부는 신혼 초인 1951년 대구에서 박 대통령 내외와 같은 집에 살았다. 안방과 윗방은 박 대통령 부부가 쓰고, 대청 건넌방을 나와 아내가 썼다. 아내가 큰딸 예리를 가졌을 때다. 배가 불러 몸이 무거워지는 아내를 육 여사가 살뜰히 보살펴줬다. 나는 그해 9월 만삭이던 아내를 두고 미국 보병학교로 유학을 떠났는데, 아내 곁에 육 여사가 있어서 안심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이 취임한 뒤엔 청와대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육 여사를 만나 인사를 드렸다. 청와대 1층에 내려와 계시지 않으면 2층 내실로 올라가서 꼭 안부를 여쭸다. 그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71년 4월 대통령 선거 유세 때인데, 태양이 단상 정면에 떠 있어서 눈이 부셨다. 나는 당에서 나눠준 민주공화당보를 접어 햇볕 가리개로 고깔모자를 만들어서 육 여사 머리에 씌워드렸다. 내가 “아, 예쁘시네요”라고 하자, 그가 소녀처럼 환하게 웃었다.
돌이켜보면 불길한 징조라고도 할 만한 작은 소동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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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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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육영수 여사의 영결식이 열린 1974년 8월 19일, 전국이 비통함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염천(炎天) 무더위에도 200만 인파가 육 여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기 위해 중앙청 영결식장에서 사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이르는 연도를 가득 메웠다. 흰 소복을 입은 부녀자와 가슴에 검은 상장을 단 노인들이 흐느끼며 애통해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정문 앞에서 육 여사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노란색과 흰색 국화로 덮인 영구차를 어루만지는 대통령의 모습이 사진으로 전해져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