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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의 금강경강좌 제10강 여법수지분 제13
金剛般若波羅蜜經(금강반야바라밀경) 제10강 여법수지분 제13분
如法受持分 第十三(여법수지분)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當何名此經이며 我等이 云何奉持하리잇고
이시에 수보리가 백불언하사대 세존이시여 당하명차경이며 아등이 운하봉지 하리잇고
佛告須菩提하사대 是經은 名爲金剛般若波羅蜜이니 以是名字로 汝當奉持하라 所以者何오
불고수보리하사대 시경은 명위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시명자로 여당봉지하라 소이자하요
須菩提야 佛說般若波羅密이 卽非般若波羅密일새 是名般若波羅密이니라
수보리야 불설반야바라밀이 즉비반야바라밀일새 시명반야바라밀이니라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所說法不아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가 유소설법불아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如來는 無所說이니다
수보리가 백불언하사대 세존이시여 여래는 무소설이니라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이 是爲多不아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삼천대천세계소유미진이 시위다부아
須菩提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이시여
수보리언하사대 심다니이다 세존이시여
須菩提야 諸微塵을 如來가 說非微塵일새 是名微塵이며 如來가 說世界도 非世界새
수보리야 제미진을 여래가 설비미진일새 시명미진이며 여래가 설세계도 비세계일새
是名世界니라
시명세계니라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見如來不아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가이삼십이상으로 견여래불아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不可以三十二相으로 得見如來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三十二相이
불야니이다 세존이시여 불가이삽십이상으로 득견여래니 하이고오 여래가 설삼십이상
卽是非相일새 是名三十二相이니다
즉시비상일새 시명삼십이상이니다
須菩提야 若有善男子善女人이 以恒河沙等身命으로 布施하고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
수보리야 약선남자선여인이 이항하사등신명으로 보시하고 약부유인이 어차경중에
乃至受持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甚多니라
내지수지 사구게등하야 위타인설하면 기복이 심다니라
제13, 여법하게 받아 지니다[如法受持分,여법수지분]
그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의 이름을 무엇이라 해야 합니까?
그리고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가져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密)’이다. 그대들은 반드시 이러한 이름으로 받들어 가지도록 하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반야바라밀이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설법한 바가 있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법하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삼천 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먼지의 수를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먼지를 여래는 말하기를 ‘먼지가 아니고 그 이름이 먼지일 뿐이다.’고 하며, 여래가 말하는 세계도 또한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서른두 가지의 거룩한 상호로써 여래라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서른두 가지의 거룩한 상호로써는 여래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서른두 가지의 거룩한 상호는 곧 상호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서른두 가지의 거룩한 상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수많은 목숨을 바쳐 널리 보시한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 경전 가운데서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가지고 남을 위하여 설명해 주었다면 그 복이 훨씬 많으니라.”
이 경을 수지하는 법
여법이나 수지라고 하는 말은 불교에서 잘 쓰는 말이지요. ‘여법하게 살라’는 것은 ‘법대로 살라’는 뜻입니다. ‘가르침대로 살라’ ‘이치대로 살라’는 뜻이지요. 인위적인 규칙에 대해 ‘여법하게’ 라고 했다면 ‘규칙대로’라는 뜻이 됩니다.
수지는 ‘받아지니다’라는 뜻입니다. 앞서 설명하였습니다만, 경을 받아지닌다는 것은 첫째 종이와 먹으로 된 이 책자를 우리가 소지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둘째 그 가르침을 마음속에 아로새겨서 늘 잊지 않고 생각하며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에 지니는 수지야말로 진정한 수지지만, 불자로서 어디를 가든 항상 경전을 지니고 다니는 1차적인 수지도 중요합니다. 불자들은 항상 천수경 하나라도 지니고 다녀야 합니다. 금강경을 가지고 다니면 더욱 좋지요. 경전을 가지고 다니다가 1분도 좋고, 2분도 좋고, 짜투리 시간이 나면, 짧은 시간을 이용해서 한구절이라도 읽고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연세 있는 분이 전철에서 멍하니 앉아,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지긋이 보고 마음에 새기고 있다면, 제 3자가 보더라도 아름답고 근사한 모습이지요.
