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 면속구(德源免屬區)
함경북도의 원산시, 안변군, 덕원군, 고원면, 문천군 등을 관할 구역으로 하던 면속 대수도원구(abbatia nullis, 또는 territorialis). 1940년 1월 13일, 기존의 원산 대목구(元山代牧區)가 함흥 대목구(咸興代牧區)와 덕원 면속구로 분리됨으로써 설정되었으며, 1949년 공산당에 의해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체포되면서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역대 교구장] 초대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上院) 주교(1940. 1∼1950. 1), 2대 교구장 서리 디모테오 베테를리(Timotheus Bitterli, 李聖道) 몬시뇰(1952. 5∼1980. 10), 3대 교구장 서리 이동호(李東鎬, 블라치도) 아빠스(1981, 5∼ 2006.11). 4대 교구장 서리 이형우(시몬 베드로)아빠스(?∼?)
[원산 대목구의 설정] 1909년 2월 25일 한국에 진출한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Congregation of St. Ottilien O.S.B, 芬道會) 즉 ‘포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는 그 해 말 서울 백동(白洞, 현 惠化洞)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실업학교인 숭공학교(崇工學校)와 사범 학교인 숭신학교(崇信學校)를 설립하는 등 의욕적인 출발을 하였다.
그 결과 1913년 5월 15일에는 이 수도원이 대수도원(大修道院, abbatia)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사우어 원장이 대원장(abbas)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울 대수도원은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은 뒤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전후의 조국의 독일에서 큰 원조를 가대할 수 없었고 기존에 해오던 목공·양조·철공·양봉·축산만으로는 미래의 터전을 닦기에 미흡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사우어 대원장을 비롯한 모든 신부·수사들이 새로운 활동 분야로 원한 것은 ‘본당 사목’이었다. 그
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의 반대로 서울 지역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짐에 따라 새 포교지로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되었고, 사우어 대원장은 1919년 무렵부터 이 문제를 가지고 뮈텔 주교와 협의한 끝에 함경도 지역을 택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협의 결과는 즉시 교황청에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920년 8월 5일, 함경도와 북간도(北間島), 의란(依蘭) 지역이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원산 대목구’로 설정됨과 동시에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회에 위임되었으며, 사우어 대원장은 8월 25일 그 초대 대목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베네딕도회에서 인수하게 된 지역에는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사목해 오던 5개의 본당이 있었으며, 신자수는 약7,500명이었다.
물론 서울 수도원을 곧 그곳으로 이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사우어 주교는 먼저 1921년 5월부터 본당을 인수하고 수도원 이전 계획을 수립하여 1922년 원산 이웃의 덕원(덕원군 北城面 於雲里)에 새 부지를 매입하였다.
수도원 건물은 1927년 10월에서야 겨우 1층만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시일을 늦출 수 없었으므로 이전 작업을 시작하였고, 그 해 11월 17에는 완전히 이전을 마침으로써 마침내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베네딕도회에서는 본당 설립에 노력하여 1927년까지 함경도 지역에 4개 본당을, 간도 지역에 5개 본당을 신설하였고, 원산 본당의 해성학교(海星學校)을 비롯하여 각처에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25년 11월에는 ‘툿칭의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즉 분도 수녀회)를 원산으로 초청하는 등 여러 가지로 성장을 위해 기틀을 다져 나갔다.
[설정 과정] 1927년에 이르러 원산 대목구는 14개 본당에 총 신자수 14,005명, 성직자 28명, 수도자 50명, 학교수 40개교, 시약소 4개소를 헤아리게 되었고, 의료·농공·출판 활동 등에서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 무렵 사우어 주교는 원산 대목구에 속해 있는 지역 중에서 중국 땅에 속해 있던 간도와 의란 지역의 정치적 위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본당과 신자수의 증가를 계기로 독립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의견을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이때 교황청에서는 먼저 1928년 7월 3일자로 원산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흑룡성의 의란 지역을 독립 포교지(依蘭布敎地)로 설정함과 동시에 우선은 사우어 주교 관할 아래 두었다.
이어 1928년 7월 19일, 간도 지역이 연길 지목구(延吉知牧區)로 설정되었고, 그 초대 지목으로 테오도르 브레허(T. Berher, 白化東) 신부가 임명되었다.
