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湖동양학-24]
붓끝 모양 산봉우리 주위엔 '큰 문장' 수두룩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다'.
나의 변함없는 화두다. 인물은 과연 땅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받아 태어나는 것인가. 아파트에
서는 인물이 태어날 수 없는 것인가. 지령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20년 가까이 고민하고
있지만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다.
문자와 먹물에 집착하다 보니 영안(靈眼)이 열리지 않아 '지령'을 시원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
이다. 그렇지만 간접적인 단서는 포착할 수 있었다.
그 단서란 문필봉이 보이는 곳에서 학자들이 많이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문필봉은 붓 끝의 모
습처럼 생긴 산봉우리를 가리킨다. 흔히 삼각형처럼 뾰쪽한 모양을 하고 있다. 문필봉이 바라
다 보이는 동네에서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학자와 문필가들이 많이 배출됐다. 대표적인
동네 세 군데를 꼽는다면 경남 산청의 필봉산(筆峰山) 주변과, 전북 임실의 삼계면 (三溪面),
경북 영양의 주실(舟室) 마을이다.
산청에는 아주 잘 생긴 문필봉이 포진하고 있다. 이름을 아예 '필봉산'으로 붙였을 정도다. 나
는 항상 함양.산청을 지날 때 마다 멀리서 필봉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가슴이 설렌다. 차를 세
워놓고 한참 동안 감상하는 버릇이 있다. 예부터 함양.산청 일대에서는 이 필봉산이 붓 끝처럼
보이는 지점에다가 집을 지으려고 경쟁이 심했다.
필봉산이 바라다 보여야 인물이 배출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를 보면 필봉산 주변
에서 팔선생(八先生)이 배출됐다.
일두(一) 정여창(鄭汝昌.1450~1504),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
구졸암(九拙庵) 양희(梁喜.1515~1581),
개암(介庵) 강익(姜翼.1523~1567),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1449~1498),
뇌계(雷溪) 유호인(兪好仁.1445~1494),
청연(靑蓮) 이후백(李後白.1520~1578),
춘당(春塘) 박맹지(朴孟智.1426~1492).
이 여덟 명의 학자가 함양 일대에서 팔선생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춘당(春塘) 박맹지(朴孟智.1426~1492).
뇌계(雷溪) 유호인(兪好仁.1445~1494),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1449~1498),
일두(一) 정여창(鄭汝昌.1450~1504),
구졸암(九拙庵) 양희(梁喜.1515~1581),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
청연(靑蓮) 이후백(李後白.1520~1578),
개암(介庵) 강익(姜翼.1523~1567),*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
청파(靑坡) 이륙(李陸:1438~98)*
*춘당(春塘) 박맹지(朴孟智,1426~1492)
일로당(逸老堂) 양관(梁灌)[1437~1507]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1449~1498]
금재(琴齋) 강한(姜漢)[1454~?]
구졸암(九拙菴) 양희(梁喜)[1515~1580]
우계(愚溪) 하맹보(河孟寶)[1531~1593]*
그런가 하면 필봉산이 잘 보이는 지점인 산청군 생초면에서도 근래에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
두희를 비롯해 여러 명의 판.검사가 배출됐다. 동양철학의 대가이면서 풍수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던 배종호 교수도 역시 필봉산이 잘 바라다 보이는 산청군 금서면 출신이다. 지금도 함양.
산청 일대에서 필봉산 바라다 보이는 집터는 시세의 2~3배다.
전북 임실군 삼계면에서는 박사가 지금까지 1백3명이 나왔다. 요즘 박사 시세가 많이 떨어지기
는 했지만, 1개 면에서 1백3명의 박사 배출은 이색적인 기록이다. 삼계면은 궁벽진 산골이면서
도 산세가 빼어난 곳이었다.
삼계(三溪)라는 명칭 자체가 '3개의 냇물'이 합쳐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냇물이 합쳐지는
곳은 기운이 모이는 곳이므로 명당으로 간주한다. 조선 초기에 이름난 사대부 집안들이 산수가
빼어난 이곳으로 낙남(落南)하여 터를 잡고 살았다. 삼계면 일대에 수백년간 살고 있는 경주 김
씨, 풍천 노씨, 청주 한씨, 경주 정씨 등이 그런 집안들인데, 1백3명의 박사 가운데 70~80%는
이 집안의 후손들이다.
