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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권 함경도
본래는 고구려의 땅이다.
고려 성종 14년 경내(境內)를 10도(道)로 나눌 때, 화주(和州)ㆍ명주(溟州) 등의 군현(郡縣)을 삭방도(朔方道)로
하였다. 정종(靖宗) 2년에 동계(東界)라 일컬었는데, : 북계(北界)와 더불어 양계(兩界)라고 한다.
문종 9년에는 동북면(東北面)이라 일컬었다.
뒤에 함주(咸州) 이북은 동여진(東女眞)에 함몰되고 말았는데, 예종 2년에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을 보내
어 이를 격파하여 축출하고, 함주로부터 공험진(公?鎭)까지 9개의 성곽(城郭)을 쌓아 경계를 삼고, 선춘령(先春
嶺)에 비(碑)를 세웠다. 명종 8년에는 연해 명주도(沿海溟州道)라 일컬었다.
고종 45년에 원 나라 군사가 침략해 오니,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이 반란
을 일으켜 병마사(兵馬使) 신집평(愼執平)을 살해하고, 화주 이북의 땅을 가지고 원 나라에 귀부(歸附)하니,
원 나라에서는 화주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摠管)으로 삼고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고, 원종(元宗) 4년에는 강릉도(江陵道)라 일컬었다. 공민왕 5년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유인우(柳仁雨)
를 보내어 쌍성을 격파하여 화(和)ㆍ등(登)ㆍ정(定)ㆍ장(長) ㆍ 예(預)ㆍ고(高)ㆍ문(文)ㆍ의주(宜州) 등과
선덕(宣德) ㆍ 원흥(元興) ㆍ 영인(寧仁)ㆍ요덕(耀德)ㆍ정변(靜邊) 등의 진(鎭)을 수복(收復)하였다.
이에 앞서 삭방도(朔方道)를 도련포(都連浦)로 경계를 삼아 장성(長城)을 쌓고 정주ㆍ선덕ㆍ원흥의 세 관문
(關門)을 설치하였던 것이 모두 원 나라로 들어간 지가 99년이었더니, 이에 이르러서 비로소 회복하였던 것이다.
수춘군(壽春君) 이수산(李壽山)을 파견하여 강역(彊域)을 정하고 다시 동북면(東北面)이라 호칭하고,
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라 일컫다가, 9년에는 삭방강릉도(朔方江陵道)라 일컬었다. 공양왕(恭讓王) 때에
이르러 비로소 강릉도(江陵道)와 나누어 자연히 한 도가 되었는데, 본조 태조 때에 국토를 두만강(豆滿江)까지
개척하여 공(孔)ㆍ경(鏡)ㆍ길(吉)ㆍ단(端)ㆍ청(靑)ㆍ홍(洪)ㆍ함(咸)의 7개 주(州)를 두었고, 태종 13년에 관내에
영흥(永興)ㆍ길주(吉州)가 있다 하여 영길도(永吉道)라 고쳤고,
16년에 영흥을 강등시켜 화주목(和州牧)으로 만들고, 함주를 승격시켜 함흥부(咸興府)로 만들어 관찰사의 본영
(本營)을 여기에두고, 드디어 함길도(咸吉道)로 고쳤다.
세종 때에 또 회령(會寧)ㆍ종성(鍾城)ㆍ온성(?城)ㆍ경흥(慶興) 등의 4개 읍을 설치하였고, 예종 원년에 이시애
(李施愛)가 길주(吉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까닭으로 길주를 강등시켜 현(縣)으로 만들었으며, 성종 원년에 함흥
에서 반란군을 따라 관찰사를 살해하였다 하여 군(郡)으로 강등시키고, 관찰사의 본영을 영흥부(永興府)로
옮기고 영안도(永安道)로 고쳤고, 전하(殿下 중종) 4년에 다시 함흥부에 관찰사를 본영을 옮기고, 드디어 지금의
명칭으로 고쳤다. 영부(領府)가 1, 대도호부(大都護府)가 1, 도호부(都護府)가 12, 군(郡)이 4, 현(縣)이 4개이다.
관원 관찰사(觀察使) : 1명,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3명으로, 하나는 남도(南道), 하나는 북도(北道),
하나는 관찰사가 겸임하고 있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3명으로, 하나는 관찰사가 겸임하고 둘은 남ㆍ북절도사가 겸임한다.
신증 금상전하 4년에 남도에 예속되어 있던 낭성(浪城)ㆍ도안(道安)의 두 포(浦)를 혁파하고, 이어 남도절도사가
겸하였던 수군도 혁파하였다. 병마우후(兵馬虞候) : 1명이 북도에 있다. 신증 금상전하 7년에 갑산부(甲山府)가
재차 도적의 침입을 받자, 남도우후(南道虞候)를 아울러 설치하였다.
도사(都事) : 1명이 있다. 병마평사(兵馬評事) : 2명이 있는데 정6품으로 하나는 북도에 있고, 하나는 남도에 있다.
신증 금상전하 7년에 남도평사(南道評事)를 혁파하였다.
심약(審藥) : 3명으로 하나는 관찰사가, 둘은 남ㆍ북으로 절도사가 맡고 있다. 검율(檢律) : 1명이 있다.
[비고]
연혁 본래 숙신국(肅愼國) 땅이다 : 당우(唐虞) 삼대(三代)에서는 숙신(肅愼)이라 하였고, 한(韓)ㆍ진(晉)에서는
읍루(?婁)라 하였고, 북조(北朝)에서는 물길(物吉)이라 하였고, 수(隨)ㆍ당(唐)에서는 말갈(靺鞨)이라 하였고,
발해(渤海)ㆍ송(宋)ㆍ원(元)에서는 여진(女眞)이라고 하였다.
한무제(韓武帝) 원봉(元封) 4년에 현도군(玄?郡)을 두었다 : 지금 함흥(咸興)이 뒤에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군(郡)
으로 옮겨 구려(句麗) 서북이 되었다.
뒤에 옥저국(沃沮國) 땅이 되었다 : 옥저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었고, 동옥저의 경계는 함흥(咸興)ㆍ
정평(定平)ㆍ홍원(洪原)이 낭림산(狼林山) 이동(以東)이며 황초령(黃草嶺)ㆍ부전령(赴戰嶺) 두 영의 이남(以南)
이다. 북옥저의 경계는 북청(北靑)ㆍ이원(利原)ㆍ단천(端川)이 장백산을 한계로 하였고,
남옥저의 경계는 영흥(永興)ㆍ고원(高原)ㆍ문천(文川)ㆍ덕원(德源)ㆍ안변(安邊)이 철령(鐵嶺)을 한계로 하여
그 서쪽이 곧 일산(?山)이며 대간(大幹)과 연달았다.
○ 동남북 옥저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삼국(三國)의 땅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高句麗) 태조왕(太祖王) 4년 : 한(漢) 나라 광무(光武) 건무(建武) 병진년.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여
그 성읍(城邑)을 취하고, 동쪽 경계를 개척하여 창해(滄海)에 이르렀으며, 진(晉) 나라 초에 신라(新羅) 북쪽
경계 이하(泥河)에서 멈추었다 : 지금 덕원(德原) 북쪽 경계이다.
당(唐) 나라 중종(中宗) 때 발해국(渤海國) 남쪽 경계 영흥(永興)에 이르렀으며,
신라 말엽에는 여진(女眞)이 거(據)하였다. 고려(高麗) 성종(成宗) 14년 정평(定平)이남으로써 삭방도(朔方道)
에 예속하게 하였고, 도련포(都連浦)로써 경계 삼았다.
함흥부 咸興府
동쪽으로는 홍원현(洪原縣) 경계까지 70리, 남쪽으로는 정평부(定平府) 경계까지 27리,
서쪽으로는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경계까지 2백 80리,
북쪽으로는 삼수군(三水郡) 경계까지 2백 10리, 북청부(北靑府) 경계까지 1백 7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6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의 옛땅으로 오랫동안 동여진(東女眞)에게 점거(占據)되었는데, 고려 예종 2년에 윤관
등에게 명하여 여진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3년에 함주 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를 설치하여 진동군(鎭東軍)이라
일컫고 성을 쌓아 남계(南界)의 정호(丁戶) 1천 9백 48호를 옮겨 채웠다가,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
으로 돌려주었는데, 뒤에 원 나라에 함몰되어 합란부(哈蘭府)라 일컬어져 쌍성에 속해 있던 것을 공민왕 5년에
우리 환조(桓祖)에게 명하여 쌍성을 격파하여 옛 강토를 수복하여 지함주사(知咸州事)로 삼았다가,
곧 만호부(萬戶府)로 고쳐 병영을 설치하고 강릉(江陵)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 등 각 도의 군마(軍馬)를 모아
다가 변경을 지켰다. 18년에는 목(牧)으로 승격시켰으며, 본조 태종 16년에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켜 관찰사의 본영으로 삼고 토관(土官)을 두었다. 세조 13년에 부내(府內) 사람이 이시애의 사주(使嗾)에
따라 관찰사ㆍ수령 등을 살해하였으므로 성종 원년에 군(郡)으로 강등시키고 토관을 혁파하였다.
영흥부(永興府)로 옮겼던 관찰사의 본영을 금상전하 4년에 복구시켰다.
진관 대도호부 1 : 영흥(永興), 도호부 1 : 정평(定平). 군이 1 : 고원(高原).
관원 부윤(府尹) : 관찰사가 겸한다. 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
토관(土官) 도무사(都務司) 도무(都務) : 1명이 있는데 정5품이다.
○ 도무(都務)로부터 그 이하 섭사(攝事)에 이르기까지 관품(官品)은 모든 다른 읍과 같다.
감부(勘簿) : 1명이 있는데 종6품이다. 관사(管事) : 1명이 있는데 정8품이다.
전례서(典禮署) 장부(掌簿) : 1명이 있는데 종5품이다. 전사(典事) : 1명이 있는데 정7품이다.
급사(給事) : 1명이 있는데, 종8품이다. 섭사(攝事) : 1명이 있는데 종9품이다. 제학서(諸學署) 감부(勘簿)ㆍ
관사(管事)ㆍ섭사(攝事) : 각각 1명이 있다. 융기서(戎器署) 사창서(司倉署) 영작서(營作署) : 모두 제학서와 같
다.
수지국(收支局) 장사(掌事) : 1명이 있는데 종7품이다. 섭사(攝事) : 1명이 있다.
전주국(典酒局) 급사(給事)ㆍ섭사(攝事) : 각각 1명이 있다.
사옥국(司獄局) 섭사(攝事) : 2명이 있다. 사부(四部) : 인흥(仁興)ㆍ예안(禮安)ㆍ의흥(義興)ㆍ지안(智安).
섭사(攝事) : 각각 2명.
○ 이상은 동반(東班)에 매어 있는데 관찰사가 본도 출신으로 그 후보자를 추천해 아뢴다. 평안도도 같다.
진북위(鎭北衛) 여직(勵直) : 1명이 있는데 정5품이다.
○ 여직으로부터 부여용(副勵勇)에 이르기까지 관품은 모든 위(衛)와 같다.
여과(勵果) : 2명이 있으니 정6품이다.
부여과(副勵果) : 2명이 있는데 종6품이다. 여정(勵正) : 2명이 있는데 정7품이다.
부여정(副勵正) : 2명이 있는데 종7품이다. 여맹(勵猛) : 3명이 있는데 정8품이다.
부여맹(副勵猛) : 3명이 있는데 종8품이다. 여용(勵勇) : 3명이 있는데 정9품이다.
부여용(副勵勇) : 3명이 있는데 종9품이다.
○ 이상은 서반(西班)에 매어 있는데 절도사가 본도 출신으로 추천한다. 평안도도 같다.
군명 함주(咸州)ㆍ합란부(哈蘭府)ㆍ함평(咸平) ㆍ 진동군(鎭東軍) ㆍ 함산(咸山).
성씨
본부 문(文)ㆍ이(李)ㆍ한(韓)ㆍ연(延)ㆍ조(趙)ㆍ현(玄)ㆍ김(金)ㆍ박(朴)ㆍ최(崔)ㆍ서(徐)ㆍ우(禹)ㆍ노(盧)ㆍ
윤(尹)ㆍ위(魏)ㆍ황(黃) : 모두 내(來) 성.
주(朱) : 투화(投化)해온 성.
풍속 순박하고 우직(愚直)하며, 말을 달리고 활쏘는 것으로 덕을 삼으며, 이익으로 유혹하면 함부로 허락한다 :
모두 이윤손(李尹孫)의 <향교기(鄕校記)>에 나와 있다. 무사(巫祀)를 숭상한다 : 군적(郡籍)에 있다.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힘이 세고 사납다 : 《지지(地志)》에 이르기를, "그 토질이 대부분 메마르고 기후가 일찍
추워지지만, 인민들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힘이 세고 사납다. 한 도내의 주군(州郡)이 대부분 이와 같다."
하였다.
바퀴통이 큰 수레를 탄다 : 민속이 바퀴통이 큰 수레와 번거(藩車)를 즐겨 타는데, 다른 군현에서도 그러하다.
형승
성읍(城邑)이 관장히 크고, 왕성했던 옛땅이다 : 모두 이석형(李石亨)의 <문소루기(聞韶樓記)>에 나와 있다.
산천 성관산(城串山) : 본부 북쪽 2리 지점에 있는 진산(鎭山)으로, 산허리에 조그마한 샘이 있는데,
구름만 일면 곧 비가 온다.
○ 공민왕 때에 우리 태조가 납합출(納哈出)을 토벌할 적에, 3군(三軍)으로 나누어 좌군(左軍)이 성관산을 경유
하여 나갔다고 한 곳이 바로 여기이다.
기린산(麒麟山) : 본부 북쪽 90리 지점에 있는데,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떠들면 운무(雲務)가 일어 길을
덮어 버린다.
덕산(德山) : 본부 동북쪽 45리 지점에 있다. 우리 태종 때에 감로(甘露)가 이 산에 내렸다.
운주산(雲住山) : 본부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태백역산(太白亦山) ㆍ 소백역산(小白亦山) : 모두 본부 북쪽 1백 53리 지점에 있는데, 두 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그 빛이 모두 희기 때문에 세상에서 백역(白亦)이라고 한다.
우두산(牛頭山) : 본부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오봉산(五峯山) : 본부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부전령(赴戰嶺) : 본부 북쪽 1백 40리 지점에 있다. 함관령(咸關嶺) : 본부 동쪽 70리 지점에 있다.
차유령(車踰嶺) : 본부 동북쪽 73리 지점에 있는데, 그 고개 남쪽을 함관령이라 하고,
북쪽을 차유령이라 하니, 두 고개의 거리는 20여 리이다.
○ 함관령은 또 홍원현(洪原縣)에도 나와 있다. 귀주동(歸州洞) : 본부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토아동(兎兒洞) : 본부 북쪽 90리 지점에 있는 고천사(高遷社)에 있다.
○ 신우(辛禑) 때에 심덕부(沈德符)가 왜적을 대문령(大門嶺)에서 공격하여 패전하자, 적의 기세가 더욱 강성해
졌다. 태조가 가서 토벌하기를 자청하여, 함주에 도착하여 여러 장수의 부서(部署)를 정하였는데 병영(兵營) 안
70보 지점에 소나무가 있었다. 태조가 군사들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몇 번째 가지의 몇 번째 솔방울을 쏠 터이
니, 너희들은 이를 보라." 하고, 곧 유엽전(柳葉箭)으로 이를 쏘아 7발 7중(七發七中)하였는데, 모두 말한 그대로
명중하였으므로 군중(軍中)이 모두 뛰고 춤추며 환호하였다.
이튿날 곧장 적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나가서 토아동(兎兒洞)에 진을 치고 토아동 좌우에 군사를 매복(埋伏)
시키니, 적들이 먼저 토아동 안의 동ㆍ서산을 점거하고 있다가 멀리서 나팔 소리를 듣고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이는 이차거(李??)의 나팔 소리이다." 하였다.
태조가 상호군(上護軍) 이두란(李豆蘭), 산원(散員) 고여(高呂), 판위시사(判衛寺事) 조영규(趙英珪)ㆍ안종검
(安宗儉)ㆍ한나해(韓那海)ㆍ김천(金天)ㆍ최경(崔景)ㆍ이현경(李玄景)ㆍ하석주(河石柱)ㆍ이유(李柔)ㆍ전세
(全世)ㆍ한사우(韓思友)ㆍ이도경(李都景) 등 백여 명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서 고삐를 잡고 천천히 그 사이
를 지나니, 적은 군사가 적으면서도 걸음이 느린 것을 보고 그 소행을 헤아릴 수 없어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동쪽의 적들이 서쪽 적에게로 가서 함께 진을 쳤다. 태조는 동쪽 적이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올라가서 호상(胡
床)을 차지하고 군사로 하여금 안장을 벗기고 말을 쉬게 하여다.
한참 뒤 말에 오르려 할 때 백 보 지점에 마른 나뭇가지가 있었으므로,
태조가 연속 세 번 쏘아 모두 명중시키니, 적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탄복하였다.
태조가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호통치게 하기를, "이번 주장(主將)은 바로 이만호(李萬戶)이다. 너희들은
속히 와서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소용 없다." 하니 적의 추장이 대답하기를, "명령대로 따르겠습
니다." 하고 바야흐로 그 부하들과 항복을 의논하면서도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테조가 이르기
를, "마땅히 저들의 해이한 틈을 이용하여 급히 칠 것이다." 하고, 드디어 말에 올라 두란과 고여와 영규로 하여
금 적을 유도하게 하니, 선봉(先鋒) 수백 명이 추격해 왔다.
태조가 겉으로는 쫓기는 척하고 스스로 맨 뒤에서 후퇴하다가, 매복한 안까지 와서는 드디어 군사를 돌려 직접
적병 20여 명을 쏘니, 활에 맞아 넘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고, 두란ㆍ종검 등과 말을 달려 반격하자, 복병(伏兵)이
또 뛰쳐나왔다. 이에 태조가 몸소 사졸(士卒)보다 먼저 단기(單騎)로 적의 뒤를 충돌하니, 향하는 곳마다 무너지
고 흩어졌으며,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기를 서너 번이나 하였고, 손으로 적들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쏘기만 하면 겹으로 된 갑옷도 뚫었으며, 어떤 때는 한 화살에 사람과 말이 다 죽는 경우도 있어 적들이 모두 달
아나 무너지니, 관군(官軍)이 말을 타고 서로 호응하며 쫓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고,
적의 시체는 들을 덮고 냇물을 막아 한 사람도 탈주하지 못하였다.
이번 싸움에 패하여 천불산(千佛山)으로 들어간 적들도 모두 사로잡았다.
천불산(千佛山) : 본부 서북쪽 90리 지점에 있다. 백운산(白雲山) : 본부 서쪽 63리 지점에 있다.
중봉산(中峯山) : 본부 서쪽 25리 지점에 있다.
설열한령(薛列罕嶺) : 본부 서쪽 2백 80리 지점에 있는데,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산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송동령(松洞嶺) : 본부 동쪽 45리 지점에 있다.
초황령(草黃嶺) : 본부 북쪽 1백 10리 지점에 있으니, 설열한령과 30리 떨어진 곳이다.
덕산동(德山洞) : 본부 동쪽 40리 지점인 함관령(咸關嶺)과 차유령(車踰嶺) 남쪽에 있다.
우리 태조가 납합출(納哈出)과 여기에서 대전하여 패해서 함관령과 차유령을 넘어 달아나는 적들을 쳐서 거의
섬멸하니, 버리고 간 병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사음동(舍音洞) : 본부 동북쪽 25리 지점에 있는데, 우리 태조가 이곳에 군사를 주둔하였다.
함흥평(咸興坪) : 본부의 동ㆍ서ㆍ남쪽이 모두 큰 들로 되어 있는데, 이를 속칭 함흥평이라 한다.
납합출이 이곳에 진을 치자 태조가 단기(單騎)로 돌진하여 적을 시험하니, 적의 용맹한 장수 셋이 함께 달려나
와 곧장 앞으로 오자 태조가 겉으로 패하여 달아나는 척하여 고삐를 당겨 그 말에 채찍을 가하면서 말을 재촉하
는 것처럼 꾸미니, 세 장수가 앞을 다투어 추격해 왔다.
태조가 갑자기 말을 달려 오른쪽으로 나가니, 세 장수가 능히 공격해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가 뒤에서 이들을
쏘니, 모두 활시위 소리와 함께 거꾸러졌다. 옮겨 다니며 싸우면서 유인하여 요충지에 이르러 좌우의 복병이
함께 일어나 합동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납합출이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도망하
므로 은패(銀牌)ㆍ동인(銅印) 등의 물건을 노획해 나라에 바치니, 동북방의 변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바다 : 본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성천강(城川江) : 본부 서쪽 2리 지점에 있다. 그 근원이 두 개가 있으니,
하나는 갑산부(甲山府) 경내 화기령(樺岐嶺)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평안도 희천군(熙川郡) 경내에서 나와 합류
하여 본부 서북쪽 합란동(哈蘭洞)을 경유하여, 성 남쪽을 거쳐 도련포(都連浦)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도련포(都連浦) : 옛날에는 도린포(都麟浦)라 하였는데, 본부 남쪽 35리 지점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옛 장성(長城)의 끝이 여기에 연접해 있는데, 우리 태조가 납합출을 토벌할 때에 우군(右軍)이 도련포를 경유하
였다는 것이 바로 이곳이다.
화도(花島) : 본부 남쪽 45리 지점에 있으며, 대나무를 재배한다.
송도(松島) : 본부 동쪽 85리 지점에 있으니, 곧 바다 가운데의 공한지이다. 땅이 평평하고 수초(水草)가 있으며,
주위는 30리이다.
호련천(湖連川) : 본부 동쪽 8리 지점에 있다. 가을한천(加乙罕川) : 본부 서쪽 18리 지점에 있다.
미진포(微塵浦) : 본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토산 실ㆍ삼ㆍ대살[竹箭] : 화도(花島)에서 난다. 화피(?皮)ㆍ영양ㆍ사향(麝香)ㆍ지치ㆍ인삼ㆍ복령ㆍ안식향
(安息香)ㆍ오미자ㆍ송이버섯ㆍ석이버섯ㆍ잣ㆍ연어(?魚)ㆍ송어(松魚)ㆍ황어(黃魚)ㆍ전복[鰒]ㆍ조개[蛤]ㆍ
홍합(紅蛤)ㆍ과어(瓜魚)ㆍ고등어[古刀魚]ㆍ해삼(海蔘)ㆍ은어(銀魚)ㆍ도루묵[銀口魚]ㆍ청어(靑魚)ㆍ
넙치(黃魚)ㆍ꽃게[紫蟹]ㆍ숭어[秀魚]ㆍ굴[石花]ㆍ여항어(餘項魚)ㆍ홍어(洪魚)ㆍ방어(?魚)ㆍ게[蟹]ㆍ
삼치(麻魚)ㆍ돈피[貂]ㆍ날다람쥐ㆍ산달(山獺)ㆍ해달(海獺)ㆍ수달(水獺)ㆍ미역[藿]ㆍ소금.
성곽 읍성(邑城) : 석축으로 주위가 4천 6백 33척에 높이가 6척인데, 그 안에 16개의 우물과 3개의 못이 있다.
봉수 무을계재봉수(無乙界岾烽燧) : 본부 동쪽 1백 7리 지점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홍원현(洪原縣)의 남산(南山)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적구미(狄仇未)와 응한다.
적구미봉수(狄仇未烽燧) : 본부 동쪽 80리 지점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무을계(無乙界)와 응하고,
남쪽으로는 마구미(馬仇未)와 응한다.
마구미봉수(馬仇未烽燧) : 본부 동쪽 63리 지점에 있는데, 북쪽으로는 적구미와 응하고,
서쪽으로는 혼동재(昏東岾)와 응한다.
혼동재봉수(昏東岾烽燧) : 본부 동쪽 38리 지점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마구미와 응하고 서쪽으로는 안양외관(安陽外串)과 응한다.
안양외관봉수(安陽外串烽燧) : 본부 남쪽 24리 지점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혼동재와 응하고,
북쪽으로는 성관산(城串山)과 응한다.
성관산봉수(城串山烽燧) : 남쪽으로는 안양외관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정평부(定平部)의 비백산(鼻白山)과 응한다.
궁실 경흥전(慶興殿) : 본부 동쪽 귀주동(歸州洞)에 있다. 우리 태조의 옛 저택의 터이며,
공정왕(恭靖王)과 태종이 이 자리에서 탄생하였으므로 이 궁전을 지은 것이다.
누정 문소루(聞韶樓)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 이석형(李石亨)의 기문에, "철령(鐵嶺) 이북으로부터 1천여 리 지역은 큰 바다에 접하고 큰 산이 겹겹이 있어
서 웅번(雄藩)과 명진(名鎭)들이 물고기 비늘처럼 교착해 있고 바둑돌처럼 펼쳐져 있는데, 함흥만이 그 요충지
에 위치해 있다. 그 가운데에 산천의 맑은 기운이 모이고 서려서 실로 우리 국가 억만년의 무궁한 기업을 이룩하
였으니, 선왕의 잠저(潛邸)와 능침(陵寢)이 모두 이곳에 있다. 인물의 번성함과 성읍의 굉장함과 해산물ㆍ농산
물의 풍부함도 한 방면의 으뜸으로 동북방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 도(道)는 그 땅이 야인(野人)과 인접해 있고, 민속(民俗)이 오랑캐 풍속과 섞여 모든 제어하는 방법과
위무하는 계책이 감사에게 모두 집중되어 있으니, 만일 높은 덕과 무거운 인망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누가 능히
이 책임을 감당하겠는가. 그러므로 국가에서 감사를 임명할 때에 다른 도에 비해서 더욱 중하게 다루어 반드시
대신 중에서 신중히 선발하여 본부의 부윤(府尹)을 겸임하게 하였다.
정묘년에 예천(醴泉) 권공(權公) 맹손(孟孫)이 형조 판서로서 특별히 이 명을 받고 이미 부임하여 일을 보자, 정
사는 다스려지고 폐단은 제거되어 크게 인화(人和)를 얻었다. 본부 객관 북쪽에는 옛날에 누정(樓亭)이 있었는
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해 있었다. 공이 여러 서리(胥吏)들에게 묻기를, '너희들이 있는 이 부(府)는 왕업을 일
으키신 옛땅으로 한 도내에서 우러러보는 고을인데도, 모든 빈객을 응접하는 관우(館宇)가 누추하고 좁아서 제
도와 외관이 합당치 않은데, 어찌 오래된 것을 철거하고 새로 짓지 않느냐?' 하니, 서리들이 모두 기뻐하여 뛰며,
달을 넘기지 않고 공사를 마쳤다. 누정은 모두 세 칸으로 처마에 익(翼)을 다니, 난간과 마루가 시원하고 형세가
다 적당하여 한 고을의 명승이 이에 갖추어지게 되었다. 무진년 가을에 내가 휴가를 얻어 돌아가는데,
권공이 나에게 고하기를, 상감께서는 함흥이 조종(祖宗)의 기업을 일으키신 땅이라 하여 특별히 용비어천(龍飛
御天)의 새 악부(樂府)를 내리시니, 본부의 영광이 지극하다. 그런데 그 악부가 온 것이 마침 누정이 이루어지던
날이었으니, 또한 이 누정의 경사가 아니겠는가. 누정이 이미 준공되고, 악부가 또 내려왔으며, 자네도 마침 왔
으니, 어찌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마땅치 않겠는가.
자네가 돌아가거든 나를 위하여 편액(扁額)을 구해서 글을 짓고, 하인이 돌아올 적에 문소루(聞韶樓)라는 큰 세
글자를 써 보내주면 영광이겠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소(韶)라는 것은 순임금의 음악으로, 공자가 일찍이
그것을 일러 극진히 아름답고 또 극진히 선하다.' 하였고 또 제 나라에 계실 때에, 이 음악을 듣는 석달 동안 고
기맛을 몰랐다 함은 그 정(情)과 문(文)이 갖추어지고 또 거룩한 때문이었다.
이제 <용비어천가>의 제작은 조종(祖宗)의 쌓으신 덕의 근원을 미루어 일대(一代) 예악(禮樂)의 아름다움을 이
룬 것으로서 비록 순임금의 소악(韶樂)의 읍양(揖讓)하여 계승한 실제로도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니, 이를 마땅히 노래로 형용하고 악기로 연주하여 온 나라 방방곡곡에서 써야 할 것이다.
하물며 풍패(?沛 제왕의 고향을 말함.)의 고장인 이곳 인민의 부로(父老)들은 선왕의 창조하신 유적을 직접 보
았고, 또 모두 선왕의 인후하신 은택을 입었으니, 그 읊은 가사를 듣고 기뻐하고 감동하여 사모함이 과연 어떻
겠는가.
아, 이 누정의 지음이 옛날에 되지 않고, 오늘에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음악의 내리심이 이 누정의 준공보다 먼
저하거나 뒤지지도 않고 마침 이때에 있었으니, 어찌 하늘이 이 누정을 더욱 빛나게 하고 그 아름다운 이름을
의탁하여 영원히 전하게 하려 하심이 아니겠는가.
이 누정에 올라 이 음악을 연주하여 궁(宮)ㆍ각(角)이 서로 소리를 내고, 금(金)ㆍ석(石)이 번갈아 화답하여 균
천(鈞天)에서 9주(九奏)를 울리며, 오현금(五絃琴)의 남풍곡(南風曲)이 울려 퍼지게 되면 이 누정의 경치가 이
에 더욱 좋아질 것이다.' 한다." 하였다.
○ 권맹손(權孟孫)의 시에, "여섯 용(龍)이 날아서 해동(海東) 하늘에 임하시니, 만물이 그 우로(雨露)의 혜택을
입었도다. 쌓고 쌓은 인(仁)의 공은 백대(百代)의 제왕에 뛰어나시고, 높고 높은 덕업은 천년의 운수에 응했도
다. 찬양한 악장(樂章)을 풍패(?沛)에 내리시니, 노래하는 새 가사를 관현(管絃)에 올리네. 선대의 성명(聖明)을
이어받아 만물의 화육(化育)을 돈독히 하시니, 태평 시대의 풍아(風雅)가 길이 흘러 전하리라." 하였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높은 다락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때는 바야흐로 봄 하늘, 유유히 흘러간 옛일이 한
번 바라보는 가로세. 풍패(?沛) 위의 여러 능(陵)은 모두 몇 대런가, 기산(岐山) 남쪽의 옛집은 이미 많은 세월이
지났구나. 풍악은 제 나라에서 석달 동안 고기 맛을 잊었던 소(韶)의 연주를 듣는 듯하고, 노래는 순임금 남풍시
(南風詩)의 오현금(五絃琴)에 들어오네. 붓을 가지고 어찌 반드시 고적(古蹟)만 찾으리, 이를 크게 써서 후세 사
람에게 전하리라." 하였다.
○ 이사철(李思哲)의 시에, "망산(芒山)과 탕산(?山)의 상서로운 구름기운은 한 나라의 하늘, 해가 함지(咸池)로
부터 나와 사방을 비춰 주네. 자손에게 물려주신 큰 공업(功業)을 이 땅에서 그 기초를 다졌는데, 용이 난 남긴
자취는 그 초년(初年)을 상상하게 한다. 경사는 현조(玄鳥)에 모여 큰 복을 뻗치게 했고, 면과시(?瓜詩)를 읊어
전파하매 아악(雅樂)을 듣네. 소악(韶樂)을 듣고 이미 석 달 동안 고기맛을 잊었는데, 대풍가(大風歌 한 나라 고
조(高祖)가 지어 읊은 노래.)는 마땅히 풍패(?沛)를 향해 전하리로다." 하였다.
○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울긋불긋 단청한 누각이 하늘을 찌를 듯, 여덟 창문으로 펼쳐지는 경치 아득히 끝이
없구나. 한 나라의 풍패는 천고(千古)를 지났고, 주 나라의 기(岐)ㆍ빈(?)은 만년(萬年)이나 내려갔도다.
술취한 속에 맑은 담론은 왕연(王衍)의 주미(?尾)요, 흥취는 한가한 가운데 아름다운 백아(伯牙 거문고 잘 타는
사람)의 거문고로다. 오늘 용이 날아 일어나신 땅을 찾아와서 그 송축한 노래가 악부(樂府)에 전한 것을 흔연히
듣노라." 하였다. 남화문루(南華門樓) : 본부 성의 남문(南門)이다. 선경루(仙景樓) : 객관 북쪽에 있다.
○ 홍일동(洪逸童)의 시에, "성인(聖人)의 덕화가 이제 바야흐로 점차 멀리 동쪽으로 흘러오는데,
만리길 중국으로 조회하는 한 가닥 길이 통해 있네. 범이 버티고 앉은 듯 웅장한 관문(關門)이 바다 위에 막아
섰고, 새가 활개치며 나는 듯 웅장한 누각이 구름 위로 솟았구나. 깊은 가을 남쪽 포구(浦口)엔 푸른 아지랑이
걷혔는데, 외로운 따오기 나는 서쪽 산에는 지는 해가 붉다. 오늘 성인의 거룩하신 공업을 생각하며,
신선의 풍악이 허공에 울림을 기쁘게 듣노라." 하였다.
○ 박원형의 시에, "높은 누각이 큰 들 동쪽에 임하였고, 먼 산봉우리 뻗어나와 바다 포구를 당겨 통하였네.
빈풍(?風)의 가색(稼穡)은 천년 후요, 위국(魏國)의 산하(山河)는 한 번 바라보는 속이로구나.
푸른 풀 언덕가에는 비가 뿌옇게 날리고, 늘어진 버들 그늘 아래엔 이슬 맺힌 복숭아가 마냥 붉네. 외로이 읊조
려 등루부(登樓賦)를 이루지 못하였는데, 길게 이어진 피리 소리가 저녁 하늘에 희롱하네." 하였다.
○ 이사철의 시에, "육룡(六龍)이 임어(臨御)하사 하늘 동쪽에서 일어나시니, 풍패(?沛) 옛 시골은 이제 우로
(雨露)의 은택에 젖어 있네. 만리 강산은 읊조리며 휘파람부는 속이요, 한 누정의 아름다운 풍경은 그림 가운데
에 펼쳐져 있구나. 멀리 화악(華嶽)이 횐 구름과 연해 있음을 보고, 아득히 함지(咸池)에 붉은 해가 목욕하는 것
을 상상해 보노라. 이미 장풍(長風)을 전파하여 대지(大地)에 불었으니, 다시는 가느다란 티끌도 푸른 공중을
가릴 것이 없구나." 하였다.
○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그림 같은 누각의 승경(勝景)은 하늘 동쪽 나라에서 으뜸이었는데, 눈을 드니 아름
다운 강산이 사면으로 통하였네. 떨어지는 노을은 지는 해 밖에 아른거리고, 멀리 서 있는 수목들은 엷은 연기
속으로 아득히 보인다. 연잎을 띄운 옥소(玉沼)는 유리처럼 푸르고, 금잔에 넘치는 술은 호박(琥珀)처럼 붉구
나. 취기(醉氣)로 누각에 올라 객로(客路)도 잊었는데, 날이 저무니 푸른 산 아지랑이가 빈 추녀 안으로 들어오
네." 하였다.
낙민정(樂民亭) : 성천강 가에 있다. 칠보정(七寶亭) : 동헌(東軒) 남쪽 못 가운데에 있다.
학선정(鶴仙亭) : 가을한천(加乙罕川) 가에 있다. 강효문(康孝文)이 관찰사로 있을 때 세운 것이다.
신증 관풍정(觀風亭) : 문소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본부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평원관(平原館) : 본부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덕산역(德山驛) : 본부 동북쪽 32리 지점에 있다.
신원(新院) : 본부 동북쪽 52리 지점에 있다. 평천원(平川院) : 본부 서쪽 19리 지점에 있는데,
그 곁에 학선정(鶴仙亭)이 있다.
신증 창고 병풍파사창(屛風坡社倉) : 본부 북쪽 2백 65리 지점에 있다.
고천사창(高遷社倉) : 본부 북쪽 95리 지점에 있다.
한후구비사창(漢厚仇非社倉) : 본부 동쪽 2백 70리 지점에 있다.
퇴조사창(退朝社倉) : 본부 동쪽 60리 지점에 있다. 혼동사창(昏東社倉) : 본부 동쪽 35리 지점에 있다.
불우 신흥사(新興寺)ㆍ정암사(正菴寺) : 모두 운주산에 있다. 망해사(望海寺) : 우두산에 있다.
중천사(中天寺)ㆍ돈수사(頓水寺) : 모두 천불산에 있다. 은적사(隱跡寺)ㆍ수암사(水菴寺)ㆍ안심사(安心寺) :
모두 기린산에 있다.
정수암(淨水菴) : 오봉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본부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성안에 있다.
송도사(松島祠)ㆍ화도사(花島祠) : 모두 봄가을로 본읍에서 치제(致祭)한다. 여단 : 본부 북쪽에 있다.
능묘
정릉(定陵)ㆍ화릉(和陵) : 우리 환조 연무성환대왕(桓祖淵武聖桓大王) 및 의혜왕후(懿惠王后)의 능이 한 영역
(塋域)에 있는데, 귀주동에 있다. 참봉(參奉)이 두 사람.
○ 정총(鄭摠)이 지은 비문(碑文)에, "성상께서 즉위하신 2년 봄 정월 신미일에, 신 정총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부덕(否德)한 사람으로 하늘의 아름다운 명을 받고 나라를 창조하였음은 오직 조종(祖宗)께서 덕을 쌓아
오신 데 힘입은 것인지라, 삼가 이미 4대(四代)의 시호를 추존하여 모두 왕의 작위를 올렸으니, 그대는 우리 선
열 조고(先烈祖考) 정릉(定陵)의 비명(碑銘)을 지어 이를 영원히 세상에 밝혀 보이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신 정총은 명을 받들고는 공경함과 두려움으로 감히 비루하고 졸렬함으로 사양하지 못하였습니다. 일찍이 보건
대,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5백 년마다 반드시 왕자(王者)가 일어난다.' 하였습니다.
전조(前朝 고려)가 그 시조(始祖)인 왕씨(王氏)로부터 5백 년을 전해와서 국운이 이미 쇠하여 공민왕의 후사
(後嗣)가 끊어지매, 요망스러운 중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가 성(姓)을 사칭하고 왕위를 도적질하여 황음(荒
淫)과 포학(暴虐)을 일삼았습니다.
무진년에는 그의 정승 최영(崔瑩)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함부로 천자(天子)의 경내를 침범하려 하니, 인민들의
화가 끝이 없었습니다. 이때 우리 주상전하께서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로 계시다가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돌리시니, 우왕이 비로소 그 죄를 알고,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해에 천자가 이성(異姓)으로 왕씨의 뒤를 삼은 것을 문책하시매, 전하께서는 당시 시중(侍中)으로 국정
을 맡고 계셨는지라, 모든 장수들과 상의하시고 왕씨의 후예 요(瑤)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처음 우왕 때부터 정치가 권신(權臣)에게로 돌아가서 관작과 옥사(獄事)를 공공연하게 팔아 조정의 정사를 흐
리고 어지럽게 하며, 전토(田土)를 침탈하여 산야를 독점하여 기강(紀綱)이 크게 무너지고 해독이 날로 심해지
자, 백성들이 마침내 원망하고 한탄하면서 조석으로 치평(治平)의 날이 오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전하께서 정승이 되시면서 구폐(舊弊)를 개혁하여 제거하시고 치도(治道)를 경신하사,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경계(經界)를 바로잡으시고, 일없는 관원을 없애어 관작을 중히 여기어 재능있고 현량한 자를 발탁하
여 중용하고, 완악하고 흉악한 자를 내쫓는 동시에, 무위(武威)를 떨쳐 변경의 도적을 물리치고, 인정(仁政)을
베풀어 민업(民業)을 후하게 하시고, 기강과 법도를 정돈하고 예절과 음악을 닦아 밝히시니, 삼한(三韓)의 백성
들이 부모처럼 사랑하고 떠받들었습니다.
요(瑤)가 혼미하여 대체(大體)에 어두워서 간사한 무리들을 신임하여 쓰고 충직한 사람들을 추방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녀자와 환관의 말을 들어 전제(田制)의 바름을 어지럽히고,
사사로이 친압하는 자들에게 맡겨 관작의 공정함을 문란케 하며, 정치와 법령이 상도(常道)가 없어 국법을 무너
뜨리고 재정의 용도(用度)가 절제가 없어 백성의 재산을 손상시킬 뿐더러 뭇소인들의 점차 파고드는 참소를 믿
고, 전하께서 장차 기울어지려는 국운을 회복해 놓은신 공마저 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그 정승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항상 죄에 빠트릴 것을 꾀해 오다가, 몽주가 은밀히 대간(臺諫)으로 있
는 그 일당에게 사주하여 공신(功臣)과 직언(直言)한 자에게 죄를 씌우려고 얽어 만들어 글을 올려 장차 전하께
미치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 화가 불측(不測)한 지경에 있게 되어 온 국민들이 통분해하고 원망하였습니다.
홍무(洪武) 25년 7월 16일에 좌시중(左侍中) 신 배극렴(裵克廉)과 우시중(右侍中) 신 조준(趙浚) 등 52명이 그
천명(天命)의 소재를 알고, 인심의 돌아가는 바를 살펴 대의(大義)를 주창하니, 백관(百官)과 부로(父老)들도
서로 꾀하지 않고도 뜻이 같은지라, 똑같은 말로 왕위에 오르시기를 권고하였던 것입니다. 전하의 사양하심이
두서너 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대중의 뜻이 더욱 굳어서 억지로 보위(寶位)에 나가시니, 저자에서는 점포
도 바꾸지 않고, 병기에는 피도 묻히지 않고 하루아침에 나라가 청명(淸明)해지자 백성들이 마침내 크게 기뻐
하였습니다.
곧 중추(中樞) 신 조반(趙?)을 중국에 보내어 이 사실을 보고하니, 황제가 이에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삼한
(三韓)의 백성들이 이미 이씨(李氏)를 추대하였으니, 백성들이 병화가 없어, 사람마다 각기 하늘의 즐거워하는
바를 즐기게 되니, 곧 상제(上帝)의 명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중추(中樞) 신 조림(趙琳)이 잇따라 돌아왔는데, 또 칙서(勅書)를 내리기를, '국호(國號)를
무어라고 고쳤느냐? 급히 달려와서 보고하라.' 하여 즉시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나라 이름을 아뢰니, '조선'이란 국호를 내리고, 또 이르기를, '하늘의 뜻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길이 후사
(後嗣)가 번창하도록 하라.' 하였으니, 그 하늘과 사람과 상하의 도움을 얻은 것이 이와 같으니, 진실로 이른바
5백 년 만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상고하건대, 선원(璿源 임금의 세계(世系))에 전주(全州)의 망족(望族)으로 사공(司空) 한(翰)이란 분
이 있었는데, 신라(新羅)에 벼슬하였고, 신라 태종왕(太宗王)의 10대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을 아내
로 맞아 시중(侍中) 자연(自延)을 낳았고, 시중이 복야(僕射) 천상(天祥)을 낳았으며,
복야가 아간(阿干) 광희(光禧)를 낳았고, 아간은 사도(司徒) 입전(立全)을 낳았으며, 사도는 긍휴(兢休)를 낳았
고, 긍휴는 염순(廉順)을 낳았으며, 염순은 승삭(承朔)을 낳았고, 승삭은 충경(充慶)을 낳았으며, 충경은 경영
(景英)을 낳았고, 경영은 충민(忠敏)을 낳았으며, 충민은 화(華)를 낳았고, 화는 진유(珍有)를 낳았으며, 진유는
궁진(宮進)을 낳았고, 궁진은 대장군(大將軍) 용부(勇夫)를 낳았으며, 대장군은 내시 집주(內侍執奏) 인(璘)을
낳았고,집주가 시중 문극겸(文克謙)의 딸과 결혼하여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았으며, 장군은 상장군(上將
軍) 이공(李公) 강제(康濟)의 딸과 결혼하여 지의주(知宜州) 안사(安社)를 낳았는데, 뒤에 원 나라 조정에 벼슬
하여 남경 5천호소 달로화치(南京五千戶所達魯花赤)가 되었으니, 즉 우리 전하의 고조(高祖)로, 이제 목왕(穆
王)으로 봉(封)하여 능호(陵號)를 덕릉(德陵)이라 하였고, 배위(配位) 이씨(李氏)는 천우장사(千牛長史) 공숙
(公肅)의 따님으로, 이제 효비(孝妃)로 봉하여 능호를 안릉(安陵)이라 하였습니다.
증조의 이름은 행리(行里)이시며, 천호(千戶)를 봉(封)으로 받으셨는데, 이제 익왕(翼王)으로 봉하여 능호를 지
릉(智陵)이라 하고, 배위 등주(登州) 최씨(崔氏)는 이제 정비(貞妃)로 봉하여 능호를 숙릉(淑陵)이라 하였으며,
찬성사(贊成事)에 추증(追贈)된 춘(椿)이라 하시는 조부는 이제 도왕(度王)으로 봉하여 능호를 의릉(義陵)이라
하였고, 배위 문주(文州) 박씨(朴氏)는 경비(敬妃)로 봉하여 능호를 순릉(純陵)이라 하였습니다.
아버님이 되시는 문하시중 영록대부 판장작감사 삭방도만호(門下侍中榮祿大夫判將作監事朔方道萬戶)에 추증
된 자춘(子春)이라 하시는 분은 여러 번 변경에서 공로를 세워 모든 사람들의 으뜸이시더니, 지정(至正) 경자년
4월 갑술일에 병환으로 삭방도(朔方道)에서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46세였습니다.
그해 8월 병신일에 함주(咸州) 동쪽 귀주(歸州)의 언덕에 장례를 모셨습니다.
이제 환왕(桓王)으로 봉하고, 능호를 정릉(定陵)이라 하였으며, 배위 최씨(崔氏)는 판문하영흥백 정효공(判門下
永興伯靖孝公)에 추증된 한기(閑奇)의 따님으로 의비(懿妃)에 봉하고, 능호를 화릉(和陵)이라 하였습니다.
대대로 공과 덕을 쌓아 왕업(王業)의 터전이 비롯되었던 것이니, 선(善)이 축적되어 경사가 일어난 그 근원이
멀고 흐름이 빛나서 후히 성철(聖哲)을 낳으사 큰 기업(基業)을 세우게 하신 것이니, 하늘의 덕 있는 자를 사랑
하고 도우심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왕께서는 세 번 장가를 드셨는데, 의비께서 또 따님 한 분을 낳으셔서 삼사 좌사(三司左使) 조인벽(趙仁壁)에
게 시집갔으며, 이씨(李氏)가 아들 원계(元桂)를 낳으셨는데, 고려에 벼슬하여 완산군(完山君)에 봉작(封爵)되
고 죽었으며, 김씨(金氏) 정안옹주(定安翁主)는 아들 화(和)를 낳으셨는데 의안백(義安伯)에 봉해졌습니다.
전하의 배위 한씨(韓氏)는 증문하부사(贈門下府事) 한경(韓卿)의 따님으로 먼저 돌아가셨으므로 절비(節妃)로
추증(追贈)되셨고, 능호를 제릉(齊陵)이라 하였는데, 아드님 방우(芳雨)는 진안군(鎭安君), 방과(芳果)는 영안
군(永安君), 방의(芳毅)는 익안군(益安君), 방간(芳幹)은 회안군(懷安君), 태종(太宗)의 이름자를 썼다 은 정안
군(靖安君)이며, 방연(芳衍)은 일찍 죽어 원윤(元尹)에 추증되었으며,
두 따님은 모두 어립니다. 계실(繼室)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윤성(允成)의 따님으로 현비(顯妃)에
봉해졌고, 아드님 방번(芳蕃)은 무안군(撫安君)이며, 방석(芳碩)은 어리고, 따님은 경산(京山) 이씨(李氏) 이제
(李濟)에게 시집갔으며,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습니다. 진안군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과 결혼하
여 아들 복근(福根)은 원윤(元尹)이며, 영안군은 증 문하 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과 결혼하
였으며, 익안군은 증 문하 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방(崔仁?)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석근(石根)은 원윤(元尹)
이며, 회안군은 증 문하 찬성사 민선(閔璿)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맹중(孟衆)은 원윤이며,
정안군은 예문관 태학사(藝文館太學士) 민제(閔霽)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무안군은 귀의군(歸義君) 왕모(王某)
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신이 그윽이 제왕가의 일어남을 살펴보건대, 그 조종(祖宗)의 덕을 축적한 원대함과, 본지(本枝)의 번성하여 많
음이 주 나라 왕실만한 것이 없습니다. 저 후직(后稷)으로부터 수십 대를 지나서 문(文)ㆍ무왕(武王)에 이르러
서야 왕업(王業)을 일으켜 그 인후(仁厚)하고 많은 자손이 실로 8백 년의 긴 역사(歷史)의 터전을 다진 것이오나,
또한 인후(仁厚)한 덕으로 이를 이룩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국가로 본다면, 멀리 사공(司空)으로부터 환왕(桓王)에 이르기까지 선을 쌓은 것이 이미 오래이며,
우리 전하께서 영명(英明)하신 자질과 신무(神武)의 지략(智略)으로 멀리 선대의 공렬을 이어받으시고, 빛나게
큰 복을 받으시와 억만년의 그지없는 아름다움을 열어 놓으시니, 그 금지옥엽(金枝玉葉)의 뻗은 것이 번성하여
진실로 주가(周家)와 함께 나란히 융성하니, 이는 그 쌓아온 것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발양(發揚)함이 크고, 세운
것이 공고하기 때문에 전수(傳垂)함이 먼 것이니, 아, 성대하신 일이옵니다.
신 정총이 두 손을 모아 머리를 조아리고 명(銘)을 올려 이르기를, 아, 아름다워라, 선리(仙李)여, 근본이 굳고
뿌리가 깊으오이다. 저 사공으로부터 대대로 덕의 칭송이 높더니, 그 상서가 발양하여 환왕에 이르러 우리의 밝
으신 주상(主上)을 탄생하사 문득 동방을 갖게 되시니, 역수(歷數)가 돌아감이 있는지라, 병기도 쓰지 않으시고
백성과 더불어 혁신하셨네. 밝게 덕음을 공포하실 때 왕은 이르기를, '착하지 못한 내가 하늘의 복록(福祿)을 받
게 된 것은 실로 조종(祖宗)께서 경사를 길러 오신 힘에 말미암은 것이다.' 하고, 이에 옛 전장(典章)에 의거하사
왕의 시호를 추후로 올리시니, 잠겼던 덕이 나타났습니다. 그 빛이 드러나지 않으리이까. 인후한 종친(宗親)들
이 그 복을 더욱 후히 하여 줄기와 가지가 길이 만대나 가오리다.
저 귀주(歸州)를 바라보노라니, 우뚝한 능(陵)이 솟아 있는데 왕기(王氣)가 왕성하여 그지없이 복되고 아름다우
리이다. 신은 두 손을 모아 머리 조아리며, 저의 이 명(銘)이 아첨하는 말이 아닌지라, 이를 아름다운 빗돌에 새
겨 후인들에게 보이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의릉(義陵) : 우리 도조 공의성도대왕(度祖恭毅聖度大王)의 능이다. 운전사(雲田社)에 있다.
○ 참봉(參奉)이 2명이다.
순릉(純陵) : 우리 도조 경순왕후(敬順王后)의 능이다. 본부 동쪽 33리 지점에 있다.
○ 참봉이 2명이다.
덕릉(德陵)ㆍ안릉(安陵) : 우리 목조 인문성목대왕(穆祖仁文聖穆大王)과 공효왕후(恭孝王后)의 능이 같은 영역
(塋域)에 있는데, 본부 서북쪽 60리 지점에 있다. 예전에는 경흥부(慶興府)의 읍성 남쪽에 있었는데, 태종 10년
에 똑같이 이곳으로 옮겼다.
○ 참봉이 2명이다.
한경묘(韓卿墓) : 본부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적
합란부(哈蘭府) : 원 나라에서 합란부를 설치하였는데, 그 옛 관사(官舍)가 지금의 본부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 이제 명 나라 《일통지(一統志)》를 상고하건대, 개원성(開元城)이 삼만위(三萬衛) 서문(西門) 밖에 있다"
하였고, 《원지(元志)》에는 "개원성의 서남방이 영원현(寧遠縣)이고, 또 그 서남이 남경(南京)이고, 또 그 남쪽
이 합란부이고, 또 그 남쪽이 쌍성(雙城)으로, 곧장 고려의 왕도(王都)에 다다른다." 하였으니, 이른바 합란이란
곧 이 쌍성이니, 즉 영흥부(永興府)의 삼만위는 바로 옛날의 읍루물길(?婁勿吉)의 땅이다.
운전사(雲田社) : 본부 동쪽 14리 지점에 있는데, 태조(太祖) 잠저(潛邸) 때의 옛날 집이 있다. 그 동쪽 2리 지점
에 땅이 바닷가에 연접하고 푸른 잔디가 펀펀하게 10여 리를 뻗쳐 있는데,
태조가 소싯적에 여기에서 격구(擊毬)를 하였다 하며, 속칭 송원(松原)이라 한다.
범박구미(凡朴仇未) : 본부 서북쪽 1백 65리 지점에 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부세(賦稅)를 피하여 이 땅에 들어
와 살았는데, 읍(邑)과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읍민들이 모르다가, 뒤에 그를 따라 옮기는 자가 점점 많아져서
읍민들이 마침내 이를 알게 되어 조세를 납부하게 하였다 하는데, 지금은 따로 사창(社倉)을 설치하였다.
송두등(松豆等) : 본부 남쪽 10리 지점에 있느니, 곧 우리 태조가 놀던 곳이다. 지금은 내수 분사(內需分司)를
두었다. 덕산고성(德山古城) : 석축으로 주위가 4백 97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백운산고성(白雲山古城) : 본부 서쪽 63리 지점에 있다. 석축으로 그 주위가 1만 4천 5백 73척인데, 지금은 폐
지되었다.
덕산동초원고성(德山洞草原古城) : 본부 동북쪽 48리 지점에 있다. 토축(土築)으로 주위가 1천 1백 47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퇴조고성(退潮古城) : 본부 동쪽 60리 지점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4천 9백 17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중봉고성(中峯古城) : 본부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 석축으로 그 주위가 1천 39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한당고성(閑堂古城) : 본부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토축으로 주위가 6천 5백 11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오로촌고성(吾老村古城) : 본부 북쪽 35리 지점에 있다. 석축으로 그 주위가 1천 76척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선덕진(宣德鎭) : 본부 남쪽 45리 지점에 있다. 성의 기지가 남아 있다.
명환 고려 이택(李澤) : 예종 3년에, 함주 대도독부사(咸州大都督府使)가 되어 왔다.
본조 정갑손(鄭甲孫) : 부윤(府尹)을 겸임하였다. 김호지(金好智)ㆍ이종겸(李宗謙)ㆍ
함우치(咸禹治) : 부윤을 겸임하였다.
신면(申?) : 성화(成化) 정해년에 관찰사로 부윤(府尹)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이시애(李施愛)의 일당이 신면의 살해를 꾀하고 군사를 일으켜 관청을 포위하니, 신면이 면치 못할 것을 알고,
궁시(弓矢)를 가지고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4명을 쏘아 죽이고, 화살이 다 떨어지자, 그 활을 꺾어 버리고 적을
욕하며 죽었다.
우거 본조 김광수(金光?)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열녀 본조 막장(莫莊) : 절의(節義)가 있어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제영 옛날 구성(九城)에 일찍이 공적을 기록한 바 있는데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채찍을 드날리며 변방으로
나가니, 때는 바야흐로 가을 하늘, 흥망(興亡)을 회상해 읊으며 한 편의 시(詩)를 짓는다. 옛날 구성에 일찍이
공적을 기록한 바 있는데, 선왕조(先王朝)에서 만리의 변경을 또 개척하셨네." 하였다.
산채(山寨) 속을 가다가 비를 만나고 : 정몽주의 시에, 떨어지는 나뭇잎이 한창 어지러운데, 그대를 생각하여도
그대는 볼 길이 없구나, 원수(元帥)는 변방 깊숙이 들어가고, 강건한 장수는 멀리 군사를 나누어 갔다.
산채에 가다가 비를 만났고, 성루(城樓)에서 일어나 구름을 바라보노라니, 병란(兵亂)이 사해(四海)에 가득하니,
어느 날에나 문치(文治)를 다시 닦을꼬." 하였다.
화각(?角) 소리 한결 높고 가을은 저물려 하네 :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멀리 장군의 깃발을 따라 동주(東州)를
지나가니, 화각 소리 한결 높고 가을은 저물려 하네. 화사롭던 지난일을 물을 곳이 없는데, 싸늘한 연기 시든 풀
들이 황량한 언덕만을 싸고 있구나." 하였다.
함주(咸州) 벌판은 원래 나라의 중앙이었다네 : 정도전의 시에, "호숫빛과 하늘 그림자가 함께 창망(蒼茫)한데,
한 조각 외로운 구름이 석양을 띠고 떠 있네. 이때 차마 옛 곡조를 들으랴. 함주 벌판은 원래 나라의 중앙이었다
네." 하였다.
일만 개 잎새의 선원(璿源)이 이 땅에서 그 터전을 닦았던 것 : 최효손(崔孝孫)의 시에, "함평(咸平)의 풍토와 기
후가 남녘 땅과 같아서, 2월 동풍(東風)에 풀이 파릇파릇 반이나 나오는구나. 일만 개 잎새의 선원이 이 땅에서
그 터전을 닦았던 것, 주민들은 일찍이 취화(翠華 임금과 깃발)의 노닒을 보았네." 하였다.
구름 속으로 점점이 솟은 산은 옥비녀를 뽑아낸 듯 : 박연(朴堧)의 시에, "만리 동녘 바다 한 언덕에 자리잡은
고을, 구름 속으로 점점이 솟은 산은 옥비녀를 뽑아낸 듯. 봄바람에 꽃과 새가 평화롭기만 하여,
당년에 봉련(鳳輦)이 놀던 것을 상상케 하누나."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옥저(沃沮) 땅인데, 한(漢) 나라가 현도군(玄?郡)을 두었다 : 뒤에 군(郡)으로 옮겼으며, 지금 이르는
현도는 옛날 부(府)를 말하는 것이다.
뒤에 도로 낙랑(樂浪)에 예속시켜 불이성(不而城) 일명 불내예(不耐濊)라고 불렀다 : 예(濊) 옥(沃) 잡거(雜居)
를 말하기 때문이다.
