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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긴급 기도 요청
구원의 기쁜소식 902호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한 회원님이 보내온 글입니다.
기도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오래 전 한 도시에서 근무할 때입니다.
대선 관련 하원‧상원회의가 있던 다음 날입니다.
△목요일
평소와 다름없이 버스 편으로 귀가했습니다.
악한 사람의 해코지로 승용차 2대를 폐차한 뒤부터 안전한 버스로 귀가하고 있습니다.
벤 차량을 운전하는 건장한 남성이 저희 아파트 횡단보도 앞에 시동을 건채로 있었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밀어버릴 것 같았습니다. 과거에도 그런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차량 옆으로 다가가 차량 안을 들여다 본 뒤 음성신호기를 누르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차량이 쏜살같이 북쪽으로 달렸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넌 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간 후 아파트 단지의 안쪽(우회전) 작은 건널목을 건너려 했습니다.
이상한 마음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좀 전에 대로변 북쪽으로 달린 벤 차량이 유턴을 해서 다시 저희 아파트 단지 안으로 달려왔습니다. 그 차량은 제가 횡단보도를 건너려 한 그 횡단보도를 건너 아파트 000동 단지로 들어갔습니다.
사진을 촬영하려 하니 손살 같이 주차장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습니다.
제가 생각 없이 횡단보도를 건넜다면 그 차량에 치었을 것입니다.
2009년 11월 악한 사람이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횡단보도에서 실패하면 유턴해서 돌아와 아파트 단지 내 도로를 건널 때 밀어 버리고. 병원에 입원하면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임…)
또 나에게 적용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금요일
낮 시간대 집 거실에서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중이었습니다.
벨소리가 들렸습니다.
화면에 건장한 남성 2명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이상한 마음이 들어서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한번 문을 두드린 뒤 “계세요”하고 한 번 외치고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때 2009년 11월 악한 사람이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당시 저는 농담으로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을 아파트로 보내 문을 열어주면 바로 쑤셔 버리고 빨리 나오고…”
또 나에게 적용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켜 보호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토요일
뇌출혈로 타 도시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아내로부터 문자와 전화가 왔습니다.
참고로 아내는 어느 날 새벽에 뇌출혈로 쓰러져 한 병원에서 입원을 했습니다.
당시 담당주치의는 뇌관부(숨골)의 1/2이상 출혈로 수술이 불가능하다. 수술해도 소용이 없다. 생존율은 10%이하다. 식물인간으로 살다 폐렴으로 죽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문자로 알리고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런 뒤 보호자 실에서 아이와 함께 사생결단으로 기도했습니다.
생존율이 10%밖에 안 된다는 아내가 6시간여 만에 눈을 떴습니다.
3일간 보호자실에서 밤낮으로 아내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급속도로 회복됐습니다.
부원장인 주치의는 “기적이다. 약이 너무 잘 듣는다. 기도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위험한 뇌출혈도 재발되지 않았고, 폐렴도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측 눈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한 방향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아내는 타 도시로 옮겨졌습니다.
이후 4개월 동안 좋아진 것도 나빠진 것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 아내가 토요일에 한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시면 눈이 나을 것 같다. 나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문자를 간병인을 통해 보내왔습니다. 거듭 거듭 보내왔습니다.
아상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내와 통화를 했습니다.
000 목사님이 기도해 주면 낫겠다는 아내의 요청에 “너의 기도도 중요하다. 너도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기도 안 한다. 끊어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문도 열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기도를 요청할까 이상하다는 마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일요일(주일)
-입양아 사망사고와 관련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아이를 기른 부모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기독교이념으로 설립한 대학을 나온 입양아 어머니와 입양아 아버지.
모두 목사님을 아버지로 둔 이들이 입양아를 학대했다는 것은 믿기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이의 췌장이 끊어졌다는 부분이 석연치 않았습니다.
아이의 췌장이 끊어지려면 어른이 소파에서 아이배로 뛰어내리는 충격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실험이 있었습니다.(한 방송에서 보도함)
또 아이의 배 안에 피가 많이 고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전에 아이를 학대했다고 신고가 들어왔지만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모두 ‘혐의 없음’으로 처리됐습니다. 이들 기관이 제대로 조사를 했을 것이라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살펴봤습니다.
병원에서 누가 아이의 췌장을 끊어 버렸다면 배안에 피가 많이 고일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습니다. 반드시 병원 CCTV 등을 확인해야 한다는 마음이 아주 강하게 들었습니다.
양부모가 아무리 학대를 해도 췌장이 끊어지게 학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양부모의 학대로 몬다면 ‘사건성립이 될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고의로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학대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도 해봤습니다.
