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67/180206]일본, 그 아찔했던 하루
2월 4일(일) 아침 7시. 일본 니가타(新瀉) 역근처 어느 모텔(Dormy Inn․3성급 체인호텔로 서울 강남에도 있다한다) 2층 식당. 소인국 식탁같은 곳에 네 명(동생네와 우리 부부)이 앉아 도란도란, 오순도순 아침을 먹는다. 뷔페인데, 제법 맛깔스럽다. 일본 음식은 그래도 우리 입에 맞아 여행할 때 크게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중국은 모든 반찬을 무조건 볶아대고, 또 ‘그놈의’ 지독한 향내라니...생각만 해도 싫다. 하지만 일본은 쓰시도 좋고 미소된장국도 좋다. 흠이라면 반찬을 손톱만큼 준다는 거다. 단무지 세 조각을 먹으라고 내놓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청국장 비슷한 낫도(納豆)가 몸에 좋다니까, 그리고 먹을만도 했다. ‘ㅁ’자로 지은 모델은 지붕이 없는 중정(中庭)이 특색이었다. 어제 오후는 비가 뿌렸는데, 새벽부터 함박눈이 쏟아졌다. 밥을 먹으며 중정에 내리는 눈을 보는 재미에 신이 났다. 그림이 너무 멋졌으므로, 잠시 후 들려올 ‘비보(悲報)’도 모르는 채.
아내가 종종 ‘료칸여행’을 기획한다. 나로선 반대할 까닭이 없다. 초등생 방과 후 글쓰기 지도, 몇 십년 줄기차게, 쉼없이 달려온 아내다. 때때로 쉬어도 되리라.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힐링은 ‘유카다’을 입고 노천탕에서 1시간여 사우나를 즐기는 게 최고일 듯. 그야말로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혀로 맛보기도 하고, 앞에 펼쳐진 거대한 산맥에 산처럼 쌓인 눈들을 보면서, 머리를 식히는 것은 호사(豪奢) 중의 호사이리라. 아예 눈이 사람키만큼 쌓인 골목길들은 장관(壯觀) 중의 장관이다. 어쩌면 이런 곳이? 우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장기간 여관에서 묵으며 ‘설국(雪國)’을 썼다는 ‘에치코 유자와(越後湯驛)’을 찾았다. 기억하리라.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이윽고 눈나라였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로 시작하는 소설 ‘설국’의 첫 구절을. 니가타에서 신간선(新幹線)으로 40분. 앙징맞은 소읍(小邑)이지만, 여기저기 스키장 천지다. 그곳에서 일박(一泊)을 맛있게 묵었었다.
이제 12시 55분 대한항공(KAL)만 타면 짧지만 좋은 추억(追憶)을 쌓고 내 나라로 돌아가게 되리라. 아침을 먹고 방에 돌아와 짐을 정리하는데, 난데없는 문자. “폭설, 기상악화로 비행기 결항”. 이게 웬일인가? 그럼, 못돌아간다는 말인가? 일단 서둘러 공항으로 가보기로 했다. 공항 셔틀버스비 1인 410엔. 수중(手中)에 딱 2000엔이 있었으니, 30분 걸려 용케 공항을 가는데, 눈은 쏟아지고, 걱정이 먹구름. 뭔가 사달이 나도 크게 날 듯싶었다. 모든 비행기가 뜰 수 없는, 일요일 오전, 니가타공항은 휑뎅그레했다. 일본어를 모르는 우리, 영어로도 소통이 안되는 그곳에 ‘구세주(救世主)’는 따로 있었다. 구글통역기. 우리말로 물으면 일본어가 찍힌다. 그쪽에서 일본어로 말하면 우리말이 찍힌다. 상대방에 들이대기만 하면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할 수 있다. ‘세상에, 이런 효자(孝子)가 있단 말인가?’ 문제는 어떤 비행기도 뜰 수 없고, 내일(월)은 원래 한국행 비행일정이 없으며, 오늘 중 가려면 도쿄 하네다(羽田)공항으로 가야 하는데, 시간과 티켓이 있는지 알아봐야 한단다. 7시 55분 하네다발 김포공항행 빈 좌석이 있으니, 티켓은 변경하여 발매해준단다. 