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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속한의학원론』 |
조헌영은 한의학자이자 민족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의병장을 지냈던 조부와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익히고 대구로 나와 고등보통학교에 다닌 뒤 일본 早稻田大學 영문과에 진학하였다. 그는 유학시절 재일본 동경 조선유학생 학우회장을 지냈으며, 1927년 新幹會 동경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항일민족운동을 펼쳤고, 귀국한 뒤에도 1929년에 신간회 상무위원을 맡는 등 민족운동을 계속해 나아갔다.
그러나 1931년 신간회가 강제 해산된 뒤에는 한의학 연구에 몰두하여 스스로 東洋醫藥社란 출판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학술잡지 『동양의약』지를 발행하였다. 이 때문에 한의학술 연구와 신지식의 교류와 보급, 활발한 저술 활동으로 근대 한의학을 개척하여 한국한의학의 기초를 수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또 1935년 조선어표준말 사정위원회 위원, 조선어 큰사전 편찬전문위원으로 활약하였는데, 훗날 『조선말큰사전』에 한의학용어와 약초 이름이 대거 표제어로 선정된 것도 그의 역할이 컸던 것이 아닌가 싶다. 1945년에는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 사무차장 등을 역임하는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가 다른 무엇보다도 근대 한의학 재건에 가장 크게 기여한 점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1948년 제헌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한의사제도의 수립에 결정적인 공로를 남긴 것이다. 그는 또 제헌의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강력히 추진하였고, 이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약하여 강한 민족주의적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는 주로 한의학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평양의과대학 동의학부 교수를 역임하면서, 한의사 양성사업과 함께 『동의처방학』, 『동의학용어사전』등을 편찬하였다. 또 다른 한편 『의방류취』, 『향약집성방』,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역대 한의고전명저를 차례로 번역하여 출판하는 등 한의고전연구 분야에서도 방대한 연구업적과 학술성과를 쌓았다.
또한 그는 북한에서도 1956년 7월 재북 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을 맡았고, 1980년 7월에는 서기장으로서 활동하다가 1988년 5월 23일 평양에서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그가 펼친 북한에서의 한의학연구는 제자인 동의학연구소 김동일 교수 등에 의해 지속되었다.
특히 그는 일제강점기에 이미 한의학 연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바 있는데, 1930년대 『新東亞』에 한의학술논문을 연재함으로써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과 아울러 우리 민족의 전통의학을 멸시하고 박해하는 책동에 반발하여 한의학의 독자성과 우월성, 나아가 고유의 생명력을 논증하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근대 한의학 개척자로서의 선구자적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문 한의학저술로는 이 책 『통속한의학원론』을 필두로 『民衆醫術理療法』,『肺病漢方治療法』,『神經衰弱症治療法』,『胃腸病治療法』,『婦人病治療法』,『小兒病治療法』등을 남겼다. 뒤쪽 한방치료법시리즈 5종은 훗날 『東洋醫學叢書五種』이라는 서명으로 통합하여 출판되었다. 이 저술들은 일제강점기 목표의식을 상실한 채 표류하던 의인들에게 민족의학 수호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다시 되새겨보는 通俗醫學의 의미. 通俗漢醫學原論
조헌영 의학론의 중심 테마 가운데 하나는 역시 '동서의학비교론'이라 할 수 있다. 1934년에 간행한 이 책 『통속한의학원론』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화제도 역시 동서의학 비교 혹은 절충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새로운 의학을 지향했던 그의 생각들이 두루 열거되어 있다.
서두에는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상대적 특징으로 종합의료와 국소처치 의술, 자연요법과 인공치료, 現象醫學과 組織醫學, 靜體醫學과 動體醫學, 治本醫學과 治標醫學, 養生醫術과 防禦醫術, 내과의학과 외과의학, 평민의술과 귀족의술, 民用醫術과 官用醫術로 대별해 놓았다.
그의 이러한 논의는 오늘날에 이르러서 다소 분명하게 대비되지 않는 점도 있다하겠지만 이러한 논의과정을 통해 서양의학의 장점은 취하고 한의학의 우수성을 부각하여, 후손에 계승시키기 위한 충정만은 높이 살만 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관점은 서구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그의 저작 『물질문명은 어디로』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114회 선구자의 눈으로 바라본 동서문명 비판 - 『물질문명은 어데로』, 2002년6월17일자)
◇ 『통속한의학원론』 |
일제강점기에 한의학의 명맥을 잇고자 각종 학술활동을 전개한 조헌영(趙憲泳, 1900~1988)은 한국 한의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사법부 영문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1936년 인사동에 日月書房이란 출판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한의학인물로서 그의 비범함은 청강 金永勳(1882~1974)이 생전에 쓰던 처방을 모아 편집한 遺著이자 의론집인 『晴崗醫鑑』에 실려 있는 김영훈의 회고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30대의 이 청년은 동의학에 대하여 매우 조예가 깊었고, 특히 그의 설명하는 논리가 매우 현대적이어서 선생(김영훈)으로서도 단번에 귀가 트일 정도로 감명이 되었다. 그의 음양론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라든지 동의치료방법의 과학적 설명이라든지 하나도 나무랄 데가 없는 확고한 주관과 이지력을 갖고 있었다. 우리 동의계에 이처럼 보배스런 인물은 일찍이 만나 본 일이 없었다. 선생은 홀딱 반할 정도로 친숙해졌고,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하면 밤이 새는 줄 모르도록 쾌재를 불렀다."
그는 특히 1930년대 조선일보를 통해 벌어진 지상 논쟁의 중심에서 한의학의 부흥을 역설하기도 했다. 당시 양의사인 張基茂, 鄭槿陽, 약사 李乙浩 등이 제기한 한의학에 대한 견해들을 내용에 따라 찬동을 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면서 한의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유도해내었다. 이 논쟁은 1947년 『한의학의 비판과 해설』이란 제목으로 한데 모아 출간되었으며, 당시 의료계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김남일은 『근현대 한의학 인물실록』(2011)에서 조헌영을 ‘통속한의학의 확산을 위해 노력한 학자’로 소개하면서 그의 학문세계를 '통속한의학'이란 단어로 집약된다고 하였다. 나아가, '통속한의학'이란 "대중 의료에 가장 공헌이 많고 위대한 공효가 있는 한의학이 날로 쇠퇴해가는 것이 애석하고 우려되어 그 부흥에 미력을 보태고자 만든 신조어이다. 1936년 4월 18일에 동서의학연구회 주최, 동아일보 후원으로 조헌영이 김영훈, 신길구 등과 함께 강사로 나서서 通俗漢醫學講演會를 연 것도 '통속한의학'의 확산을 위한 노력의 하나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한의학이 정규의료체제로 굳건히 자리 잡은 오늘날에 이르러 ‘통속한의학’이란 용어는 자칫 민간요법이나 비정규 의료의 표상으로 여겨질 우려가 있다. 한의가 의료인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시기, 값싼 자가 처치법의 수단으로 대중적인 지지를 끌어내는데 호소력이 있었지만 첨단기술이 접목된 오늘날 현대의료의 현장에서는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관치의료인 양의학에 대립하여 통속한의학이란 기치 아래 한의학의 명맥을 되살리려했던 선구자의 노력은 분명 높이 살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