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요나에게 하신 명령은 이러하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요나서 1장 2절
이 말씀을 들은 요나는 즉시 짐을 챙겨서 길을 떠났다.
근데 그 다음이 상상초월임.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니느웨의 정반대쪽으로 간 것이다.
하나님과 대놓고 맞짱 뜬 요나는 역대급 상남자 인정.
지도에서도 느껴지는 상남자 기운
하나님이 가라고 한 니느웨가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요나가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니느웨는 현재 이라크 모술 지역이고, 당시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임.
니느웨는 성경의 표기방법이고, 일반적으로는 니네베라고 함.
오늘날 니느웨 위치
당시 아시리아 제국의 영토(초록색)를 보면 아래와 같음.
요나가 속해 있던 북이스라엘은 두로 아래, 예루살렘 위 지역이었음.
다시 말해, 북이스라엘은 자신을 언제 잡아 먹을지 모르는 강대국과 국경을 마주 대하고 있었음.
당시 아시리아의 영토
이런 상황인데, 하나님이 나타나서 적국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을 말씀을 전달하라는 것임.
근데 '너희의 악독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내용을 거기 가서 외친들 그게 뭐가 어때서 요나는 다시스까지 도망가기로 마음 먹은 것일까?
요나서를 바탕으로 추정해 본 요나의 생각은 이렇다.
만약 자신이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경우,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임. ① 개무시함 ② 회개함
① 의 경우라면, 하나님 심판이 내려지고 아시리아는 멸망하고 북이스라엘은 개이득.
그런데 만약 ② 의 상황이 발생한다면? 하나님은 용서하고 아시리아 제국은 유지될 것임.
비록 잠시의 회개로 잔악한 정복전쟁은 잠시 중단될 수도 있겠지만, 북이스라엘은 언제 다시 늑대로 변할지 모르는 이웃과의 불안한 동거를 이어가야 함.
여기에는 북이스라엘 입장에서의 유불리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걸려 있었음.
아시리아 제국은 고대사회에서 가장 잔인했던 폭력국가였음.
수많은 정복전쟁을 통해 끔찍하게 살해된 사람들의 수가 어마어마했음.
포로의 피부를 산 채로 벗겨내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교육하는 중 @대영박물관 소장
이렇게 잔악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민족을
용서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이런 상황이다보니 여기서 정의와 윤리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임.
요나 생각에는 이 나쁜 놈들은 다 쳐죽이는 게 맞음.
한 놈도 그냥 살려둬서는 안되는 놈들임.
만에 하나, 니느웨 사람들이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라도 해버리면 하나님은 분명히 저들을 용서할테니, 그럴 만한 가능성 자체를 제거해야 함.
그래서 요나는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인 다시스행 배에 오름.
그리고 과감히 하나님께 쳐맞음.
지중해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나서 바다에 던져지고 커다란 물고기에게 잡아먹혀서 뱃 속에서 3일을 살다가, 물고기가 소화 안되는 요나를 해변에 오바이트1) 해서 겨우 살아난 자세한 이야기는 성경을 직접 읽어보길 바람.
특히 요나서 2장은 물고기 뱃 속에 있을 때 요나가 한 기도의 내용인데 엄청 지겨움.
도대체 뭐라고 하는건지 읽어봐도 잘 알 수가 없음.
하지만 정황상 분명히 살려달라는 얘기일 것임.
그런데도 끝까지 잘못했다는 얘기는 안함.
하지만 또 쳐맞으면 곤란하기 때문에 요나는 어쩔 수 없이 니느웨로 향함.
기원전 8세기 니느웨 성 네르갈 문
이 당시 한반도에서는 비파형 동검을 사용하고 고인돌을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끌려오다시피 했으니 맡긴 일도 대충대충 한다.
니느웨 성이 워낙 커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하려면 적어도 3일이 필요했으나, 달랑 하루만 일하고 칼퇴함.
대충 전했으니 니느웨 사람들도 듣는 둥 마는 둥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요나서 3장 5절
요나가 우려하던 일이 기어이 일어났다.
원래 사람 심리가 적극적으로 뭘 하라거나 구매하라고 설득하면 들은 척 만 척 하다가도, "안 살라믄 말고" 식으로 나오면 오히려 더 혹하는 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반응도 요나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음.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서 3장 10절
이러한 성의없는 그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니느웨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임금부터 백성들까지 심지어 짐승에게까지 굵은 베옷을 입혀 전국민이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악한 길에서 떠났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 하면서 선민의식을 가졌던 이스라엘도 하지 못한 전국민의 회개 운동, 진리와 공의로의 돌이킴이 니느웨서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들이 요나의 선포를 흘려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하루 동안 선포된 말씀이었지만 전해지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소돔의 사람들처럼 요나의 선포를 농담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들의 죄와 허물, 불의와 악독을 솔직히 인정했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다. 하지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분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자가 받는다. 죄를 깊이 인식하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커진다. 빚을 500데나리온 탕감받은 사람과 5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은 탕감해준 이에 대해 마음이 다를 수밖에 없다. "사함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사함 받음이 많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눅7:47)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고, 누구의 소리를 듣고 있는가?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게 보이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요나만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엎드려, '죄인 오라 하실 때 날 부르소서' 하면서 구원해 주시길 간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둘 다에 관심이 없는가?
하나님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에게 '두 번째로 말씀'하셨다. 다시 기회를 주신 것이다. 니느웨 백성들에게도 요나를 통해 살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은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라고 하셨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다. 악독함이 하나님 앞에 상달했던 니느웨가 하나님 앞에 돌이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에게도 아직 기회가 있지 않겠는가? 돌이킴이 생명의 길이다. 이것이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