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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년(명종 9)~1637년(인조 15)
張顯光 1554 1637 仁同 德晦 旅軒 文康
인동(仁同)
동락서원(東洛書院) 을미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장현광(張顯光)
선산(善山)
금오서원(金烏書院) 융경 임신년에 세웠고, 만력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길재(吉再)ㆍ김종직(金宗直)ㆍ정붕(鄭鵬)ㆍ박영(朴英)ㆍ장현광(張顯光)
□□영당(□□影堂) 숭정 임오년(1642,인조20)에 세웠다. : 장현광(張顯光
*여헌영당(旅軒影堂) (1642) 조선 인조(仁祖) 때 경상도 선산(善山)에 건립한 영당(影堂).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제향함.
성주(星州)
천곡서원(川谷書院) 가정 무오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이천(程伊川)ㆍ주자(朱子)ㆍ김굉필(金宏弼)ㆍ정구(鄭逑)ㆍ장현광(張顯光)
영천(永川)
임고서원(臨皐書院) 가정 을묘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장현광(張顯光)
입암서원(立巖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장현광(張顯光)ㆍ정사진(鄭四震) 호는 수암(守庵), 세마(洗馬)를 지냈다.
의성(義城)
빙계서원(氷溪書院) 가정(嘉靖) 정사년에 세웠으며 선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김안국(金安國)ㆍ이언적(李彦迪)ㆍ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ㆍ장현광(張顯光)
청송(靑松)
송학서원(松鶴書院) 계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ㆍ장현광(張顯光)
*張顯光 1554~1637
간송집 연보 / 간송 선생 연보〔澗松先生年譜〕 [미상(未詳)]
3년(1623) 인조대왕 1년 계해 선생 39세
○ 4월. 삼년상을 마쳤다. ○ 상로암(霜露庵)이 완성되었다. - 아호(鵝湖)의 선영 아래에 있다. - 〈박황암문집서〉와 〈가훈발〉을 썼다.
○ 겨울. 선산(善山)에 성묘하고, 부지암(不知巖)에서 여헌 선생을 배알하였다. - 선생이 그때 두풍(頭風)을 앓고 있어서 여헌이 참포(黲布)로 머리를 싸매주었는데, 그 참포는 전날 여헌이 상중에 입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
[주-D027] 부지암(不知巖) : 장현광이 강학하던 곳이다. 1610년(광해군2)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였다가 1655(효종6)년에 부지암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장현광의 위패를 모셨다. 1676년(숙종2)에 동락서원(東洛書院)으로 사액을 받았다.
四未軒文集卷之八 / 上樑文 / 不知巖精舍重建上樑文
