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5. 16.
문재인 전 대통령이 양산 평산마을 자택에서 유유자적하는 노년을 정말로 꿈꾸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서 잊혀진(잊힌) 삶, 자유로운 삶을 살겠다.”
퇴임을 앞두고 이런 저런 기회에 그가 했던 말이다. 그런데 ‘잊힌 삶’을 꿈꿨던 사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북적거리는 ‘퇴임-귀향’ 길이었다. 혹 잊히기 싫다는 말을 반어적으로 한 건 아닌가. 설령 진심으로 잊히고 싶었다 하더라도 전직 대통령의 삶이 절간처럼 고즈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한적했던 평산마을이 소음으로 몸살을 앓는다는 뉴스다.
평산마을 집 앞 확성기 시위에 분개
한 보수단체가 11일부터, 그러니까 귀향 바로 다음날부터 확성기를 앞세운 집회‧시위를 벌였다. 첫날엔 한밤중까지 확성기 시위로 인해 마을 주민들이 잠을 설쳤던 모양이다. 경찰에 수십 건의 신고가 들어갔다는데 시위대가 요령껏(?) 데시벨(소리 단위) 조정을 하는 바람에 저지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생각지도 않았던 복병을 만난 셈이다. 낮엔 지지자들이 먼 발치에서라도 찬사를 보내주고 밤에는 달빛 별빛 동무삼아 차 한 잔 즐기고, 독서도 좀 하다가 잠자리에 드는 일상이 기다릴 줄 기대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밤새 비난으로 가득한 확성기 소리에 시달려야 하게 됐으니 이런 봉변이라니!
문 전 대통령은 15일 양산의 덕계성당 미사에 참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래된 원산면옥’에서 냉면으로 점심식사를 했다고 페이스북으로 알렸다. 그리고 집에 도착할 때쯤 며칠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과 마주쳤거나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몹시 서운했거나 화가 났을 법하다.
“집으로 돌아오니 확성기 소음과 욕설이 함께하는 반지성이 작은 시골마을 일요일의 평온과 자유를 깨고 있다.”
그는 시위대에 대한 비난의 글과 함께 사과의 말도 올렸다.
“평산마을 주민 여러분 미안합니다.”
‘반지성’ ‘평온(평화의 유사어)’ ‘자유’라는 표현은 짐작컨대 윤석열 대통령 들으라는 취임사 패러디였을 것이다.
“윤 대통령, 취임사에서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으로 반지성주의를 지목하던데, 그렇다면 이런 확성기 시위는 지성적 행위냐? 이런 것이 윤 대통령이 강조해 마지않은 자유냐? 나와 주민들의 자유는 침해돼도 괜찮다는 건가? 평화가 깨뜨려지는 것은 어쩌고?”
이렇게 따지고 싶은 심정 아니었을까.
그런데 시위대 가운데는 ‘코로나19백신피해자가족협의회’(이하 코백회) 회원 100여명도 있었다. 코백회에 따르면, 지난 1일 기준 접종 후 이상반응 환자는 46만7687명이며 이중 중증 환자 수는 1만8828명, 사망자 수는 2133명에 달했다. 이들은 “국민을 사지로 내몰아 놓고 자유를 찾았다는 문재인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단체의 김두경 회장은 “백신 부작용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지겠다고 국민 앞에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유기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국제신문, 5월 15일).
지성·반지성 구분하는 기준은 뭔가
문 전 대통령으로서는 이런 책임 추궁이 억울할 수 있다. 코로나 방역과 치료를 위해 애쓴 점(때로는 자화자찬이 지나쳤지만)은 인정해 줘야 한다. 그러나 퇴임했다고 해서 책임이 면해 지는 것은 아니다. 코백회의 대표들만이라도 만나 고통과 고충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기는커녕 그는 시위를 ‘반지성’으로 매도했다. 아무리 임기를 다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태도를 바꾸다니!