교구 분할 이후, 원산 대목구에서 영흥·고원·북청·흥남·나남·나진 본당 등을 신설함으로써 본당이 모두 12개에 이르게 되었다.
또 신학교에서는 1929년 9월부터 대신학교 교육을 시작하였고, 1935년 2월 10일에는 당국으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고 5월 14일 개교식을 거행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최초로 2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한편 원산 수녀원에서는 각 처에 분원을 설립하고, 시약소 사업과 교육 활동을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원산 대목구의 교세는 1929년 6개 본당에 신자수 2,922명이던 것이 1940년에는 12개 본당에 신자수 11,064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교황청에서는 비오 11세의 칙서를 통해 1940년 1월 13일자로 원산 대목구 대신 ‘덕원 면속구’와 ‘함흥 대목구’를 새로 설정하는 동시에 사우어 주교를 덕원 면속구장 겸 함흥 대목구의 관리자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덕원 면속구는 원산시를 포함하여 안변군·덕원군·고원군·문천면을 관할하는 독립 수도원(abbatia nullius) 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기존의 원산·덕원·고산·고원 본당 등 4개 본당이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함흥 대목구에서는 회령·청진·함흥·영흥·북청·나남·흥남 본당 등 7개 본당을 관할하게 되었다.
[수난과 청산] 1940년 5월 13일, 수도원 성당 내에서 사우어 주교 등 여러 성직자,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덕원 면속구 설정식과 사우어 주교의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써 사우어 주교는 교회법적으로 자치 수도원구의 정식 초대 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함경도 교회의 상황은 실제로 이전과 달리진 것이 없었고, 모든 본당은 그대로 성 베네딕도회에서 관할하였다.
또 일제 말기의 수난과 공산 정권의 수립, 6·25 동란 등으로 인해 함흥 대목구에 한국인 교구장이 임명될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되지 않았다.
이후 덕원 면속구의 교세 현황은 1944년에 한 번 나타나는데, 본당수는 설정 당시와 마찬가지로 4개였고, 공소 35개소, 성직자 23명, 수도자 73명, 신자 5,370명이었다.
덕원 면속구 설정 당시에 일제 총독부는 이미 한국인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 수탈은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더 심해지게 되었고, 미국과 아일랜드 선교사들은 체포·구금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덕원의 베네딕도회 식구들은 일단 무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과 우호 관계에 있던 독일 출신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총독부에서는 점차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도 여행을 제한하고 교구 밖으로의 이주를 금하였다.
또 거주를 옮길 때마다 감시를 하고 3개월마다 ‘거주 신청 갱신’을 하도록 했으며, 전교 활동을 하는 경우에도 경찰서에 신고하고 여행증을 받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덕원 수도원에서 열리는 월례 회합은 방해를 받게 되었고 단지 신부들의 연례 피정만이 허락되었다.
이후 전쟁이 계속되면서 신사 참배에 대한 강요가 심해졌으며, 1942년 2월에는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가 폐교되면서 그 신학생들이 모두 정식 인가를 받은 덕원 신학교로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일제는 1942년 10월부터 전쟁 물자에 필요한 고철 및 금속제 물품 수집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다행히 덕원 수도원과 고산 성당의 종은 무사하였다.
해방임 됨과 동시에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공산당을 조직하고 공산화에 착수하였다. 이어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하는 동시에 1947년 2월 22일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설립하고 토지 개혁과 산업 국유화 등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당시까지 북한에서는 종교인들이 많아서 공산당이 뿌리내리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공산화의 정책에는 종교 탄압이 포함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정책은 다른 경우처럼 일시에 단행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실행되었다.
덕원의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도 1946년의 토지 개혁령에 따라 건물과 대지를 제외한 모든 토지가 몰수되었다.
또 선교사와 신자들은 ‘반종교(反宗敎) 투쟁’의 대상이 되어 억압을 받게 되었고, 1948년 9월에는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청산’(淸算)이란 새로운 탄압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선 1948년 12월 1일, 수도원의 경리 책임자인 엔크(Dagobert Enk) 신부가 포도주를 불법으로 제조하고 탈세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이어 1949년 3월 24일에는 원산 해성학교의 오병주(吳秉珠, 요셉) 부교장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4월 28일에는 덕원 인쇄소의 책임자인 피셔(Ludwig Fischer, 裵) 수사가 ‘불온물 인쇄’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수난의 서곡에 불과하였다.
