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반전 / 조미숙
“내비 둬. 지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주말에 알바 하라고 해.” 아들의 말투가 퉁명스럽다. “그래도 어떻게 그러냐? 자식이 하고 싶다는데 도와줘야지.” “난 알바하고 동아리 활동하고 학교 공부하느라 너무 힘들어. 누나는 알바도 안 하고 놀잖아.” 아들의 하소연에 “미안하다. 부모가 가난해서.”라며 전화를 끊었다. 아들과 오랜만에 통화했는데 씁쓸한 마음만 남았다.
막내아들은 카카오 청년 전세대출을 받아 살고 있다. 하지만 이자가 계속 오르니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는 2.6퍼센트(%)라 관리금 포함 20만 원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벌써 3퍼센트로 올라 25만 원이 되었다. 둘째 방세까지 더하면 만만치 않는 돈이다. 내년 걱정을 하다 보니 얼마까지 오를지 모르는 대출금 이자도 무섭고 한푼이라도 절약하려면 원금을 더 줄여야겠다는 생각에 아들에게 전화한 것이다. 그동안 1.8퍼센트 이자를 준다는 광고에 시작했던 적금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자가 많이 올라 계속 넣는다는 게 의미가 없어 중단하고 다른 상품에 가입했다. 통장에 500만 원 정도 있는데 얼마 안 되지만 원금 상환을 하면 더 낫겠다 싶었다.
아들은 욕심 많은 작은딸에게 내심 불만이 많았다. 작은딸은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취업률이 높지 않은 과라 중간에 이중 전공을 선택했다. 그러더니 대기업에 취직하려면 아무래도 석사 학위가 필요하다며 대학원에 가겠다고 했다.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하는 애라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대신 우리 집 형편에 등록금은 대 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래서 에스케이하이닉스 장학금을 받으려고 시험을 봤는데 그만 떨어졌다.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아는 터라 많이 속상했다. 펑펑 울며 전화한 딸이 어떻게 하냐고 한다. 저도 집에 손 내밀기 힘들다는 건 알기에 그만둘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내년 1월부터 대학원 연구실로 출근해야 해서 주말 알바도 힘들다고 했다. 앞으로 2년 동안 방세와 생활비까지 다달이 큰돈이 들어가야 한다. 대학까지는 본인이 알바도 하고 장학금도 받고 해서 방세 외에는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없었다. 딸에게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긴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전화를 끊고 조금 있으니 카톡이 울린다. “엄마 그런 얘기 하지 마. 절대 미안한 거 없어. 나도 힘들어도 열심히 살고 있다는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그 돈은 가지고 있어.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 있잖아. 또 금방 작은누나 이사도 해야 하잖아. 변동 금리가 적용돼도 6개월에 한 번이니 더 기다려 봐.” 라는 문자다.
아들이 언제 이렇게 자랐나 싶다. 막내라서 마냥 철부지로 봤는데 어느새 내 버팀목이 되어 주다니 울컥했다. “고맙다. 내가 아들 잘 키웠나 보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사는 것 같아서. 잘 자.”라고 답장을 보냈더니 “넵! 마님도.”라며 없는 애교를 떨었다.
아들은 딸이라는 오진을 받고 자칫하면 세상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위로 누나 둘이 있었고 또 두 번의 제왕절개로 더 이상 아이 낳기가 힘들 수도 있는 상황에서 또 딸이라는 말은 시어머니에게도 남편에게도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애가 바뀐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만한 반전을 보이며 태어난 아들은 초등학교 때 또 한 번의 돌팔이 의사의 오진에 병원 신세를 졌다. 폐가 커졌다는 무서운 말로 입원 치료를 거듭하게 했는데 알고 보니 그 병원의 소아과 환자는 죄다 같은 병명이었다. 그 후로 그 의사는 병원에서 사라졌다.
중학교에 가면서 전교 1등이라는 기염을 토하던 아들은 원치 않은 고등학교에 배정되면서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설상가상으로 원인 모를 피부병에 시달렸다. 밤마다 밤새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사포 면처럼 꺼끌꺼끌해지고 염증이 올라와 붉어진 얼굴을 하고 등교하면 각 과목 선생님과 친구들의 질문 세례를 받는 것도 죽을 맛이었나 보다. 대인 기피증까지 생겼다. 백방으로 피부과를 알아보고 다녔는데 효과가 없었다. 저녁에 자면서 박박 긁다 보니 손을 묶어 보기도 했다. 나중에는 좀비처럼 피가 줄줄 흐르는 지경까지 되어 입원 치료를 해서 감염된 것은 잡았다. 고등학교 3년간 고생하다 대학에 진학 후 서울에서 새로운 피부과에 다니면서 호전되었다. 군대 다녀올 때까지 증상이 심하면 스테로이드 약을 먹고 가벼우면 항히스타민제로 바꿔 먹다가 최근에야 모든 약을 끊었다. 또 치아가 제멋대로여서 환하게 웃지도 못하고 스트레스가 엄청났는데 나중에 돈 벌어서 하라고 했더니 대견하게도 군대에서 월급 모아 해결했다. 지금 교정하느라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고생한다.
지금 아들은 영광에 있다. 그곳에서 '2022 대학생 스마트 이(e) -모빌리티 경진대회 내구레이싱 대회'에 참가하려고 내려와 있었다. 뭔지도 몰랐는데 아들이 보내 준 대회 영상을 보고 알았다. 자기들이 만든 소형 전기 자동차로 경주하는데 순위뿐만 아니라 내구성 등 여러 가지를 본다고 했다. 결승선에 3위로 통과했다. 그것 때문에 늦은 밤까지 동아리실에서 살았구나. 이제야 왜 힘들다고 했는지 알았다. 몇 위를 했건 간에 꿈을 향해 쏟아부은 열정이 기특했다. 언제 어떻게 또 어떤 반전을 보여줄지 모르지만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 준 아들을 칭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