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뱀사골의 찬바람(구례, 순천 , 광양) 4
김실장이 말을 이어간다.
"아니 뼈를 가지고 신원확인 한다고 했는데 했으면 결과는 어떻게 나왔는지요?"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언급 했듯이 이미 이 유해들은 유가족이 있고( 물론 7명은 제외하고) 시대상황에 따라 확인된 유해로써 자가봉송 성격으로 이곳에 안장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유해발굴이 아니라 지역 현충시설에서 국가가 정한 법률에 따라 국가 현충시설로 옮겨가는 과정에 개입하여 사전 탐문을 통해 알아본 결과로 정확성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 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 당시에 유족들간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미친개나 여우 까마귀등에 훼손된 유해를 완벽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그 싯점에는 어려웠다.
그래서 경찰에서 경찰 조직과 능력으로 유가족 식별은 담당하고 우리는 발굴과 감식준비까지 해주고 영결식은 전체가 참여하는 방향으로 선을 정하여 발굴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17명의 호국전사 유해를 제외한 유가족이 나타나지않는 나머지 7명의 처리 문제인데 물론 그 자리에 다시 매장하면 된다는 간단한 답이 나올 수 있으나 유가족의 옳바른 식별을 위해서는 유족을 다 찾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해답이다.
우린 이런 전후 사정을 경찰과 정보를 공유하기로 하고 그 뒷처리는 경찰에서 책임지기로 했다.
그리고 7월 말에 영결식이 이루어졌다. 물론 신원확인 과정은 채취한 샘플로 국가기관에서 비교분석이 이루어 지고 있었다.
우리는 권할아버지와 나누어야할 모든 것을 이미 정리하고 철로 길을 걸어 다시 제보자와 현장으로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커피의 향기가 조곡동을 흔들고 운전을 하는 승현이와 사진을 찍는 승범이가 앞에서 철로 레일을 따라 걸어간다. 저 봉화산 모퉁이에서 기차 들어오는 신호가 들렸다.
우리는 길 옆으로 비켜 서 걷는데 저 앞에서 콰당하는 서리가 들렸다. 황급히 널라사 바라보니 승현이가 그만 철길을 뛰다가 옆의 고랑으로 나가 떨어진 것이다.
"바보 녀석, 그래도 살으려고 철길 밑으로 떨어진 것이다." 깔깔 거리며 죽을 시늉을 하는 그 모습에는 아랑곳 없이 우리는 매장지역으로 걷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오늘의 이곳 방문은 귀중한 시간의 꼭지점을 붙잡고 있었다.
"김실장님 죄송 합니다만 그 신원확인 결과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변명같지만 이미 경찰에 전담부서가 있고 그곳에서 해결하는 과정으로 결론을 도출했기 때문입니다."
푸르름은 절정에 이르고 시간여행을 떠난 우리는 서서히 차 머리를 하동으로 돌리고 있었다.
온 김에 화개장터를 가보고 악양에 들러 최참판댁을 들어가 보고 광양으로 들어가 아직 발굴하지 않은 경찰 묘지를 찾아 묵념을 하기로 했다.2번 국도와 58번 국도를 번갈아 달리며 우린 섬진강교로 향했다. 이곳으로 해서 하동으로 진주로 마산으로 가려던 우리의 군경이 대부분 빠져 나갔지만 일부가 마지막까지 밀려오는 북한군을 지연시키기 위해 총을 쏘고 사투를 벌이다 다리가 폭파되고 총알은 바닥이 나고 할 수 없이 옷을 벗어 던지고 총칼을 땅속에 숨키고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곳 순천 광양의 6.25전쟁사~!
정사는 없고 구술로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서 그래도 민초들은 나라를 위해 도망치는 아군을 숨겨주기도 하고 몰래 밥도 갔다주며 다시오는 아군을 기다렸다는 슬픈 이야기 있다.
김목사님이 차량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며 인근의 주유소로 들어간다.
"아니 이곳은 동네마다 그렇게 빨갱이라는 사람들이 많았나요?"
"목사님, 빨갱이가 무슨 말인지는 아세요 얼굴이 까맣고 물들인 빨간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에요~!"