인천공항(승용차가 장기주차장에 있다)이든 김포공항이든, 가면 되는 것을. 아이고,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휴대폰이 불이 났다. 국내의 여동생들이 "대체 어떻게 되냐? 올 수는 있냐"며 걱정에 머리가 터진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엔화 한 푼도 없고, 환전소도 일요일이라 쉬고, 당장 니카타역 가는 것도 막막하다. 요행히 마스터카드를 받은 택시가 있다. 고마운 일. 니가타역에도 환전할 데는 없었으나, 마스터카드로 도쿄행 신간선 티켓을 끊다. 엄청 비싸다. 우리 돈으로 1인 10만여원. 눈이 뒤집힐 지경이나 어찌할 것인가. 눈은 환장하게 계속 내리고. 도쿄까지 2시간 반. 시속 320km라는 고속철도가 그만큼 걸린다니, 대체 몇 킬로나 될까? 신의주에서 부산까지는 족히 될 듯하다. 그래도 일찍부터 서둘러 다행. 일은 벌어졌고,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할 판. 모처럼 초고속 열차여행에 여동생은 신이 났다. 설마 도쿄에는 환전할 곳이 있겠지, 그리고 시간은 충분하니까, 돌아가는데 별 문제는 없을 거야. 이런 눈구경을 언제 하겠어? 언제 도쿄를 오겠어? 오빠, 언니, 즐기자구요. 여기 구글 통역기도 있는데, 뭐. 아내가 놀린다. "아가씨, 인자 혼자 자유여행 올 수 있것지잉? 함 오서방이랑 와봐봐잉"
눈 덮힌 산하를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눈이 시릴 정도다. 길쭉한 일본 본토 땅이 제법 넓다. 어디쯤 왔을까. 어느 순간, 날씨가 말짱하게 개였다. 일본 본토의 철도지도, 엄청 복잡하다. 마치 거미줄같다. 역이 JR을 포함하여 못되어도 500개는 족히 되는 것같다. 신간선도 여러 갈래인 줄 처음 알았다(우리가 탄 상월(上越)신간선을 비롯해 북륙(北陸), 산양(山陽), 동북(東北), 북해도(北海道), 산형(山形)신간선 등 물샐 틈이 없다). 2시간 반 동안 역도 몇 곳 쉬지 않는다. 신사(新瀉)-연삼조(燕三條)-장강(長岡)-포좌(浦佐)-월후탕(越後湯)-고원(高原)-고기(高崎)-웅곡(熊谷)-대궁(大宮)-상야(上野)역 다음이 마침내 동경(東京)역이다. 호기(豪氣)까지 부려본다. 우리의 ‘홍익회’에 해당하는 이동점빵에서 샌드위치와 음료수도 카드로 사먹어 본다.
드디어 도쿄역 도착. ‘메가 시티(인구 1천만명이 넘는 도시)’답게 정거장도 엄청 복잡하다. 하네다공항을 가려면 JR 하바마츠쵸역으로 또 바꿔타야 한단다. 이것 참, 갈수록 태산이다. 그곳에서 모노레일을 타야 한다는데, 촌넘들인지라 어리둥절, 이 노릇을 어이 하랴. 엔화도, 비자카드도 없으니 가는 데마다 쩔쩔맬 수밖에. 영어라도 통하면 어떻게 해보련만. 죽으란 법은 없는 듯. 안내소의 한국인 아가씨가 친절하다. 편의점에서 마스터카드로 티켓을 끊는 법을 직접 데려가 알려주는 게 아닌가. 눈물나게 고맙다. 휴우-이제 살았다. 모노레일만 타면 하네다에 간단 말이지.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드뎌 3시간여 만인 오후 2시 공항 도착. 수속을 밟으려 해도 3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오늘 밤 늦게라도 갈 수 있는데. 5층 전망대에서 활주로에 가득한 세계 각국의 비행기를 감상하다. 꿈을 꾸는 듯하다. 마스터 카드는 이럴 때 사용하라고 있는 거다. ‘백색의 연인’ 웨하스도, 고향 아버지께 설선물로 드린 정종도 사며 시간을 죽이다. 이왕이면 정식으로 한번 일본 음식도 먹어보자. 1인 2만5천원. 날씨가 좋으니 뜨는 것은 문제없다. 오랜 기다림 끝에 이륙. 잠을 청하다.