불자로서 마음에 새겨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當何名此經이며 我等이 云何奉持하리잇고
이시에 수보리가 백불언하사대 세존이시여 당하명차경이며 아등이 운하봉지하리잇고
금강경의 12분까지 상당한 내용을 이야기 했습니다. 금강경의 주된 이치인 무상의 이치를 반복하면서, 지금까지 ‘보살의 삶은 베푸는 삶이다’라는 것을 주로 이야기 하였고, 베풀 때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 ‘상을 내지 말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쉽게 표현한다면 좋은 일을 하면서 ‘생색내지 말라’는 것이지요.
보살의 삶은 베푸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특히 베푸는 일을 하면서 상을 내고 생색내고 관념에 사로잡히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상을 내지 않고 보시하는 것은 대단한 복이 된다고도 하였습니다.
이 정도 내용만 되어도 벌써 상당한 경전, 훌륭한 경전이 되기 때문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을 경으로 묶는다면 무엇으로 제목하면 좋겠는가 묻습니다. ‘이 경전의 이름을 우리가 무엇으로 하여 받들어 가지겠습니까’
똑똑한 수보리이므로 적절한 시간을 맞춰서 경의 제목을 물었습니다.
佛告須菩提하사대 是經은 名爲金剛般若波羅蜜이니 以是名字로 汝當奉持하라
불고수보리하사대 시경은 명위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시명자로 여당봉지하라
금강반야바라밀경은 다이아몬드와 같이 날카로운 지혜, 빛나는 지혜, 명쾌한 지혜인 금강반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경(經)이란 가르침이니까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는 가르침 이렇게 이름을 지을 수가 있다. 이 이름으로써 그대는 마땅히 받들어 가지라.’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경전을 마음에 수지하든, 책으로 수지하든 그 이름은 중요합니다.
특정한 사람을 찾을 때는 ‘누구 찾아오너라’ 해서는 안되고 당연히 이름을 부르면서 그 사람을 찾아오라고 해야 합니다. 이름이라는 것이 상당히 허망한 것이기도 하면서 상당히 필요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여기 이 경전의 이름을 등장시켜 놓았습니다.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佛說般若波羅密이 卽非般若波羅密일새 是名般若波羅密이니라
소이자하오 수보리야 불설반야바라밀이 즉비반야바라밀일새 시명반야바라밀이니라
‘까닭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수보리야 부처님이 설하신 반야바라밀이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곧 아니다(卽非,즉비)라고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 가지 이유만이 아니예요.
무엇이건 본래 없던 것이고, 만든 것입니다. 또 만들었다 하더라도 ‘무엇이다’ 라고 결정적으로 드러내 보일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텅 빈 것이고 공한 것이라고 누차 말씀 드렸지요.
우리가 이런 저런 인연을 얼기설기 묶어서 ‘금강경 법회다’ ‘이것이 금강경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 이름이 금강경일 뿐인 것이지요. 시명반야바라밀입니다.
즉비의 논리라고 하는 것은 세상 모든 만물에 다 적용시켜도 모두 해당되는 논리입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고 그 이름이 아버지다.’
‘학생이 학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학생이다.’
‘스님이 스님이 아니라 그 이름이 스님이다.’
가만히 사유해보면 기가 막힌 말이고 딱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름 지어놓고 부르자니 아버지고 스님이고 학생이지요. 한 남자가 아버지라고 해도 그 아들에게나 아버지이지 아내에게는 아버지가 아니지요. 그 사람에게 손자가 있다면 할아버지가 되고, 직업이 학교 선생이라면 선생님이 됩니다. 개중에 장난꾸러기 학생들이 있다면 좋지 아니한 별명으로도 불리지요.
보통사람이라도 한 사람이 가진 이름은 열 가지 내지 스무가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름은 이름일 뿐입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아들과 딸에게 한해서만 아버지이고 아내에게는 남편이요, 손자에게는 할아버지요, 회사에 가서는 회사원입니다.