악한 사람이 교회와 교인을 해코지하기 위해 배후에서 진행했다면 모두 가능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악한 사람은 그보다 더한 짓도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재수사와 재취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변호사들도 이 부분에 대해 집중 조사와 변론을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이의 부모 이름과 얼굴을 인터넷 등에 게재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 명예훼손혐의로 처벌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이름과 사진, 교회를 인터넷과 언론에 게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모두 명예훼손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손해배상도 청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국교회 차원에서 강력하게 대응을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배후가 있다면 반드시 밝혀야 할 것이라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어떻게 췌장이 끊어질 수가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한 방향으로만 판단하고, 몰아간다면 오진과 오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천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중을 기했으면 합니다.
국민들의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도 보지 않았습니까?
거짓과 속임수와 조작에 속아 춤을 춘 수많은 사람들.
눈물이 나옵니다.
또 한 국회의원의 아픔을 보며 덩달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느닷없이 한 유튜브가 한 국회의원을 성폭행범으로 몰았습니다.
일반 언론까지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보도했습니다.
한 호텔방에 두 여성이 각각 다른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방에 두 여성이 자고 있는데 그중 한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지요.
고함만 질러도 성폭행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믿는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건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왜 ‘6일’ ‘6일’ 느닷없이 그런 급조된 뉴스가 나왔는지 아리송했습니다.
피해자로 지목된 당사자도 “의원과 일체의 불미스러운 일도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모두 민․형사 책임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수사기관의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 해당 의원과 피해자로 불렸던 여성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훼손된 두 분의 명예는 어떻게 보상 받을 수 있을지?
크리스천 언론인들은 “내년 봄 있어서도 안 될 지역 선거 관련 배후가 없었는지 등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다”며 “시민들이 해당 의원과 피해 여성으로 불렸던 분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우리도 이들을 기도 등으로 지키자”고 입을 모았습니다.
△월요일
출근을 했습니다.
아내에게 속속 문자가 왔습니다.
000 목사님께 기도를 요청했느냐고. 회신이 늦자 비난하는 글도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회사 부사장님으로부터 오는 14일 징계위원회를 연다고 했습니다.
피해자인 저를 징계대상자라 못 박아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참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습니다.
30년 우리 신문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인데,
한국 언론계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인데.
그런 수치를 당한 제가 징계대상자라니…
징계위원들의 면면을 봐도 가해자 쪽과 초록동색이었습니다.
보안업체 에스원이 저희 회사 CCTV 보관기간이 한 달입니다.
그런데 이날은 12월 10일 폭력사건이 발생한 지 꼭 한 달이 지난 1월 11일이었습니다.
‘증거가 인멸됐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2009년 11월 악한 사람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또 나에게 적용하는구나.’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곧 바로 경찰청에 전화를 했습니다.
에스원의 CCTV 동영상은 덮어씌우기를 하기 때문에 복원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신고하면 조사는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노동청에 전화를 하니 노동위원회에 이의제기를 한 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노동위원회에 사실조사를 요청하라고 했습니다.
직장에 제출한 경위서를 몇몇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보냈습니다. 남에게 알리지 말고 기도해 달라고. 악한 사람이 행한 악한 일은 제 카톡으로 기도문 형식으로 작성해 보냈습니다.
※참고로 제 휴대폰은 많은 사람이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역시 아내에게 카톡으로 경위서와 징계위원회 개최 건을 보내줬습니다.
아내는 더 이상 말이 없었습니다.
퇴근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악한 사람이 소행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CCTV 동영상이 지워진지 한 달 만에 징계위원회를 연다니…
후배를 불러 호통을 치면 될 일을…
가해자나 피해자가 징계위를 요청 하지도 않았는데 징계위를 연다…
목요일에 벤 차량으로 저를 죽이지 못했으니 금요일에 저의 집으로 건장한 남성 2명을 보냈으나 역시 죽이지 못했으니 플랜C를 가동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를 죽인 뒤 자살을 가장해서, 제가 작성한 경위서가 아닌 ‘가짜 경위서’를 보여주고, 폭력이 담긴 동영상은 지워졌으니 보여줄 필요가 없고 저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갔을 것이고…
아내의 요청에 따라 아내의 회복을 위해 목사님께 기도 요청 문자를 보냈다면 ‘아내의 기적’은 가짜라고 우길 것이고, 월요일에 아내가 보내온 좋지 않은 문자를 보여주며 부부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을 것입니다. 저와 아이는 아내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날(월요일) 제 휴대폰에 회사에 제출한 경위서와 악한 사람의 악행이 담겨 있어 저를 죽이고 자살했다고 하지 못했구나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월요일(2주일마다 월요일 야간당직 섬)은 제가 당직서는 날이기 때문에 밤을 이용해 저를 죽이려 했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천지도 분간 못하고 깨춤을 추는 구나’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전에도 수없이 많이 저를 살해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엽기적인 사건사고들이 일어났습니다.