동한(東漢) 건무(建武) 6년 옥저(沃沮)로써 현후(縣侯)로 삼았고, 고구려(高句麗) 태조왕(太祖王)이 동옥저를
정벌하여 얻은 것이다 : 남북 옥저는 모두 고구려에 들어갔다.
당(唐) 나라 중종(中宗) 때 발해국(渤海國)을 남경(南京)에다 두고 남해부(南海府)로 하였다 : 신라 도(道)이다.
숙종(肅宗) 30년 홀로 진(鎭)으로 되었다 : 진관(鎭管)을 영흥(永興)으로 옮겼다.
방면 주동사(州東社) : 25리이다. 주남(州南) : 20리이다. 주서(州西) : 20리이다. 주북(州北) : 30리이다.
상조양(上朝陽) : 서쪽으로 30리이다. 하조양(下朝陽) : 서북쪽으로 70리이다.
동고천(東高遷) : 북쪽으로 1백 20리이다. 서고천(西高遷) : 북쪽으로 1백 10리이다.
덕천(德川) : 동쪽으로 40리이다. 덕산(德山) : 동쪽으로 60리이다. 원평(元平) : 북쪽으로 90리이다.
가평(加平) : 북평(北平)에서 10리이다. 기곡(岐谷) : 북쪽으로 40리이다. 천원(川原) : 서쪽에서 20리이다.
천서(川西) : 서쪽으로 30리이다. 연포(連浦) : 남쪽으로 40리이다. 선덕(宣德) : 남쪽으로 70리이다.
주지(朱地) : 남쪽으로 30리이다. 삼평(三平) : 위와 같다. 운전(雲田) : 동남쪽으로 30리이다.
동명(東溟) : 동쪽으로 60리이다. 퇴조(退潮) : 동쪽으로 50리이다. 보청(甫靑) : 동쪽으로 90리이다.
원천(元川) : 동북쪽으로 3백 리이며 태백산(太白山)에 이른다. 영고산(永高山) : 북쪽으로 1백 50리이다.
기천(岐川) : 서북쪽으로 1백 20리이다.
성지 도련포 장성(都連浦長城) : 고려 덕종(德宗) 때에 축조하였다.
영아 순영(巡營) : 본조 태종(太宗) 16년 본부에 관찰사영(觀察使營)을 두었으며, 세조(世祖) 때에 남북도 관찰
사(南北道觀察使)를 각각 두었다. 성종(成宗) 원년 영흥부(永興府)로 영을 옮겼으며, 중종(中宗) 4년에 전대로
하였다.
관원 관찰사 :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와 순찰사 함흥부윤(巡察使咸興府尹)을 겸하였다.
도사중군(都事中軍) :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 심약(審藥)ㆍ검률(檢律)ㆍ역학훈도(譯學訓導) : 각 1명을
두었다.
진보 중령보(中嶺堡) : 옛날에 목책(木柵)이 있었다. 숙종(肅宗) 14년에 보(堡)를 설치하고, 21년에 축성(築城)
하였는데, 북쪽에서 옛날 장진책(長津柵)까지 거리가 1백 90리이다.
○ 별장(別將) 1명을 두었다.
부전령보(赴戰嶺堡) : 숙종(肅宗) 28년 수책(竪柵)에 보를 설치하였는데, 서쪽으로 삼수(三水)의 강구보(江口堡)
에 이르고, 2백 60리이다. ○ 별장 1명을 둔다.
봉수 초고대(草古臺) :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창령(倉嶺) : 동쪽으로 60리에 있다.
창고 동창 서창고(東倉西倉庫) 14 : 모두 성내(城內)에 있다. 교제창(交濟倉) : 남쪽으로 30리 바닷가에 있다.
사창(社倉) 17처 : 선덕(宣德)ㆍ운전(雲田)ㆍ동명(東溟)ㆍ퇴조ㆍ보청ㆍ원천상(元川上)ㆍ원천하(元川下)ㆍ
영고산(永高山)ㆍ동고천(東高遷)ㆍ서고천(西高遷)ㆍ가평(加平)ㆍ기곡(岐谷)ㆍ기천ㆍ송지(宋地)ㆍ덕산(德山)ㆍ
조양(朝陽)ㆍ혼동(昏東).
목장 도련포장(都連浦場) : 남쪽으로 40리에 있으며, 지금은 폐지하여 백성에게 경작(耕作)을 허가하고,
감목관(監牧官)을 옮겨 문천(文川) 사눌도(四訥島)에 두게 하였다.
화도장(花島場).
교량 만세교(萬歲橋) : 서문 밖 성천강(城川强)에 있으며, 다리 길이는 1백 50칸이다.
토산 해삼(海蔘).
누정 무황정(無荒亭) : 낙민루(樂民樓) 서쪽 만세교가에 있다.
성루(城樓) 12 : 동쪽이 동평문(東平門)이고, 남쪽이 남화루(南華樓)이며, 북쪽이 망양루(望洋樓)이며,
서남쪽이 무도루(無?樓)이며 또 간도루(看?樓)ㆍ명도루(鳴?樓)ㆍ대로정(待勞亭)ㆍ구천각(九天閣)ㆍ
의운루(倚雲樓)ㆍ의허루(倚虛樓)ㆍ의천루(倚天樓)ㆍ장사정(壯士亭)ㆍ병포루(?砲樓)이다.
격구정(擊毬亭) : 동쪽으로 15리에 있으며, 운전사(雲田社)이다.
땅이 해문(海門)과 연했고, 사초(莎草)가 평평하고 넓게 있어 10여 리나 되어 속칭 송원(松原)이라 했다.
태조(太祖)가 어릴 때 여기서 격구하였고, 현종(顯宗) 15년에 비로소 정자를 세웠다.
단유 제성단(祭星壇) : 남쪽으로 40리이며, 도련포(都連浦)가 있다.
태조(太祖)가 잠저(潛邸)할 때 여기서 태백성(太白星)에게 제사 지냈는데, 지금은 본부(本府)에서 치제(致祭)
하였다.
사원 문회서원(文會書院) : 동북쪽으로 10리 우구봉(牛邱峯) 아래에 있다. 명종(明宗) 계해년에 세웠고,
선조(宣祖) 병자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숙종(肅宗) 병자년에 어필(御筆)을 사액하였다.
공자(孔子) : 선조(宣祖) 정미년에 세웠다. 이계손(李繼孫) : 자는 인지(引之)이며, 여흥(驪興) 사람이다. 벼슬은
병조 판서(兵曹判書)이고 좌찬성(左贊成)을 증직하였으며, 시호는 경헌(敬憲)이다.
유강(兪絳) : 자는 강지(絳之)이며 기계(杞溪) 사람이다. 벼슬은 호조 판서(戶曹判書)이며, 시호는 숙경(肅敬)
이다.
이후백(李後白) : 자는 계진(季眞)이며, 호는 청련(靑連)이고, 연안(延安) 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吏曹判書) 연양군(延陽君)이며, 좌찬성(左贊成)을 증직하였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한준겸(韓俊謙) : 자는 익지(益之)이며, 호는 유천(柳川)이고, 청주(淸州) 사람이다. 벼슬은 영돈녕(領敦寧)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도원수(都元帥)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남구만(南九萬) : 태묘(太廟)를 보라.
이광하(李光夏) : 자는 계이(啓而)이며 덕수(德水) 사람이다. 숙종(肅宗) 신사년에 연경(燕京)에서 졸하였으며,
벼슬은 판윤(判尹)이고, 영의정(領議政)으로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문덕교(文德敎) : 자는 가화(可化)이며, 호는 동호(東湖)이고, 개령(開寧) 사람이다. 벼슬은 형조 좌랑(刑曹佐郞)
이며 도승지(都承旨)로 증직되었다.
○운전서원(雲田書院) : 현종(顯宗) 정미년에 세웠으며, 영종(英宗) 정미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 : 모두 문묘(文廟)를 보라.
조헌(趙憲) : 김포(金浦)를 보라. 송시열(宋時烈) : 문묘를 보라. 민정중(閔鼎重) : 양주(楊州)를 보라.
○ 창의사(彰義祠) : 현종(顯宗)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종(正宗) 을묘년에 사액하였다.
윤탁연(尹卓然) : 자는 상중(尙中)이며, 호는 중호(重湖)이고, 칠원(漆原) 사람이다. 선조(宣祖) 임진년 본도감사
(本道監司)로서 노적(勞績)이 있었다. 벼슬은 호조 판관(戶曹判官)이며,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유응수(柳應秀) : 진주(晉州) 사람이며, 선조(宣祖) 정유년 난리에 순직하였고, 벼슬은 삼수군수(三水郡守)이며,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이유일(李惟一) : 용인(龍仁) 사람이며, 벼슬은 갑산 부사(甲山府使)이고,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한인제(韓仁濟) : 청주 사람이며, 벼슬은 남우후(南虞侯)이고,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증직되었다.
백응상(白應祥) : 연안(延安) 사람이며, 벼슬은 부령 부사(富寧府使)이고, 병조 참의로 증직되었다.
박길남(朴吉男) : 밀양(密陽) 사람인데, 벼슬은 군자첨정(軍資僉正)이며,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증직되었다.
정해택(鄭海澤) : 동래(東萊) 사람이며, 벼슬은 나난만호(羅暖萬戶)이고, 우윤(右尹)으로 증직되었다.
박중립(朴仲立) : 밀양 사람이며, 벼슬은 방원만호(防垣萬戶)이고, 우윤으로 증직되었다.
이희록(李希錄) : 전주(全州) 사람이며 벼슬은 사복첨정(司僕僉正)이고, 우윤으로 증직되었다.
박응숭(朴應嵩) : 자는 천정(天挺)이며 밀양 사람이다. 벼슬은 어면만호(魚面萬戶)이며, 군기시정(軍器寺正)을
증직하였다.
이사제(李思悌) : 전주(全州) 사람이며, 벼슬은 예빈판관(禮賓判官)이고 군기시정을 증직하였다.
한경상(韓敬商) : 청주(淸州) 사람이며, 벼슬은 예빈참사(禮賓參事)이고, 감찰(監察)을 증직하였다.
김응복(金應福) : 자는 사향(士享)이며, 경주(慶州) 사람이다. 벼슬은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이며, 감찰을
증직하였다.
영흥대도호부 永興大都護府
동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50리, 남쪽으로는 고원군(高原郡) 경계까지 14리,
서쪽으로는 평안도 맹산현(孟山縣) 경계까지 2백 25리, 평안도 영원군(寧遠郡) 경계까지 2백 10리,
북쪽으로는 정평부(定平府) 경계까지 24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의 장령진(長嶺鎭)으로, 혹은 당문(唐文) : 당(唐) 자는 당(堂) 자로도 썼다. 이라 일컫기도 했고,
혹은 박평군(博平郡)이라 일컫기도 하였는데, 고려 초기에 화주(和州)로 되었고, 광종 6년에 비로소 성보(城堡)
를 쌓았으며, 성종 14년에 화주안변도호부(和州安邊都護府)로 고쳤다.
현종 9년에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로 강등하여 본영(本營)으로 삼았는데,
고종 때에 조휘(趙暉)ㆍ탁청(卓靑)이 병마사(兵馬使)를 살해하고 온 고을과 더불어 반역하여 원 나라에 귀부
(歸附)하니, 원 나라에서 이에 쌍성 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등주(登州)와 병합하였으나, 그대로 방어사
(防禦使)라 일컫다가, 뒤에 통주(通州)와 병합하였다.
충렬왕 때에 예전대로 복구하였는데,
공민왕 5년에 군병을 보내어 이를 수복(收復)하고 화주목(和州牧)으로 하였고,
18년에 화령부(和寧府)로 승격시켜 부윤(府尹)ㆍ소윤(少尹)ㆍ판관(判官)을 두었으며, 이듬해에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본조 태조 2년에 영흥진(永興鎭)이 외할아버지 최씨(崔氏)의 관향이라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부(府)로
만들었고, 태종 3년에 본부 사람들이 조사의(趙思義)를 따라서 반란을 계획하였다 하여 군(郡)으로 강등시켰다
가, 이듬해에 전대로 회복시켰으며,
16년에 다시 화주목으로 강등하여 목사(牧使)와 판관을 두고 토관을 혁파하였다.
세종 8년에 영흥대도호부(永興大都護府)로 고쳤고, 세조 때에 진(鎭)을 설치하였으며,
성종 원년에 관찰사의 본영을 이곳으로 옮기고 부로 승격하였는데,
전하(중종) 4년에 다시 관찰사의 본영을 함흥부로 옮기고 대도호부로 강등시켰다.
군명 박평(博平)ㆍ쌍성(雙城)ㆍ화주(和州)ㆍ당문(唐文)ㆍ장령(長嶺)ㆍ화령(和寧)ㆍ역양(歷陽).
성씨 본부 최(崔)ㆍ장(張)ㆍ김(金)ㆍ석(石)ㆍ이(李)ㆍ박(朴)ㆍ길(吉)ㆍ송(宋)ㆍ한(韓)ㆍ민(閔)ㆍ유(劉)ㆍ정(鄭)ㆍ
노(盧)ㆍ방(邦)ㆍ호(扈)ㆍ고(固)ㆍ안(安)ㆍ탁(拓)ㆍ우(禹)ㆍ손(孫)ㆍ심(沈)ㆍ위(魏)ㆍ고(高)ㆍ용(龍) :
모두 내(來).
주(周) : 속(續). 영흥(永興) 최(崔)ㆍ유(劉) : 모두 속(續). 정변(靜邊) 윤(尹)ㆍ김(金)ㆍ고(高)ㆍ연(延)ㆍ박(朴)ㆍ
문(文)ㆍ이(李)ㆍ노(盧)ㆍ조(趙)ㆍ한(韓)ㆍ위(魏)ㆍ원(元)ㆍ임(任)ㆍ유(柳)ㆍ심(沈). 백(白)ㆍ오(吳)ㆍ석(石) :
모두 내(來).
장평(長平) 손(孫) : 속(續).
산천
성력산(聖歷山) : 본부 서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검산(劒山) : 본부 서북쪽 90리에 있으며, 그 위에 못이 있는데, 날이 가물 때 비를 빌면 감응이 있다 한다.
국태산(國泰山) : 본부 서쪽 15리에 있다. 산 위에 석정(石井)이 있는데, 날이 가물 때 비를 빌면 감응이 있다
한다.
병풍산(屛風山) : 본부 서쪽 60리에 있다. 그 위가 펀펀하고 넓어서 사람이 살만하며, 그 가운데에 못이 있는데
혹 사람이 들어와 살기만 하면 항상 비가 내리는 재앙이 있다 한다.
태박산(太博山) : 본부 서쪽 35리에 있는데, 웅장하게 10여 리가 구불구불 꺽여 있다.
애전현(艾田峴) : 본부 서쪽 1백 80리 지점이 되는 평안도 맹산현(孟山縣) 경계에 있는데,
옛날에는 맹주현(孟州峴)이라 했다.
오령(烏嶺) : 본부 서쪽 30리에 있다. 위에 석탑(石塔)이 있는데, 속칭 호종탑(胡宗塔)이라 한다.
광성령(光城嶺) : 본부 동쪽 30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험하다.
장평령(長平嶺) : 본부 서쪽 2백 25리 지점이 되는 평안도 맹산현 경계에 있다.
진술산(鎭戌山) : 본부 동쪽 45리에 있는데, 돌 성의 옛터가 있다.
죽전령(竹田嶺) : 본부 서쪽 1백 80리에 있다.
마유령(馬踰嶺) : 본부 서북쪽 2백 10리 지점이 되는 평안도 희천군(熙川郡) 경계에 있는데, 군사상의 요해지
(要害地)이다.
농암동(籠岩洞) : 부 동쪽 15리에 있다. 산창동(山倉洞) : 본부 서쪽 70리 지점에 있다.
바다 : 본부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비류수(沸流水) : 정변사(靜邊社)에 있다. 본부에서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그 근원의 물구멍의
원경(圓徑)이 5척 3촌이나 되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데, 물이 솟아나와 냇물이 되어 용흥강(龍興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용흥강 : 본부 동북쪽 2리에 있으니, 옛이름은 횡강(橫江)이다. 그 근원이 넷이 있는데, 하나는 비류수이고,
하나는 마유령에서 나오고, 하나는 애전현에서 나오며, 하나는 양덕현(陽德縣) 경계의 거차령(居次嶺)에서 나오
는데, 고암(庫岩)에 이르러 송어탄(松魚灘)과 합류해서는 횡천(橫川)이라 하고, 용신당(龍神堂)을 지나 진정사
(鎭靜寺) 서쪽 절벽 아래에 이르러서는 창경연(??淵)이라 부르는데, 아래에 넓은 여울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흰
돌이 있어 형상이 흰 말과 같으며, 그 돌이 잠기고 드러나는 것으로써 물의 깊이를 안다고 한다. 읍성(邑城)의 동
북쪽을 지나서 이 강이 되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하륜(河崙)이 사명을 받들고 이곳에 이르니, 도순문사(都巡問使) 강회백(姜淮伯)이 강 중류에 술자리를 벌여
놓고 청하여 말하기를, "본부는 곧 도조(度祖)ㆍ환조(桓祖)가 거주하던 땅이며, 태조가 이곳에서 태어나셨는데
도 아직 그 명칭이 없으니, 또한 하나의 유감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하륜이 비로소 용흥(龍興)이라 이름지
었다는 것이다.
웅도(熊島) : 본부 동남쪽 95리에 있는데, 그 둘레가 15리이다.
저도(猪島) : 본부 동쪽으로 70리 떨어진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저도(大猪島) : 본부 동쪽 60리에 있다. 모도(茅島) : 본부 동쪽 1백 60리에 있다.
말응도(末應島) : 흑도(黑島)라고도 한다. 본부 동쪽 90리 지점에 육지와 연해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담천(潭泉) : 본부 동쪽 15리에 있다. 물이 약간 미지근하고 짠데, 이 물에 목욕하고서 병이 나은 자가 많았다
한다.
토산 실ㆍ삼ㆍ 댓살[竹箭] : 우리 세조 때에 강원도에서 배로 대나무 뿌리를 싣고 와서 저도에 심었다.
쇠 : 산창동(山倉洞)에서 난다. 납 : 본부 동쪽 독지사(禿旨社)에서 난다.
오미자ㆍ지치ㆍ안식향ㆍ인삼ㆍ송이버섯ㆍ복령ㆍ벌꿀ㆍ여항어ㆍ숭어ㆍ삼치ㆍ연어ㆍ게ㆍ은어ㆍ송어ㆍ홍합ㆍ
넙치ㆍ황어ㆍ홍어ㆍ과어ㆍ청어ㆍ전복ㆍ방어ㆍ굴ㆍ조개ㆍ도루묵ㆍ고등어ㆍ해삼ㆍ미역ㆍ소금
성곽 성력산성(聖歷山城) :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2천 9백 82척에 높이가 5척이며, 그 안에 한 개의 우물과
한 개의 못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산창동성(山倉洞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5천 58척에 높이가 4척이며,
군창이 있다.
봉수 진술산봉수(鎭戌山烽燧) : 서쪽으로는 고원군(高原郡)의 웅망산(熊望山)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고령인성
(古寧仁城)과 응한다.
고령인성봉수(古寧仁城烽燧) : 본부 동쪽 40리에 있는데, 북쪽으로는 정평부(定平府)의 원정현(元定峴)과 응
하고, 남쪽으로는 진술산과 응한다.
신증 말응도봉수(末應島烽燧) : 북쪽으로는 정평의 도안현(道安峴)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문천(文川)의 황석재
(黃石岾)와 응한다. 금상(중종) 5년에 진술산과 고령인성의 두 봉수를 폐지하고 이곳으로 옮겨 합쳤다.
궁실 선원전(璿源殿) : 본부 동남쪽으로 13리 흑석리(黑石里)에 있으니, 곧 환조(桓祖)의 옛 저택으로 태조가
출생한 곳이다. 정통(正統) 계해년에 정인지(鄭麟趾)가 태조의 수용(?容 초상화)을 여기에 받들어 모셨는데, 영
정(影幀) 뒤에 씌어져 있기를, "청룡(靑龍)ㆍ백호(白虎)가 좌우로 뻗었는데, 마치 산 호랑이가 바위 위에 버티고
앉은 듯하다. 공후(公侯)의 부귀와 영화로운 세대로 일세를 통솔하신 대장군(大將軍)이다. 우레같이 떨친 명예
천하에 두루 퍼지고, 사해(四海)에 막힘이 없이 거서(車書)가 통일되었네6. 3척 칼끝으로 온 나라를 편케 하고,
한 개의 채찍 끝으로 천하를 평정하셨네."란 56자의 글귀가 있다. ○ 참봉(參奉) 2명이 있다.
신증 이숙함(李叔?)의 시에, "임금의 수레가 형산(荊山 황제(皇帝)의 돌아간 곳)에서 쉬시니[晏駕] 보좌(寶座)
가 비었는데, 수용(?容)을 우러러 절하고 뵈오니, 거듭 의의(依依)하여라. 분명 한 폭의 단청이건만,
황홀한 중동(重瞳)이 일월같이 빛나네. 미물들도 옥전(玉殿)에 조회할 줄 알거니, 풍운(風雲)이 길이 금비(金扉)
를 보호해 주리로다. 사관(祠官 제사를 받드는 관원)이 손수 불을 피워 향로의 연기 가늘게 피어 오르는데, 남은
향기 다시 스쳐 옷에 가득히 스며 있네." 하였다.
누정 망경루(望京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한 쌍의 환자(丸子)가 판자 위를 달리는 듯, 세월을 자꾸만 재촉하니, 세상에 뜬인생
이 정녕 끝이 있도다. 한없는 나그네의 시름은 강의 비요, 오직 남은 봄이란 해당화가 있을 뿐이네.
올라보니 사방에 산구름이 어울렸고, 앉아서 보니 마을마다 보리이삭이 늘어졌구나. 먼 곳을 바라보노라면 때
로 시름도 함께 멀어지나니, 읊조리며 기대어 섰는 그 심사가 어떠할까." 하였다.
학교 향교 : 본부 남쪽 1리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문묘(文廟)를 세워 선성(先聖)을 제사하고, 학교를 세워 자제를 가르치는 것은 온 천하
가 해야 하고 만세를 지나도 폐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사람마다 타고난 천성(天性)이 있으므로 진실로 배우지
않을 수 없고, 배우는 도리는 더욱 성인(聖人)의 글을 강습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국가에서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으로 하여금 모두 문묘와 학교를 설치하게 하여 수령을 보내어 그 제사
를 받들게 하고, 교수(敎授)를 두어 그 교육을 맡게 하는 것은 대개 교화(敎化)를 베풀고 예의를 익힘으로써 인재
를 성취시켜 문명의 정치를 돕게 하고자 해서이다. 무인년 봄에 추상(樞相) 손공(孫公)이 동북면 도순문사(東北
面都巡問使)로 영흥부윤(永興府尹)을 겸임하여 부임했는데, 마침 상정(上丁 음력 2ㆍ8월 상순(上旬)의 정일(丁日
))을 당하여 몸소 석전(釋奠)을 행하다가 그 문묘와 학교가 누추하고 퇴락함을 보고, 주루룩 눈물을 흘리고는 다
시 중수하려 하면서 또 그 지세가 낮고 좁아서 고칠 수 없자 물러나 부로(父老)들에게 묻기를,
'백성이 생겨난 이후로 공자(孔子)보다 위대한 분이 없어 천하 고금에 그 사당을 지어 제사하지 않는 곳이 없는
데, 너희 부중의 문묘와 학교는 그 누추하고 좁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더욱이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이 학문보다 먼저 할 것이 없고, 이 지역이 북녘 오랑캐와 이웃하고 있어 옛날부터
무(武)만을 숭상하고 문(文)을 숭상하지 않아서 완악하고 사나운 습속이 아직도 제거되지 못하고 있다.
너희 고을이 가장 커서 모든 군읍의 본보기가 되고 있으니, 어찌 새로 지어서 유학(儒學)을 일으키고 도의를 강
론하여 주창자가 되지 않겠는가.' 하니, 중론이 모두 같아서 능히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이에 소윤(少尹)의 옛
청사의 터를 보니 그 지대가 높고 광활하며 형세가 잘 둘러싸여 있는지라, 드디어 그 자리를 닦아 역사를 시작
하고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왕래하면서 몸소 권장하고 독려하니, 소윤 이운실(李云實) 공도 기꺼이 이를 도왔고,
본읍 사람 전 판사 이용화(李用和)가 실로 그 공사를 주간하여 성묘(聖廟)와 횡사(?舍 학당)가 모두 그 위치를
맞게 잡고, 다락은 남녘으로 하고, 문은 아래로 내어 수개월이 못되어서 낙성하였다.
여러 생도 김렴(金濂)등 60여 명을 모아 교육에 힘쓰던 중, 전 성균악정(聖均樂正) 김조(金稠) 공이 마침 교수관
(敎授官)으로 왔다. 손공(孫公)이 기뻐하여 권강(勸講)에 더욱 힘을 기울여, 점차 경술(經術)을 연마하게 하니,
학업이 날로 진전되었다. 이듬해 기묘년 과거에 생원(生員) 조사(趙斜)ㆍ김렴(金濂)ㆍ이양부(李陽敷) 등이 모두
이 학당에서 성하게 일어나서 과거에 합격하니, 이는 이 부중에 학교를 설치한 이래 일찍이 없던 바로, 실로 손
공의 과거시험을 권장한 공로와 김공의 가르친 노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영락(永樂) 원년 여름에, 김공이 다시
사예(司藝)가 되고, 이양부도 박사(博士)가 되어 함께 성균관에 벼슬하고, 내가 재능 없는 사람으로 지관사(知?
事)를 맡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손공의 흥학(興學)에 심력을 다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여 영구히 전하기를 청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삼대(三代 하(夏)ㆍ상(商)ㆍ주(周))의 학교는 모두 인륜(人倫)을 밝히기 위한 것이며, 육적(六籍
육경(六經))의 글도 이 도를 밝힌 것이니, 이 학당에 거처하며 이 글을 읽는 자는 마땅히 도(道)를 찾을 것을 생
각하여야 하며, 또한 그 인륜을 두텁게 할 것을 생각하여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충(忠)을 다하고, 남의 자식이
되어서는 효(孝)를 다하며, 장유(長幼) 붕우(朋友)에 이르기까지 그 있는 바에 따라 각기 그 직분을 다한다면 이
것이 곧 유자(儒者)의 실학(實學)인 것이다. 한갓 장구(章句)에만 빠져서 몸과 마음을 닦지 않고,
그 문장을 화려하게 지어 이익과 영달만을 구하는 것을 우리 손공의 학문을 일으킨 본의가 아니다.
손공은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으로 신념이 굳고 선을 좋아한 군자이다. 내 본시 그를 중히 여겼는데,
이제 두 사람의 말을 듣고는 더욱 공이 정사를 행함에 선무(先務)부터 급히 한 줄을 알았으니 이것으로 시행한
다면 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까지 아울러 언급하는 바이다." 하였다.
역원 화원역(和原驛) : 본부 동쪽 4리에 있다. 용흥원(龍興院) : 용흥강(龍興江) 북쪽 언덕에 있다.
신증 금피원(金彼院) : 본부 북쪽 20리 정평부(定平府) 경계에 있다.
불우 안불사(安佛寺) : 광성령(光城嶺) 동쪽에 있다. 원명사(圓明寺) : 검산(劍山)에 있다.
진정사(鎭靜寺) : 태박산(太博山)에 있다. 보현사(普賢寺) : 국태산(國泰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본부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성력산에 있다. 여단 : 본부 북쪽에 있다.
비류수사(沸流水祠) : 사전(祀典)에 소사(小祀)로 기록되어 있으며, 봄가을로 향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한다.
말응도사(末應島祠) : 봄가을로 본읍에서 치제(致祭)한다.
총묘 최한기 묘(崔閑奇墓) : 본부 남쪽 15리에 있다.
고적 평주진(平州鎭) : 본부 서북쪽 70리에 있다. 본래는 영흥진(永興鎭)으로, 고려 문종 15년에 비로소 성보
(城堡)를 쌓았는데, 본조 태조 2년에 본부를 영흥부로 고치고, 인하여 그 진(鎭)의 이름을 평주라 고친 것이다.
그 성의 기초가 아직도 남아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변방의 성이 푸른 산기슭을 의지해 있는데, 가을이 깊으니 그 기운 유달리 맑구나.
이슬 맺힌 뜰에는 노란 국화가 울고, 바람 부는 난간에는 붉게 물든 나뭇잎들이 우는구나.
한 구비 시냇물이 마음을 한결 맑게 해주고, 천겹 산봉우리에 눈이 더욱 밝아오네. 다만 흘러가는 세월이 너무나
빨라서, 얼굴이 쉬이 변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하였다.
정변진(靜邊鎭) : 본부 동쪽 60리에 있는데, 돌성의 옛터가 있다. 고려 현종 22년에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고,
정종 5년에 성을 쌓았다.
○ 김극기의 시에, "우뚝한 정자 사면의 전망도 먼데, 아로새긴 대마루와 채색한 난간이 찬란하기도 하다.
노래하는 미희(美姬)가 술을 권하매 술병이 자주 비워지고, 취한 나그네가 시를 쓰니 글자가 반이나 비뚤어졌네.
옥창이 처마를 침범하는 듯 자줏빛 대가 가지런히 서 있고, 금비녀가 뜰 곁에 있는 듯 황국(黃菊)이 떨어져 있구
나. 담 너머로 멀리 단풍나무를 바라보니, 어느 곳의 수풀이 사씨(謝氏)의 집 같은가." 하였다.
영인진(寧仁鎭) : 본부 동쪽 60리에 있으며, 청원(淸源)이라고도 하는데, 본조 태조(太祖) 6년에 성을 쌓았다.
장평진(長平鎭) : 본부 동쪽 45리에 있다. 본래는 장평진으로 옛날에는 고질달(古叱達)이라 일컬었는데, 고려
광종 20년에 비로서 성을 쌓고, 공민왕 6년에 현(縣)으로 고쳐 영(令)을 두었다.
요덕진(耀德鎭) : 본부 서쪽 1백 20리에 있다. 본래는 현덕진(顯德鎭)으로 고려 현종 14년에 성을 쌓았으며,
공민왕이 현(縣)으로 고쳤다.
○ 이상은 현재 모두 폐하여 사(社)로 만들었다.
○ 사(社)라는 것은 이(里)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본도 사람들이 이(里)라고 칭하는 것은 모두 사(社)인 것이
다.
북루(北樓) : 김극기의 시에, "나무와 바위가 쌓인 가운데 울긋불긋한 정자, 붉은 티끌은 일어나지 않고 녹음만
짙구나. 물은 두 갈래로 흘러 제비꼬리같이 나뉘어지고, 산은 두서너 봉우리 솟아 자라가 머리를 든 듯, 대 이슬
뿌려 개인 낮에도 비를 이루고, 솔바람 불어 더운 철에도 가을같구나. 누가 능히 달 아래에서 유곤(劉琨)의 휘파
람 불어, 오랑캐의 혼백이 놀래어 북녘 땅으로 도망가게 하려나." 하였다.
희우루(喜雨樓)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참담한 가을빛 속에 변방의 해가 잠기고, 어둠침침한 바다 기운이 숲
안개와 섞여 있네. 천리 시야 안에 농상(農桑)이 풍요하니, 옛날의 강포(强暴)한 자들이 몇 번이나 잘못을 뉘우
쳤는고." 하였다.
고철옹성(古鐵甕城) : 본부 서쪽 2백 10리 지점에 있다. 토축(土築)으로, 본래 평안도 맹산현(孟山縣) 경계에 있
던 것을 본부로 이속시킨 것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명환 고려 지채문(智蔡文) : 현종 때에 거란 군사가 침입하자, 채문을 보내어 군병을 거느리고 가서 화주(和州)
에 진(鎭)을 치고서 동북방을 방비하게 하였다. 김보당(金甫當) : 의종(毅宗) 때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가 되었는데 담력과 기개가 있었다. 정중부(鄭仲夫) 등이 왕을 거제현(巨濟縣)으로 추방하니, 이듬해에 보당이
중부 등을 치고 다시 의종을 세우려고, 녹사(錄事) 이경직(李敬直)ㆍ장순석(張純錫)ㆍ유인준(柳寅俊)과 병마사
배윤재(裵允材), 지병마사(知兵馬使) 한언고(韓彦固) 등과 군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여 의종을 받들고 계림
(鷄林)으로 나가 있다가,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에 잡혀 있었는데, 이의방(李義方)이 국문(鞠問)하여 죽였다.
이공로(李公老) : 명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판관(判官)에 선임되었는데, 사재(私財)를 내어 백성의 부세(賦稅)를
대차해 주었고, 치적이 한 도내에서 뛰어나 사의서승(司儀署丞)으로 발탁하였다.
본조 이의흡(李宜洽) : 세종 때에 부사(府使)가 되었는데, 치적이 탁월하여 특별히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
하였다.
이함장(李?長) : 부사(府使)로 있었다. 이영구(李英?) : 판관(判官)으로 있었다.
이계손(李繼孫) : 관찰사로 부윤(府尹)을 겸임하였다. 처음에 북쪽 사람들은 학문이란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계손이 나이 어린 자제들을 모아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등을 가르치고, 과거를 권장하는 법을 세워 장려
하니, 이로부터 사람들이 학문의 열풍을 일으켜 6진(六鎭)에서도 과거에 급제하는 자가 있었다.
인물
고려 최한기(崔閑奇) : 의혜왕후(懿惠王后)를 낳아 환조(桓祖)의 배필이 되어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
을 낳았다. 원 나라에서 천호(千戶)를 제수받았고, 본조에서 판문하부사 영흥백(判門下府使永興伯)을 증직(贈
職)하였으며,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본조 김원계(金原桂) : 태조 때에 이성만호(泥城萬戶)가 되었다. 이때 왜적이 선주(宣州)에 쳐들어 왔는데,
원계가 군병을 인솔하고 구원하러 가서 힘써 싸워 적의 포위망을 뚫고 드디어 승세(勝勢)를 타고 추격하여
오랑캐 속으로 돌입하였으나 적에게 살해되었다.
우거 고려 전영수(田永需) : 벼슬이 지주사(知州事)에 이르렀는데, 일찍 벼슬을 사퇴하고 물러와 살았다.
둔촌(遁村) 이집(李集)이 그를 찾아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시(詩)를 짓기를, "과거 동기생 전지주(田知州)를 수
십 년 동안 만나지 못했기에, 길을 돌아 멀다 않고 유유히 채찍을 재촉하여 그대를 찾아왔네. 날씨는 차고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초가집이 산을 의지하고 있네. 마침 약을 캐러 가고 없어 한이불 속에서 자지 못하였네.
도연명(陶淵明)이 일찍 돌아갔으니, 응당 초은편(招隱篇)이 있으리라. 가련하다. 소계자(蘇季子 소진(秦蘇))여,
어찌 성곽(城郭)을 등진 전택(田宅)이 없었단 말인가. 이웃에 집짓고 살기로 본래 언약하였으니, 나이 늙거든
서로 숙연(宿緣)을 찾아보세나." 하였다.
제영 화주(和州) 객사(客舍)에 비가 새벽까지 연이어 내리는데 : 정몽주의 시에, "화주 객사에 비가 새벽까지 연
이어 내리는데, 문 밖에서는 여전히 조두(?斗) 소리가 들려오네. 장막 안에 장군(將軍)은 촛불을 밝힌 채로 앉아
있으니, 새벽녘에는 귀밑에 흰 실가닥 더 얻게 되리라." 하였다.
성한 아름다운 기운이 신주(神州)를 싸고 있네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천제가 맑은 시냇물을 보내어 땅에서
솟아나오니, 성한 아름다운 기운이 신주를 싸고 있네. 순(舜)임금의 옛날 밭갈고 고기잡던 그 자취는 모두 이
용흥강과 성력산(聖歷山) 머리에 있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남옥저(南沃沮) 땅이다. 숙종(肅宗) 30년 부(府) : 정평(定平)ㆍ고원(高原).
방면 홍인(洪仁) : 부내(府內)이다. 복흥(福興) : 서북쪽으로 25리이다. 순녕(順寧) : 남쪽으로 20리이다.
억기산(億岐山) : 동남쪽으로 45리이다. 장평(長平) : 동남쪽으로 50리이다. 영인(寧仁) : 동북쪽으로 70리이다.
이인(里仁) : 북쪽으로 60리이다. 덕흥(德興) : 동북쪽으로 20리이다. 장흥(長興) : 북쪽으로 20리이다.
정변(靜邊) : 서북쪽으로 70리이다. 요덕(耀德) : 서쪽으로 1백 50리이다. 횡천(橫川) : 서쪽으로 70리이다.
운곡(雲谷) : 서남쪽으로 처음이 1백 80리이고, 끝이 2백 30리이다.
영아 중영(中營) 인조(仁祖) 때에 설치하였다. ○ 중영장(中營將)은 본부사(本府使)가 겸한다.
○ 속읍(屬邑)은 영흥(永興)ㆍ정평(定平)ㆍ고원(高原)이다.
봉수 성황치(城隍峙) : 서쪽으로 5리이다. 덕기(德?) : 북쪽으로 20리이다.
창고 부창(府倉) : 서쪽으로 3리이다. 전세창(田稅倉) : 서쪽으로 1리이다.
교제창(交濟倉) : 두산사(頭山社)이다. 두산창(頭山倉) : 남쪽으로 30리이며 순녕사(順寧社)이다.
평창(坪倉) : 동쪽으로 40리이며 장평사(長平社)이다. 해남창(海南倉) : 동남쪽으로 70리이다.
해북창(海北倉) : 동쪽으로 60리에 있으며, 영인사(寧仁社)이다. 왕성창(王城倉) : 동쪽으로 60리이다.
독창(禿倉) : 동쪽으로 35리에 있으며, 이인사(里仁社)이다. 덕창(德倉) : 동쪽으로 15리이며, 덕흥사(德興社)
이다. 용흥창(龍興倉) : 북쪽으로 5리이며, 장흥사(長興社)이다.
용신창(龍神倉) : 서쪽으로 45리이며, 정변사(靜邊社)이다. 산창(山倉) : 서북쪽으로 60리이며, 정변사이다.
요창(耀倉) : 서쪽으로 1백 30리이며, 요덕사(耀德社)이다. 가창(假倉) : 서쪽으로 1백 50리이며, 요덕사이다.
사창(社倉) : 서쪽으로 1백 65리이다. 산성창(山城倉) : 서쪽으로 2백 20리이다.
미놀창(尾?倉) : 서남쪽으로 1백 60리이며, 아울러 횡천사(橫川社)이다. 운창(雲倉) : 서쪽으로 2백 30리이다.
천을창(天乙倉) : 서남쪽으로 1백 60리이다.
철수창(鐵水倉) : 서쪽으로 1백 10리이며, 아울러 운곡사(雲谷社)이다.
역참 화원역(和原驛) : 동쪽으로 4리이다. 평원역(平原驛)ㆍ통화역(通化驛)ㆍ관문참(官門站).
목장 말응도장(末應島場) : 축성(築城)이 2백 70파(把)이고, 목책(木柵)이 77파이며, 전답(田畓)이 있고,
목자(牧子)가 있다.
교량 용흥강교(龍興江橋) : 북쪽으로 2리이며, 여름 장마에는 배를 쓴다.
토산 석이버섯ㆍ잣[海松子]ㆍ청려석(靑礪石)ㆍ배[梨].
사원 흥현서원(興賢書院) : 광해주(光海主) 임자년에 세웠으며, 정사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 : 모두 문묘(文廟) 편을 보라. 이계손(李繼孫) : 함흥(咸興)편을 보라.
○ 정충사(精忠祠) : 숙종(肅宗) 을묘년에 세웠으며, 정종(正宗)을 묘년에 사액하였다.
김경복(金慶福) : 벼슬은 종성부사(鐘城府使)이며,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증직하였다.
이몽서(李夢瑞) : 벼슬은 장간현감이며, 군자첨정(軍資僉正)을 증직하였다.
정평도호부 定平都護府
동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30리, 남쪽으로는 영흥부(永興府) 경계까지 45리,
서쪽으로는 평안도 영원군(寧遠郡) 경계까지 1백 25리, 북쪽으로는 함흥부(咸興府) 경계까지 2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1리이다.
건치연혁 옛날에는 파지(巴只) : 선위(宣威)라고도 불렀다. 라고 일컬었는데,
고려 성종 2년에 천정만호부(千丁萬戶府)를 두었다. 정종 7년에 비로소 성보(城堡)를 쌓고 관문(關門)을 설치하
고는 정주방어사(定州防禦使)로 하였는데, 고종 때에 원 나라에 함몰되었다. 공민왕 5년에, 군병을 보내어 이를
수복하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르다가, 태종 13년에 평안도 정주(定州)와 이름
이 같다는 이유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각각 1명.
군명 파지(巴只)ㆍ선위(宣威)ㆍ천정(千丁)ㆍ중산(中山)ㆍ정주(定州).
성씨 본부 안(安)ㆍ임(林)ㆍ신(申)ㆍ김(金)ㆍ최(崔)ㆍ한(韓)ㆍ이(李)ㆍ전(全)ㆍ진(陳)ㆍ두(杜) : 모두 속(續).
장곡(長谷) 맹(孟)ㆍ김(金)ㆍ연(燕) : 모두 속. 원흥(元興) 이(李) : 양성(陽城). 정(鄭) : 장기(長?).
김(金) : 곡주(谷州). 선덕(宣德) 한(韓)ㆍ김(金) : 모두 등주(登州). 안(安) : 장기.
산천 비백산(鼻白山) : 본부 북쪽 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도성산(到城山) : 본부 서쪽 10리에 있다.
검산(劒山) : 장곡현(長谷縣)에 있으니, 본부와는 서쪽으로 1백 리가 떨어져 있다.
도안산(道安山) : 본부 남쪽 50리에 있다. 당산(堂山) : 본부 남쪽 45리에 있다.
원정현(元定峴) : 본부 남쪽 32리에 있다. 성산(城山) : 예원현(豫原縣)에 있으니, 본부 남쪽 33리에 있다.
가막동(加莫洞) : 본부 서쪽 1백 10리 지점에 있으니, 평안도 영원군(寧遠郡) 경계에 있다.
바다 : 본부 동쪽 30리에 있다. 생천(?川) : 본부 남쪽 50리에 있으며, 지금은 금이강진(金伊江津)이라고 하니,
바로 장계천(長溪川)의 하류이다.
장계천 : 본부 남쪽 33리에 있으며, 그 근원이 가막동에서 나온다.
감상진(甘祥津) : 생천이 남쪽으로 흘러 33리 지점에 이르러 이 나루가 되어 도안포(道安浦)로 들어간다.
토산 실ㆍ삼ㆍ지치ㆍ인삼ㆍ복령ㆍ오미자ㆍ벌꿀ㆍ사향(麝香)ㆍ안식향(安息香)ㆍ은어ㆍ삼치ㆍ도루묵ㆍ게ㆍ
송어ㆍ연어ㆍ고등어ㆍ황어ㆍ청어ㆍ전복ㆍ조개ㆍ미역ㆍ뱅어[白魚]ㆍ과어(瓜魚)ㆍ홍합ㆍ날다람쥐ㆍ돈피ㆍ
소금ㆍ수유(?油)ㆍ숭어ㆍ전어(錢魚)ㆍ방어. 신증 잣.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5천 9백 28척,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10개의 우물과 3개의 못이
있는데, 북쪽은 옛 장성(長城)에 의지해 쌓았다.
관방 도안포영(道安浦營) : 본부 남쪽 52리에 있으며, 남도(南道)에 예속되어 있다.
○ 수군 만호(水軍萬戶) 1명이 있다. 신증 금상전하 4년에 이를 혁파하였다.
봉수 비백산봉수(鼻白山烽燧) : 북쪽으로는 함흥부 성관산(城串山)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원정현(元定峴)과
응한다.
원정현봉수(元定峴烽燧) : 남쪽으로는 영흥부(永興府)의 고령인성(高寧仁城)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비백산과
응한다. 신증 도안현봉수(道安峴烽燧) : 본부 남쪽 50리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비백산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영흥의 말응도(末應島)와 응한다. 정덕(正德) 경오년에 원정현봉수를 혁파하고 이곳으로 옮겨 합한 것이다.
학교 향교 : 본부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봉대역(蓬臺驛) : 본부 북쪽 5리에 있다. 주천역(酒泉驛) : 예원현(預原縣)에 있으니, 본부와 50리 거리이다.
초원역(草原驛) : 본부 남쪽 35리에 있다. 습현원(濕峴院) : 본부 서쪽 31리에 있다.
신증 남산원(南山院) : 본부 남쪽 5리에 있다. 생천원(?川院) : 본부 남쪽 43리에 있다.
불우 관음사(觀音寺) : 도성산에 있다. 정림사(正林寺) : 도안산에 있다. 환희사(歡喜寺) : 백운산(白雲山)에 있다.
효순사(孝順寺) : 중봉산(中峯山)에 있다. 비사문사(毗沙門寺) : 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본부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비백산사(鼻白山祠) : 《사전(祀典)》에 북악(北嶽)
으로 삼고, 중사(中祀)로 기재되어 있다. 봄가을마다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한다. 성황사 : 비백산에 있다.
여단 : 본부 북쪽에 있다.
고적
장곡폐현(長谷廢縣) : 본부 남쪽 55리에 있다. 본래는 고려 장주(長州)로, 가림(?林) 혹은 단곡(端谷)이라고도
하였는데, 현종 3년에 성을 쌓고, 9년에는 장주 방어사(長州防禦使)로 일컫다가, 뒤에 현(顯)으로 강등시키고,
본부의 속현으로 하였는데, 본조 세종 4년에 현을 혁파하고 장곡사(長谷社)로 삼았다.
예원폐현(預原廢縣) : 본부 남쪽 45리에 있다. 고려 정종 10년에 생천(?川)에 성을 쌓고 원흥진(元興鎭)을 설치
하여 진사(鎭使)를 두었으며, 예종 11년에는 예주(預州)에 성을 쌓고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는데, 뒤에 본부의
속현으로 하였다. 본조 태조 7년에 예주와 원흥을 합하여 예원군(預原郡)으로 하였는데, 세조 4년에 군(郡)을 없
애고 본부의 속현으로 하였다. 지금은 독산사(禿山社)라 하고, 군창(軍倉)이 있는데, 별칭 원성(原城)이라고도
한다. 옛 장성(長城) : 고려 때 쌓은 것으로 서쪽으로는 큰 고개를 넘고, 동쪽으로는 도련포(都連浦)와 연접해 있
는데, 세 겹으로 참호(塹壕)를 둘러서 여진(女眞)을 막았으니, 이곳이 바로 삼관문(三關門) 땅이다.
의주(義州)에 자세히 나와 있다. 옛 장주성(長州城) : 본부 서남쪽 55리에 있다. 석축으로 그 주위가 2천 2백 3척
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옛 원흥진(元興鎭) : 본부 남쪽 50리에 있다. 토성(土城)으로 주위가 4천 4백 17척에 달하는데, 지금은 폐해 버
렸다. 수시리고성(隨時里古城) : 본부 남쪽 40리에 있다. 토축으로 주위가 1천 1백 91척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
다. 동쪽으로 예원군(預原郡)과 5리가 떨어져 있다.
세류고성(細柳古城) : 본부 남쪽 30리에 있다. 토축으로 그 주위가 4천 2백 28척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봉대고성(蓬臺古城) : 본부 북쪽 6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2천 2백 60척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지금은 고읍성(古邑城)이라 부른다.
금이강성(金伊江城) : 본부 남쪽 50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7백 18척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여위고성(汝委古城) : 본부 서쪽 40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2백 82척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장곡역(長谷驛) : 옛터가 장곡현에 있다. 신증 도안포폐진(道安浦廢鎭).
효자 본조 정득신(鄭得信) : 주이리(朱伊里) 사람이다. 아버지가 고질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서 약에 타서
드리니, 그 병이 즉시 나았다 한다. 성종 4년에 이 사실이 보고되어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개펄은 남으로 선덕진(宣德鎭)과 연해 있고 : 정몽주의 시에, "정주(定州)에서 중구일(重九日 9월 9일)에
높은 산에 올라보니, 의구한 누런 국화가 눈에 붉게 비쳐오네. 개펄은 남으로 선덕진과 연해 있고, 산봉우리는
북으로 여진성(女眞城)에 의지해 있구나. 백년간 싸우던 나라의 흥하고 망한 일들이 만리 길 나그네의 심정을
비분에 젖게 하네. 술자리를 파하고 원수(元帥)에게 부축되어 말에 오르니, 나지막한 산의 비낀 해가 붉은 깃발
을 비춰주네." 하였다.
흰 느릅나무 많은 곳에서 말 울음소리 자주 들려오네 : 정추(鄭樞)의 시에, "정주 관문 밖엔 풀이 마냥 무성한데,
사막에는 인기척 없고 해는 서쪽으로 향해 가네. 비린내 나는 바닷바람이 전사자의 백골(白骨)에 부는데, 흰
느릅나무 많은 곳에서 말 울음소리 자주 들려오네." 하였다.
가시밭을 헤치고서 높다란 집을 지었고 : 최이(崔?)의 시에, "태수(太守)가 옛날 명관인 황패(黃覇)보다 훌륭하니,
이 중산(中山 정평)이 곧 황패가 다스리던 영천(穎川)이 아니런가. 가시밭을 헤치고서 높다란 집을 짓고 송아지
를 머물러 두어 선현(先賢)의 일을 본받네." 하였다.
땅이 다하니 나무가 냇물에 떠 있는 듯하네 : 고득종(高得宗)의 시에, "하늘이 나지막하니 구름이 산봉우리로
나오고, 땅이 다하니 나무가 냇물에 떠 있는 듯하네."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동옥저(東沃沮) 땅이다. 정종(正宗) 8년 현으로 강등되었으며, 17년 다시 승격하여 중산(中山)이라
하였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부내(府內) : 끝이 10리이다. 주이(朱伊)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여인(汝仁) :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귀림(歸林) :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독산(禿山) : 남쪽으로 45리이다. 파춘(播春)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세류(細流) :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산지(山知) :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장곡(長谷)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50리이다.
성지 산지성(山知城) :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주이성(朱伊城)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봉수 왕금동(王金洞) : 남족으로 30리에 있다.
창고 읍창(邑倉) : 북쪽으로 2리에 있다. 북창(北倉) : 북쪽으로 20리에 있으며 주이사(朱伊社)이다.
신창(新倉) 세 곳 : 모두 여인사(汝仁社)에 있는데, 상창(上倉)은 부(府)에서 80리에 있으며. 중창(中倉)은 부
에서 50리에 있고, 하창(下倉)은 부에서 30리에 있다.
산창(山倉) : 서남쪽으로 35리에 있으며 장곡사(長谷社)이다.
남창(南倉) 두 곳 : 하나는 금강(金江) 북쪽 세류사(細柳社)에 있는데, 부(府)에서 30리에 있고 하나는 금강
남쪽 독산사(禿山社)에 있는데, 거리가 40리이다.
해창(海倉) 두 곳 : 하나는 금강 북쪽 파춘사(播春社)에 있는데, 부에서 45리에 있고,
하나는 금강 귀림사(歸林社)에 있는데, 부에서 55리에 있다.
초창(草倉) : 초원역(草原驛) 곁에 있다.
역참 주천역(酒泉驛) : 남쪽으로 50리에 있다.
진도 감상진(甘祥津) : 동남쪽으로 50리에 있으며, 안포(安浦) 연해(沿海)의 소로(小路)와 통한다.
교량 금강교(金江橋) : 남쪽으로 35리에 있으며, 여름 장마에는 배를 쓴다.
지경교(地境橋)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봉대교(蓬臺橋) : 북쪽으로 8리에 있다.
덕포교(德浦橋) :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산지교(山知橋) 두 곳 :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남산교(南山橋) : 남쪽으로 2리에 있다.
고원군 高原郡
동쪽으로는 영흥부(永興府) 경계까지 15리, 북쪽으로는 영흥부 경계까지 20리,
남쪽으로는 문천군(文川群) 경계까지 15리, 서쪽으로는 평안도 양덕현(陽德縣) 경계까지 1백 1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7백 16리이다.
건치연혁 옛 덕령진(德寧鎭)으로 : 홍원군(洪源郡)이라고도 한다. 고려 광종 24년에 비로소 성을 쌓고,
성종 14년에 고주 방어사(高州防禦使)로 하였다가, 현종 19년에 봉화산(鳳化山) 남쪽에 성을 쌓고 읍 청사를
거기로 옮겼으며, 공민왕 5년에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는데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郡)
으로 만들었다.
관원 군수ㆍ 훈도 : 각 1명.
군명 덕령(德寧)ㆍ홍원(洪源)ㆍ고주(高州).
성씨 본군 김(金)ㆍ이(李)ㆍ조(曹)ㆍ한(韓) : 등주(登州). 애수(隘守) 한(韓) : 속(續).
산천 가산(?山) : 군 북쪽 1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웅망산(熊望山) : 군 북쪽 13리에 있다.
구룡산(九龍山) : 군 서쪽 70리에 있다. 굴성산(屈城山) : 군 북쪽 15리에 있다.
벌라산(伐羅山) : 군 서쪽 10리에 있다. 학산(鶴山) : 군 서쪽 40리에 있다.
관여령(串餘嶺) : 군 서쪽 1백 10리 지점에 있는 평안도 양덕현(陽德縣) 경계에 있다.
죽전령(竹田嶺) : 군 서쪽에 90리에 있다.
덕지탄(德之灘) : 군 북쪽 7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어서 하나는 관여령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영흥부 죽전
령에서 나와 조장탄(照章灘)과 합류하여 군청 남쪽을 지나 이 여울이 되고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어량(魚梁)의 이익이 온 도내의 으뜸이다.
신당연(神堂淵) : 군 북쪽 10리에 있다.
전탄(箭灘) :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문천군(文川郡) 산천에도 나와 있다.
발산제(鉢山堤) : 군 동쪽 5리에 있다.
토산 실ㆍ삼ㆍ인삼ㆍ오미자ㆍ지치ㆍ숫돌[礪石] : 군 서쪽 원기이(院?伊)에서 난다.
등석(燈石) : 벌라산 백석굴(白石窟)에서 난다. 사향ㆍ연어ㆍ송어ㆍ과어ㆍ황어.
봉수 웅망산봉수(熊望山烽燧) : 동쪽으로는 영흥부 진수산(鎭戍山)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문천군 천불산(千佛山)과 응한다.
학교 향교 : 군 동쪽 2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군 서쪽 1리로 옮겼다.
역원 통달역(通達驛) : 군 서쪽 5리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연기 낀 버들가지 땅에 늘어져 금실을 나부끼는데, 몇 번이나 꺾여서 정든 사람 이별
속에 주어졌나. 숲 밖의 한 마리 매미 객의 한 아는 듯 소리 길게 뽑으며 석양이 물든 가지에 와서 오르네."하였다.
거방역(巨防驛) : 애수진(隘守鎭)에 있다. 지금은 폐해 버렸다. 요광원(要光院) : 군 서쪽 40리에 있다.
전탄원(箭灘院) : 전탄 언덕에 있다.
불우 서운사(栖雲寺) : 웅망산에 있다. 학산사(鶴山寺) : 도성산(道成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 북쪽 2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 군 북쪽 2리에 있다.
고적 애수진(隘守鎭) : 군 서쪽 70리에 있다. 석축으로 둘레가 1천 5백 68척인데, 옛날에는 이병(梨柄)이라 하였
다. 고려 성종 2년에 쌓은 것으로 본래는 문주(文州)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공민왕 9년에 본군에 예속시켰다.
지금은 폐해 버렸다.
고군(故郡) : 지금의 군 청사 북쪽 15리에 있다. 성종 22년에 군 청사가 영흥(永興)과 매우 가까우며, 또 화재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전염병에 걸린다하여 관아(官衙)를 발산사(鉢山社)로 옮겼다.
명환 본조 이적(李績).
제영 남쪽 교외에는 누워있는 송아지도 많구나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백성들은 바지가 다섯 벌이나 된다고
노래하고, 관고(官庫)에는 9년이나 묵은 곡식이 쌓여 있네, 성인(聖人)의 덕화가 점차 동으로 뻗쳐 오니, 남쪽
교외에는 누워있는 송아지도 많구나."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옥저(沃沮) 땅이다.
방면 군내(郡內) : 북쪽으로 끝이 20리이다. 상발산(上鉢山) : 서쪽으로 20리이다.
하발산(下鉢山) :동쪽으로 25리이다. 신산(薪山) : 남쪽으로 30리이다. 산곡(山谷) : 서쪽으로 끝이 1백 10리이다.
수동(水東) : 서북쪽으로 끝이 1백 10리이다.
성지 고주시성(高州時城) : 웅망산(熊望山) 남쪽에 있는데, 광종(光宗) 24년 성고주(城高州)가 1천 16칸이며,
문(門)이 6이다.
봉화산고성(鳳化山古城) : 현종(顯宗) 19년 축조하였으며 주치(州治)를 옮겼다.
창고 군내창(郡內倉) :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전세창(田稅倉) :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읍창(邑倉) : 읍내(邑內)에 있다. 수하창(水下倉) :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수상창(水上倉) : 서쪽으로 80리에 있다. 산하창(山下倉) : 서쪽으로 60리에 있다.
산상창(山上倉) : 서쪽으로 80리에 있다. 교제창(交濟倉) : 동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영흥(永興) 땅이다.
역참 일수역(溢守驛) : 옛 일수진(溢守鎭)이 있다.
교량 덕지탄교(德之灘橋) : 북쪽으로 5리에 있다. 구령포교(仇嶺浦橋) :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사박포교(沙朴浦橋)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토산 석이버섯ㆍ벌꿀ㆍ비룻돌[硯石]ㆍ배[梨]ㆍ대추ㆍ밤.
49권 안변도호부 安邊都護府
동쪽으로 강원도 흡곡현계(?谷縣界)까지 95리이며
남쪽으로는 농도 이천현계(伊川縣界)까지 88리요, 동도 회양부계(淮陽府界)까지 85리이며
서쪽으로는 관내 영풍현계(永?縣界)까지 90리이고, 강원도 평강한계(平康縣界)까지 1백 5리이며
북쪽으로는 덕원부계(德源府界)까지 25리이요,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비열홀군(比列忽郡)이었는데 : 일명 천성(淺成)이라고도 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7년에 비열주(比列州)로 하고는 군주(君主)를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 때에 삭정군
(朔庭郡)으로 고쳤다. 고려에 이르러 등주(登州)로 고쳐 성종(成宗) 14년에는 단련사(團練使)를 두었고, 현종
(顯宗) 9년에는 등주 안변도호부(登州安邊都護府)라 고쳤다.