여기서 빨갱이 단어에 대한 구구한 해석은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우리나라 사회에 각인된 빨갱이란 단어는 근래에 파생된 단어가 아니고 이미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서구라파에서 부터 시작하여 구 서련 중국에 파고들은 조직들로 민족을 내세우며 현실을 부정하고 폭력으로 사회를 바꾸려던 "파르티잔, partlsan" 에서 비롯된 것으로 빨간 기를 들게 되는데 구소련의 국기가 그렇다. 제국주의 시절에 한 순간 동구라파를 휩쓸었던 광풍과도 같은 세력이었다.
그래서 독립군도 마적단도 다 같이 이 용어를 혼용하게 되는데 그 당시 조선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모순들을 개혁하려는 민초들의 억눌림이 결국 세력을 만들고 기본질서를 무너뜨리려는 과도기적
시기에 나타난 현상으로 주로 계급투쟁과 재산 토지의 공유화를 외치는 지주대 반지주, 권력대 반권력의 카테고리에서 전쟁이나 테로란 도구를 빌어 국가 전복과 사회변혁을 이루어 보려던 사람들을 말한다 보면 어떨까.
그러니 흔히 못살면서 말잘하고 배웠다하면 그 당시는 그런 매력에 빠져 빨갱이가 되기 쉽상이고 그 반대로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우익들은 점진적 개혁과 각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정책으로 해결하다 보니 일제 말 구한말 조선이 안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봉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이에 따라 그 극한 대립이 빨갱이와 보도연맹이란 연좌제로 이어져 시대적 부산물로 남기게 되었다고... .
주유는 끝이 나고 차는 계속달려 10번도로를 따라 섬진강 휴게소에 이르렀다.
휴게소에서 잠시 물을 사서 마시고 간이 벤치에 앉아서 얼마전 세상을 놀라게한 구원파라는 이단적(사실 나는 잘 모른다)교회의 수장인 유병언이라는 사람이 죽어간 곳이 여기근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이순간 세월호가 직립보행 모습으로 똑바로 세웠다고 언론이 떠들석하고 유명(?)한 가수 박진영이 그 유병언의 조카이며 구원파의 신도이니 아니니로 시끌적한데 몇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유병언은 죽었고 시신을 잘못 손대어 최초 위치가 틀렸다고"고 한다!"
"아니 부랑자 시체 신고가 들어왔어요, 그 길옆 과수원 풀밭에 있다고... ."
전국을 여기저기 일년12달 돌아다니다 보니 별별 사람 만나고 별별 이야기 듣는다.
그러니 그 사실이 객관적인지 아닌지는 나도 솔직히 모른다.
"이 이야기도 그렇게 받아들여 주세요, 김실장님 목사님!"
나는 '14년 어느 여름날에 금강 하구에 정확히 말하면 논산에 황산대교에 가게 되었다. 실제 젓갈로 유명한 강경이다. 그래도 이곳이 법원이 있고 6.25전쟁 때도 '50년 7월 중순에 대부분의 경찰이 무기력하게 뒤로만 갈 때에 이곳 경찰은 경찰서장이하 전 인원이 결사항전하여 8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곳이다. 멀지 않은 곳에 '남한의 모스크바'라하는 논산 성동리가 인근이다.
0씨가 많이 살았는데 양평 신원리에 기념관이 있는 몽양 여운형선생과 연관이 있는 곳이라 한다.
여운형선생하면 당시로써는 드물게 영어회화에 능통한 독립운동가며 대중정치가로써 이름을 날리었다. 하지만 중도적인 진보사상가로 해방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946년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났을 때 미군정의 지지를 받으며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 된다.
이런 이유로 실제 북한군 점령기에 신원리에는 많은 사람이 피해를 면했다고 하며 오히려 다시 수복되어 우리측 군경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선량한 마을 사람이 다소 피해를 입었다고 구전된다.
이 성동리에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지금도 그 당시 교회가 있는데 무려 교인이 60여명 무참하게 프락치에게 당하고 이어서 수복 이후에는 그 프락치 일가족들이 피해를 보게 되는데 하룻밤에 동네 사람 18명이 제사날이 갔다고 하니 이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어느날 낚시꾼이 황산대교 밑에서 낚시를 하다 물이 어느정도 빠진 상황인데 뻘 속에 사람 뼈같은 것이 보여 신고가 되었고 경찰이 먼저 현장을 확인하고 우리 발굴단에 통보하여 합동으로 조사를 나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만난 경찰이 바로 전북지구 과학 경찰로써 황00이었다.