너무나 많은 국가와 국민의 재산이 불탔습니다.
정장식 전 포항시장이나 야구계 전설 하일성 야구해설가도 자살을 가장해 살해 됐다는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2009년 11월 이야기를.
“내일 공범들이 많은데 출근해야 하는지요. 그래도 저를 죽이려한 저들의 회복을 도와야 하는지요.”라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음은 제가 제출한 폭행사건 경위서입니다.
000의 상관 폭행 경위서
000의 000 편집국장 권행대행 폭행(목 조름)에 대한 경의서를 제출합니다.
00신문 30년 역사에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고, 한국 언론사에서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너무나 황당한 일이었기에 당시 기억을 떠올리기조차 싫었으나 지난 17일(목) 000 편집국장으로부터 경위서 제출을 요구하는 문자를 받고 아래와 같이 기억나는 대로 당시 상황을 작성합니다.
저는 12월 10일 휴가 중인 000 편집국장을 대신해 편집국장 직무대행을 수행하게 됐습니다.
그날 오전 8시35분께 평소처럼 편집국 회의실에서 편집회의를 하자고 각 데스크들에게 알렸습니다.
000이 “왜 편집회의를 하느냐”고 시비조로 말했습니다.
저는 “편집국장이 없으면 000이 편집권장 권한대행으로 신문을 만들고 책임까지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000이 머뭇하다 “자기 일만 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다시 시비조로 말했습니다.
어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뒤 “000이 들어와서 회의하자”고 차분히 달랬습니다.
000은 지난 8월 12일 000 국장 휴가 중 제가 편집국장 권한대행을 맡아 편집회의를 주재할 때 사전 통보 없이 불참했습니다.
저는 당시 편집회의를 주재하면서 참석한 데스크들에게 “편집국장이 없을 때 일수록 각자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12월 10일 오전 회의실에서 편집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정치팀의 예고 기사란’에는 평소와 달리 ‘00포럼’ 한 꼭지만 적혀 있었습니다.
제가 “왜 00포럼 한 건 뿐이냐”고 물었습니다.
000은 “봐라 기사가 없다. 편집회의 왜 하느냐”고 다시 시비조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편집회의에 들어오기 직전 연합뉴스 홈페이지를 체크해 봤더니 ‘검찰총장 사상 첫 징계위 연다’는 기사와 검찰청을 능가하는 정부 조직인 공수처법을 표결에 붙인다’는 기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재빠르게 ‘지면계획표’에 적었습니다. (증거자료 1)
편집회의 때 지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000에게 “오늘 000 징계위가 열린다”고 했습니다.
000은 저의 말을 끊고 “오늘 밤 11시까지 결정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공수처법 처리도 오늘 밤 11시까지 결정 안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000 징계위 건과 공수처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챙길 것으로 요구했습니다.
000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밤 11시까지 처리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넣을지, 말지) 결정해 달라고 마구 닦달했습니다.
취재지시를 내려도 취재가 안 되면 보도할 수 없고, 취재 과정에서 취재지시 내용이 다르면 데스크에 보고한 뒤 취재를 중단할 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취재를 할 수 있습니다.
공수처법 처리도 000 징계위 결정도 일찍 마치면 내일자 지면에 보도할 수 있고, 결정이 되지 않아도 뉴스로서 가치가 있으면 내일자 1면에도 보도할 수 있습니다.
내용의 질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000에게 오후까지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다른 데스크들 같으면 “예 알겠습니다”고 하는데 000은 달랐습니다.
다시 “밤 11시까지 결정이 안 된다. 빨리 결정해 달라”고 닦달을 부렸습니다.
저는 “사장님과 상의해 결정하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하도 말이 안 통해 화가 나서 “이 세끼”라고 두 차례 말했습니다.
보다 못한 000 부국장이 000 부국장이 오후 2시에 출근하니 그 때 편집국장님 권항대행과 함께 결정하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매일 오후 2시께 편집국장과 000 부국장이 최종편집회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목을 조른 000이 000 부국장에게 대든 뒤 000 부국장이 사과하지 않으면 오후 편집회의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고, 000은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오후 편집회의는 편집국장과 000 부국장만 하고 있습니다. 편집국장이 000부국장에게 권한을 위임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000이 부국장에게 대든 것은 잘못입니다.)
000은 다시 말했습니다.