고종(高宗) 때에 정평(定平) 이남의 모든 읍성(邑城)이 몽고(蒙古) 군병에게 침입당하여 강릉도(江陵道) 양주
(襄州)로 옮겼다가 다시 간성(杆城)으로 옮긴 지 거의 40년인 충렬왕(忠烈王) 24년에 각기 본성으로 돌아갔었다.
본조 태종(太宗) 3년 이 고을 사람인 조사의(趙思義)가 반란을 일으켜 감무(監務)로 격하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도호부로 환원되었다.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설치하였고, 성종(成宗) 2년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
되었는데 중종 4년에 다시 격하시켜 도호부가 되었다.
속현
학포현(鶴浦縣) : 본부 동쪽 60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의 곡포현(鵠浦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금양군(金壤郡)의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본부로 예속시킨 것을 본조에서 그대로 따른
것이다.
영풍현(永?縣) : 본부 서쪽 90리에 있다. 본래 증대이(甑大伊)었는데 고려 목종(穆宗) 4년에 성을
쌓고 진(鎭)을 두었으며, 뒤에 현(縣)으로 고쳐 본부에 예속되어 온 것을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진관(鎭管) 도호부(都護府) 1개소 : 덕원(德源). 군(郡) 1개소 : 문천(文川).
관원 부사(府使)ㆍ 교수(敎授) : 각 1명.
군명 비열홀(比列忽)ㆍ천성(淺成)ㆍ삭정(朔庭)ㆍ등주(登州)ㆍ삭방(朔方)ㆍ학성(鶴城).
성씨
본부 한(韓)ㆍ전(全)ㆍ노(盧)ㆍ상(桑)ㆍ손(孫)ㆍ최(崔)ㆍ김 ㆍ장(張)ㆍ윤(尹)ㆍ형(邢)ㆍ임(任)ㆍ허(許)ㆍ송(宋) :
모두 내(來).
학포(鶴浦) 양(楊)ㆍ이(李)ㆍ맹(孟)ㆍ인(印). 맹(孟)ㆍ양(楊)ㆍ남(南)ㆍ손(孫)ㆍ김ㆍ이(李)ㆍ송(宋)ㆍ전(田) :
모두 압융수(壓戎戍)에 있다.
복령(福靈) 최(崔)ㆍ윤(尹)ㆍ송(宋)ㆍ이. 문산(文山) 허(許)ㆍ박(朴)ㆍ노(盧). 익곡(翼谷) 이ㆍ신(申) :
혹은 신(辛)이라고도 한다.
한(韓)ㆍ경(敬)ㆍ안(安)ㆍ방(芳) : 혹은 방(方)이라고도 한다. 방(方) : 철원수(鐵垣戍)에 있다.
상음(霜陰) 김ㆍ오(吳)ㆍ양(陽).
최(崔) : 동주(東州) 송(宋) : 기성(岐城)ㆍ김 : 풍양(?壤). 유(劉)ㆍ임(林) : 모두 상림(霜林).
○ 최씨 이하는 모두 화등수(禾登戍)에 있다.
서곡(瑞谷) 길(吉)ㆍ전(田)ㆍ현(玄)ㆍ원(元)ㆍ김(金)ㆍ장(張)ㆍ손(孫)ㆍ유(劉). 위산(衛山) 방(方)ㆍ나(羅)ㆍ
한(韓)ㆍ임(任)ㆍ채(蔡)ㆍ오(吳). 영풍(永?) 혁(赫)ㆍ임(林)ㆍ오(吳)ㆍ만(萬)ㆍ우(禹)ㆍ강(康)ㆍ한ㆍ유(劉) :
모두 내(來).
파천(派川) 홍(洪)ㆍ김ㆍ전(全)ㆍ이(李)ㆍ양(楊) : 혹은 양(陽)이라고도 한다.
형승
곡산(鵠山)을 앞으로 대하고 제학(?壑)을 아래로 굽어본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앞으로 곡산을 대하니 펀
펀하기 책상 같고, 아래로 제학을 굽어보니 아득하여 술잔같이 보인다." 하였다.
산천
학성산(鶴城山) : 본부 동쪽 5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그 형상이 학(鶴)모양과 흡사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한 것이다.
검봉산(劍峯山) : 본부 서남쪽 35리에 있다. 본명은 설봉산(雪峯山)인데 산위에 세 개의 석봉(石峯)이 높이 있기
때문에 속칭 검봉이라 한다.
오압산(烏鴨山) : 일명 황룡산(黃龍山)이라고도 하며 본부 동쪽 60리에 있는데, 극히 높고 남쪽으로 철령(鐵嶺)
과 연해 있다. 산마루에 못[池]이 있는데 날이 가물 때에 비를 빌면 매양 그 감응이 있다 하며, 골짜기 속에 또
아홉 개의 못[淵]이 있다.
백운산(白雲山) : 본부 동쪽 10리에 있다.
풍류산(風流山) : 익곡현(翼谷縣)에 있는데 남쪽으로 90리 거리에 있다. 그 위에 못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
를 공중에서 때로 음악소리가 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했다는 것이다. 철령(鐵嶺) : 본부 남쪽 83리에 있다.
고려 때에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철관(鐵關)이라 불렀다.
○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철령(鐵嶺)의 산은 높이 칼날과도 같은데, 동쪽으로 바다 하늘을 바라보니 아득
하기만 하다. 가을바람은 유난스러이 양쪽 귀밑을 불어 스치는데, 말을 몰아 오늘 아침에 북녘 변방에 왔노라."
하였다.
○ 변중량(卞仲良)의 시에, "철관성(鐵關城) 아랫길은 멀리도 뻗었는데, "안계(眼界)에 가득히 들어오는 노을과
물결엔 해도 기울었구나, 남으로 가고 북으로 오는 사이에 봄은 저물려 하는데, 가는 곳마다 말머리에 해당화
(海棠花)가 피었네." 하였다. 신증 남곤(南袞)이 절도사(節度使) 이장곤(李長坤)을 보내는 부(賦)에, "등주(登州)
남쪽과 연성(連城) 북녘에 큰 산들이 깎아지른 듯 하늘로 치솟으니, 그 산세가 국토를 가로질렀다.
장백산(長白山)에 뿌리를 박고 뻗어나가 남으로 수천리를 달려와서 넓게 모였다. 그 길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
을 당시에는 다만 만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이 보일 뿐이라, 우공(愚公)은 머뭇거리다가 도로 물러가고, 거령(巨
靈)도 손바닥만 어루만지다가 피해 갔다네. 인가와는 서로 막혀 통하지 않았고, 풍기(風氣)조차도 다른 구역과
막혀 있었으리. 도무지 알 수 없는 일 어느 연대(年代)에 있었는지.
새[鳥]나 넘는 이 길을 찾아 뚫었단 말인가. 처음엔 실 같은 외줄기 숲 밖으로 빙빙 돌더니, 점점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 암석 사이로 서리었다네. 인마(人馬)가 이미 통하게 됨에 따라 평탄한 큰 길을 개척하였고, 고려(高麗)
때엔 이곳에 관문을 설치하고 철관(鐵關)이라 불렀다네.
아, 슬프다, 백이(百二) 험한 요새지에서 몇 왕대(王代)의 분쟁을 겪었던고, 나는 상상하건대, 윤관(尹瓘)이 북정
(北征)할 때 예왕(睿王) 같은 영명한 임금을 만나 누대(累代)에 쌓였던 분한(憤恨)을 일거에 소탕(掃蕩) 숙청(肅
淸)하려고 생각하였다네. 위봉(威鳳)이 절월(節鉞)을 받고 장춘(長春 땅 이름)에 군사를 주둔하고는, 10만 대군
을 몰아 천리 밖에 원정할 적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이 군사를 쓰던 효릉(?陵)을 흘겨보고 한신(韓信)이 행군
하였던 정형(井?)을 밟아 들어가니, 원수(元帥)가 관문(關門)을 떠나기도 전에 그 위엄이 이미 오랑캐 땅에 떨치
었는지라, 달아나는 적병을 추격하여 파지(巴只 땅 이름)까지 나가고, 땅을 개척하여 아홉 개의 성(城)을 쌓음에
이르렀다. 개가(凱歌)를 부르며 돌아오매, 고갯길도 평탄하였으니 그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던가.
국세가 쇠퇴함에 미쳐서 조휘(趙暉)ㆍ탁청(卓靑)의 역적이 있어 나라를 배반하고 오랑캐 원(元) 나라에 붙어
화령(和寧)땅을 훔쳐서 웅거(雄據)하니, 의관(衣冠)이 관문을 경계로 한계를 그었고 반쪽 변방의 초목이 오랑캐
에게 더럽힘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내안(乃顔)의 잔당이 흉악하게 침입하여 개원령(開元嶺)을 넘어 화주(和州)ㆍ
등주(登州)를 노략하여 사람을 죽여 양식을 삼으니 어린아이들이 남지 않았다. 관군이 적의 그림자만 보아도
뿔뿔이 달아나 주력이 무너지고, 추악한 그들은 북을 울리며 관문으로 들어왔다.
정수기(鄭守琪)와 나유(羅裕)는 또한 어떤 사람이드냐. 무슨 낯으로 밝은 해를 보았던가. 비록 생명을 보전코저
나라를 저버렸다지만 어찌 나라가 멸망하고도 몸이 온전할 수 있다던가. 천험(天險)의 성곽을 버리고 지키지 않
아서 백만의 병력이 흉악한 적의 손에 섬멸되고 말았네.
또한 기강이 해이함을 볼 수 있으며, 나라의 운명도 이로 인하여 쇠퇴하였다. 지금까지도 한떨기 나뭇가지 첩첩
한 낙엽마저 그 분통한 빛을 띠고 있으리니 오히려 그 당시를 위하여 간사한 무리들을 베고 싶구나.
성이니 풍패(?沛)에서 일어나시니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케 하는 큰 뜻을 두시었네. 철관(鐵關) 서쪽에 살기
가 가득한지라 잔악한 무리들을 제거하여 동한(東韓)의 안녕을 되찾았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고 산하를 다 차지
하였으니, 옛날의 외적들 있던 곳이 이제는 지경 안에 있게 되었다.
누가 동봉(東封)의 일환(一丸)을 빌려 관방(關防)을 헐어버리고 다시 기찰(譏察)함이 없이 다만 지나가는 길손들
의 한가로운 모습만 보게 하였나. 아, 산천은 변함이 없으니 성패의 길이 다르고 험준 견고함은 예와 같아도 흥하
고 쇠한 자취가 다른 것이 어찌 그 시세(時勢)의 이롭고 불리함이 사람이 모사를 잘하고 못하는 데 연유하고,
인재를 쓰고 버리는 것이 나라 세력의 강하고 약함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그 나라를 굳게 함은
산하의 험준함으로써 하지 아니하니, 형세의 이로움이 인화(人和)만 같지 못하다.
덕을 닦지 않으면 한 배 가운데의 사람도 적국이 되나니, 위후(魏侯)의 아름다운 강산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금중(禁中)의 염파(廉頗)ㆍ이목(李牧 전국시대 조(趙) 나라의 명장)이 족히 당(唐) 나라의 국위를 떨친다는 것이
다. 오직 어진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한 나라의 장성(長成)이 되는 것은 고금이 같으니, 고려 때 상고해 보더라도
자명한 일이다. 내가 그대의 가는 것을 전송(餞送)하려 울퉁불퉁한 높은 고갯길을 올라가니, 돌아가는 구름은
빽빽하게 응결하여 찬 비를 재촉해 좔좔 퍼붓는구나. 긴 칼 빼어들고 휘파람 불어 이별에 어지러운 이 마음을
끊었노라. 어찌하면 그대와 더불어 꽁무니를 수레로 삼아 신마(神馬)를 몰아서 큰 사막을 넘고, 푸른 연하(煙霞)
를 헤치며 백두산(白頭山)의 정상에 올라 윤관(尹瓘)의 공적비(功績碑)를 어루만지고, 바다에 임하여 푸른 물결
을 잔질하여 가슴 가운데에 불평을 씻고 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 징초(徵招)의 악장(樂章)을 연주하며 돌아와
호월일가(胡越一家)의 가사(歌詞)를 임에게 바쳐볼까." 하였다
법호현(法乎峴) : 본부 동쪽 20리에 있다.
노리현(老里峴) : 본부 서쪽 55리에 있다. 고개 위에 장성(長城)을 쌓았고 연대(煙臺)가 있는데 옛날에 관방(關防)
으로 쓰이던 곳이다. 이 길은 황해도에 통한다. 바다 : 동쪽 30리에 있다. 또 본부 북쪽 20리에도 있다.
온천(溫泉) : 본부 서남북 1백 57리에 있다.
남대천(南大川) : 본부 서남북 5리에 있는데, 근원이 강원도 평강현(平康縣)의 분수령(分水嶺)에서 나와 북으로
흘러 익곡현(益谷縣)을 지나서 또 동북쪽으로 흘러 부평(富坪)에 이르러 심천(深川)이 되고, 서쪽 5리에 이르러
관도(官渡)가 되었는데 흐름이 느려져서 물이 고여 회수(匯水)를 이루었다. 동쪽 언덕이 불쑥 솟아 거북형상과
같아서 속칭 용당(龍堂)이라 이르는데 그 앞에 흰모래가 평평하게 깔려 있어 경치를 이루었으며 동북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국도(國島) : 본부 동쪽 60리에 있다
○ 이곡(李穀)의 기(記)에, "섬이 해안에서 10리쯤 떨어져 있다. 서남 모퉁이로부터 들어가 물가에 흰 모래가 흰
비단 같고 그 아래에 평지가 5ㆍ6묘(畝) 가량 된다. 그 모양이 마치 반쪽의 담벽같이 되어 있고, 가운데에 집터
가 있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중이 살던 곳이라 한다.
그 위엔 산이 고리같이 둘러 있는데 산세가 그다지 높지 않고 덩굴진 풀들이 덮여 있고 또 수목도 없어서 보기
에는 한 흙언덕에 불과하다. 배를 타고 조금 서쪽으로 가면 높고 낮은 언덕들이 점점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그 높은 언덕의 돌들은 모두 직방(直方)형으로 되어 즐비하게 벽같이 서 있고, 그 낮은 언덕의 돌들은 모두 평평
하게 원형으로 늘어서 있고 한 돌 위에 한 사람이 앉을 만한 정도의 것들이다. 그러나 가지런하게 있는 것이 아
니다. 수백 보를 더 가면 그 벼랑의 높이가 수백 척 가량 되고, 그 돌이 백색으로 방직(方直)과 장단(長短)이 한
결같이 같으며, 한 개마다 그 정상(頂上)에 조그마한 돌을 이고 있는 것이 마치 화표주(華表柱)의 머리같이 되어
있어 낯을 들고 보면 두렵고 놀랄 만한 것이 있다. 한 개의 조그마한 굴이 있어 배를 저어 들어가니 점점 좁아져
서 배를 드릴 수 없게 되고 그 굴속을 바라 보니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고 그 좌우에 얽혀 선 돌들이 겉면에 비하
여 한결 가지런하게 있었으며, 그 뒤 돌의 각부(脚部)가 늘어진 것도 모두 펀펀하고 반듯하여 바둑판처럼 되어
있는데 하나하나가 톱으로 끊은 것 같았다. 이것으로 본다면 다만 겉면만 이 같은 것이 아니고 온 섬이 곧 한 묶
음의 방석(方石)의 줄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굴속의 날카로운 암석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여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배를 돌려 북으로
가니 또 한 면이 병풍을 둘러친 것같이 되어 있는 것이 있어, 배를 버리고 내려가 배회하며 잡고 올라보니 대개
돌과 굴이 서로 다름이 없고 그 절벽이 그다지 높지 않고 그 아래가 약간 평탄한데다가 그 둥근 돌들이 배열되
있는 것이 약 1천 명의 인원이 앉을 만한 것이어서 유람객들이 반드시 이곳에서 휴식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머물러 술 마시고 있었는데 바람이 일지나 않을까 염려도 되고 또 화식(火食)하는 속인들의 머무를 곳이
아니어서 절벽을 끼고 동남쪽으로 또 수백 보를 가면 절벽의 돌이 약간 달라지고 바야흐로 철망(鐵網)을 이루어
물을 담고 이에 깎이어 조금 둥글게 되었는데, 돌의 길이가 5ㆍ60척(尺)으로 한 가닥이 다른 한 가닥과 같아서
한 면이 모두 이와 같으니 사람들이 이를 철망석(鐵網石)이라 이른다. 이것이 국도의 대개이다."라고 하였다.
○ 안축(安軸)의 시에, "푸른 바다의 한 가닥 물이 거울 같은 호수를 이루었는데, 푸른 봉우리가 사면을 둘러싸고
물은 평평하게 깔렸네, 간직한 별다른 섬이 이미 진세(塵世)의 땅이 아니거늘, 그 위에 높은 누대 있어 그림을
이루었네. 물결 속으로 해가 비치니 한 자가 넘는 잉어가 뛰어 놀고, 모랫가에 비가 개이니 한 쌍의 오리가 희롱
한다. 백년 전 선배(先輩)의 풍류는 흐터져 간 곳이 없는데, 오직 저 장송(長松)만이 늙어도 마르지 않고 있구나."
하였다.
○ 신선(神仙)의 섬이 육오(六鰲)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멀리서 의아해 바라보니, 망망(茫茫)한 갈 길이 구름
과 물결에 막혀 있네, 물에 뜬 한 송이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바닷속에 꽂힌 수많은 괴석(怪石)들이 높이
솟았구나. 조망(眺望) 속에 시력(視力)이 다해 끊어지니 이 몸에 새 날개를 갖추지 못한 것이 한스럽고, 바닷길
을 건너보니 목숨이 행여 홍모(鴻毛)처럼 가볍게 될까 두렵다. 물가 돌에 가득히 낀 이끼 위엔 마른 나뭇잎들이
흩어져 있고, 언덕을 몰아치는 바람 앞에 조그만 배가 흔들리네. 노 젖는데 지친 사공 더운 땀을 흘리고,
준비한 술자리는 가난한 고을에서 고혈(膏血)을 마저 짜낸 것이리라. 어찌 하면 이 동해물을 훨씬 불게 하여,
기이(奇異)한 지경을 모두 삼켜 이 노고를 면하게 할까.
여도(女島) : 국도(國島) 북쪽 본부와 30리 거리에 있다. 압융관(壓戎串) : 본부 동쪽 5리에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자초(紫草)ㆍ송이[松?] 댓살[竹箭] : 압융관에서 난다. 오미자(五味子)ㆍ인삼(人蔘)ㆍ
안식향(安息香)ㆍ복령(茯?)ㆍ모향(茅香)ㆍ영양(羚羊)ㆍ사향(麝香). 배[梨]: 석왕사(釋王寺)에서 나므로 세칭
석왕배[釋王梨]라 한다. 꿀[蜂蜜]ㆍ홍어(洪魚)ㆍ게[蟹]ㆍ송어(松魚)ㆍ연어(?魚)ㆍ삼치[麻魚]ㆍ전복[鰒]ㆍ
은어(銀魚)ㆍ홍합(紅蛤)ㆍ숭어[秀魚]ㆍ과어(瓜魚)ㆍ청어(靑魚)ㆍ도루목[銀口魚]ㆍ여항어(餘項魚)ㆍ넙치
[廣魚]ㆍ고리마(高里麻)ㆍ해삼(海蔘)ㆍ소유(?油)ㆍ굴[石花]ㆍ고등어[古刀魚]ㆍ소금[鹽]ㆍ조개[蛤].
성곽 학성 산성(鶴城山城) : 본부 동쪽 5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3천 9백 30척에, 높이가 12척이며, 그 안
에 네 개의 우물과 군창(軍倉)이 있다.
○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에 비렬홀성(比列忽城)을 쌓았다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한다.
관방 낭성포영(浪城浦營) : 본부 북쪽 25리에 있는데 남도(南道)에 예속되 있다.
○ 수군 만호(水軍萬戶) 1명이 있다. 신증 금상전하 4년에 혁파하였다.
봉수 사현 봉수(沙峴烽燧) : 남쪽으로는 철령(鐵嶺)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학성(鶴城)과 응한다.
학성 봉수(鶴城烽燧) : 북쪽으로는 덕원부(德源府)의 견산(見山)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사현(沙峴)과 응한다.
철령 봉수(鐵嶺烽燧) : 북쪽으로는 사현(沙峴)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강원도 회양부(淮陽府)의 소산(所山)과
응한다.
신증 낭성현 봉수(浪城峴烽燧) : 본부 북쪽 31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압융관(壓戎串)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덕원부의 장산(長山)과 응한다.
압융관 봉수(壓戎串 烽燧) : 본부 동쪽 63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마암(馬巖)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낭성현
(浪城峴)과 응한다.
마암 봉수(馬巖烽燧) : 본부 동쪽 91리에 있다. 서쪽으로는 압융관과 응하고, 동쪽으로는 강원도 흡곡현
(?谷縣)의 치공산(致空山)과 응한다.
신증 궁실 객관 동헌(客館東軒) : 이주(李?)의 시에, "철령(鐵嶺)의 천연 요새(要塞) 진중(秦中)과도 같은데, 옛
변성에서 부는 슬픈 피리소리가 먼 공중에 퍼지네, 찬 비는 무수한 산봉우리 눈[雪]에 연했고, 굶주린 갈가마귀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에 놀래어 부르짖는다. 인생 백년 가고 머무르는 가운데 몸이 먼저 늙었고, 반평생의 슬픈
일 기쁨 속에 당당했던 호기(豪氣) 꺾이었다. 만리 타향의 나그네 시름으로 말이 없는데, 관하(關河)는 멀고멀어
오랑캐의 땅과 가깝다네." 하였다.
누정 북루(北樓)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누가 옥(玉) 장막(帳幕)을 열어 하괴(河魁)를 베게했는고. 한(漢) 나
라 장군의 깃발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네. 북녘 오랑캐 위엄을 두려워하여 모두 담이 떨어졌으니 다투어 국경
의 관문을 두드리고 와서 항복하는 것 곧 보리라." 하였다.
가학루(駕鶴樓) : 객관 남쪽에 있다.
○ 이자송(李子松)의 시에, "몸은 지쳐 소리내어 하품하고, 홀로 정자에 올라서 중얼거리며 난간에 기대어 오랫
동안 머뭇거렸네. 달은 차고 기울며 산은 의구(依舊)하고, 꽃은 지고 또 피건만 흐르는 물은 변함없구나.
눈에 가득히 들어오는 구름과 노을은 살아 있는 그림이고, 성긴 발[簾]에 뿌리고 스며드는 비바람이 맑은 가을
가져오네. 곁에서 보는 사람들은 거듭 찾아온 이 길손, 분주하게 역마(驛馬)를 달리며 늙어도 쉬지 않는다고
응당 웃으리라."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묻노니, 올라와서 머문 이 누각(樓閣)을 어떤 사람이 처음에 세웠던고. 10년간 길에
분주하여 본뜻을 저버렸고 백 번이나 싸웠던 산하(山河)는 눈물 흐를 만하네. 원님의 정치 물같이 맑은데 서생
(書生)의 초라한 행색은 가을보다 쓸쓸하다. 시중(侍中)이 이곳을 지나며 써서 남긴 시구(詩句)를 우러러보고
읊조리며 그치지 못하노라." 하였다.
○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수상(首相)이 가학루(駕鶴樓)에 올라, 눈앞의 경개를 시구(詩句)에 담아 벽 사이에
머물게 하였구나. 강산은 참으로 아름다워도 나의 고향이 아닌데, 세월은 덧없이 물을 따라 흐른다. 저 멀리 바
라보니 별은 북극(北極)에 높았고, 안장에 몸을 붙여 멀리 노니던 지난 가을이 기억된다. 이 한몸 만 리 행역(行
役) 피곤함 속에서, 난간에 의지하여 잠시의 휴식을 얻었노라." 하였다.
○ 박원형(朴元亨)이 시에, "절부(節符)를 가지고 순행하다가 옛 고을 누대에 올라, 감회로 술 마시며 시 짓고
잠시 머물렀다. 구름은 패택(沛澤 한(漢) 나라 고조(高祖)의 고향. 여기서는 이태조의 고향 함흥을 말함)으로
뻗친 길 가운데서 일어나고, 강물은 기산(岐山) 골짜기로 흘러 들어가는구나. 요동(遼東)의 학(鶴)이 간 후에도
성곽은 예와 같은데, 순(舜) 임금이 갈던 밭에는 보리가 가을을 이루었네. 이 몸 이미 황하(黃河)를 두고 맹서
하는 공신(功臣)되려고 결심했는데, 누가 임천(林泉)으로 물러나는 것을 배울 것이랴." 하였다.
원수대(元帥臺) : 학포현(鶴浦縣)에 있다. 바닷가에 큰 늪이 있고, 늪 가운데에 조그마한 봉우리가 있다.
옛날에 지병마사(知兵馬使)가 이 봉우리에 와서 놀고 쉬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한 것이다.
○ 이곡(李穀)의 시에, "백경(百頃 백묘(百畝)가 1경임) 호수 가운데에 외로운 섬이 푸른데, 시인(詩人)이 개척
하여 새 정자를 지었다네. 다시 올 때에는 모름지기 술 천곡(千斛)을 싣고 오리니, 바람이 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도 뼛속까지 시원히 깨리." 하였다.
○ 정축(鄭樞)의 시에, "가벼운 노(櫓)로 서서히 저어 층대(層臺)에 오르니, 햇살은 푸른 물속을 쏘고 하늘이 거
꾸로 열려 있네. 머리를 돌려 보니 압융(狎戎) 이별도 멀지 않으니, 난주(蘭舟)에 또 밝은 달빛을 가득히 싣고 돌
아오리라." 하였다.
신증 용당정(龍堂亭) : 본부 서쪽 3리 지점에 있다.
○ 이주(李?)의 사(辭)에, "강물은 유유히 흐르는데, 손[客] 가운데는 대부(大夫)도 있고 선비[士]도 있도다.
물을 가로질러 배를 띄우고 높은 노랫소리 쇠피리[鐵笛]의 음향이 맑은 물밑까지 울리니, 자라와 악어는 춤을
추고 물고기와 용은 시름한다. 서왕모(西王母 신선의 이름) 요지(瑤池 서왕모가 사는 선경)에서 잔치를 파하고
다시 뭇 신선을 보내어 삼주(三洲 삼신산)에 노닌다. 강비(江妃 강의 여신)와 수백(水伯 해신(海神))이 드나들며
맞이하고, 풍륭(?隆 구름과 우레의 신)도 또한 달려와 심부름하네.
진회(秦淮)에서 소두(少杜 두목지(杜牧之))를 따르고 적벽강(赤壁江)에서 소선(蘇仙 소동파)과 화답하네, 혼(魂)
이 소상강(瀟湘江)ㆍ동정호(洞庭湖)에서 놀거니, 또 무슨 운(雲)ㆍ몽(夢)의 두 호수를 찾아 무엇하랴.
내 이미 농서(?西) 사람[이태백]은 아니나, 선풍(仙風)과 도골(道骨) 없는 것이 한스럽도다. 공자(孔子)가 흐르
는 것을 보고 감탄한 것 생각하니,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음을 알았노라. 또한 내 스스로 여옹(呂翁)에 비겨서
맑게 글을 읊으며 날아 지나가고 싶기도 하다마는, 오히려 묘령 가희(歌姬)의 뱃노래가 잊히지 않아서 청사(靑
蛇 여옹의 칼 이름)에 의지해 길이 탄식하노라. 철관(鐵關)을 향하여 남녘을 바라보고, 이 몸이 나그네길에 있음
을 깨달았건만 흰 구름 겹겹이 싸고 있어 아득하기만 하고, 종남산(終南山)은 한 치의 푸른 빛도 보이지 않는구
나. 충과 효가 두 길이 아니라 하지만 어찌 사은(私恩)과 공의(公義)의 구별이 없으리오. 배를 머물고 언덕에 올
라 배회하니, 하늘은 아득히 멀고 강물은 빨리 흘러간다." 하였다.
학교 향교 : 본부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옛날엔 사신(詞臣 사장(詞章)을 맡은 신하)들이 장영(將營)
안에 있었으므로 향교 백여 칸이 일시에 이루었네. 초상(肖像)을 그리니 그 기상 천지같이 크고, 덕을 노래해
찬양하니 일월같이 밝도다. 송사(松社)의 인풍(仁風)은 푸른 숲에 불고, 행단(杏壇)의 교화의 비는 붉은 꽃송이
를 적시었네. 지금에는 이 지역에 호걸들이 많아서, 글 문채 장장(??)하여 봉황의 울음소리 날렸다네." 하였다.
역원 고산역(高山驛) : 본부 남쪽 75리에 있으며, 찰방(察訪)이 있다. 본도(本道)의 속역(屬驛)이 13개가 있으니,
남산(南山)ㆍ삭안(朔安)ㆍ화등(火燈)ㆍ봉룡(奉龍)ㆍ철관(鐵關)ㆍ양기(良驥)ㆍ통달(通達)ㆍ애수(隘守)ㆍ
화원(和原)ㆍ주천(酒泉)ㆍ봉대(蓬臺)ㆍ평원(平原) 덕산(德山)이다.
○ 찰방(察訪) 1명이 있다. 삭안역(朔安驛) : 본부 북쪽 3리에 있다. 남산역(南山驛) : 본부 남쪽 25리에 있다.
봉룡역(奉龍驛) : 본부 서쪽 30리에 있다. 화등역(火燈驛) : 본부 동쪽 50리에 있다.
남산원(南山院) : 본부 남쪽 25리에 있다. 용지원(龍池院) : 본부 남쪽 50리에 있다.
증생원(拯生院) : 본부 동쪽 50리에 있다.
불우 석왕사(釋王寺) : 태조(太祖)가 잠저(潛邸) 때에 세웠다. 양로사(養老寺) : 모두 설봉산(雪峯山)에 있다.
가지사(迦智寺)ㆍ 계정암(戒淨菴)ㆍ광덕사(廣德寺)ㆍ보현사(普賢寺) : 모두 오압산(烏鴨山)에 있다.
백운사(白雲寺)ㆍ석보사(石寶寺) : 모두 백운산(白雲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본부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학성산(鶴城山)에 있으니 속칭 선위대왕(宣威大王)의 신(神)이라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신묘(神妙)한 것이란 헤아릴 길이 없어 근원을 모르는데, 현저한 은택이 인간에 퍼
져 있음을 누가 알리요. 구슬 궁전[珠宮 용궁]은 물결을 비고 붕새 나르는 바닷속에 감추었고, 옥 지붕 구름을
뚫고 곡산(鵠山)에 붙었구나. 성자(聖子)가 내린 듯 좌우에 삼렬(森列)하였고, 신왕(神王)이 밝은 모습으로 중
앙에 엄연히 좌정하였도다. 시골의 풍속은 퉁소와 북으로 날마다 신을 맞이하고 보내고, 나라의 제전(祭典)은
절부(節符)와 깃발이 때로 오고간다네. 다만 장마와 가뭄이 그 손아귀로 돌아갈 뿐 아니라, 은혜와 위벌(威罰)
이 그 얼굴에 달려 있다네. 군(軍)이 숨을 죽이고 모두 놀라 달아나니, 만리 변방에 풍진(風塵) 고요하여라." 하
였다.
여단 : 본부 북쪽에 있다. 상음 신사(霜陰神祠) : 상음현(霜陰縣)에 있다.
속설에 선위대왕(宣威大王)의 부인이라 하며, 그 지방 민속에 따라 매년 단오(端午)에 선위대왕과 함께 제사한
다.
능묘 지릉(智陵) : 익조 성익대왕(翼祖聖翼大王)의 능이다. 서곡현(瑞谷縣) 봉룡역(奉龍驛) 북쪽에 있으니,
본부 청사로부터 거리가 38리다.
○ 참봉(參奉) 2명이 있다. 조돈 묘(趙暾墓) : 본부 남쪽 25리에 있다.
고적 문산 폐현(文山廢縣) : 본부 남쪽 30리에 있다. 본시 고구려의 가지달현(加之達縣)이었는데, 신라 때 청산
(靑山)으로 고쳐 삭정군(朔庭郡)의 속현으로 하였고, 고려 초기에 다시 문산현(汶山縣)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속해 두었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인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익곡 폐현(翼谷廢縣) : 본부 남쪽 65리에 있다. 본시 고구려의 오지탄현(於支呑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익계(翊
溪)로 고쳐 삭정군(朔庭郡)의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붙여둔 것을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서곡 폐현(瑞谷廢縣) : 본부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의 경곡현(庚谷縣)으로 일명 수을탄(首乙呑)이
라고도 하였는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삭정군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현종 9년에도 그대로 붙여 두
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파천 폐현(派川廢縣) : 본부 동쪽 95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의 기연현(岐淵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내속시켰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위산 폐현(衛山廢縣) : 본부 남쪽 52리에 있다. 고구려 때의 칭호는 미상이다. 고려 현종 9년에 붙여 온 것을 본
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복령 폐현(福令廢縣) : 영(令) 자는 영(靈) 자로도 썼는데 본부 서쪽 30리에 있다.
혹은 복녕향(福寧鄕)이라 일컬었고, 혹은 복평향(福平鄕)이라 호칭하였다.
상음 폐현(霜陰廢縣) : 본부 동쪽 30리에 있다. 본시 고구려의 살한현(薩寒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
으로 고쳐 삭정군의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에 그대로 붙여 왔고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학포교(鶴浦橋) : 학포현(鶴浦縣)에 있다. 공양왕(恭讓王) 때에 우리 태조(太祖)가 마침 졸고 있다가 이 다리에
이르러서 말이 실족해 떨어지니 태조가 내려 서서 두 손으로 말의 귀와 갈기를 잡으니 말은 공중에 매달리고
얽혀 있는 것이 놓지 않는지라 사람을 시켜 찯던 칼을 빼어 안장을 끊어버리게 한 뒤에 놓으니, 말이 물에 잠겼
다가 다시 떠올라 나왔다.
안점(鞍岾) : 서곡현(瑞谷縣) 남쪽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에 한 남자가 북녘 장성(長城)의 사역장으로
갈 때 그 아내가 임신중인 것을 알고 갔었다.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쌀을 지고 가는 한 남자
를 만나 그 고향을 물으니,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 마침내 서로 붙들고 통곡하고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부자(父子)의 형상을 바윗돌에 그리고는 드디어 함께 죽어버려 이곳에 장사했다." 한다.
압융수(壓戎戍) : 즉 벽융관(壁戎串)이다. 철원수(鐵垣戍) : 본부 동쪽 파천사(派川社) 바다 어귀에 조그마한
석성(石城)이 있는데 세칭 수성(戍城)이라 한다. 강원도 흡곡현(?谷縣) 지경에 있다.
향등수(香登戍) : 본부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신증 낭성포 폐진(浪城浦廢鎭).
명환 신라 성종(成宗) : 진흥왕(眞興王) 17년에 사손(沙飡) 성종(成宗)으로 군주(軍主)를 삼았다.
무선(武仙) : 문무왕(文武王) 21년에 무선이 정병(精兵) 3천 명을 거느리고 비렬홀(比列忽)를 지켰다.
고려 정사도(鄭思道) : 공민왕(恭愍王) 때에 부사(府使)가 되었는데 한 방면(方面)을 진압하고, 용도(用度)를
절제 있게 하였다.
본조 김효성(金孝誠)ㆍ 김소남(金召南). 신증 남계당(南季堂) : 사람됨이 인자(仁慈)하고 화평하였으며 법을
준수하는 양리(良吏)의 풍모가 있었다.
인물 고려 한경(韓卿) : 문하부사 안천부원군(門下府事安川府院君)에 증직(贈職)되었다.
이가 신의왕후(神懿王后)를 낳아 우리 태조(太祖)의 배필이 되어 공정대왕(恭靖大王)과 공정대왕(恭靖大王)을
낳았다.
김승언(金升彦) : 원(元) 나라 제과(制科)에 합격하였으며, 재예와 행검(行檢)이 있었다.
이인(李?)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政堂)에 이르렀다.
본조 김성정(金成庭) : 과거에 올라 직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효자 본조 강렴(姜廉) : 효행이 있어 정문(旌門)을 세웠고, 벼슬은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신증 구질비(仇叱非)ㆍ구질덕(仇叱德) : 형제인데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것을 형제가 협력하여 호랑이
를 잡아 아버지가 죽음을 면하였다. 금상 전하 11 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용은 옛 진터 누른 느름나무 달 아래에서 다투고 : 안축(安軸)의 시에, "일만 겹 산이 4면을 둘렀는데, 언덕
너머 동해 바다엔 물이 공중에 떠 있네. 용은 옛 진터 누른 느름나무 달 아래에서 다투고, 까마귀는 빈 마을터
늙은 나무 지저귄다. 고향에 애착되어 떠나지 못하는 백성이 불쌍하고, 성(城)을 버리고 변란을 꾀하던 간웅(姦
雄)을 말하네. 당시에 누가 변경의 계책이라 했었나. 한 번 융의(戎衣 군복)를 걸치고 나가 평정할 사람 없던 것
못내 슬프구나." 하였다.
저문 날에 옛일을 생각하며 성(城) 머리에 서 있으니 : 앞사람의 시에, "저문 하늘 아래 옛일을 생각하며 성 머리
[城頭]에 서 있으니, 붉은 잎 누른 꽃 눈에 가득한 가을 풍경일세. 담 안에 가까운 재앙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
지 못하고, 오직 바닷섬만을 빙자해 깊은 계책이라 했었네. 백 년된 무덤에는 무정한 풀만이 우거져 있고, 10리
길 풍연(風煙) 속에는 신의 있는 갈매기가 난다. 멀리 북녘을 바라보며 부질없이 탄식할 즈음에, 어디서 강적
(羌笛)한 소리가 사람의 시름을 끌게 하는고." 하였다.
연기 어린 그림 같은 봉우리 일천 산이 저물었는데 : 박신(朴信)의 시에, "연기 어린 그림 같은 봉우리 일천 산이
저물었는데. 모자(帽子) 속으로 가득히 들어오는 맑은 바람은 6월도 가을 같구나." 하였다.
넓은 바다 물결은 천추(千秋)의 달빛 아래 고요하고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이 땅은 일찍이 칼과 창을 겪었던
곳, 이제는 만사가 모두 공허로 돌아갔다네. 넓은 바다 물결은 천추(千秋)의 달빛 아래 고요하고, 변방 관문(關門)
의 구름도 한 피리 바람과 함께 걷혔구나. 밝은 원님 응당 오늘의 두모(杜母)라 노래할 것이요, 글하는 사람으론
누가 양웅(揚雄 서한(西漢)사람 문장으로 이름이 높다)의 뒤를 이으려나. 앉아서 다시 성인(聖人 일본)의 덕화(德
化)가 점점 동녘으로 번져 나온 것을 치하하니, 때로 산 넘고 바다 건너 귀화(歸化)해 오는 야인(野人)을 보겠네."
하였다.
땅이 금원(金源)과 연접하니 산은 창[戟]인 양 솟아 있고 : 정추(鄭樞)의 시에, "등주(登州)ㆍ화주의 지난일은
화각(?角)소리 속에 흘러갔는데, 멀리 높은 봉우리 위에 올라 푸른 하늘을 굽어보니 땅이 금원과 연접했다.
산은 창인 양 솟아 있고, 하늘은 부상(扶桑) 쪽으로 나지막한데 바다엔 바람이 없구나. 신랑(愼郞)의 깃발 쓰러진
것 천추의 남은 한이요, 윤상(尹相 윤관(尹瓘)의 비(碑)) 세운 것 일대(一代)의 영웅일세. 동녘 변방의 가죽옷 입
은 무리들에게 말을 보내노니, 신무(神武)하신 우리 임금 군사 일으키는 것 슬퍼하신다." 하였다.
반공(半空)의 고각(鼓角)소리 바람 불어 떨어지고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반공의 고각소리 바람 불어 떨어
지고, 깊은 산골의 노을은 햇볕 비쳐 열리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고읍 학포(鶴浦) : 동쪽으로 60리이며 본래 신라 곡포(鵠浦)인데 경덕왕(景德王) 16년 학포(鶴浦)로 고쳐
금양군(金壤郡) 영현(領縣)이 되게 하였으며, 고려 성종(成宗)이 이름을 압융(押戎)이라 정하고 현종(顯宗) 9년
지금의 학포사(鶴浦社)로 내속(來屬)시켰다.
유거(幽居) : 동북쪽으로 25리이며, 본래 신라 동허(東墟)이고, 일명 가지근(加知斤)이라고 한다. 경덕왕 16년
유거(幽居)로 고쳐 정천군(井泉郡) 영현(領縣)으로 하였으며, 고려 현종 9년 지금 낭성포(浪城浦)로 내속시켰
다가 폐진(廢鎭)되었다.
문산(汶山) : 서남쪽으로 30리이며, 본래 신라 가지달달(加支達達)인데, 경덕왕 16년 청산(靑山)이라 고쳐
삭정군(朔庭郡)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23년 문산(汶山)이라 고쳤으니, 지금의 문산사(文山社)이다.
영풍(永?) : 서쪽으로 90리이며, 본래 증대이(甑大伊)인데, 고려 목종(穆宗) 4년 축성(築城)하여 진예(鎭隸)를
두었고, 동쪽 경계는 뒤에 현(縣)으로 고쳐서 본조(本朝) 초에 내속(內屬)시켰다.
방면 세청(世淸) : 읍내(邑內)이며 끝에서 동쪽으로 10리이다. 영춘(永春) : 남쪽으로 끝에서 10리이다.
신리(新里) : 남쪽으로 25리이다. 모지(毛只) : 남쪽으로 60리이다.
위익(衛翼) : 남쪽으로 처음이 50리이고, 끝이 1백여 리이다. 문산(文山) : 남쪽으로 30리이다.
방하산(方下山) : 서쪽으로 20리이다. 서곡(瑞谷) : 서쪽으로 50리이다.
영풍(永?) : 서쪽으로 80리이며, 끝에서 2백리이다. 사동(蛇洞) : 서쪽으로 25리이다.
상도(上道) : 동쪽으로 20리이다. 하도(下道) : 동북쪽으로 30리이다. 학포(鶴浦) : 동쪽으로 90리이다.
파천(派川) : 동쪽으로 1백 리이다.
성지 읍성(邑城) : 둘레가 1만 3백 58척(尺)이다. 상음현성(霜陰縣城) : 고려 현종(顯宗) 16년 축조하였다.
파천현성(派川縣城) : 고려 덕종(德宗) 원년에 축조하였다. 영풍현성(永?縣城) : 고려 목종(穆宗) 4년에 축조하
였다.
황룡산고성(黃龍山古城)ㆍ노인치고장성(老人峙古長城) : 고개 위에서 축조하였으며, 옛날 형대(炯臺)가 있다.
군영고지(軍營古址) : 석왕사(釋王寺)가 있는데, 남쪽은 옛날 동계 행영(東界行營)이다.
삼방(三防) : 상(上)ㆍ중(中)ㆍ하(下) 삼방이 있는데, 이 샛길로 장곡(長谷)을 경유해서 바로 분수령(分水嶺)을
통하며, 옛날에 세 곳 방을 설치한 땅에는 골짜기 형세가 칼로 깎아지른 듯 손가락같이 벌려 있고 또 물이 깊어
낭떠러지에 따라 겨우 서울 가는 첩로(捷路)만 통한다.
진보 익곡현(益谷縣)ㆍ응천진소(凝川眞所)ㆍ상음현 복녕경(霜陰縣福寧卿) : 지금의 부평(富坪)인데,
위 세 곳은 각각 교위대정 좌군우군녕새(校尉隊正左軍右軍寧塞)가 있다.
봉수 사동(蛇洞) : 북쪽으로 25리이다.
창고 부창군향창(府倉軍餉倉) : 모두 읍내(邑內)이다. 모지사창(毛只社倉) : 남쪽으로 20리이다.
고산창(高山倉) : 남쪽으로 70리이다. 고산창(高山倉) : 남쪽으로 70리이며, 위익사(衛翼社)이다.
봉룡창(奉龍倉) : 서쪽으로 30리이며, 서곡사(瑞谷社)이다. 남산창(南山倉) : 남산역(南山驛)이다.
낭성창(浪城倉) : 동북쪽으로 30리이며, 하도사(下道社)이다. 서곡창(瑞谷倉) : 서곡사(瑞谷社)가 있다.
학포창(鶴浦倉) : 학포 남변(南邊)이다. 영풍하창(永?下倉) : 서쪽으로 1백 50리이다.
영풍상창(永?上倉) : 서쪽으로 1백 15리이다.
역참 인두문참(引豆門站)ㆍ방하산참(方下山站).
진도 낭성진(浪城津) : 낭성포(浪城浦)에 있다. 합진(蛤津) : 상음현(霜陰縣) 북쪽에 있다.
마차진(磨差津) : 파천(派川) 하류(下流)이다.
교량 남대천교(南大川橋) : 서쪽으로 5리이며, 삼방(三防)의 물이 여기에 이르게 되고, 깊고 일렁거리며 동쪽
낭떠러지가 우뚝하게 일어나서 거북 형상 같으므로 세속이 용당(龍塘)이라고 불렀고, 그 앞에는 백사(白沙)가
평평하고 너른데, 사람들이 관도(官渡)라 불렀다.
남산교(南山橋) : 역전(驛前)에 있다. 용지원교(龍池院橋) : 남쪽으로 50리이다.
심천교(深川橋)ㆍ고산교(高山橋) : 오른쪽으로는 회양대로(淮陽大路)로 통한다.
해천교(蟹川橋)ㆍ한천교(漢川橋) : 오른쪽으로는 북대로(北大路)로 통한다.
누정 표표연정(飄飄然亭) : 서쪽으로 5리이다.
능침 태봉주 궁예묘(泰封主弓裔墓) : 서남쪽으로 1백 20리이며 삼방로(三防路) 왼쪽이며 석축(石築)이 수십
길이나 되고, 높다란 형대(炯臺)가 있는데, 지금은 절반이나 허물어졌다.
단유 웅곡악(熊谷岳) : 삼국사(三國史)에서 말하는 웅곡악은 비렬홀군(比列忽郡)에 있으며, 신라에서는 북진
(北鎭)으로서 중사(中祀)로 모셨는데, 고려 때에 폐지하였다.
사원 옥동서원(玉洞書院) : 명종(明宗) 정유년에 세웠으며, 숙종 임오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이계손(李繼孫) : 함흥(咸興)편에 보라. 김상용(金尙容) : 강화(江華)편을 보라.
조석윤(趙錫胤) : 개성(開城)을 보라.
덕원도호부 德源都護府
동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7리요, 남쪽으로는 안변부계(安邊府界)까지 25리이며,
서쪽으로는 통부 관내 영풍현계(永?縣界)까지 30리이며 북쪽으로는 문천군계(文川郡界)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천정군(泉井郡)이었는데 : 일명 오을매(於乙買)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정천군(井泉郡)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용주(湧州)라 일컬었으며 성종(成宗) 14년에는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뒤에 의주(宜州)로 고쳤
으며 예종 3년에 성을 쌓았다. 본조 태종 13년에 딴 곳의 예예 의하여 의천(宜川)이라 고쳤고,
세종 1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는데 군(郡)으로 만든 지 27년 만에 목(穆)ㆍ익(翼)ㆍ도(度)ㆍ환(桓) 4대의
어향(御鄕)이라 하여 승격시켜 도호부(都護府)로 만들었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각 1명.
군명 천정(泉井)ㆍ오을매(於乙買)ㆍ정천(井泉)ㆍ용주(湧州)ㆍ의주(宜州)ㆍ의천(宜川)ㆍ덕주(德州)ㆍ동모(東牟)ㆍ
의춘(宜春)ㆍ의성(宜城)ㆍ춘성(春城).
성씨 본부 강(康)ㆍ최(崔)ㆍ박(朴)ㆍ오(吳)ㆍ한(韓)ㆍ유(兪)ㆍ이(李)ㆍ고(高)ㆍ조(趙)ㆍ연(燕)ㆍ정(鄭)ㆍ안(安)ㆍ
배(裵). 최(崔)ㆍ서(徐)ㆍ백(白) : 모두 내(來). 김(金) : 속(續). 진명(鎭溟) 정(鄭) : 영일(迎日). 황(黃) :
평해(平海). 장(張)ㆍ김(金) : 모두 울주(蔚州)ㆍ장기(長?)ㆍ영덕(盈德). 박(朴) : 울주ㆍ예주(禮州).
강(姜) : 속(續). 용진(龍津) 송(宋) : 청주(淸州). 조(趙) : 양주(楊州). 김(金)ㆍ현(玄) : 모두 염주(鹽州).
산천 반룡산(盤龍山) : 부 서쪽 15리에 있다. 또 문천군(文川群)에도 보인다.
소의달산(所衣達山) : 부 북쪽 20리에 있다. 송산(松山) : 부 동북쪽 25리에 있다.
마수령(馬樹嶺) : 마식산(馬息山)이라고도 하는데, 부 서쪽 30리에 있다.
바다 : 부 동쪽 7리에 있고, 또 부 북쪽 10리에도 있다. 부내천(府內川) : 부 남쪽 1백 보(步)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반룡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진명포(鎭溟浦) : 진명현(鎭溟縣) 동쪽 4리에 있다. 죽도(竹島) : 부 동쪽 15리에 있는데 대나무가 있다.
고려 때에 정주(定州) 이남 12개의 성(城)의 인물이 모두 이 섬으로 들어와서 몽고의 군병을 피하였다.
당시 조휘(趙暉)ㆍ탁청(卓靑)이 여진(女眞)의 포지원(布只員)과 모의하여 도병마사(都兵馬使) 신집평(愼執平)
을 살해하고 적을 맞아 드렸기 때문이다. 관사(館舍)와 민가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신도(新島) : 본부 동쪽 37리에 있으며, 거주민이 있다.
연도(連島) : 부 동쪽 30리에 있다. 일명 이도(李島)라고도 이르며, 육지와 연하고 거주민이 있다.
초도(草島) : 부 동쪽 30리에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자초(紫草)ㆍ감초(甘草)ㆍ인삼(人蔘)ㆍ사향(麝香)ㆍ안식향(安息香)ㆍ영양(羚羊)ㆍ
복령(茯?)ㆍ벌꿀[蜂蜜]ㆍ오미자(五味子)ㆍ댓살[竹節]: 죽도에서 난다. 송어(松魚)ㆍ연어(?魚)ㆍ청어(靑魚)ㆍ
과어(瓜魚)ㆍ넙치[廣魚]ㆍ고등어[古刀魚]ㆍ방어(?魚)ㆍ가갯살[江瑤柱]:
용진현(龍津縣)에서 나는데 채취하기가 아주 어려워서 현민 50여 호가 이 때문에 업을 잃고 거의 다 도망해 흩
어진 것을 고려 유석(庾碩)이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어 그 채취령을 일채 금지하니 유리해 도망했
던 백성들이 다 돌아왔다.
조개[蛤]ㆍ해삼(海蔘)ㆍ삼치[麻魚]ㆍ 홍합(紅蛤)ㆍ게[蟹]ㆍ황어(黃魚)ㆍ도루묵[銀口魚]ㆍ굴[石花]ㆍ은어
(銀魚)ㆍ홍어(洪魚)ㆍ숭어[秀魚]ㆍ고리마(古里麻)ㆍ수유(?油)ㆍ소금[鹽].
봉수 유현 봉수(楡峴烽燧) : 부 북쪽 35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문천군(文川郡)의 천불산(天佛山)과 응하고 남쪽
으로는 발산(拔山)과 응한다. 발산 봉수(拔山烽燧) : 본부 북쪽 7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유현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현산(見山)과 응한다. 현산 봉수 : 부 남쪽 22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발산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안변부(安邊府) 학성(鶴城)과 응한다.
신증 장덕산 봉수(長德山烽燧) : 부 동쪽 7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문천(文川)의 황석점(黃石岾)과 응하고, 동쪽
으로는 안변부의 낭성현(浪城峴)과 응한다. 금상 전하(중종) 5년에 유현ㆍ발산ㆍ현산 등 처의 봉수는 폐지하고
이곳으로 옮겨 합쳤다.
학교 향교 : 부 서쪽 1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부 북쪽 1리로 옮겨 있다.
역원 철관역(鐵關驛) : 부 북쪽 7리에 있다. 명석원(銘石院) : 부 남쪽 13리에 있다.
불우 안양사(安養寺) : 부 서쪽 10리에 있다. 우리 태조(太祖)가 어렸을 적에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
운석사(雲石寺)ㆍ은적사(隱寂寺) : 모두 반룡산에 있다. 송림사(松林寺) : 송산에 있다.
우달사(?達寺) : 부 서쪽 20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부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부 북쪽 2리에 있다.
소의달산사(所依達山祠) : 봄가을로 읍에서 치제(致祭)한다.
여단 : 부 북쪽에 있다.
고적 고정천성(古井泉城) : 부 북쪽 15리에 있다. 석축으로 되었으며 둘레가 4천 3백 22척인데 지금은 폐해버
렸다.
진명 패현(鎭溟廢縣) : 부 남쪽 24리에 있다. 혹은 원산현(圓山縣)이라 일컬으며 수강(水江)이라고도 이름하였
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령(縣令)으로 하였는데, 뒤에 본부에 예속되었다. 지금은
진강사(鎭江社)라 일컫는다.
○ 고을의 성은 석축으로 주위가 2천 2백 87척, 높이가 9척이며, 그 안에 두 개의 샘이 있는데 지금은 절반이나
무너져 있다.
용진 폐현(龍津廢縣) : 부 동쪽 30리에 있다. 옛날에는 호포(狐浦)인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진(鎭)
을 설치하였고, 목종(穆宗) 9년에 성을 쌓았다. 그 뒤에 문주(文州)에 붙였다가 홍무(洪武) 12년에 다시 쪼개어
현령으로 만든 것을 우리 세조(世祖) 5년에 현을 없애고 본주로 붙이고는 용성사(龍城社)라 일컬었다.
고을 북쪽귀산사(龜山社)ㆍ명효사(明孝社)를 분할하여 문천군(文川群)에 붙였다.
○ 낭문산성(朗門山城)은 석축으로 그 둘레가 3천 4척, 높이는 5척인데 3면이 바다로 되어 있으며, 그 안에 한
개의 우물이 있다. 철관(鐵關) : 부 북쪽 15리에 있는데 둘레가 1천 4백 3척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삼
선(三善)ㆍ삼개(三介)가 여진(女眞)을 유치해 들여 북방 변경을 침략하므로 도지휘사(都指揮使) 한방신(韓方
信)과 병마사(兵馬使) 김귀(金貴) 등이 화주(和州)로 군사를 이끌고 나갔다가 패전하고 철관으로 물러와 지키
니, 화주 이북이 모두 그들에게 함락되고, 관군(官軍)이 여러 번 패전하여 장병(將兵)들이 사기(士氣)를 잃어
밤낮으로 우리 태조(太祖)가 오기만 기다렸다.
태조가 서북면(西北面)으로부터 군사를 인솔하고 철관에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장병들의 사기가 스
스로 갑절이나 더하여, 한방신ㆍ김귀와 더불어 3면으로 진군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화주ㆍ함주(咸州) 등의
땅을 모두 수복하였다.
용주리(湧珠里) : 부 남쪽 10리에 있다. 목조(穆祖)가 전주(全州)로부터 삼척(三陟)으로 옮겼다가 또 본부로 옮
겨오니, 1백 70가구가 따라 왔다. 본부 남쪽 용주리에 살며 익조(翼祖)를 낳았다. 익조가 경흥부(慶興府)로 옮겨
살더니, 난리를 피하여 적도(赤島)로 들어갔다가, 적도로부터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적전사(赤田社)라 이름을
고쳤다. 경흥의 백성들이 뒤따라 오는 자가 마치 시장에 가는 것 같았다. 또 함흥(咸興) 송두등리(松頭等里)로
옮겨 도조(度祖)를 낳고 얼마 안 되어 도로 적전으로 돌아와서 살았다. 도조 때에 쓰던 문짝[門扉]를 지금까지도
본부 창고에 간직하고 있다.
진명포(鎭溟浦) : 진명현(鎭溟縣) 동쪽 4리에 있다. 고려말에 왜구(倭寇)가 진명성(鎭溟城)에 침입하여 창고를
불사르고 인민을 살해 약탈한 바 있어 그 뒤에 비로소 병선(兵船)을 설치하여 진명포에 정박시키니 왜구가 다시
오지 않았다. 포구의 수로가 막히고 얕아서 병선은 안변의 낭성포(浪城浦)로 이박(移泊)시켰다.
명환
고려 김유성(金有成) : 장서기(掌書記)가 되었다. 본조 이사계(李師季) : 부사(府使)가 되어 농업ㆍ잠업을 부지
런히 권장하였다.
신증 송숙기(宋叔琪)ㆍ조옥곤(趙玉崑)ㆍ김석필(金錫弼).
우거 고려 조돈(趙暾) :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대대로 용진(龍津)에 살았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아전과 백성
들이 여진(女眞)으로 도망해 들어가므로 왕이 조돈을 보내어 해양(海陽) 등지에 가서 1백여 호를 찾아 가지고
돌아왔다. 여러 관직을 거쳐 예의판서(禮儀判書) 용성군(龍城君)이 되었다. 용진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냈는데,
그 아들 인옥(仁沃)이 따라가려고 하니, 강력히 만류하여 말하기를, "우리 집이 위태롭고 불안한 때를 당하여
선대의 혈맥이 남아 있기가 겨우 털끝 같았는데, 현릉(玄陵)의 지나친 은혜를 입어 일문(一門)이 보전함을 얻었
다. 그러나 백에 하나를 갚은 것이 없으니 너희들은 늙은 아비로 인하여 걱정하지 말고, 왕실(王室)에 힘을 다
하라." 했다.
본조 조인옥(趙仁沃) : 조돈의 아들. 한성부(漢城府) 인물 아래에 자세히 나와 있다.
권륜(權綸) : 본관은 안동(安東),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이르
렀으며, 오랫동안 성균관(成均館)의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어 유생들이 장자(長者 점잖은 사람)라 일컬었다.
