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네시아의 어느 마을, 문자가 없는 민족이 있었다. 어느날,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자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글자를 갖게 된 이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말을 제대로 쓰고 읽기 시작했다.
동화 같은 이 얘기는 실제다. 인도네시아 부퉁섬에 사는 소수민족 '찌아찌아족' 얘기다. 2009년 이들이 한국 사회에도 널리 알려졌다. 찌아찌아어만 있을 뿐 문자가 없었는데, 한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한글의 우수성 입증' '최초의 한글 수출'이라며 큰 화제가 됐다.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다. 9년 동안 찌아찌아 마을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찌아찌아족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인구는 약 7만명, 부퉁섬 남부 바우바우시와 그 일대에 주로 거주한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도서국가다. 남중국해와 인도양, 태평양이 교차하는 동남아시아의 적도를 따라 크고 작은 섬들이 남북으로 펼쳐져 있다. 섬의 개수는 아무도 모른다. 인도네시아 정부도 섬이 대략 1만8000개가 넘는다는 것까지만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이 중 6000여개만 유인도다. 전체 국토는 한반도의 9배. 총 인구 수는 2017년 기준 2억6000만여명이다. 중국, 인도, 미국에 이어 세계 4위 규모다. 오랫동안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다. 1602년부터 1945년까지다. 지금도 노인 중 일부는 네덜란드어를 구사한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섬들 중에서도 찌아찌아족이 사는 부퉁섬은 조금 독특하다. 원래는 독립국가였다. 14세기부터 이어진 600년 역사의 부퉁왕국이다. 1960년 인도네시아에 합병됐다. 전체 면적은 4200㎢다. 제주도의 2.3배 크기다. 섬 대부분은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다. 부퉁섬의 인구는 40만여명. 13개 민족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중 찌아찌아족이 최대 민족이다.
찌아찌아족과 한글의 첫 만남은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전태현 한국외국어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통번역학과 교수는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바우바우시를 방문했다. 이때 처음 고유문자가 없는 찌아찌아족을 알게 됐다. 전 교수에게 이 얘기를 전해들은 훈민정음학회는 찌아찌아족에게 한글 사용을 제안했다. 찌아찌아족은 부족장 회의를 열었다. 한글을 부족의 문자로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때가 2009년이었다.
족장 회의에서 한글 도입 결정
현지에서 한글을 가르칠 교사로 정덕영씨가 선발됐다. 이듬해 바우바우시로 간 정씨는 지금도 찌아찌아족에게 여전히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부퉁섬의 유일한 한국인 거주자이기도 하다. 2월26일 수업을 마친 정씨와 전화 통화로 이야기를 나눠 봤다. 우선 몇 곳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지 물었다. "세 곳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다. 고등학교 한 곳에선 한글이 아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어 수업을 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부퉁섬은 바우바우시와 4개의 군으로 이뤄져 있다. 시장의 힘이 막강하다. 요즘도 시장이 외부 출장을 나가면 앞뒤로 행렬이 함께한다. 어느 날 시장이 직접 요청을 해왔다. 고등학생들한테 한국어를 가르쳐달라는 거였다. 거절할 수 없었다. 한글을 가르치기 위한 일종의 서비스 수업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게 좋은 계기가 됐다. 부퉁섬 민족들 사이엔 서열이 있다. 찌아찌아족이 인원은 가장 많지만 서열상 상류층은 아니다. 상류층은 월리오족이다. 고등학교엔 아무래도 상류층 아이들이 많이 다닌다. 이 아이들이 졸업 후 부퉁섬의 상층사회로 진입하더라. 월리오족 아이들이 한국어 수업을 주로 듣는데 이것이 찌아찌아족 전체에 한글 수업을 원활히 하는 데 아무래도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한글을 쉽게 익힐까. "우리말을 한나절 언어, 반나절 언어라고도 부른다. 나절은 6시이다. 반나절은 3시간이다. 솔직히 처음엔 의구심이 있었다. 아이들이 과연 한글을 배울 수 있을까. 그런데 쉽게 배우더라. 1 대 1로 가르치면 반나절 만에도 읽는다."
