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은 아니지만 짐을 정리하고 숙소를 나왔다.
우려했던 대로 비가 왔다. 우산이 한 개 뿐이라
비닐우산을 한 개 사서 선운사로 향했다.
그래도 토요일이라고 오가는 사람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는 정말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바람도 꽤 불고, 쌀쌀했다.
그래서인지 동백도 아직 잎사귀에 윤이 돌지않고 거무튀튀했다.
당연히 꽃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산문을 들어서자 아름드리 나무들이 주변에 가득한데, 어디서 익숙한 새소리가 주의를 끈다. 바로 휘파람새 소리다. 개인적으로 나는 꾀꼬리보다 휘파람새 소리를 더 좋아한다. 어린시절 아침에 등교할 때마다 들리던 새소리이건만 지금은 이런 인적 드문 산사에서나 들을 수 있다.
길 안쪽으로 부도전이 보이길래 좀 가까이 가서 보려니까 어치 두 마리가 겅중거리며 '넌, 뭐냐?'라고 시비를 걸듯 다가와 고갯짓을 하더니, 알록달록한 몸매를 과시하곤 사라져버렸다.
부도전은 오래된 것은 드물고 최근의 것들이 다수로 보였다. 그래도 좀 멀리서 보면 그럴듯하다.
우리가 어디 절에 한번 가면 꼭 공사 중이던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희한한 일이다.
어떤 젊은 총각?이 천왕문 앞에서 부터 절을 하고 들어가더니 곳곳마다 다니면서 거의 백팔배 수준이다.
전각 둘레로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는 동백나무는 거의 피지 않았다. 아직 시기가 아니다.
원래 동백꽃을 보러왔으나, 그래도 반쯤 물이 찬 물동이에 물 한 방울 떨어진 듯 울려퍼지는 휘파람새 노래를 들었으니 그것으로 만족이다.
선운사를 나와, 아침을 먹으러 갔다.
어젯밤 장어집 사장님이 알려준 한식뷔폐집인데,
거리가 상당하다. 한 10키로 될 것 같다.
심원초등학교 맞은 편 '보라네 감자탕'
원래 불길한 예감은 틀린적이 없으니, 이곳이 이번 여행에서 가성비 갑일 것 같다.
간판과 달리 감자탕을 하지 않고, 아침과 점심 한식뷔폐를 운영한다. 가격도 저렴하고, 먹다보면 새로운 반찬이 자꾸 추가된다.
맛도 좋고, 위생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사장님이 뭐 하나 지저분해지는 꼴을 못 본다.
아! 일요일은 휴무이니 만약 고창에 오실 분이 계시면 참고하시라.
팔천원에 행복을 맛보고 강진으로 출발했다.
심원초등학교도 교정에 큰 나무들이 많은 것을 보니, 유서깊은 지역 초등학교인 것 같다.
한 시간반 남짓 달려서 강진 성전면 월남사지에 도착했다. 이곳은 31년전 소대장을 하던 동네인데, 그 때는 월남사지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비가 오락가락하고 바람부는 토요일 오전, 아무도 없는 월남사지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비둘기 우는 소리에 댓잎을 가르는 바람소리 그리고 가끔 휘파람새가 대숲 사이에서 노래를 불렀다.
세월의 더께가 쌓인 석탑 옆에 새로지은 대웅전이 쌩뚱맞다.
멀리 월출산 봉우리를 바라보다 근처의 오설록 차밭으로 향했다. 보성의 대한다원이 사진 찍기는 좋지만, 이곳은 규모가 대한다원보다 훨씬 크다.
차는 아직 이파리가 암록색으로 새순이 나오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내가 군대생활할 때 이 차밭이 조성된 지 얼마 안되었었고, 규모도 작았었는데, 지금은 어마어마하다.
멀리서 나이든 아주머니들이 차밭 속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기 바쁘다.
잠시 바람을 느끼다가 근처 무위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위사는 잘 알려진 사찰이지만, 오늘 날씨가 춥기도 하고 비바람도 오락가락하다보니 인적이 드물었다.
난 사람이 없어서 좋았는데, 복작거리는 델 좋아하는 아내는 너무 한산하단다.