만년에 본부 소라리(素羅里)로 물러와 휴양하면서 소요정(逍遙亭)을 짓고는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제영 북녘 바람이 철관(鐵關)의 정을 불러 일으키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만리 창파(滄波)에 한 정자[草亭],
북녘 바람이 철관의 정을 불러 일으키네. 백 년 동안 범과 이리떼가 둔(屯)쳤던 이곳, 이제 닭 울고 개 짖는 소리
가 의구(依舊)하구나." 하였다.
늙은 여우는 옛 진터에 깃들고 : 변중량(卞仲良)의 시에, "멀고 먼 철관 북녘 땅, 외로운 신하 이를 어찌하리요.
늙은 여우는 옛 진터에 깃들고, 저녁 새들이 찬 나뭇가지에 모여드네. 바닷가에 귀양[謫居]산 지도 이미 3년,
가을바람 부니 백 가지 감회가 많아져가네. 유리(流籬)하는 신세를 어찌 견디랴마는, 다행히 고인(故人 친구)이
지나쳐 주는 것 힘입네." 하였다.
산 형세는 꿈틀꿈틀 백두산(白頭山)에 모였네 :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땅 신령 숨을 드내쉬니, 창해(蒼海)물
이 출?거리고, 산 형세는 꿈틀거려 백두산에 모여 있네." 하였다.
땅이 우리나라 판도(版圖)로 들어왔으니 만대(萬代)로 전하리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한 구역 형승지가 참
으로 험한 정형구(井?口)와 같은데, 백 번 싸운 외로운 성 바로 여기가 석두(石頭)란다. 땅이 우리나라 판도로
들어왔으니 만대로 전하리. 《시경(詩經)》에 빈풍(?風)을 지은 것 몇 천년 되었던고." 하였다.
아름답다, 이 덕원(德源)은 하늘이 만든 땅이로다 : 김수령(金壽寧)의 시에, "반도(蟠桃)가 열매를 맺으려면 천
년이 걸리는데, 선리(仙李)의 뿌리가 서리는데 8백 년이 걸렸다네. 아름답다, 이 덕원은 하늘이 만드신 땅이로
다. 면면(綿綿)하게 뻗은 오이덩굴 한 악장(樂章) 왕업(王業)의 아름다움을 찬송하였네."하였다.
용(龍 제왕)의 자품이 실로 이 천년(千年)의 땅에서 탄강(誕降)하셨으니 : 박중손(朴仲孫)의 시에, "용의 자품이
실로 이 천년의 땅에서 탄강하셨으니, 왕실의 역수(曆數)는 응당 억만년을 이어 전하리라." 하였다.
패(沛)땅의 옛 물건 이끼 사립문 있는데 : 허종(許琮)의 시에, "도문(都門)을 떠나서 북녘 고을에 와서야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개인 맑은 흥취 나그네의 시름을 잊게 하네. 누대(樓臺)의 그림자는 하늘이 낮은 곳에 거꾸러
졌고, 산악(山岳)의 정기는 땅이 다한 머리에 쌓여 있네. 푸른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햇바퀴는 바야흐로 새벽이
되는데, 적전(赤田 용주리(湧珠里)의 별칭 도조(度祖)가 있던 집)에 난 꽃나무는 가을을 모른다네. 패땅의 옛
물건 이끼 낀 사립문이 있는데, 촌옹(村翁)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그칠 줄 몰랐네." 하였다.
[비고]
고읍 미산(●山) : 남쪽으로 25리에 있으며 본래 신라 매시달(買尸達)인데, 경덕왕(景德王) 16년 미산이라 고쳐
정천군(井泉郡)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에서는 진명현(鎭溟縣)을 설치하였는데, 다음을 보라.
송산(松山) : 동북쪽으로 25리에 있으며, 본래 신라 부사달(夫斯達)인데, 경덕왕 16년 송산으로 고쳐 정천군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에서는 용진진(龍津鎭)을 설치하였는데, 다음을 보라.
방면 현사(縣社) : 진명현 땅이다. 부내(府內) : 동ㆍ서쪽으로 각 10리에 있다.
북면(北面) : 북쪽으로 35리에 있다.
장림(長林) : 서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적전(赤田) : 남쪽으로 25리에 있다.
용주(湧州) : 남쪽으로 끝이 15리다. 용주는 한때 고치(古治)이며, 부(府)와의 거리가 10리다.
용성(龍城) : 동북쪽은 용진현 땅이다.
○ 용주리(湧珠里) : 남쪽으로 10리에 있으며, 적전사(赤田社)이다. 우리 목조(穆祖)가 삼척에서 이곳으로 이거
(移居)하고 고려에 벼슬하여 의주 병마사(宜州兵馬使)가 되어 고원(高原)에 진을 치고 원병(元兵)을 막았다.
익조(翼祖)가 여기서 탄강하였으며, 뒤에 경흥(慶興)으로 옮겼다가 다시 함흥(咸興)ㆍ송두(松頭) 등 마을로 옮
겼다. 탁조(度祖)도 여기서 탄강하였으며, 얼마 안 있어 도로 적전사(赤田社)로 옮겨 거마(居馬)하였다.
정종(正宗) 정미년 기적비(紀蹟碑)를 세웠다.
○ 목조(穆祖)가 덕원(德源)에서 간동(幹東)으로 이거하였다. 익조(翼祖)는 천호(千戶)를 이어받고,
선원보(璿源譜)라 불렀다. 목조는 원조(元朝)에 입사(入仕)하여 남경 오천호소달로하치[南京五千戶所達魯花赤]
가 되었으며 또 지지(地志)라고도 말하였다. 익조는 적도(赤島)에서 화를 피하였으며, 드디어 함흥(咸興)으로
이거하였는데, 경흥부(慶興府)에 상세하다.
성지 고읍성(古邑城) : 남쪽으로 10리에 있으며, 고려 예종(睿宗) 3년 3월 축조하였다. 둘레가 4천 3백 22척이며,
이는 곧 윤관(尹瓘)이 9성(城) 축조 때 설치하였고, 호주는 9천이다.
○ 현종(顯宗) 7년 의주(宜州)에 있는 성으로 6백 52칸(間)이고, 문(門)이 다섯인데, 용주시성(湧州時城)에 있다.
영아 후영(後營) : 인조(仁祖) 때에 설치하였다. ○ 뒤에 영장(營將)이 본부사(本府使)를 겸하였다.
○ 속읍(屬邑)은 안변(安邊)ㆍ덕원(?源)ㆍ문천(文川)ㆍ고원(高原)이다.
봉수 소달산(所達山)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창고 부창(府倉)ㆍ군창(軍倉) : 부내(府內)이다.
원창(元倉)ㆍ교제창(交濟倉) : 모두 원산포(元山浦) 곁에 있다. 용창(龍倉) : 용진(龍津) 해변(海邊)에 있다.
역참 장부역(長富驛) : 용진(龍津)이다. 조동역(朝東驛)ㆍ관문참(官門站).
교량 우교(牛橋) :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방하산교(方下山橋) : 북쪽 5리에 있으며, 북면천(北面川)이다.
남천교(南川橋) : 남쪽으로 5리에 있으며, 부내천(府內川)이다. 역전천교(亦田川橋) :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견산교(見山橋) : 남쪽으로 20리에 있으며, 오른쪽은 모두 대로(大路)이다.
토산 잣[海松子)ㆍ배.
사원 용진서원(龍津書院) : 숙종(肅宗) 을해년에 세웠으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송시열(宋時烈) : 문묘(文廟)를 보라.
문천군 文川郡
동쪽은 덕원부(德源府) 용진현(龍津縣) 경계까지 14리, 남쪽은 같은 덕원부 경계까지 17리,
서쪽은 평안도 양덕현(陽德縣) 경계까지 54리, 북쪽은 고원군(高原郡) 경계까지 3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8리이다.
건치연혁 옛날에는 매성(妹城)이라 일컬었는데,
고려 성종(成宗) 8년에 성(城)을 쌓고는 문주 방어사(文州防禦使)로 하였다. 뒤에 의주(宜州)로 합병시켰다가,
충목왕(忠穆王) 원년에 다시 쪼개어 주(州)로 만들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하여 군(郡)으로 만들었다.
관원 군수 ㆍ훈도 : 각 1명.
군명 매성(妹城)ㆍ문주(文州)ㆍ이균(伊均).
성씨 본군 이(李) : 음죽(陰竹). 채(蔡) : 평강(平康). 박(朴) : 춘주(春州). 전(全)ㆍ박(朴) : 모두 속(續).
산천 반용산(盤龍山) : 군 서남쪽 2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천불산(天佛山) : 군 북쪽 25리에 있다.
보현산(普賢山) : 군 북쪽 10리에 있다. 두리산(頭里山) : 군 서쪽 50리에 있다. 바다 : 군 동쪽 30리에 있다.
배기이천(配岐伊川) : 군 서쪽 57리에 있다. 전탄(箭灘) : 군 북쪽 33리에 있다.
배기이천의 하류가 반룡산 동쪽에 이르러 이 여울이 되었다. 또 군 동쪽에 이르러 문천포(文川浦)가 되었는데
고원군(高原郡)의 덕지탄(德之灘)과 합류하여 영흥부(永興府)의 용흥강(龍興江)으로 들어간다.
원기천(院岐川) : 군 남쪽 1리에 있다. 석천(石川)이라고도 하며, 근원이 반룡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덕원부
(德源府)의 용성현(龍城縣)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사눌도(四訥島) : 군 동쪽 30리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마도(馬島) : 군 북쪽 40리에 있다.
대나무를 재배한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쇠[鐵] : 두리산에서 난다.
자초(紫草)ㆍ잣[海松子]ㆍ복령(茯?). 댓살[竹箭] : 마도에서 난다.
벌꿀[蜂蜜]ㆍ인삼ㆍ오미자(五味子)ㆍ사향(麝香)ㆍ연어(?魚)ㆍ홍어(洪魚)ㆍ방어(?魚)ㆍ넙치[廣魚]ㆍ
숭어[秀魚]ㆍ송어[松魚]ㆍ도루묵[銀口魚]ㆍ황어(黃魚)ㆍ은어(銀魚)ㆍ고등어[古刀魚]ㆍ조개[蛤]ㆍ
홍합(紅蛤)ㆍ삼치[麻魚]ㆍ굴[石花]ㆍ청어(靑魚)ㆍ게[蟹]ㆍ과어[瓜魚]ㆍ해삼ㆍ고리마(古里麻)ㆍ소유(?油)ㆍ
소금.
봉수 천불산 봉수(天佛山烽燧) : 북쪽은 고원군의 웅망산(熊望山)과 응하고, 남쪽은 덕원부의 유현(楡峴)과
응한다.
신증 황석점 봉수(黃石岾烽燧) : 서쪽은 영흥의 말응도(末應島)와 응하고, 남쪽은 덕원부의 장덕산(長德山)과
응한다. 금상전하(중종) 5년에 천불산 봉수를 없애고 이곳으로 합쳐 옮겼다.
누정 절문루(節文樓)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 김수령(金壽寧)의 시에, "호기(豪氣)는 백 척(尺)의 다락이라고 들었을 뿐, 나는 듯한 누각이 시원스런 이 바
닷가에 있을 줄을 어찌 알았으리요. 십천두(十千斗)의 술을 가지고 진왕(陳王)의 즐거움을 하려 하지 않으니,
한 번 웃는 월녀(越女)의 만류함에 관계없는 것일세.
대지는 찌는 듯 더운데 바람은 고요하고, 하늘은 감색(紺色)으로 푸른데 불이 흘러내리는 듯하네. 당시의 더위
먹어 죽은 사람을 응당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인데, 이같이 시원하게 노는 것을 기뻐하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 : 전에는 군 동쪽 5리에 있었는데, 성종(成宗) 21년 경술년에 군 북쪽 1리로 옮겼다.
역원 양기역(良驥驛) : 군 동쪽 5리에 있다. 옛날에는 고종역(高宗驛)이었는데, 우리 세조(世祖) 초기에 덕녕역
(德寧驛)을 이곳으로 합쳐 덕종역(德宗驛)이라 일컬었던 것을 성종(成宗) 6년에 회간대왕(懷簡大王 성조의
아버지 덕종(德宗))의 묘호(廟號)를 피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비파원(琵琶院) : 군 남쪽 17리에 있다. 앞에 못이 있는데 그 형상이 비파 같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름한 것이다.
불우 영덕사(靈德寺) : 반룡산에 있다. 천불사(天佛寺) ㆍ청련사(靑蓮寺) : 모두 천불산에 있다.
도창사(道昌寺) : 군 남쪽 8리에 있다. 절 가운데에 큰 나무가 있었는데 홍무(洪武) 무진년에 다 말랐다가 신미ㆍ
임신년에 이르러 다시 가지가 뻗고 무성하게 번영하였다. 이는 바로 한(漢) 나라 때에 죽었던 버드나무가 다시
소생한 것과 부합하는 일로서 당시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는 본조(本朝 이조)가 나라를 개창할 조짐(兆朕)이라."
하였다. 지금은 폐해 없어졌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본군 북쪽 3리에 있다.
여단 : 군 북쪽에 있다.
능묘 숙릉(淑陵) : 익조(翼祖)와 정숙왕후(貞淑王后)의 능(陵)이 군 동쪽 15리인 초한사(草閑社)에 있다.
○ 참봉(參奉) 2명이 있다.
고적 고이균성(古伊均城) : 군 동쪽 5리에 그 터가 남아 있다. 운림진고성(雲林鎭古城) : 군 서쪽 30리에 있다.
석축으로 둘레가 1천 2백 13척이며 높이가 12척이다. 고려 현종(顯宗) 때 이를 쌓고는 방어소(防禦所)라 호칭
하여, 지금도 진사(鎭司)라고 부른다.
용진폐현(龍津廢縣) : 군 동쪽 30리에 있으며, 지금은 명효사(明孝社)라 일컫는다. 또 덕원부(德源府) 고적에도
나와 있다. 덕녕역 : 옛터가 군 북쪽 15리에 있다. 말흘 석성(末屹石城) : 군 북쪽 25리에 옛터가 있다.
조지포(漕至浦) : 군 북쪽 50리에 있다. 영흥(永興)과 고원(高原)의 선졸(船卒)들이 지켰는데, 성종 20년에 혁파
해 버렸다.
신증 효자 본조 난을동(卵乙同) : 나이 18세에 아버지가 병을 얻어 빈사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다리살을 베어
약과 조화하여 바쳤던 바 그 병이 나았다. 금상 13년에 동네에 정려하였다.
제영 늘어진 버들 그늘 속에선 온갖 새들이 지저귀네 : 정도전(鄭道傳)의 시에,"문주성(文州城) 밖에는 풀빛도
푸르고, 늘어진 버들 그늘 속에선 온갖 새들이 지저귀네. 청명(淸明) 한식(寒食) 다 지난 줄을 알지 못하고, 해
는 비꼈는데 오히려 서녘을 향해 가는구나."하였다.
산은 나계(螺?) 모양으로 4면을 둘러 푸른데 : 김윤종(金潤宗)의 시에, "산은 나계모양으로 4면을 둘러 푸른데,
한낮[午] 꽃 사이에서 한 마리 새가 운다. 눈썹을 찌푸리고 나귀 등에 실려가는 길손에 비하지 말라.
봄바람에 네 말(四牡 사자(使者)의 행차)을 메워 달리는 장부(丈夫)의 행차이다." 하였다.
신증 눈 속에 서 있는 소나무 봉오리 한 점이 푸르고 : 민수천(閔壽千)의 시에, "눈 속에 소나무 봉오리 한 점이
푸르고, 황성(荒城)의 고각(鼓角)소리는 땅속에서 울린다. 평생의 이 의기, 암컷처럼 엎드렸는 것 부끄러워하여,
하늘의 남녘을 두루 다니고 또 북녘으로 가노라."하였다.
[비고]
고읍 운림(雲林) :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고려 현종(顯宗) 6년 운림진(雲林鎭)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둘레가
1천 2백 13척이며, 뒤에 방어소(防禦所)로 삼았다. 본조(本朝) 초에 내속시킨 것을 폐지하였으며,
지금은 그대로 진사(鎭司)로 부른다.
방면 군내(郡內) : 끝이 10리이다. 초한(草閑) :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운림(雲林)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60리다. 도지랑(都之郞)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명효(明孝) :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귀산(龜山) : 동북쪽으로 40리에 있으며, 우이사(右二社)이고, 덕원(德源) 용성현(龍城縣)을 쪼개어
본군(本郡)에다 붙였다.
성지 할미성(割尾城) : 북쪽으로 25리에 있다. 금장성(金場城) : 북쪽으로 35리에 있으며, 옛터가 남아 있다.
봉수 천달산(天達山)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창고 사창군자창(司倉軍資倉) : 군 안에 있다. 명효창(明孝倉) :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귀산창(龜山倉) : 동북쪽으로 40리에 있으며, 바닷가이다. 도지부창(都之部倉)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운림창(雲林倉) :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역참 양기역(良驥驛) : 옛날에는 덕녕(德寧)이라고 불렀으며, 동쪽으로 5리에 있다. 혁폐 관문참(官門站).
교량 원기천교(院岐川橋) : 군 남쪽에 있다. 배기천교(配岐川橋) : 남북쪽으로 6리에 있으며, 다리가 있다.
토산 숫돌[礪石].
목장 사눌도장(四訥島場) : 함흥(咸興) 감목관(監牧官)이 이곳으로 옮겼다. 마도장(馬島場).
북청도호부 北靑都護府
동쪽은 이성현(利城縣) 경계까지 68리, 남쪽은 함흥부(咸興府) 경계까지 80리,
서쪽은 홍원현(洪原縣) 경계까지 56리, 북쪽은 갑산부(甲山府) 경계까지 1백 68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8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옛 땅으로 오랫동안 여진(女眞)에게 점령되었다.
고려 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을 보내어 여진을 축출하였다. : 9개의 성을 설치한 당시의 칭호는 자세하지
않다. 뒤에 원(元) 나라에 함몰되어 삼살(三撒)이라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에 옛 지경을 수복하고는 안북 천호방어소(安北千戶防禦所)를 두었고, 21년에 지금의 이름
으로 고쳐 주(州)로 만들고 안무사 겸 만호(安撫使兼萬戶)를 두었었다.
본조 태조(太祖) 7년에 청주부(靑州府)로 고쳤고, 태종(太宗) 17년에는 청주목(淸州牧)과 음이 같다 하여 다시
북청(北靑)이라 하였다. 세종(世宗) 9년에 고쳐서 도호부(都護府)로 만들었고, 세조(世祖) 12년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 절도부사(兵馬節度副使)라 칭하고 부사(副使)로 이를 겸임하게 하였다.
또 판관(判官)을 두었는데 얼마 안가서 부사는 폐해버렸다. 13년에 이시애(李施愛)를 평정하고 남도와 북도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를 설치하고 본부로 그 본영(本營)을 삼았다.
진관 군(郡)이 1개 : 단천(端川). 현(縣)이 2개 : 홍원(洪源)ㆍ이성(利城).
관원 부사(府使) : 1명,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가 겸임한다. 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각 1명.
군명 삼살(三撒)ㆍ청주(靑州)ㆍ안북(安北)ㆍ청해(靑海).
성씨 본부 이(李)ㆍ조(趙) : 모두 속(續).
산천 연덕산(連德山) : 부 서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대덕산(大德山) : 부 북쪽 20리에 있다.
입석산(立石山) : 부 동쪽 60리에 있다. 산 위에 서 있는 돌이 있고, 북쪽 기슭에 또 서 있는 돌이 있는데, 높이가
36척이고 넓이가 12척이나 되어, 마치 비(碑)를 세워놓은 것 같다. 성대산(聖代山) : 부 북쪽 81리에 있다.
죽파산(竹坡山) : 부 서쪽 99리 함흥부 경계에 있다. 중산(中山) : 부 동쪽 35리에 있다.
승방동산(僧房洞山) : 부 서쪽 45리에 있다. 대동산(大洞山) : 부 북쪽 20리에 있다.
후치현(厚致峴) : 부 북쪽 1백 9리에 있다.
만령(蔓嶺) : 부 북쪽 68리 이성현(利城縣) 경계에 있다. 성화(成化) 3년에 이시애(李施愛)가 길주(吉州)에서 반
란을 일으켜 정평(定平) 이북에는 사람과 물화가 서로 통하지 못하자, 관군(官軍)이 토벌하려고 이 고개에 이르
렀다. 이시애가 그 군병을 다 거느리고 와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크게 패하여 도망하는 것을 마침내 생포하여
베었다.
○ 양성지(梁誠之)의 < 평삭방서(平朔方序)>에 이르기를, "공경히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 임어하옵신 13년
여름 5월에 적신(賊臣) 이시애가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성상께서 크게 분노하여 도총사(都摠使) 신(臣)
준(浚 귀성군(龜城君)과 부사(副使) 신 석문(錫文 조석문(曺錫文))에게 명하여 서울의 군사 3천 명을 영솔하고
가서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또 진북장군(鎭北將軍) 신 순(純 강순(康純))에게 명하여 평안도의 군병을 영솔
하게 하고, 정로장군(征虜將軍) 신 중선(仲善 박중선(朴仲善))에게 명하여 황해도의 군병을 영솔하여 양덕령
(陽德嶺)을 넘어 토벌케 하였다.
또 신 준(俊)ㆍ신 유림(有臨 최유림(崔有臨) )ㆍ신 진충(進忠)ㆍ신 의견(義堅)ㆍ신 교(嶠 김교(金嶠))ㆍ신 자경
(子慶 오자경(吳子慶)) 등에게 명하여 경기ㆍ충청ㆍ전라ㆍ강원도의 군병을 영솔하고 이 싸움을 돕게 하였다.
대군(大軍)이 모두 함흥부(咸興府)로 회합하니, 모두 3만 명인데, 북청으로 나가서 진(陣)을 쳤다.
6월 정사일에 적(賊)이 밤을 타고 돌격해 온 것을 여러 장수가 나가 싸워 크게 격파하고 지세(地勢)가 불리하여
홍원(洪原)으로 물러와서 진을 치고 있었다. 7월 정해일에 적이 임명한 북청부사라는 자가 부임해 와서 바야
흐로 풍악을 벌이고 잔치를 베풀어 술 마시고 있는 것을 우리의 군사가 정탐하여 알게 되었다.
이에 정예(精銳)한 군사를 보내어 공격해 들어가서 거의 다 죽이고 들어가 북청창(北靑倉)을 점거(占據)하니
이때 적들은 이성(利城)에 해안을 의지해 진을 치고 있었다. 8월 정유일에 우리 대군이 진격해 나가니, 적은
방패로 앞을 가리고 쏘는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우리 군사가 칼날을 무릅쓰고 올라가서 싸움이 한창 격렬할 무렵에 대장(大將) 어유소(魚有沼)가 해변을 따라
험하고 막힌 데를 넘어 들어갔다.
적은 불의에 관군이 그 배후로 좇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죽을 힘을 내어 마구 싸웠으나 우리 군사도 용기 백배
하여 오시(午時)로부터 유시(酉時)에 이르도록 일대 접전을 벌였다.
적의 괴수가 기(旗)를 버리고 먼저 도망하여 드디어 대패했다. 우리의 대군이 승세(勝勢)를 타고 추격하여 수
천 급(級)의 머리를 베고, 마천(磨天)ㆍ마운령(磨雲嶺)을 넘어 길주(吉州)의 영동역(嶺東驛)에 이르니,
적의 괴수는 그의 주거를 불사르고 처자와 수백 기(騎)의 부하를 이끌고 명원참(明源站)까지 도망하였다.
그러나 적의 부하 장수 이주(李珠) 등이 적의 괴수를 결박지어 투항(投降)해 왔으므로 진 앞에서 베이고 그 머리
를 서울로 보내왔다. 전하께서 경내에 대사(大赦)를 내리시고 3일간 저자에 그 머리를 효시(梟示)하였다.
다만 일부의 군사만을 머물러 두어 북방을 진압하게 하고는, 참가한 군사들에게는 주식(酒食)을 내려 먹인 뒤에
파해 보냈다.
인하여 3년간 복호(復戶 조세와 부역을 면케 하는 것)하게 하였으며, 대소의 장사(將士)들에게는 논공행상(論功
行賞)을 차등있게 베풀었다. 신은 그윽히 생각하건대, 함길도는 본시 조종(祖宗)께서 기업을 창건한 땅으로 다른
도에 견줄 바 아니니, 만약 수개월만 더 적이 점거하였다면 그 해독을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군사를 보낸 지 수개월에 세 번 싸워 큰 도적을 평정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천지와 조종이 음으로
도우셨기 때문이지만 실상은 지혜로운 꾀와 신묘한 계산으로 실수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신의 직책이 사국(史局)을 더럽히고 있으나 마땅히 대서 특서하여 그 무공(武功)을 만대(萬代)에 밝히는 바이다."
하였다.
건자개현(乾者介峴) : 만령(蔓嶺)과 8리 거리에 있다. 혹자는 이시애가 이곳에서 전패하였다고도 한다.
마본령(馬本嶺) : 부 북쪽 1백 67리 갑산부(甲山府) 경계에 있다. 향령(香嶺) : 부 북쪽 1백 30리에 있다.
김창기이(金昌岐伊) : 부 북쪽 1백 13리 단천군(端川郡) 경계에 있다.
허건려이령(虛件驢耳嶺) : 부 북쪽 1백리 48리에 있다.
관음굴(觀音窟) : 부 서쪽 82리에 있?며, 굴 안에 물이 있다.
바다 : 부 동쪽 42리에 잉는데, 부 남쪽 60리에도 있다.
호망포(好望浦) : 부 서쪽 57리에 있다. 날이 가물 때 비를 빌면 감응이 있다.
오천(五川) : 부 동쪽 2리에 있다. 그 근원이 5개가 있으니. 하나는 중산(中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대동산(大同山)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죽파산(竹坡山)에서 나오며, 다른 하나는 승방동산(僧房洞山)에서
나와 본보 서남쪽 10리에서 합류하고, 또 큰 냇물과 합류한다. 그 근원이 다섯이기 때문에 속칭 오천이라고 한다.
부 남쪽 40리 속후촌(俗厚村)을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대천(大川) : 김창기이ㆍ후치현ㆍ향령ㆍ죽파산의 물이 부 서남쪽 10리에서 합류하여 대천이 되고,
또 오천과 다시 합류한다.
벌성포천(伐成浦川) : 부 북쪽 1백 38리에 있다. 근원이 향령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산북파천(山北坡川)과
합류한다. 황수천(黃水川) : 부 북쪽 1백 38리에 있다. 근원이 향령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산북파천과 합하는
데 물빛이 황색이기 때문에 이름지은 것이다.
산북파천(山北坡川) : 부 북쪽 1백 18리에 있다. 물 근원이 후치현에서 나와 황수천과 합한다.
독산천(禿山川) : 부 북쪽 1백 62리에 있다. 물 근원이 향령에서 나온다. ○ 이상 네 개의 냇물은 모두 갑산부
(甲山府)의 허천강(虛川江)으로 들어간다.
오정탄(於丁灘) : 부 북쪽 35리에 있다. 이동천(梨洞川) : 부 북쪽 45리에 있다.
방원(防垣) : 부 북쪽 77리에 있다. 송도(松島) : 부 남쪽 64리에 있다. 육도(陸島) : 부 남쪽 90리에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사향(麝香)ㆍ영양(羚羊)ㆍ굴피[樺皮]ㆍ석이[石?] ㆍ오미자(五味子)ㆍ인삼ㆍ
벌꿀[蜂蜜]ㆍ잣[海松子]ㆍ자초(紫草)ㆍ옷[漆]ㆍ숭어[秀魚]ㆍ홍어(洪魚)ㆍ쇠[鐵]: 성대산에서 난다.
연어(?魚)ㆍ삼치[麻魚]ㆍ송어(松魚)ㆍ청어(靑魚)ㆍ황어(黃魚)ㆍ방어(紡魚)ㆍ고등어[古刀魚]ㆍ넙치[廣魚]ㆍ
살조개[江瑤柱]ㆍ미역[藿]ㆍ전복[鰒]ㆍ홍합(紅蛤)ㆍ문어(文魚)ㆍ대구[大口魚]ㆍ은어(銀魚)ㆍ게[蟹]ㆍ
여항어(餘項魚)ㆍ도루묵[銀口魚]ㆍ꽃게[紫蟹]ㆍ해삼(海蔘)ㆍ고리마(古里麻)ㆍ소유(?油)ㆍ돈치[貂]ㆍ
청서(靑鼠)ㆍ수달(水獺)ㆍ해달(海獺)ㆍ소금[鹽] 신증 감초(甘草).
신증 성곽 읍성(邑城) : 정덕(正德) 정축년에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6천 척이며, 높이가 9척이고,
그 안에 한 개의 못과 두 개의 우물과 네 개의 샘이 있다.
봉수 마본령 봉수(馬本嶺烽燧) : 북쪽으로는 갑산(甲山)의 응덕령(應德嶺)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허건려이와
응한다.
허건려이 봉수(虛件驢耳烽燧) : 북쪽으로는 마본령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장항(獐項)에 응한다.
장항 봉수(獐項烽燧) : 본부 북쪽 1백 25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허건려이와 응하고, 남쪽으로는 후치현과 응한
다.
후치현 봉수(厚致峴烽燧) : 북쪽으로는 장항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망덕(望德)과 응한다.
망덕 봉수(望德烽燧) : 본부 북쪽 59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후치현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자라이(者羅耳)와 응
한다. 자라이 봉수(者羅耳烽燧) : 본부 북쪽 25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망덕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가대(加代)와
응한다.
가대 봉수(加代烽燧) : 본부 남쪽 18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자라이와 응하고 동쪽으로는 소응거대(所應居代)와
응하며, 서쪽으로는 산개동(山芥洞)과 응한다.
소응거대 봉수(所應居代烽燧) : 본부 동쪽 57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이성(利城)의 다포산(多布山)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가대와 응한다.
산개동 봉수(山芥洞烽燧) : 본부 서쪽 35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가대와 응하고, 남쪽으로는 홍원(洪原)의 황
가라산(黃加羅山)과 응한다.
신증 장진 봉수(長津烽燧) : 본부 동남쪽 50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이성현의 다포산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예적(曳積)과 응한다. 예적 봉수(曳積烽燧) : 본부 남쪽 50리에 있다. 남쪽으로 육도(陸島)와 응한다.
육도 봉수(陸島烽燧) : 본부 남쪽 60리에 있다. 남쪽으로 홍원형이 천도(穿島)와 응한다.
신증 궁실 객관 동헌(客館東軒) : 방유령(方有寧)의 시에, "국은에 보답하려는 진심 어린 정성 다함이 없어서 전
사(田舍)로 돌아가려는 계획도 이루지 못하였네. 양쪽 귀밑은 희끗희끗하게 변하였어도, 조그마한 이 마음은
밝아 있네. 공사(公事)를 어느 때나 마치려나, 나그네의 시름은 날과 더불어 생겨나는구나. 서로 만나 이야기도
흡족하지 못하였는데, 남쪽으로 또 나누어 가네." 하였다.
신증 누정 진남루(鎭南樓) : 즉 읍성 남쪽 문루(門樓)이다. 도경당(倒鏡堂) : 성안 남쪽에 있다.
학교 향교 : 본부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신증 지금은 본부 동쪽 3리 지점으로 옮겼다.
역원 거산역(居山驛) : 본부 동쪽 60리에 있으며, 찰방(察訪)이 있다. 본도(本道)의 속역(屬驛)이 18개 역이
있으니, 함원(咸原)ㆍ신은(新恩)ㆍ평포(平浦)ㆍ오천(五川)ㆍ제인(濟人)ㆍ시리(施利)ㆍ곡구(谷口)ㆍ기원(基原)ㆍ
마곡(麻谷)ㆍ영동(嶺東)ㆍ임명(臨命)ㆍ웅평(雄平)ㆍ명원(明原)ㆍ고참(古站)ㆍ종포(終浦)ㆍ웅이(熊伊)ㆍ허천
(虛川)ㆍ적생(積生)이다. ○ 찰방(察訪) 1명이 있다. 오천역(五川驛) : 오천(五川) 곁에 있다.
제인역(濟人驛) : 본부 북쪽 90리에 있다. 평청원(平靑院) : 본부 서남쪽 42리에 있다.
황수원(黃水院) : 본부 북쪽 35리에 있다. 궐파원(蕨坡院) : 본부 동북쪽 74리에 있다.
대정원(大定院) : 본부 동쪽 36리에 있다.
신증 교항원(橋項院) : 본부 서쪽 8리에 있다.
불우 안정사(安靜寺)ㆍ일요사(日曜寺) : 모두 대덕산(大德山)에 있다.
진정사(鎭淨寺) : 본부 북쪽 20리 되는 평지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본부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본부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 본부 북쪽에 있다.
고적 홍도동 산성(弘道洞山城) : 본부 북쪽 7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는 6천 7백 80척이며, 높이가 6척인데,
지금은 절반이나 퇴락해 있다. 이망지 산성(泥亡只山城) : 본부 북쪽 19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는 4천 9백
75척이며, 높이가 5척인데 지금은 절반이나 퇴락됐다.
다탄대 산성(多灘臺山城) : 본부 남쪽 15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1천 6백 21척에, 높이는 6척인데, 지금은
반이나 퇴락되었다.
허천평성(虛川坪城) : 본부 동쪽 34리에 있다. 토축(土築)으로 주위가 3천 4백 97척인데 지금은 폐허되었다.
장진포(長津浦) : 본부 47리에 있다. 본부의 선졸(船卒)이 지켜 왔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신증 명환 본조 정윤서(鄭允?) : 판관(判官)이 되었다.
인물 본조 이지란(李之蘭) : 처음 이름은 두란첩목아(豆蘭帖木兒)였는데, 우리 태조(太祖)를 섬겨 개국공신
문하시랑 찬성사(開國功臣門下侍郞贊成事)가 되어 청해군(靑海君)에 진봉(進封)되었으며, 시호는 양렬(襄烈)
이다.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제영 산은 말갈(靺鞨) 땅으로 좇아 뻗어 왔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이 지역이 옛날에 적의 땅에 빠졌던 것
을 선왕(先王)께서 다시 개척하셨네. 민호(民戶)가 많다보니 온갖 풍속들이 섞여 있고, 지세(地勢)가 장하여 큰
인재가 나온다. 길은 푸른 바다를 향하여 구부러졌고, 산은 말간(靺鞨)땅으로 좇아 뻗어 나왔다. 짧은 옷 입고
사나운 범을 쏘는 것 보며 해[歲]가 저물어도 돌아올 줄을 몰랐다." 하였다.
이 고장 풍속은 용맹 있는 무사(武士)를 높여 왔는데 : 이직(李稷)의 시에,"이 고장 풍속은 용맹 있는 무사를 높
여 왔는데, 향교(鄕校) 학당의 제생(諸生)들이 번성하구나. 먼 변방의 풍속을 보지 않고서야, 교화(敎化)의 행해
진 것을 어찌 알랴."하였다.
강포(强暴)한 부족(部族)이 많아서 : 정초(鄭招)의 시에, "들판은 평평하게 바다와 접했는데, 벼ㆍ기장 논밭에는
가을이 익어가네. 마을에서 새벽 연기가 아름답게 올라오고, 소ㆍ양(羊) 나려오는데, 저녁 햇살이 밝게 비친다.
강폭한 부족이 많아서, 무마(撫摩)하기에 서생(書生)의 솜씨 부끄럽구나. 늦은 가을의 맑은 흥취 넉넉하여,
새로 읊은 이 시(詩)를 기행문(記行文)으로 삼으련다." 하였다.
[비고]
연혁 경종(景宗) 원년에 부사(府使)를 별도로 설치하고 판관(判官)을 감하였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노덕(老德) : 곧 부의 안이며, 끝이 10리이다. 덕성(德城) : 북쪽으로 10리이다.
동성대(同聖代) : 북쪽으로 90리이며, 끝이 1백리이다. 이곡(泥谷) : 북쪽으로 1백 리이다.
차서(車書) : 서북쪽으로 1백리이다. 가회(佳會) : 서쪽으로 30리이다. 평포(平浦) : 서 북쪽으로 90리이다.
천양화(天陽化)ㆍ대속후(大俗厚)ㆍ해안(海岸) : 서남쪽으로 40리이다. 인후(仁厚)ㆍ양녕(良寧)ㆍ
중산(中山) : 서남쪽으로 25리이다. 소양화(小陽化) : 남쪽으로 60리이다.
소속후(小俗厚) : 남쪽으로 45리이다.
종산(鍾山) : 남쪽으로 35리이다. 양천(梁川) : 동쪽으로 30리이다. 중평(中坪) : 동쪽으로 35리이다.
거산(居山) : 동쪽으로 70리이다. 보청(甫靑) : 동쪽으로 45리이다. 파산(坡山) : 북쪽으로 1백 40리이다.
성지 별안대성(別安臺城) : 동쪽으로 20리에 있으며, 둘레가 9백 70척이다.
용의동성(龍義洞城) : 북쪽으로 20리에 있으며, 둘레가 1천 1백 20척이다.
창창동성(蒼蒼洞城) : 북쪽으로 10리에 있으며, 둘레가 1천 3백 89척이다.
영아 남병영(南兵營) : 본조 12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남도(南道)와 북도(北道)와의 거리가 멀므로 이곳에 설치하였다.
관원 함경남도 병마절제사(咸鏡南道兵馬節制使) :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하였는데 중종(中宗) 4년에
수사(水使)를 감원(減員)하였다가 뒤에 다시 겸하였다.
중군(中軍) : 곧 병마오후(兵馬虞侯)이다. 심약(審藥) 1명이다. 속영(屬營) : 전영(前營)은 홍원(洪原)에 있으며,
좌영(左營)은 중산(中山)에, 중영(中營)은 영흥(永興)에, 별중영(別中營)은 단천(端川)에, 우영(右營)은 삼수
(三水)에, 후영(後營)은 덕원(德源)에 있다. ○ 진보(鎭堡)는 11이다.
봉수 불당(佛堂) : 남쪽으로 50리에 있다. 산성(山城) : 중산사(中山社)에 있다.
석이(石耳) : 남청사(南靑社)에 있다. 사을이(沙乙耳) : 북쪽으로 40리에 있다.
이동(梨洞) : 북쪽으로 70리에 있다.
후치령(厚致嶺) ㆍ허대이령(虛大耳嶺) ㆍ마저령(馬底嶺)
창고 창(倉)이 여섯ㆍ고(庫)가 여섯 : 모두 성안에 있다. 거산창(居山倉)ㆍ
적진창(赤津倉) : 황해당(況海堂)에 있다. 해창(海倉) : 장진(長津)에 있다.
이진창(耳津倉)ㆍ양화창(陽化倉) 소양화(小陽化)에 있다.
육도창(陸島倉) : 이상의 여섯 창(倉)은 바닷가에 있다. 평포창(平浦倉)ㆍ거서창(車書倉)ㆍ성대창(聖代倉)ㆍ
삼기창(三岐倉) : 이곡(泥谷)에 있다. 제인창(濟仁倉)ㆍ파산창(坡山倉).
역참 자항역(慈航驛) : 북쪽으로 45리에 있다. 구원기참(舊院基站)ㆍ대현참(大峴站).
교량 남대천교(南大川橋) : 서남쪽으로 5리에 있다.
어어탄교(魚漁灘橋) :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율항교(律項橋) : 북쪽으로 40리에 있다.
토산 송이버섯ㆍ소금[鹽]ㆍ살조개[江瑤柱]
사원 노덕서원(老德書院) : 인조(仁祖) 정묘년에 세우고 숙종(肅宗) 정묘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이항복(李恒福) : 포천(抱川)조에 있다. 김덕성(金德誠) : 사천(泗川)조에 있다.
정홍익(鄭弘翼) : 자는 익지(翼之)이고 호는 휴헌(休軒)이며, 동래(東萊)가 본관이다. 벼슬은 부제학에 이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민정중(閔鼎重) : 양주(楊州)조에 있다. 오두인(吳斗寅) : 파주(坡州)조에 있다.
이상진(李尙眞) : 자는 천득(天得)이고 호는 만암(晩庵)이며, 전의(全義)가 본관이다. 벼슬은 우의정에 이르렀
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오도일(吳道一) : 자는 관지(貫之)이고, 호는 서파(西坡)이며, 해주(海州)가 본관이다. 벼슬은 병조 판서 전문형
에 이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단천군 端川郡
동쪽은 길성현(吉城縣) 경계까지 66리, 남쪽은 이성현(利城縣) 경계까지 37리, 서쪽은 경계까지 45리, 갑산부
(甲山府) 경계까지 1백 86리, 북쪽은 야인지(野人地) 경계까지 1백 7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2백 78리이다.
건치연혁 본시 오림금촌(吳林金村)으로 오랫동안 여진(女眞)이 점령하고 있었다.
고려 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이 여진을 축출하고 성을 쌓고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를 두었다가 4년에 성
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함몰되어 독노올(禿魯兀)이라 일컫던 것을 공민왕(恭愍王)이 수복하였고,
신우(辛禑) 때에 단주 안무사(端州安撫使)로 고쳤다. 본조 태조(太祖) 7년에 지단주사(知端州事)로 고쳤고,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의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만들었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각 1명.
군명 오림금촌(吳林金村)ㆍ독노올(禿魯兀)ㆍ복주(福州)ㆍ단주(端州)ㆍ증산(甑山).
성씨 본군 심(沈)ㆍ김(金) : 모두 삼척(三陟).
산천 도덕산(道德山) : 본군 서쪽 2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증산(甑山) : 본군 서쪽 2리에 있다.
천봉산(天鳳山) : 본군 서쪽 26리에 있다. 말흘라산(末訖羅山) : 본군 동쪽 8리에 있다.
오봉산(五峯山) : 본군 서남쪽 30리에 있다. 또한 이성현(利城縣)에도 나와 있다.
회산(廻山) : 본군 남쪽 10리에 있다. 덕응주산(德應州山) : 본군 동쪽 20리에 있다.
마운령(磨雲嶺) : 본군 남쪽 37리에 있다. 옛날에는 두을외대령(豆乙外大領)이라 일컬었다.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아늑한 마운령(磨雲嶺)의 가장 꼭대기를 비틀거리며 가는 늙은 말 안장조차 못 이기
네. 새만이 통행하는 길이 3천 리나 된다고 전날에 들었더니, 이제 양의 창자 같은 백 여덟 굽이를 오르네.
자는 안개 가벼운 산아지랑이에 옷은 반이나 젖었고, 매달린 언덕 위 절벽길은 두 눈이 차가웁네.
그대에게 말하노니 동쪽으로 가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귀밑털이 서녘 바람에 또 얼룩지려 한다." 하였다.
마천령(磨天領) : 본군 동쪽 66리에 있다. 옛날에는 이판령(伊板嶺)이라 불렀다. 여진 사람들은 소[牛]를 이판
(伊板)이라 불렀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에 어떤 사람이 산 아래서 송아지를 팔았더니, 그 어미 소가 송아지
를 찾아 고개를 넘어갔다. 이때 소 주인이 뒤를 좇아간 곳이 바로 길이 되었기 때문에 이판령이라 이름했다
한다. 또 길성현(吉城縣)에도 나와 있다.
홍군파(紅軍坡) : 본군 북쪽 1백 32리에 있다. 오파동(於把洞) : 본군 북쪽 87리에 있다.
이동(梨洞) : 본군 북쪽 61리에 있다. 오갈암(烏曷巖) : 본군 남쪽 13리 바다 가운데 있는데, 그 형상이 돛대와 같
아서 물새들이 그 위에 떼로 모아들므로 속칭 오갈암이라 한다. 오갈은 물새의 이름이다.
도라화산(都羅和山) : 본군 북쪽 15리에 있다. 두언대평(豆彦台坪) : 본군 남쪽 10리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바다 : 본군 동쪽 10리에 있다.
보이천(甫耳川) : 본군 남쪽 10리에 있다. 물 근원이 신동(新洞)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파독천(波獨川)과 합류
한다.
파독천(波獨川) : 본군 남쪽 2리에 있다. 그 근원이 갑산부(甲山府) 지경 쌍청동(雙靑洞)에서 나와 북녘으로 채
금동(採金洞)을 지나 본군 남쪽 5리에 이르러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마이천(泥磨耳川) : 본군 동쪽 20리에 있다. 역시 쌍청동에서 나와 덕응주산을 지나서 남쪽으로 20여 리를 흘
러 바다로 들어간다. 쌍성진(雙城津) : 본군 동쪽 30리에 있다.
오라퇴진(吾羅退津) : 본군 동쪽 40리에 있다. 사을포진(斜乙浦津) : 본군 동쪽 25리에 있다.
노동반포(路洞反浦) : 본군 남쪽 21리에 있다. 난도(卵島) : 본군 동쪽 21리 바다 가운데 있다.
신증 황토령(黃土嶺) : 본군 서쪽 2백 50리에 갑산 경계에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영양(羚羊)ㆍ 사향(麝香)ㆍ복령(茯?)ㆍ오미자(五味子)ㆍ잣[海松子]ㆍ 인삼(人蔘)ㆍ
자초(紫草)ㆍ석이[石?]ㆍ벌꿀[蜂蜜]ㆍ 쇠[鐵]ㆍ납쇠[鉛鐵] : 모두 토라산(吐羅山)에서 난다.
사색옥(四色玉) : 청(靑)ㆍ황(黃)ㆍ 백(白)ㆍ오(烏)의 사색의 옥이 모두 이동(梨洞)에서 난다.
석류황(石硫黃) : 오을족(吾乙足)의 북쪽 봉우리 밑에서 난다. 대구[大口魚]ㆍ문어(文魚)ㆍ은어(銀魚)ㆍ
전복[鰒]ㆍ방어(?魚)ㆍ삼치[麻魚]ㆍ조개[蛤]ㆍ홍합(紅蛤)ㆍ꽃게[紫蟹]ㆍ게[蟹]ㆍ연어(?魚)ㆍ송어(松魚)ㆍ
고등어[古刀魚]ㆍ황어(黃魚)ㆍ미역[藿]ㆍ다시마[塔士麻]ㆍ해삼(海蔘)ㆍ곤포(昆布)ㆍ해달(海獺)ㆍ돈피[貂]ㆍ
청서(靑鼠)ㆍ수달(水獺)ㆍ화피(樺皮)ㆍ소금[鹽]
성곽 읍성(邑城) : 석축으로 주위는 3천 9백 68척이며,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세 개의 우물이 있다.
세종 31년 무진에 성를 쌓았다.
관방 오을족보(吾乙足堡) : 본군 북쪽 1백 2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8백 60척에 높이가 8척이다.
신증 구보(舊堡) 북쪽 60리에 있다. 석축으로 성의 주위는 1천 8백 척이며, 높이가 9척이다.
금상 24년에 만호(萬戶)를 두었다.
쌍청보(雙靑堡) : 본군 서쪽 1백 6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1천 3백 82척이며, 높이는 8척이다. 위의 두 보
(堡)는 홍원(洪原)의 군졸이 방비하고 있다. 신증 구보(舊堡) 서쪽 90리에 있는데, 석축으로 성의 주위가 8백
43척에 높이가 9척이다. 연산(燕山) 임술년에 권관(權管)을 두었다.
신증 증산보(甑山堡) : 본군 서쪽 1백 90리에 있다. 금상 23년에 권관을 두었다.
봉수 말흘라 봉수(末訖羅烽燧) : 동쪽으로는 오라퇴(吾羅退)와 응하고, 서쪽으로는 파독지(波獨只)와 응하며,
북쪽으로는 수차덕(水差德)과 응한다.
오라퇴 봉수(吾羅退烽燧) : 본군 동쪽 45리에 있다. 서쪽으로는 말흘라와 응하고, 남쪽으로는 수차덕과 응하며,
동쪽으로는 호타리(胡打里)와 응한다.
호타리 봉수(胡打里烽燧) : 본군 동쪽 65리에 있다. 서쪽으로는 오라퇴와 응하고, 동쪽으로는 길성(吉城)의
벌장포(伐長浦)와 응한다.
수차덕 봉수(水差德烽燧) : 본군 북쪽 42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말흘라와 응하고, 북쪽으로는 국사당(國祠堂)
및 오라퇴와 응한다.
국사당 봉수(國祠堂烽燧) : 본군 북쪽 73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수차덕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오을족구자 북봉
(吾乙足口子北峯)과 응한다.
오을족구자북봉 봉수(吾乙足口子北峯烽燧) : 본군 북쪽 1백 8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국사당과 응한다.
파독지 봉수(波獨只烽燧) : 본군 서쪽 10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이성(利城)의 마운령(磨雲嶺)과 응하고, 북쪽
으로는 장항(獐項)과 응하며, 동쪽으로는 말흘라와 응한다.
장항 봉수(獐項烽燧) : 본군 북쪽 35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파독지와 응하고, 북쪽으로는 고소리(古所里)와
응한다.
고소리 봉수(古所里烽燧) : 본군 북쪽 65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장항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가사(家舍)와 응
한다.
가사봉수(家舍烽燧) : 본군 북쪽 92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소리와 응하고, 북쪽으로는 쌍청구자북봉과 응
한다.
쌍청구자북봉 봉수(雙靑口子北峯烽燧) : 본군 북쪽 1백 17리에 있다. 남쪽으로 가사와 응한다.
신증 신오을족보 백덕 봉수(新吾乙足堡柏德烽燧) : 보(堡) 동쪽 10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길주(吉州)의 응봉
(應峯)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은룡덕(隱龍德)과 응한다.
은룡덕 봉수(隱龍德烽燧) : 신오을족보의 남쪽 20리에 있다. 서쪽은 검의덕(檢義德)과 응한다.
검의덕 봉수(檢義德烽燧) : 신오을족보 서쪽 30리에 있다. 서쪽은 신쌍청보 북봉(新雙靑堡北峯)과 응한다.
신청보 북봉 봉수(新靑堡北峯烽燧) : 보 북쪽 4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곽령(藿嶺)과 응한다.
곽령 봉수(藿嶺烽燧) : 신쌍청보 남쪽 10리에 있다. 남쪽으로 가사(家舍)와 응한다.
신증 누정 연정(蓮亭) : 본군 읍성 서쪽에 있다. 읍호성(?灝亭) : 본군 남쪽 2리에 있다.
학교 향교 : 본군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시리역(施利驛) : 옛날에는 실리역(失里驛)이라 일컬었다. 본군 읍성 남쪽에 있다.
기원역(基原驛) : 본군 남쪽 3리에 있다.
마곡역(麻谷驛) : 본군 북쪽 45리에 있는데 우리 태종 9년에 비로소 설치하였다.
영제원(永濟院) : 본군 북쪽 80리에 있다. 충신원(忠信院) : 본군 남쪽 40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본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증산(甑山)에 있다. 여단 : 본군 북쪽에 있다.
불우 옥룡사(玉龍寺) : 천봉산에 있다. 화장사(花藏寺)ㆍ노동사(蘆洞寺) : 모두 오봉산에 있다.
고적 도덕산성(道德山城) : 석축으로 주위가 3천 9백 28척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덕응주 산성(德應州山城) : 석축으로 주위는 2천 71척이며, 높이가 11척이다. 그 안에 큰 못이 있는데, 지금은
반이나 무너져 있다. 인연고개
산성(因緣古介山城) : 본군 서쪽 10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2천 98척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고영회산성(古營回山城) : 본군 남쪽 7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2천 98척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보이고개 산성(甫耳古介山城) : 본군 남쪽 15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9백 68척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노동 산성(路洞山城) : 본군 남쪽 25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7백 37척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마운령 장성(磨雲嶺長城) : 그 끝이 바다에 이르고 있다.
옛 단주[古端州]: 하다리(何多里)에 있다. 현 읍내 서쪽 13리이다.
노동소루(路洞小壘) : 본군 남쪽 40리에 있다.
마곡점소루(麻谷岾小壘) : 위의 두 소루는 정해년에 이시애(李施愛)를 정벌할 때에 관군이 쌓은 것이다.
신증 오을족 폐보(吾乙足廢堡) : 금상 24년에 폐해 버렸다.
쌍청폐보(雙靑廢堡) : 연산(燕山) 임술년에 폐해 버렸다.
우거 본조 신원후(辛元厚) : 이시애의 반란 때 원후가 차운혁(車云革) 등과 더불어 그를 잡아 죽이려고 꾀하다
가 도리어 적당하게 잡힌 바 되었는데, 죽을 때 임하여서도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히지 않았다.
이 사실이 보고되어,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직첩을 내렸다.
제영 가을비에는 동녘 바다 머리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오랫동안 객지에 지체하니 내 행색이 슬프며, 해가
지나도 오히려 쉬지 못하네. 지난 봄바람에는 요동(遼東)의 벌판을 달렸는데, 가을비에는 바다의 동녘 머리일세.
말 안장에 의지한 한 몸이 멀리 왔고, 산과 물은 천고(千古)의 가을이로세. 금원(金源) 호협(豪俠)들의 소굴이,
오늘에서는 다만 황폐한 무덤만이 남았구나." 하였다.
물이 겹치고 산이 겹쳐서 지경이 한층 더 그윽한데 : 정흠지(鄭欽之)의 시에, "물이 겹치고 산이 겹쳐서 지경이
한층 더 그윽한데, 난간을 의지하며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노라. 마음을 태우자니 이미 노쇠한 병이 된 것을
깨달았고, 마음놓고 명승의 유람길조차도 감당하기 어렵구나. 남녘으로 흰 구름을 바라보며 언제나 목력(目力)
을 다했는데, 북으로 누런 사막지대를 넘고서도 다시 머리를 돌려 보았다. 어찌하면 비린내 풍기는 추악한 무리
들을 깨끗이 소탕하고, 첩서(捷書)를 주야로 달려 구중궁궐에 올릴까." 하였다.
신증 관하(關河) 천리 밖인데 : 이윤(李胤)의 시에, "흰 머리털 날리며 가는 날 안장 위에서, 머나먼 길을 가고 또
가며 스스로 쉬지 않네. 관하(關河) 천리 밖인데, 등잔불에 밤은 이미 5경(更)이라. 나그네 마음 유달리 빗소리에
놀라는데, 향수(鄕愁)는 다시 가을을 당했구나. 동해 일대를 누비며 수많은 명산수(名山水)를 보긴했지만,
어찌 내 고장의 조그마한 숲 언덕만 하랴." 하였다.
[비고]
연혁 숙종(肅宗) 46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올리고 독진(獨鎭)을 삼았다. : 단주(端州) 서쪽으로 13리인 하다리
(何多里)에 있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이상(利上) :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이하(利下) : 동쪽으로 50리에 있다.
두일(斗日) : 북쪽으로 1백 80리에 있다. 하다(何多) : 서쪽으로 70리에 있다.
마암(馬巖) :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파도(波道) : 북쪽으로 2백 리에 있다.
복귀(福貴) : 서쪽으로 1백 리에 있다. 수상(水上) : 서북쪽으로 2백 30리에 있다.
수하(水下) : 서북쪽으로 1백 리에 있다. 고만(高滿) : 동쪽으로 70리에 있다.
광천(廣泉)ㆍ신안(新安) : 서북쪽으로 1백 10리에 있다. 신만(新滿).
영아 별중영(別中營) : 숙종(肅宗) 때에 설치하였다.
○ 별중영장(別中營將)은 본부사(本府使)가 겸한다.
○ 속읍(屬邑)은 단천(端川)이고, 속진(屬鎭)은 이동(梨洞)이며, 별중사(別中司)는 산도(山道)에 있다.
진보 이동진(梨洞鎭) : 북쪽으로 90리에 있으며, 선조(宣祖) 41년에 숭의보(崇義堡)를 이동에 옮기고 곧 이동진
이라 하였다가, 영종(英宗) 21년에 호타리보(胡打里堡)를 혁폐하고 동쪽으로 성(城)을 합하였다.
둘레는 4백 17척이다. ○ 병마만호(兵馬萬戶) 1명이 있다.
호타리보(胡打里堡) : 동쪽으로 60리에 있다. 경종(景宗) 3년에 용족보(龍足堡)를 이곳에 옮겼으며,
둘레는 1천 40척이다. 영종 21년에 혁폐하고 이동진에 예속시켰다.
○ 용덕(龍德)ㆍ화저(火底)는 곽보(藿堡)에서 30리이며, 서쪽으로는 마등령(馬騰嶺)이 40리 검의던(檢義德)이
40리에 있다.
숭의보(崇義堡) : 추운령(驅雲嶺)의 북쪽에 있으며, 선조(宣祖) 41년에 혁폐하고 이동진에 예속시켰다.
○ 이동(梨洞)의 동북쪽으로부터 고파령(高坡嶺) 30리에 이른다.
○ 이동의 서쪽으로부터 3리이며 송현(松縣)에서 3리이다. 증산창(甑山倉)은 5리고, 증산현(甑山縣)은 북쪽
으로 20리이며, 추운령(驅雲嶺)은 25리이고 시장현(市場峴)은 10리고, 용족보도 10리이다.
봉수 증산(甑山) : 서남쪽으로 15리에 있다. 마흘내(?訖乃) :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오라퇴(吾羅退) : 동쪽으로 45리에 있다.
창고 읍창(邑倉) 둘ㆍ신동창(新洞倉)ㆍ유전창(杻田倉) : 모두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고성창(古城倉) : 서북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진창(津倉)ㆍ교제창(交濟倉) : 모두 동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바닷가이다.
이동창(梨洞倉) : 이동진 안에 있다. 마곡창(麻谷倉) : 마곡역에 있다.
역참 기원참(基原站)ㆍ마곡참(麻谷站) :
○ 부의 서쪽으로부터 이룡평(離龍坪)이 30리, 신동령(新洞嶺)이 30리, 국사령(國師嶺)이 35리, 석성창(石城倉)
이 10리, 신리동(新里洞)이 70리, 황토기경보(黃土岐慶堡)가 20리, 황토령(黃土嶺)이 20리이며 갑산(甲山)과
통한다.
○ 부의 동북쪽으로부터 마곡(麻谷)이 45리, 서북쪽으로 국사령(國師嶺)이 30리, 이동(梨洞)이 30리이며,
수갈파령(輸葛坡嶺)은 길주(吉州)와 통한다.
목장 두언태장(豆彦台場) : 둘레가 35리이다. ○ 감목관(監牧官)이 1명이며, 본부사(本府使)가 겸한다.
교량 남대천교(南大川橋) : 남쪽으로 5리에 있다. 복대천교(福大川橋) : 서남쪽으로 10리에 있다.
북대천교(北大川橋) : 동북쪽으로 10리에 있다.