그를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한 동력은 주로 광화문 촛불집회(2016년 10월 29일부터 17년 4월 29일까지)에서 나왔다. 대통령이 된 그는 그 집회를 ‘혁명’으로 격상시켰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적 시위였음을 강조했지만 집회 현장의 살벌함은 말하지 않았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머리 부분만 크게 그려(그러니까 잘린 머리를) 크레인에 매달았다. 박 대통령이 쇠창살에 갇힌 모습이나 오랏줄에 칭칭 감긴 모습을 형상화해서 끌고 다녔다. 촛불 대신 횃불을 든 수백 명의 시위대가 청와대로 행진하기도 했다. 이런 것은 지성적 장면이었는가?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 대통령에 대해 탄핵결정을 했다. 이정미 재판장은 결정문을 낭독한 후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했다. 이 같은 탄핵 결정이 나오자마자 (당시의) 문 전 당 대표는 전남 진도군 팽목항 임시 분향소로 달려가 방명록에 썼다.
“얘들아 너희들이 촛불광장의 별빛이었다. 너희들의 혼이 천만 촛불이 되었다. 미안하다. 고맙다.”
여기서 “고맙다”는 말은 지성에서 나온 표현이었는가? 그러니까 지적인 사고를 거쳐 도출한 마음의 표시였는지 아니면 충동적으로, 혹은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은 작년 5월 12일 취임 4주년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SNS시대에 문자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정치의 영역이든 또는 비정치의 영역이든 마찬가지다.”
그는 이미 17년 4월 대선 후보 적부터 이른바 ‘문자폭탄’을 ‘민주주의의 양념 같은 것’이라고 부추겼다(이에 대해 박지원 당시 국민의당 대표는 “문재인 캠프는 문자폭탄 만드는 양념공장, 문재인은 공장 사장”이라는 촌평을 내놨다). 문자(혹은 댓글)폭탄은 민주정치의 양념인데 자신의 양산 자택 앞 확성기 시위는 반지성적 행위라고 구분하는 기준은 뭔가?
형수욕설은 지성인가 반지성인가
옆길로 빠지는 감이 있긴 하지만 이왕 말이 나왔으니 묻고 싶다. 지난 5년간 국정을 함께 이끌었던 더불어민주당과 관련된 질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국무위원 후보들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끝났다. 초거대 민주당은 너무 쉽게, 태도를 종전과 180도 바꿨다. 후보자를 위한 방패를 던져버리고 창을 쥔 것이다. 그 바람에 인사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된 장관이 속출했다. 그럴 수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봐야할지, 문 전 대통령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한동훈 법무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목격된 민주당 의원들의 행태다.
“비꼬는 겁니까?” “당연해?” “가만 계세요.” “뭐가 사실이 아닙니까?”(이상 민주당 이수진 의원).
“(중고 노트북 50대 복지시설 기부 관련) 기증자가 한 아무개로 나옵니다. 그리고 해당되는 것은 영리법인으로 나옵니다(한 후보자 딸 이름으로 기부했다는 주장이었는데 한**는 ‘한국3M’으로 밝혀짐)”(같은 당 최강욱 의원).
“이 논문을 1저자로 썼습니다. 이모하고요. 공저자가 아니라 제1저자로요.(한 후보의 딸과는 상관없는 인척들의 논문이었고 이모(姨母)가 아니라 이모 교수였음)”(같은 당 김남국 의원).
이런 황당한 추궁은 지성적 사고와 판단의 결과인가 반지성에서 비롯된,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인가.
이번 청문회 과정에서 청문 대상자 가운데 형수에게 (남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욕설을 퍼부은 사람, 부인이 법인카드를 유용하고 공무원을 가사도우미로 부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호기를 부리며 누구는 된다, 누구는 안 된다고 판정을 내렸다.
민주당이 대선 후보로 내세웠던 사람이 누구인지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람의 행위는 지성, 반지성 어디에 속한다고 여겼을까? 그를 다시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로, 게다가 총괄선대위원장으로까지 추대했다. 이 같은 민주당의 결정은 지성과 반지성 어느 쪽 소산인가? 이에 대해 문 전 대통령의 명쾌한 판단이 기대된다(퇴임 대통령임을 핑계 삼으려면 답변 책임자를 지명해 주든가).
이진곤 /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데일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