1949년 5월 9일 밤, 사우어 주교와 로트(Lucius Roth, 洪泰華) 원장 신부, 쉴라이허(Arnulf Schleicher, 安世明) 부원장 신부, 신학교 교수인 클링사이즈(Rupert Klingeis, 吉世東) 신부 등이 체포되었고, 5월 11일 밤에는 신학교 교장이 로머(Anselm Romer, 盧炳朝) 신부 등 독일인 신부 8명, 수사 22명, 한국인 김치호(金致鎬)·김종수(金宗洙)·김이식(金利植)·최병권(崔炳權) 신부 등을 체포했다.
그리고 한국인 수사 26명과 신학생 73명을 합친 99명을 내쫓고 수도원과 신학교를 몰수하였다.
이로써 22년 간 함경도 지역 교회의 중심 역할을 해오던 덕원 수도원은 폐쇄되었고,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원산 수녀원도 5월 11일에 폐쇄되었으며, 원산·고산·고원·덕원 본당의 성직자들도 모두 체포되거나 추방되면서 덕원 면속구 자체가 청산되기에 이르렀다.
[희생자의 탄생과 재건의 노력] 청산 후 덕원 면속구의 모든 한국인 수도자들과 신학생들은 친척집으로 피신하거나 남하하였다.
한편 사우어 주교를 비롯하여 모든 독일인 성직자·수도자들 67명은 평양과 함흥 등의 인민 교화소(人民敎化所)에 수감되었다가 옥사독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6·25동란과 함께 만포 수용소(滿浦收容所), 관문리 수용소, 옥사독 수용소로 이송되는 ‘죽음의 행진’을 겪으면서 만 4년 동안 사우어 주교를 비롯하여 25명이 희생되었고, 나머지 42명의 생존자만이 1954년 1월 8일에 북한 땅을 떠나 독일로 송환되었다.
이에 앞서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는 비테를리 신부를 한국의 성 베네딕도 수도회 공동체이 새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수도 가족들이 덕원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그곳에 가서 수도원을 재건할 책임을 갖고 있었다.
이에 비테를리 신부는 1952년 1월 25일 노규채(魯奎彩, 아우구스티노) 신부와 함께 남하한 한국인 수사들은 최영호(崔榮浩, 비안네) 신부와 함께 갖은 고생 끝에 부산으로 갔고, 1950년 12월 9일에는 원산에서 피난민 수송선을 타고 내려온 이북의 수사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들은 부산 중앙 성당에 방을 하나 얻어 생활하였는데, 당시 수사들의 숫자가 16명인 데다가 수사 지원자, 연길·함흥 대목구의 신학생들까지 합쳐지게 되었으므로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비테를리 신부는 입국 즉시 한국인 수사들과 만난 뒤 새로운 거처를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대구 대목구장 최덕홍(崔德弘, 요한) 주교의 허락을 얻어 왜관(倭館)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자 교황청에서는 1952년 베테를리 신부를 덕원 면속구와 함흥 대목구의 교구장 서리로 임명하였으며, 1954년 4월 9일에는 연길 대목구의 교구장 서리직도 그에게 위임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묜시뇰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왜관에 정착한 성 베네딕도 수도회는 이후 수도원 건립에 착수하였다. 동시에 대구교구의 최덕홍 주교는 1953년 비테를리 묜시뇰을 왜관 감목 대리로 임명하였고, 왜관·낙산·성주의 3개 본당을 베네딕도회에 위임하였다.
이어 1955년 7월 3일에는 수도원이 완공되어 낙성식과 강복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본국으로 송환되었던 독일 선교사중 담(Fabin Damm, 卓世榮) 신부 등 신부 3명과 수사 1명이 다시 한국에 입국하였다.
또 1959년에는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고난을 겪었던 퀘겔만(Wilibald Kuglmann, 孔榮道) 신부도 다시 한국으로 왔다.
1964년 12월 7일,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은 대수도원으로 승격되었고, 4월 28일에는 오도하스(Odo Haas, 吳) 신부가 왜관 대수도원의 초대 대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71년 4월 15일 이동호 신부가 제2대 왜관 대수도원장으로 피선되었으며, 1981년 5월 22일 덕원 면속구 및 함흥 대목구장 서리를 맡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출처:[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