찌아찌아 사람들은 한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정씨는 "한글이 들어오기 전부터 찌아찌아 사람들이 한국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동경심이라고 할까, 한류 열풍 덕이었다. 드라마 '대장금'이 인기였다고 하더라. 원래는 초등학교에서만 한글을 가르쳤는데 2년 전부터는 중학교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찌아찌아 족장들과 의논해 결정한 일이다. 중학교에서도 계속 한글을 접하게 하기 위해서다. 찌아찌아족은 바우바우시 외에 2개의 군에도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문의가 온다. '의무교육 아니냐'며 우리한텐 왜 한글을 가르쳐주지 않냐고 물어온다. 혼자서는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찌아찌아족에게 한글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정씨에 따르면 한 해 300여명씩, 지금까지 모두 3000여명에게 한글을 가르쳤는데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지금도 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씨는 "이들이 지속적으로 한글을 사용한다고 장담할 순 없다. 졸업 후에 한글을 일상적으로 접하진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 찌아찌아 사람들은 애초에 왜 한글을 받아들이기로 했을까. "인도네시아의 공식 공용어는 인도네시아어다. 그런데 소수민족이 많다 보니 이들의 고유어도 많다. 350여개 민족이 550개 언어를 사용한다. 결국 민족의 정체성은 언어다. 이곳에서 보니 언어가 없어지면 민족도 없어지더라. 부퉁섬에도 50년 전까진 30여 민족이 살았다는데, 지금은 13개 민족만 남았다. 언어가 없어지면서 다른 민족에 흡수됐다. 유네스코 같은 기관에서 소수민족에게 로마자라도 써서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도록 독려하는 이유다.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찌아찌아족은 로마자가 아닌 한글을 쓰기로 한 거다.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고, 한글의 우수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실험적인 시도다. 다른 소수민족은 고대 인도 문자나 아랍어 문자를 사용하기도 한다."
정씨가 원래부터 한국어 교사였던 건 아니다. 대학에선 무역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제약회사에서 근무했다. 한국어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다. 제약회사 근무 시절에도 직원들에게 바른 어법 등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발음과 어문규정을 확인하려 항상 사전을 살피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급기야 2006년엔 KBS '우리말겨루기'에 출전해 우승했다. 한국어 교사 자격증도 땄다. 2007년 제약회사를 퇴직한 후엔 한국인과 결혼해 국내에 정착한 외국인들에게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러다 2010년 찌아찌아 마을로 파견됐다. 떠나기 전 인도네시아어를 익혔다. 지금도 인도네시아어로 한글을 가르친다. 언어에 재능이 있는 셈이다.
세종학당 철수로 한때 섬을 떠나기도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큰 관심 속에 시작한 한글 교육은, 그러나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현지에 세종학당을 설립하려 했는데 처음엔 규정이 문제였다. 정부 산하기관인 세종학당재단이 외국에 세종학당을 설립할 때는 국내 교육기관과 해외 교육기관이 공동으로 신청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결국 한국의 경북대와 인도네시아 무함마디아 부퉁대가 손잡고 신규 지정을 신청했다. 다음엔 예산이 문제였다. 세종학당재단의 지원금 5000만원이 3400만원으로 줄었다. 결국 경북대가 자체 재원으로 예산을 확보했다. 이듬해인 2012년 1월 바우바우 세종학당이 겨우 문을 열었다. 하지만 바우바우 세종학당도 7개월 만에 다시 문을 닫았다. 비자와 영수증 처리 등 실무적인 문제 때문에 경북대가 사업 연장을 포기했다고 한다. 정씨가 인도네시아와 한국을 왔다갔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정씨는 2010년 초 훈민정음학회 소속으로 파견됐다가 그해 말 한국으로 돌아왔고, 2012년 1월에 세종학당 소속으로 다시 바우바우시에 들어갔다가 7개월 후 귀국했다.