사람의 이름만이 아니고 그 어떤 것도 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 큰 지침이 되고 교훈이 되는 금강경마저도 ‘시명반야바라밀’이라고 했습니다.
‘이름이 반야바라밀이지 뭐가 반야바라밀이냐’ 라고 이해하는 것이 그것에 매달리거나 집착하지 않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해야말로 금강경다운 이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所說法不아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如來는 無所說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가 유소설법부아
수보리가 백불언하사대 세존이시여 여래는 무소설이니다
무득무설분에 잠깐 언급되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는가’ 우리 일반상식으로는 부처님같이 설법을 많이 하신 분도 없지요.
부처님의 제자인 수보리도 평생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살아왔고, 그 설법에 의해서 자기 인생을 엮어가고, 그것을 기준삼아 수행을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삼계의 대도사요 사생의 자부라고 하는 이유도 세존의 위대한 설법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보리는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없습니다’라고 부처님께 대답합니다.
부처님이 ‘여래가 설한 바 설법이 있는가’를 물었을 때 ‘설법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미 설법을 했다고 하는 관념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것은 곧 상이 됩니다. 그러면 금강경의 안목이 아니지요. 금강경은 다른 소승불교의 차원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금강경은 대승불교적인 안목으로 설해진 경전이기 때문에 보통 상식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처님이 설법한 것이 있다’‘ 깨달음이 있다’‘복이 있다’ ‘죄가 있다’라고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요즘에는 어떤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곳곳에서 끊임없이 참회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참회할 일이 많은 것이 아니예요. 우리의 시각을 어디에다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그러한 일이 발생을 할 뿐입니다. 사과는 벌레 먹은 사과도 있고 튼실하게 잘 영근 사과도 있을텐데 잘 영근 사과에다 초점을 맞춰야지 벌레먹은 사과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도 아주 뛰어난, 지극히 고귀한 인간의 본래의 모습, 내재되어 있는 너무나도 소중한 본래인의 심성, 다이아몬드보다 천 배 만 배 더 소중한 본래인의 심성, 불성이라고도 하는 그것에 늘 초점을 맞추고 눈을 떠야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참회할 일, 잘못됐다고 사죄할 일이 없습니다. 너무 그렇게 잘못된 데에 마음 쓸 일이 아니지요.
수보리는 감히 부처님의 위대한 설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강경의 안목은 무소설(無所說)이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죄나 참회에 대한 것도 보다 더 차원 높은 안목으로 보면 큰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늘 그렇게 주눅들고 좁은 안목을 가질 것이 아닙니다. 죄이든 복이든 우리는 금강경의 안목 정도는 가져야 됩니다. 복이 없다는데 죄인들 뭐가 있겠습니까.
천수경만 해도 ‘죄라는 것은 고정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전부 우리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죄는 마음에 건립된 것이니까 마음만 없다면 모든 죄는 사라진다. 죄가 없고 마음도 없으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참회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 텅 빈 우리의 심성자리, 우리의 마음에 초점을 맞춰놓으면 차원이 달라집니다.
보살은 보살 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관심이 깊으면 자기의 처지를 돌보지 않습니다. 자기 처지가 지금 어떻더라도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항상 남을 위하는 마음에 늘 급급하고 어떻게 하면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 하는 자세로 살아가면 자기 처지가 남보기에는 어떻든지 간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자신이 세상 누구와 비교해도 높은 경지에 있고, 돈도 제일 많고, 지식도 제일 많고 건강도 제일 좋아야 보살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 모든 조건이 최하위라 해도 이 사람의 정신이 보살행으로 무장되어 있으면 여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문제 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에 관심을 쏟고 사느냐’ 에 좌우되는 것이지요.
금강경의 차원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수보리는 ‘부처님이 설법한 바가 없다[無所說]’라고 당당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이 是爲多不아
須菩提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이시여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삼천대천세계소유미진이 시위다부아
수보리언하사대 심다니이다 세존이시여
그동안 금강경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깨달음이나, 보시나 별별 세상의 조건을 전부 망라해 보였습니다. 여기서는 삼천대천세계라고 하는 세상에서 제일 큰 것과 미진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을 다 끄집어내어 하나하나 쪼갭니다.
