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오랜 고난을 거친 신간선과 일본 국철. 그 재기의 시작은 신간선 100계로 부터.
위기의 국철. 사력을 다한 마지막 개혁의 시작.
1964년 도카이도신간선이 개통하고 1975년 산요신간선 전 구간이 개통했음에도 차량은 여전히 0계 한 형식으로만 운영되고 있었다. 0계는 1964년 부터 생산되기 시작하여 1976년 초에 최초 도입된 차량들이 퇴역했지만 기존 0계를 다시 제작해 교체하였기 때문에 1980년대에도 조금씩 업그레이드는 이루어 졌지만 속은 똑같은 0계가 계속 제작되고 있는 웃지 못할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고 신형 차량의 개발은 지지부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국철의 정체기가 최고조에 달하고 민영화 직전에 이르게 된 1984년 국철은 도카이도 신간선에 노후화된 0계를 재빠르게 교체하고자 새로운 형식의 차량. 100계를 도입하여 1985년 10월부터 장거리 "히카리"를 중심으로 투입했다.
100계 전동차는 도호쿠신간선의 200계보다도 5년 늦게 도입되었지만 형식명은 먼저 받아갔다. 이는 국철시절엔 도호쿠신간선 차량이 짝수, 도카이도신간선 차량이 홀수로 배정되었기 때문이다.
0계를 기반으로 성능과 거주성의 적절한 개선 실현
역시 국철 말기의 정체기 탓에 100계에도 큰 신기술 보다는 0계를 베이스로 하여 성능 향상과 거주성 개선을 중심으로 설계가 진행되었다. 이미 200계 차량을 개발하면서 도입한 신기술들이 안정화 되면서 이를 적절히 활용해 0계에 적용. 적절한 선에서 제작비용 절감과 성능향상, 거주성 개선의 효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선두부는 0계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샤프한 이미지를 더했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고출력 전동기를 탑재하는 대신 4량의 부수차를 넣어 12M4T로도 0계와 동일한 성능을 낼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이 부수차의 일부를 2층차량으로 제작해 이 공간에 그린샤, 식당차, 컴파트먼트 등을 설치해 거주성 또한 향상시켰다.
제어장치는 효율성이 낮은 탭제어 대신 반도체를 사용한 사이리스터 연속 위상제어를 채용했다. 200계보다는 다운그레이드 된 4단계 방식의 사이리스터 정류기를 채용했으며 0계보다는 효율적으로 견인전동기의 출력을 활용 하면서도 200계 보다는 제작비용을 절감하는데 성공했다. 주변압기도 경량화 하였으며 하부기기는 일체화된 커버를 붙여 공기저항을 최대한 줄였다. 견인전동기는 200계와 동일한 230kW급의 직류전동기를 채용했으며 전동기 브러시 교체주기도 늘려 유지보수 소요도 크게 개선 했다. 0계와 같은 MM' 유닛 구성으로 되어있으나 옆에 부수차 하나를 붙이는 식으로 1유닛을 구성할수도 있다.
제동장치는 발전제동과 더불어 응답성이 빠른 전기지령제동에 부수차에는 와전류제동장치를 장착했다. 보조전원장치도 전동발전기(MG)대신 SIV를 사용했으며 열차의 간단한 상태정보를 기관사에게 알려주고 이를 저장하는 열차정보관리장치가 채용되어 운전실에 작은 CRT 모니터로 열차의 간단한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신간선의 기술적 안정과 거주성 향상을 이룩한 100계는 바로 다음해 로렐상을 수상하였다.
2층차에 식당차에 컴파트먼트까지
100계는 애초의 개발 모토가 "고객 제일, 승무원은 그 다음" 으로 잡을 정도로 고객 서비스에 심혈을 기울여 0계에 비해 거주성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먼저 보통차는 2+3배열을 그대로 두고 리클라이닝 시트를 적용했으며 간이형 리클라이닝 시트를 장비한 0계 후기형에 비해 시트피치나 리클라이닝 각도도 확대했다. 객실의 내장도 0계에서 보였던 나사구멍, 금속 몰딩, 무기질의 칙칙한 벽체등의 투박한 내장을 싹 없애고 부드러운 질감의 내장재, 조잡한 구조의 최소화를 통해 주택 수준의 거주성을 확보했다.
나름의 배리어프리 대책도 세워져 일부 차량에 휠체어 대응 좌석이 갖춰졌고 객실 입구벽 상단에 LED로 된 승객안내장치 전광판을 설치해 정차역 안내는 물론 무선으로 수신되는 문자 뉴스서비스도 제공했다. NHK라디오를 수신해 그린샤에서 이어폰으로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서비스는 N700계가 도입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그린샤 서비스 중에 하나인데 이 100계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특히 100계가 자랑하는 2층 차량에는 도쿄에서 하카타까지 장거리를 이용하는 승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집중되었다. 2층부에는 그린샤, 1층부에는 1인실 부터 4인실까지 다양한 컴파트먼트 개실이나 매점(카페테리아)이 설치되었으며 장거리 "히카리"를 전담하는 편성에는 8호차의 2층부엔 식당, 1층부엔 주방을 설치한 식당차로 운영해 다양한 고객 서비스 전개가 이뤄졌다.