토산 은(銀)ㆍ금(金)ㆍ구리[銅]ㆍ납[鉛]ㆍ벼룻돌[硯石]ㆍ활석(滑石)ㆍ화석(火石)ㆍ곤포(昆布).
누정 공민루(共民樓)ㆍ첨운루(瞻雲樓) : 모두 부 안에 있다.
이성현 利城縣
동쪽은 단천군(端川郡) 경계까지 45리, 북쪽은 단천군 경계까지 34리,
남쪽은 북청부(北靑府) 경계까지 37리이며, 서쪽은 같은 북청부 경계까지 4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1백 89리이다.
건치연혁 옛날에는 시리(時利)라 일컬었는데, 고려 때에 복주(福州)로 붙였다.
본조에 이르러 복주를 고쳐 단천(端川)으로 하고, 이내 붙여두었던 것을 세종(世宗) 18년에 단천군 마운령
(磨雲嶺) 이남의 시질간(時叱間)ㆍ시리(施利)의 두 개 사(社)와, 북청부(北靑府) 동쪽 다보사(多甫社) 이북의
땅을 분할하여 현(縣)을 설치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각 1명이다.
군명 시리(時利)ㆍ시질간(時叱間)ㆍ다보(多甫)ㆍ아사(阿沙)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나와 있다.
관성(觀城).
산천 진산(鎭山) : 본현 서쪽 22리에 있다. 성산(城山) : 본현 서쪽 8리에 있다.
영취산(靈鷲山) : 본현 남쪽 25리에 있다. 회산(檜山) : 본현 서쪽 40리에 있다. 날이 가물어 비를 빌면 번번히
감응이 있다 한다.
오봉산(五峯山) : 본현 북쪽 15리에 있다. 운달산(雲達山) : 본현 북쪽 16리에 있다.
궐파산(蕨坡山) : 본현 서쪽 35리 북청부계(北靑府界)에 있다.
좌익령(佐翼嶺) : 본현 북쪽 35리인 단천군계(端川郡界)에 있다.
만령(蔓嶺) : 본현 남쪽 37리에 있다. 북청부 산천 조항에 자세히 나와 있다.
마운령(磨雲嶺) : 본현 동쪽 44리 단천군계에 있다.
옛날에 오랑캐를 막던 곳으로 문기(門基)와 추석(樞石)이 있다. 또한 문현(門峴)이라고도 한다.
다포산(多布山) : 본현 남쪽 34리에 있다. 오갈암(烏曷巖) : 본현 동쪽 20리 지점 바다 가운데 있다.
형제암(兄弟巖) : 본현 동쪽 23리에 있는데 크고 작은 것이 대치(對峙)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바다 : 본현 5리 지점에 있다. 난도(卵島) : 본현 동쪽 30리 바다가운데 있다.
가차도(加次島) : 난도(卵島)와 대치해 있다. 초피도(椒皮島) : 본현 남쪽 35리 바닷가에 있다.
천곶(穿串) : 본현 남쪽 30리에 있는데, 바위의 형상이 홍문(虹門) 같은 것이 있다.
소천(小川) : 본현 남쪽 3리 지점에 있다. 나하동(羅下洞) : 본현 남쪽 45리 지점에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인삼(人蔘)ㆍ사향(麝香)ㆍ오미자(五味子)ㆍ자초(紫草)ㆍ석지(石脂)ㆍ옷칠[漆]ㆍ쇠
[鐵]: 나하동(羅下洞)에서 난다. 대구[大口魚]ㆍ조개[蛤]ㆍ홍합(紅蛤)ㆍ살조개[江瑤柱]ㆍ송어(松魚)ㆍ
고등어[高刀魚]ㆍ홍어(洪魚)ㆍ방어(?魚)ㆍ삼치[麻魚]ㆍ도루묵[銀口魚]ㆍ문어(文魚)ㆍ전복[鰒]ㆍ
연어(?魚)ㆍ게[蟹]ㆍ청어(靑魚)ㆍ해달(海獺)ㆍ수달(水獺)ㆍ돈피[貂]ㆍ청서(靑鼠)ㆍ미역[藿]ㆍ소금[鹽]ㆍ
화피[樺皮)ㆍ다시마[塔士麻]ㆍ은어(銀魚)ㆍ해삼(海蔘)ㆍ벌꿀[蜂蜜]ㆍ석이[石?].
봉수 다포산 봉수(多布山烽燧) : 북쪽으로는 마운령(磨雲嶺)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북청(北靑)의 소응거대(所應居代)와 응한다.
마운령 봉수(磨雲嶺烽燧) : 북쪽으로는 단천군(端川郡)의 파독지(波獨只)와 응하고, 남쪽으로는 다포산
(多布山)과 응한다.
신증 누정 호호정(浩浩亭)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고, 앞에는 평야를 굽어본다.
학교 향교 : 본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시리역(施利驛) : 본헌 남쪽 4리에 있다. 곡구역(谷口驛) : 본현 동쪽 35리에 있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새벽녘 말을 타고 이성현(利城縣)에서 나와 평원(平原)을 치달려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니, 바닷물 짙게 푸르러 채색 구름과 합했네. 붉은 기운 먼저 치솟아 산화(山火)가 급히 타오르는 듯 순식
간에 구름 열리고 그 기운 걷히니, 물은 멀고 하늘은 길어 한 빛을 이루었네. 화룡(火龍)이 유리소반[??盤]을
떠받들어 올리니, 신이(神異)한 광채가 번쩍번쩍 사람의 눈을 쏘아댄다. 부상(扶桑)과 석목(析木)이 정녕 어디
메냐, 하늘과 바다가 모두 망망(茫茫)하여 찾을 길이 없구나. 겨우 바다밑을 떠나자. 쉽게도 높이 올라 순식간에
눈앞에서 일만 길[萬丈]이네.
세상의 광음(光陰)이 바로 이와 같은 것, 사람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크게 탄식하도록 한다. 말을 쉬게 하려고
곡구역(谷口驛)에 투숙하여 홀로 앉아 있노라니, 웬일인지 회포가 좋지 않다. 백년 3만 날이 이런 것이니,
바람에 나부끼는 곳은 꽃이나 귀에 잠깐 스치는 좋은 새소리처럼 마침내 없어지고 마는 것. 취중(醉中)에 살고
꿈속에 죽는다면 무엇하겠는가. 대장부란 요컨대 이름이 불멸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하였다.
보은원(普恩院) : 본현 남쪽 15리에 있다. 원동원(院洞院) : 본현 서쪽 35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본현 서쪽을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성산(城山)에 있다. 여단 : 본현 북쪽에 있다.
불우 한당사(閑堂寺) : 운달산(雲達山)에 있다. 송림사(松林寺) : 오봉산(五峯山)에 있다.
반룡사(盤龍寺) : 진산(鎭山)에 있다. 난암사(卵巖寺) :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고적 성상 고성(城上古城) : 석축으로 주위가 9백 95척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싯간 산성(時叱間山城) : 본현 동북 26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9백 12척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신증 명환 본조 김극성(金克誠).
[비고]
연혁 정종(正宗) 때에 이원(利原)으로 고쳤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다실(多實) : 서남쪽으로 끝이 30리이다. 시한(時閒) : 동쪽으로 끝이 4리이다.
시리(施利) :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성지 읍성(邑城) : 둘레가 3천 26척이며 우물 셋이 있다. 마운령관(磨雲嶺關) : 옛날에 긴 성을 쌓았는데 □□에
까지 이어졌다. 또는 문현(門峴)ㆍ성현(城峴)ㆍ장진현(長津峴)이라고도 하며, 지금도 옛 문터가 있다.
봉수 성문(城門) : 성현(城峴) 위에 있다. 진조봉(眞鳥峯) : 남쪽으로 10리이며 바다에 임해 있다.
창고 읍창(邑倉) : 읍내(邑內)에 있다. 곡구창(谷口倉) : 곡구역(谷口驛) 옆에 있다.
남창(南倉) : 남쪽으로 10리이며 바닷가에 있다. 서창(西倉) :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교제창(交濟倉) : 자외포(者外浦)에 있으며 영종(英宗) 임술년에 설치하였다.
역참 나하동참(羅下洞站) : 서남쪽으로 30리에 있다.
교량 남천교(南川橋) : 남쪽으로 4리이다. 우계교(牛溪橋) : 동쪽으로 7리이다.
동천교(東川橋) : 동쪽으로 30리이다. 원교(院橋) : 남쪽으로 17리이다.
토산 초서피.
누정 월파정(月波亭) : 시리(施利)에 있다.
사무루(使無樓)ㆍ동송정(東松亭)ㆍ남송정(南松亭) : 동남쪽으로 6,7리의 송림(松林)에 있는데 연호(延豪)에서
3, 4리이고 바다와 접한 송림이다.
홍원현 洪原縣
동쪽으로 북청부계(北靑府界)까지 53리이요, 남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4리이며,
서쪽으로는 함흥부계(咸興府界)까지 37리이며 북쪽으로도 동부계(同府界)까지 64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9백 75리이다.
건치연혁 옛날에는 홍긍(洪肯), 혹은 홍헌(洪獻)이라고 일컬었는데, 고려 말기에 비로소 현(縣)을 두었다.
본조 태조 7년에 지금의 명칭으로 고쳐 함흥부(咸興府)에 붙였다가 태종 2년에 다시 쪼개어 현령(縣令)을
두었다. 얼마 안 되어 이를 없애고, 다시 함흥으로 붙였던 것을 세종 15년에 다시 현감(縣監)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각 1명.
군명 홍헌(洪獻)ㆍ홍긍(洪肯).
성씨 본현 이(李).
산천 두무산(豆蕪山) : 본현 북쪽 85리에 있다. 황가라산(黃加羅山) : 본현 동쪽 35리에 있다.
대문령(大門嶺) : 본현 동쪽 30리 허에 있는데 산줄기가 서쪽으로부터 동으로 달려 뻗은 것이 있고, 또 남쪽
으로 굽이굽이 바다에 이르렀다. 고개를 따라 서성(西城)이 있고, 성에 문 세 개가 있어 행로를 통하게 하였다.
서쪽 문을 대문(大門)이라 이르고, 가운데 문을 중문(中門)이라 이르고, 남쪽 문을 석문(石門)이라 이른다.
석문은 해변에 있으며, 세 문의 거리가 모두 3리 가량 되었다. 신우(辛禑) 때에 심덕부(沈德符)가 왜적(倭賊)
과 고개 북쪽에서 싸워 대패하였다.
차유령(車踰嶺) : 본현 서쪽 50리 함흥부와의 경계에 있다.
함관령(咸關嶺) : 본현 서쪽 37리 함흥부와의 경계에 있다. 묘봉산(妙峯山) : 본현 동쪽 35리에 있다.
바다 : 본현 남쪽 4리에 있다. 신익천(新翼川) : 본현 서쪽 4리에 있다. 물 근원이 두무산에서 나와 본현 서남
9리 지점을 지나, 문암(門巖)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요원수(要原水) : 본현 동쪽 35리에 있다. 물 근원이 북청(北靑)의 중산(中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천관도(穿串島) : 본현 남쪽 5리에 있다. 서로 통한 구멍이 있으며, 그 위는 과녁[侯]을 세우고 활을 쏠 만하다.
마랑이도(馬郞耳島) : 본현 동쪽 58리 지점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문
암(門巖) : 본현 남쪽 10리 지점 해안(海岸)에 있는데, 석벽(石壁)이 문짝같이 서 있는 것이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석이[石?]ㆍ잣[海松子]ㆍ인삼(人蔘)ㆍ오미자(五味子)ㆍ자초(紫草)ㆍ솟돌[鼎石] :
차유령(車踰嶺) 아래서 난다. 연어(?魚)ㆍ송어(松魚)ㆍ고등어[古刀魚]ㆍ은어(銀魚)ㆍ필어(筆魚)ㆍ청어(靑魚)ㆍ
조갯살[江瑤柱]ㆍ넙치[廣魚]ㆍ홍어(洪魚)ㆍ복어[鰒]ㆍ홍합(紅蛤)ㆍ해삼(海蔘)ㆍ황어(黃魚)ㆍ문어(文魚)ㆍ
삼치[麻魚]ㆍ대구[大口魚]ㆍ게[蟹]ㆍ도루묵[銀口魚]ㆍ꽃게[紫蟹]ㆍ미역[藿]ㆍ고리마(古里麻)ㆍ해달(海獺)ㆍ
소금[鹽].
봉수 황가라산 봉수(黃加羅山烽燧) : 동쪽으로는 북청부(北靑府)의 산개동(山芥洞)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남산(南山)과 응한다.
남산 봉수(南山烽燧) : 본현 남쪽 2리에 있다. 서쪽으로는 함흥부(咸興府)의 무을계(無乙界)와 응하고,
동쪽으로는 황가라산과 응한다.
학교 향교 : 본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신은역(新恩驛) : 본현 서쪽 4리에 있다. 함원역(咸原驛) : 본현 서쪽 30리에 있다.
평포역(平浦驛) : 본현 동쪽 45리에 있다. 함관령(咸關嶺) : 함관령(咸關嶺) 아래에 있다.
불우 은적사(隱寂寺)ㆍ중암사(中菴寺) : 모두 두무산에 있다. 도솔암(兜率菴) : 묘봉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본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본현 서쪽 2리에 있다. 여단 : 본현 북쪽에 있다.
고적 달달동(??洞) : 본현 남쪽 30리에 있다. ○ 원(元) 나라 승상(丞相) 납합출(納哈出)이 조소생(趙小生)의
꾀임을 듣고 삼살(三撒 북청) 홀면(忽面)지역을 침략해 들어왔는데, 도지휘사(都指揮使) 정휘(鄭暉)가 그들과
누차 싸워 패전하니, 공민왕(恭愍王)이 우리 태조(太祖)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명해 보냈다.
이때 납합출은 조소생ㆍ탁도경(卓都卿)과 같이 이 달달동에 둔치고 있었다.
태조가 함관령(咸關嶺)을 넘어 이곳에 도착하니, 납합출이 진(陣)을 치고 서로 대하여 10여 명의 기사(騎士)를
거느리고 진 앞으로 나오므로 태조도 또한 10여 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진 앞으로 나아가 상대하였다.
납합출이 거짓말로, "내가 처음 올 때에는 본시 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ㆍ반성(潘誠) 등을 추격하여 왔으
며 귀국 경지를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나는 누차 패전을 거듭하여 군졸 만여 명을 상실하였고 비장(裨將) 수명도 죽어 형세가 심히 곤궁하고
급박하여 파전(罷戰)하기를 비는 바이니 명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때 적병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
므로 태조가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다. 항복 받는 척하고는 한 장수가 납합출의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이를
쏘니, 활 시윗소리에 응하여 꺼꾸러졌다. 또 납입출이 탄 말을 쏘아 죽이고 바꿔 탄 말을 또 죽였다.
이리하여 큰 싸움을 한참 동안 벌여 서로 승부를 다투었다. 태조가 납합출에게로 바짝 쫓아가니 납합출이
급히 말하기를, "이만호. 두 장수가 어찌 서로 핍박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곧 말머리를 돌리는 것을 태조가
또 그의 말을 쏘아 죽였는데, 그 부하의 군사가 말에서 내려 자기 말을 납합출에게 주어 드디어 모면하게 되
었다. 조포산(照浦山) : 본현 동쪽 12리에 있다. 태조(太祖)가 일찍이 이 산에서 사냥할 적에 세 마리의 노루가
떼를 지어 나왔다. 태조가 먼저 노루 한 마리를 쏘아 죽이고 노루 두 마리가 함께 달아나는 것을 또 쏘니 한 화살
이 한꺼번에 겹쳐 꿰뚫고 나무 벤 밑동에 매우 깊이 박혀 있었다.
함관령(咸關嶺) : 태조(太祖)가 납합출과 큰 싸움을 한참 동안 벌이다가 날도 저물려고 해서 태조가 군사를
거두어 진지로 퇴각하는데 스스로 후군(後軍)이 되어 오고 있었다. 고갯길이 꾸불꾸불 여러 층을 이루고 환자
(宦者) 이파라실(李波羅實)이 가장 아래 층에 있었는데 은갑(銀甲)을 입은 두 장수가 파라실을 쫓아 창을 겨누
고 거의 닿을 찰라에 태조가 말을 돌려 두 장수를 쏘아 모두 꺼꾸러뜨리고 곧 이어 20여 명을 죽이고는 다시
군사를 돌려 반격했다. 한 명의 적이 태조를 뒤로 추격하여 창을 들어 찌르려고 하였다.
태조가 홀연 몸을 뉘어 말에서 떨어지는 형상을 지으며 위로 적을 쳐다보며 그 겨드랑을 쏘고는 즉시 도로 탔다.
또 한 적이 앞으로 나와 태조를 정면으로 쏘았다. 태조가 즉시 말 위에서 일어서니 화살이 사타구니 아래로
빠져 나갔다. 태조가 이에 말을 달리며 쏘아 그 무릎에 명중시켰다. 또 냇물 가운데서 한 명의 적장을 만나니,
그 사람은 갑옷으로 목까지 싸고, 면갑(面甲)에다 또 턱에 갑주까지 만들어 입을 벌리는데 편리하도록 하여
주밀하게 보호한 것이 몹시 견고해서 쏠 만한 구석이 없었다. 태조가 부러 그 말을 쏘니, 말이 광기(狂氣)를
발작하여 마구 뛰었고, 적은 힘을 내어 고삐를 당기면서 입을 벌렸으므로 태조가 그 입을 쏘아 마쳤다.
이미 세 사람을 거꾸러뜨리니 이로부터 적군은 크게 붕괴(崩壞)하기 시작하였고, 태조가 철기(鐵騎)를 동원
하여 짓밟으니 적은 저희끼리 밟고 쓰러져 죽이고 노획한 것이 심히 많았다.
요원 산성(要原山城) : 본현 동쪽 35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9백 84척에 높이가 4척인데, 지금은 태반이
무너져 있다.
신증 효녀 본조 길씨(吉氏) : 집에서 일찍이 실화(失火)한 적이 있었는데, 뜨거운 불꽃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시어머니를 업고 나오다가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함께 죽었다. 금상 2년에 동네에 정문을 세웠다.
열녀 본조 내은덕(內隱德) : 본현 동쪽 몽상리(蒙尙里)의 사람이다. 그 남편이 호랑이에게 잡혀가는 것을 내은덕
이 방망이로 그 호랑이를 때려 죽여 남편이 살아났다. 이 사실이 보고 되어 동네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땅이 궁벽지니 구름과 연기가 고색 짙고 : 김구(金坵)의 시에, "땅이 궁벽하니 구름과 연기가 고색 짙고,
언덕이 나즈막하니 나무와 나무들이 평평하다. 장안(長安 서울)이 몇 리나 되는고. 머리를 돌려 보니 정을 견딜
길이 없구나." 하였다.
변방 망대[?]에는 오랑캐 티끌이 그쳐 있고 :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말을 달려 외로운 성(城)으로 들어가니,
먼 산봉오리엔 저녁 햇빛이 밝다. 밭두둑마다 기장과 찰벼가 풍성하게 들어섰고, 바다에 솟은 산은 반은 흐리
고 반은 개여 있구나. 변방 망대에 오랑캐 티끌이 그쳐 있고, 넓은 물결 위에는 신기루(蜃氣樓)가 평평하다.
난간에 의지하니 나그네 회포 한층 더해지는데, 마을의 나무 멀리 정을 머금은 듯하여라." 하였다.
신증 연기가 덮혀 외로운 마을 침침한데 : 허종(許琮)의 시에, "연기가 덮혀 외로운 마을 침침하고, 갈매기 나는
것 두어 점(點) 희다. 버드나무에 봄빛이 이르고, 하늘은 손의 시름을 위하여 개였네. 신세(身世)는 나이가 장차
늦어지고, 관산(關山)에는 길이 험하기도 하구나. 피곤이 몰려와 잠을 자려고 했더니, 우는 새 나의 시흥(詩興)
을 일으켜 준다." 하였다.
[비고]
연혁 세종(世宗) 15년에 현감(縣監)을 다시 두었고, 읍(邑)을 신익사(神翼社)에 설치했다가, 20년에 지금의
치소(治所)로 옮겼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신익(新翼) : 남쪽으로 끝이 10리이다. 노동(盧洞) : 서쪽으로 30리이다.
부민(富民) : 서북쪽으로 30리이다. 호현(好賢) : 북쪽으로 90리이다. 경포(景浦) : 동쪽으로 20리이다.
용원(龍原) : 동쪽으로 40리이다.
성지 읍성(邑城) : 둘레가 8백 61보이며, 동ㆍ남쪽에 두 문이 있고 우물 둘이 있다.
대문관(大門關) : 조포산(照浦山)의 한 줄기가 서남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달려 남이(南?)에 이르러 바다에서
그쳤으며, 순령(循嶺)에는 성이 있는데 성에는 세 문이 있어 통행할 수 있는 길이다. 서쪽에 있는 성문을 대문
(大門)이라 하고 가운데에 있는 성문을 중문(中門)이라 하고 남쪽의 성문을 석문(石門)이라 하는데 석문은
바닷가에 있다. 세 문은 모두 서로의 거리가 3리이다.
영아 전영(前營) : 숙종(肅宗) 6년에 설치했다. ○ 전영장은 본부사(本府使)가 겸한다.
○ 속읍(屬邑)은 북청(北靑) ㆍ 홍원(洪原) ㆍ 이원(利原)이다.
창고 읍창(邑倉) : 읍내(邑內)에 있다. 부민창(富民倉) : 서북쪽으로 10리에 있다.
산창(山倉) : 북쪽으로 50리에 있다. 해창(海倉) :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요진창(要津倉) : 동쪽으로 35리에 있다. 교제창(交濟倉) : 동쪽으로 5리에 있다.
호현창(好賢倉) : 호현사(好賢社)에 있다.
역참 대문참(大門站).
목장 마양도장(馬養島場) : 함흥 감목(咸興監牧)에 속해 있다.
진도 방어진(?魚津) : 동쪽으로 5리이다. 우간진(右看津) : 동쪽으로 20리이다.
요진(要津) : 동쪽으로 30리이며 연해의 작은 나루이다.
교량 서수교(西水橋) : 서대천(西大川)에 있다. 몽상교(夢尙橋) :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동수교(東水橋) : 동대천(東大川)에 있다.
낙민교(樂民橋) : 동대천에서 10리의 해변이며 마양도(馬養島)에 들어가려면 이곳을 지나야 한다.
토산 : 초서피(貂鼠皮).
갑산도호부 甲山都護府
동쪽으로는 건주위(建州衛) 동량북계(東良北界)까지 1백 5리요, 남쪽으로는 단천군계(端川郡界)까지 90리,
북청부계(北靑府界)까지 1백 32리이며, 서쪽으로는 삼수군계(三水郡界)까지 65리이며, 북쪽으로는 혜산진
(惠山鎭)까지 1백 1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3백 8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허천부(虛川府)이었는데 오랫동안 여진(女眞)에게 점거되어 누차 병화(兵火)를 겪고 인가가
없었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3년에 비로소 갑주 만호부(甲州萬戶府)를 두었다.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
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만들었고, 세종(世宗) 19년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겸절제사(兼節制使)라 일컬
었으며, 세조(世祖) 7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고 그대로 진을 두었다.
관원 부사(府使) ㆍ 교수(敎授) : 각 1명.
군명 허천(虛川) ㆍ 이산(夷山) ㆍ 갑주(甲州)
성씨 본부 김(金)ㆍ석(石)ㆍ신(辛)ㆍ최(崔)ㆍ이(李)ㆍ박(朴)ㆍ전(全) : 모두 내(來). 최(崔)ㆍ윤(尹)ㆍ이(李)ㆍ
김(金)ㆍ장(張)ㆍ강(姜) : 모두 투화해 온 성.
산천 천봉산(天鳳山) : 본부 동쪽 8리에 있으니 진산(鎭山)이다. 장평산(長平山) : 본부 동쪽 15리에 있다.
오음회령(吾音會嶺) : 본부 서쪽 50리에 있다.
마본령(馬本嶺) : 본부 남쪽 1백 32리에 있다. 북청부계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웅이령(熊耳嶺) : 본부 남쪽 64리에 있다. 응덕령(鷹德嶺) : 본부 남쪽 1백 6리에 있다.
아질간령(阿叱間嶺) : 본부 북쪽 55리에 있다.
오로촌령(吾老村嶺) : 본부 남쪽 90리 단천군계(端川郡界)에 있다. 혜산령(惠山嶺) : 본부 북쪽 90리에 있다.
녹반현(綠礬峴) : 본부 북쪽 91리에 있다. 유파현(楡波峴) : 본부 남쪽 56리에 있다.
향동(香洞) : 본부 서쪽 1백 11리에 있다. 진동동(鎭東洞) : 본부 동쪽 37리에 있다.
허천강(虛川江) : 본부 서쪽 1리에 있다.
북청부(北靑府)의 벌성포천(伐成浦川) ㆍ 산북파천(山北坡川) ㆍ 독산천(禿山川) ㆍ 황수천(黃水川)이 본부
남쪽 청주갈림[淸州岐]에서 합류하여 허천역(虛川驛) 곁을 지나서 이 강이 된다.
혜산강(惠山江) : 본부 북쪽 95리에 있다. 그 근원이 백두산(白頭山) 남쪽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혜산진
(惠山鎭)을 거쳐 허천강과 더불어 삼수군(三水郡)으로 들어가서 압록강(鴨綠江)이 된다.
운총천(雲寵川) : 본부 북쪽 74리에 있다. 근원이 북호(北胡) 지역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허천강과 합류
하여 혜산강으로 들어간다. 가마천(加?川) : 본부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진동동(鎭東洞)에서 나와 허천강으로
들어간다.
웅이천(熊耳川) : 본부 남쪽 80리에 있다. 그 근원이 향동에서 나와 본부 남쪽 청주갈림[淸州岐]을 지나 우음수
(于音水)와 합하여 서쪽 허천강으로 들어간다. 우라한령(于羅漢嶺) : 혜산 동북쪽 70여 리에 있다.
보다회산(甫多會山) : 본부 북쪽 1백 90리에 있다. 두리산(豆里山) : 본부 북쪽 2백 리 지점에 있다.
오시천(吾時川) ㆍ 봉천대(奉天臺) ㆍ 백덕산(白德山) : 큰 돌이 있는데 사면이 깎은 듯하고 높이가 30여 장(丈)
이나 된다.
차군만동(車軍萬洞) : 이 이하는 압록강 밖의 땅에 속한다.
노동(蘆洞)ㆍ약수동(藥水洞)ㆍ지항포수(池港浦水)ㆍ포석동(泡石洞)ㆍ건천수(乾天水)ㆍ신다신수(辛多信水)ㆍ
백탑동(白塔洞) : 벽돌탑[塼塔]이 있다.
백두산(白頭山) : 본부 북쪽 3백 30리 거리에 있는데 회령부(會寧府) 편에 자세하다.
회산채(回山寨)ㆍ마죽령(馬竹嶺)ㆍ갈산(葛山)ㆍ흑산(黑山).
토산 삼[麻]ㆍ구맥(瞿麥)ㆍ화피(樺皮)ㆍ백반(白礬) : 지항포(池港浦)에서 난다. 수포석(水泡石)ㆍ녹반(綠礬)ㆍ
여석(礪石) : 모두 운총(雲寵)에서 난다. 오미자(五味子)ㆍ석이[石?]ㆍ잣[海松子]ㆍ영양(羚羊)ㆍ돈피[貂]ㆍ
청서(靑鼠)ㆍ사향(麝香)ㆍ수달(水獺)ㆍ여항어(餘項魚)ㆍ벌꿀[蜂蜜]
성곽 읍성(邑城) : 석축으로 둘레가 1천 2백 81척에 높이가 9척이다.
신증 외성(外城) : 읍성 서쪽으로부터 연해 쌓아 허천강까지 이르렀는데 길이가 5백 35척이며 높이가 9척이다.
관방 혜산진(惠山鎭) : 본부 북쪽 95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2천 3백 20척에 높이가 9척이며, 그 안에 우물
한 개가 있고,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영(營)이 있다. ○ 첨절제사(僉節制使) 1명이 있다.
운총보(雲寵堡) : 본부 북쪽 80리에 있다. 석축으로 둘레가 1천 4백 67척이며, 높이는 9척이다.
인차외보(仁遮外堡) : 본부 북쪽 1백 38리에 있는데, 석축으로 둘레가 2천 8백 60척이며, 높이가 9척이다.
○ 이상은 병마만호(兵馬萬戶) 각 1명이 있다.
동인보(同仁堡) : 본부 북쪽 36리에 있으며, 석축으로 둘레가 1천 3백 51척이며, 높이가 8척이다.
신증 금상 7년에 권관(權管)을 설치하였다.
진동보(鎭東堡) : 본부 동쪽 12리 지점에 있다 석축으로 그 둘레가 1천 4백 95척에 높이가 8척이다.
신증 금상 7년에 권관을 두었다.
봉수 인차외서봉 봉수(因遮外西峯烽燧) : 본부 북쪽 1백 43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진지달(榛遲達)과 응하고,
서쪽으로 삼수(三水)의 가남봉(家南峯)과 응한다.
진지달 봉수(榛遲達烽燧) : 본부 북쪽 1백 26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허천강구(虛川江口)와 응하고, 서쪽으로는
인차외서봉과 응한다.
허천강구 봉수(虛川江口烽燧) : 동쪽으로는 혜산동봉(惠山東峯)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진지달과 응한다.
혜산동봉 봉수(惠山東峯烽燧) : 본부 북쪽 1백 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도산(刀山)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허천
강구와 응한다.
도산 봉수(刀山烽燧) : 본부 북쪽 78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시린포(時麟浦)와 응하고, 북쪽으로 혜산동봉과
응한다.
시린포 봉수(時麟浦烽燧) : 본부 북쪽 70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녹반현(綠礬峴)과 응하고, 북쪽으로 도산과
응한다.
녹반현 봉수(綠礬峴烽燧) : 남쪽으로는 광생천(廣生遷)과 응하고, 북쪽으로 시린포와 응한다.
광생천 봉수(廣生遷烽燧) : 본부 북쪽 90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후지(厚知)와 응하고 북쪽으로는 녹반현과
응한다.
후지 봉수(厚知烽燧) : 본부 북쪽 35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남산(南山)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광생천과 응한다.
남산봉수(南山烽燧) : 본부 남쪽 4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후지와 응하고, 남쪽으로는 유파현(楡坡峴)과 응한다.
유파현 봉수(楡坡峴烽燧) : 북쪽으로는 남산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응덕령(鷹德嶺)과 응한다.
응덕령 봉수(鷹德嶺烽燧) : 북쪽으로 유파현과 응하고, 남쪽으로는 북청(北靑)의 마본령(馬本嶺)과 응한다.
신증 남봉 봉수(南峯烽燧) : 본부 남쪽 15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유파현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서봉(西峯)과
응하는데 금상 7년에 남산 봉수를 폐해 버리고 이곳으로 옮겨왔다.
서봉 봉수(西峯烽燧) : 본부 서쪽 13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남봉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마산(馬山)과 응한다.
마산 봉수(馬山烽燧) : 본부 서쪽 25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서봉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후지와 응한다.
신증 누정 수항문루(受降門樓)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정원루(定遠樓) : 객관 서쪽에 있다.
이요정(二樂亭) : 객관 북쪽에 있다. 부사(府使) 조윤손(曹閏孫)이 세운 것이다.
영보대(永保臺) : 본부 서쪽 허천강변에 있다. 복융대(服戎臺) : 혜산진에 있다.
학교 향교 : 본부 북쪽 1리에 있다.
○ 우리 태조(太祖)가 즉위하고서 공주(孔州) 이북으로부터 갑산부에 이르기까지 비로소 향교의 교사를 세웠다.
신증 지금은 본부 남쪽 2리에 옮겼다.
역원 허천역(虛川驛) : 본부 남쪽 4리에 있다. 종포역(終浦驛) : 본부 남쪽 1백 36리에 있다.
웅이역(熊耳驛) : 웅이령(熊耳嶺) 아래에 있다. 호린포원(呼麟浦院) : 본부 남쪽 50리에 있다.
불우 자복사(資福寺) : 천봉산(天鳳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본부 서쪽에 있다. 신증 지금은 본부 동쪽으로 옮겨져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본부 남쪽 8리 지점에 있다. 여단 : 본부 북쪽에 있다. 신증 지금은 본부 동쪽으로 옮겨져 있다.
고적 장평산 고성(長坪山古城) : 본부 동쪽 13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2천 6백 척에, 높이가 9척인데, 지금
은 절반이나 무너져 있다.
가오마보(加吾?堡) : 벽성(?城)으로 주위가 1천 2백 92척이다. 세조(世祖) 7년에 없애버리고 진동(鎭東)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영파보(寧坡堡) : 세종(世宗) 26년에 폐하고, 세조(世祖) 7년에 운총(雲寵)으로 옮겨 설치
하니 그 옛 기지는 오랑캐 땅에 있다.
진지달보(榛遲達堡) : 벽성(?城)이다. 세조 초년에 이를 폐하고 혜산진(惠山鎭)으로 합속(合屬)시켰는데, 그
옛 기지가 오랑캐 땅에 있다. 안정보(安定堡) : 세조 4년에 폐했다.
유원보(柔遠堡) : 세조 6년에 폐했는데 그 옛 기지가 오랑캐 땅에 있다.
허천강구 행성(虛川江口行城) : 석축으로 길이가 2천 8백 척이며, 높이가 9척이다.
효자 본조 김전(金專) : 효행이 있었으므로 동네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해와 달은 첩첩한 봉오리 사이로 밝은 빛을 감추었는데 : 하연(河演)의 시에, "해와 달은 첩첩한 봉우리
사이로 밝은 빛을 감추었는데, 우레처럼 울리며 번개처럼 달리는 것 몇 굽이 여울이더냐, 조각만한 하늘 몇
자[尺]나 되는 땅 위에 외로운 성이 있으니, 맑은 술 누른 꽃으로 한번 얼굴을 폈노라." 하였다. 맑은 물 푸른
산 몇 만 겹[萬里]이더냐 : 정흠지(鄭欽之)의 시에, "맑은 물 푸른 산 몇 만 겹이냐, 구름과 연기 가리고 서리어
있는 듯 없는 듯 하다네, 백성들 다만 스스로 밭 갈고 우물 파는 것만 알아서, 그 순박(淳朴)함은 그대로 태고
(太古)적 풍속일세."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발해(渤海) 때에 율빈부(率賓府) 땅으로 하였으며, 금(金) 나라에서 도통소(都統所)
를 삼아 휼품로(恤品路)에 예속시켰다. 뒤에 병화(兵火)를 겪었으므로 사람이 살지 않았다.
방면 읍사(邑社) : 부 안이다. 별해(別害) : 서남쪽으로 60리에 있다. 진동(鎭東) :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허린(虛麟) : 서쪽으로 45리에 있다. 허천(虛川) :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혜산(惠山) : 북쪽으로 90리에 있다.
이리(二里) : 동남쪽으로 35리에 있다. 운총(雲寵) : 북쪽으로 80리에 있다.
동인(同仁) : 북쪽으로 35리에 있다. 호린(呼麟) : 남쪽으로 50리에 있다. 회리(會里) :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웅이(熊耳) : 남쪽으로 80리에 있다. 격포(●浦) : 남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별사(別社) : 북쪽으로 70리에 있다. 이가리(利加里) : 이원현(利原縣)의 남쪽으로 15리에 있으며,
중종(中宗) 3년에 떼어서 본부에 예속시켰다.
영아 좌영(左營) : 효종(孝宗) 때에 설치하였다.
○ 좌영장(左營將)은 본부사(本府使)가 겸한다.
○ 속읍(屬邑)은 갑산(甲山)이며, 속진(屬鎭)은 혜산(惠山) ㆍ 운총(雲寵) ㆍ 동인(同人) ㆍ 진동(鎭東)이다.
진보 쌍청보(雙靑堡) : 동남쪽으로 1백 20리이며, 권관(權管)이 있다. 단천(端川) 편에 상세하다.
황토기보(黃土岐堡) : 동남쪽으로 90리에 있으며 남쪽으로 단천(端川)과의 거리는 2백 30리이다.
성의 둘레는 1천 31척이며 권관이 있고 보루[堡]가 있어, 단천의 동쪽에 속하는데 철종(哲宗) 원년 경술에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이 아뢰어 혁파[罷]하였다.
신안보(新安堡) : 북쪽으로 1백 10리에 있다. 만혜산진(萬惠山鎭) 오른쪽의 다섯 보루는 혁파하였는데 지금도
옛터가 강 밖에 있으며, 본래 우리나라 땅이다.
봉수 석이(石耳) : 남쪽으로 80리에 있다. 우두령(牛頭嶺) : 남쪽으로 50리에 있다.
남봉(南峯) :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이간(伊間) : 북쪽으로 25리에 있다. 하간(河間) : 북쪽으로 50리에 있다.
소리덕(所里德) : 북쪽으로 70리에 있다. 하방금덕(何方金德) : 북쪽으로 80리에 있다.
창고 읍창(邑倉) : 부 안에 있다. 별해창(別害倉) : 서남쪽으로 70리에 있다.
이리창(二里倉) : 동남쪽으로 35리에 있다. 진창(鎭倉)이 넷 : 혜산(惠山)ㆍ운총(雲寵)ㆍ동인(同仁)ㆍ
진동(鎭東)에 있다. 역창(驛倉)이 넷 : 허린(虛?)ㆍ호린(呼?)ㆍ웅이(熊耳)ㆍ종포(終浦)에 있다.
역참 허린역 : 서쪽으로 45리에 있다. 혜산역 : 북쪽으로 95리에 있다.
교량 가마교(加?橋) : 북쪽으로 5리에 있다. 웅이교 : 남쪽으로 70리에 있다.
포항교(浦項橋) :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운총교 : 북쪽으로 80리에 있다. 진동교 : 동쪽으로 7리에 있다.
토산 구리[銅] ㆍ 현석(硯石).
누정 정원루(定遠樓).
단유 백두산단(白頭山壇) : 영종 43년에 명하여 망덕산(望德山)에 단을 설치하고 망제(望祭)하였다
삼수군 三水郡
동쪽으로는 갑산부계(甲山府界)까지 1백 25리이고, 남쪽으로는 함흥부계(咸興府界)까지 3백 44리이며,
서쪽으로는 평안도의 고 무창군계(古茂昌郡界)까지 1백 10리이며, 북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까지 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5백 7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갑산군(甲山郡) 삼수보(三水堡)였는데, 본조 세종(世宗) 23년에 만호(萬戶)를 두어 적(賊)의
길목을 경비하도록 하였고, 28년에는 삼수군(三水郡)을 설치하였으며, 노산군(魯山君) 2년에 군을 혁파하고
다시 만호를 두었다. 세조(世祖) 7년에 다시 군으로 환원, 8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10년에 이르러
다시 군으로 강등되었다 : 갑산부(甲山府)에서 서북으로 2일간[二日程]의 거리인데 사닥다리 길을 경유한다.
이방동(李方洞)ㆍ적생동(積生洞)ㆍ신원절동(申元節洞)ㆍ오감덕(五敢德)ㆍ허공교(虛空橋)ㆍ
검은지달(黔隱遲達) 등의 곳은 일로(一步)의 평지도 없다.
세 개의 큰 물이 있는데 하나는 백두산(白豆山) 아래의 마죽동(馬竹洞)에서 나와 혜산진(惠山鎭)과 인차외
(仁遮外)를 거쳐 최천이동(崔天已洞)의 물과 합류하여 군계(郡界)로 들어오고,
하나는 길성현(吉城縣) 북쪽 장백산(長白山) 서북보(西北堡)에서 나와 운총보(雲寵堡)를 거쳐 허천강(虛川江)
과 합하여 강기(江岐)에 이르러 군계로 들어오고,
또 하나는 함흥부(咸興府)의 황초령(黃草嶺)ㆍ부전령(赴戰嶺)과 평안도 강계부(江界府)의 오만령(五萬嶺) 등의
물이 어면강(魚面江)과 합하여 군계로 들어 온다.
세 개의 물이 합류하여 압록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삼수(三水)라고 이른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군(郡)이 어면강ㆍ압록강ㆍ삼수동수(三水洞水)의 세 가닥 사이에 있기 때문에 삼수라 했다."
한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명.
군명 삼강(三江).
성씨 갑산부(甲山府)와 같다.
산천 장령(長嶺) : 본군 동쪽 57리에 있다. 소라동령(所羅洞嶺) : 본군 동쪽 1백 25리에 있다.
오봉산(五峯山) : 본군 남쪽 8리에 있다. 이방령(李方嶺) : 본군 동쪽 59리에 있다.
사동령(蛇洞嶺) : 본군 남쪽 61리에 있다. 신로령(新路嶺) : 본군 남쪽 1백 67리에 있다.
성파령(城坡嶺) : 본군 남쪽 2백 73리에 있다. 어면강(魚面江) : 본군 서쪽 2리에 있다.
인차외전(仁遮外川) : 본군 동쪽 70리에 있다. 그 근원이 적생동(積生洞)에서 나와서 북녘으로 흘러 혜산강
(惠山江)으로 들어간다.
압록강(鴨綠江) : 본군 북쪽 1리에 있다. 바로 혜강의 하류인데 평안도로 들어가 압록강이 되기 때문에 이를
통칭 압록강이라 한다.
최천기동(崔天己洞) : 이 이하는 압록강 밖의 땅에 속한다.
상나란(上那?)ㆍ하나란(下那?)ㆍ삼수동(三水洞)ㆍ고미동(古未洞).
토산 삼[麻]ㆍ오미자(五味子)ㆍ석이[石?]ㆍ잣[海松子]ㆍ인삼(人蔘)ㆍ화피(樺皮)ㆍ파랭이꽃[瞿麥]ㆍ
벌꿀[蜂蜜]ㆍ사향(麝香)ㆍ영양(羚羊)ㆍ수포석(水泡石)ㆍ토표(土豹)ㆍ수달(水獺)ㆍ돈피[貂]ㆍ청서(靑鼠)ㆍ
여항어(餘項魚).
성곽 읍성(邑城) : 석축으로 주위가 1천 8백 12척이며, 높이가 8척인데 그 안에 세 개의 우물이 있다.
압록강 행성(鴨綠江行城) : 본군 북쪽 1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1천 5백 17척에, 높이가 5척이다.
관방 나난보(羅暖堡) : 본군 동쪽 42리에 있는데 주위가 1천 5백 33척이다.
어면보(魚面堡) : 어면강변에 있는데 신축한 돌성이다. 이상의 보루에는 병마만호(兵馬萬戶) 각 1명이 있다.
가을파지보(加乙波知堡) : 본군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신증 홍치(弘治) 경신년에 비로소 석성을 쌓으니,
주위가 6백 10척에, 높이가 8척이며, 권관(權管) 1명을 두었다.
소농보(小農堡) : 본군 동쪽 22리 지점에 있는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신증 홍치(弘治) 경신년에 비로소 석성
을 쌓았는데, 주위는 6백 4척이며, 높이가 8척이고, 권관 1명을 두었다.
신방구비 농보(神方仇非農堡) : 본군 남쪽에 있다. 신증 홍치 임술년에 비로소 돌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1천
2백 50척에 높이가 8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금상 15년에 병마만호 1명을 두었다.
별해보(別害堡) : 본군 남쪽 4백 30리에 있다. 신증 홍치 신유년에 비로소 돌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1천 3백 55척에,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다. 금상 15년에 병마만호 1명을 두었다.
신증 인차외보(仁遮外堡) : 본군 동쪽 85리에 있다. 석축한 성으로 주위가 1천 8백 5척에, 높이가 8척이며,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다. 전에 갑산(甲山)에 속해 있던 것을 연산(燕山) 8년에 본군으로 붙이고,
병마만호 1명을 두었다.
감파농보(甘坡農堡) : 본군 남쪽 1백 14리에 있다. 정덕(正德) 무인년에 비로소 돌성을 쌓았는데,
주위는 3백 28척이며, 높이가 7척이다.
봉수
가을파지서봉 봉수(加乙波地西峯烽燧) : 본군 서쪽 21리에 있다. 동쪽으로 송봉(松峯)과 응한다.
송봉 봉수(松峯烽燧) : 본군 서쪽 5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남봉(南峯)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가을파지서봉과
응한다.
남봉 봉수(南峯烽燧) : 본군 남쪽 1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독탕(禿湯)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송봉과 응하며,
남쪽으로는 금룡기덕(金龍己德)과 응한다.
독탕 봉수(禿湯烽燧) : 본군 동쪽 11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나난서봉(羅暖西峯)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남봉과
응한다.
나난서봉 봉수(羅暖西峯烽燧) : 본군 동쪽 34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가남봉(家南峯)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독탕과 응한다.
가남봉 봉수(家南峯烽燧) : 본군 동쪽 57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갑산부(甲山府)의 인차외서봉(仁遮外西峯)과
응하고, 서쪽으로는 나난서봉과 응한다.
교전 봉수(?田烽燧) : 본군 남쪽 1백 20리에 있다. 북쪽으로 가응계(加應戒)와 응한다.
가응계 봉수(加應戒烽燧) : 본군 남쪽 1백 55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교전(?田)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신파(新
坡)와 응한다.
신파 봉수(新坡烽燧) : 본군 남쪽 33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가응계와 응하고, 북쪽으로는 금을덕산(金乙德山)과
응한다.
금을덕산 봉수(金乙德山烽燧) : 본군 남쪽 32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신파와 응하고, 북쪽으로는 금룡기덕(金龍
己德)과 응한다.
금용기덕 봉수(金龍己德烽燧) : 본군 남쪽 15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금을덕산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남봉과
응한다.
신증 인차외서봉 봉수(因遮外西峯烽燧) : 본군 동쪽 90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진지달(榛遲達)과 응하고, 서쪽
으로는 가남봉과 응한다.
진지달 봉수(榛遲達烽燧) : 본군 동쪽 1백 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혜산강기이(惠山江岐伊)와 응하고 서쪽으로
는 인차외서봉과 응한다. ○ 이상의 두 봉수는 전에 갑산부에 속해 있었는데, 현재 이곳으로 이속되어 왔다.
신증 누정 진융루(鎭戎樓) : 객관(客官) 서쪽에 있다.
○권민수(權敏手)의 시에 "누정은 오직 제도에 의해 되었고, 성첩(城堞)은 본시 옛날에 쌓았던 것. 물이 가까우
니 기둥의 그림자 잠겼고, 산이 깊은 탓인가 새도 울지 않네. 사냥꾼 기사(騎士)들은 숲을 의지해 모아드는데,
변방의 햇볕 밝게 사람들을 비쳐준다. 현판한 그 이름이 어찌 뜻이 없으랴, 오랑캐를 평정하는데 행여 병기를
쓰지 말라." 하였다.
학교 향교 : 객관 서쪽에 있다. 신증 지금은 객관 동쪽으로 옮겨져 있다.
역원 적생역(積生驛) : 본군 동쪽 1백 5리에 있다. 초평원(草坪院) : 본군 남쪽 40리에 있다.
신증 삼강역(三江驛) : 본읍에 있다. 소을외원(所乙外院) : 본군 남쪽 2백 9리에 있다.
안구비원(安仇非院) : 본군 남쪽 2백 51리에 있다.
교량 허공교(虛空橋) : 본군 동쪽에 있다.
불우 정수암(淨水菴) : 오봉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본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본군 북쪽 1리에 있다. 여단 : 본군 북쪽에 있다.
고적 전원경보(田元京堡) ㆍ소농보(小農堡) : 본군 동쪽 25리에 있다. 벽성(?城)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가을파지보(加乙坡知堡) : 본군 서쪽 14리에 있다. 벽성으로 주위가 7백 26척에 높이가 7척이다.
제영 오랑캐의 산에 한(漢) 나라 해가 밝구나 : 이계손(李繼孫)의 시에, "변새(邊塞)에 오랑캐[烽火] 연기 적적
하고, 오랑캐의 산에도 한(漢) 나라 해가 밝구나." 하였다.
구름은 진(秦) 나라 관문(關門)을 가리어 어둡고 : 김윤종(金潤宗)의 시에, "삼수(三水)는 요충지대, 장군(將軍)
이 따로 병영(兵營)을 세웠던 것. 풀이 무성하니 호마(胡馬) 건장하고, 바람이 세차니 활이 소리낸다. 구름은
진(秦) 나라 관문을 가리어 어둡고, 꽃은 촉(蜀) 나라 길에 당하여 밝구나. 바야흐로 봄을 맞아 순행하는 곳곳에,
백성들의 습속(習俗)은 농(農)ㆍ병(兵)을 일삼네." 하였다.
신증 오랑캐를 베어 다한 뒤에 백두산(白頭山)에 의지해 서련다. : 이계손(李繼孫)의 시에, "날 때에 뽕나무 활
쏘아 준 것 원유(遠遊)를 뜻함이니, 옥문관(玉門關) 천리 길 이별 시름 상관없다. 원컨대 이 3척(尺)의 호신검
(護身劍)을 가지고, 오랑캐를 베어 다한 뒤에 백두산에 의지해 서련다."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발해의 땅이며 현덕부(顯德府)의 경계이다.
뒤에 여진(女眞)이 점거하였고, 금 나라 때에 갈뢰리(曷懶里)에 예속되었다가 원 나라가 소유하였다.
숙종(肅宗) 22년에 만호(萬戶)로 강등되었고 : 역모죄인 이동량(李東樑)의 출생지이다.
36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옮겼다 : 본군이 벽지여서 북쪽과 끊어져 육진(六鎭)과 다르지 않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文獻備考》
방면 읍사(邑社) : 읍 안에 있다. 관동(館洞)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백 리이다.
호야동(好野洞) :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재전(財田) :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나난(羅暖) : 서북쪽으로 60리에 있다. 인차외(仁遮外) : 동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소농(小農) : 서북쪽으로 60리에 있다. 갈파지(乫坡知) : 서북쪽으로 90리에 있다.
구갈파지(舊乫坡知) : 서북쪽으로 1백 리에 있다. 자작구비(自作仇非) : 서쪽으로 9리에 있다.
어면(魚面) : 서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영아 우영(右營) : 숙종(肅宗) 19년에 설치했다.
○ 우영장(右營將)은 본부사(本府使)가 겸한다.
○ 속읍(屬邑)은 삼수이고, 속진(屬鎭)은 갈파지ㆍ인차외ㆍ나난ㆍ소농ㆍ구갈파지이다.
진보 갈파지진 : 서북쪽으로 1백 리에 있으며, 중종(中宗) 6년에 구갈파지(舊乫坡知)로부터 이곳으로 옮겼다.
성의 둘레는 3천 5백 척이다.
○ 병마 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1명이다.
봉수 수영동(水永洞) :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서봉(西峯) : 인차외진(仁遮外鎭)의 서쪽 10리에 있다.
가남봉(家南峯) : 나난진(羅暖鎭)의 동쪽 20리에 있다. 서봉(西峯) : 나난진의 서쪽 5리에 있다.
옹동(甕洞) : 갈파지진의 서쪽 5리에 있다. 송봉(松峯) : 구갈파지보(堡)의 남쪽 10리에 있다.
신봉(新峯) : 구갈파지진의 서쪽 10리에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군향창(軍餉倉) : 읍 안에 있다. 진보창(鎭堡倉) 각 다섯 : 진보(鎭堡)에 있다.
교량 농평교(農坪橋) :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토산 쇠[鐵]ㆍ송이[松?].
누정 관덕루(觀德樓) : 부 안에 있다. 무검정(撫劍亭) :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세검정(洗劍亭) : 인차외진에 있다.
동강(東江)이 누정 밑 북쪽을 둘러 흐르며 호산만보(湖山萬堡)를 바라본다.
읍취정(?翠亭) : 나난진의 동쪽에 있으며 산천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들이 10리에 열려 있다.
50권 경성도호부 鏡城都護府
동쪽으로 바다까지 6리, 남쪽으로 명천현(明川縣) 경계까지 1백 42리, 서쪽으로 명천현 경계까지 1백 45리,
북쪽으로 부령부(富寧府) 경계까지 48리, 서울과의 거리는 1천 7백 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명칭은 우롱이(于籠耳)다 : 《요동지(遼東誌)》에는 목랑고(木郞古)라 하였다. 오랫동안
여진(女眞)에게 점령되었다가 고려 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이 여진을 쫒아내고 이곳에 성을 쌓았다.
명칭은 자세하지 못하다. 뒤에 원 나라에 편입되었는데 공민왕(恭愍王)이 수복하였다.
본조 태조(太祖) 7년에 비로소 현재의 명칭을 사용하고 만호(萬戶)를 두었다. 공정왕(恭靖王) 2년에 군(郡)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로 군사(軍事)를 겸임하였다. 태종(太宗) 4년에 병마사를 도병마사(都兵馬使)로
고치고 그대로 판군사(判郡事)가 되게 하였다. 세종 18년에 군을 올려 도호부(都護府)로 삼고,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로 판부사(判府使)를 겸임하게 하고, 비로소 판관(判官)과 지방관[土官]을 두어
절제사의 본영(本營)을 삼았다. 세조(世祖) 13년에 북도절도사(北道節度使)로 명칭을 바꾸고,
그대로 부사(府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진관 현(縣) 2 : 길성(吉城)ㆍ명천(明川). 신증 길성(吉城)은 주(州)로 승격되었다. 보(堡) 5 : 서북(西北)ㆍ
사마동(斜?洞)ㆍ사하북(斜下北)ㆍ주을온(朱乙溫)ㆍ어유간(魚游間) 신증 주(州) 1 : 길주(吉州).
관원 부사(府使) : 북도절도사가 겸임한다. 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토관(土官) 도무사(都務司) : 도무(都務)ㆍ교부(校簿) : 각 1명이다. 정6품. 다른 고을도 같다.
전사(典事) : 각 1명이다. 전례서(典禮署) : 장부(掌簿)ㆍ전사(典事)ㆍ급사(給事)ㆍ섭사(攝事) : 각 1명이다.
융기서(戎器署) : 감부(堪簿)ㆍ관사(管事)ㆍ섭사(攝事) : 각 1명이다.
사창서(司倉署) 영작서(營作署) : 모두 융기서(戎器署)와 같다.
수지국(收支局) : 장사(掌事)ㆍ섭사(攝事) : 각 1명이다. 전주국(典酒局) : 급사(給事)ㆍ섭사(攝事) : 각 1명이다.
사옥국(司獄局) : 섭사(攝事) : 2명이다. 진봉위(鎭封衛) : 여직(勵直)ㆍ부여직(副勵直) : 각 1명이다.
여과(勵果)ㆍ부여과(副勵果)ㆍ여정(勵正)ㆍ부여정(副勵正) : 각 2명이다.
여맹(勵猛)ㆍ부여맹(副勵猛) : 각 3명이다. 여용(勵勇) : 4명이다. 부여용(副勵勇) : 5명이다.
군명 우롱이(于籠耳)ㆍ목랑고(木郞古)ㆍ치성(雉城).
산천 조백산(祖白山) : 부(府)의 서쪽 5리에 있고 진산(鎭山)이다. 설봉산(雪峯山) : 부의 북쪽 32리에 있다.
길성현(吉城縣)에도 나타나 있다. 백산(白山) : 부의 서쪽 1백 10리에 있다. 산세가 매우 험하여 5월이 되야
눈이 녹으며, 7월이면 다시 눈이 쌓인다. 산꼭대기에는 나무의 키가 낮고 작다. 지방 사람들은 이 산도 장백산
(長白山)이라고 부른다.
○ 이색(李穡)이 장만호(張萬戶)를 전송하는 시에, "장백산은 높고 험준하며 철령관(鐵嶺關)은 우뚝하여 산맥
은 몇 천리나 뻗어 내려 천연적으로 험한 곳이므로 넘어다닐 수 없네.
해단(奚丹)의 여러 종족들이 산짐승처럼 살면서, 활과 화살을 휘두르며 달리고 싸우는 것을 생활로 삼고 있
으니, 이 지역을 다니며 살펴보니 긴 탄식이 절로 나네. 가을풀이 쓸쓸한 가운데, 윤관(尹瓘)이 세웠던 비석이
묻혀 있도다. 집현학사(集賢學士)이며 상장군(上將軍)이 임금의 명령을 받고 지방의 군무(軍務)를 맡았도다.
우리나라에서는 백성을 사랑하니 어찌 큰 것을 좋아하리오마는, 짐승처럼 미쳐 날뛰는 것을 차마 그대로 두
고 볼 수가 없도다. 전쟁이란 예로부터 그 출발을 매우 신중히 여기는 바이며, 먼저 민간의 고통을 돌보아 극
히 세밀한 곳까지 다 살펴야 하네.
서리 내리는 가을인 듯 하기도 하고 따뜻한 봄날이 되기도 하는 병영(兵營)에서 국경지대에는 원한을 품고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즉시 동해의 물결을 쏟아 가지고, 영원토록 마르지 않는 술을 빚으리.
모든 사람이 흠씬 취하고 한마음이 되게 하여 대대로 우리 임금을 해와 달처럼 받들게 하라.
그리고 스스로 강한편(江漢篇)의 시를 지어서 말을 달려와, 황금 대궐 안에 바치리라." 하였다.
제왕산(諸王山) :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동쪽은 바다에 닿았다. 중봉산(中峯山) : 부의 남쪽 1백 8리에 있다.
운주산(雲住山) : 부의 남쪽 60리에 있다. 입암(立巖) : 부의 남쪽인 간합리(幹合里)에 있다. 높이가 2백여 길
[丈]이다. 이 지방 사투리에 돌을 간합(幹合)이라고 하므로, 그대로 땅이름으로 붙였다.
광암(廣巖) : 부의 남쪽 1백 17리에 있다. 입암(笠巖) : 부의 남쪽 1백 50리에 있다.
○ 이상의 바위 셋이 솥발처럼 솟아 있는데 매우 기괴하다.
오봉산(五峯山) : 부의 남쪽 65리에 있다. 백록산(白鹿山) : 부의 남쪽 1백 40리에 있다.
강릉산(江陵山) : 부의 남쪽 1백 10리에 있으며, 남쪽은 바다에 닿았다.
허수라현(虛修羅峴) : 부의 서쪽인 부령(富寧)의 북쪽 경계에 있다. 적(賊)의 통로를 지키며 탐색하는 곳이다.
바다 :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덕산천(德山川) : 부의 남쪽 2리에 있다.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세칭 오촌천(吾村川)이라고도 한다.
어유간천(魚游澗川) : 부의 북쪽 17리에 있다.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주을온천(朱乙溫川) : 부의 남쪽 32리에 있다.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이상 세 곳의 물은 모두 근원이 백두산에서 나온다.
