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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선생님의 젊은 날의 투쟁에서 배운다
사제에 살아라!
불멸의 정예10만 결집! ③-3
△불법은 승부이니 ‘상승북’이여, 울려 퍼져라!(1990년, 오사카)
청년부가 지부의 선두로 서라!
<지바지부>
일본의 기둥
11월 1일 지바현 체육관에서 지바지부가 결성대회를 열었다.
1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6시 15분, 남녀 부대기와 지부기가 입장했다. “니치렌 대성인이 탄생하신 땅에 지부가 탄생했습니다.”라는 사회자의 첫 마디로 대회를 시작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등단한 이케다 회장은 역설했다.
“니치렌 대성인은 니치렌을 없애려는 것은 일본의 기둥을 쓰러뜨리려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학회를 비판하고 괴롭히면 일본의 기둥을 쓰러뜨리는 꼴입니다.”
‘지바시에 처음으로 지부가 생겼다. 그러나 아직 하나뿐이다. 제2, 제3의 지부를 결성할 수 있는 지바로 만들고 싶다.’
회장은 그러한 소망을 담아 대회 전후에 짬짬이 청년을 격려했다.
당시 이야기 - 히라쿠리 세쓰코
부대장이었던 저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여자부원을 결집하려고 전력으로 뛰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케다 선생님과 만나게 하는 것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통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에게로 오세요!”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저는 선생님의 지도를 구했습니다. 본부에서 있었던 질문회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각오를 하고 저희 집의 고민을 이야기 했습니다. 언니가 2명의 어린아이를 떠안은 채 이혼하고, 일을 하러간 언니대신 어머니가 육아를 하고 있는 나날이었습니다.
사정을 들어 주신 선생님께서는 “언니는 어본존을 수지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으셨기에 “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몸속까지 스며들 듯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본존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학회에서 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학회에서 멀어지지 않으면 반드시 행복해지니까요.”
선생님의 지도대로 그 후 언니는 재혼하여 ‘일가회락’의 가정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저에게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인생에서 생사(生死)라는 문제는 가장 큰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회합에 참석하면 생명이 ‘생(生)’의 방향으로 갑니다.
반대로 불법의 세계에서 멀어지면 생명이 ‘사(死)’의 방향으로 갑니다.
그러므로 회합에 참석하면 생명은 이미 승리하는 쪽으로, 성장하는 쪽으로, 희망이 있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저는 지부 결성식의 결과를 위해 달렸습니다. 당일 여자부는 생각지 못한 대결집이 되었습니다. 회장(會場)에 도착한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에게 말을 건네셨습니다.
“여자부, 분발했군요. 앞으로도 부탁합니다”라고. 선생님의 한 마디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당신이 솔선하여 움직이면 된다”
<마에바시 지부>
나와 함께
마에바시 지부의 결성대회는 11월 4일 오후 6시 전, 마에바시시(市) 군마회관에서 개최되었다. 회장(會場)에는 600면의 멤버가 달려왔다.
이 날 군마에 처음으로 지부기와 함께 남자 제114부대, 여자 제114부대의 부대기가 나부꼈다.
당시 이야기 - 오오츠카 야스에
마에바시 지부는 마에바시, 이세사키, 시부카와, 누마타, 도미오카, 후지오카 등지에 흩어진 학회원이 한자리에 모여 결성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여자부 부대장에 임명된 저는 부대 전체를 장악하는 일이 불안했습니다. 결성식이 끝난 후 선생님에게 그 불안한 심정을 털어놓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여자부는 밝은 웃음을 띠며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이좋게 단결해서 분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힘들다는 것은 잘 알지만 먼저 당신이 솔선해서 활동하려고 노력하세요. 상식 있게 시간을 엄수하고 무사고로 투쟁해야 합니다.”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돌아가려는 참에 선생님이 “오늘 늦은 시간까지 수고했습니다. 배고프지요? 이거 드세요.” 하며 경단을 주셨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또 이렇게 격려하셨지요.
“따로따로 흩어져 있던 경단도 꼬챙이로 꿰면 가지런히 하나로 모입니다. 당신 자신이 명랑하게 분발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모두 모여듭니다. 그 속에서 힘이 나옵니다. 단결의 기본은 책략이나 방법이 아니라 신심을 근본으로 한 투쟁입니다.”
저는 용기가 솟구쳤습니다. 우리는 그 지도를 부대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당시 이야기 - 마츠모토 쓰루하루
결성 대회 며칠 후 선생님께서 숙박하신 여관으로 인사를 하러갔던 때의 일입니다. 그곳의 안주인이 매우 감격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창가학회의 회장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매우 높으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통은 그러한 입장에 있는 분과 저회들은 친숙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케다 회장님은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이쪽이 황송할 정도로 실로 정중한 인사를 받았습니다.