“공수처법은 밤 11시까지 처리가 안 된다. 3면에 넣으면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하도 닦달을 부려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뒤 “000 징계는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저는 이어 “000 부국장이 출근하면 결정하겠다. 추이를 지켜보자.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최선을 다해 달라”며 평안하게 지시를 했습니다. 그런 뒤 팀별 보고를 받고 편집회의를 마쳤습니다.
제자리에 돌아와 서울 000 기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오후 2시께 000 부국장과 회의를 하기 위해, 1면이나 3면에 기사를 배정하기 위해 ‘공수처법 처리’와 ‘000 징계위’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000 기자에게 “공수처법 처리 언제 될 것 같으냐, 000 징계위는 언제 마칠 것 같으냐”고 물었습니다.
000 기자는 “공수처법 처리는 곧 이뤄질 것 같고, 000 징계위 결정은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000(밤 11시 돼도 결정 나지 않는다)이 거짓말 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편집회의에 들어와 거짓말을 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어 저는 000 서울본부장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곧 국회에서 공수처법이 처리될 것 같다. 1면에 가야 할 것 같으니 기사를 작성해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오후 1시가 지난 것 같습니다.
국회에서 공수처법이 통과됐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오후 2시께 000 부국장이 출근했습니다.
편집국장 회의실에서 000 부국장과 편집회의를 했습니다.
“공수처법이 통과됐다. 1면에 배정하자. 000 징계위 결정은 어찌될지 모르겠다. 결정 나면 1면에 넣고 결정 나지 않으면 3면으로 가든지 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후 다시 제자리에 돌아왔습니다.
‘경북도로부터 자료를 받아두었던 ’짓다만 경북지역 건축물‘ 관련 기사와 경북부 기자들에게 취재지시를 내려 보내온 ‘도내 21개 시‧군 해맞이 축제 취소’ 기사를 취합해 2건의 기사를 작성한 뒤 지방면 8, 9면을 마감했습니다. 지면에 반영되지 못한 기사는 인터넷 판에 올렸습니다.
어느덧 오후 3시가 넘었습니다.
평소처럼(오후 3시30분~4시 식사함‧이전 3명이 하던 업무를 맡고 있음) 회사 앞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사무실 문을 막 열려고 하니 000이 문 밖(차를 주차하는 곳)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000은 “3면에 가야하데 000 부국장이 ‘공수처 기사’를 1면으로 간다고 했다.”며 불평하는 했습니다.
000은 오늘 아침 편집회의에서 “오늘 밤 11시까지 공수처와 000 징계가 결정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수처법이 오전이 지나자 국회에서 통과됐고, 000 징계위도 회의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000이 자신의 잘못을 나에게 전과시키려 하는구나”하는 마음이 들어 다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니 또 붙잡았습니다.
저는 000의 거듭된 말에 “너가 공수처법과 000 징계 결정이 오늘 밤 11시 넘어야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그런 적이 없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했습니다. 또 다시 같은 말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하도 화가 나서 “이 세끼”라며 2~3차례 말했습니다.
그런 뒤 “아침 편집회의 때 000 부국장이 보다 못해 000 부국장 오면 편집국장 권한대행과 000 부국장이 결정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니 가만히 있었습니다.
000은 그러다 “오전 편집회의에서 공수처법은 내(000)가 먼저 이야기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네가 먼저 했느냐. 내가 ‘공수처법’과 ‘000 징계위’ 관련 메모를 보여줄까하니 000이 느닷없이 두 손으로 내 목을 조르면서 “야 이 세끼, 야 이 세끼”를 반복했습니다.
참 황당했습니다. 나의 손으로 000의 손을 뿌리 친 뒤 발로 차버리려 하다가 순간 머리 위에 있는 CCTV가 떠올라 ‘이 자가 나를 이용하려 하는 구나’하는 마음에 참았습니다.
(이 글을 적으며 당시 편집회의를 회상해 보았습니다. 제가 000 징계위 뉴스의 중요성을 설명할 때 관련 취재메모도 내지 않았던 000은 저의 말을 끊고 ‘000 징계위’와 ‘공수처법’은 오늘 밤 11시 넘어야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생각났습니다. 000이 ‘공수처법’을 먼저 말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000인 윤석열 징계위와 공수처법이 오늘 밤 11시 넘어야 결정된다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당시 제가 취재지시를 위해 경북부 취재계획 상단에 메모한 ‘000 징계위’와 ‘공수처법’ 메모지를 증거로 제출합니다.)
잠시 뒤 000 차장과 000 부국장이 왔습니다.
저는 “너무나 분해 000 잔 의원님과 사장님께 이야기해 저놈(000)을 반드시 쫓아내야 겠다”고 사장님이 계시는 2층 계단으로 올려가려니 000 부국장이 “사장님은 서울에 계신다”며 내일 말씀드려라고 했습니다.