道之將廢者天耶。詎堪輿情之久鬱。事若有待乎時也。聿覩堂搆之重新。不貳不虞。是斷是度。恭惟我旅軒先生。學貫性命。化洽木鍾。笥笈陪從之人。難容胡文定庠舍。杖屨逍遙之地。仍成邵堯夫行窩。實惟十五家 金公宗孝,張公悌元,光翰,乃範,趙公煕道,李公秀彥,朴公有文,張公乃度,德元,申公祐德,張公乃貞,朴公之㕀,張公慶遇,乃睦,李公忠民諸賢。 之賢勞。玆焉八九架之排布。凡前舊物。一玉三鶴之名勝。席間至論。四書六經之微奧。春秋百世。享於是而妥靈。軒楣四字。書因之以揭額。光風霽月。宛然灑落襟期。躍魚飛鳶。莫非涵育意想。何悟不辰之毁撤。延及當日所芋躋。堂榭成墟。獨立十尋壇杏。襟紳失所。但見數尺廟碑。感慨之情。無大無小而常切於玆地。更新之議。經歲經年而始協于今春。召匠計功。迨數月而告訖。隨材授任。同一鄕而董監。舊砌猶存。不改薖軸之間架。新樑復擧。乃申頌禱之篇章。拋樑東。亭亭紫玉照玲瓏。遙遙仰想靈芝秀。道氣千年長不窮。拋樑西。洛水之流渺渺兮。如許眞源洙泗自。幾人夢罷荒臺迷。拋樑南。汀洲古藪碧鬖鬖。化中培植今安在。月滿空山水滿潭。拋樑北。一邱賴此一巖力。緣何有取不知名。不慍不知君子德。拋樑上。嵬乎山斗俱瞻仰。蘋蘩禮薦復何時。吾黨遑遑失所往。拋樑下。地勢東南連大野。大道元來在面前。高深必自平夷者。伏願上樑之後。多士風動。吾道日興。揖讓周旋。庶一變而至於魯至於道。欽慕感發於千載。而見于羹見于牆。警咳如承。毋負嘉惠之訓。申燕若侍。敢生非辟之心。
사미헌집 제8권 / 상량문(上樑文) / 부지암정사중건상량문〔不知巖精舍重建上樑文〕
도가 장차 폐하려는 것은 하늘의 뜻인가? 어찌 뭇 사람의 마음이 오래토록 울울함을 견디랴? 일은 마치 때를 기다림이 있는 것 같으니, 마침내 정사의 중건을 보게 되었네. 의심하지 않고 걱정하지 말며, 이에 재목을 자르고 이에 계획하고 측량하였네.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여헌(旅軒) 선생은 학문은 성명(性命)을 관통하고 교화는 가르침에 흡족하였네. 책상자를 지고 와서 배종하던 사람을 호문정(胡文定)의 상사(庠舍 학교)로도 다 수용하기 어려웠고, 지팡이와 신으로 소요하던 곳에 그대로 소요부(邵堯夫)의 행와(行窩)가 만들어졌네. 실제로 15분 〔김종효(金宗孝), 장제원(張悌元), 장광한(張光翰), 장내범(張乃範), 조희도(趙煕道), 이수언(李秀彥), 박유문(朴有文), 장내도(張乃度), 장덕원(張德元), 신우덕(申祐德), 장내정(張乃貞), 박지주(朴之㕀), 장경우(張慶遇), 장내목(張乃睦), 이충민(李忠民) 등 여러 현인〕 의 현로(賢勞)가 여기에 여덟 아홉 칸의 집을 지었네. 무릇 앞의 옛 건물터는 일옥삼학(一玉三鶴)의 명승지이고, 강석에서의 지극한 논의는 사서육경의 오묘한 것이었네. 춘추로 백세토록 이곳에서 제사를 드려 영혼을 편안하게 하며, 헌함의 문미에 네 글자를 써서 인하여 편액으로 걸었네. 비 갠 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완연히 깨끗한 회포이며, 연못에 뛰는 물고기와 하늘을 나는 솔개는 함양과 훈육의 의사가 아님이 없네. 어찌 좋지 않은 때의 서원 훼철이 당일 선생이 오르내리던 집에 미칠 줄을 알았으리? 정사가 폐허가 된 곳에는 열 길 높이의 은행나무가 홀로 서 있고, 선비들이 귀의를 잃은 곳에는 다만 몇 척 높이의 묘비만 보이네. 감개한 마음은 작은 일 큰 일에 관계없이 항상 이곳에 간절하고, 중건하려는 의논은 세월이 지나고 해가 지남에 비로소 올 봄에 협의했네. 목수를 불러 공사를 계획하여 몇 달에 걸쳐 준공하고, 재목감에 따라 임무를 부여하여 한 고을 사람들이 동참하고 감독하였네. 옛 섬돌은 오히려 남아 있으니 과축(薖軸)의 시렁을 바꾸지 않았고, 새로운 대들보를 다시 올리니 이에 송도(頌禱)의 노랫말을 펴네.