극락보전이 다행이 수리가 끝나, 못 볼뻔 했지만 볼 수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홍매화 한그루는 바람을 따라 향기를 흩뿌렸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팽나무 삼형제를 뒤로하고, 강진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벌써 오후 1시를 넘겼다.
강진만생태공원은 아마도 순천만생태공원을 벤치마킹한 듯 싶었다. 갈대밭이 볼만하지만 조류독감 때문에 출입을 금하고 있어 탐방로 안으로 들어가 볼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자전거 길을 따라서 한참을 걷다가 점심을 먹으려하니 2시 반이 넘었다.
내가 정한 식당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왔던 해태식당이다.
군대시절 동료와 둘이 갔다가, 4인 이상만 받는다고 하여 발걸음을 돌렸었는데, 지금은 2인 이상이면 문제가 없다.
아내는 인터넷 댓글을 보고 해태식당을 비판할 준비를 충분히 한 상태로 들어갔고, 난 어느정도 전라도식 한정식을 예상하고 있었다.
진한 젓갈 맛이 섞인 김치, 숙성된 육회, 삼합, 게장 등이 아내에 입맛에는 맞지 않았고, 싸그리 숙청되었다.
나는 이정도면 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아내에게는 아마도 보라네 한식뷔폐가 제일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원래 이번 여행은 백련사 동백숲이 목적지였다. 마침 동백축제와 겹쳐서, 혹시 꽃이 피있을까 싶었지만 양지바른 곳만 몇 송이 피었을 뿐이었다.
축제 때문에 백련사 진입로부터 차량 통제를 해서, 걸어올라갔다. 2년전엔 차로 갔기 때문에 기억이 없었을 뿐이지 걸어가니 오르막으로 한 30분이나 걸렸다.
백련사도 동백 대신에 홍매화가 아름다웠다.
여러 행사 부스를 잠시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차 한잔 하라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소주잔만한 잔으로 차 한잔을 주는데, 우롱차 맛이 났다. 아내에게 차 맛이 좋다고 했더니, 아내도 동의를 했다.
산책길을 따라 스님들이 만든 차밭까지 둘러본 다음, 차 부스로 가서 판매하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이 차가 마셔보니 우롱차 같던데, 맞나요?"
"아니요, 녹차인데 발효한 겁니다."
"..."
차를 구별할 때, 통상 발효되지 않을것을 녹차
반 발효차를 우롱차, 완전 발효차를 홍차라고 부른다.
이 아주머니가 강진군 명인이라지만, 아마 명칭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가격은 상당히 비싸지만 맛이 좋아서 기념으로 두 봉을 구입했다.
숙소까지 와보니 저녁 6시 정도가 되었다. 아내가 숙소 주인에게 근처 맛집을 물어봤더니 2군데를 추천해주었다. 잠시 쉬었다가 그 중에 숙소에서 가까운 '갑진갈비'라는 곳으로 향했다.
거기는 예약을 안하면 기다려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홀 안에 빈 자리도 있고, 손님도 그리 많지도 않은데, 눈치를 보아하니, 종업원들이 바쁜 채를 하고 있지만, 실제 일은 안하고 있었다.
한참을 가게 입구에 서 있는데, 안에서 아무 대응이 없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딴 곳으로 가자고 했다.
사장은 그제서야 미안하다고 했고, 다른 종업원이 놀이방에서 기다려달라는 말을 했다.
약 30분 기다려서 돼지갈비를 먹을 수 있었다.
서비스로 물회와, 북엇국을 주는데, 각각 초고추장과 참기름 맛이었다. 고기는 지나치게 달았다.
아내의 평점은 예외없이 박했다.
배가 불러서 잠시 읍내를 거닐었다.
보도에 동백 문양을 투사해주는데 상당히 볼만했다.
나온김에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작가 김영랑 생가까지 가봤다. 초가집 한 채를 지어놨고, 그 옆에 조그맣게 시문학파 조형물이 세워져있다.
어쩌면 우리 말고는 이날 이곳을 방문한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7시만 넘어도 온 읍내가 쥐죽은 듯이 조용하고, 가로등만이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당일에 2만 6천보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