용성천(龍城川) :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그 근원은 회령부(會寧府)의 여이현(餘伊峴)에서 나와 남쪽으로 1백
20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국경지대를 순찰하다가 지은 시에, "용성(龍城)에 가을 날씨는 쌀쌀한데,
옛 병참에 흰 연기가 서리었다. 만리에 전쟁이 종식되었으니, 오랑캐도 태평시대를 하례하도다." 하였다고 한다.
명간천(明澗川) : 부의 남쪽 1백 15리에 있다. 근원이 백두산에서 나와 명천현(明川縣)의 사마동보(斜?洞堡)를
경유하여 동으로 흘러 광암(廣巖)을 지나서 운가위천(雲加委川)과 합쳐진다.
장자택(長者澤) : 부의 남쪽 90리에 있다. 한 골짜기에 가득한데 길이가 15리요, 넓이가 3리요, 깊이가 6백여
척이다.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가물 때 이 못에 비오기를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 운가위천(雲加委川) : 부의 남쪽 9백 9리에 있다. 근원이 백두산
동남쪽에서 나와 중봉산(中峯山)을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추봉 온천(錐峯溫泉) : 부의 서쪽 34리에 있다. 운가위 온천(雲加委溫泉) : 부의 서쪽 1백 10리에 있다.
장포지(長浦池) : 부의 북쪽 28리에 있다.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신증 허수라천(虛修羅川) : 부의 북쪽 1백 35리에 있다. 근원이 장백산에서 나와 검천(檢天) 박가천(朴加遷)
에서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무계택(無界澤) : 부의 남쪽 1백 10리에 있다. 길이가 9리, 넓이가 6리인데, 온 골짜기에 가득하다.
용연(龍淵) :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비오기를 빌면 효험이 있다.
원수대(元帥臺) : 부의 남쪽 8리에 있다. 남쪽은 바다에 닿았다.
토산 귀보리[瞿麥]ㆍ삼[麻]ㆍ토표(土豹)ㆍ낭미(狼尾)ㆍ담비[貂]ㆍ청서(靑鼠)ㆍ영양(羚羊)ㆍ해달(海獺)ㆍ
수달(水獺)ㆍ고등어[古刀魚]ㆍ인삼ㆍ벌꿀ㆍ오미자ㆍ아양록(阿羊鹿)ㆍ송어(松魚)ㆍ황어(黃魚)ㆍ넙치[洪魚]ㆍ
삼치[麻魚]ㆍ연어ㆍ방어(?魚)ㆍ숭어[秀魚]ㆍ대구[大口魚]ㆍ은어(銀魚)ㆍ문어(文魚)ㆍ도미[?魚]ㆍ게[蟹]ㆍ
조개[蛤]ㆍ홍합(紅蛤)ㆍ곤포(昆布)ㆍ다시마[塔士麻]ㆍ사철(沙鐵)ㆍ미역[藿]ㆍ소금[鹽]ㆍ해삼(海蔘).
신증 송이버섯[松?]ㆍ무태어(無泰魚)ㆍ대살[竹箭] : 다탕포(多湯浦)에서 산출된다.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천 3백 81척, 높이 9척이다. 안에 우물 9개소가 있다.
남산성(南山城) : 부의 서남쪽 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3천 2백 89척, 높이 9척이다. 안에 우물 둘과
군창(軍倉)이 있다.
관방 어유간보(魚游澗堡) :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1천 89척, 높이 8척이다.
주을온보(朱乙溫堡) : 부의 남쪽 32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1천 68척, 높이 78척이다.
삼삼파보(森森坡堡) : 부의 남쪽 1백 2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1천 4백 23척, 높이 5척이다.
○ 이상에는 병마(兵馬)와 만호(萬戶)가 각 1명이다.
오촌보(吾村堡)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1천 2백 91척, 높이 6척이다.
보로지책(甫老知柵) : 부의 남쪽 43리에 있다. 보화덕책(甫化德柵) : 부의 남쪽 54리에 있다.
○ 오촌(吾村) 이하에는 모두 군대가 주둔한다.
신증 보화보(甫化堡) : 부의 남쪽 54리에 있다.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 1천 23척, 높이 6척이다.
근동보(芹洞堡) : 부의 북쪽 67리에 있다. 흙으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 3백 38척, 높이 5척이다.
봉수
북봉 봉수(北峯烽燧) : 부의 북쪽 8리에 있다. 남쪽은 장평과 호응하며, 북쪽은 강덕과 서쪽은 어유간과
호응한다.
강덕 봉수(姜德烽燧) : 부의 북쪽 37리에 있다. 남쪽은 북봉(北峯)과 호응하며, 북쪽은 부령부(富寧府)의
최달동(崔達洞)과 호응한다.
장평 봉수(長坪烽燧)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남쪽은 요참에 응하며, 북쪽은 북봉(北峯)에 호응한다.
요참 봉수(要站烽燧) : 부의 남쪽 55리에 있다. 남쪽은 주촌 남봉에 호응하며, 북쪽은 장평과 호응한다.
주촌 남봉 봉수(朱村南峯烽燧) : 부의 남쪽 84리에 있다. 남쪽은 팔을하에 호응하고, 북쪽은 요참에 호응한다.
팔을하 봉수(八乙下烽燧) : 부의 남쪽 1백 65리에 있다. 북쪽은 남봉(南峯)에 호응하며, 서쪽은 이마퇴에
호응한다.
이마퇴 봉수(尼?退烽燧) : 부의 남쪽 1백 92리에 있다.
서쪽은 명천(明川)의 건가토(件加土)에 호응하며, 동쪽은 팔을하와 호응한다.
어유간보 봉수(魚游澗堡烽燧) :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동쪽은 북봉(北峯)에 호응하며, 남쪽은 아양덕(阿陽德)
에 호응한다.
이양덕 봉수(阿陽德烽燧)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남쪽은 차덕생동의 중봉(中峯)과 호응하며, 북쪽은 어유간
의 서봉(西峯)과 호응한다.
차덕생동 중봉 봉수(車德生洞中峯烽燧) : 부의 북쪽 54리에 있다. 남쪽은 김득로가하중봉(金得老家下中峯)과
호응하며, 북쪽은 아양덕(阿陽德)과 호응한다.
김득로가하 중봉 봉수(金得老家下中峯烽燧) : 부의 서쪽 68리에 있다. 서쪽은 오촌보(吾村堡)의 서봉(西峯)과
호응하며, 북쪽은 차덕생동의 중봉(中峯)과 호응한다.
오촌보 서봉 봉수(吾村堡西峯烽燧) : 부의 서쪽 71리에 있다. 동쪽은 김득로가하(金得老家下)의 중봉(中峯)과
호응하며, 남쪽은 주을온보의 서봉(西峯)과 산성(山城)에 호응한다.
산성 봉수(山城烽燧) :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서쪽은 주을온보의 서봉(西峯)과 호응하며, 북쪽은 오촌보의
서봉(西峯)과 호응한다.
주을온보 서봉 봉수(朱乙溫堡西峯烽燧) : 부의 서쪽 33리에 있다. 북쪽은 오촌보 서봉(吾村堡西峯)과 호응하고
동쪽은 산성(山城)과 호응하며 남쪽은 주을온보의 남봉(南峯)과 호응한다.
주을온보 남봉 봉수(朱乙溫堡南峯烽燧) : 부의 남쪽 65리에 있다. 남쪽은 보로지보(甫老知堡)의 신봉수(新烽燧)
와 호응하며 북쪽은 주을온보의 서봉(西峯)과 호응한다.
보로지보 신봉수(甫老知堡新烽燧) : 부의 서쪽 67리에 있다. 남쪽은 같은 보(堡)와 독봉수와 호응하며, 북쪽은
주을온보의 남쪽봉과 호응한다.
독봉수(禿烽燧) : 부의 서쪽 86리에 있다. 남쪽은 보화덕보(甫化德堡) 및 석봉수와 호응하며, 북쪽은 보로지
(甫老知)의 신봉수(新烽燧)와 호응한다.
석봉수(石烽燧) : 부의 서쪽 89리에 있다. 남쪽은 보화덕보의 중산(中山)과 호응하며, 북쪽은 독봉수와 호응
한다.
보화덕보 중산봉수(甫化德堡中山烽燧) : 부의 서쪽 91리에 있는데, 남쪽은 삼삼파의 적목(赤木)과 호응하며,
북쪽은 석봉수(石烽燧), 독봉수(禿烽燧)와 호응한다.
삼삼파 적목봉수(森森坡赤木烽燧) : 부의 서쪽 1백 25리에 있는데, 남쪽은 같은 보(堡)의 판봉수(板烽燧)와
호응하며, 북쪽은 보덕화보(甫德化堡)의 중산(中山)과 호응한다.
삼삼파 판봉수(森森坡板烽燧) : 부의 서쪽 1백 27리에 있는데, 남쪽은 이파의 석봉수(石烽燧)에 호응하며,
북쪽은 적목(赤木)에 호응한다.
이파 석봉수(梨坡石烽燧) : 부의 서쪽 1백 36리에 있는데, 남쪽은 명천(明川)의 사마동(斜?洞)과 원산(圓山)에
호응하며, 북쪽은 삼삼파(森森坡)의 판봉수(板烽燧)와 호응한다.
신증 어유간보(魚游澗堡)의 이순덕 봉수(李順德烽燧) : 부의 북쪽 55리에 있는데, 남쪽은 아양덕(阿陽德)과
호응하며, 북쪽은 부령(富寧)의 임수덕(林秀德)과 호응한다.
오촌보 남봉수(吾村堡南烽燧) : 부의 서쪽 40리에 있는데, 남쪽은 주을온보의 서봉(西峯)과 호응하며, 북쪽은
차덕생동(車德生洞)의 중봉(中峯)과 호응한다.
주을온보 서봉봉수(朱乙溫堡西峯烽燧) : 부의 서쪽 47리에 있는데, 북쪽은 오촌보(吾村堡)의 남봉수(南烽燧)와
호응하며, 남쪽은 판봉수(板烽燧)와 호응한다. 정덕(正德) 계유년에 옛 서봉(西峯)을 폐지하고 이곳으로 옮겼다.
보로지보(甫老知堡)의 화파 봉수(樺坡烽燧) : 부의 서쪽 1백 5리에 있는데, 북쪽은 판봉수(板烽燧)에 호응하며,
남쪽은 석용봉에 호응한다.
석용봉 봉수(石茸峯烽燧) : 부의 서쪽 1백 15리에 있는데, 남쪽은 독송봉에 호응하며, 북쪽은 화판(樺板)과 호응
한다.
독송봉 봉수(獨松峯烽燧) : 부의 서쪽 1백 10리에 있는데, 남쪽은 황세동과 호응하며, 북쪽은 석용봉과 호응한다.
황세동 봉수(黃細洞烽燧) : 부의 서쪽 90리에 있는데, 남쪽은 보화보의 중령(中嶺) 봉우리와 호응하며, 북쪽은
독송봉과 호응한다.
보화보 중령상봉수(寶化堡中嶺上烽燧) : 부의 서쪽 1백 70리에 있다. 남쪽은 삼삼파보의 대가퇴(大加退)와 호응
하며, 북쪽은 황세동과 호응한다.
삼삼파보(森森坡堡)의 대가퇴 봉수(大加退烽燧) : 부의 서쪽 1백 50리에 있는데, 남쪽은 소가퇴(小加退)와 호응
하며, 북쪽은 중령(中嶺) 봉오리와 호응한다.
소가퇴 봉수(小加退烽燧) : 부의 서쪽 1백 34리에 있는데, 남쪽은 강가덕(姜加德)과 호응하며, 북쪽은 대가퇴와
호응한다. 정덕(正德) 신사년에 판봉수(板烽燧)를 폐지하고 이곳으로 옮겼다.
강가덕 봉수(姜加德烽燧) : 부의 서쪽 1백 60리에 있는데 남쪽은 명천(明川)의 사마동(斜?洞)과 이흥도대(李興
道代)에 호응하며, 북쪽은 소가퇴와 호응한다. 정덕(正德) 신사년에 이파석(梨坡石)을 폐지하고 이곳으로 옮겼
다.
누정 위원루(威遠樓) : 객관 동쪽에 있다. 신증 남루(南樓) : 바로 남문 누(樓)이다.
학교 항교(鄕校) : 부의 서쪽 3리에 있다. 역원 수성역(輸城驛) : 바로 용성(龍城) 땅으로 부의 북쪽 50리에 있다.
찰방(察訪)의 본도(本道)에 소속된 역이 18개이다.
오촌(吾村)ㆍ주촌(朱村)ㆍ요참(要站)ㆍ석보(石堡)ㆍ회유(懷綏)ㆍ영안(寧安)ㆍ풍산(?山)ㆍ역산(?山)ㆍ종경(鍾慶)ㆍ
무안(撫安)ㆍ녹야(鹿野)ㆍ무령(撫寧)ㆍ덕명(德明)ㆍ마유(馬乳)ㆍ연기(燕基)ㆍ아산(阿山)ㆍ강양(江陽)ㆍ웅무
(雄撫).
○ 찰방(察訪) 1명이다. 오촌역(吾村驛) :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주촌역(朱村驛) : 부의 남쪽 79리에 있는데, 군창(軍倉)이 있다.
요참역(要站驛) :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신증 명칭을 영강(永康)으로 고쳤고 부의 남쪽 46리에 있다.
청하원(淸河院)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의생원(義生院) : 부의 남쪽 60리에 있다.
신증 운가위원(雲加委院) : 부의 남쪽 1백 9리에 있다.
불우 용장사(龍藏寺)ㆍ만경암(萬景庵) : 모두 운주산(雲住山)에 있다.
심적사(深跡寺)ㆍ정수암(淨水庵) : 모두 오봉산(五峯山)에 있다. 쌍계사(雙溪寺) : 백록산(白鹿山)에 있다.
중산사(中山寺) : 중봉산(中峯山)에 있다. 용암사(龍庵寺) : 강릉산(江陵山)에 있다.
용범사(龍梵寺) : 설봉산(雪峯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산성(山城)에 있다.
여단(勵壇)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진파보(榛坡堡) : 부의 서쪽 1백 10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다.
보이덕보(甫伊德堡) : 부의 서쪽 1백 20리에 있으며 흙으로 쌓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신증 증산(甑山) : 부의 남쪽 87리에 있으며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2백 75척이다. 안에 못이 두 개 있고
창고의 터가 있다.
명환 본조 최윤덕(崔潤德)ㆍ하경복(河敬復)ㆍ박종우(朴從遇) : 모두 절도사였다.
이행검(李行儉) : 도진무(都鎭撫)로 있었다. 조정에서 도절제사(都節制使)인 이징옥(李澄玉)이 이반의 생각을
가졌다는 말을 듣고 박호문(朴好問)을 보내어 그와 교대시켰더니, 이징옥은 박호문을 죽이고 대금황제(大金
皇帝)라고 자칭하고 강을 건너가서 금(金)의 옛 도읍을 점령하는 것을 이행검이 계책을 써서 그를 종성(鍾城)
에 머무르게 하여 죽였으므로, 특별히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승진시켰다.
제영 새로 사진을 열고 여러 군대를 설치하다 :
이숙치(李叔?)의 시에, "긴 강물을 가운데 두고 저들과 우리를 나누었는데, 새로 사진(四鎭)을 열어 여러 군대를
설치하였다. 장군이 경제의 역량을 겸하여 백성들을 잘 안무하니, 우리에게 돌아오는 사람들 국경에 일어나는
구름처럼 많네." 하였다.
매[鷹]처럼 날샌 장수는 정말 상대가 없어라 : 유계문(柳季聞)의 시에, "쇠 독[鐵甕]처럼 튼튼한 성이 바다를
누르고 있으니, 오랑캐를 몰아내는 공적을 거둘 수 있네. 매처럼 날샌 장수는 정말 상대할 이 없으니, 쥐도둑
같은 오랑캐야 걱정할 것이 무엇이랴. 물 건너고 산 넘으면서 수고롭게 다니노라니, 어버이를 생각하며 임금을
그리워 하는 마음에 꿈조차 아득하여라. 변경 지역에도 임금의 혜택을 입게 되니, 일개 서생(書生)이 마음대로
놀 수 있도다." 하였다.
몸을 비스듬히 하여 남쪽으로 태양 가에 있는 구름을 바라보다 : 성임(成任)의 시에, "여행하는 도중에 춘분(春
分)의 절기를 만났는데 호위하는 전군(前軍)이며 후군이로다. 수레 위에서 북을 울리며 노래하는 중에 고향
생각이 간절하니, 몸을 비스듬히 하여 남쪽으로 태양 가에 있는 구름만 바라보노라." 하였다.
[비고]
연혁 고구려(高句麗) 이후 발해(渤海)가 용원부(龍原府)를 설치하였다. 영종(英宗) 32년에 별도로 부사(府使)를
설치하고 34년에 다시 겸하였다. : 경성(鏡城)ㆍ진관(鎭管)ㆍ명천(明川)ㆍ줄온(●溫)ㆍ삼삼파(森森坡)ㆍ
재덕(在德).
성지 남산고성(南山古城) : 서남쪽으로 5리인데, 둘레는 3천 2백 89척이고 우물이 2개 있다.
영아 북병영(北兵營) : 본조 정종(定宗) 때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를 두었는데,
뒤에 병마도정제사(兵馬都節制使)로 고쳤으며, 세조(世祖) 13년에는 병마절도사로 고쳤다.
관원 함경북병마절도사(咸鏡北兵馬節度使) :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ㆍ경성도호부사(鏡城都護府使)를 겸하
였다. 중군(中軍) : 바로 병마우후(兵馬虞侯)이다.
병마평사(兵馬評事) : 세조(世祖) 원년(元年)에 설치하고, 인조(仁祖) 15년에 혁파하였으며 현종(顯宗) 4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숙종 8년에는 문신(文臣)의 인재를 고르는 시종(侍從)으로써 육진교양관(六鎭校養官)을
겸임하게 하였다. 심약(審藥)이 각 1명이다. 위(衛)는 남도(南道)에 속한다 : 전위(前衛)는 부령(富寧), 좌위
(左衛)는 경성, 중위(中衛)는 무산(茂山), 우위(右衛)는 명천, 후위(後衛)는 길주(吉州)이다.
봉수 수만덕(壽萬德) : 남쪽으로 1백 20리이다. 중덕(中德) : 남쪽으로 1백 10리이다.
영강(永康) : 남쪽으로 55리이다. 나적동(羅赤洞) : 북쪽으로 5리이다.
송곡현(松谷峴) : 북쪽으로 45리인데 우측은 원봉(元烽)이다. 차산(遮山) : 어유간(魚遊澗) 서북쪽이다.
하봉(下峯) : 오촌(吾村) 서쪽이다. 고봉(古峯) : 줄온(●溫) 서쪽이다. 송봉(松峯) : 보화(寶化) 서쪽이다.
동봉(洞峯) : 삼삼파(森森坡) 뒤, 위의 다섯 곳 가운데서 봉화가 처음으로 일어났다.
창고 읍창(邑倉)ㆍ병영창(兵營倉) : 모두 성내(城內)이다. 용창(龍倉) : 북쪽으로 35리이다.
용북창(龍北倉) : 북쪽으로 15리이다. 온남창(溫南倉) : 남쪽으로 30리이다. 영창(永倉) : 영강(永康) 역이다.
보창(寶倉) : 남쪽으로 65리이다. 주창(朱倉) : 남쪽으로 90리이다.. 산창(山倉) : 남쪽으로 98리이다.
어북창(漁北倉) : 남쪽으로 1백리이다. 어남창(漁南倉) : 남쪽으로 1백 15리이다. 신창(新倉) : 위와 같다.
동창(東倉) : 남쪽으로 1백 35리이다. 서창(西倉) : 위와 같다.
진보창(鎭堡倉) : 진보(鎭堡)의 다섯 군데에 있다.
역참 주촌참(朱村站)ㆍ운위원참(雲委院站).
교량 오촌천교(吾村川橋) : 서쪽으로 2리에 있다. 어유간교(魚遊澗橋) : 북쪽으로 17리이다.
줄온천교(●溫川橋)ㆍ운가위천교(雲加委川橋) : 우측 남북으로 큰 길이 있다.
명간천교(明澗川橋) : 남쪽으로 1백 35리이다.
토산 사향(麝香)ㆍ다시마[昆布].
누정 백일루(百一樓) : 성내(城內)이다. 정북루(靖北樓) : 윤 문숙공(尹文肅公)의 묘(廟) 곁이다.
사원 창열사(彰烈祠) : 현종(顯宗) 경자년에 건립하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정문부(鄭文孚) : 자는 자허(子虛)이고, 호(號)는 농포(農圃)이며, 해주(海州) 사람이다. 인조(仁祖) 을축년에
좌시안(坐詩案)의 화를 입었는데 벼슬은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고,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였으며,
시호(諡號)는 충의(忠毅)인데 임진년에 북평사(北評事)로서 왜적을 토벌하였다.
이붕수(李鵬壽) : 자는 중항(仲恒)이며 공주(公州) 사람인데 선조(宣祖) 계사년에 단천(端川)에서 전사하였
으며 지평(持平)으로 추증하였다.
최배천(崔配天) : 자는 중립(仲立)이고 강릉(江陵) 사람인데 벼슬은 판관(判官)이며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추증하였다. 강보우(姜父佑) : 진주(晉州) 사람이고 벼슬은 첨사(僉使)이며 판결사(判決事)를 추증하였다.
지달원(池達源) : 자는 사진(士進)이며 충주(忠州) 사람인데 벼슬은 참봉(參奉)이고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추증하였다. 본부(本府)의 유생(儒生)이다.
이희당(李希唐) : 주계 만호(朱溪萬戶)이며, 계사년에 전사하였다. 이기수(李麒壽) : 공주(公州) 사람이며,
호조 좌랑을 추증하였다.
서수(徐遂) : 이천(利川) 사람이며 호조 좌랑을 추증하였다. 박유일(朴惟一) : 충주(忠州) 사람이며 호조 좌랑
(戶曹佐郞)을 추증하였다.
오경헌(吳慶獻) : 해주(海州) 사람이며 판결사(判決事)를 추증하였다. 위의 10명은 임진란 때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다.
길성현 吉城縣
동쪽은 명천현(明川縣) 경계까지 10리, 북쪽은 명천현의 경계까지 32리, 남쪽은 바다까지 1백 27리,
서쪽은 단천군(端川郡) 경계까지 1백 19리, 서울까지는 1천 4백 6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여진(女眞)에게 점령되었다가, 고려 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
과 오연총(吳延寵)을 보내어 군대 17만을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내고, 지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동쪽은
화관령(火串嶺)까지, 북쪽은 궁한령(弓漢嶺), 서쪽은 몽라골령(蒙羅骨嶺)까지를 우리의 영토로 만들고,
궁한촌(弓漢村)에다 6백 70칸을 쌓고 길주(吉州)라고 이름 붙였다. 3년에 방어사(防禦使)을 두었고, 6년에
중성을 쌓았다가 바로 그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와서 이 지역이 원(元) 나라에 편입되어 해양(海洋)이라고 이름 붙였다. : 또 삼해양이라고도 한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에, "해양(海洋)은 땅 이름인데, 지금은 길주(吉州)에 있다. 해양에서 북쪽으로
50리를 가면 태신(泰神)이요, 태신에서 동쪽으로 60리를 가면 적알발(的?發)이다. 해양ㆍ태신ㆍ적알발의 3개
소에는 모두 맹안(猛安)이 있는데, 속설에 이것을 3해양(三海洋)이라 한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수복되었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길주등처 관군민만호부(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설치하고, 영주(英州) 및 선화(宣化) 등의 진(鎭)을 모두 이 주(州)에 예속시켰다. 우리 왕조 태조(太祖) 7년에
길주목(吉州牧)으로 고쳤다가, 세조(世祖) 13년에 이시애(李施愛)가 이 주(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고, 예종(睿宗) 원년에 강등하여 현(縣)으로 만들어 현재의 명칭으로 고치고 주(州)의 북쪽인
영평(永平) 등의 지역을 분할하여 따로 명천현(明川縣)을 설치하였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이다.
신증 금상(今上) 7년에 명천현을 폐지하여 이곳에 예속시키고, 주(州)로 승격하여 목사(牧使)와 판관(判官)을
두었으며, 8년에 다시 명천현을 설치하고 판관(判官)을 폐지하였다.
관원 목사(牧使) : 1명이다.
군명 해양(海洋)ㆍ삼해양(三海洋) : 양(陽)으로 쓰기도 한다. 궁한촌(弓漢村)ㆍ길주(吉州)ㆍ웅성(雄城).
성씨 본현(本縣) 최(崔)ㆍ이(李) : 원래부터 있던 성씨이다.
산천 원산(圓山) : 두리산(豆里山)이라고도 한다. 현의 서쪽 2백 95리에 있다. 동쪽에는 또 소두리산이 있다.
마천령(磨天嶺) : 현의 서쪽 1백 30리에 있다. 장백산(長白山) : 현의 서쪽 1백 16리에 있다.
경성부 항목에 상세하다.
성불산(成佛山) : 현의 서쪽 45리에 있다. 도산(刀山) : 현의 서쪽 44리에 있다.
장덕산(長德山) :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설봉산(雪峯山) : 현의 서쪽 72리에 있다.
바다 : 현의 동쪽 57리와 남쪽 1백 27리에 있다.
임명천(臨溟川) : 현의 남쪽 62리에 있다. 근원이 덕만동(德萬洞)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부서천(浮瑞川) :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근원이 두리산에서 나와 사하북(斜下北)에서 나오는 물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사하사천(斜下洞川) : 현의 서쪽 6리에 있다. 부서천(浮瑞川)과 합류한다.
유진(楡津) : 현의 남쪽 70리에 있다. 벌장포(伐長浦) : 현의 남쪽 82리에 있다.
다신포(多信浦) : 현의 동쪽 50리에 있다. 바로 부서천의 하류인데,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쌍포(雙浦) : 현의 남쪽 78리에 있다. 상세한 것은 쌍개원(雙介院)의 주에 있다.
화통동 온천(火筒洞溫泉) : 현의 서쪽 91리에 있다. 약수리 온천(藥水里溫泉)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대사동 온천(大寺洞溫泉) : 현의 서쪽 45리에 있다. 건자개동 온천(乾者介洞溫泉) : 현의 서쪽 13리에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철(鐵) : 다신포에서 산출된다. 사향(麝香)ㆍ녹용(鹿茸)ㆍ영양(羚羊)ㆍ오미자ㆍ지치
[紫草]ㆍ녹반(綠礬) : 현의 북쪽 10리에서 산출된다. 벌꿀ㆍ인삼ㆍ대구어(大口魚)ㆍ문어(文魚)ㆍ연어(?魚)ㆍ
송어(松魚)ㆍ황어(黃魚)ㆍ은어(銀魚)ㆍ고등어[古刀魚]ㆍ점복[鰒]ㆍ조개ㆍ홍합ㆍ홍어(洪魚)ㆍ삼치[麻魚]ㆍ
방어(?魚)ㆍ임연수어(臨淵水魚)ㆍ꽃게[紫蟹]ㆍ게ㆍ해삼(海蔘)ㆍ고리마(古里麻)ㆍ미역[藿]ㆍ곤포(昆布)ㆍ
다시마(塔士麻)ㆍ해달(海獺)ㆍ수달(水獺)ㆍ섬소(蟾?)ㆍ청서(靑鼠)ㆍ담비[貂]ㆍ화피(樺皮)ㆍ소금.
신증 홍화(紅花)ㆍ백토(白土) : 서북쪽인 최세동(崔世洞)에서 산출된다.
송이버섯ㆍ사철(沙鐵) : 서재동(西齋洞)에서 산출되는데, 주(州)의 서쪽 40리에 있다.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5백 26척, 높이 8척이다. 안에 우물 여섯이 있다.
관방 서북보(西北堡) : 현의 서쪽 67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백 42척, 높이 9척이다.
○ 병마만호(兵馬萬戶) 한 사람을 둔다. 사하북보(斜下北堡) : 현의 서쪽 4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백 53척, 높이 4척이다. 성종(成宗) 26년에 만호를 폐지하고 권관(權官)을 두었다.
덕만동소보(德萬洞小堡) : 현의 서쪽 91리에 있다. 목책(木柵)을 설치했는데 둘레가 2백 48척, 높이 8척이다.
신증 정덕(正德) 계유년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5백 척, 높이 8척이다.
이덕소보(梨德小堡) : 현의 북쪽 62리에 있다. 판자로 성을 설치했는데 둘레가 5백 23척, 높이 7척이다.
신증 장군파보(將軍坡堡) : 주(州)의 북쪽 66리에 있다.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천 4백 64척, 높이 8척
이다. 안에 우물 둘이 있다. 금상(今上) 16년에 이덕보(梨德堡)를 폐지하고 이곳으로 옮겼다.
병마만호(兵馬萬戶) 한 사람을 둔다.
봉수 향교현 봉수(鄕校峴烽燧) : 현의 남쪽 3리에 있다. 남쪽은 산성(山城)과 호응하며, 북쪽은 녹반점, 서쪽은
최세동(崔世洞)과 금만덕(金萬德)에 호응한다.
녹반점 봉수(綠礬岾烽燧) : 현의 북쪽 12리에 있는데 북으로 명천현ㆍ고점현(古岾峴)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명천현 입암(入巖)에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향교현(鄕校峴)에 호응한다.
산성 봉수(山城烽燧) :현의 남쪽 28리에 있다. 북쪽은 향교현(鄕校峴), 남쪽은 유진(楡津)과 호응한다.
유진 봉수(楡津烽燧) : 남쪽은 벌장포(伐長浦), 북쪽은 산성(山城)과 호응한다.
벌장포 봉수(伐長浦烽燧) : 남쪽은 단천군(端川郡)의 호타리(胡打里), 북쪽은 유진(楡津)과 호응한다.
최세동 봉수(崔世洞烽燧) : 현의 서쪽 26리에 있다. 동쪽은 향교현(鄕校峴), 서쪽은 장항과 호응한다.
장항 봉수(獐項烽燧) : 현의 서쪽 49리에 있다. 동쪽 최세동, 북쪽은 옥천동과 호응한다.
옥천동 봉수(玉泉洞烽燧) : 현의 서쪽 68리에 있다. 서쪽은 대동(大洞), 남쪽은 장항과 호응한다.
대동 봉수(大洞烽燧) : 현의 서쪽 87리에 있다. 동쪽으로 옥천동과 호응한다.
금만덕 봉수(金萬德烽燧) : 현의 서쪽 34리에 있다. 동쪽은 향교현, 서쪽은 방장에 호응한다.
방장 봉수(防墻烽燧) : 현의 서쪽 47리에 있다. 동쪽으로 금만덕에 호응한다.
신증 서산 봉수(西山烽燧) : 주의 북쪽 70리에 있다. 북쪽은 명천(明川)의 기운봉(起雲峯), 동쪽은 중봉(中峯)에
호응한다.
장고개 중봉 봉수(長古介中峯烽燧) : 주의 북쪽 56리에 있다. 서쪽으로는 서산(西山)에, 남쪽은 최세동에 호응
한다.
오갈암 봉수(烏曷巖烽燧) : 주의 서쪽 72리에 있다. 서쪽은 대동(大洞), 남쪽은 장항(獐項)에 호응한다.
금상(今上) 11년에 옥천동 봉수(玉泉洞烽燧)를 폐지하고 이곳으로 옮겼다.
응봉 봉수(鷹峯烽燧) : 주의 서쪽 1백 30리에 있다. 북쪽은 유덕, 남쪽은 서산 중봉(西山中峯),
서쪽은 단천(端川)의 백덕(柏德)에 호응한다.
서산 중봉 봉수(西山中峯烽燧) : 주의 서쪽 1백 2리에 있다. 북쪽은 응봉, 동쪽은 유덕에 호응한다.
유덕 봉수(楡德烽燧) : 주의 서쪽 65리에 있다. 서쪽은 서산 중봉(西山中峯), 동쪽은 향교현에 호응한다.
장동 봉수(場洞烽燧) : 주의 남쪽 60리에 있다. 북쪽은 산성(山城), 남쪽은 기이리동(岐伊里洞)에 호응한다.
홍치(弘治) 기미년에 유진 봉수(楡津烽燧)를 폐지하고 이곳으로 옮겼다.
기이리동 봉수(岐伊里洞烽燧) : 주의 남쪽 95리에 있다. 북쪽은 장동(場洞), 남쪽은 단천(端川)의 호타리
(胡打里)와 호응한다. 금상(今上) 7년에 벌장포 봉수(伐長浦烽燧)를 폐지하고 이곳으로 옮겼다.
누정 압해정(壓海亭) : 해안에 있다. 신증 지금은 마천령(磨天嶺) 위로 옮겨 세웠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동남쪽 2리에 있다.
역원 임명역(臨溟驛) : 현의 남쪽 61리에 있다.
영동역(嶺東驛) : 현의 남쪽 92리에 있다. 우리 태조(太祖) 14년에 처음 설치하였다.
웅평역(雄平驛) : 현의 남쪽 3리에 있다. 세종 5년에 처음 설치하였다.
쌍개원(雙介院) : 현의 남쪽 1백 5리에 있다. 이상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바다 가운데 우뚝히 서있는데 모양이
무지개 문과 같기 때문에 이름을 천도(穿島)라 하고, 작은 배가 그 가운데로 드나든다.
여진에서 구멍을 쌍개라 하므로 땅 이름을 쌍개원이라 하였는데, 압해정(壓海亭)이 있다.
마천령원(磨天嶺阮) : 마천령(磨天嶺) 밑에 있다.
불우 덕수암(德水庵) : 옛적엔 향수사(香水寺)라고 하였다. 장수사(長壽寺) : 모두 성불산(成佛山)에 있다.
복흥사(復興寺) : 설봉산(雪峯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학교에 있다. 성황사(城隍寺) : 현의 동쪽 3리에 있다.
여단(勵壇) :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옛 웅주[古雄州]: 고려 예종(睿宗) 3년에 윤관(尹瓘)이 여진을 쫓아내어 화관령(火串嶺) 밑에다 성을 쌓고,
행랑(行廊) 9백 92칸을 짓고 영해군 웅주 방어사(寧海軍雄州防禦使)를 설치했다가,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지
역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다시 수복되어 공양왕(恭讓王) 2년에 길주(吉州)에 병합되었다.
○ 《고려사(高麗史)》에는, "길주(吉州)는 북쪽에 있고, 웅주(雄州)는 남쪽에 있다." 하였으나,
지금은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옛 영주[古英州] : 윤관(尹瓘)이 여진을 쫓아내고 몽라골령(蒙羅骨嶺) 밑에 성을 쌓고 행랑 9백 90칸을 짓고,
안령군 영주 방어사(安嶺軍英州防禦使)를 설치했다가 4년에 성을 철거하고 여진에 돌려 주었다.
공민왕 때에 수복되어 공양왕 2년에 길주(吉州)에 병합시켰다. 지금은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 윤관(尹瓘)이 병마령할(兵馬鈴轄)인 임언(林彦)을 시켜 그 사실을 기록하여 영주(英州) 관청의 벽에 써 붙이
게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맹자》에, '약한 것은 진실로 강한 것을 대항하지 못하며, 작은 것은 진실로
큰 것을 대항하지 못한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오래전부터 외우고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 그 뜻을 확신하였다.
여진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강약과 다소의 실정이 뚜렷이 다른데도 우리의 변경을 넘보아 오다가, 숙종(肅宗)
10년에 틈을 타서 난리를 일으켜 우리의 군대와 백성을 많이 죽였으며, 그 중에 잡혀 노예가 된 자도 많았다.
숙종께서는 군대를 정돈하여 대의(大義)를 내세워서 이를 토벌하려다가 아깝게도 그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영
원히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 임금께서 왕위를 이어 받들어 3년상을 다 마치고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여진은 본래 고구려의 한 부
락이었다. 개마산(蓋馬山)의 동쪽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우리에게 조공 받치는 직무를 닦아오면서 우리 선왕의
은택을 깊이 받아 왔었다. 그런데 하룻동안에 배반하여 무도한 짓을 자행하였으므로, 아버지께서는 매우 이를
분하게 여기셨다. 일찍이 들으니, 옛사람이 큰 효도라고 하는 것은 어버이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지금 다행히 3년상을 다 마치고 처음으로 국사를 담당하게 되었으니, 정의의 깃발을 들고 무도한 놈을 쳐
부셔서 선왕의 수치를 한꺼번에 씻어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곧바로 수사도 중서시랑 평장사(守司徒中
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 (知樞密院事
翰林學士承旨)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서, 정예 군대 30만 명을 거느리고 토벌하는 일을 담당
하게 하니 윤공은 업적이 뚜렷하였다. 그는 일찍이 유신(庾信)씨를 사모하여 이르기를, '유신(庾信)은 6월에 강
물이 얼어서 삼군(三軍)을 건너게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니라 지극한 정성뿐이다. 나는 또한 어떠한 사람인가.' 하였는데, 그의 지극한 정성으로 감동되어
신비하고 기이한 행적이 여러번 알려졌었다. 오공(吳公)은 현재 중요한 명망을 가진 분이다.
성격이 삼가며 조심하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신중히 생각하여 그의 좋은 계책과 큰 계획은 실시하여 잘 되지 않
은 적이 없었다. 두 분은 일찍부터 이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임금의 명령을 듣고 분개하며 격려
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내려갔다. 군대가 출발하는 날에 직접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여러 사람들에게
맹세를 선포하기도 전에 눈물이 솟아나 턱으로 흘러 내렸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미 적의 지역에 들어서자 삼군(三軍)이 힘을 내어 소리치며 들어가니, 한 사람이 백 명을 당해 낼 수 있었다.
마른 가지를 꺾으며 대[竹]를 쪼개는 것보다도 더 쉽게 되어, 머리를 베인 수가 6천여 명이며, 활과 화살을 싣고
진 앞에 나와서 항복한 자가 5천여 명이었고, 우리의 기세를 바라보고는 넋을 잃고 극북(極北) 지역으로 도망쳐
버린 자 역시 헤아릴 수 없었다. 아아, 여진은 우둔하며 어리석어서 강하고 약함과 많고 적음의 정세를 헤아리지
않고 멸망을 스스로 이렇게 불러 들였도다.
이 지방은 3백 리인데 동쪽은 바다에 닿아 있고 서북은 개마산(蓋馬山)이 사이에 놓였고, 남쪽은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와 연접되었다.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우리의 백성을 안주시킬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고구려의 소유였으므로 그 옛적에 세운 비석(碑石)과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대개 고구려가 과
거에 잃었던 것을 지금 임금께서 뒤에 와서 찾았으니, 어찌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여기에다 새로 여섯
곳의 성을 설치하였는데, 첫째는 진동군 함주대도독부(鎭東軍咸州大都督府)인데, 군대와 민간인이 1천 9백 48
세대이고, 둘째는 안령군 영주방어사(安嶺軍英州防禦使)인데, 군대와 민간인이 1천 2백 38호이고, 셋째는 영해
군 웅주방어사(寧海軍雄州防禦使)인데, 군대와 민간인이 1천 4백 36호이고, 넷째는 길주 방어사(吉州防禦使)인
데, 군대와 민간인이 6백 80호이고, 다섯째는 복주방어사(福州防禦使))인데, 군대와 민간인이 6백 32호이며, 여
섯째는 공험진 방어사(公?鎭防禦使)인데, 군대와 민간인이 5백 32호이다. 그들 중에서 관직이 있고 훌륭한 역량
이 있어 그 책임을 맡을 만한 사람을 뽑아서 그 지방을 진무시키기로 하였다.
이것은 《시경》에 이른바, '여기에서 울타리가 되며 여기에서 임금의 교화를 펴서 왕실을 보호한다.'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편하게 베개를 높이 베고 동쪽지역에 대한 걱정이 없게 되었다.
원수가 나에게 이르기를, '옛적에 당(唐) 나라의 정승인 배진공(裵晉公)이 회서(淮西)에 출정하여 그곳을 평정하
고, 막객(幕客)인 한유(韓愈)가 여기에 비문을 지어서 그 사실을 널리 전하였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이 헌종(憲宗
)의 영걸함이 보통사람 보다 뛰어난 덕이 있음을 알게 되어, 그의 덕을 노래하며 칭송하였다.
이제 그대가 다행히 이 일에 참가하여 그 전말을 상세히 아니, 이를 기록하여 우리 임금께서 과거에 아무도 이루
지 못했던 위대한 업적을 영원한 후대까지 전하게 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임언은 명을 받고 붓을 들어 이렇게
기록한다." 하였다.
옛 선화진[古宣化鎭] : 이것도 윤관(尹瓘)이 설치한 것이다. 예종(睿宗) 4년에 성을 철수하고 여진에게 돌려주
었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수복하여 길주(吉州)에 병합하였다. 다신산성(多信山城) : 현의 남쪽 31리에 있는데
강성(江城)이라고 부른다. 둘레가 1만 5천 75척, 높이 16척이다. 안에 못이 10개가 있다. 옛적에는 군창이 있어
서 식량을 많이 저장했었는데, 이시애(李施愛)의 군대가 패할 때에 태워버리고 갔다.
산 아래에 또 돌로 쌓은 성이 있는데, 둘레가 2천 8백 5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는데, 속칭 오포성(吾布城)이라
고 부른다.
소파온 고성(所波溫古城) : 현의 남쪽 89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2천 20척이다. 지금은 폐지
되었다. 산성(山城) : 현의 남쪽 3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4백 5척, 높이 8척이다. 지금은 반쯤
허물어졌다. 태신 고성(泰神古城) : 현의 남쪽 51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3천 1백 27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명환 고려 허재(許載) : 9성을 쌓을 때에 중군 녹사(中軍錄事)로 와서 이곳을 지켰다. 이때에 여진이 와서 공격
하는데, 허재는 군대를 독려하여 하룻밤 사이에 다시 이중(二重)의 성을 쌓아 그들에 대항하니 적들이 물러갔
다. 뒤에 또 길주(吉州)의 관문 밖에서 여진을 공격하여 3천여 명을 죽이고, 그들의 무장을 노획하였다.
그 공로로 잡단(雜端)에 승진되었다.
본조 하경복(河敬復) : 도절제사(都節制使)로 판목사(判牧使)를 겸임하였다.
유강(柳江) : 문종(文宗) 때에 목사가 되었는데, 행정 성적이 최고였으므로 가정(嘉靖)에 승진되어 회령 절제사
(會寧節制使)로 옮겨갔다.
유우 본조 김구경(金久?) : 사건에 관련되어 귀양와서 살았다. 하연(河演)이 지어 보낸 시에, "붉은 단풍 누른
국화 가을도 저물려하는데, 객지에서 지내는 명절도 물처럼 흘러가버렸네. 내 친구는 어디서 센 머리털만
늘어나는고, 오랑캐의 피리와 노래 속에 달빛만이 누(樓)에 가득하리라." 하였다.
효자 본조 서원기(徐原起) : 서지리(西之里) 사람이다. 효행으로 정문(旌門)을 세웠다. 뒤에 벼슬이 중현대부
사재령(中顯大夫司宰嶺)에 이르렀다.
제영 멀고 먼 지역 땅이 끝난 곳 : 황희(黃喜)의 시에, "나이 칠십에 3천리 밖에 임금의 명을 받들고 오니, 멀고
먼 지역 땅이 끝난 곳이로다. 다행히 주인이 정중한 마음으로 대해 주어서, 늙은 얼굴 센 머리털에도 오히려
운치 있게 지내도다." 하였다.
바람에 먼지 날리는 이곳 전쟁터였건만 : 정초(鄭招)의 시에, "바람에 먼지 날리는 이곳 전쟁터였건만 밥짓는
연기는 태평한 백성이로다. 산하(山河)의 웅장함을 앞뒤로 당기고 관청을 새로 지어 산뜻하여라. 동떨어진 지역
에도 위력이 미치니 오랑캐의 풍속으로도 화평과 친선을 요청하여 왔네. 임금의 교화가 이제 널리 미치니,
서생(書生)이 말고삐를 잡고서 순행할 수 있도다." 하였다.
뽕과 삼밭이 이어진 백 리나 되는 성 :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천년동안 전쟁을 겪은 지역인데, 이제는 뽕과
삼밭이 이어진 백 리나 되는 성이로다. 푸른 바다에는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고, 먼 산봉우리엔 흰 구름이 퍼져
있도다.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웅대한 뜻이 있고 멀리 국경을 나올 때 감정이 서려있네. 임금의 교화 동쪽으로
널리 퍼져 나가서, 간 곳마다 은혜와 영광을 받게 되었네." 하였다.
아득한 산세(山勢)는 바닷머리를 박차고 내달았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땅의 신비한 기운이 서려있는 바닷
가의 고을이어서, 아득한 산세(山勢)가 바닷머리를 박차고 내달았다. 사방으로 바라보며 멀리 생각하니 옛 생각
이 간절한데, 두 갈래 물은 성 밑으로 어울려 흐르는구나." 하였다.
군대를 지휘하여 진치는 법을 시험한다 : 신숙주의 시에, "고을을 옮기니 벌써 터를 잡았었는데, 돌을 모아 놓은
것이 제대로 성(城)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무들은 여기 저기에 보이고, 구름과 산은 간 곳마다 가지런하다.
군대를 지휘하여 진치는 법을 시험하며, 고적을 탐방하여 민간의 사정을 살펴본다. 절도사로서의 역량 부족함이
부끄럽거늘, 어찌 감히 국경을 순찰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길 수 있으랴." 하였다.
올라보니 시야(視野)가 천 리에 트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올라보니 시야가 천리에 트였고, 굽어보니 모든
산이 들판처럼 평평하구나. 스스로 부끄럽네, 서생(書生)이 좋은 글귀 없어서, 망운정(望雲亭) 위에다 이름만 써
놓는다." 하였다.
[비고]
연혁 숙신(肅愼)ㆍ옥저(沃沮)ㆍ고구려(高句麗)ㆍ발해(渤海)ㆍ말갈(靺鞨)ㆍ여진(女眞)이 교대로 그 땅을 차지
하였다. 중종(中宗) 7년에 혁폐하여 명천현(明川縣)에 예속시켰다가 다시 길주목(吉州牧)을 삼아 따로 판관
(判官)을 두었으며, 8년에 다시 현(縣)으로 강등하여 명천현을 설치하였다.
선조(宣祖) 38년에 다시 길주목(吉州牧)을 삼았다 : 옛날에는 경성진관(鏡城鎭管)이던 것을 영종(英宗) 25년에
독진(獨鎭)으로 삼아 방영(防營)을 두었다.
방면 백초(白初) : 남쪽으로 끝이 60리이다. 백이(白二) : 서북쪽으로 끝이 2백여 리이다.
백삼(白三) : 동북쪽으로 끝이 30리이다. 다초(多初) : 남쪽으로 끝이 60리이다.
다이(多二) : 동남쪽으로 끝이 40리이다. 서조(西初) : 서남쪽으로 끝이 60리이다.
서이(西二) : 서쪽으로 끝이 60리이다.
성지 오포성(吾布城) : 다신성(多信城) 밑에 있으며 둘레가 2천 8백 5척이다.
영아 방영(防營) : 선조 38년에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였고, 광해군 원년에 혁파하고 성진(城津)에 방영을
설치하였다가 40년에 다시 본주에 옮겼으며, 영종 22년에 또 성진에 옮겼다가 25년에 다시 본주에 옮겼다.
관원 함경도 도병마 방어사(咸鏡度道兵馬防禦使) : 1명이다.
속진 성진(城津)의 서북쪽이다.
봉수 쌍포령(雙浦嶺) : 서남쪽으로 80리에 있다.
동산(東山) : 장고파(長古坡)라고도 하며, 북쪽으로 45리에 있다. 고봉(高峯) : 서북쪽으로 75리에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방영창(防營倉) : 읍내에 있다. 동창(東倉) : 동남쪽으로 45리에 있다.
해창(海倉) : 동남쪽으로 55리에 있다. 서창(西倉) : 남쪽으로 70리에 있다.
임명창(臨溟倉) : 남쪽으로 70리에 있으며 이상 세 창은 바닷가에 있다.
원평창(院坪倉) : 서남쪽으로 35리에 있다. 신창(新倉) :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서북창(西北倉) : 서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영동창(嶺東倉)ㆍ진창(鎭倉) : 두 곳에 있으며 성진성 안에 있다.
역군창(驛軍倉) : 임명역(臨溟驛)에 있다.
역참 산성참(山城站).
교량 남대천교(南大川橋) : 남쪽으로 7리에 있다. 명천교(溟川橋) : 남쪽으로 65리에 있다.
쌍포천교(雙浦川橋) : 쌍포천(雙浦川)에 있다.
토산 석이[石?]ㆍ수어(繡魚)ㆍ명태(明太)ㆍ가자미[?魚]ㆍ다시마.
누정 임해정(臨海亭) : 임명역 옆에 있다.
사원 명천서원(溟川書院) : 현종(顯宗) 경술년에 세우고 숙종(肅宗)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명천현 明川縣
동쪽은 경성부(鏡城府) 경계까지 6리, 북쪽은 같은 부(府) 경계까지 7리, 남쪽은 바닷가까지 1백 70리,
서쪽은 길성현(吉城縣) 경계까지 44리이고, 서울까지는 1천 5백 5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길주(吉州)의 명원역(明原驛)이다. 본조 예종(睿宗) 원년에 고을 사람 이시애(李施愛)가 반역을
일으켰기 때문에 격을 낮추어 길주를 길성현(吉城縣)으로 만들고, 또 장덕산(長德山)에서부터 북쪽 지역을
분할하여 따로 현(縣)을 만들어 명원역(明原驛)을 치소(治所)로 삼고, 명칭을 명천(明川)이라 하였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이다. 신증 금상(今上) 7년에 폐지하고 길주에 예속시켰다가 8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군명 명원(明原).
성씨 길성(吉城)과 같다.
산천 영평산(永平山) : 현의 남쪽 32리에 있는 진산이다. 마유산(馬乳山) : 현의 남쪽 1백 64리에 있다.
칠보산(七寶山) : 현의 동쪽 56리에 있다. 백록산(白鹿山) : 현의 서쪽 59리에 있다.
가을마산(加乙?山) : 현의 동남쪽 1백 73리에 있다. 국화대산(菊花臺山) : 현의 남쪽 1백 25리에 있다.
우화령(于禾嶺) :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숭산(崇山) : 현의 남쪽 31리에 있다. 산꼭대기에 이상한 바위가 우뚝히
서 있다.
바다 : 현의 동남쪽 1백 70리에 있다. 대천(大川) : 현의 서쪽 12리에 있는데, 속칭 우화천(?禾川)이라고 부른다.
그 근원이 두 군데서 나오는데, 하나는 백록산(白鹿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와서 북으로
흘러 사마동보(斜?洞堡)를 지나 동쪽으로 경성부(鏡城府)와의 경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양도(羊島) : 현의 남쪽 1백 54리에 있다. 송도(松島) : 현의 동쪽 73리인 황진(黃津) 가에 있다.
난도(卵島) : 현의 남쪽 2백 90리인 바다에 있다. 바윗돌이 험준하여 사람이 다닐 수 없다. 장끼가 많이 서식하여
새끼를 기른다.
황진리 온천(黃津里溫泉) : 현의 동쪽 65리에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 석이[石?]ㆍ사향[麝香]ㆍ벌꿀ㆍ복령(茯笭), 토삼청(土三靑) : 영평산(永平山)에서 산출
된다. 주석(朱石) : 현의 남쪽인 황토동(黃土洞)에서 산출된다. 옻[漆]ㆍ인삼ㆍ오미자ㆍ대구어(大口魚)ㆍ문어
(文魚)ㆍ홍합(紅蛤)ㆍ전복[鰒]ㆍ은어(銀魚)ㆍ삼치[麻魚]ㆍ송어(松魚)ㆍ연어(?魚)ㆍ황어(黃魚)ㆍ꽃게[紫蟹]ㆍ
게[蟹]ㆍ해삼(海蔘)ㆍ곤포(昆布)ㆍ다시마[塔士麻]ㆍ고리마(古里麻)ㆍ수달(水獺)ㆍ미역[藿]ㆍ담비[貂]ㆍ
청서(靑鼠)ㆍ벚나무 껍질[樺皮]ㆍ소금. 신증 방어(?魚)ㆍ무태어(無泰魚)ㆍ해달(海獺)ㆍ쌍어(雙魚)ㆍ
대화살 : 양도(羊島)에서 산출된다.
신증 성곽 읍성(邑城) : 정덕(正德) 정축년에 처음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3백 척, 높이 10척이고 안에 우물
이 두 개 있다.
관방 사마동보(斜?洞堡) : 현의 북쪽 32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1천 3백 73척, 높이 9척이다.
○ 병마만호(兵馬萬戶) 1명이다. 신증 금상(今上) 20년에 만호(萬戶)를 폐지하고 권관(權官)을 두었다.
봉수
건가토 봉수(件加土烽燧) :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북쪽은 경성(鏡城)의 이마퇴(尼?退)에, 남쪽은 영평산에,
서쪽은 화파에 호응한다.
영평산 봉수(永平山烽燧) : 북쪽은 건가토에, 남쪽은 고참현에 호응한다.
고참현 봉수(古站峴烽燧) : 현의 남쪽 42리에 있다. 북쪽은 영평산, 남쪽은 길성현의 반현(礬峴)과 호응한다.
화파 봉수(樺坡烽燧) :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동쪽은 건가토에, 북쪽은 원산 및 사마동 남봉에 호응하고,
서쪽은 임연세동(林延世洞)에 호응하고, 남쪽은 농보전현(農堡前峴)에 호응한다.
사마동남 봉수(斜?洞南烽燧) : 현의 북쪽 21리에 있다. 남쪽은 화파 및 임연세동에, 북쪽은 원산(圓山)에 호응
한다.
임연세동 봉수(林延世洞烽燧) : 현의 남쪽 34리에 있다. 동쪽은 화파(樺坡), 남쪽은 우화농보(于禾農堡)의
전현(前峴)에 호응한다.
농보전현 봉수(農堡前峴烽燧) : 현의 남쪽 46리에 있다. 북쪽은 화파, 서쪽은 입암에 호응한다.
입암 봉수(立巖烽燧) : 현의 남쪽 58리에 있다. 북쪽은 농보(農堡)의 전현(前峴), 남쪽은 길성(吉城)의 녹반현
(綠礬峴)에 호응한다.
원산 봉수(圓山烽燧) : 현의 북쪽 40리에 있다. 남쪽은 사마동 남봉과 화파에 호응하며, 북쪽은 경성(鏡城)의
이파(梨坡)에 호응한다.
신증 사마동 이흥도대 봉수(斜?洞李興道代烽燧) : 현의 북쪽 65리에 있다. 북쪽은 경성(鏡城)의 강가덕(姜加德)
에, 남쪽은 송치생대(宋致生代)에 호응한다. 금상(今上) 16년에 원산 봉수(圓山烽燧)를 폐지하고 옮기어 여기에
합쳤다.
송치생대 봉수(宋致生代烽燧) : 현의 북쪽 95리에 있다. 북쪽은 이흥도대(李興道代)에, 남쪽은 기운봉에 호응
한다.
기운봉 봉수(起雲峯烽燧) : 현의 북쪽 1백 39리에 있다. 북쪽은 송치생대(宋致生代)에,
남쪽은 길주(吉州)의 서산(西山)에 호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명원역(明原驛) :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이시애(李施愛)의 군대가 패하여 이 역(驛)의 북쪽에 왔다가,
부하인 이주(李珠) 등에게 묶여서 원수(元帥)에게 보내져 죽임을 당하였다.
고참역(古站驛) : 현의 남쪽 36리에 있다.
불우 대사(大寺)ㆍ쌍계사(雙溪寺) : 모두 백록산(白鹿山)에 있다. 중암사(中庵寺)ㆍ은봉사(隱峯寺)ㆍ
석림사(石林寺) : 모두 칠보산(七寶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여단(勵壇) : 현의 서쪽에 있다.
고적 영평산성(永平山城) : 고참(古站) 북쪽에 층산(層山)이 있고, 그 위에 옛적에 돌로 쌓은 성이 있는데, 둘레
가 4천 7백 12척이다. 안에 큰 못이 있는데, 날이 가물 때에 여기에서 비를 빌면 효험이 있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대사동보(大寺洞堡) : 현의 서쪽 29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8백 31척이요, 높이가 5척이다. 지금은
반쯤 퇴락하였다.
소사마동보(小斜?洞堡) :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벽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백 4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가을마산성(加乙?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5백 20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신증 고장군파(古將軍坡) : 현의 서쪽 9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9백 65척이다.
[비고]
연혁 본래 여진 궁한리촌( 女眞弓漢里村)이다. 중종(中宗) 7년에 혁파하여 길주(吉州)에 예속시켰다가 8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선조(宣祖) 39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치소를 영평고성(永平古城)으로 옮겼으며
뒤에 다시 지금 치소로 옮겼다.
방면 아간(阿間) : 남쪽으로 60리이다. 상오화(上汚禾) : 서쪽으로 30리이다.
하오화(下汚禾) : 부내(府內)로부터 동쪽으로 30리이다. 상가(上加) : 남쪽으로 1백 리이다.
하가(下加) : 남쪽으로 1백 20리이다. 상고(上古) : 동쪽으로 95리이다.
하고(下古) : 동남쪽으로 1백 50리이다. 위는 모두 경계의 끝이다.
진보 재덕진(在德鎭) : 북쪽으로 30리이다. 선조(宣祖) 38년에 영평산(永平山) 고성(古城)에 설치하였고,
사마동(斜?洞)에 옮겨 합하였으며, 재덕성보(在德城堡)ㆍ재고참(在古站)이라고도 하며 북층산(北層山) 위는
둘레가 4천 9백 척이며 우물이 3개, 못이 하나 있다.
순조(純祖) 때에 귀문관(鬼門關)의 남쪽 소사마동으로 옮겼으며 옛터가 있다. ○ 병마만호(兵馬萬戶)가 1명이다.
봉수 항포동(項浦洞) : 서남쪽으로 20리이다. 북봉(北峯) : 북쪽으로 10리이다.
창고 읍창(邑倉)ㆍ산창(山倉) : 서북쪽으로 30리이다. 덕창(德倉) : 45리이다.
평창(坪倉) : 서남쪽으로 25리이다. 고창(古倉) : 서남쪽으로 45리이다.