삼천대천세계가 예를 들어 이 지구라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장 작은 먼지가 많은가 하고 물었습니다.
수보리는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須菩提야 諸微塵을 如來가 說非微塵일새 是名微塵이며 如來가 說世界도 非世界새 是名世界니라
수보리야 제미진을 여래가 설비미진일새 시명미진이며 여래가 설세계도 비세계일새 시명세계니라
앞에서는 복이니 깨달음이니 설법이니 하는 지극히 추상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여기서는 구체적인 먼지를 이야기 합니다. ‘먼지는 먼지가 아니고 이름이 먼지다’ 설비미진[說非微塵]이라고 했는데, 즉비나 설비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연필 한 자루도 쪼개놓고 보면 먼지이고 쌀 한톨도 가루를 내면 먼지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온통 먼지입니다. 그런데 그 먼지는 먼지가 아니고 이름이 먼지일 뿐이라고 하는데는 이유가 많습니다.
연필을 쪼개고 보면 먼지이지만,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연필은 연필일 뿐 먼지가 아닙니다. 쌀도 부수면 먼지이지만 먼지 이전에는 쌀입니다.
눈에 보이는 먼지는 어쩌다가 그러한 인연이나 조건에 의해서 먼지입니다.
선방에는 부전소임이라는 것이 있는데 선방을 관리하고 청소하는 소임입니다. 어느 해인가 선방에서 한 젊은 수좌가 너무 게을러서 다른 스님들이 ‘구석구석에 먼지가 저렇게 많은데 청소 좀 해야지 책임자가 청소를 이렇게 안하면 되느냐’고 한마디씩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젊은 수좌는 좌선을 하고 앉았다가 ‘세상이 전부 먼지로 되어있는데 먼지를 어디다 치우란 말인가’ 라고 답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스님들이 모두 웃으면서 먼지수좌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이 수좌는 일본에 가서 공부를 잘하고 있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세상에서 제일 작은 먼지 이야기를 한 다음에 세계이야기를 합니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도 곧 세계가 아닐새 이 이름이 세계다’ 비세계(非世界)라는 구절 앞에 즉(卽)자를 넣어도 상관이 없고, 안 넣어도 역시 뜻은 ‘곧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전에 어떤 스님과 지구의 생김새에 대해서 상당히 설전을 한 적이 있어요. 그 스님은 물론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과학적인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지구는 눈에 보이는 대로 낮은 곳도 있고 높은 곳도 있고 강이 흐르고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희다. 이것이 지구 아니냐. 왜 자꾸 둥글다고 하느냐.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지구야말로 진짜 실다운 지구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도 지구가 둥근지는 잘 모르지요.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을 타고 가서야 지구는 둥글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눈 앞에 펼쳐진 세계를 보면서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것은 안맞다’ 라고 하는 말에도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지구는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이 모습 이대로다. 둥글다고 하지 말라’이런 이야기도 ‘이 세계는 사실은 세계가 아니다’라고 하는 데 참고가 됩니다.
세계가 곧 세계가 아닌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지요. 우리가 편의상 ‘이것을 세계라고 하자’라고 이름 지어 놓고 부를 뿐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見如來不아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不可以三十二相으로 得見如來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三十二相이 卽是非相일새 是名三十二相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가이삼십이상으로 견여래부아
불야니이다 세존이시여 불가이삼십이상으로 득견여래니 하이고오 여래가 설삼십이상이 즉시비상일새 시명삼십이상이니다
이 구절 역시 그동안 공부해온 실력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설법도, 먼지도, 지구도 모두가 사실은 어떤 관념에 사로잡혀서 고집할 일이 아니라는 말씀을 그동안 금강경에서 한결같이 해왔습니다.
