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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를 비처럼
호세아 10:9-12 2023/10/29 성령강림 후 22주
10:9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그러니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
10:10 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리니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리라
10:11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주인공은 호세아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 북이스라엘서 활동했던 하나님의 예언자입니다.
예언자
히브리어로 ‘나비’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또 예언자를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하나님이 행하는 일 구원과 심판에) 눈을 뜬 사람’이지요.
그래서 예언자를 다른 말은 '선견자'(seer)라고도 부릅니다.
선견자 그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셈법은 ‘일 더하기 일은 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만큼 믿고 신뢰하는가에 따라, ‘일 더하기 일이 삼’이 될 수도 있고, '십'이 될 수도 있고, ‘백’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긴 사람들이 바로 ‘나비’라고 불리는 예언자들이었습니다.
또(세 번째로) 예언자를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기에 좀 더 설명을 붙이자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사시대 사무엘을 ‘나비 사무엘’, 그리고 왕정시대 다윗을 ‘나비 다윗’ 이렇게 부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말로 다시 번역하면,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 ‘하나님의 사람 다윗’ 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사람 예언자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부유했을까요, 가난했을까요?
사람들로부터 환대를 받았을 까요, 멸시를 받았을까요?
후자였습니다.
가난했고,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하나,
그들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서 전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권력자들이 듣기 좋은 아첨이나 가난한 이들을 호리는 간사함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오직 하나,
‘회개하라’
‘죄악에서 돌이키라’
‘악인의 꾀를 따르지 말고, 죄인의 길에 서지 말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라’는 말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그들의 삶은 늘 가난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예언자가 짊어 지어야할 자기 십자가였습니다.
가난하게 살수 있는 능력이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마태복음 3장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마지막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의 가난한 삶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새)마3: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3:2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였다.
3:3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3:4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벌)꿀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굶주림이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예언자들의 삶이란?
인간적으로 볼 때, 불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 예언자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을 가난하다 불우하다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요?
‘나비’ ‘예언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소명’이자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의 주인공 호세아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호세아’
‘구원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세야 → 예수아 → 예수스 → 예수’ 이렇게 발음이 바뀌게 되는데, 모두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호세아’라는 이름 앞에 여호와의 약자인 ‘여’자를 붙이면, ‘여호수아’가 됩니다.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만큼 좋은 이름이 ‘호세아’입니다.
자, 그렇다면 ‘호세아’ 속에는 그의 이름의 뜻처럼 어떤 구원의 역사가 담겨져 있는 지, 오늘 본문 속으로 한 걸은 더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호세야가 예언자로 활동하던 시대 북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역사의 운을 타고 난 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멈추고, 북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안정과 경제적 호황을 누렸던 시기에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경제의 불평등이었습니다.
풍요로운 경제의 혜택이 모든 백성들에게 골고를 돌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스라엘 땅에 ‘째다카’ ‘하나님의 공의’를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공의가 사라지고 불의가 판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은 또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였습니다.
남 유다 갈라지자 북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을 좀 더 잘 섬기기 위해 성전 두 개를 짓습니다. 남쪽 예루살렘성전보다 더 크고 화려한 성전 두 개를 짓게 되는데, 그것이 왕립 성소의 지위를 가진 사마리아 성전과 벧엗 성전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봐 줄만했습니다.
문제는 탐심으로 가득한 부자들과 권력자들, 특히 여로보암 2세가 아주 엉뚱한 짓을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건축한 사마리아 성전과 벧엗 성전에 풍요의 신 ‘바알’과 다산의 신 ‘아세라’를 두고 섬기게 된 것입니다. 명백한 우상숭배였지요.
그러자 하나님은 ‘나비’ ‘하나님의 사람’ 호세아를 통하여 그들의 악함을 이렇게 꾸짖습니다.
호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여기에 보면,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질의 풍요와 맞바꾼 죄악,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 번째 죄악, 무엇입니까?
진실도 없고
이 땅에 무엇보다도 있어야할 것이 진실입니다.
하지만 있어야할 진리가 이스라엘 땅에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물질의 탐욕으로 바꾼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무엇입니까?
인애도 없고
‘인애’ 다시 말해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의 말씀이 역전이 되는 어처구지 없는 현실이 벌어집니다.
(새)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친절이 사라짐)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교만함이 가득)
13:5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이웃에 대해 무례함)
13: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불의가 판을 침)
13: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의리와 신뢰가 없음)
세 번째 ‘나비’ ‘하나님의 사람’ 호세아를 통하여 고발한 이스라엘의 죄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물질 숭배, 우상 숭배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것이 참된 예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0:10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죄악이었습니다.