아창(阿倉) : 남쪽으로 45리이다. 신창(新倉) : 남쪽으로 70리이다. 상가창(上加倉) : 남쪽으로 1백 리이다.
하가창(下加倉) : 남쪽으로 1백 20리이며 해변이다. 서창(西倉) : 동남쪽으로 1백 20리이다.
동창(東倉) : 동남쪽으로 1백 50리이며 해변이다. 상고창(上古倉) : 동쪽으로 90리이다.
하고창(下古倉) : 동남쪽으로 95리이다.
교량 대천교(大川橋) : 덕진(德鎭) 북쪽이다. 북교(北橋) : 증산천(甑山川) 아래이다.
고참교(古站橋) : 서남쪽으로 28리이다.
경원도호부 慶源都護府
동쪽은 경흥부(慶興府) 경계까지 96리, 남쪽은 바다까지 1백 65리, 서쪽은 온성부(穩城府) 경계까지 19리,
북쪽은 두만강까지 16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2천 1백 44리이다.
건치연혁 옛적에는 공주(孔州)라고 했다. 광주(匡州)라고도 하였다 한다. 뒤에 사람이 땅을 파다가 동인(銅印)
을 발견했는데, 광주방어지인(匡州防禦之印)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오랫동안 여진에게 점령당했다가 고려의 윤관(尹瓘)이 여진을 쫓아내고, 성을 쌓고 공험진내 방어소(公險鎭內
防禦所)를 만들었다. 본조 태조(太祖) 7년에 옛터에다 돌로 성을 쌓았다.
이 지방에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으며, 또한 왕업의 터전을 시작한 땅이기 때문에 현재의 명칭으로 고치
고 승격하여 부(府)를 만들고, 경성부(鏡城府)에서 용성(龍城) 이북을 분할하여 여기에 소속시켰다.
태종(太宗) 9년에 치소(治所)를 소다로(蘇多老)의 옛 영(營)으로 옮기고 목책(木柵)을 만들어 거주하고 있다가,
10년에 여진의 침략이 있었기 때문에 백성의 세대를 경성군(鏡城郡)으로 옮기고, 그 땅을 비워두었다.
17년에 경성(鏡城)의 두룡이현(豆龍耳峴) 이북의 땅을 분할하여 다시 부가참(富家站)에다 읍(邑)을 설치하고
도호부(都護府)로 만들었다. : 바로 옛적 부거회유역(富居懷綏驛)이 있던 곳이다.
세종(世宗) 10년에 다시 부(府)의 치소를 횟가[會叱家] 지방에 옮기고, 남계(南界)의 백성을 옮겨서 이곳에
채우고 토관(土官)을 두었다.
진관 보(堡) 2개 : 아산(阿山)ㆍ아오지(阿吾地).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토관 도할사(都轄司)ㆍ도할(都轄) : 종 6품. 전사(典事) : 각 1명이다.
전례서(典禮署)ㆍ감부(勘簿)ㆍ급사(給事)ㆍ섭사(攝事) : 각 1명이다. 융기서(戎器署)ㆍ사창서(司倉署)ㆍ장사
(掌事)ㆍ섭사(攝事) : 각 1명이다.
전주국(典酒局)ㆍ급사(給事)ㆍ섭사(攝事) : 각 1명이다. 사옥국(司獄局)ㆍ섭사(攝事) : 각 1명이다.
회원위(懷遠衛)ㆍ여과(勵果)ㆍ부여과(副勵果)ㆍ여정(勵正)ㆍ부여정(副勵正) : 각 1명이다.
여맹(勵猛) : 2명이다. 부여맹(副勵猛) : 3명이다. 여용(勵勇) : 4명이다. 부여용(副麗容) : 5명이다.
군명 공주(孔州)ㆍ광주(匡州)ㆍ추성(楸成).
산천 증산(甑山) : 부의 서쪽 31리에 있다. 산꼭대기에 시루[甑]와 같이 생긴 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희악산(希岳山) : 부의 남쪽 85리인 경흥부(慶興府)와의 경계에 있다.
복호봉(伏胡峯) :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운봉산(雲峯山) : 부의 남쪽 22리에 있다.
마유산(馬乳山) : 부의 북쪽 25리에 있다. 산꼭대기에 말 젖[馬乳]과 같이 생긴 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을 붙였다.
나단산(羅端山) : 부의 남쪽 34리에 있다. 산 위에 돌이 7개가 늘어서 있는데, 이것을 칠보석(七寶석)이라 한다.
오랑캐는 일곱을 나단이라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또 종성부(鍾城부)의 항목에도 보인다.
경관령(慶關嶺) : 부의 서쪽 18리인 온성부(穩城府)의 경계에 있다.
회호로하대산(回呼老下大山) : 부의 서쪽 29리에 있다. 바다 : 부의 동쪽 1백 65리에 있다.
두만강(豆滿江) :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근원이 백두산에서 나와 동량(東良)ㆍ북사지(北斜地)ㆍ
아목하(阿木河)ㆍ수주(愁州)ㆍ동건(童巾)ㆍ다온(多溫)ㆍ속장(速障) 등의 지방을 경유하여 횟가[會叱家]에서
남쪽으로 흘러 경흥부(慶興府)의 사차마도(沙次麻島)에 이르러 갈라져 5리쯤 흘러서 바다에 들어간다.
여진 말로 만(萬)을 두만(豆滿)이라고 하는데, 여러 갈래의 물이 여기로 합류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사전(祀典)에 북독(北瀆)의 신을 여기에서 제사지낸다. 중사(中祀)에 실려있다.
횟가천[會叱家川] : 부의 남쪽 1리에 있다. 근원이 증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임성동천(林成洞川) : 부의 남쪽 19리에 있다. 근원이 나단산(羅端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에 들어
간다.
오롱초천(吾弄草川) :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근원이 경성부(鏡城府)의 유성동(柳城洞)과 회령부(會寧府)의
세곡리(細谷里) 등지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서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현성평(縣城坪) :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이 다음은 두만강 밖의 지역이다. 훈춘강(訓春江) : 근원이 여진 땅에서
나와서 동림성(東林城)에 이르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알타리(斡朶里) 야인(野人)이 사는 곳이다.
수빈강(愁濱江) : 근원이 백두산(白頭山)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蘇下江)이 되고,
한쪽은 속평강(速平江)이 되어 공험진(公?鎭)과 선춘령(善春嶺)을 경유하여 거양(巨陽)에 이르러 동쪽으로 1백
20리를 흘러 아민(阿敏)에 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오라손산(於羅孫山) : 훈춘강의 동쪽 70리쯤 되는 곳에 오라손 옛 참(站)이 있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신증 야춘산(也春山) : 부의 동쪽 70리인 수빈강가에 있다.
토산 삼[麻]ㆍ오미자ㆍ인삼ㆍ사향(麝香)ㆍ해달(海獺)ㆍ수달(水獺)ㆍ대구[大口魚]ㆍ문어(文魚)ㆍ연어(?魚)ㆍ
삼치[麻魚]ㆍ방어(?魚)ㆍ홍어(紅魚)ㆍ청어(靑魚)ㆍ해삼(海蔘)ㆍ홍합(紅蛤)ㆍ백합(白蛤)ㆍ송어(松魚)ㆍ
고등어[古刀魚]ㆍ굴[石花]ㆍ미역[藿]ㆍ곤포(昆布)ㆍ다시마[塔士麻]ㆍ소금.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천 80척, 높이 9척이다.
관방 훈융진(訓戎鎭) : 부의 북쪽 28리에 있다.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3천 2백 42척, 높이 8척이다. 안에 우물
다섯이 있다. 병마첨절제사영(兵馬僉節制使營)이 있다.
○ 첨절제사(僉節制使) 1명이다. 아산보(阿山堡) : 부의 동쪽 75리에 있으며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8백 79
척, 높이 8척이다. 본래 건을가퇴보(件乙加退堡)에서 아산보(阿産堡)를 이곳에 옮겼는데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
한 것이다. ○ 병마만호(兵馬萬戶) 1명이다.
안원보(安原堡) : 부의 동쪽 29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7백 44척, 높이 7척이다.
고아산보(古阿山堡) : 부의 동쪽 59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8백 3척, 높이 6척이다.
진북보(鎭北堡) : 부의 동쪽 14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6백 13척, 높이 4척이다.
오롱초보(吾弄草堡) :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백 85척, 높이 4척이다.
신증 고아산(古阿山) 이하 3개 소의 보(堡)는 금상 11년에 모두 폐지되었다.
신증 건원보(乾元堡) : 부의 동쪽 45리에 있다. 정덕(正德) 병자년에 돌로 쌓았는데 성의 둘레가 1천 4백 58척
이요, 높이 7척이다. ○ 권관(權官) 1명이다.
봉수 중봉 봉수(中峯烽燧) :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동쪽은 마유(馬乳)에, 서쪽은 온성부(穩城府)의 입암
(立巖)에 호응한다.
훈융진 장항 봉수(訓戎鎭獐項烽燧) : 부의 동쪽 18리에 있다. 남쪽은 남산(南山), 서쪽은 마유에 호응한다.
마유 봉수(馬乳烽燧) :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동쪽은 훈융(訓戎)의 장항(獐項), 남쪽은 후훈(厚訓),
서쪽은 중봉(中峯)에 호응한다.
후훈 봉수(厚訓烽燧) : 부의 동쪽 57리에 있다. 남쪽은 남산(南山), 북쪽은 마유(馬乳)에 호응한다.
남산 봉수(南山 烽燧) : 부의 남쪽 66리에 있다. 북쪽은 후훈(厚訓)과 훈융(訓戎)에,
남쪽은 동림(東林)에 호응한다.
동림 봉수(東林烽燧) : 부의 남쪽 89리에 있다. 북쪽은 남산(南山), 남쪽은 수정(水貞)에 호응한다.
수정 봉수(水貞烽燧) : 부의 남쪽 97리에 있다. 북쪽은 동림(東林), 남쪽은 아산(阿山)에 호응한다.
아산 봉수(阿山烽燧) : 부의 남쪽 1백 15리에 있다. 북쪽은 수정(水貞), 남쪽은 백안(伯顔)에 호응한다.
백안 봉수(伯顔烽燧) : 부의 남쪽 1백 39리에 있다. 북쪽은 아산(阿山),
남쪽은 경흥(慶興)의 아오지보(阿吾地堡)의 동봉(東峯)과 호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객관 동쪽에 있다.
역원 마유역(馬乳驛) : 부의 성내(城內)에 있다.
연기역(燕基驛) : 옛 건원보(乾元堡)인데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아산역(阿山驛) : 옛 아산보(阿山堡) 안에 있다.
불우 정수사(淨水寺) : 증산(甑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두만강
신사(豆滿江神祠) : 동림성(東林城) 안에 있다. 봄 가을로 나라에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보내어 제사를
올린다. 여단(勵壇)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소다로영(蘇多老營) : 동림성(東林城)의 북쪽 5리에 있다.
현성(縣城) : 진북보(鎭北堡)에서 횟가천[會叱家川]을 건너서 큰 들 가운데에 흙으로 쌓은 성이 있는데, 명칭
을 현성(縣城)이라 한다. 성 안에 우물 6개가 있다.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이르기를, "해관성(奚關城)이 동쪽으로 훈춘강(訓春江)까지 7리, 서쪽으로
두만강까지 5리라." 했는데, 아마 여기인 듯하다.
거양성(巨陽城) : 거(巨)는 개(開)로 쓴 곳도 있다. 현성(縣城)에서 북쪽으로 90리 되는 산 위에 옛적에 쌓은 돌
성이 있는데, 오라손참(於羅孫站)이라 하며, 거기서 북쪽으로 30리가 되는 곳에는 허을손참(虛乙孫站)이 있고,
거기서 북쪽으로 60리가 되는 곳에는 유선참(留善站)이 있고, 거기서 동북쪽으로 70리가 되는 곳에 흙으로 쌓
은 옛 성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거양성이다. 안에 돌기둥 두 개가 있는데, 이것은 옛적에 종(鐘)을 매달았던
곳이다. 높이가 3척, 둘레의 직경이 4척이 조금 넘는다.
일찍이 경원(慶源) 사람 유성(庾誠)이란 자가 그 성에 와서 그 종을 부수고 말 아홉 마리로 싣고 갔는데,
겨우 전체의 10분의 1에 불과하였다. 따라간 사람 30여 명은 모두 죽고, 그들이 남기고 간 쇠는 풀 속에 버려
두었는데도 아무도 감히 가져가는 사람이 없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이곳은 고려의 윤관(尹瓘)이 쌓은 것인데, 서쪽으로 선춘령(先春嶺)까지 60리쯤 된다."
한다.
동림고성(東林古城) : 부의 동쪽 40리인 두만강 가에 있다. 돌로 쌓고, 둘레가 5천 8백 11척인데 매우 험준하다.
태종(太宗) 원년에 수축하였다. 안에 큰 우물이 있는데,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다.
건원보(乾原堡) :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5백 20척, 높이는 7척이다.
옛 아오지보[古阿吾地堡] : 부의 동쪽 1백 1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성종(成宗) 19년에 폐지하였다.
유신보(有信堡) : 부의 남쪽 87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다. ?종(成宗) 9년에 폐지하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신증 진북폐보(鎭北廢堡)ㆍ옛 아산폐보[古阿山廢堡]ㆍ오롱초폐보(吾弄草廢堡).
명환 본조 박령(朴齡) :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있었다. 신유정(辛有定) :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있었다.
○ 권근(權近)이 신유정을 전송하는 글에,
"우리 왕조(王朝)는 하늘의 명을 받아서 동쪽의 지역을 다 차지하여, 고려 시대의 동북쪽의 옛 영토를 모두 다시
찾았는데, 다만 공주(孔州)는 가장 궁벽하게 멀리 떨어져 있어서 원(元) 나라 말기에는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
고, 무성한 가시덤불로 수십 년이나 내려왔다.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 처음으로 왕업(王業)을 일으키고 4대를 왕으로 추존(追尊)하였는데, 고조(高祖)는 시
호를 목왕(穆王)이라 하고, 그 무덤이 이곳에 있었는데, 칭호를 높여 목릉(穆陵)이라 하고, 주(州)를 승격하여 경
원부(慶源府)로 고치고 남아있는 백성들을 불러들여 큰 진(鎭)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역이 깊숙하고 험한데다가 연접하여 사는 야인(野人)들이 산중과 숲 속에 거주하는데, 좋아할 때는 사
람이나 화가 나면 짐승이다. 어떤 때는 복종하다가도 어떤 때는 침략하는 등 번복하여 일정하지 않았다.
인자한 태도로 회유하기가 어려우며 의(義)로도 복종시키기가 어렵다.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 여러 도(道) 가운
데서 가장 심하다. 그러므로 이곳에 지방관을 보낼 적마다 반드시 그 선발을 신중히 하였다. 을유년 가을에 나
의 큰 이모의 아들인 박령(朴齡)의 품계를 가선(嘉善)으로 올려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삼아서, 경(卿 판서)의 자
격으로 보냈는데 이는 그 책임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너그럽고 후덕하여 위신이 있어서 백성들이 기쁘
게 복종하였다. 정해년 겨울에 임기를 마치니 불러올리고 그 후임을 고르기에 고심했는데, 또 나의 막내 이모의
아들인 총제(摠制) 신공(辛公)을 뽑았으니, 과거에 대신을 지낸 사람으로서 이 부(府)에 책임자로 가는 경우는
공이 처음이다. 이것은 더욱 그 책임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전하(殿下)께서는 대궐에서 공을 소대(召對)하고 이르기를,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적부터 경(卿)은 군무를 도
와서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보호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대의 충성을 가상히 여겼고, 여러 번 지방에 주둔하였으
나 노고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간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나는 항상 잊지 않고 있던 터인데, 이제 동쪽 문
제를 해결하려면 그대가 아니고는 이 사명을 맡을 사람이 없으니, 경(卿)은 가서 정성을 다하라.' 하였다.
공은 대답하기를, '신은 아무런 재주가 없사오나 성심만 있을 뿐이니, 어찌 힘을 다하여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성질이 급하여 사람들에게 허물을 저지를까 염려됩니다.' 하니, 임금은 웃으며, '경의 성미가 급하다고 할
지라도 과거에 잘못된 일이 없었다. 내가 그대를 선택하여 맡기는 것이니, 남의 말은 탓할 것이 없느니라.'
하였다.
공은 사양할 수 없었다. 출발할 때에 나는 병 때문에 나가서 전송하지 못하고 글을 써서 전송을 대신한다.
공이 8살 적에 그 아버지가 전쟁에서 죽고 잇달아 또 어머니가 죽었다. 마침내 외숙에게서 자라났는데, 온갖 슬
픔과 고생을 모두 겪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벌써 힘이 세고 날쌨으며 공부를 하게 되자 대략 의미만 알고 나
서는 마침내 과거를 볼 생각을 버리고 활 쏘는 것을 배웠다.
장성한 뒤에 군대에 들어가서 왜구(倭寇)와 싸워서 여러 번 공을 세워 사람들은 그의 용맹을 칭찬하였다.
두 번 추부(樞府)의 직에 있을 때에는 굳세고 바른 대로 법을 지켰고, 송사를 처결하는 것이 밝고 미덥게 하였다.
지방으로 나아가 이산(伊山)ㆍ강릉(江陵)ㆍ의주(義州)에 주둔할 때에도 청백하여 남에게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간 곳마다 백성들이 처음에는 두려워하다가 마침내는 사랑하게 되어 교대되어 간 뒤에도 사모하고 잊지 아니하
였으니, 이른바 옛사람이 남긴 사랑이 있다고 말할 만하다. 성격이 본래 곧고 깨끗하여 남의 잘못을 보면 이를
덮어두지 못하고 반드시 모두 털어놓고 욕을 하고 야단을 치고야 만다. 그러나 조금도 사적인 감정은 갖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도 그에 대하여 그다지 원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이 임금에게 지우를 받았고, 또 세상에서도
중하게 여김을 받게 된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아첨하려는 것이 아니요, 이로 인하여 경계를 삼게
하려 함이다.
대체로 사람이 가축을 다루는 것은 짐승을 상대하는 것과 반드시 그 방법을 달리 해야 한다.
말에는 굴레를 씌우고 소에게는 수레를 매면, 무거운 짐을 싣고 고된 일을 시키더라도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
는 것이 없고, 차거나 떠받는 염려가 없는 것은, 그것이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만일 원숭이에게 갓을 씌워 놓는
다면 반드시 찢어버리고 달아날 것이며, 범에게 채찍질을 한다면 반드시 대들어 물 것이다.
공이 과거에 역임한 여러 지방의 백성들은 모두 예의의 교화에 젖은 사람들이었으니, 가축과 비슷하여 명령을
내려 금지하여 위엄으로 제지할 수 있어 아무도 감히 거역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가는 곳은 그 백성이 사나워서 예법에 익지 못하였기 때문에 들짐승과 같다. 만일 위엄으로 다루려
하면 물지 않으면 달아날 것이다. 공은 마땅히 그 강한 태도를 변경하여, 관대한 태도 지니기를 힘써서, 저들로
하여금 기쁘게 복종하여 와서 따르도록 해야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들짐승을 몰아서 우리 안에 몰아넣는 것과 같이 될 것이다. 그런 후에 먹이를 주어가며 길러서
나중에는 위엄으로 그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어찌 쉽지 않겠는가. 그리고 산과 숲 속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는
함정을 튼튼히 하여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우리의 농작물에 해를 입히지 않게 할 뿐이며, 구태여 산과 숲을
모조리 뒤져서 그들을 쫓아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공은 마땅히 이러한 방법으로 노력하여 안으로는 사랑
으로 그들을 위안하며, 밖으로는 사건이 발생되지 않게 하라. 후에 묘당에 들어와 내정(內政)을 닦아서 외적을
물리치는 방법을 세우게 될 때라도 역시 이러한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공은 노력할지어다." 하였다.
황희(黃喜) : 교수관(敎授官)으로 있었다.
제영 숲이 푸그고 아득한 오랑캐의 고장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맑은 강에는 얼음이 녹아 물이 넓은데,
숲이 푸르고 아득한 오랑캐의 고장이구나. 산 뒤에는 바다 구름이 국경에 이어져 어두컴컴하고, 성의 서쪽으로는
트인 고갯길이 하늘까지 기다랗게 걸렸구나. 사람들은 임금의 선조가 살던 땅이라는 옛 역사를 말하고,
봄은 만리 밖에 있는 관하(關河)에 볕을 펼쳐 주도다. 전쟁의 경보와 싸움의 불길도 사라진 지 벌써 오래이고,
다만 닭과 개 소리만이 먼 지역까지 들려오네." 하였다.
누런 갈대밭 물가에는 국경의 구름이 길게 뻗쳤다 : 신숙주의 시에, "봄바람에 먼지는 바다처럼 가득찼는데,
지는 해 외로운 성 여기가 타향이구나. 푸른 산봉우리 들판에는 오랑캐 군대가 멀리 없어졌고, 누런 갈대밭 물가
에는 국경의 구름이 길게 뻗쳤다. 관산(關山) 밖에 멀리 다니는 나그네, 돌아갈 꿈은 멀고 먼 한강(漢江)의 북쪽
이로다. 옛적부터 우리와 오랑캐는 하늘이 한계해 놓은 것이니, 흐르는 강물을 사이에 두고 경계가 이루어졌구나."
하였다.
군대들이 밥짓는 만 개의 아궁이에 연기가 비로소 따사롭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산은 겹겹으로 둘려있고
물은 절로 찰랑거리는 곳, 북쪽 오랑캐가 여기서 오래도록 자리를 잡고 있었네. 군대가 밥을 짓는 만 개의 아궁이
에 연기가 비로소 따사롭고, 뽕나무 우거진 모든 그늘에는 해가 차츰 길어지도다. 한 고조(漢高祖)의 붉은 깃발은
패상(沛上)에서 출발하였고, 주(周) 나라의 의거(義擧)는 기양(岐陽)에서 시작되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국경
지방을 순찰한다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윤관(尹瓘)이 세운 비석이 우리의 옛 영토임을 어렴풋이 알려주네."
하였다.
신증 산은 아름다운 기운이 감돌고 물은 출렁거린다 : 조연하(曹?河)의 시에, "산은 아름다운 기운이 감돌고 물은
출렁대는 곳, 이씨 왕조(李氏王朝)가 기초를 잡은 것이 이 고장에서 시작되었지. 넓은 평원은 여기가 사시던 곳
이요, 많은 자손들은 저절로 번성하셨네. 하늘이 성인 임금을 내시어 큰 왕업을 시작하셨고, 만물은 봄빛을 맞이
하여 태양에 빛나도다. 좋도다 여기 경원(慶源)은 천고(千古)의 역사를 간직한 곳, 임금의 훌륭하신 덕은 만대에
이르도록 한이 없어라."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비고 읍사(邑社)ㆍ솔하(?下) : 북쪽으로 20리이다. 농포(農圃) : 동쪽으로 15리이다.
안원(安原) : 남쪽으로 30리이다. 고건원(古乾原) : 남쪽으로 50리이다. 유신(有信) : 남쪽으로 90리이다.
고아산(古阿山) : 남쪽으로 75리이다. 동림(東林) : 남쪽으로 35리이다. 성천(城川) : 남쪽으로 5리이다.
신건원(新乾原) : 동남쪽으로 55리이다. 신아산(新阿山) : 동남쪽으로 90리이다.
훈융(訓戎) : 북쪽으로 30리이다.
해진(海津) : 남쪽으로 1백 60리이며 해변인데, 서쪽은 온성(穩城) 끝 경계이다.
진보 강탄파수(江灘把守)가 14곳 : 훈융(訓戎)이 3개처, 본부(本府)가 3개처, 안원(安原)이 3개처,
건원(乾原)이 3개처, 아산(阿山)이 2개처이다.
봉수 건가퇴(件加退) : 동남쪽으로 70리이다. 권설(權設)ㆍ진보(進堡) : 남쪽으로 40리이다.
창고 읍창(邑倉)ㆍ사창(社倉) : 고건원(古乾原)ㆍ고아산(古阿山)ㆍ유신(有信)ㆍ동림(東林)ㆍ해진(海津).
역참 보발(步撥) 훈융참(訓戎站)ㆍ관문참(官門站)ㆍ안원참(安原站)ㆍ건원참(乾原站)ㆍ아산참(阿山站).
간발(間撥) 연기참(燕基站).
목장 경원장(慶原場) : 백헌종(百憲從)이 경원장에 있는데 변장(邊將)이 감목관(監牧官)을 겸임한다.
교량 굴항교(掘項橋) : 남쪽으로 1백 55리이며 해변인데, 호수(湖水)의 깊이는 1백 50보이고, 넓이는 3보이다.
누정 통군정(統軍亭) : 부내(府內)이다.
회령도호부 會寧都護府
동쪽은 바다까지 1백 49리, 남쪽은 부령부(富寧府)의 경계까지 68리, 서쪽은 두만강까지 6리,
북쪽은 종성부(鍾城府) 경계까지 30리, 서울과의 거리는 1천 9백 2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다. 오랑캐의 말로 알목하(斡木河)라 한다 : 오음회(吾音會)라고도 한다.
우리 왕조 태종(太宗) 때에 알타리의 동맹가 첨목아(童孟哥帖木兒)가 빈 틈을 타서 들어와 거주하였다.
세종(世宗) 15년에 올적합(兀狄哈)이 맹가(孟哥)의 부자를 죽이니 알목하(斡木河)에는 추장이 없어졌다.
16년에 마침내 석막(石幕)에 있는 영북진(寧北鎭)을 백안수소(伯顔愁所)에 옮기고, 바로 알목하의 서북지역이
적(賊)의 요충지대에 해당하며 또한 알타리(斡朶里)의 남아 있는 종족들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특별히 성
보(城堡)를 설치하여 영북진 절제사(寧北鎭節制使)가 이곳을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지방은 진(鎭)과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서 정보와 응원이 잘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같은 해 여름에 따
로 알목하(斡木河)에다 진(鎭)을 설치하고,
풍산(?山)ㆍ원산(圓山)ㆍ세곡(細谷)ㆍ유동(宥洞)ㆍ고랑기(高郞岐)ㆍ아산(阿山)ㆍ고부거(古富居)ㆍ
부회환(釜回還) 등의 지역까지를 경계로 삼고 회령진(會寧鎭)이라 하고,
첨절제사(僉節制使)) 두었다가 겨울에 승격하여 도호부사(都護府使)를 만들고 판관(判官)과 토관(土官)을 두었
다. 23년에 종성(鍾城)의 오롱초(吾弄草)의 서쪽 지역을 떼어다가 여기에 소속시켰다.
진관 보(堡) : 풍산(?山).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토관 경원부(慶原府)와 같다.
군명 아목하(阿木河)ㆍ오음회(吾音會)ㆍ오산(鰲山)ㆍ회산(會山).
풍속 바람이 매우 차가우며 검소와 용맹을 숭상한다 : 모두 《지지(地志)》에 있다. 여행하는 사람은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 《부적(府籍)》에 있다.
○ 5개소의 진(鎭)의 풍속이 모두 이와 같다.
산천 오산(鰲山) : 부의 서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두만강(豆滿江)가에 있다.
원산(圓山) :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염통산(念通山)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상문령(上門嶺) :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하문령(下門嶺) : 부의 서쪽 6리에 있다.
죽포령(竹苞嶺) :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갈파령[加乙坡嶺] : 부의 동쪽 85리에 있다. 고개 위에 갈랫길 셋이 있다.
쌍개암(雙介巖) : 부의 남쪽 1백 43리에 있다. 높이가 10여 장(丈)이다. 중간에 구멍 둘이 있어서 물이 언제나
솟아난다. 오랑캐는 구멍을 쌍개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동쪽 1리쯤 되는 곳에 또 바위가
바닷가에서 마주보고 있는데 양쪽 벼랑이 천 척이나 되며, 위에 깊은 못이 있는데 가물 때에 비오게 해달라고
빌면 효험이 있다.
우라한현(于羅漢峴) : 부의 서남쪽 45리에 있다, 백두산의 남쪽 지맥이다.
전괘현(錢掛峴) : 부의 동남쪽 79리인 부령부(富寧府)와의 경계에 있다.
바다 : 부의 동쪽 1백 49리에 있다. 팔을하천(八乙下川) : 부의 북쪽 1리에 있다. 근원이 원산(圓山)에서 나와
부의 북쪽인 오산(鰲山) 밑을 경유하여 두만강(豆滿江)의 삼기(三岐)로 들어간다.
풍산천(?山川) :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전괘현(錢掛峴)의 여러 골짜기에서 나와 풍산보(?山堡)를 경유하고,
부의 성 서쪽을 경유하여 알목하(斡木河)가 되어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두만강(豆滿江) : 부의 북쪽에 있다. 진주지(眞珠池) : 부의 동쪽 1백 48리인 고랑기이(高郞岐伊)에 있다.
진주가 산출된다.
백두산(白頭山) : 바로 장백산(長白山)이다. 부의 서쪽으로 7, 8일 걸리는 거리에 있다. 산이 모두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가 2백 리요, 가로는 천리에 뻗쳐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다. 남쪽으로 흐르
는 것은 압록강(鴨綠江),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松花江)과 혼동강(混同江),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하강
(蘇下江)과 속평강(速平江),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豆滿江)이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아야고하(阿也苦河)이다." 라고 했는데, 아마 속평강
(速平江)을 가리킨 듯하다. 다음은 모두 두만강 밖에 사는 야인(野人)의 지역이다.
고라이(古羅耳)ㆍ사오이동(沙吾耳洞)ㆍ상가하(常家下)ㆍ아적랑이(阿赤郞耳)ㆍ하다가사(下多家舍)ㆍ
벌인(伐引)ㆍ무을계(無乙界)ㆍ상동량(上東良)ㆍ중동량(中東良)ㆍ하동량(下東良)ㆍ어후강(魚厚江)ㆍ
후훈(厚訓)ㆍ박가천(朴加遷)ㆍ검천(檢天).
신증 역산천(?山川) : 부의 남쪽 1백 40리에 있다. 근원이 가을파동(加乙坡洞)에서 나와 역산(?山)을 경유하여
보제원천(菩提院川)이 되어서 동남쪽에서 합류하여 바다에 들어간다.
토산 쇠[鐵] : 부의 동쪽 60리인 활동(闊洞)에서 산출된다. 삼[麻]ㆍ인삼ㆍ오미자ㆍ대구어(大口魚)ㆍ
문어(文魚)ㆍ송어(松魚)ㆍ연어(?魚)ㆍ홍합(紅蛤)ㆍ조개[蛤]ㆍ미역[藿]ㆍ곤포(昆布)ㆍ다시마[塔士麻]ㆍ
소금ㆍ방어(?魚)ㆍ삼치[麻魚]ㆍ청어(靑魚)ㆍ해삼(海蔘)ㆍ담비[貂]ㆍ청서(靑鼠).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 6천 3백 12척, 높이 6척이다. 안에 우물 8개소가 있다. 신증 옛 성은 좁았
는데 정덕(正德) 정묘년에 남쪽과 북쪽으로 터를 확장하고 물러나 쌓아서 둘레가 1만 7백 76척이 된다.
행선(行城) : 부의 서쪽에 있는 독산(禿山)의 연대(煙臺)에서 시작하여 두만강 언덕을 따라서 돌아가며 뻗어내려
가서 경원부(慶源府)의 훈융진(訓戎鎭)까지 가서 끝난다. 부의 경내에 있는 것은 길이가 1만 1천 7백 20척, 높이
15척이다.
○ 김종서(金宗瑞)가 4개소의 진(鎭)에 행성(行城)을 쌓아야 할 것인가의 가부를 논한 상소에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위엄과 덕이 널리 베풀어져서 하루에 국토를 1백리씩 확장시킨 자가 많습니다만 주(周)의 문왕(文
王)보다 더 훌륭한 이가 없었으며, 언쟁을 일삼고 무력을 남용하여 천리 밖에 영토를 개척한 자가 많지 않은 것
은 아니나 한 무제(漢武帝)보다 더한 이는 없었습니다.
또한 못나고 잔약하여 날마다 그 영토를 축소시킨 자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덕으로 국토를 개척한 자
는 땅을 얻기는 쉽고 잃기는 어려웠고, 힘으로 땅을 넓힌 사람은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웠습니다. 그것은 일은
같아도 방법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시조가 힘으로 삼한(三韓)을 통일하였으나 위력이 북방까지는 미치지 못하였고 다만 철령(鐵嶺)을 경계
로 삼았습니다. 예종(睿宗) 때에 지모가 있는 신하가 지혜를 써서 적(賊)의 무리를 유인하여 섬멸하고 드디어
아홉개의 성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획득하자마자 바로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태조(太祖)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무(聖武)로 북방에서 출발하여 동쪽 나라를 모두 차지하시어 남쪽은 바다까지,
서북은 압록강(鴨綠江)까지, 동북은 두만강(豆滿江)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공주(孔州)ㆍ경주(鏡州)ㆍ길주(吉州)ㆍ단주(端州)ㆍ청주(靑州) ㆍ홍주(洪州)ㆍ함주(咸州)의 7개 주
(州)를 설치하셨으니, 참으로 우리나라에서 국가가 생긴 이래에 일찍 없었던 위대한 업적입니다.
태종(太宗)께서 왕위를 계승하시어 정치가 도(道)에 무젖어 오랫동안 연마되자, 오랑캐가 변화하여 백성이 되었
고, 풍속이 선량하게 고쳐졌기 때문에 튼튼히 유지되어 감히 꼼짝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태평시대가 오랜 동안
계속되는 가운데에, 이곳을 지키는 신하가 통제하는 방책을 잘못하여 경성(鏡城)에서 북쪽지역이 적의 소굴로
들어갔습니다.
태종께서는 이를 근심하시어 처음으로 부거(富居)에 경원(慶源)을 설치하여 옛 땅을 회복할 뜻을 약간 보이셨으
니, 오랑캐를 물리치며 국토를 회복하는 것은 임금께서 선왕의 뜻을 잘 계승하기에 달려있습니다.
지난번에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건의하기를, '경원(慶源)의 땅을 줄이고 용성(龍城)에 합치면 곧 북방의 조치가
잘 되고 민간의 폐해도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께서는, '선대에서 지켜온 강토는 한 자 한치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여기시고 불가함을 고집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으셨는데, 그 뒤에 이 문제가 다시
일어나 시끄러운 논의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신으로 하여금 가서 대신들과 상의하고, 석막(石幕)에다 영북진(寧北鎭)을 더 설치하여 그것으로 경계를
정하게 하셨습니다. 신이 지금 북방에 있으면서 안 가본 곳이 없으며 안 들은 말이 없습니다.
부거(富居)와 석막(石幕)은 모두 경계가 될 곳이 아니며, 용성(龍城)도 국경을 방위할 만한 중요 지점이 아닙니다.
말하는 사람은, '용성(龍城)은 진(秦) 나라의 함곡관(函谷關)과 같아서 좁고 험난하기가 비할 곳이 없으니, 만일
여기만 지키고 있다면 오랑캐들이 감히 우리에게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으며, 우리 백성들도 편하게 누워서 마음
대로 살 수 있다.' 하는데, 이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가로막힌 물이 없는데 무엇으로 험난한 것을 설치하며, 의지할 만한 산이 없는데 무엇으로 튼튼하게 방비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이야말로 사방으로 트인 곳으로 사방에서 전쟁을 벌일 곳입니다.
만일 이곳을 사방의 요충지대라고 하여 큰 진(鎭)을 만들어 가지고 책임자인 장군이 주재하는 곳으로 삼고 네
고을이 응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좋습니다. 그러나 만일 말하는 사람의 의견대로 용성(龍城)을 국경으로 만든
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저들의 침략을 면치 못하게 될 때에, 곧 후일에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천령(磨天嶺)을
국경으로 만들라고 할 것이며, 그렇게 하여도 오히려 침략을 면치 못하게 될 때에는, 곧 철령(鐵嶺)을 국경선으
로 만들고야 말 것이니, 고려 시대의 일을 보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역사상의 여러 임금들은 그들의 발상지에 대하여 소중히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한(漢) 나라가 풍패(?沛)에서, 당(唐) 나라가 진양(晉陽)에 대한 사실에서 대체로 볼 수 있습니다. 선조(先祖)의
발상지를 버리고 지키지 아니하며, 왕업(王業)이 출발된 땅을 잊어버리고 수복하지 못하면서, 선대의 터전을
잘 지켜나간다 할 수 있겠으며, 자손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선대의 뜻과 업적을 잘 계승하여 그들의
공적을 받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용성(龍城)을 국경으로 정하려는 데는 의리상 옳지 못한 것이 한 가
지 있으며, 유리하지 못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선대의 출신지를 줄이는 것이 의리상 옳지 못한 한 가지며,
산이나 물이 험난한 곳이 없는 것이 첫째로 불리하며, 지키고 방어하기에 편함이 없는 것이 둘째로 불리한 것입
니다. 그리고 두만강을 국경으로 정하는 데는 의리상 옳은 것이 한 가지가 있으며, 유리한 점이 두 가지가 있습
니다. 왕업이 출발된 땅을 찾는 것이 첫째로 의리상 옳은 일이며, 큰 강의 험난함을 근거로 한 것이 첫째로 유리
한 점이며, 방어에 편리한 것이 둘째로 유리한 점입니다.
그렇다면 용성(龍城)을 국경으로 정하자는 의견은 어쩌다 미쳐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돕
게 되어 오랑캐들이 스스로 도망쳐 버렸으니, 임금께서 이 기회를 이용하시어 군졸 한 명도 괴롭히지 않으시며,
백성 한 사람도 해치지 않으시고 옛 영토를 다시 찾으시어, 마침내 4개소의 읍(邑)을 설치하셨으니, 선대의 뜻
과 업적을 잘 계승하시어 그분들의 공적에 빛을 더하게 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또한 듣건대, 큰 일을 이룩하는 사람은 작은 폐해는 고려하지 않으며, 큰 업적을 세우는 사람은 작은 손해
는 따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이 크면 폐해도 저절로 생기며, 업적이 넓으면 손해도 서로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만 그럴 것이 아니라 옛적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4개소의 읍(邑)을 설치하는 것은 일부러 일을 크게 벌이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요, 선조의 땅을 수복하기
위한 것이니, 일로써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이며, 선왕의 업적을 계승하는 것이니 의리상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작은 폐해를 염려하며 작은 손해를 걱정하려 합니까.
더구나 첫해에 눈이 비록 많이 왔다고 하나 가축이 그다지 많이 죽어 없어지지 않았고, 다음해의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였다 하지만, 사람이 그다지 죽지 않았습니다. 만일 말하는 사람들의 얘기와 같다면 농자짓는 소와 전쟁
에 쓰는 말이 어디에서 생겼으며, 많은 군대와 많은 노역자의 수가 아직도 줄지 않은 까닭은 또 무엇입니까.
그들의 말이 실제보다 지나친 것은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또 지난해의 일로 말할지라도 그 피해가 크기는 하였습니다만, 이것을 흥부(興富)의 사망한 것과, 승우(承祐)의
군대가 전멸한 것과 용성(龍城)에서 크게 패전한 것과 비교한다면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9년 동안의 수재와
7년 동안의 한재는 요(堯)와 탕(湯)의 위대한 덕에 아무런 손해가 없으며, 흉노의 50만 군대와 돌궐의 40만 군대
도 한(漢)과 당(唐)의 큰 공적에 아무런 손해도 주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재해(災害)가 1년 정도에 불과하였으
며 적(賊)의 군대가 수천 명이 넘지 않았는데, 무엇을 근심하며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신이 또한 들으니, 옛적의 호걸은 만리(萬里)의 장성(長城)을 쌓아 흉노를 방어하였고 천 리의 긴 제방을 쌓아서
황하를 막았으며, 또한 거기에 인부를 동원한 것이 10년이란 오랜 세월이 걸렸다 합니다. 이것은 지나친 일이었
다 할지라도 뒷세상에서는 그 혜택을 입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靺鞨)과 연접하여 여러 번
침해를 받아 왔습니다. 고려로부터 지금까지 그 피해가 없어지지 않았으니, 성을 수축하여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이 다른 도(道) 보다는 백배나 더 해야 될 것입니다 아무리 금년에 성 하나를 쌓으며, 명년에 또 성 하나를 쌓
아서 해마다 성을 쌓는다 할지라도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부거(富居)를 국경으로 정하고서도 몇 자 되는 성도 쌓지 않았습니다. 국경의 읍(邑)도 이러한데 더구
나 용성(龍城) 이남의 주군(州郡)이겠습니까.
이제 와서 생각한다면 국경을 대비하는 방책이 너무나 허술하였으니, 중국 사람이 조소하는 것이 마땅하였습니
다. 임금께서 염려하시고, 계책을 마련하는 신하가 의견을 건의하고, 백성들이 자식과 같이 모여들어 벌써 회령
(會寧)에 성을 쌓았고, 또 경원(慶源)에 쌓아서 공사가 철을 넘기지 않고 일이 모두 끝났습니다.
더구나 갑산(甲山)과 경흥(慶興)에는 제대로 잘 수축하여 모두 튼튼한 성이 있으니, 북방의 염려는 벌써 10분에
서 7, 8은 없어진 것입니다.
신이 또 들으니 은(殷) 나라는 귀방(鬼方)을 정벌하는데 3년이 걸렸고, 주(周) 나라의 출정한 군인들은, '내가 못
본 지 벌써 3년이 되었구나.' 또, '어느 달에나 내가 돌아갈거나.' 하는 시를 읊었습니다. 그렇다면 은(殷)과 주
(周)의 백성들도 오랜 동안 출정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후로 오랑캐들은 더욱 세력이 긴장되었기 때문
에 전쟁도 더욱 잦았습니다. 그들이, '돌아왔다가 백발을 흩날리며 다시 국경에 출정하노라.'고 읊은 시를 보아
도 알 수 있습니다.
중국뿐만이 아니라, 고려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 철령(鐵嶺)을 관문(關門)으로 했다가 뒤에 쌍성
(雙城)을 국경으로 정할 때에 남도에 있는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여기에 와서 주둔시켰습니다.
주둔한 군사들이 늙어도 집에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부자간에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합니
다.
그들이 먼 길에 얼마나 오래 주둔해 있었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상황으로 말하자면 하늘과 땅
처럼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신이 또한 들으니 읍(邑)을 옮기는 것은 큰 일입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일으키며,
평화로운 분위기를 해치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이 깊이 염려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편안히 살고 있는 우리 백성을 사나운 족속들이 웅성대는 지역으로 옮기는 것은, 그들이 원망하며 싫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드문 일입니다. 다만 임금께서 신묘하신 방법을 세우시어, 한 사람의 아전도 처벌하
지 아니하며 한 사람의 백성도 처벌하지 않고, 수만 명의 대중이 불과 1개월 동안에 모두 새로운 지역으로 모여
들어 큰 사업이 쉽게 이룩되고 새로운 읍(邑)이 영구히 건설되었으니,
얻자마자 바로 잃어버린 것과는 비교하여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
뜻밖에 경박한 무리들이 첫해에 큰눈이 내린 것과 다음해에 큰 전염병이 유행한 것을 빙자하여, 서로 뜬소문을
퍼뜨려 인심을 현혹하고 선동했기 때문에, 안정된 사람이 동요하려 하며 자리를 잡으려던 사람이 떠나려 하여,
하마터면 튼 사업이 무너지고 과거의 공적을 잃어 버릴 뻔하였습니다. 다행히 임금께서 현명하신 단안을 내리
심을 힘입어 뜬소문이 저절로 없어지고 백성의 마음이 저절로 안정되었습니다. 더구나 지극하신 사랑이 깊이
무젖어 추운 자가 옷을 입게 되고 굶주린 자가 밥을 먹게 되니, 백성은 노역에 힘을 들이면서도 그 괴로움을 잊
으며, 군대는 복무에 힘을 들이면서도 그 고생을 잊어버립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 윗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면 백성은 적
개심(敵愾心)을 가진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그들을 기쁘게 할 목적으로 백성에게 일을 시키면 백성은 그
괴로움을 잊는다.' 한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오늘날 4개소의 읍을 설치한 것은 오로지 북방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며, 오늘날 국경지대에 주둔시키는 것도
적(賊)을 방어하고 우리 백성을 편히 살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즉 오늘의 조치는 그만 두어도 될 것
을 그만두지 않고 백성의 노력을 함부로 동원시키는 것이 아니며, 일을 크게 벌이기를 좋아하며 공을 세우기에
급급하여 전쟁을 일삼으며 무력을 남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체로 지극히 어리석은 듯하면서도 지극히 신령한 것이 백성입니다. 어찌 이런 취지를 모르겠습니까.
백성들이 신에게 말하기를, '회령(會寧)과 경원(慶源)에는 이미 성을 쌓았으니, 앞으로 쌓아야 할 것은 종성(鍾
城)과 용성(龍城) 뿐입니다. 이 두 곳에만 성을 쌓아 놓는다면 우리는 걱정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이 말을 믿는다면 그 밖에 여러 백성들의 마음도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지난해 경원(慶源)에서의 피해는 정말 참혹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흩어졌던 자
가 모여들고 도망쳤던 자가 돌아와서, 농사일에 힘쓰며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오늘의 사정으로 미루어 본다면 훗날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지 않을 것을 다짐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팔팔한 의기를 참지 못하고 스스로 나와서 적중에 들어가 적의 머리를 벤 사람도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사정으로 고찰한다면 훗날에도 윗사람을 친근히 하며 어른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것을 또한 다짐할
수 있으니, 경원(慶源) 한 읍의 일로 미루어 본다면 3개 읍의 군대와 백성의 마음을 대체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신이 오랫동안 북방에 있으면서 야인(野人)의 사정을 상세히 관찰하니, 아무리 부자 형제의 사이라 할지라도
욕심이 생기면 서로 살해하기를 원수나 다름없이 하기 때문에, 아무리 매일 천냥[千金]을 소비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을 결속하기가 어렵습니다.
혹 이익을 보여서 그들과 결합한다 할지라도 이익이 없어질 때에는 다시 그 행패를 부릴 것입니다.
그런즉 겉으로는 회유하는 혜택을 보이고 안으로 방어의 태세를 갖춘다면, 곧 우리의 세력은 저절로 강해지고
저들의 세력은 저절로 줄어들 것이니, 저절로 강해진 세력을 가지고 저절로 줄어든 틈을 이용한다면 곧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성을 쌓고 무기를 수리하며 군대를 훈련하며 양곡을 저축할 것을 서두르는 것이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만일 성을 튼튼히 하고 무장을 완전하게 갖추며 군대가 잘 훈련된다면 즉시 4진(鎭)의 사람들은 스스로 지키며
스스로 싸울 것이니, 다른 군대가 가서 원조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니, 그 적의 침입이 영구히 종식되며 적의
마음이 영구히 복종될 것은 미리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이 또한 생각하니 처음에 새로 옮겨가서는 몇 자에 불과한 목책(木寨)을 가지고도 충분히 튼튼히 지킬 수 있
었는데, 더구나 지금은 돌로 성을 쌓았으니 스스로 지킬 것을 무엇 때문에 염려하겠습니까. 백성이 식량을 준비
한 것이 없고, 관청에 저축한 것이 없으며, 흉년이 잇달아 들었을 적에도 백성으로 굶어죽은 사람이 없었는데,
더구나 지금은 해마다 풍년이 들어서 백성은 식량이 남아나고 관가에도 저축이 있으니, 식량이 없는 것을 무엇
때문에 걱정하겠습니까. 관청에서 백성들에게 조금도 거두어들이는 것이 없고 백성은 조금도 내놓는 것이 없는
데, 무엇 때문에 물자가 잦아지겠습니까.
백성의 마음이 이미 안정되고 도망치는 무리가 날로 줄어드는데, 무엇 때문에 모두 도망쳐 버리겠습니까.
종성(鍾城)만 다 쌓아 놓으면 백성의 동원이 저절로 중지될 것이니, 힘이 없어질 것을 무엇 때문에 걱정합니까.
용성(龍城)에 대해서는 사정이 그다지 급하지 않으니, 급히 성을 쌓는 것을 서두를 필요가 없이 물자와 인력(人
力)이 여유가 있기를 기다려 착수할지라도 늦지 않습니다. 신이 또 들으니, '선(善)한 사람이 나라를 백년 동안
다스리면, 난폭하여 백성을 해치는 자를 없앨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백년을 지나지 않고서는 정치를 잘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읍을 새로이 설치하여 아직 10년도 되지 못했는데, 어찌 한 가지 성공과 한 가지 실패를 가지고 성급히
걱정하거나 좋아해야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임금께는 속히 달성될 것을 요구하지 마시며, 조그마한 이익을 반갑게 여기지 마시며, 조그만 폐해를
따지지 마시며, 조그만한 문제를 염려하지 마시고, 오랜 세월을 두고 장구히 버티어 나가시면 곧 뜬소문이 저절
로 없어지고, 민심이 안정되며, 민폐(民弊)가 없어지고, 백성의 원망이 끊어지며, 백성의 식량이 풍족하여지며,
군대의 세력이 강해질 뿐만 아니라 도둑이 저절로 굴복하며, 새로 세운 읍이 영원히 튼튼하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말하는 것을 다 믿어주지 않는 듯합니다. 첫해의 눈[雪]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은 가축이 다 죽어버
렸다 하는데 신은 그렇지 않다 하였고, 다음해에 유행한 전염병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은 사람이 거의 다 죽었다
하는데 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조정에서의 의론은, 저는 곧고 신은 그르며 저는 충성스럽고 신은 옳지
못하다고들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신은 슬픈 마음이 이를 데 없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본다
면 일이 모두 증거가 있으므로 마침내 숨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충성스러웠으며 누가 옳지 못하였는가.
누가 공정하였으며 누가 사사로웠는가. 공과 사의 구별과 충성과 잘못의 차이점은 다만 임금님의 현명한 판단
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예로부터 밖에서 일을 마련하는 신하가 참소와 비난을 받아서 화를 면치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고려의 윤관(尹瓘)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윤관은 훌륭한 집안에서 낳았고 큰 공적을 세웠는데도 하마터면 화를
면치 못할 뻔하였는데, 더구나 신은 조그마한 공적도 세운 것이 없으며 일을 마련할 재주도 없어 하는 일에 잘못
이 많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니, 임금은 곧 중관(中官)을 보내어 위로하며 이
르기를, "이제 그대의 글을 보니 북방 문제에 대하여 내가 근심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신증 정덕(正德) 기사년에 새로 보을하진(甫乙下鎭)을 설치하고 성을 둘려 쌓았는데, 길이가 모두 3만 1천 6백
척이다.
관방 고령진(高嶺鎭) : 부의 북쪽 21리에 있으며 돌로 쌓았다. 둘레 2천 7백 80척, 높이 6척이다.
행성(行城) 밖에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영(營)이 있다.
○ 첨절제사(僉節制使) 1명.
풍산보(?山堡) : 부의 남쪽 5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1천 8백 33척, 높이 6척이다.
○ 병마만호(兵馬萬戶) 1명. 신증 보을하진(甫乙下鎭) : 부의 서쪽 25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성의 둘레 3천 6백 12척인데 정덕(正德) 기사년에 설치하였다. ○ 첨절제사 1명.
봉수 고령진 하을포 봉수(高嶺鎭下乙浦烽燧)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남쪽은 고령진의 북봉(北峯), 북쪽은
종성(鍾城)의 세천보 포항(細川堡浦項)에 호응한다.
북봉 봉수(北峯烽燧)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북쪽은 하을포(下乙浦), 남쪽은 죽포(竹苞)에 호응한다.
죽포 봉수(竹苞烽燧) : 남쪽은 오롱초, 북쪽은 북봉(北峯)과 호응한다.
오롱초 봉수(五弄草烽燧) :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남쪽은 오산, 북쪽은 죽포(竹苞)에 호응한다.
오산 봉수(鰲山烽燧) : 서쪽은 하문(下門), 북쪽은 오롱초에 호응한다.
하문 봉수(下門烽燧) : 남쪽은 상문(上門), 북쪽은 오산(鰲山)에 호응한다.
상문 봉수 : 남쪽은 독산(禿山), 북쪽은 하문(下門)과 호응한다.
독산 봉수 : 부의 서쪽 18리에 있다. 동쪽은 옹산(甕山), 북쪽은 상문(上門)에 호응한다.
옹산 봉수 :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남쪽은 봉화현(烽火峴), 서쪽은 독산(禿山)에 호응한다.
봉화현 봉수 :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북쪽은 옹산(甕山), 남쪽은 염통산(念通山)에 호응한다.
염통산 봉수 : 북쪽은 봉화현(烽火峴), 남쪽은 풍산보(?山堡)의 천장(泉場)에 호응한다.
천장 봉수(泉場烽燧) : 부의 남쪽 50리에 있다. 북쪽은 염통산(念通山), 남쪽은 전괘현(錢掛峴)에 호응한다.
전괘현 봉수 : 북쪽은 천장(泉場), 남쪽은 부령(富寧)의 양영만동(梁永萬洞)에 호응한다.
신증 고연대 봉수(古煙臺烽燧)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남쪽은 풍산(?山)의 서봉(西峯), 북쪽은 보을하남봉
(甫乙下南峯)에 호응한다.
풍산보 서봉 봉수 :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남쪽은 남봉(南峯), 북쪽은 송봉(松峯)에 호응한다.
남봉 봉수(南峯烽燧) : 부의 서쪽 65리에 있다. 남쪽은 금세동(金世洞), 북쪽은 서봉(西峯)에 호응한다.
금세동 봉수 : 부의 서쪽 75리에 있다. 남쪽은 부령(富寧)의 우무개(?無介), 북쪽은 남봉(南峯)에 호응한다.
신증 누정 남루(南樓) : 바로 남문(南門)의 초루(?樓)이다.
제승정(制勝亭) : 객관의 동쪽에 있다. 부사(府使)인 김량필(金良弼)이 지었다.
학교 향교(鄕校) : 객관의 동쪽에 있다.
역원 : 영안역(寧安驛) : 부성 안에 있다. 풍산역(?山驛) : 풍산보(?山堡)에 있다.
역산역(?山驛) : 부의 동쪽 1백 10리에 있는데 군창(軍倉)이 있다.
신증 광제원(廣濟院) : 부의 남쪽 70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부의 남쪽 10리에 있다. 여단(?壇)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공험진(公?鎭) : 고령진(高嶺鎭)에서 두만강을 건너 고라이(古羅耳)를 넘고, 오동참(五童站)ㆍ영소참
(英所站)을 경유하여 소하강(蘇下江)에 이르는데, 강가에 공험진(公?鎭)의 옛터가 있다. 남쪽은 구주(具州)ㆍ
탐주(探州), 북쪽은 견주(堅州)와 연접되어 있다.
○ 《고려사 지리지(高麗史地理志)》에 보면, "공험진(公?鎭)은 예종(睿宗) 3년에 성을 쌓고 진(鎭)을 설치하고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6년에 산성을 쌓았다." 하였고, 주(註)에 공주(孔州)라고도 하며, 광주(匡州)라고도
하며, 선춘령(先春嶺)의 동남쪽, 백두산(白頭山)의 동북쪽에 있다 하였고, 또 소하강(蘇下江)가에 있다고도
하였다.
지금 경원(慶源)을 공주(孔州)로 본다면 아마도 선춘령의 동남쪽, 백두산의 동북쪽이며, 소하강가에 있다는 말이
옳을 듯하다. 그러나 조사할 수가 없다.
또 《지리지(地理志)》에는, "통태(通泰)ㆍ평융(平戎)ㆍ종녕(宗寧)ㆍ진양(鎭陽) 등의 진(鎭)에 모두 예종(睿宗)
3년에 성을 쌓았다가 4년에 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했으나 그 지점이 어디 있는지 이제 조사할 수
가 없다.
선춘령(先春嶺) : 두만강 북쪽 7백리에 있다. 윤관(尹瓘)이 토지를 확장하여 여기까지 와서 공험진(公?鎭)에 성을
쌓고 드디어 비석을 영(嶺) 위에 세우고, "고려의 국경"이라고 새겼다. 비석의 사면에 모두 글씨가 있었는데 모두
오랑캐들이 지워버렸다.
운두성(雲頭城) :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이 둘레 1만 7천 40척이다. 안에 개천 하나와 우물 한 군데
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원산보(圓山堡) : 부의 서쪽 35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2만여 척이며 안에 개천 둘과 못 셋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영북보(寧北堡) : 부의 동쪽 13리에 있다.
옹희보(雍熙堡) : 부의 북쪽 31리에 있다. 이풍보(利?堡) : 부의 남쪽에 있다.
신증 산성(山城) : 부의 동쪽 30리에 있고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9백 80척이다. 안에 못 2개소가 있다 비를
오게 해달라고 빌면 효험가 있으며 일반이 용연(龍淵)이라 한다.
제영 백년 전 옛 땅이 지금은 진(鎭)이 되었구나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우리 백성과 오랑캐가 섞여서 농사를
지어가며 사는 곳, 풍속은 활과 칼만 알았지 책은 알지 못하였네. 백년 전 옛 땅이 지금은 진(鎭)이 되었는데,
알목하(斡木河)의 물은 흘러서 옛 터전으로 연이어 내려가누나." 하였다.
긴 강물만이 오랑캐의 터전과 가로막고 있음이 보일 뿐이도다 : 신숙주의 시에, "객지에서 오랫동안 날을 보내고
있노라니, 시를 쓰기 위하여 또한 붓을 잡았노라. 북쪽에 오면서부터는 봄철이 다 가도록 아무런 재미도 없는데,
긴 강물만이 오랑캐의 터전을 가로막고 있음이 보일 뿐이도다." 하였다.
언제 오랑캐의 티끌을 쓸어버릴까 : 홍일동(洪逸童)의 시에, "날마다 전쟁을 일삼으며 편히 살 수 없는 곳,
글 한줄 읽을 줄 아는 사람 없구나. 언제나 오랑캐의 무리 다 쓸어 없애고, 사방에 뽕과 삼밭이 가득함을 보리오."
하였다.
한가닥 밥 짓는 연기 오랑캐의 터전에 덮여 있다 :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객지에 아무도 찾아주는 사람 없고,
시간을 보내려니 때로는 옛사람의 글을 읽노라. 느지막이 다시 성 위에 올라 보니,
한 가닥 밥짓는 연기가 오랑캐의 터전에 잠겨 있도다."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여진(女眞)의 알목하(斡木河)이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내남(內南) : 끝은 10리이다. 내북(內北) : 끝은 10리이다. 외북(外北) : 동쪽으로 25리이다.
