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사미(三寒四微), 요즘의 겨울 날씨를 비유하는 신조어이다. 추위보다 나흘간의 미세먼지를 더 걱정해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우리네 어리적 겨울은 삼한사온(三寒四溫)으로 사흘간은 정말 추웠다. 그때는 의복, 영양 상태, 난방 등이 부실하여 절기가 입춘이 되기까지 “춥다”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눈도 수시로 쏟아져 한번 오면 발목 정도는 쉽게 빠졌다.
밤새 눈이 내려, 온 천지가 새하얗게 변한 날, 우리 동네와 아랫동네 골목대장과의 전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패거리 눈싸움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가끔 있는 일로, 며칠 전에는 동네끼리 편을 갈라 다방구를 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머리에 털모자를 덮어쓰고, 손에는 벙어리 장갑을 낀 채, 동네 어귀로 올망졸망 모여들었다. 싸움의 규칙은 간단했다. 동네 경계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로 포진해 있다가, 싸움이 시작되면 눈을 던지면서 쳐들어가 상대 진영을 점령하는 거였다.
조금 후 눈덩이가 여러 개 우리 쪽을 향해 날아오고, 우리도 상대방 진영을 행해 눈덩이를 무수히 날리는 것으로 동네 패싸움의 막이 올랐다. 평소 아랫동네 아이들은 거친 행동에 욕설을 심하게 하는 등, 보통 악다구니들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그 기질이 여실히 드러났는데, 눈 속에다 조그만 돌과 연탄재를 섞어 넣는 바람에 눈덩이가 꼭 돌덩이 같았다. 그 눈덩이 하나가 ‘쌩’ 하고 총아같이 날아와 우리 편 서열 두 번째 형을 정통으로 맞추었다. 곧바로 이마에 불룩 혹이 튀어나왔다. 연이어 상대방이 봇물 터지듯이 공격해오자 공포에 파랗게 질린 우리는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쳤다. 동네 패싸움 역사에 이런 치욕적인 일도 없었다. 그리고 복수전으로 펼쳐진 썰매 달리기 시합에서는 제대로 붙어 보지도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연전연패였다.
패배가 일상화되던 어느 날, 목형 일을 하는 큰형이 자새(‘얼레’의 방언)를 육모로 만들어서 선물했다. 그것은 우리 동네에서 나만 가지게 된 고급스러운 자새였다. 구색을 갖추고자 어머니를 졸라서 가오리연을 하나 사고, 실도 비싼 명주실로 여러 타래 구입하였다 가오리연은 무게 중심 잡기가 중요하지만, 꼬리를 많이 달아야 심하게 까불대지 않는다. 안 그러면 하늘 높은 곳에서 바람에 휘둘려 빙빙 돌거나 밑으로 사정없이 내려꽂혀 나무에 걸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봉투나 화장지 등으로 쓰임새가 다양한, 귀한 신문지를 오려서 꼬리도 길게 달아 놓았다.
다음은 명주실에 개미를 먹이는 일이 남았다. 당시에는 대부분 막걸리를 마실 때라 유리병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힘들었다. 대개 사금파리를 가루로 만들어 개미를 먹였으니, 제대로 된 유리 사하고 붙으면 상대가 안 되었다.
나는 어렵게 약병을 하나 구해 쇠 절구통에 찧어 가루을 만들었다. 그리고 풀을 끓여서 동네 골목대장 광호 형 집으로 가지고 갔다. 광호 형은 우선 자기가 가진 네모자새에 내 육모자새의 실부터 연결하였다. 그런 다음, 동네 아이들 연실에 개미를 먹이던 깡통을 가져와서 유리가루를 풀과 함께 넣고 막대기로 휘휘 저어 섞었다. 광호 형이 유리가 고루 섞인 풀을 돌가루 종이에 한 웅큼씩 퍼서 연결한 실을 가운데 넣고 잡고 있으면, 나는 부리나케 감아 들였다. 세 번 정도 풀고 감기를 반복하고 난 뒤 그늘에서 말렸다. 이제 연싸움 상대만 만나면 될 일이었다.
겨울 방학이라 한가한 우리들의 놀이터, B여자중학교 운동장에 가니 연 날리는 애들이 제법 여럿 있었다. 그중 지난 눈싸움에서 봤던 아랫동네 골목대장 형도 끼어 있었다. 그 형도 가오리연을 날리고 있었는데, 내 연이 한참 하늘로 올라 까마득해지자 슬슬 시비를 걸어왔다. 다른 연도 많은 데 굳이 나한테 싸움을 거는 것은, 내 육모 자새가 아니꼬워서 하는 짓이 분명했다.
나는 가급적 그 거센 형과는 싸움을 붙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 집요하게 공격해오자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할 수밖에 없었다. 내 줄에 그 형의 연줄이 엇걸리자, 나머지 연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재빨리 하늘을 비워냈다. 드넓은 창공에는 두 개의 연만이 덩그러니 남아 용호상박 을 겨루는 형국이 되었다. 다들 말은 없었지만 내 연이 곧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을 것이다. 사실 나마저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모두의 예상과 달리 밀고 당기고가 제법 길게 이어졌다. 그러다가 상대방 연이 중심을 잃고 아래쪽으로 선회를 할 즈음, 내가 감는 속도를 급하게 올리자, 상대방 실의 연결된 매듭 부분쯤이라 생각되는 곳에 덜컥 걸리는 느낌이 왔다. 조금 후 연 하나가 긴 실 꼬리를 매단 채 공설 운동장 쪽으로 흐느적거리며 날아갔다. 갑자기 우리 동네 아이들이 “와!” 하고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너른 하늘에는 유독 꼬리가 긴 가오리연 하나만이 온갖 자태를 뽐내며 맘껏 까불거리고 있었다. 겨우내 계속됐던 아랫동네와의 흑역사(黑歷史)를 한방에 끊어내는 통쾌한 순간이었다.
아랫동네 형은 헐거워진 실을 급히 감아 뒷수습을 한 뒤, 자기편 애들을 데리고 날아간 연을 따라 눈싸움할 때의 우리처럼 꽁무니가 빠지게 달려갔다. 연 보다는 비싼 명주실을 조금이라도 건지려는 생각이 간절했으리라. 이렇게 그해 겨울은 많은 추억거리를 남긴 채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세월 따라 잊혀간 우리들의 이야기가 다시 세간으로 불려 나온 것은, 내가 대신동의 안태고향(安胎故鄕)을 떠나 개금동에서 살던 때였다. 1972년 9월 14일 오전 9시 50분경, 전날부터 쏟아진 폭우로 꽃마을 쪽이 있는 구덕 수원지 둑이 터져, 사망 60명, 실종 15명, 부상자 48명의 엄청난 인명피해가 났다는 소식이 속보로 귓전을 때렸다. 그때 희생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패싸움 놀이를 했던 아랫동네의 형들이나 그 가족들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 수재민들이 모여 산다는 해운대 반여동에 공무로 출장을 나간 적이 있다. 혹시나 싶어 아는 주민에게 형들의 안부를 물었으나, 얼굴은 알아도 서로 통성명을 하고 지낸 사이가 아니라 알 길이 없었다. 지면을 빌려, 안타깝게도 고인이 되신 형들과 그 가족들의 명복을 빈다.
첫댓글
데이빗 님 께서도 옛날 생각이 나서 슬프지나 봅니다. 보고싶은 친구가 많는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