‘두 가지’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는 ‘세 가지의 죄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죄악의 뿌리, 어디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오늘 본문 9절에 따르면,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였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호10:9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그러니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
‘기브아 시대’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그 때부터 이스라엘의 죄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실까요?
우리가 ‘기브아 시대’를 엿보기 위해서는 사사기 19장 이하를 참고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절, 에브라임 산골에 레위 사람 하나가 살고 있었습니다.
땅을 소유할 수 없는 레위사람, 이들을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예언자가 있기 전, 예언자의 몫을 담당했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레위 사람이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첩을 맞아들입니다.
삿19:1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때에, 한 레위 남자가 에브라임의 산골에 들어가서 살고 있었다. 그는 유다 땅의 베들레헴에서 한 여자를 첩으로 데려왔다.
19:2 그러나 무슨 일로 화가 난 그 여자는, 그를 떠나 유다 땅의 베들레헴에 있는 자기 친정 집으로 돌아가서, 넉 달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다.
19:3 그래서 그 남편은 그 여자의 마음을 달래서 데려오려고, 자기의 종과 함께 나귀 두 마리를 끌어내어 길을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집 나간 첩을 잘 달래서 다시 자기 집이 있는 에브라임 산골로 데려오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거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아’ 한 노인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됩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죄악이 시작되는 아주 큰 문제가 터집니다.
저녁 무렵,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찾아오더니 다짜고짜 아주 무례한 요구를 합니다.
(새)삿19:22 그들이 한참 즐겁게 쉬고 있을 때에, 그 성읍의 불량한 사내들이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싸고, 문을 두드리며, 집 주인인 노인에게 소리질렀다. "노인의 집에 들어온 그 남자를 끌어내시오. 우리가 그 사람하고 관계를 좀 해야겠소."
19:23 그러자 주인 노인이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보시오, 젊은이들, 제발 이러지 마시오. 이 사람은 우리 집에 온 손님이니, 그에게 악한 일을 하지 마시오. 제발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
19:24 여기 처녀인 내 딸과 그 사람의 첩을 내가 끌어내다 줄 터이니, 그들을 데리고 가서 당신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이 남자에게만은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
19:25 그러나 그 불량배들은 노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레위 사람은 자기 첩을 밖으로 내보내어 그 남자들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 남자들이 밤새도록 그 여자를 윤간하여 욕보인 뒤에, 새벽에 동이 틀 때에야 놓아 주었다.
결국 불량배에게 밤새도록 윤간을 당한 레위 사람의 첩은 노인의 집 앞에서 죽은 채로 발견이 됩니다.
더 끔찍한 것은 첩의 남편인 레위 사람이 억울하게 죽은 첩의 시신을 집에 돌아오자마자 12덩이로 토막 내서 이스라엘의 온 지역으로 하나씩 보내는 잔악성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삿19:27 그 여자의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서, 그 집의 문을 열고 떠나려고 나와 보니, 자기 첩인 그 여자가 두 팔로 문지방을 잡고 문간에 쓰러져 있었다.
19:28 일어나서 같이 가자고 말하였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 여자의 주검을 나귀에 싣고, 길을 떠나 자기 고장으로 갔다.
19:29 집에 들어서자마자 칼을 가져다가, 첩의 주검을 열두 토막을 내고, 이스라엘 온 지역으로 그것을 보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북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시면서 ‘기브아 시대’ 일어났던 범죄를 다시 언급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풍요에 취한 북 이스라엘이 ‘기브아 시대’와 마찬가지로 죄의 잔인함과 죄의 잔악성을 지금까지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평화와 풍요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브아 시대 행했던 죄의 잔인함과 죄의 잔악성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에 결론입니다.
죄의 잔인함과 죄의 잔악성을 지금 당장 멈추고, 너희 자신을 위하여 ‘쩨다카’ 하나님의 공의를 심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닌 하나님의 인애를 거두라는 것이었습니다.
호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또 하나, 묵은 땅을 기경하듯 마음의 밭을 기경하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땅에 없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잃어버린 공의를 비처럼 내려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다시 10장 12절입니다.
호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말씀을 마칩니다.
죄악만 일삼은 이스라엘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더럽다‘, ‘못났다‘하며 버리지 않고 언제나 그렇듯 기회를 또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11장 3-4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새)호11:3 나는 에브라임(죄악만 일삼은 북 이스라엘 백성)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11:4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그러니 신앙의 걸음마를 떼게 하시고, 품에 길러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 사랑의 등에 업히시고, 생명의 젖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쩨다카 하나님의 공의가 비처럼 내려와 이 땅(진실, 인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