서두에도 말씀 드렸지만, 후배가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고, 화가 난다고 선배의 목을 조르고 욕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날 저는 편집국장 직무대행이었습니다.
편집국장 직무대행의 목을 조르는 것을 우습게 아는데 이 회사 대표님이나, 부사장님, 실‧국장님들, 이 회사 알기로 얼마나 우습게 알고 있으며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간 제가 아는 00신문은 후배가 선배에게 대들면 편집국장들이 가혹할 정도로 후배를 혼내 줬습니다. 감히 후배들이 선배에게 대들지 못했습니다.
선배가 책망한다고 목을 조르며 대드는 후배가 있다면, 앞으로 직원을 책망하는 대표이사님, 부사장님, 실‧국장님의 목을 조르며 욕하며 대드는 직원이 나오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문사는 군대조직과 같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매일 매일 경쟁지와 치열한 경쟁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긴장의 끈을 풀 수 없습니다. 거듭 확인해야 하고, 거듭 수정해야 보다 정확한 보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 “오보는 오진보다 무섭다”고 합니다.
기사를 놓치면 다그치고… 그러면 내일 특종을 잡아 만회하고…
마감 시간을 앞둔 편집국은 흡사 전쟁터와 같다고 합니다. 늘 긴장해야 하고…
군대에서 조교가 욕하고 벌을 준다고 조교의 목을 조르며 욕하며 대드는 훈련병이 있다면, 그 훈련병을 방치하는 군대가 있다면 그 군대는 당나라군대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군대에서 훈련병이 조교에게 대들면 정말 초상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기강이 잡히지 않고 통제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문사 조직은 군대, 검찰, 경찰, 의사 조직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도 상관들의 큰 소리와 욕이 난무하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신문 편집국은 어떻습니까?
긴장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모두 무장해제한 느낌입니다. 상하관계도 없는 것 같습니다.
위엄이 있어야 하는데 위엄도 없고…
출근하면 오늘 무엇을 쓸까 고민해야 하는데 술집이나 시장통에 온 느낌입니다.
타 언론사와 그 언론사 사장부터 직원들까지 한 바퀴 돌며 욕하고 비난하고, 우리 신문사 사장부터 직원까지 한 바퀴 돌며 욕하고 비난한 뒤 편집회의를 시작합니다.
우리 신문을 잘 만들면 될텐데…
그러기 위해 연구하기도 바쁜 시간인데 말입니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는지?
술좌석에서는 간혹 조심하며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버젓이 사무실에서 업무시간에 거의 매일. 이젠 문화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당나라 편집국’ 같습니다.
“작지만 강한신문을 만들어라”고 하시지만, 목표와는 방향이 다른 것 같습니다.
000은 그날(12월 10일) 무단 퇴근해 버렸습니다.
자신이 마감해야 할 2면과 3면도 마감하지 않았습니다.
000 차장이 와서 2면과 3면을 자신이 마감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내가 마감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날 지방면 2, 3개면과 1면, 2, 3면을 마감했습니다.
공수처 기사는 1면과 3면에 넣었습니다.
000 징계위도 그날 밤 8시가 넘어 마쳤습니다.
15일로 연기(2차 징계위)된 000 관련 기사는 3면이 넣었습니다.
다음날 중앙지와 주요 지방지를 보니 ‘000 징계’관련 기사와 공수처법 통과 기사가 1면과 정치면에 일제히 보도됐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000의 무단 퇴근도 문제입니다.
자신의 면도 마감하지 않고 무단 퇴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후배에게 오늘 출근할 수 없으니 편집국장에게 이야기 하라. 네가 내 면을 마감해 달라”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날(10일) 데스크 3명(국장-휴가, 차장-휴가, 000이 무단 퇴근)이 빠졌습니다.
000은 총선을 앞둔 3월에도 막무가내로 대든 적이 있습니다.
당시 오전 편집회의시간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신문들이 총선 관련 ‘면 머리띠’(신문 위쪽 날짜 옆)에 ‘총선 D-0일’ 등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창간 30주년’, ‘2021 새해 특집’, ‘선택 D-0일’ 등의 ‘면 머리띠’는 그 신문과 그 면을 돋보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그날 중앙지, 지방지 신문을 들고 편집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각 데스크들이 취재계획을 보고를 한 뒤 가져온 신문을 펼쳐 보이며 “우리 신문도 총선관련 면 머리띠를 넣으면 좋겠다”고 건의했습니다.
편집국장님이 편집부에 지시하면 될 일입니다. 편집국장님에게 건의를 해도 안 되니 편집회의에서 건의하면 반영 될 것으로 생각해서 편집회의 시간에 건의했던 것입니다.