볼하 일리(乶下一里) : 남쪽으로 80리이다. 볼하 이리(乶下二里) : 남쪽으로 60리이다.
옹희 일리(雍熙一里) : 동쪽으로 45리이다. 옹희 이리(雍熙二里) : 북쪽으로 30리이다.
상리(上里) : 서쪽으로 40리이다. 하리(下里) : 서쪽으로 20리이다. 원산(圓山) : 동쪽으로 50리이다.
어운동(魚雲洞) : 동쪽으로 90리이다. 고령(高嶺) : 북쪽으로 30리이다. 세곡(細谷) : 동쪽으로 70리이다.
영산(靈山) : 남쪽으로 60리이다. 고풍산(古?山) : 위와 같다.
역산(?山) : 동남쪽으로 1백 20리이며 바닷가에 있다. 위는 모두 경계의 끝이다.
진보 볼하진(乶下鎭) : 서쪽으로 50리이다. 중종(中宗) 4년에 포항동(浦項洞) 입구 상줄암(上?巖) 아래에 설치
하였으며 첨사(僉使)를 두었고, 광해군 원년(元年)에는 바깥 토성(土城)을 쌓았는데 후에 폐하였다.
숙종(肅宗) 7년에 다시 첨사를 두었고, 영종(英宗) 7년에는 운두(雲頭) 고성(古城)으로 옮겨 설치하였는데 성의
둘레는 1만 8천 2백 20척이며 옹성(甕城)이 하나, 치성(雉城)이 8개, 포루(砲樓)가 16척이며 참처(塹處)가 1만
3천 8백 70척이고 성문(城門)이 4개, 우물이 17개이다.
○ 병마첨절제사 방수장(兵馬僉節制使防守將)이 1명이다.
혁폐 풍산진(?山鎭) : 남쪽으로 20리이다. 숙종 36년에 종성부(鍾城府) 세천(細川)으로 옮겼으며, 권관(權管)이
만호(萬戶)가 되었다. 성의 둘레는 1천 38척이며, 성문이 3개 있다. 숙종 10년에 무산부(茂山府)에 옮겨 예속시
켰다가 이내 폐지하였다.
역산보(?山堡) : 동쪽으로 1백 10리이다. 숙종 6년에 만호(萬戶)를 설치하였다가 그 다음해에 폐지하였다.
○ 강탄파수(江灘把守) : 고령(高嶺)이 2개처, 본부(本府)가 4개처, 볼하(乶下)가 3개처이다.
동수 고현(古峴) : 옛 풍산진(?山鎭)의 남쪽이다. 이형(梨峴) : 남쪽으로 80리이다.
봉덕(奉德) : 서쪽으로 60리이다. 중봉(中峯) : 서쪽으로 55리이다.
운두봉(雲頭峯) : 서쪽으로 50리이다. 북봉(北峯) : 북쪽으로 30리이다. 내지덕(內池德) : 동쪽으로 15리이다.
창고 읍창(邑倉)ㆍ신창(新倉) : 남쪽으로 60리이다. 역창(?倉) : 동남쪽으로 1백 50리이며 해변이다.
세창(細倉) : 동쪽으로 50리이며 세곡(細谷)이다. 영창(靈倉) : 동남쪽으로 60리이며 영산(靈山)이다.
어창(魚倉) : 동남쪽으로 80리이며 어운동(魚雲洞)이다. 하창(下倉) : 서쪽으로 20리이며 하리(下里)이다.
역참 독덕참(獨德站)ㆍ관문참(官門站)ㆍ고령참(高嶺站)ㆍ볼하참(乶下站).
사원 현충사(顯忠祠) : 숙종 계미년에 건립하고,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정문부(鄭文孚) : 경성(鏡城) 편에 보인다.
신세준(申世俊) : 평산(平山) 사람이며 본부(本府)의 교생(校生)이고 벼슬은 첨지(僉知)이며 병조 참의(兵曹參議)
를 추증하였다.
오윤적(吳允迪) : 해주(海州) 사람이며 벼슬은 군자주부(軍資主簿)이고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추증하였다.
최언영(崔彦英) : 해주(海州) 사람이며 벼슬은 군기주부(軍器主簿)이고 호조 좌랑을 추증하였다.
허관(許灌) : 양천(陽川) 사람이며 벼슬은 군기주부(軍器主簿)이며 호조 좌랑을 추증하였다.
정여경(鄭餘慶) : 영일(迎日) 사람이며 벼슬은 예빈봉사(禮賓奉事)이며 호조 좌랑을 추증하였다.
이희백(李希白) : 경주(慶州) 사람이며 벼슬은 수문장(守門將)이며 호조 좌랑을 추증하였다.
윤립(尹?) : 파평(坡平) 사람이며 벼슬은 예빈봉사(禮賓奉事)이고 호조 좌랑을 추증하였다.
오존례(吳遵禮) : 경주 사람이며 벼슬은 수문장(守門將)이며 호조 좌랑을 추증하였다.
종성도호부 鍾城都護府
동쪽은 온성부(穩城府) 경계까지 27리, 북쪽은 같은 부의 경계까지 87리, 서쪽은 두만강(豆滿江)까지 1리,
서울과의 거리는 2천 3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옛 영토였는데, 여진이 비어 있는 틈을 타서 들어와 살면서 수주(愁州)라고 칭하였다.
우리 왕조에 이르러 세종(世宗) 16년에 이미 별도로 알목하(斡木河)에다 회령진(會寧眞)을 설치하고,
이듬해에 영북 본진(寧北本鎭) : 바로 백안수소(伯顔愁所)에다 군(郡)을 설치하고 종성(鍾城)이라 이름하고,
진(鎭)의 절제사(節制使)가 지군사(知郡事)의 일을 겸하게 하고 부계(府溪)ㆍ임천(林川)ㆍ녹야(鹿野)ㆍ방산
(防山)ㆍ조산(造山)ㆍ시반(時反) 등 지방의 백성의 세대를 여기에 소속시켰고,
22년에 수주(愁州)가 강가에 들어가 있어서 적이 침략하며 들어오는 길목이므로 드디어 군(郡)의 치소(治所)를
이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본진(本鎭)의 성을 도절제사(都節制使)의 행영(行營)으로 만들었다.
23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켜 판관(判官)을 두고 토관(土官)을 설치하고,
또 남계(南界)의 백성을 옮겨 이곳에 채웠다.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토관 경원부(慶源府)와 같다.
군명 수주(愁州)ㆍ종산(鐘山).
성씨 본부(本府) 이(李)ㆍ장(張)ㆍ양(梁)ㆍ맹(孟)ㆍ김(金)ㆍ유(兪)ㆍ전(全)ㆍ박(朴)ㆍ한(韓)ㆍ봉(奉)ㆍ용(龍)ㆍ
최(崔)ㆍ남(南)ㆍ정(鄭)ㆍ손(孫). 황(黃)ㆍ조(趙)ㆍ유(劉)ㆍ강(姜)ㆍ변(邊)ㆍ염(廉)ㆍ지(池) : 모두 다른 곳에서
이주해 온 성들이다.
산천 소백산(小白山) : 부의 남쪽 45리에 있으니 진산(鎭山)이다. 봄과 여름에도 눈이 있다.
동건산(童巾山) : 부의 북쪽 25리에 있다. 모양이 종(鐘)을 엎어놓은 것과 같다.
부의 명칭이 이 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나단산(羅端山) : 부의 동쪽 54리에 있다. 또 경원군(慶源郡) 편에도 보인다.
광덕산(廣德山) : 부의 동쪽 45리에 있다. 위에 용담(龍潭)이 있다. 녹야현(鹿野峴) : 부의 남쪽 1백 20리에 있다.
곡암(斛巖) : 부의 동남쪽 45리에 있다. 돌 모양이 섬을 쌓아 놓은 것 같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바다 : 부의 남쪽 1백 80리에 있다.
두만강(豆滿江) : 부의 성 서쪽 2리에 있다. 상세한 것은 경원부(慶源府)의 항목에 나타나 있다.
동관소천(潼關小川) : 부의 북쪽 1리에 있다. 서쪽으로 흘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서풍천(西?川) : 부의 북쪽 1리에 있다. 근원이 나단산(羅端山)에서 나와서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부계(俯溪) :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근원이 녹야현(鹿野峴)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경원부(慶源府)에 들어
가서 오롱초천(吾弄草川)과 합류된다.
오롱소 물[吾籠所水] 부의 남쪽 1백 20리에 있다. 녹야현(鹿野峴)에서 나와서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담천(潭泉) : 광덕산(廣德山)에 있다. 가도(?島) : 부의 동쪽 1백 98리에 있는 바다 가운데에 있다.
향고개(香古介) :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국사당 중령(國祠堂中嶺) :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유성동현 중령(柳城洞峴中嶺) : 부의 동쪽 1백 20리에 있다. 가을파령(加乙坡嶺) : 부의 동쪽 1백 80리에 있다.
수주동(愁州洞) : 이 다음은 모두 두만강 밖에 있는 땅이다.
보청포동(甫靑浦洞)ㆍ남경여동(南京餘洞)ㆍ벌시온동(伐時溫洞)ㆍ하을아동(下乙阿洞).
신증 증산(甑山) : 소백산(小白山)의 동북쪽에 있다. 임천산(林泉山) : 부의 동남쪽 80리에 있다.
토산 쇠[鐵] : 부의 동쪽 바닷가에서 산출된다. 삼[麻]ㆍ인삼ㆍ대구어(大口魚)ㆍ문어(文魚)ㆍ홍합ㆍ미역[?]ㆍ
곤포(昆布)ㆍ소금.
신증 해삼(海參)ㆍ방어(?魚)ㆍ청어(靑魚)ㆍ송어(松魚)ㆍ은어(銀魚)ㆍ연어(?魚).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 4천 8백 81척, 높이 8척이다. 안에 우물 20개가 있다.
행성(行城) : 돌로 쌓은 것이 길이 6만 2천 4백 8척이요, 흙으로 쌓은 것이 길이 8만 5천 6백 척이요,
목책(木柵)이 길이 3천 5백 82척이다.
관방 북도절도사 행영(北道節度使行營) : 바로 백안수소(伯顔愁所)의 영북진(寧北鎭)의 옛 성이다.
부의 남쪽 85리에 있는데 돌로 쌓은 성의 둘레가 8천 3백 5척, 높이 25척이다. 안에 우물 5개가 있으며 서쪽으로
회령(會寧)이 55리, 북쪽으로 온성(穩城)이 70리, 동쪽으로 경원(慶源)이 90리다. 4개소 진(鎭)의 중앙에 위치
하여 두만강에 얼음이 얼어붙을 때에는 절도사가 여기에 머무르고 있다.
동관진(潼關鎭) : 부의 북쪽 18리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이 둘레 2천 9백 82척, 높이 9척이다.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영(營)이 있다.
○ 첨절제사 1명.
방원보(防垣堡) : 부의 남쪽 22리에 있으며 돌로 쌓았는데 둘레 2천 4백 88척, 높이 7척이다.
○ 병마만호(兵馬萬戶) 1명.
세천보(細川堡) : 부의 남쪽 25리에 있으며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5백 77척, 높이 5척이다.
봉수 북봉 봉수(北峯烽燧) : 부의 북쪽 9리에 있다. 남쪽은 남산(南山), 북쪽은 동관진에 호응한다.
동관진 봉수(潼關鎭烽燧) : 부의 북쪽 17리에 있다. 남쪽은 북봉(北峯), 북쪽은 보청포에 호응한다.
보청포 봉수(甫靑浦烽燧) : 부의 북쪽 21리에 있다. 남쪽은 동관진, 북쪽은 온성(穩城)의 소동건(小童巾)에 호응
한다.
남산 봉수(南山烽燧) :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북쪽은 북봉(北烽), 남쪽은 중산에 호응한다.
중산 봉수(中山烽燧) : 부의 남쪽 11리에 있다. 북쪽은 남산(南山), 남쪽은 삼산에 호응한다.
삼산 봉수(三山烽燧) : 부의 남쪽 16리에 있다. 북쪽은 중산(中山), 남쪽은 오갈암에 호응한다.
오갈암 봉수(烏曷巖烽燧) : 부의 남쪽 21리에 있다. 북쪽은 삼산(三山), 남쪽은 방원보에 호응한다.
방원보 봉수(防垣堡烽燧) : 부의 남쪽 31리에 있다. 북쪽은 오갈암(烏曷巖), 남쪽은 신기이에 호응한다.
신기이 봉수(新?伊烽燧) :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북쪽은 방원(防垣), 남쪽은 세천보의 포항(浦項)에 호응한다.
세천보 포항 봉수(細川堡浦項烽燧) : 부의 남쪽 49리에 있다. 북쪽은 신기이, 남쪽은 회령(會寧) 고령진(高嶺鎭)
의 하을포(下乙浦)와 호응한다.
신증 하수구 봉수(下水口烽燧) : 부의 북쪽 4리에 있다. 북쪽은 북봉(北峯), 남쪽은 상수구와 호응한다.
상수구 봉수(上水口烽燧) :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남쪽은 남산(南山), 북쪽은 하수구(下水口)에 호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객관의 서쪽에 있다.
역원 종경역(鍾慶驛) : 부의 성 안에 있다. 무안역(撫安驛) : 부의 남쪽 75리에 있다.
군창(軍倉)이 있다. 녹야역(鹿野驛) : 부의 동쪽 1백 22리에 있다. 군창(軍倉)이 있다.
소백산원(小白山院) : 소백산 아래에 있다. 신증 곡암원(斛巖院) :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부의 동쪽 2리에 있다.
여단(?壇)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동건성(童巾城) : 부의 북쪽 27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백 32척, 높이 3척, 절벽이 1천 1백 21척
이다. 안에 큰 못이 있는데 사면은 다듬은 돌로 쌓았고, 못 밑은 넓은 돌을 깔았다. 못 언덕에 또 넓고 반듯산 것
이 숫돌과 같이 반들반들한 돌이 있다. 전하는 말에 동건(童巾)이란 사람이 그 돌에 쓰기를, "태정(泰定) 5년에
적을 방어하고 7년에 …."이라 하였으므로, 동건성(童巾城)이라고 한다 하겠다.
동풍보(東?堡) : 부의 동쪽 40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다. 둘레 1천 4백 40척인데 현재는 폐지되었다.
서풍보(西?堡) : 부의 동쪽 20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다. 둘레가 1천 8백 11척인데 현재는 폐지되었다.
응곡보(鷹谷堡) : 부의 동쪽 30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다. 둘레가 1천 1백 21척인데 현재는 폐지되었다.
남경(南京) : 동관보(潼關堡)에서 두만강을 건너 보청포(堡靑浦)를 경유하여 사춘천(舍春川)을 건너면 옛 성이
있는데, 명칭을 남경(南京)이라 한다. 그 서북쪽에 또 산성이 있는데 그 땅의 명칭은 알 수 없다.
신증 명환 본조 유담년(柳聃年) : 판관(判官)으로 있었는데, 청렴하며 간소하게 지내고 법을 지켰다.
남적(南績) : 부사(府使). 권승(權勝) : 판관으로 있었다. 청렴하며 간소하였다.
유옥(柳沃) : 부사(府使). 형벌을 간소하게 하며 행정이 청백하였다.
제영 가시덤불을 쳐내고 부(府)를 설치한 지 몇 해가 되지 않았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가시덤불을 쳐내고
부(府)를 설치한 지 몇 해가 되지 않았는데, 경내에 사는 백성은 큰 강물을 경계로 삼고 있네. 오랑캐들 다투어
정성을 바치는 것을 날마다 보니, 동쪽으로 적셔오는 임금의 교화가 역마(驛馬)를 통하여 전달되는 것보다 빠르
도다." 하였다.
봄바람에 역마를 타고 종성(鍾聲)을 향한다 : 강효문(康孝文)의 시에, "봄바람에 역마를 타고 종성으로 향하니,
북치며 호각 부는 소리 요란하니 장군의 행차로다 동쪽 산에 살구꽃 서쪽에는 진달래, 말이 가는 대로 따라서
청명한 봄경치를 구경하노라."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읍사(邑社)ㆍ동풍(東?) : 동쪽으로 45리이다. 서풍(西?) : 동남쪽으로 25리이다.
응곡(鷹谷) : 동쪽으로 30리이다. 동관(潼關) : 북쪽으로 3리이다. 향현(香峴) : 남쪽으로 27리이다.
고읍(古邑) : 남쪽으로 75리이다. 방원(防垣) : 남쪽으로 50리이다. 장풍(長?) : 동남쪽으로 1백 50리이다.
녹야(鹿野) : 남쪽으로 1백 50리이다. 방산(防山) : 동남쪽으로 1백 40리이다.
조산(造山) : 동남쪽으로 1백 90리이며 해변이다. 위는 모두 경계의 끝이다.
영아 속위북도(屬衛北道) : 전위(前衛)는 회령(會寧), 좌위(左衛)는 종성(鍾城), 중위(中衛)는 온성(穩城),
우위(右衛)는 경원(慶源), 후위(後衛)는 경흥(慶興)이다.
진보 강탄파수 20처(江灘把守二十處) : 동관(潼關)이 3개처, 본부(本府)가 14개처, 방원(防垣)이 3개처이다.
봉수 포항(浦項) : 남쪽으로 50리이다. 북봉(北峯) : 북쪽으로 9리이다. 장성문(長城門) : 북쪽으로 13리이다.
북봉(北峯) : 북쪽으로 18리이다. 권설(權設)ㆍ금적곡(金迪谷) : 동쪽으로 60리이다.
소백산(小白山) : 동남쪽으로 35리이다. 피덕(皮德) : 남쪽으로 50리이다.
회중동(回仲洞) : 남쪽으로 65리인데 위는 행영(行營)에 붙였다.
창고 읍창(邑倉)ㆍ고읍창(古邑倉) : 행영성(行營城) 밖이다. 동풍창(東?倉) : 동쪽으로 35리이다.
부계상창(?溪上倉) : 남쪽으로 90리이다. 부계하창(?溪下倉) : 남쪽으로 70리이다.
녹야상창(鹿野上倉) : 동쪽으로 1백 50리이다. 녹야하창(鹿野下倉) : 동남쪽으로 1백 20리이다.
조산해창(造山海倉) : 해변이다. 방산창(防山倉) : 동남쪽으로 1백 40리이다.
역참 보발(步撥) 방원참(防垣站)ㆍ관문참(官門站)ㆍ동관참(潼關站) 간발(間撥) 방원참ㆍ세천참(細川站)ㆍ
무안참(撫安站) : 동쪽으로 온성(穩城) 취암참(鷲巖站)은 30리이다.
토산 연석(硏石) : 자색(紫色)의 아름다운 오연석(烏硯石)과 아란석(鵝卵石)은 오룡천(五龍川)에서 최고품이
나온다.
사원 종산 서원(鍾山書院) : 현종 병오년에 건립하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정여창(鄭汝昌) : 문묘(文廟)에 보인다. 기준(寄遵) : 고양(高陽)에 보인다.
유희춘(柳希春) : 담양(潭陽)에 보인다. 정화(鄭曄) : 광주(廣州)에 보인다.
정홍익(鄭弘翼) : 북청(北靑)에 보인다. 김상헌(金尙憲) : 태묘(太廟)에 보인다.
정온(鄭蘊) : 광주(廣州)에 보인다. 조석윤(趙錫胤) : 개성(開城)에 보인다.
유계(兪棨) : 임천(林川)에 보인다. 민정중(閔鼎重) : 양주(楊州)에 보인다.
남구만(南九萬) : 함흥(咸興)에 보인다.
온성도호부 穩城都護府
동쪽은 경원부(慶源府) 경계가 34리, 남쪽은 바다가 2백 61리, 서쪽은 종성부(鍾城府) 경계가 37리,
북쪽은 두만강이 5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2천 1백 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영토인데, 비어 있는 틈을 타서 여진이 들어와 살면서 명칭을 다온평(多溫平)이라 하였
다.
우리 왕조 세종(世宗) 22년에 처음으로 군(郡)을 설치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고치고,
경원(慶源) 및 길주(吉州)의 남쪽과 안변(安邊)의 북쪽에 있는 여러 고을 백성의 세대를 이곳으로 옮겨 살게 하
였다. 23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고 판관(判官)을 두고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24년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진관 보(堡) 1개소 : 영건(永建).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토관 경원부(慶源府)와 같음.
군명 다온평(多溫平)ㆍ전성(氈城).
산천 남산(南山) :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두만강(豆滿江) :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대초도(大草島) : 부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둘레가 21리이다. 목장(牧場)이 있다.
소초도(小草島) : 대초도(大草島)의 동쪽에 있다. 견탄(犬灘) :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압강탄(壓江灘)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귀암탄(龜巖灘) :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부에서 북쪽으로 11리이다.
유전탄(柳田灘) : 부의 북쪽 6리에 있다. 오정탄(於丁灘) : 부의 북쪽 8리에 있다.
타내탄(他乃灘) : 부의 북쪽 7리에 있다. 포항탄(浦項灘) : 부의 동쪽 8리에 있다.
미전탄(美錢灘) : 부의 동쪽 23리에 있다. 독읍탄(禿邑灘) :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입암탄(立巖灘) : 부의 동쪽 28리인 장성(長城) 밖에 있다.
돌이 깎아지른 듯한 것이 네모지게 하늘 위로 솟아올라서, 언제나 그 위에는 구름이 서려 있다. 탄(灘)의 명칭이
이 바위 때문에 생겼다.
○ 이상에는 모두 척후(斥候)가 있다. 바다 : 부의 남쪽 2백 61리에 있다.
귀암봉(龜巖峯) : 부의 서북쪽 20리에 있다. ○ 다음부터는 강 밖에 있는 곳이다.
탁타산(?馳山) :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다온동(多溫洞) : 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우지산(右地山) : 부의 서북쪽에 있다. 귀암봉에서 30리이다. 어후강(魚厚江)ㆍ후지여동(厚知餘洞)ㆍ
상주여동(尙州餘洞).
신증 김연덕(金連德) : 부의 동쪽 1백 95리에 있다.
대초도(大草島) : 정덕(正德) 신미년에 목장을 단천(端川)으로 옮겼다.
토산 삼[麻]ㆍ대구어(大口魚)ㆍ문어ㆍ연어ㆍ송어(松魚)ㆍ홍합ㆍ백합(白蛤)ㆍ강요주(江瑤柱)ㆍ미역[?]ㆍ
곤포(昆布)ㆍ해삼(海參)ㆍ소금ㆍ담위[貂]ㆍ청서(靑鼠)ㆍ수달(水獺)ㆍ인삼ㆍ오미자.
신증 황어(黃魚).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천 5백 60척, 높이 9척이다. 안에 우물 25개가 있다.
행성(行城) : 길이가 14만 3천 7백 68척, 높이 12척이다.
관방 유원진(柔遠鎭) : 부의 서쪽 18리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의 둘레가 3천 6백 87척, 높이 9척이다.
안에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영(營)이 있다.
미전진(美錢鎭) : 부의 동쪽 26리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의 둘레 3천 6백 39척, 높이 8척이다. 병마첨절제사의
영(營)이 있다. 성종 15년에 설치하였다.
○ 이상에는 병마첨절제사 각 1명이다.
영건보(永建堡)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3천 3백 90척, 높이 8척
○ 병마만호(兵馬萬戶) 1명이다.
신증 황자파보(黃?坡堡) : 부의 동쪽 27리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의 둘레가 1천 6백 90척, 높이 8척이다.
가정(嘉靖) 계미년에 설치하였다. 권관(權管) 1명이다.
봉수 사장 봉수(射場烽燧) :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서쪽은 유원평, 동쪽은 부평(浮萍)에 호응한다.
유원평 봉수(柔遠坪烽燧) : 부의 서쪽 43리에 있다. 동쪽은 사장(射場), 남쪽은 압강에 호응한다.
압강 봉수(壓江烽燧) :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북쪽은 유원평, 남쪽은 고성에 호응한다.
고성 봉수(古城烽燧) : 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북쪽은 압강, 남쪽은 시건에 호응한다.
시건 봉수(時建烽燧) : 부의 서쪽 71리에 있다. 북쪽은 고성(古城), 남쪽은 견탄에 호응한다.
견탄 봉수(犬灘烽燧) : 부의 서쪽 56리에 있다. 북쪽은 시건, 남쪽은 중봉에 호응한다.
중봉 봉수(中峯烽燧) : 부의 서쪽 67리에 있다. 북쪽은 견탄, 남쪽은 송봉에 호응한다.
송봉 봉수(松峯烽燧) : 부의 서쪽 71리에 있다. 북쪽은 중봉, 남쪽은 소동건에 호응한다.
소동건 봉수(小童巾烽燧) : 부의 서남쪽 78리에 있다. 북쪽은 송봉, 남쪽은 종성부(鍾城府)의 보청포(甫靑浦)에
호응한다.
부평 봉수(府坪烽燧) :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서쪽은 사장(射場), 동쪽은 포항에 호응한다.
포항 봉수(浦項烽燧) : 부의 동쪽 14리에 있다. 서쪽은 부평(府坪), 동쪽은 미전에 호응한다.
미전 봉수(美錢烽燧) :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서쪽은 포항, 동쪽은 송봉(松峯)에 호응한다.
송봉 봉수(松峯烽燧) : 부의 동쪽 31리에 있다. 북쪽은 미전, 남쪽은 전강에 호응한다.
전강 봉수(錢江烽燧) : 부의 동쪽 44리에 있다. 북쪽은 송봉, 남쪽은 입암에 호응한다.
입암 봉수(立巖烽燧) :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북쪽은 전강, 동쪽은 경원부(慶源府)의 중봉(中峯)에 호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부의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무령역(撫寧驛) : 부의 성 안에 있다. 덕명역(德明驛) : 부의 남쪽 1백 50리에 있다. 군창(軍倉)이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여단(?壇)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주원보(周原堡) :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 4백 52척이다. 현재 폐지되었다.
시건보(時建堡) :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 5백 11척이다. 현재 폐지되었다.
낙토보(樂土堡) : 부의 남쪽 4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남은 터가 있다.
풍천보(?川堡) :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 1천 5백 60척이다. 현재 폐지되었고
미전진(美錢鎭)으로 옮겼다.
옛 영건보(永建堡) : 부의 남쪽 16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 1천 6백 41척, 높이 8척이다.
현재 폐지되었다.
열녀 본조 안덕(安德) : 절부(節婦)로서 정문(旌門)을 받았다.
제영 국경의 달, 오랑캐의 피리 소리에 나그네가 근심한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국경의 달 오랑캐의 피리
소리는 오랜 나그네를 근심하게 하고, 산의 꽃 계곡의 버들은 개인 날씨에 아름답구나." 하였다.
국경의 성에 오랜 나그네가 늦은 봄을 전송한다 : 앞사람의 시에, "국경의 성에 오랜 나그네가 늦은 봄을 전송하
노니, 제철의 물건들은 어지러이 눈에 닿는대로 새롭기만 하여라. 금(金) 나라 사람들 그때의 사실을 물어보려
하노니, 어느 누가 당시의 남은 백성이더냐." 하였다.
거진(巨鎭)을 새로 옮겨 긴 강을 등지고 있구나 : 앞사람의 시에, "거진(巨鎭)을 새로 옮겨 긴 강물을 등지고 있
으니, 눈앞에 아득하다 국경 밖의 하늘이여, 태수(太守)가 일하는 것이 참으로 노련한 솜씨이니, 훌륭한 이름이
이제부터 알려지리라."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여진(女眞)의 다온평(多溫平)이다. 인조 8년에 현(縣)으로 강등하고 : 양사복(梁士福)ㆍ양저홍(梁?洪)
등이 모반하여 주벌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11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와동(瓦洞) : 동쪽으로 10리이다. 미전(美錢) : 동쪽으로 20리이다. 포항(浦項) : 동쪽으로 10리이다.
영달동(永達洞) : 서남쪽으로 32리이다. 주원(周原) : 북쪽으로 10리이다. 장충동(長忠洞) : 남쪽으로 40리이다.
유원(柔遠) : 서쪽으로 18리이다. 오후(於厚) : 서쪽으로 25리이다. 당동(堂洞) : 남쪽으로 11리이다.
변포(?浦) : 서쪽으로 11리이다. 황자파(黃?坡) : 동쪽으로 27리이다. 덕천(德川) : 남쪽으로 1백 20리이다.
덕산(德山) : 남쪽으로 1백 50리이다. 덕명(德明) : 남쪽으로 1백 60리이다.
안화(安和) : 남쪽으로 2백 60리이며 해변인데, 사사(四社)를 넘어 경원(慶源)ㆍ경흥(慶興)의 서쪽 경계와
종성(鍾城)의 동쪽 경계를 넘어 있다.
진보 황자파보(黃?坡堡) : 동남쪽으로 25리이며, 성의 둘레는 1천 6백 90척이고, 우물이 하나 있다.
○ 권관(權管)이 1명이다.
강탄파수(江灘把守)가 15처 : 영달이 2개처, 유원이 3개처, 본부가 7개처, 미전이 2개처, 황자가 1개처이다.
봉수 평연대(坪煙臺) : 평봉(平峯)이라고도 하며 서쪽으로 13리이다. 평거대(坪炬臺) : 북쪽으로 5리이다.
장성현(長城峴) : 동봉(東峯)이라고도 하며 동쪽으로 25리이다.
창고 읍창(邑倉)ㆍ사창(社倉) : 장충동(長忠洞)ㆍ덕천(德川)ㆍ덕산(德山)ㆍ덕명(德明)ㆍ안화(安和)ㆍ
해진(海津).
역참 보발(步撥) 영달참ㆍ관문참(官門站)ㆍ황자파참 간발(間撥) 취암참(鷲巖站).
목장 대초도장(大草島場) : 중종 6년에 단천(端川) 땅으로 옮겼으며, 현종 6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감목관(監牧官)은 본부사(本府使)가 겸임한다.
누정 진변루(鎭邊樓) : 성내에 있다.
경흥도호부 慶興都護府
동쪽으로 조산포(造山浦)가 35리, 남쪽은 바다가 40리, 서쪽은 경원부 경계가 36리, 북쪽은 두만강이 35리,
서울과의 거리는 2천 2백 5리이다.
건치연혁 옛적 공주(孔州)의 땅이다.
경원부(慶源府)는 이미 횟가[會叱家]로 치소(治所)를 옮기고 나서, 세종(世宗)은 공주(孔州)의 옛 지역과는 거
리가 멀어서 방어하기가 어렵다 하여 다시 공주(孔州)의 옛 성(城)을 수리하고, 만호(萬戶)를 파견하여 공주 등
처 절제사(孔州等處節制使)를 겸임하게 하다가, 17년에 부근에서 백성의 세대 3백호를 떼어서 여기에 소속시키
고, 따로 현(縣)을 설치하여 명칭을 공성(孔城)이라 하고, 첨절제사(僉節制使)가 현(縣)의 사무까지 겸임하게
하였다가, 19년에 이곳은 목조(穆祖)께서 처음 사시던 땅이라 하여 올려서 군(郡)을 만들고 현재의 명칭으로
고쳤다. 25년에 다시 그 성을 넓히고 승격하여 도호부(都護府)로 만들고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진관 보(堡) 1개소 : 무이(撫夷).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토관 온성(穩城)과 같음.
군명 공성(孔城)ㆍ광성(匡城).
산천 백악산(白岳山) : 부의 서남쪽 57리에 있다. 산이 매우 높고 험준하다. 꼭대기 돌틈에서 나오는 물이 있는데
가물 때에도 마르지 않으며, 비가 와도 넘치지 않는다. 비가 오게 해달라고 빌면 효과가 있다.
바다 :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적지(赤池) : 부의 남쪽 10리에 있다. 둘레가 몇 리에 달하며, 북쪽으로 두만강에
연접해 있다. 전하는 말에, 우리 도조(度祖)께서 검은 용을 쏜 못이라 한다.
두만강(豆滿江) : 부의 동문(東門) 밖에 있다. 남쪽으로 조산포(造山浦)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마전도(麻田島)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추도(楸島) :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난도(卵島) : 부의 남쪽 70리 되는 바다에 있다. 둘레가 13리다. 서수라곶(西水羅串) : 부의 남쪽 66리에 있다.
하다산(何多山) : 이 다음은 강 밖에 있는 땅이다.
남라이포(南羅耳浦)ㆍ필단탄(匹段灘)ㆍ이사산(伊沙山)ㆍ
진주지(眞珠池) : 직무이보(直撫夷堡)의 동쪽에 큰 못이 있고 바다와 통한다. 전하는 말에, 이곳에 용이 진주를
생산한다고 한다. 순지(蓴池). 신증 함림덕(咸林德) :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앞에 적지(赤池)와 구신포(仇申浦)가 있다.
아양관산(我羊串山) :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초관산(草串山) :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토산 삼[麻]ㆍ쇠[鐵]ㆍ인삼ㆍ물개[海獺]ㆍ수달(水獺)ㆍ대구어[大口魚]ㆍ문어ㆍ송어(松魚)ㆍ연어ㆍ
황어(黃魚)ㆍ고등어[古刀魚]ㆍ홍어(洪魚)ㆍ홍합ㆍ백합(白蛤)ㆍ굴[石花]ㆍ숭어[秀魚]ㆍ꽃개[紫蟹]ㆍ
자하(紫蝦)ㆍ소금ㆍ다시마[塔士馬]ㆍ미역[?]ㆍ곤포(昆布)ㆍ방어(?魚)ㆍ삼치[麻魚]ㆍ넙치(廣魚)ㆍ
청어(靑魚).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천 26척, 높이 9척이다. 안에 우물 5개가 있다.
관방 무이보(撫夷堡) : 부의 북쪽 26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3천 2백 40척, 높이 9척이다.
○ 병마만호(兵馬萬戶) : 1명이다.
조산포영(造山浦營) : 부의 동쪽 35리에 있다. 북도(北道)에 속한다. 돌로 쌓은 성의 둘레가 1천 5백 79척, 높이
8척. 바로 옛적의 진변보(鎭邊堡)이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이다.
아오지보(阿吾地堡) : 부의 서쪽 37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8백 25척, 높이 8척이다.
성종(成宗) 19년에 경원(慶源)의 아오지보를 폐지하고 여기로 옮기면서 명칭을 그대로 썼다. 군창(軍倉)이 있다.
○ 병마만호 1명이다.
서수라보(西修羅堡) : 부의 남쪽 57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8백 74척, 높이 18척이다. 토병(土兵)이
주둔한다.
녹둔도농보(鹿屯島農堡) : 섬은 사차마도(沙次磨島)라고도 한다. 부의 남쪽 56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
는 1천 2백 47척, 높이 6척이다.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조산포(造山浦)까지가 20리인데, 병선(兵船)
이 있고 조산만호(造山萬戶)가 이를 관장한다. 여름에는 본포의 수군이 여기에 나누어 주둔한다.
봉수 남봉 봉수(南峯烽燧) : 부의 남쪽 4리에 있다. 남쪽은 구신포, 북쪽은 망덕산에 호응한다.
구신포 봉수(仇申浦烽燧) : 부의 남쪽 18리에 있다. 남쪽은 조산포, 북쪽은 남봉(南峯)에 호응한다.
남산 봉수(南山烽燧) : 부의 남쪽 42리에 있다. 남쪽은 거수보, 북쪽은 구신포에 호응한다.
거수보 봉수(居愁堡烽燧) : 부의 남쪽 54리에 있다. 북쪽으로 남산(南山)에 호응한다.
망덕산 봉수(望德山烽燧) : 부의 북쪽 10보(步)에 있다. 북쪽은 다롱합, 남쪽은 남봉(南峯)에 호응한다.
다롱합 봉수(多弄哈烽燧) : 부의 북쪽 8리에 있다. 북쪽은 파태, 남쪽은 망덕산에 호응한다.
파태 봉수(波泰烽燧) : 부의 북쪽 18리에 있다. 북쪽은 무이(撫夷)의 북봉(北峯), 남쪽은 다롱합에 호응한다.
무이 북봉 봉수(撫夷北峯烽燧) : 부의 북쪽 28리에 있다. 서쪽은 경원부(慶源府)의 옛 아오지보의 동봉(東峯),
남쪽은 파태에 호응한다.
아오지보 동봉 봉수 : 부의 서쪽 32리에 있다. 북쪽은 경원(慶源)의 백안(伯顔), 동쪽은 무이(撫夷)의 북봉(北峯)
에 호응한다.
신증 누정 환벽정(環碧亭) : 부의 동쪽 성 밖에 있다. 부사(府使)인 반석평(潘碩枰)이 세웠다.
망덕정(望德亭) : 객관에 있다. 청허당(淸虛堂) : 객관의 서쪽에 있다.
○ 권민수(權敏手)의 시에, "높은 정자가 객지에 다니는 나그네의 마음을 위로해 주노니, 모래 사장은 기러기 날
으는 옆에 가로 놓여 있도다. 우리나라의 나무 위에는 남았던 구름도 걷혀버리고, 오랑캐의 산에는 저녁노을이
환하게 밝았도다. 술 석잔 마시니 나그네의 한이 맑아지는 듯, 호각소리 한 마디는 변방의 생각을 짙게 하여라.
돌아갈 길이 아득하다고 따지지 마소, 북쪽의 변경이 깨끗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리라."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객관의 동쪽에 있다.
역원 강양역(江陽驛) : 객관의 남쪽에 있다. 옹무역(雍撫驛) : 아오지보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객관의 북쪽에 있다.
여단(?壇)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간동(斡東) : 목조(穆祖)가 덕원(德源)에서 이리로 옮겨왔다.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적도(赤島) :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둘레가 12리이다.
목조(穆祖)가 간동에 있을 때 여진의 여러 천호(千戶)를 찾아갈 적마다 반드시 저들은 소를 잡고 잔치를 여러 날
동안 베풀어서 접대하였고, 여러 천호(千戶)가 간동에 오면 목조도 그렇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로 자주 모여서 연회를 벌였고, 익조(翼祖)가 목조의 뒤를 이어받은 뒤에도 그대로 하였다.
익조의 위엄과 덕이 차츰차츰 크게 되니, 여러 천호(千戶)의 부하들이 모두 익조에게 마음이 쏠리게 되었다.
여러 천호들은 이를 시기하여 살해하기를 기도하고 마침내 거짓으로 통고하기를, "우리는 북쪽 지방에 가서 사
냥을 해가지고 올 터이니, 20일 동안은 만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익조도 이를 허락하였는데, 약속한 시일이 지
났는데도 그들은 오지 않았다.
익조는 직접 해관성(奚關城)을 가보려고 하여 가는 도중에 어떤 노파가 물통을 머리에 이고 손에는 대접 한 개
를 들고 왔다. 익조는 마침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 하니, 노파는 대접을 씻어 물을 떠서 드리면서 말하기를,
"당신은 모르고 있습니다만 여기 사람들이 사실은 응원병을 청하러 간 것입니다.
당신의 위엄과 덕망이 애석하기 때문에 내가 어쩔 수 없이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익조는 황급히 돌아와서, 집안 사람들을 배에 태워보내며, 두만강을 따라 내려와서 적도(赤島)에서 만나자고 약
속하고, 자신은 손부인(孫夫人)과 함께 경흥(慶興) 뒷고개 마루턱에 이르러 바라보니, 간동(斡東) 벌판에 적(賊)
의 기병(騎兵)이 가득히 몰려오고 선봉 3백 여명은 벌써 거의 다가오고 있었다.
익조는 부인과 함께 말을 달려 바닷가에 가까이 이르렀다. 해안에서 적도(赤島)까지의 넓이가 6백 보(步)가 되는
데, 여기는 본래 조수가 없고 깊어서 건널 수가 없었으며 약속한 배도 아직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갑자기 물이 물러나 1백 보(步) 정도가 잦아지지 않았다. 익조는 부인과 함께 흰 말 한 필을
같이 타고 건너가고, 따르는 사람들이 다 건너자 물이 다시 들어왔다.
적(賊)들은 왔다가 건너지 못하고 가버렸다.
북방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이것은 하늘의 조화요, 사람의 능력으로 되지 않을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익조는 그곳에서 움을 파고 살았다. 그 터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간동(斡東) 사람들은 익조가 적도(赤島)에 있
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그곳으로 돌아왔다. 익조는 다시 덕원부(德源府)로 옮겨 살았다.
옛 안릉(安陵)ㆍ옛 덕릉(德陵) : 부(府)의 성(城) 남쪽 10리에 있다. 둥근 봉우리 둘이 있는데 남쪽은 안릉이요,
북쪽은 덕릉이었다. 태종 10년에 함흥부(咸興府)에 옮겨 모셨다. 지방 사람들은 이곳을 능들[陵坪]이라 한다.
적지고성(赤池古城) : 적지(赤池)에 있다. 위는 매우 위험하다.
굴포(掘浦)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포(浦)의 동쪽 5리쯤 되는 곳에 창고의 터가 있다. 전하는 말에, 고려가
북쪽을 정벌할 때에 물자를 바다로 수송해 오던 곳이라 한다.
옹이역(雍耳驛) : 옛터가 부의 서쪽 90리에 있다. 회동보(檜洞堡) :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진변보(鎭邊堡) : 서수라곶(西水羅串)에 있다. 서만원(徐萬院) : 옛터가 부의 서남쪽 50리에 있다.
판성동 고산성(板城洞古山城) : 부의 서쪽 51리에 있다. 돌로 쌓았다. 현재는 폐지되었다.
신증 아오지성(阿吾地城) : 부의 북쪽 55리에 있다. 두만강과의 거리가 5리다. 돌로 쌓았다. 둘레 2천 1백 척이다.
정덕(正德) 기사년에 여기에 보(堡)를 설치했다가 신사년에 옛 진(鎭)으로 환원하였다.
제영 성 아래에 한 줄기의 강물이 길게 흐르네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누런 구름은 국경에 가득하여 나그네의
근심을 자아내는데, 성 아래에 한 줄기의 강물 길게 흐르네. 구슬픈 오랑캐의 피리 소리 행여나 나그네 귓전을
스치지 말아다오, 소리마다 국경의 여행을 괴롭혀 주느니." 하였다.
봄 그늘 아득히 해변 하늘의 근심이로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봄 그늘 아득히 해변 하늘의 근심, 딱딱이
두들기는 소리에 밤도 지루하여라. 귀화하여 오는 먼 곳 사람이 잇달아 들어오니, 간 곳마다 술자리를 벌여 놓고
즐겁게 노는구나." 하였다.
오랑캐 땅의 모든 산은 나그네의 근심을 자아낸다 :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오랑캐 땅의 모든 산은 나그네의
근심을 자아내는데, 강물가에서 회포를 푸니 앞 선배에게 부끄럽구나. 아침에 일어나 지난밤의 꿈을 기억해 내니,
한강 남쪽에서 임금을 따라 놀았구나." 하였다.
신증 기다란 두만강이 국경의 산에 가로놓였다 : 이덕숭(李德崇)의 시에, "기다란 두만강이 국경의 산에 가로놓
였는데 나그네의 돌아갈 꿈은 찬란한 오색 구름 속이로다. 오랑캐의 지역에 바람이 맵다고 말하지 말라,
임금께서 주신 겹 갖옷[重?]은 추위도 무섭지 않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조산(造山) : 남쪽으로 60리이다. 해정(海汀) : 동남쪽으로 80리이다. 서수라(西水羅) : 남쪽으로 80리이다.
아오지(阿吾地) : 서쪽으로 30리이다. 무이(撫夷) : 남쪽으로 30리이다.
여구산(?邱山) : 남쪽으로 50리이다. 무안(撫安) : 서남쪽으로 60리이다. 웅이(雄耳) : 서남쪽으로 70리이다.
봉수 서봉(西峯) : 서남쪽으로 3리이다. 포항(浦項) : 남쪽으로 15리이다. 두리산(豆里山) : 남쪽으로 45리이다.
우암(牛巖) : 동남쪽으로 70리이다. ○ 처음 일으켰다.
창고 읍창(邑倉)ㆍ무안창 : 서쪽으로 50리이다. 해정창(海汀倉) : 동남쪽으로 70리이며 해변이다.
여구창 : 남쪽으로 65리이며 해변이다.
역참 혁폐(革廢) 옹이역(雍耳驛) : 서쪽으로 90리이다. 보발(步撥) 아오지참(阿吾地站)ㆍ관문참(官門站)ㆍ
무이참(撫夷站)ㆍ조산참(造山站)ㆍ서수라참(西水羅站) : 끝이다.
교량 동천교(東川橋)ㆍ차교(車橋)ㆍ홍조장교(洪槽場橋) : 모두 서남쪽으로 25리에 있다.
부령도호부 富寧都護府
동쪽은 바다가 83리, 남쪽은 경성(鏡城府) 경계가 62리, 서쪽은 야인(野人)이 거주하는 경계가 35리,
북쪽은 회령부(會寧府) 경계가 38리, 서울과의 거리는 1천 8백 1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경성군(鏡城郡)의 석막(石幕) 지역이다.
우리 왕조 세종(世宗) 13년에 동량(東良)은 북여진(北女眞)이 왕래하는 중요한 길목이라 하여, 처음으로 영북진
(寧北鎭)을 설치하고, 절제사가 판경성군사(判鏡城軍事)를 겸임하게 하였다.
16년에 진(鎭)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기고, 석막(石幕)의 옛 땅은 토관(土官)의 천호(千戶)가 이를 지키게
하였다. 31년에 부거현(富居縣)을 줄이고 그곳 백성의 세대를 석막으로 옮기고,
본현에서 굴포(堀浦)로부터 서쪽과 회령부(會寧府)에서 전괘현(錢掛峴)으로부터 서쪽과 회령부(會寧府)에서
전괘현(錢掛峴)으로부터 남쪽과 황절파(黃節坡)에서 북쪽 지방을 떼어 여기에 붙이고,
명칭을 부령이라 하고,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또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진관 보(堡) 2개소 : 무산(茂山)ㆍ옥련(玉蓮).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토관 경원부(慶源府)와 같음.
군명 석막(石幕)ㆍ부거(富居)ㆍ영산(寧山).
성씨 맹(孟)ㆍ김(金)ㆍ강(姜)ㆍ송(宋)ㆍ백(白)ㆍ권(權)ㆍ유(劉)ㆍ이(李)ㆍ신(申)ㆍ박(朴)ㆍ최(崔)ㆍ정(鄭)ㆍ
서(徐)ㆍ조(曹)ㆍ호(扈)ㆍ남궁(南宮)ㆍ장(張)ㆍ주(朱)ㆍ한(韓)ㆍ감(甘)ㆍ옹(邕)ㆍ배(裵)ㆍ강(康)ㆍ노(盧)ㆍ
유(兪)ㆍ오(吳)ㆍ채(蔡)ㆍ양(梁)ㆍ황(黃)ㆍ국(鞠)ㆍ염(廉)ㆍ설(薛)ㆍ신(辛)ㆍ유(庾)ㆍ곽(郭)ㆍ연(延)ㆍ조(趙)ㆍ
손(孫)ㆍ현(玄) : 모두 이주해 온 성씨이다. 동(童)ㆍ최(崔)ㆍ이(李)ㆍ김(金) : 모두 귀화한 성씨이다.
산천 두리산(豆里山) : 부의 동남쪽 12리에 있다.
석막산(石幕山) :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전하는 말에, 산 밑에 돌로 막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한다.
형제암(兄弟巖) : 부의 남쪽 19리에 있다. 두 바위가 마주 보고 솟아 있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청암산(靑巖山) : 부의 남쪽 90리에 있다. 산의 돌이 모두 푸르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회봉산(回峯山) : 부의 남쪽 60리에 있다. 쌍계산(雙溪山) : 부의 동쪽 29리에 있다.
청계산(淸溪山)이라고도 한다. 동랑산(冬郞山) : 부의 동쪽 67리에 있다. 사면에 바위가 험준하다.
운봉산(雲峯山) : 부의 동쪽 68리에 있다. 운룡산(雲龍山)이라고도 한다.
타락산(駝駱山) : 부의 동남쪽 84리에 있다.
복호봉(伏胡峯) : 부의 동쪽 64리에 있다. 바다 : 부의 동쪽 83리에 있다.
천곶[穿串] : 쌍개(雙介)라고도 한다. 부의 동쪽 58리에 있다. 산이 바다 가운데로 몇 리쯤 들어갔는데, 그 위가
높고 평평하며 바위에 전면으로 서있고, 그 밑에 있는 구멍이 문처럼 생겨서 고깃배가 드나들 수 있다.
대천(大川) : 부의 동쪽 30보(步)에 있다. 근원이 양영만동(梁永萬洞)에서 출발하여 무산보(茂山堡)를 경유하고,
남쪽으로 흘러 청암산(靑巖山) 밑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다갈동(多曷洞) : 부의 동쪽 13리에 있다.
자장담(資莊潭) : 부의 남쪽 61리에 있다. 물빛이 맑고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으며, 큰물이 지더라도 모래가
메꾸어지지 않는다. 전하는 말에는 용이 있었다고 한다.
토산 귀리[瞿麥]ㆍ삼[麻]ㆍ쇠[鐵] : 다갈동(多曷洞)에서 산출된다. 인삼ㆍ토표(土豹)ㆍ낭미(狼尾)ㆍ담비[貂]ㆍ
청서(靑鼠)ㆍ해달[海獺]ㆍ수달(水獺)ㆍ잣ㆍ오미자ㆍ대구[大口魚]ㆍ문어ㆍ방어(?魚)ㆍ송어(松魚)ㆍ황어(黃魚)ㆍ
삼치[麻魚]ㆍ은어(銀魚)ㆍ청어(靑魚)ㆍ연어ㆍ홍합ㆍ굴ㆍ미역[藿]ㆍ백합(白蛤)ㆍ게[蟹]ㆍ도미[?魚]ㆍ소금ㆍ
곤포(昆布)ㆍ다시마[塔士麻]ㆍ화피(樺皮)ㆍ고등어[古刀魚]ㆍ숭어[秀魚]ㆍ해삼(海蔘)ㆍ전복[鰒].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1백 39척, 높이 9척이다. 안에 우물 2개가 있다.
관방 옥련보(玉蓮堡) : 부의 남쪽 6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1천 33척, 높이 5척이다.
무산보(茂山堡) : 부의 북쪽 18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1천 7백 42척, 높이 11척이다.
○ 이상은 병마만호(兵馬萬戶) 각 1명이다.
신증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의 둘레가 1천 7백 64척, 높이 15척이다. 안에 우물 1개가 있다.
과거의 보(堡)는 토지가 척박하고 또 적(敵)의 경계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정덕(正德) 기사년에 이곳으로 옮겨
서 설치하였다.
신증 양영만동보(梁永萬洞堡) : 부의 북쪽 50리에 있다.
정덕(正德) 계유년에 돌로 쌓았다. 성의 둘레 6백 70척, 높이 15척이다. 권관(權管) 1명을 두었다.
봉수 무산보 동량동 봉수(茂山堡東良洞烽燧) :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남쪽은 부의 남봉(南峯),
북쪽은 양영만동에 호응한다.
양영만동 봉수(梁永萬洞烽燧) : 부의 북쪽 50리에 있다. 남쪽은 동량동, 북쪽은 회령(會寧)의 전괘현에 호응한
다.
남봉 봉수(南峯烽燧) : 부의 남쪽 7리에 있다. 남쪽은 허통동, 북쪽은 동량동에 호응한다.
허통동 봉수(虛通洞烽燧) : 부의 남쪽 27리에 있다. 남쪽은 옥련보의 북봉에, 북쪽은 남봉(南峯)에 호응한다.
옥련보 북봉 봉수(玉蓮堡北峯烽燧) : 부의 남쪽 50리에 있다. 남쪽은 최달동, 북쪽은 허통동에 호응한다.
최달동 봉수(崔達洞烽燧) : 부의 남쪽 78리에 있다. 북쪽은 옥련봉, 남쪽은 경성부의 강덕(姜德)에 호응한다.
신증 임수덕 봉수(林秀德烽燧) : 부의 남쪽 98리에 있다. 북쪽은 옥련(玉蓮)의 북봉(北峯)에, 남쪽은 경성(鏡城)
의 강가덕(姜加德)의 이순덕(李順德)에 호응한다. 정덕(正德) 갑술년에 최달동(崔達洞)을 폐지하고 이리로 옮
겼다.
무산보 남봉 봉수(茂山堡南峯烽燧) :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남쪽은 동량동, 북쪽은 우무개에 호응한다.
정덕(正德) 기사년에 양영만동을 폐지하고 이곳으로 옮겼다.
우무개 봉수(?無介烽燧) : 부의 북쪽 50리에 있다. 남쪽은 무산보(茂山堡)의 남봉(南峯), 북쪽은 풍산(?山)의
금세동(金世洞)에 호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부의 동쪽 1리에 있다. 신증 현재는 옮겨서 부의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석보역(石堡驛) : 부의 동쪽 1리에 있다.
회유역(懷綏驛) : 바로 옛 부거(富居)의 회유관(懷綏館)이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부령(富寧)으로 읍(邑)을 옮기고, 또 백성을 옮기다 보니, 산 밑에 남아 있는 성은
쓸쓸한 터로다. 여기가 옛적에는 오랑캐의 소굴이었는데, 현재는 지나는 곳마다 임금의 은혜를 입고 있도다."
하였다.
신증 무산원(茂山院)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불우 영수암(靈水庵)ㆍ은적사(隱寂寺) : 모두 쌍계산(雙溪山)에 있다.
귀석사(龜石寺) : 동랑산(冬郞山)에 있다. 보은사(報恩寺) : 운봉산(雲峯山)에 있다.
청룡사(靑龍寺) : 타락산(駝駱山)에 있다. 양수암(兩水庵) : 회봉산(回峯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부의 서쪽 3리에 있다.
여단(?壇) :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부거 폐현(富居廢縣) :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성의 둘레 2천 7백 31척, 높이 9척이다. 현재
는 절반이나 퇴락되었다. 군창(軍倉)이 있다. 본래 경성(鏡城)의 부가참(富家站)이었는데, 본조(本朝) 태조 7년
에 떼내어 경원부(慶源府)에 붙이고 이곳을 치소(治所)로 만들었다가, 세종 10년에 경원의 치소를 횟가[會叱家]
로 옮기고, 여기는 따로 현(縣)을 설치하고, 명칭을 부거(富居)라 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31년에 현을 줄이고 여기에 합쳤다. 현재의 회유역(懷綏驛)이 바로 그 자리였다.
인물 본조 맹득미(孟得美) : 활쏘는 재주가 뛰어났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이시애(李施愛)를 토벌
하였는데 종군했다가 전사하였다. 정헌대부 한성 부윤(正獻大夫漢城府尹)을 추증하였다.
제영 길이 오랑캐의 모래밭 하늘 끝간 데로 들어간다 : 박맹지(朴孟智)의 시에, "길이 오랑캐의 모래밭 하늘 끝
간 데로 들어가는데, 남쪽과 북쪽으로 분주히 말달리는 것 언제나 끝나려는고. 10년 동안 글과 칼을 배운 뜻을
가지고, 전쟁에 격문을 쓰고 남는 여가를 이용하여, 원유편(遠遊篇)을 더 지어보네." 하였다.
[비고]
토산 옷[漆]ㆍ소나무 : 칠보산(七寶山)에서 산출된다.
용수(龍鬚) : 한 줄기의 직선 길이는 수 척(尺)이며, 가늘기는 힘줄과 같고, 견고하기는 뼈와 같으며, 붓을 꽂는
통으로 사용한다. 해착어(海錯魚).
누정 통군정(統軍亭)ㆍ백남루(白南樓) : 모두 부내(府內)에 있다. 팔각정(八角亭).
방면 석막(石幕) : 부내(府內)로부터 남쪽으로 끝이 60리이다.
청암(靑巖) : 남쪽으로 90리인데, 바다에 이르렀다. 상무산(上茂山) : 서북쪽으로 1백여 리이다.
하무산(下茂山) : 부내(府內)로부터 동쪽으로 30리이고 북쪽으로 30리이다.
허수라(虛修羅) : 서쪽으로 30리이다. 연천(連川) : 동남쪽으로 70리이다. 동서(東西) : 동쪽으로 60리이다.
판장(板長) : 동쪽으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50리이다.
동삼리(東三里) : 동쪽으로 70리이다. 위는 모두 끝이 경계이다.
성지 부거현성(富居縣城) : 둘레가 2천 7백 31척이다.
○ 현의 서쪽 산에는 옛 무덤이 만 여 개가 있고 모두 석곽(石槨)인데, 어느 시기의 것인 지 알 수 없다.
진보 폐무산진(廢茂山鎭) : 남쪽으로 50리이다. 숙종 36년에 옥련폐보(玉蓮廢堡)로 옮겨 설치하였는데,
성의 둘레는 2천 7백 64척이고, 문(門)이 2개, 우물이 하나 있다.
○ 병마만호(兵馬萬戶)가 1명이다.
폐무산보(廢茂山堡) : 서북쪽으로 45리이다. 중종(中宗) 4년에 무산보(茂山堡)로 옮겼는데 옛 보(堡)는 땅이
기름지지 않고 도적이 일어나 경계가 너무 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성의 둘레는 1천 7백 64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숙종조에 옥련폐보(玉蓮廢堡)에 옮겨 설치하였다. 위에 보인다.
봉수 칠전산(漆田山) : 남쪽으로 45리이다. 구정판(仇正阪) : 남쪽으로 25리이다.
흑모로(黑毛老) : 북쪽으로 25리인데, 오른쪽은 원봉(元烽)이다.
노봉(老峯) : 폐무산진(廢茂山鎭) 서쪽이다.
창고 읍창(邑倉)ㆍ석창(石倉) : 남쪽으로 50리이다. 청창(靑倉) : 65리이다. 연창(連倉) : 동쪽으로 55리이다.
고창(古倉) : 동쪽으로 60리이다. 포창(浦倉) : 동쪽으로 70리이다. 판창(板倉) : 동쪽으로 60리이다.
상창(上倉) : 북쪽으로 30리이다. 무수창(舞袖倉) : 서북쪽으로 50리이다. 천창(泉倉) : 서남쪽으로 40리이다.
역참 장항참(獐項站)ㆍ관문참(官門站)ㆍ허고원참(虛古院站)ㆍ폐무산참(廢茂山站).
교량 허통교(虛通橋) : 남쪽으로 15리이다. 사정교(射亭橋) : 남쪽으로 5리이다. 남교(南橋) : 남문 밖이다.
석모노교(石毛老橋) : 북쪽으로 5리이다.
고무산교(古茂山橋) : 북쪽으로 17리인데 위는 남북으로 큰 길에 통한다.
사원 숭렬서원(崇烈書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