100계의 제작 편성별로 드러나는 각 운영사별 운영 스타일의 변화
100계는 1985년 선행양산편성인 X0편성이 제작되었고 시험운행을 거치면서 1985년 10월 도쿄-하카타 구간의 히카리 1왕복운행으로 정식 운용을 시작했다. 1986년이 되어서야 양산형이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당시엔 0계 대체 목적으로 2층차량을 뺀 12량짜리 4개편성(잠정 G편성)을 먼저 도입해 1986년 6월부터 "고다마"로 돌렸으며 11월이 되어서야 2층차량을 붙여 X편성으로 편입해 선행양산편성의 양산화 개조를 포함해 7개 편성 총 112량이 제작된 채 JR도카이에 이관되었다.
민영화 후엔 JR도카이와 JR서일본이 각각 자신들의 운영 스타일에 알맞는 형태로 100계를 계속 제작해 투입했다. JR도카이는 넘쳐나는 도카이도신간선의 수송력을 버티기 위해 2층차량을 2개만 집어넣은 G편성을 제작했다. 2층차량의 상단은 모두 그린샤, 하단은 각각 컴파트먼트와 카페테리아 시설을 배치했고 2층차 옆으로 그린샤 한량을 더 넣어 고급수요에 대응했다. 제작비용을 줄이기 위해 중정비를 담당하는 하마마츠 차량기지에서 자체 제작 하기도 했다.
JR서일본은 이에 비해 산요신간선 구간의 수송밀도가 높지 않았고, 후쿠오카나 키타큐슈 뿐만 아니라 히로시마, 오카야마 등 대도시에서 도쿄까지 장거리를 이동하는 수요를 고려해 거주성과 속도까지 늘린 V편성 "그랜드 히카리"를 도입했다. 먼저 2층차량을 기존 2량에서 4량으로 늘렸으며 부족한 동력차는 선두차까지 동력을 붙여 충당했다. 2층차량의 경우 상단이 그린샤, 하단이 보통차로 설정되었으며 8호차는 매점, 식당차와 주방 시설을 갖췄으며 그린샤엔 팔걸이쪽에 액정모니터를 배치한 AVOD서비스 등이 도입되었으며 측면 행선표시기도 LED전광판이 처음 도입되었다. 특히 산요신간선 구간에서만이라도 속도 경쟁력 확보를 위해 최고속도 270km/h 증속에 대응했다. 고압모선을 통해 집전장치 수를 줄이고 방음 커버를 붙였으며 발전제동용 저항기를 활용한 고속영역에서의 약계자제어로 출력을 확보해 시험운행에서 277.2km/h까지 기록했으나 고속에서의 소음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채산성이 떨어지는 이유로 실제 영업운행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속도경쟁 시대의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하다.
100계는 국철이 112량을 제작했고, 1991년까지 JR도카이가 800량, JR서일본이 144량을 더 제작해 총 1,056량이 제작되어 노후화된 0계를 대체해 나갔다. 1991년부터는 도카이도신간선에 AT급전이 도입되면서 천장에 고압모선 설치가 가능해져 팬터그래프 수를 3개로 줄이는 등의 개선이 이루어 졌다. 하지만 민영화 이후 기술진보가 빠르게 이루어져 1993년 진짜 270km/h를 낼 수 있는 300계 "노조미"가 데뷔하면서 급격하게 그 지위를 상실해 나갔다. JR도카이의 경우 300계를 지속적으로 도입해 한신대지진으로 300계 증비가 어려워진 JR서일본을 위해 1997년 100계 7개편성(G1~G7)을 JR서일본에 양도했다. 이후 500계, 700계들이 계속 도입되며 도카이도신간선에선 2003년 8월 시나가와역 개통을 앞두고 모든 100계가 퇴역했다.
JR서일본도 300계와 신예 500계가 도입되면서 0계처럼 고다마용으로 6량, 4량으로 단축시킨 P, K편성을 도입하면서 장거리용 V편성과 G편성은 2000년 식당차 운영 종료를 시작으로 2003년 모두 퇴역했다. 단편성화된 P, K편성은 각각 12개, 10개편성이 개조되어 2012년 3월까지 0계와 함께 "고다마"를 중심으로 운용되다가 퇴역했다.
현재 100계차량은 나고야 리니어-철도관에 선두차 한량과 2층차 한량, 우메코지 교토철도박물관에 선두차 한량, 하카타종합차량소에 2층차 2량이 전시보존 되어있다.
글 : 송승학(부운영자, 787-ARIAKE)
사진 : 김성수,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