예를 들면 서울대 교수로 있다가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한상진 박사도 청주 한씨로서 삼계
면 어은리 출신이다. 6 ~ 7년 전에 필자가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삼계면 어은리에 들린
적이 있다. 동네 정면에 문필봉이 아주 힘있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 문필봉이 잘 보이는 지점을 역추적해 찾아 들어가다 보니 나타난 동네가 삼계면 어은리의
청주 한씨 집성촌이었던 것이다. 동네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문필봉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의
집 대문을 열고 '누구 집이냐?'고 대뜸 물어보았다. 노인네 이야기가 '상진이네(한상진) 집이
다!'는 대답이었다. 어은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문필봉은 남원 지리산 자락에서 내려온 천황봉
(天皇峰) 이었다. 삼계면에서 쳐다보면 천황봉이 문필봉으로 보인다.
경북 영양의 주실마을은 일월산 밑의 첩첩산중이다. 한양 조씨들 집성촌으로서, 청록파 조지훈
시인의 고향이다. 50~60 가구가 사는 이 산골마을에서 박사가 16명이 나왔다. 서울대 조동일
교수, 독립운동사 전공인 국민대 조동걸 교수, 성균관대 부총장을 지낸 조동원 교수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유명 교수를 많이 배출한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 정면 4백m 전방쯤에는 선이 분명한 문필봉이 자리잡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이 문필봉
정기를 받아 인물이 많이 나왔다고 믿고 있다. 1백% 수긍하기도 어렵지만, 그게 아니라고 부
정하기도 어렵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문필봉이 어디 있는지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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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陽郡誌 [誌] 碑板
朴孟智碑在郡南南村 碑文曰宣德元年丙午生於大樹村第公有至性穎秀不群文行大成名譽日播早捷正統生員進士繼擢景泰甲戍文科明年乙亥世祖受禪公以成均學諭例參原從雖黽勉從仕不樂進取出爲北評事三嘉縣監入拜承文院校理而久於其職固非素志遂引疚避居于鄕而灌水爲池 雜植花卉號春塘世祖末屢以顯仕徵終不起弘治五年壬子正月十日終于正寢享年六十七葬于郡南南村琴洞壬丙之原公生時制行家庭孝友出天親喪廬墓三年曲盡誠禮晨夕省墓未嘗一日少懈服闋謝絶榮利全意於性理之學與兪▼(氵+雷)溪李靑坡爲道義之交講磨切磋之際詩▼(亻+卞)酬唱之間二公必以先生稱一代章甫皆師宗焉常在北幕有詩曰
路入胡沙天盡頭
驅馳南北幾時休
空將十載桑蓬志
草檄餘閑賦遠遊
府人懸板客舍次姜相國孟卿壽瑞詩
年當庚午喪先人
屈指如今二十春
日者拆看姜相贊
吟餘不覺淚痕新
此則翫世不平之懷終心孺慕之情發於吟詠之間者也靑坡集中有贈春塘曰
千里相逢按酒兵
滿溪微雨聽無聲
刀鳴縷膾寒飛雪
匙滑絲蓴細煮羹
三峽倒 流詞入妙
五湖幽趣眼送靑
高山更有知音者
彈盡年來百不平
▼(氵+雷)溪集中有奉寄春塘先生云
明月掛銅鉦
曉霧忽晴朗
須臾群動息
村意頗戃怳
先生戴烏巾
晏立春塘上
隨意理花田
倦來還住杖
群兒列眼前
讀書聲更敞
是間如有情
萬事以自廣
間邀克已來
詩酒坐浩蕩
有時叱面旋
狂習更疎放
山齋白日閑
紅塵不顧往
靑鶴捿何方
頭流指諸掌
共結雲烟盟
桃花賭幽賞
英雄此可樂
愼勿歌慨慷
一時名流推重之意形諸文字文章德行大鳴于世而時事大變中懷慷慨志切捿遯辭榮避勢終老田園而位不滿其德 則出處大節已可槪見二公立言垂範載在國乘矜式後人則數篇詩律亦一惇史也享于龜川書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