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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문학탐방(2023.11.16)
1.방우산장:청록파 조지훈의 집
2.길상사:시인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
3.이종석 별장
4.수연산방:소설가 이태준과 '문장'지
5.승설암터:손재형 그림 승설암도
6.박태원 집터: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7.심우장:만해 한용운 집
8.북정마을: 김광섭의 성북동비둘기
9.와룡공원
10.성균관: 대성전 명륜당 은행나무
11.혜화역: 시인 김광균 시비
가을비가 으스스하다
며칠간 몰아친 추위가 살짝 뒷걸음치니
바깥나들이 생각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비 오는 날의 남산 맨발 걷기를 할까
또 성북동 문학 기행을 떠날까 망설였다
비 오는 가을에 떠나는
나만의 문학기행,
느긋이 즐기는 길 위의 인문학으로
결정하였다
혹시 모를 한파에 대비하여 준비한
가죽 장갑, 다운 조끼, 방한모,
따뜻한 커피, 애용하는 갈색 레인코트와
긴 우산 그리고 장화보다 든든한
중등산화를 챙기고 남산 이후 홀로
떠나는 두 번째 문학 기행을 출발하였다.
1.
문학 기행으로 주제를 정했으니
첫 방문지는 조지훈의 '방우산장' 터.
한성여대 입구 5번 출구로 나와
성북로를 따라가면 대로 건너
오른쪽 인도에 자리 잡고 있어
관심만 있으면 금방 발견할 수 있다
방우산장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집.
조지훈은 불교에 조예가 깊어
불교적 용어의 시어 쓰임이 능숙하다.
그의 대표 시 '승무'가 그러하거니와
성북동 그의 집도 '방우산장'으로
지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방우'란 소를 놓아 주는 것,
한용운의 집 '심우장'의
'심우'는 소를 찾는 것이고
'목우'는 소를 기르는 것이 아닌가
불교에서는 소를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기도 하니 자유로운 소처럼
창작 의욕을 일구었으리라
청록파 3인방은 1939년 2 월호이자
창간호인 '문장'을 통해 등단하였다.
문예지 문장은 수연 산방 주인인
소설가 이태준의 구인회가 중심이 되어
창간하였으며 특히 연희 전문 교수인
정지용이 청록파 3인을 추천하였다
지금의 방우산장 자리엔
조지훈의 시 '낙화'가 적혀있다.
낙화/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사라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먼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끄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으랴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이 있을까 저허 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일제가 한글학회를 해체할 때
조지훈은 강원도 월정사로 도피하며
목월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시이다.
길 건너면 최순우 옛집이 있다
역사와 문화 기행이 아니기에
오늘은 그냥 지나친다
또한 그 위 쪽 전형필의 간송미술관도
과감히 생략한다
2.
그리고 성북동 언덕길을 올라
길상사로 들어간다.
가람을 전부 둘러보면 좋겠지만
여러 차례 방문하여 분위기를 아는지라
더구나 혼자 다니는 문학 기행이라
주제에 집중하며 즐기기로 한다
백석과 자야의 사랑을 떠올리며
법명 길상화 김영한의 사당에 들렀다
너무나 애틋하게 전해오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와 최고의 연예인의
사랑으로 마지막 선비와 기생의
이야기가 아닐까 여겨진다
백석은 타고난 사랑꾼이었다
당시 문단의 여류 시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니 최정희 노천명 모윤숙 등은
훤칠한 젊은 시인 백석을 무척 아꼈다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의 고급스러움과
노천명의 시 '사슴'이 줄 이어진다
또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도
자야에게뿐만 아니라 소설가 최정희
에게도 전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여간 백석은 사랑꾼이었다
성산포의 시인 이생진은
'내가 백석이 되어'라는 시로
환생한 백석이 길상사로 찾아와
자야를 만나는 내용을 그렸다.
길상화 사당 앞에 적힌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감상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에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이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는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길상사를 나와 길 아래 북악 수퍼를
끼고 골목으로 파고들면 심우장 가는
길을 안내하는 팻말이 가끔 보인다.
골목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니 팻말을
따라 집중하지 않으면 엉뚱한 곳으로
빠질 수도 있으니 주의 깊게 가야한다
3.
비가 내려도 세차지 않으니
사진 찍는 일도 불편하지는 않다
라틴 십자가형의 천주교 복지관을
오른쪽으로 보면서 나오면
길 건너 덕수교회가 보인다.
덕수 교회 언덕을 올라가면
이종석 별장이 나오는데 문이 닫혔다
이종석은 조선시대에 새우젓 장사로
갑부가 되었으며 현재 보인 중고의
설립자로 이곳은 1900 년에 지은 별장으로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서쪽 골짜기에 위치한다. 전통가옥의 가치가 인정되어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이태준 정지용 이효석 이은상 등의
구인회 회원은 이곳에서 문학인 모임을
자주 가졌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면
교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니
혼자만을 위함이 번거로울 것 같아
멀찍이 바라보며 사진만 찍고
수연산방으로 내려왔다.
4.
수연산방 주인인 상허 이태준은
산문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같은 회원인 정지용은 운문으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나중에 모두 북으로 갔다
자야의 연인 백석도 북한에 남았으니
성북동엔 북풍이 거세게 일었나 보다
이태준의 625 전쟁 때 북한의
종군기자로 참여하여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그는 1952년부터 사상 검토를 당하고
과거를 추궁 받았으며
1956년 숙청 당했다고 알려졌다.