“우리 신문도 총선관련 면 머리띠를 넣으면 좋겠다”는 저의 건의에 000이 느닷없이 “본인이나 잘하라”고 핀잔을 줬습니다.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000을 구박하거나 괴롭힌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000이 부국장에게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뭐가 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전에 3명이 하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00판에 눈길이 가는 기사를 만들어 넣기 위해 ‘종합’ 기사를 만들어 넣었습니다. 점심은 늘 오후 3시30분이 넘어야 먹었습니다.
000은 “지방 기사 중 1건도 기획취재부나 사람들 면에 넘어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건 그렇다 해도 선배와 후배가 전도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지방부에서 기사를 넘기지 않으면 어떻게 지금까지 신문을 만들었겠는냐”고 물었습니다.
NS5(기자입력기)에 확인해 보라고 했습니다.
편집국장을 봐라보며 사실대로 이야기 해 줄 것을 바랐지만 아무 말 없이 편집회의를 끝내 버렸습니다.
조직 기강이 무너졌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욕할 가치도 느끼지 못해 그냥 둬었습니다. 자기도 눈이 있으면 NS5(기자입력기)를 열어 보던지, 아니면 그간의 신문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000의 ‘상관 모욕’은 이어졌습니다.
00신문 창간 30주년을 앞둔 6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편집국장님이 사장님의 지시라며 대구와 경북지역 단체장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다고 했습니다. 기사는 000이 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는 설문지를 우리 경북지역 기자들을 통해 시장과 군수들에게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대구면을 맡고 있는 000에게는 설문지를 우리 대구지역 기자들을 통해 단체장들에게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설문지의 회신처는 기사를 작성할 000의 메일로 적혀 있었습니다.
당연히 시장군수들이 000에게 설문지를 회신하거나, 우리 기자들이 시장군수들의 응답 설문지를 받아 000 메일로 보내면 000이 금요일과 토요일 집에서 작성하겠구나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금요일에 앞서 목요일 000이 ‘카톡’이나 ‘회사메일’ 등으로 받아서 이틀 뒤 일요일에 취합해 달라고 제게 요구했습니다. 한 장도 빠지면 기사를 못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뒤 000 차장이 맡고 있는 대구지역 단체장들의 설문 회신지까지 받아 취합해 일요일에 달라고 했습니다. 참 기각 막혔습니다. 속에서 ‘욱’하고 올라왔지만 참고 “알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일요일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회사 FAX나 카톡으로 들어온 23개 시장군수 회신지와 대구지역 단체장들의 회신지를 챙겨 000 책상에 두었습니다.
늦게 출근한 편집국장님이 많이 도와 주셨습니다.
000이 아주 고마워 할 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후 늦게 출근한 000이 상주 기자가 보내온 설문지와 상주시장 비서실에서 보내온 설문지 내용이 다르다며 화를 내면서 설문지를 찢어버렸습니다.
‘욱’하는 것이 올라왔지만 참았습니다.
다음날(월)이 됐습니다.
000이 경북부가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 일인데 왜 자신이 경북대구 단체장 설문기사를 써야 하느냐고 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제가 “이 세끼야”하며 몇 차례 “이 세끼야”라고 했습니다.
이어 제가 “사장님이 지시하면 네가 책임지고 취재해서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00이가 포항시에 출입하지만 시 관련 공사나 차량단속 등 취재를 00이나 00에게 시키면 00이나 00이가 책임지고 취재를 해서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제보고 기사를 쓰라고 했습니다.
저는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데 말입니다. 오후 3시30분 넘어 식사를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3명이 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편집국장과 000 부국장이 말렸습니다.
하도 화가 나서 000이를 밀쳤습니다.
000이는 제게 “왜 사장님이 나에게 (기사 작성을) 시켰겠느냐”고 했습니다.
참 가관이었습니다.
제가 “사장님이 포항시 출입기자를 두고 포항지역 기사를 후배들에게 시키면 포항시청 출입기자인 00이가 무능해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경북지역 단체장과 대구지역 단체장 취합 관련 기사는 정치부에서 작성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단체장들은 선거로 뽑고 있습니다.
하여튼 안하무인격이었습니다.
편집국장이 000이가 밖으로 나가자 000이가 시비를 걸기 위해 그랬다고 했습니다.
000이의의 상관 폭행과 관련 지난 13일(일) 낮 12시께 편집국장이 편집국장실로 저를 불렀습니다.
편집국장이 10일 발생한 이야기를 아이들을 통해 다 들었다고 했습니다.
