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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주의자들은 비밀고해를 견지함으로써 오직 행위만 존중합니다. 자백은 아무리 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자백하지 않은 것이 생각나면 다시 고해신부에게 찾아가 다시 자백해야 합니다. 내가 아는 법학교수는 자백에 대해 강박증이 생겨서 성찬을 받기 전에 고해신부를 세 번 찾아가야 안심을 합니다. 우리 독일 민족이 교황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 우리는 고해신부를 자주 찾아가 그를 지치게 했고, 신부는 복잡한 면죄 조건으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신부가 제시한 면죄조건이란 이런 것이었으니 당혹스럽지 않았겠습니까?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대의 마음의 통회와, 그대의 입의 자백과, 그대의 행위의 보속(補遺)에 의거하여 그대의 죄를 사하고 [열쇠를] 풀어주노라." 이런 식의 조건들과 거기에 담긴 속뜻이 이만저만 악영향을 끼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두려운 마음에 신부가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선대에 인간의 전통이 사람들에게 지나친 고통과 부담을 준다고 본 장 제르송(Jean Gerson, 1363-1429, 프랑스 신학자, 교회지도자, 교황의 수위권에 대해서 공의회의 권한을 주장한 인물-옮긴이)은 양심의 고삐를 풀어 조금 느슨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이 족쇄를 끊기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교회의 규례와 명령을 무시하거나 어기는 행위라도 만일 경멸과 악의에서 나온 게 아니라면 대죄가 아니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장은 다소 미약하고 충분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심을 과도한 가책에서 놓이게 했습니다.
이런 억압과 굴레에 대해서, 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을 통해서 인간이 고안해낸 그런 엄격한 법과 규례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정반대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 채 모든 법과 규례를 짓밟는 무지하고 철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루터, 『루터의 탁상담화』, p.115.
첫댓글 초신자들이 혹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루터가 비판한 것은 카톨릭의 형식적이고 행위중심의 고해성사를 비판한 것입니다. 정통 개신교 성도들이 하는 회개기도(자백)를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네, 문맥과 정황을 잘 모르고 그런 혼돈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고해성사를 하고 사제의 판결에 따라 미사를 매일 드리라! 성모송 몇번 하라! 행위로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루터가 억압과 중독의 예로 든 법학 교수처럼 습관을 따라서 회개의 시늉을 내는 것은 기독교의 믿음이 아닙니다.
네, 일종의 강박이나 종교중독인 것이 아닌가 싶어요.
@노베 옛날에 특히 더 가톨릭 신자들에게 심했을 것 같아요. 요즘도 자유함이 없이 지나치게 속박되어 신앙생활하면 강박증이 심해지다가 뇌가 이상해져버리겠죠. 조심해야겠습니다.
자신의 양심이 일깨우는 대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뉘우치는 회개를 하면 되는 것인데, 가톨릭은 고해성사라는 것을 만들어내서 사람들에게 다시 올가미를 씌우죠.
현대의 개신교인들이
새겨들으면 좋을 루터의 마지막 말에 공감합니다.
인간이 고안해낸 엄격한 법과 규례는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정반대로 요즘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 채 법과 규례를 짓밟는 무지하고 철없는 자들이 있다...
네, 진짜 맞는 말씀이고 합당한 분별이십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카톨릭의 고해성사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회개기도를 죄인인 인간 신부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절대로 금지해야 합니다.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