그들이 창간한 문예지 '문장'의 폐간호
1941년 4 월호(26 회)에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가 실렸고
시인 윤동주는 이 시에 꽂혀 6개월을
가슴앓이 하다가 명시 '별 헤는 밤'을
만들어 내었다. 그들은 모두
프랑시스 잠과 라이나 마리아 릴케를
사랑했고 당나귀와 나귀를 불러왔다
윤동주의 스승이자 북아현동 하숙집
주인 정지용의 시 고향을 감상한다.
고향/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5.
곧장 길 따라 올라가면
기와집의 식당 국화 정원이 나온다
이곳이 예전 승설암 터였는데 나중에
공군의 아버지라 존경받는
독립투사 최용덕 장군의 집이 되었다
이태준의 요청으로 '승설암도'를
그린 소전 손재형과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소지자인 일본 사학자 후지즈카
지카시 와의 일화에서 추사를 서로
존중하는 모습은 실로 존경할 만하였다
중국의 서법, 일본의 서도와 달리 소전 손재형은 ‘서예’라는 새로운 명칭을 주창해 현대서예 운동을 이끌었다. 추사체 이후 독보적인 개성의 소전체를 창안한 서예 거장일 뿐 아니라 일본에 건너간 추사 ‘세한도’를 목숨 걸고 되찾아온 문화재 수집가로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6.
조금 올라가다 길 건너 바라보면
심우장 가는 합성목재 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다
무심코 계단 위의 쉼터에 들어서면
박태원 집터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우연한 발견이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쓴 구보(仇甫) 박태원(朴泰遠·1910~1986)은 작가 이상(李箱)과 함께 1930년대 한국문단에서 모더니즘의 문을 활짝 연 인물이다.
6·25 당시 월북을 택해 1988년 해금(解禁)조치 이전까지 그의 이름은 금기어였다. 해금 이후 박태원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박태원은 ‘북한에서 작가로서의 자기 삶을 마감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월북 작가였다.
그의 둘째 사위가 봉상균이고 외손자가
영화〈괴물〉〈살인의 추억〉〈설국열차
<기생충>을 만든 영화감독 봉준호씨다.
아래의 큰 길을 따라 삼청각 쪽으로
가면 김환기 화백과 김향안이 살았던
수향산방이 있다
또 1세대 여류 명사 나혜석 윤심덕
김일엽 김명순 중에 일엽의
본명은 원주였으나 춘원이 일엽으로
필명을 지어주었고 모태 기독교 신자
였으나 불교로 개종한 사연 많았던
일엽 스님이 살았던 성라암이 있으나
역시 생략하였다.
7.
이젠 심우장 가는 길이 잘 조성되어
길가에 만해의 글과 인조 연꽃을 달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이 집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자 님의 침묵의 시인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33년부터 1944 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서재였던 온돌방에는 심우장이라는 현관이 걸려있는데, 이 글씨는 근대의 대표적인 서화가인 위창 오세창이 쓴 것이다
한용운은 조선의 불교를 개혁하려고 했던 승려이자 조국의 독립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며 근대 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시인이었다
님의 침묵을 감상하지 않을 수 없다
님의 침묵/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 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에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8.
비에 젖은 심우장을 뒤로하고
북악 아래 북정마을로 올라갔다
625 때 피난민들이 이곳에 와서
많이 정착한 곳이며 사람들로
북적대었다고 북적마을이 북정마을로
되었다는 우스개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이 도성 북쪽에 위치하여 조선시대 도성 수비를 위해 어영청(御營廳)의 북둔(北屯)이 설치되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비둘기 쉼터인 비둘기 공원엔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가
적혀 있다.그는 민족적 지조를 고수한 시인이며, 초기의 작품은 관념적이고 지적이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인간성과 문명의 괴리 현상을 서정적으로 심화시킨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성북동 비둘기/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산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채석장의 비둘기로 상징된 현대인이 기계문명에 의하여 점점 살벌해지고 속화해가는 현실에서 순수한 자연과 평화가 발붙일 곳 없음을 개탄함으로써 평화로운 세계를 갈구하는
상념이 흐르고 있다.
9.
한양도성을 바라보며 올라가면
순성의 길을 만난다. 왼쪽으로 돌아서
와룡공원으로 향한다.
오른쪽으로 가면 숙정문이 나온다.
와룡공원은 토심이 얕아 수목 생육이 어렵고, 아카시아 나무 등으로 산림을 조성하였으나 주민들이 생명의 나무 1,000만 그루 심기 행사에 참여하여 수목을 심고 가꾸어 푸르름과 계절별 아름다운 꽃이 피는 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10.
이곳에서 안국역으로 내려오면서
마무리하려고 하다가 돌연 성균관의
대성전과 명륜당 은행나무가 보고 싶어 졌다.성균관 대학교 후문으로
내려갔다.
성균관 대성전 명륜당 은행나무는
윤탁(尹倬, 1472~1534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이 행단 제도를 모방하여
성균관 강당 앞뜰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명륜당의 은행나무에는 비교적 길게 발달한 유주(乳柱)가 있어 유명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대개 암나무이지만,
이 나무는 수나무이다.
이 은행나무에 무슨 사고인지 병인지는
모르겠으나 백산 나무 병원에서 나무 전체를 고정시킨 채 치료 중이다.
올 12월 28일이 퇴원 예정이다.
500 년 가까운 세월이
이 은행나무를 스치고 지나갔다.
11.
집으로 가기 위하여 가까운 전철역
4호선 혜화역으로 걸었고
1 번 출구 옆에 함석헌 시비,
타고르 흉상, 김광균 시비가 있다
김광균의 시, 설야로 오늘의 문학 기행을 마무리한다.
설야/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밑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