이 대목은 부처님께서 갖추고 있는 특수한 몸매인 32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귀가 길고, 코가 높고, 이마 위에 살이 불룩 솟았고, 미간의 백호가 있으며, 무릎을 지날 정도로 긴 팔, 예술가처럼 긴 손가락, 심지어 발은 평발이라든가 하는 여러 가지 부처님의 특징적인 모습들이 서른 두가지가 있는데 부처님이 가지신 이 아름다운 모습을 32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가이 32상을 가지고 여래라고 보는가’하고 묻자 수보리는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답하였습니다. 금강경의 무상의 관점에서 보면 가히 32상이라고 하는 특수한 모습을 가지고서 여래라고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씀하신 32상이 상이 아니고 이름이 32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즉시비상(卽是非相)이라고 했는데 시(是)자를 빼면 즉비(卽非)이지요.
수보리가 이제는 문리가 나서, 금강경에서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32상까지도 사정없이 부정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사람의 얼굴모습이나 생긴 모습을 가지고 뭐라고 꼬집어서 이야기하면 큰 실례이지요.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인격을 침해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감히 수보리는 부처님의 잘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32상을 여지없이 부정합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좀 쉽습니다. 하지만 저 밑에 있는 제자가 하늘같은 스승을 부정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요.
앞서 수보리는 부처님의 깨달음과 연등불에게서 수기받은 것과, 설법까지 부정하였는데 여기와서는 인격 침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얼굴과 몸 구석구석의 모습까지 다 부정하고 나서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쯤되면 우리 역시 알량한 자기 공로가 있고 선행이 있는 것을 내세울 처지가 아닙니다.
금강경을 여기까지 공부하면서, 감동하고 탄복하며 마음에 아로새겼다고 해도 이 대목에 와서는 정말로 대단히 탄복할 일입니다.
‘여래가 설한 삼십이상이 즉시비상일새 이 이름이 삼십이상이니다’하는 것은 건드려서는 안 될 신체에 대한 부분까지도 사정없이 언급하며 ‘32상 갖춰봐야 그것은 아니다. 말을 하자니 32상이지’하는 식으로 이야기 한 것입니다. 어떤 종교, 어떤 철학, 어떤 성인의 말씀에서도 이러한 소리를 들을 수가 없지요.
금강경은 대단하고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자고로 소견이 뛰어난 선사들이 금강경을 높이 숭상하고 탄복하는 것은 이렇게 시원스러운 가르침 때문입니다.
스승의 신체 문제까지 꼬집어서 ‘그 32상이라고 하는 것이 이름이 32상일 뿐이다’라고 표현하는 수보리는 대단한 분이예요.
須菩提야 若有善男子善女人이 以恒河沙等身命으로 布施하고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 乃至受持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甚多니라
수보리야 약유선남자선여인이 이항하사등신명으로 보시하고 약부유인이 어차경중에 내지수지사구게등하야 위타인설하면 기복이 심다니라
존중정교분에서처럼 경전의 가치를 높이 이야기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앞에서는 칠보로써 비유를 했지만 여기서는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비유를 합니다. 칠보나 금은보화, 다이아몬드 같은 것은 물질이니까 그렇다쳐도 인명과 비교해도 역시 금강경이 훨씬 우위에 있다는 내용입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목숨으로써 보시를 하거나,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전체나 내지 사구게등만 수지해서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해설했다면 그 복이 매우 많다’고 하였습니다.
아직까지는 ‘저 공덕보다 더 많다’라는 뜻으로 ‘승피(勝彼)’라는 표현을 할 분위기는 아니어서 ‘매우 많다’고 했지만, 내용인즉슨 생명을 보시한 공덕보다도 이 금강경의 공덕이 훨씬 수승하다는 내용입니다. 뜻은 그러한데 표현을 조금 아낀 것이지요.
사실 금강경의 이치를 제대로 알고 보면, 이 목숨은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고 한 번쯤 이 목숨 버리고 설사 여러 수십 번을 버린다 하더라도 금강경의 도리 한 번 제대로 안다면 그것이 훨씬 수승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여기서 경의 소중함을 한 대목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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