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후 1948년 9월 1일에 남원 지리산 골짜기 ‘서리내’에서 몇 사람을 모아 성경을 가르친 것이 최초 “한국 기독교 토착 신앙공동체”운동을 시작한 시발점이었다. 몇 달 후 서울의 Y총무인 현동완선생이 보내준 기금으로 정인세와 함께 광주에서 동광원(이현필은 歸一園이라 함)을 세워 고아원 운영에 적극 지원을 하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고아들의 숫자는 순식간 600명으로 불어났다.
동광원은 한마디로 “한국 기독교 수도원”이었는데 순결(철저한 남녀유별), 노동, 수도, 선행, 정직, 성실, 책임, 희생의 정신을 실천해 나갔다. 효소법을 개량한 농사를 시작했고, 모든 공동체 멤버는 직접 노동을 하여 자급자족했으며, 최소한 양만 먹고 최대한 남긴 농산물을 팔아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다. 노동을 중요하게 여기며, 근검절약하고 사치를 피하고 현대문명을 거부하는 점에서는 재침례파(Anabaptist, 미국 오하이오주와 펜실베니아주를 비롯한 10여개 주에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살고 있음)인 아미쉬(Amish) 공동체와 통하는 점이 있다. 김용기장로의 가나안농군학교가 일종의 농촌계몽운동이라면, 동광원은 순수한 신앙운동이었다.
현재 동광원은 남원에 그 본부를 두고 있으며, 여러 곳에 분원이 있다. 화학산 기슭 도암의 ‘청소골짜기’(정규수 수녀, 1948년 10월, 고아원운동 발상지; 고아와 머슴출신 한영우집사는 1953년에 들어와 동광원 수녀들의 농사일을 돕고 있다), 중촌(中村)의 화순(6‧25때 피신처, 김춘일 수녀가 1953년에 들어와 현재 ‘큰 언니’역할을 하고 있다), 도구밖골(도구봉) 가마터, 문바위, 이세종 선생의 유적지와 무덤, 각시바위, 소반바위, 바람재, 전남 함평, 진도, 경기도 벽제 계명산(수녀의 마을), 무등산 등지에 있다. 광주 동광원은 5‧16직후 정부에 의해 폐쇄 조치되었다가 1965년에 다시 귀일원(초대 원장=정인세 1909~1991, 초대 총무 및 2대 원장=김은연 1920~1991)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재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선생은 주로 암굴에서 수도를 했고, 손수 움막을 지어 기거했으며, 깨끗한 동정(童貞)생활을 실천했다. 부인 황홍윤은 광주에서 목회하던 백영흠 목사의 처제인데 결혼 직후부터 이선생은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거절했고, 거지와 고아들을 끌고 다니면서 집안살림을 돌보지 않자 한때는 ‘칼을 품속에 숨기고’ 다니며 살해할 기회를 노릴 정도로 남편을 미워하였다고 한다. 한 때 다른 집으로 개가하였지만 노년에 병이 들어 도장리로 돌아와 회개하고, 정월례집에서 3년간 기도하며 살다가 1998년 83세로 소천하여 이세종 부인 ‘한골 어머니’의 묘 옆에 묻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