종업원 한 사람 한사람에게도 ‘신세지겠습니다.’라고 말을 건네셨습니다. 그와 같은 손님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라고 하며 회원 분들이 따르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라고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만난 사람 모두를 감싸 안아가는 선생님의 위대함에 다시금 감동했습니다. 그 후 상경했을 때 선생님께서는 저의 생활에 대한 것까지 여러 가지 질문하셨습니다.
급료에 대한 것도 물어보시어, 적은 금액이었기 대문에 주위 간부에게서 웃음소리가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의연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뭐가 우스운 것입니까. 필사로 생활비를 융통하여 지방에서 회합을 위해 달려와 주고 지도를 구하며 온 청년입니다. 최대한으로 칭찬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 동지애이지 않습니까”라고. 선생님의 그 깊은 자애에 눈물이 났습니다.
‘성실’에 이길 것 없다
<누마즈 지부>
신심의 구극
누마즈지부 결성대회는 11월 7일 오후 6시부터 누마즈시 산업회관(당시)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멤버 3000명이 모였다.
누마즈 지부는 누마즈, 후지노미야. 아타미, 이즈 등 16지구 1만4000세대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자 제116부대, 여자 제116부대도 탄생했다.
이 자리에서 이케다 회장은 <개목초>를 배독하며 이렇게 말했다.
“대성인은 반드시 삼장사마가 있다고 아침저녁으로 가르쳤지만 ‘어리석은 자의 버릇’으로 ‘필요한 때’에는 잊어버리기 때문에 부처가 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때’ 즉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 비로소 커다란 복운을 쌓을 수 있는, 숙명을 전환할 수 있는 경사스러운 때라는 확신을 품고 신심을 관철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신심의 궁극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점을 가슴에 새기세요.”
당시 이야기 - 고노 가쓰유키
누마즈 지부의 결성대회 때, 저는 회장입구에서 담당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대의 차가 근처에 멈추고 회장(會場)을 향해 시원스럽게 걸어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처음으로 보는 이케다 선생님이었습니다.
회장 입구에서 선생님께서는 불과 20살이 될까 말까한 저에게 머리를 숙이시고 가슴에 스며드는 듯한 목소리로 “고생 많습니다”라고 말을 건네셨습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성실하고 늠름한 사람일까!’ 감동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당시 이야기 - 스기타 카츠야
저는 이 때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몇 번이나 “이케다 선생님이라는 분은 정말로 굉장한 분이야”라고 들은 적이 있어 흥미진진하게 회합에 참석했습니다.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정말이었습니다. 시원스러운 행동, 늠름한 태도, 당당한 모습,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말을 건네는 성실함. 저는 한 번에 선생님에게 매료되어 선생님의 세계에 흡수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회합이 끝나자마자 선생님께서는 곧장 회장바깥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선생님을 구도하며 많은 학회원들이 안에 들어오지 못한 채 회장 바깥에서 서있었던 것입니다. 매우 추운 날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분들에게도 말을 건네셨습니다. “추운 속에 여러분 정말로 고생 많습니다.” 성실 그 자체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게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한번 신심에 일어섰다면
아수라와 같이 학회를 지킨다
<고후 지부>
투쟁은 스피드
11월 9일 오후 5시 40분, 고후지부 결성대회가 막을 열었다. 11월 치고는 봄 날씨 같았던 날 도쿄를 비롯한 48지부에 소속된 전 현하(縣下)의 동지가 회장인 야마나시 현민 회관에 모였다.
또 이날 대성인 유연의 땅에 청년부의 부대기가 나부꼈다. 남자 제115부대, 여자 제115부대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이야기 - 미야자키 마쓰에
저는 여자부 구장으로서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세이쿄 신문의 통신원이기도 했던 저는 결성대회 날, 선생님의 뒤를 좇아 취재를 위해 뛰었습니다.
놀란 것은 선생님의 빠른 걸음 걸이었습니다. 역에 도착하시어 개회까지 현지의 격려를 위해 들리셨습니다. 그곳에서 회장(會場)까지의 길은 시내 번화가였습니다. 그 속을 선생님께서는 선두에 서서 나는 것 같은 빠른 속도로 시원스럽게 걸으셨습니다.
“광선유포의 투쟁은 스피드가 중요합니다. 때를 놓치면 패배입니다”라고 선생님께서는 지도하셨습니다만 선생님의 기백, 스피드를 직접 보고 투쟁의 방식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야기 - 아키야마 아이코
여자부 반장이었던 저는 동생과 함께 담당원이었습니다. 회합이 시작하기 전 분주한 속에서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식사 중에도 보고를 들으시고 잇따라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처음으로 선생님과 만난 저는 그 굉장한 기세에 압도당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시고 재빨리 회장으로 향하셨습니다.