이 경찰이 그 유명한 마늘밭 5만원권 돈상자를 몇십억 찾아낸 베태랑으로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실소유주인 유병언을 찾으려 전국을 추적하고 결국 마지막까지 그 어느 경찰도 찾지 못하고 싸늘한 죽음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구원파 사건이다.
그런데 매우 의미있는 제보가 한번 들어왔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섬진강 휴게소 옆인데 한 할아버지가 풀 속에 죽었다는 내용 이었단다.
하필이면 그당시 전 경찰이 비상이 걸려 있으면서 정치권의 비호아래 일부러 잡지 않는다느등 별별 소문이 난무하고 있는데 이곳에 집이 없는 할아버지가 예전부터 걸인행세로 모습을 종종 나타내곤 하여 설마 그 유명한 구원파 교주께서 풀 속에서 죽겠나 싶었다고 한다.
가까운 곳의 경찰이 바로 급파되어 현장에 갔는데 시체가 부패되어 많이 상해 있고 몸에서 벌레가 기어나오고 있는 상태로 최소 3~4일은 지나 보였다고 한다.
항간에 떠돌던 이야기지만 내연의 관계에 있는 여자나 또는 신도집으로 숨어다니고 비닐 아지트가 어디에 있다는 등 우리가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는 그런 도피행각을 계속하던 60대 후반의 건강한 아저씨가 여기서 죽으리라 누가 생각 했으랴.
결국 부랑자의 죽음으로 처리하여 마대자루에 뼈는 거둬 화장터러 갈 싯점에 이곳에 유병언과 함께 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실제 수사망을 피해 아예 집에는 들어오지 않고 걸인 행세로 살고 있다는 믿을 만한 제보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 가족과 DNA를 비교해 보려 그 부랑자의 샘플을 확보하여 비교 하니 "아니 어찌된 일인가... .!"
찾고 있는그 사람이었다.
헐레벌떡 다사 그 마대자루에 있는 뼈를 들고 현장에 갔다 원형을 유지하려 하니 난리가 나 버렸다.
푸른 5월이라 풀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서 원점을 보존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마대 속에는 사람을 먹고 사는 벌레들이 엄지 손가락만하게 자라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
아무도 모르게 비밀을 철저히 지키며 그들만의 비호속에 자란 풀 위로 마대자루는 밀리고 있었다.
그러니 풀이 눞고 사실 펼쳐놓으려니 뼈가 일부 없기도 하고 이거 참 망신도 이만저만이 아닌 있어서는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어서 언론 공개와 그 날카로운 질문들을 요리조리 얼버무리며 유교주 사건은 막을 내려갔다.
그런데 또 얼마후 처음 신고한 사람으로부터 "왜 여기 뼈 몇개는 남아 있느냐"는 제보를 받고 허겁지겁 달려가 비공식 수습했다는 들어서는 안되는 웃기는 이야기을 들었던 것이다.
이러니 어디 누구에게 이런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것이 전부며 우리 조선시대 왕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와 사실은 엄청난 괴리를 갖고 있다는 것 다 알듯이 그려려니 하고 듣고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해야 한다.
"김실장님, 지금 구원파 이야기도 어디까지나 이야기 입니다. 뿅 가지 마세요. 그 경찰이 미쳤다고 본인들의 치부를 나에게 알려주겠어요 하하하~~"
사실 옆에 동료들의 이야기는 언론 내용이 진실이고 지금 이 친구는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소설이 그럴싸하게 들리고 호기심을 유발하게 된다.
황경찰의 이야기는 그런 소설이었으며 흥미를 돋구어 본인에게 좀 관심을 가져달라는 애원의 몸짓이었다. 하 하 하, 뻥이요 뻥~~~~
섬진강에 제첩을 잡는 사람들이 물속에 들어가 뭘 끌고 다닌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이곳에 참게며 장어 제첩이 많이 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기로한 광양읍의 경찰묘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차는 화개장터로 달린다.
"아차, 이과장님 광양읍은 어떻게 되었어요?", 눈치빠른 김실장이 냄새를 맡았다.