그에게 2012년 세종학당이 없어진 후 어떻게 한글 교육을 지속했는지 물었다. "현지 사람들에게 세종학당이 철수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 한글을 알려주겠다고 했다가 몇 년 후에 일방적으로 나가버린 것 아닌가. 일종의 책임감도 있었다.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도입한다고 발표했을 때 한국 언론도 그렇지만 외신에서도 난리였다.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에서도 대서특필했다. 심지어 북한 노동신문도 흥분해서 보도했을 정도다. 도무지 나 몰라라 돌아올 수 없었다. 내가 돌아가면 이대로 찌아찌아와는 끝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뜻있는 분들과 서울시 산하에 협회를 만들었다. 한국찌아찌아문화교류협회다. 협회 이름으로 다시 들어왔다. 십시일반으로 후원해주는 분들 덕에 지금까지 찌아찌아에 머무를 수 있었다."
"왜 선생님은 한 명뿐인가요?"
정씨와의 대화는 다음날 다시 이어졌다. 첫째 날 통화 중 "제자가 죽어 상가에 가야 한다"며 통화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부퉁섬은 의료시설이 열악해 허무하게 사람이 죽는 일이 종종 있단다. 열대지방이라 하루 만에 발인을 하기 때문에 서둘러 가야 한다고 정씨는 말했다. "애경사엔 웬만하면 다 참석한다. 한국인이 와주는 것만으로도 좋아한다.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신경 쓸 일이 많다. 인도네시아는 상당히 폐쇄적인 사회다.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는데, 그 자유라는 게 6개 종교(이슬람교·힌두교·천주교·개신교·불교·유교)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다. 신분증에 반드시 이들 종교 중 하나를 택해 적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로 몰린다. 실질적으로 이슬람 사회다. 국민 중 80% 이상이 이슬람교 신자다. 그렇다 보니 나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을 마시는 게 목격되면 나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질 수 있다. 적도에 있어 저녁 6시면 해가 진다. 6시 이후엔 되도록 집에 머문다."
8년이 지난 지금, 찌아찌아 사람들은 아직도 한글에 어떤 기대 같은 걸 하고 있을까. "아이들이 묻는다. '우리한테 한글을 가르쳐준다면서 왜 선생님 한 사람만 와 있어요?' 일 년에 한 번 한글교사 양성과정을 연다. 현지 교사를 30명 모집해서 1개월 반 동안 집중적으로 교육한다. 사실 이 문제는 해외원조(ODA)로 접근해야 한다. 전반적으로 현지 주민들은 자신들한테 문자가 없다는 것에 대해 별 불편함을 못 느낀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없어서다. 문자의 전파는 받아들이는 쪽에서 승낙하는 게 가장 어려운 과정인데, 찌아찌아는 한글을 받아들이겠다고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나. 우리 쪽이 더 노력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이제 찌아찌아는 거의 잊혀졌다. 인도네시아 현지에선 다르단다. "부퉁섬은 원래 인도네시아에서 전혀 유명한 섬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글을 수입하고선 인도네시아 전역에 알려졌다. 자카르타에서 요즘도 자주 취재를 온다. 거리에 한글 표지판이 서 있고 아이들이 한글 수업을 받는 모습을 찍어간다. 부퉁섬의 정치인들도 이걸 좋아한다. 섬이 홍보가 되지 않나. 다른 부족들도 주의 깊게 보고 있다."
"한글 최초 수출"이라며 떠들썩했던 잔치의 뒷자리엔 정씨 같은 이가 있었다. 정씨의 말이다. "단숨에 뭔가 될 거란 기대는 버렸다. 내가 있을 때 찌아찌아의 모든 사람들이 일상에서 한글로 읽고 쓰게 하고 싶단 욕심은 버렸단 얘기다. 겨울에 수도꼭지가 얼지 않게 물을 조금 틀어놓지 않나.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종대왕이 만드신 한글이 한민족 전체에 퍼지는 데도 600여년이 걸리지 않았나. 다만 좋은 이미지를 남기고 가기 위해 항상 조심하고 있다. 내가 나쁜 이미지를 주면 이들에게 한글을 나눠줄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사라져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02/2018030201993.html
100자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