비가 한번 지나간 후의 상쾌한 바람이 부는 듯한 감동을 선생님께서 식사하시는 속에 느꼈습니다. 동시에 느긋하게 식사를 할 틈도 없는 다망한 모습을 보고 회장으로서 전책임을 짊어진 선생님의 심로(心勞)에 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국(一國) 일성(一城)의 왕
결성 대회에 대한 것이 ‘수필 신·인간혁명’에 적혀 있다
“우리 야마나시가 눈물에 젖으면서 일어나 광포의 정의가 빛나는 지부기를 향토의 하늘높이 올린 것은 나의 회장취임으로부터 반년 후의 일이다.
나는 그 결성 대회에 참석했다. ‘광포는 고후부터!’
야마나시 현민 회관을 꽉 채우고 희망의 여행을 기쁘게 맞이하는 고후 지부 4000명의, 연대의 동지의 의기는 드높았다.”
당시 이야기 - 미즈이시 하루미쓰
결성 대회에서 저는 학회가 지휘를 했습니다.
남자부 간부로부터 몇 시간에 걸친 지휘 훈련을 받아 휘청휘청했습니다만 열중하여 분발했습니다. 땀 두성이가 된 저에게 선생님께서 크게 박수를 보내 주셨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농업을 하고 있던 저는 농업의 미래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젊은이가 떠나버린 농업’이라니 좋지 않은 표현이군요. 본래 농업은 나라를 뒷받침하고 생명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현실에서는 힘든 일이겠지만 긍지를 갖고 분발해 주세요. 아무튼 밭을 경작하고 작물을 키우는 것은 일국(一國) 일성(一城)이 왕(王)과 같은 것입니다. ‘진흙투성이의 왕’입니다. 훌륭하지 않습니까.”라고.
그것이 저의 기둥이 되어 인생승리의 원점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그릇
연단에 선 이케다 회장은 이런 말을 꺼냈다.
“나는 몹시 부끄러움을 잘 타고 좋은 사람이지만, 일단 사악을 대하거나 신심과 학회정신에 서면 아수라왕과 같이 학회원을 지키고 지휘를 한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말해두겠습니다.……”
확신에 찬 늠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성대회 종료 후 지구 간부 이상 멤버가 ‘예비실’에 모였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간담의 장을 가지자고 이케다 회장이 초대한 것이었다.
“자, 질문희를 합시다”라고 회장이 먼저 말을 꺼내고 스스로 사회자가 되어 질문회를 시작했다.
당시 이야기 - 구보타 키요코
부대장의 임명을 받은 저는 여자부 구장들에게 “선생님께 지도를 받읍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두 진검으로 기원하고 투쟁하여 모였기 때문에 생기발랄했습니다. 두 명의 구장이 곧장 손을 들었습니다.
결성대회에서 체험담을 발표한 구장이 지명되었습니다. 그녀는 아직 감격이 가라앉지 않은 모습으로 굉장한 기세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씀하시면서 질문을 받아 주셨습니다.
“부대의 주축이 되어 최선을 다하고 싶지만 제 그릇이 작아서 고민입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지도하셨지요.
“그렇게 서두른다고 금세 크게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그릇은 경애입니다. 자기 단점을 고민하고 하나하나 극복해서 하루하루 자신을 성장시키는 투쟁 속에서 차츰 경애가 열려 그릇이 큰 인간이 되는 법입니다. 나와 함께 광선유포를 위해 분발합시다!”
다음 날 아침, 저는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 나가노로 향하시는 선생님을 고후역으로 배웅하러 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곳에서도 저에게 말을 건네시며 가정에 대한 것을 물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었습니다.
“당신이 일가를 지키고 있군요. 그것으로 됐습니다. 고생하는 것이 인재로서 성장하는 인(因)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한 마디 한마디 곱씹듯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의 양광(陽光) 넘치는 홈에서의 선생님의 격려를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이야기 - 나가타 모토코
당시 여자부 구장(區長)이던 저는 힘껏 투쟁해서 선생님을 맞이하고자 자전거로 결집하러 다녔고, 집에 돌아오면 밤마다 계속 축인근행을 했습니다.
제가 질문회에서 가장 먼저 손을 들었지만 다른 여자부원이 처음에 지명 받았습니다. 그 여자부원이 끝나자 선생님은 “다음은 아까 손 든 사람!”하며 저를 지명해주셨습니다.
당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도 병약하여 네 자매의 맏딸로 생활고 속에서 필사적으로 봉제업일과 학회활동에 매달렸습니다. 어머니는 딸인 제가 걱정되어 끊임없이 잔소리를 했습니다.
“기쁨에 넘쳐 집에 돌아가도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하면 환희가 사그라지고 맙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하고 선생님에게 생각을 털어놨습니다.
선생님은 제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어주셨지요.
“당신이 침울해지면 안 됩니다. 어머니에게 이해를 받고 싶다면 당신 자신이 어머니가 기뻐하는 딸로 변해야 합니다. 평소 당신이 하는 행동 자체가 신심입니다.”라고 차근차근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따스한 진심은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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