"저도 깜박 했어요, 저쪽 일 다보고 하루 더 일정을 잡지요. 온 김에 그 피아골에 들어가 이현상이 죽은 곳도 보고 미군들이 이곳 하동으로 전개하다 300여명이 죽었고 백의종군한 전쟁당시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이 전사한 쇳고개도 가보고 지리산의 가장 요점이라는 삼성궁에도 가보자구요."
토요일인데 조목사님이 내일 일요일 예배가 문제였다.
"목사님,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 한번 달려봅시다. 새벽에라도 올라가면 되니 노력해 보겠습니다."
화산리 마을회관에 들렸다.
이지역은 '50년 7월말에 미군이 여기까지 들어왔다가 280여명이 전사한 뼈아픈 현장으로 동네 사람들 이야기는 인민군이 국군을 따라 사전에 들어와 주요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한다.
국군은 일부 있었으나 제대로 전투도 못하고 뒤로 가기 바쁘고 미군은 지형을 모르니까 길따라 저 언덕 위에서 죽 내려오고 그러니 북한군에게 다 죽을 수 밖에 없었단다.
마을 할아버지들이 절대 이름을 적거나 사진을 찍지 말아달라고 당부 한다.
이유는 그당시에 서로 손가락질로 많은 같은 동네 사람들이 죽고 지금도 북으로 도망쳐서 내려오지않는 빨갱이 집이 있단다.
한 할아버지는 직접 채병덕 당시 백의종군으로 이곳 쇳고개 전투에 정래혁 군대와 참가했던 참모총장이 죽어서 여러명이 끌고 내려오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장본인을 만날 수 있었다.
"등치 좋데, 키는 작은데 얼마나 뚱뚱한지 군인 4명이 질질 끌고 저 잔등에서 내려와 당시 이 밭이 고추밭이라. 그래 고랑이 있는데 나중에 미군 지프가 와서 실는데 차가 한쪽으로 기울려 끌려 가더라니까. 저기 대나무 밭 위로 가면 묘비가 있었는데 얼마전 누가 와서 무너뜨려 버렸어요."
이 이야기는 내가 더 잘안다.
지금 말씀하시는 분이 2000년도 4월에 내가 이곳에 탐문을 나왔을때 그 아저씨이고 " 아저씨 저 모르시겠어요?" 아저씨가 가만히 쳐다보더니 ' 아, 맞네. 그때 어떤 국방부 사람하고 왔었지. 해병대 출신도 있었는데... ."
그 당시에 국방부 사업단의 박00중령(나보다 4년이나 고참이다)과 사계전문가 예비역 해병대 대령 출신 한명이 같이 그 자리에 있었다.
문제는 과연 바로 채병덕 소장을 지프에 실고 뒤로 후송 했느냐 아니면 이곳 대나무 밭 위에 일단 가매장을 하고 있다 나중에 다시 부산으로 옮겨 갔는지 정답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다.
지금 서울 현충원 장군 묘역 제일 상단에 모셔져 있다. 몇해전 생존해 있는 따님이 성묘차 오신 것을 나는 직접 대면한 적이 있다.하지만 그 진실 여부를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때 전속부관 역활을 하던 손인선 예비역 소장(이등병에서 장군까지 오른 인원)이 본인이 직접 수행했다고 일설에 말했다 하는데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아저씨의 실제 당일 이야기는 그렇지 못하다.
적군의 수장을 전사시켰다면 과연 어떻게 처리했을까?
증언대로 사전에 북한군이 181고지 주변의 주요고지를 점령했고 제대로 준비도 안된 우리가 북한군의 위장 항복 귀순 병에 휘둘려 일거에 전사하고 포위된 것을 아는 순간 어떠하겠는가.
그래도 이 동네 고추밭까지 끌고 왔다는 것이 가당스럽고 밀리는 판국에 임시 저 대나무 밭 위에 가매장 했다가 나중에 재 발굴하여 처리 했다고 하면 그래도 좀 이해가 갈것이다.
미군은 9.28서울 수복과 동시에 바로 영현 처리반이 들어와 전수 미군을 발굴해 갔단다.
2007년도에 우리가 쇳고개 위 181고지 일대를 발굴 했는데 파편 탄피 등은 일부 나오고 개인호가 9부 능선상에 구축 되어 있었지만 유해는 찾지 못했다.