제 이야기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당시 생각나는 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000이(옛날 같으면 나이로 봐도)가 아버지뻘에게…라며 혀를 찼습니다.
편집국장은 제보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했습니다.
000이 그런 아이한테 사과 받아 뭐하겠느냐. 그냥 두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000이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문덕 자신이 회개하면 될 것 아니냐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쨌건 다시는 욕을 하지 말아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기자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라도 ‘이 세끼’하며 욕을 해서야 되겠느냐는 마음이 들어 회개했습니다.
편집국장님은 000이의 부당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셨고, “000이는 처벌을 받아야 하고, 저도 시말서는 써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위의 일이 벌써 10년이 더 지났네요.
다음은 언론인홀리클럽이 출범과 관련 간증입니다.
한 회원의 언론인홀리클럽 태동과 관련 간증0...2002년 5월23일 한 일간 신문사 사회부장으로 있을 당시 포항시청기자실에서 함께 시청을 출입하던 국민일보 김상조 기사님(전 경북일보 편집국장직대)의 권유로 김 기자님과 함께 제일교회(현 소망교회 자리)에서 열리는 포항목회자홀리클럽 창립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0...그해 경북케이블방송사(現 현대HCN 경북방송)의 최대억 기자와 6개월간 ‘뉴스인 뉴스’를 진행해 왔으며, 그 프로에 홀리클럽 내용을 18분간에 걸쳐 내보낸 후 방송에 대한 열정을 잃고 방송출연을 중단했다.
하나님이 이 프로그램을 위해 6개월간 경북케이블방송에 출연하게 하신 것으로 믿고 있다.
0...언론인홀리클럽 출범 해인 2003년 봄 경북기독신문 사장님, 총무국장님과 함께 한동대 총장실에서 고 김영길 총장님을 인터뷰 한 적이 있었다.
소속 회사는 달랐지만, 경북기독신문을 돕고 있었다.이 자리에서 김 총장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비전을 들을 수 있었다.
배운길 경북기독신문 사장님으로부터 언론인홀리클럽의 필요성도 흘러가는 소리로 들을 수 있었다.
광야대학 한동대가 걸어 온 길을 '자치면'에 보도했다.
한동대는 말 그대로 광야대학이었다. 하나님의 대학이었다. 고난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대학이었다.지방자치부장으로서 시의회를 출입하던 중 갑자기 문화부로 발령받아 문화부장을 맡게 됐다.
0...그해 5~6월 배운길 사장님의 권유로 배사장님과 함께 선린병원 원장실을 찾아 이건오 원장님으로부터 지구촌 홀리클럽의 역사와 포항 기관장홀리클럽의 창립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찾아다니며 회원들을 가입시킨 이 원장님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고, 언론인홀리클럽 창립의 필요성도 느낄 수 있었다.
0...7월 말 양산 감림산기도원에서 전광훈 목사(청교도영성훈련원장)님 인도로 열리는 집회에 손상수 목사(산호교회)님의 권유로 참석할 수 있었다.
문화부로 자리를 옮겨 시간이 났던 시기였다.
그 집회기간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지만, 기도원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후 8시가 넘어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고, 새벽 1~3시 사이 집으로 돌아왔다.마지막 집회 하루를 앞둔 4일째 되던 날 집회였다.
성전 2층에서 찬양을 하다 기도를 하던 중 갑자기 어둠을 물리치며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었다.
너무나 기이했다. 태어나서 처음 본 환상이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다시 보여 달라고 했고, 곧이어 더 강렬하게 떠오르는 태양(지평선의 반쯤)을 볼 수 있었다.
어둠을 물리치며 떠오르는 태양이. 그 빛(햇살)이 너무나 좋았다.
당시 벅찬 감격은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다.
그날 밤 2시간여의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포항에 도착 했지만, 벅찬 감격과 기쁨을 이기지 못해 귀가하지 않고 출석하던 교회 강대상 앞으로 나아가 오랫동안 찬양하며 기도하다 귀가했다.
그 태양은 2010년 말 ‘쑥’ ‘쑥’ ‘쑥’ 3단계로 하늘 한가운데로 떠오름을 볼 수 있었다.
그 태양은 살아 있었다. 안개와 구름이 물러갔다.
그간 방해세력들로 인해 잘못 알려진 언론인홀리클럽에 대한 오해들이 다 풀어지겠다는 마음과 언론인홀리클럽이 꽃을 피우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후 그간 방해 세력으로 인해 잘못 알려진 언론인홀리클럽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바로 알려지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0...다음 달인 2003년 8월초 대도교회(부흥회)에서, 기쁨의교회(포항성시화운동본부 주관 8.15구국기도회), 팔복기도회(부흥회)에서 전광훈 목사님 초청 집회가 이어졌다.