김포 도착 10시 30분. 여주팀은 인천공항을 갈 수 밖에 없다. 판교팀은 9호선 막차를 타다. 아무래도 광역버스 막차를 댈 수 없을 것같아, 중간에 내려 막차 2호선을 타고 을지로입구역서 막차를 노리다.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2, 3분 상관으로 9003 막차를 타다. 세 번 막차의 연속, 이것도 기적같다. 캐리어 하나를 들고 뛰면서, 정류장을 출발한 버스를 보고 손짓하며 꾸벅 절을 하니, 아, 맘씨 좋은 기사분이 쉬어주는 게 아닌가. 만약 택시로 간다면 맥없이 길바닥에 4만원은 버릴 판이었는데. 이것도 다행. 오늘은 아침부터 다행의 연속이다. 행복이란 게 별 거 아니다. 숨을 돌린다. 아내가 말한다. 당분간은 일본여행 꿈도 꾸기 싫다고. 가이드도 마침내 ‘긴장’이 풀린 것이다. 반갑게 집 현관문을 여니 12시 40분. 약속이나 한 듯이 압력밥 솥의 밥을 딱딱 긁어 뜨거운 물에 말아 김치 한 포기를 썰어 우적우적 들이밀다. 그제야 눈이 버언히 뜨인다. 여주팀은 인천공항까지 가서 어떻게 가나? 2시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 잠에 들다. 일본 본토를 종횡무진했던 길고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하다. 빨리 토요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국민 애벌래'라는 초록신발을 손자에게 신겨주고 싶다. 쫄바지도 입혀보고, 내일모레 어린이집에 간다는데, 빽 백에 달랑달랑 달고 다닐 야옹이인형도 달아주고 싶다. 그것 참, 어딜 가나 손자 생각뿐이니, 손자 없는 사람들 서러워 살겠나.
4시 10분, 알람 소리에 눈을 떠 꼭두새벽 밥을 먹고 운동(배드민턴)을 하러 길을 나선다. 다시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 이번 여행에 수확이 있다면, 요넥스 배드민턴 라켓 두 자루와 배드민턴 신발을 샀다는 것이다. 이것도 난생 처음 하는 호사. 백팩에 10만원쯤 하는 라켓을 넣고, 조간신문 몇 개를 챙겨 광역버스 첫 차를 타고 직장 근처 체육관으로 향하다. 6시 반부터 한 시간 동안 3게임을 하고 사무실에 앉는다. 아, 금-토-일, 드라마같은 2박3일이 마치 꿈을 꾼 것같다. 만약에 니가타에서든, 도쿄에서든 며칠이든 발이 묶었으면 어쩔 뻔 했는가. “글로벌시대에 죽으란 법은 없더라. 따지고 보면 무슨 걱정인가? 구글통역기도 있고, 비자카드는 없어도 마스터카드가 있었는데” 기적같이 다녀온 니카다 2박3일 글 뒤풀이를 가름한다. “흐흐. 동생아, 오서방아, 고생했지만, 돈도 제법 깨졌지만(별도로 1인 30여만원 족히 털렸다), 이것도 재미가 아니냐? 동행해 주어 고마웠어.” 벌써부터 세 여동생네와 우리 부부가 펼치는 2월말 환상의 ‘코딱지(말레이시아령 코타 키나발루의 애칭) 4박5일 힐링여행’이 기다려진다. 좌우지간 국내든, 해외든, 가족끼리 하는 여행은 좋은 것이야. 사는 재미가 나더라구. 안그래? ‘앙’그러면 ‘호랑이’인데.
첫댓글 잘했네. ㅎㅎ
스릴있는 여행이라 기억장소에 잘 보관 되겠구만...
우천한테 한수 배웠네.구글번역기.요즘 음성인식이 잘 되는 모양일세.금번 여행은 나중에 우천에게 소중한 이야기거리가 될것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