이곳은 하동역이 있고 고개를 넘어서면 계동리로 경전선이 지나가는 교통의 길목이었다.
이곳 화산리도 바로 하동역 오기전 굴따리 근처까지 미군 선발대가 들어와 죽어갔고 격전이 벌어져 인민군도 상당수 죽었는데 워낙 날씨가 덥고 미군 폭격기와 남해에서 함포 사격이 계속 되어 시신을 치우지도 못하다 워낙 냄새가 나고 어디서 왔는지 까마귀떼의 습격과 왕파리들이 휘젖고 다니니 부역자들을 불러 한곳으로 치우게 했단다.
그러니 그당시 부역에 가담한 인원등은 불이익을 받을까봐 증언을 기피하여 실제 묻혀 있는데도 알기가 쉽지 않았다.
바로 굴다리 위에 커브를 도는 곳 위가 매실밭으로 위로 죽 공동묘지가 발달해 있는데 어딘가에 이곳 전투에서 숨진 인원이 있다고 한다.
물론 아군인지 북한군인지는 모르고 분명한 것은 미군은 아니였다. 미군은 바로 찾아 가면서 선물도 주고 돈도 주고 해서 앞다퉈 신고를 했다니 부럽기만 하다.
우리는 전후 50년이 지나서야 잊혀진 유해를 찾고 있는데 말이다.
마을 회관을 나오는데 한 아저씨가 따라 나온다.
"아저씨 어디가실려고요, 우리가 모셔다 드릴께."
"아니 아까는 말 안했는데 내가 저기 공동묘지 안에 당시 전사한 군인이 묻힌 곳을 아버지한테 들어서 알고 있어 안내해 줄려고... ."
사실 알고 있으면서도 옆에 있는 사람이 껄짝스러워 말 못하는 현실이 지금도 존재한다.
아무일 없는 것처럼 우린 아저씨를 차에 태워 함께 현장을 확인후 발굴계획에 포함하여 발굴결과 7구의 유해를 발굴할 수 있었다.
"아저씨 혹시 대나무 밭의 채병덕 장군 묘비는 누가 넘어뜨렸는지 아세요?"
무슨 이야기야면 2000년도에도 있던 "고 채병덕 참모총장 묘비"가 몇해전 가보니 넘어져 있는 것이다. 누가 이런 소행을 했을까 의심 가는 인원은 손00 장군인데 그 이유야 앞에서 언급한 내용의 선상에서 유추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쇳고개 언덕에 안보공원을 조성하여 거창하게 추모비등을 세웠는데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객관적 사실의 내용이어야 한다.
"총장님의 유해 진실 여부를 밝히지않고 모두 하늘 나라로 가셨으니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는 쇳고개 정상에 올라 묵념을 하고 미군이 280여명 전사 하여 개울속에 묻혀있다 발글된 수로 옆으러 가 다시 묵념했다.
아니 우린 내나라를 지키는데도 인색하여 지금도 일부 못된 사람이 병역기피 목적으로 과도한 문신이나 근육 인대 파열등의 술수를 쓰지만 6.25전쟁 당시에는 더 그랬다고 한다.
그때는 집안이 달라붙어 독자나 장손 또는 돈있고 빽있는 사람은 별의별 짓으로 군을 기피했다.
심지어 손가락까지 절단하여 군대를 가지않으려 몸부림친 우리인데 자유민주주의 파수꾼으로써 공산주의자들로 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려 태평양을 대서양을 인도양을 건너서 온 유엔군은 정말 우리 그 은덕을 잊어서는 안된다.
특히 미국은 이미 제1.2차 세계대전을 그리고 바로 '45년 8월까지 태평양 전쟁을 하여 지구상 모든 곳의 전투에 자국의 젊은이 들이 참여하여 숨져가는데 그 부모형제는 오죽하리오... .
난 얼마전 미국 하와이에 업무차 넘어가 히캄 공군기지 안에 있는 유해발굴 감싯센터에서 유해발굴 업무를 협조하고 펀치볼 하와이주 현충원에 들려 6.25전쟁 전사자 묘역에 가서 묵념했다.
그곳에 안장 되어 있는 인원이 거의 800여명으로 대부분 화장하지 않고 운구해 와서 관속에 부패방지 처리되어 안장 되어 있다고 한다.