대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 拋樑東
곧게 솟은 자옥산(紫玉山)이 영롱하게 비추네 / 亭亭紫玉照玲瓏
아득히 우러러 영지수(靈芝秀)를 생각하니 / 遙遙仰想靈芝秀
도(道)의 기운이 천년토록 길이 무궁할 것이네 / 道氣千年長不窮
대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 拋樑西
낙동강 물이 아득하고 아득하네 / 洛水之流渺渺兮
이같은 참 근원은 수사(洙泗 공자(孔子))로부터 오니 / 如許眞源洙泗自
몇 사람이 황폐한 누대에서 미혹의 꿈을 깰까 / 幾人夢罷荒臺迷
대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 拋樑南
물가 섬의 옛 숲에는 푸르름이 빽빽하네 / 汀洲古藪碧鬖鬖
교화 중에 길러졌던 인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 化中培植今安在
달빛은 빈 산에 가득하고 물은 못에 가득하네 / 月滿空山水滿潭
대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 拋樑北
하나의 언덕이 이 부지암의 힘에 의지해있네 / 一邱賴此一巖力
어떻게 하여 부지암이라는 명칭을 취하였는가 / 緣何有取不知名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군자의 덕이라네 / 不慍不知君子德
대들보를 위로 던지니 / 拋樑上
우뚝한 태산북두를 모두가 쳐다보며 우러르네 / 嵬乎山斗俱瞻仰
변변치 못한 제수를 다시 어느 때에 올릴까 / 蘋蘩禮薦復何時
우리들은 허둥거리며 갈 곳을 잃었네 / 吾黨遑遑失所往
대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 拋樑下
지세가 동남쪽으로 큰 들판을 연이었네 / 地勢東南連大野
대도는 원래 면전에 있는 것이니 / 大道元來在面前
높고 깊은 것은 반드시 평평한 것에서 시작하네 / 高深必自平夷者
삼가 원하건대, 대들보를 올린 이후에 많은 선비들이 교화의 바람이 고동하듯이 우리의 도가 날로 흥기하게 해 주소서. 읍양(揖讓)하고 주선(周旋)하는 예를 익혀 한번 변화하여 노(魯)나라에 이르고 또 도(道)에 이르기를 바라며, 흠모하고 감발하여 천년 뒤에도 국에 나타나고 담장에 나타나게 하소서.훌륭하신 말씀을 이어받듯이 하니 아름답고 은혜로운 가르침을 저버리지 말고, 평소 거처에 활짝 펴신 얼굴을 모시듯이 하니 감히 그릇되고 치우친 마음이 생기겠는가?
[주-D001] 가르침 : 원문의 ‘木鐘’은 가르침을 말한다. 《예기》 〈학기(學記)〉에 “질문을 잘하는 사람은 견고한 나무를 다듬는 것과 같아 그 쉬운 것을 먼저 하고 그 절목을 뒤로 한다. …… 질문을 기다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종을 치는 것과 같아 작게 두드리면 작게 울고 크게 두드리면 크게 운다.〔善問者,如攻堅木,先其易者,後其節目.……善待問者,如撞鍾,叩之以小者小鳴,叩之以大者則大鳴.〕”라고 하였다.[주-D002] 호문정(胡文定)의 …… 어려웠고 : 본문의 호문정(胡文定)은 오류이기에 호안정(胡安定)으로 고쳤다. 호안정은 송(宋)나라 학자 호원(胡瑗, 993~1059)으로 자는 익지(翼之), 호는 안정이다. 경술(經術)에 박통하여 범중엄(范仲淹)의 천거를 받아 백의(白衣)로서 숭정전(崇政殿)에 들어가 천자를 대하고 교서랑(校書郞)에 임명되었으며 뒤에는 소주(蘇州)와 호주(湖州)의 교수가 되어 많은 생도들을 가르쳤다. 가르칠 때는 사제의 예를 엄하게 하였으며, 사람을 가르치는 법에 있어 과조(科條)를 자세하게 구비하고 경의재(經義齋)와 치사재(致事齋)로 구분하여 가르쳤다. 뒤에 태학(太學)의 교수가 되자 학생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학교에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주-D003] 소요부(邵堯夫)의 행와(行窩) : 소요부는 송(宋)나라 학자인 소옹(邵雍, 1011~1077)을 말한다. 자는 요부(堯夫), 시호는 강절(康節)이기에 소 강절로 알려져 있다. 《주역》의 상수학(象數學)에 능통하였으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소문산(蘇門山) 백천(百泉)에서 독서하며 사는 집을 안락와(安樂窩)라 하고 자호를 안락(安樂) 선생이라 하였다. 행와(行窩)는 소 강절이 거처하는 집인 안락와를 말한다. 당시에 호사자(好事者)가 별도로 소강절이 사는 집과 같은 집을 지어 그 행차를 기다렸는데 그 이름을 행와라고 하였고 소 강절이 오기만 하면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주-D004] 김종효(金宗孝) :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반월당(伴月堂)이다. 