이 모든 내용들을 상세히 보도할 수 있었다.
특히 '오순절 역사 재현되나'란 제목의 예고 기사가 보도된 첫째 날 대도교회 집회에서 강단 앞으로 나와 춤을 추며 찬양하는 연로하신 목사님, 연로하신 장로님들의 모습을 볼 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이 밀려왔다.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흘러내렸다.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려 보기는 처음이었다.
0...전광훈 목사님의 집회를 돕고 있는 한 여 집사님(의사 부인, 강력한 예언의 은사가 있음)의 간증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집사님은 서울서 이 집회를 위해 기도 중 환상을 보는데 바다가 있고 포항으로 생각되는 곳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지역을 다 태우더라고 했다.
그는 ‘포항의 복음화가 이뤄지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그곳에 10명이 있었고, 몸 뒤로 자를 감추고 있는 사람에게 “소녀도 참여시켜 달라고 했으나 거절 하더라”고 했다.
그는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나중에 자를 감추고 있는 사람은 굳어져 동상이 되더라고 했다.
이 집사님은 간증 후 모든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안수기도 하는 시간에 교회 뒤 좌석 쪽에 있던 나에게 오더니 전광훈 목사님을 향해 (환상에서 본 사람) “목사님 찾았어요”라고 외쳤고, 한참 나의 기도소리를 듣던 중 ‘소녀도 참여시켜 달라’고 했다.(그는 언론인이 아닌데...)
그때 포항성시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던 중이었다.
0...포항성시화운동본부(회장 김광웅) 주최로 북부교회(現 기쁨의교회)에서 전광훈 목사님 초청 8.15 구국기도회(광복절 기념 예배, 15일 오후 7시30분부터)를 드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언론인홀리클럽을 결성하자고 배운길 경북기독신문사장님께 전화를 했고, 배 사장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좋다”고 했다.
신기하다는 마음이 들었다.8월15일 오후 7시 북부교회 선교복지관 예사랑(커피숍)에서 발기인대회를 열기로 했다.
발기인대회에는 10명이 참석했다. 많이 놀랐고 설렜다.
전광훈 목사님과 함께 사역하는 의사 부인이 본 ‘환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0...그로부터 언론인홀리클럽 창립일까지(15일간) 16차례의 준비위모임이 열렸다.
모임은 새벽 시간 포항 중앙교회교회 인근 식당에서 열렸다.
회칙을 만들고, 창립일 예배 식순을 짜고...故 배호경 목사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회원들은 대부분 전화로 언론인홀리클럽 가입을 약속받았으나, 일부 방송사는 방문을 통해 가입을 약속받았다.특이했던 일은 한 언론사 방문에 앞서 전날 밤 아주 귀하게 느껴진 백사(몸 속까지 투명함)와 뱀을 잡아 병속에 넣어 마개를 막았고 신기할 정도로 그 백사와 뱀은 저항하지 않고 순중하는 모습을 꿈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날 한 언론사를 방문했을 때 아주 귀한 한 분과 또 한 분이 가입함을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미리 예비해 두고 있었다.
0...그로부터 보름만인 2003년 9월1일 언론인홀리클럽이 출범하던 날 밤, 꿈을 통해 기이한 두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무리를 시내산(6개월 후 우연히 CTS 기독교TV방송을 보다 그 산이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던 곳의 시내산임을 알고 심장이 멎는 듯했다.)으로 인도하는 두 장면이었다.
나 혼자만 살기로 했을 때, 이방인과 선교사 등 4명이 사는 장면과 목숨 걸고 사탄과 맞설 대적할 때 그 무리들이 모두 사는(구원)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영적전투는 힘겨웠으며, 사탄의 방해는 집요했다.
이후 수많은 장면들이 하루 후, 3일 후, 한 달 후, 6개월 후, 1년 후 ,3년 후, 7년 후 등 그대로 됨을 볼 수 있었다. 예수님 재림도 볼 수 있었다.
방언도 선물로 받았다.
반면 상상을 초월하는 방해와 핍박이 있었다.
여러 차례 생명을 위협받는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 없이는 살수 없다.
이 회원님은 이 시대 언론을 통한 복음전파가 어쩜, 가장 효과적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급하신 모양이라고 했다.
그간 상상을 초월한 방해와 핍박이 이어졌지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 핍박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길은 십자가의 길이라고 했다.
이 길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의미 있고, 가장 복되다고 했다.
이 길은 생명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했다.
이 회원님은 행여 ‘자랑하기 위해 간증하나’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또 이 간증으로 어떤 핍박을 받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 자랑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고 했다.
오직 하나님 영광 받으시길 원할 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