미국은 가 주에 현충원이 있으며 워싱턴에는 웰링턴 국립묘지가 별도로 있고 여기는 주로 남북전쟁 당시 전사한 북군과 남군의 용사들이 안장 되어 있다.
역대 대통령들은 이곳에 안장되고 있었다.
미국이 특이한 것은 우리는 유해를 찾아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으면 묘비를 세우지 않고 화장하여 납골당에 안치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은 각각의 개체 분류만 되면 "무명용사 묘"라고 똑같이 묘비를 세워서 관리한다.
이러한 방문결과를 보고하여 겨우 우리는 이제 화장하여 지하 납골당에 갔다놓는 시대는 지나고 현충원 내에 있는 발글단 감식소에 유해보관 장소에 중성자 박스를 이용하여 반영구 보관 관리 하고 있다.
이 문제도 시간이 경과하면 관리시설 문제로 화장을 할 것이고 다만 유전자 감식 위한 시료는 채취하여 분석자료는 보영구 보존하게 되리라 본다
하지만 당장 남북 정상 회담에 이어 미북회담에서 좋은 결과가 나온디면 북한의 국민들도 유족으로서 신원확인을 해야 될 것인데 먼 안목에서 시설을 확충하여 온전하게 보존처리 하는것 이 당연하다고 본다.
차는 농로를 빠져나와 삼성궁으로 향했다.
하동의 화개 악양 청암면과 산청군의 시천면이 맞닿는 지리산 세석평전 남쪽 능선을 따라가면 삼신봉 1289m 고지 밑에 도인이 산다는 청학동이 있다. 요즘 여름철이면 초등학교 학생들 위한 한문이나 유교적 교육이 진행되는 명소로 이름이 있다.
종교적 어떤 미신을 떠나 내려오는 이야기가 이곳 삼성궁이 쉽게 말해 유불선 우리의 전통 선학의 진수 자리라고 해서 천하의 명당중에 명당이라는 곳이다.
목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그곳의 문화적 실태를 탐방하는 모양으로 잠깐 들러 내부를 나만 들어갔다.
기기한 인공 석물들, 요상한 조각품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보물찾기처럼 돌고 돌아 드디어 그 ㅎㅂ일점이 있는 곳에 올라가 하늘을 보았다.
나도 폼을 잡고 눈을 감고 올바른 사람으로 무탈하게 이 하고 있는 죽은자들을 거둬들이는 과업을 살아서도 하고 죽어서도 한다고 고하였다.
나를 지켜보던 김실장이 시비를 건다.
" 뭐라고 기도 했어요?" 안전하게 이번 여정이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했다고 답한다.
시간상 누굴 만나서 물어볼 여유도 없다.
뛰다시피 밖으로 나와 다시 차에 올라 오던 길을 따라 악양으로 간다. 이곳은 중국의 고대도시 악양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지며 그래서 인지 악양루나 동정호같은 것이 있어 그 냄새를 풍기고 있다.
동정호는 평사리로 들어 서는 마을 입구 우측에 있는그리 크지않은 저수지인데 삼국시대 백제를 멸말시키려 온 당나라 소정방이 이곳에 들러 자기고향에 동정호와 규모야 작지만 비슷하고 넓은 들판도 아마 그런 고향 생각에서 이곳을 악양이라 하지않았나 싶다.
악양루가 있는 미점리 악양천 다리가 6.25전쟁 당시 '40년 7월말에 폭파되는데 남원 구례 하동으로 연결되는 이 19번 도로가 군인들이 밀려 내려와 하동으로해서 진주 함안 마산으로 가는 주요 군사도로 사용 되었단다.
이색적인 내용으로는 바로 주도로 옆에 임진왜란 당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무갑옷 차림으로 내려가면서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는 돌 표지석이 있.
또한 고소성이 마을 들어가는 좌측 산에 바로 있는데 신라시대 백제의 공격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고고학계의 이야기인데 내가 보기에는 백제가 신라군의 동태를 감시하려 쌓았다고 아니면혹시 이곳에 부족국가가 있었다고 본다면... .
개똥 지식으로 아리송한 역사를 말하는 사이 차는 최참판댁에 머문다. 입구의 찻집에서 "토지"소설 배경의 이야기를 지역 문화사로부터 들으며 호흡을 가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