인동에 이주하여 반월당 서당을 열었는데 젊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문사가 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문림(文林)이라 불렀다고 한다.[주-D005] 장제원(張悌元) : 1556~1621.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중순(仲順), 호는 심곡(深谷)으로 1591년(선조24) 진사에 합격하였다.[주-D006] 장광한(張光翰) : 1561~1624.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사거(斯擧), 호는 자성정(自醒亭)이다.[주-D007] 장내범(張乃範) : 1563~1640.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정보(正甫), 호는 극명당(克明堂)이다.[주-D008] 조희도(趙煕道) : 1569~?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이(敬而)이다.[주-D009] 이수언(李秀彥) : 본관은 성산(星山), 호는 추모헌(追慕軒)으로 진사를 지냈다.[주-D010] 박유문(朴有文) : 본관은 울산으로 찰방과 감찰을 역임하였다.[주-D011] 장내도(張乃度) : 1573~1644.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입보(立甫), 호는 검곡(儉谷)으로 장내범의 동생이다.[주-D012] 장덕원(張德元) : 1569~1612.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사순(士順), 호는 무민당(无悶堂)이다.[주-D013] 신우덕(申祐德) : 1581~1663.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가(汝嘉)로 장내범(張乃範)의 사돈이다.[주-D014] 장내정(張乃貞) : 1579~1630.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정보(貞甫), 호는 수훈재(守訓齋)이다.[주-D015] 박지주(朴之㕀) : 본관은 죽산이다.[주-D016] 장경우(張慶遇) : 1581~1656.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태래(泰來), 호는 만회당(晩悔堂)으로 장내범의 아들이다. 1627년(인조5) 진사가 되었다.[주-D017] 장내목(張乃睦) : 본관은 인동(仁同)이다.[주-D018] 이충민(李忠民) : 1588~1673.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직(汝直), 호는 모암(慕巖)이다.[주-D019] 현로(賢勞) : 홀로 수고를 도맡아 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북산(北山)〉에 “넓은 하늘 아래, 임금의 땅이 아님이 없으며, 땅을 따라 물가에 이르기까지, 왕의 신민이 아님이 없네. 대부가 일이 고르지 않아, 나를 현능(賢能)하다 하여 홀로 종사하게 하네.〔溥天之下,莫非王土;率土之濱,莫非王臣. 大夫不均,我從事獨賢.〕”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주-D020] 일옥삼학(一玉三鶴) : 하나의 옥산(玉山)과 세 개의 학산(鶴山)을 말한다. 옥산은 구미시에 있는 인동(仁同)을 말하고, 세 개의 학산은 칠곡군에 있는 유학산(遊鶴山)ㆍ소학산(小鶴山)ㆍ황학산(黃鶴山)을 말한다.[주-D021] 헌함의 …… 글자 : 네 글자는 ‘동락서원(東洛書院)’을 말한다. 동락서원은 경북 구미시 임수동에 있다. 1655년(효종6) 지방 유림의 공의로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76년(숙종2) ‘동락’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 훼철되었다. 사미헌 당시에 다시 부지암정사로 중건하였으니, 과거의 일을 말한 것이다. 1932년에 다시 서원으로 복원되었다.[주-D022] 과축(薖軸) : 현인의 은둔지를 말하니, 부지암정사를 가리킨다. 《시경》 〈고반(考槃)〉에 “고반이 언덕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네.……석인이 한가로이 서성그림이네.〔考槃在阿,碩人之薖.……碩人之軸.〕”라고 하였는데, 주에서 “과(薖)는 은자의 넉넉한 마음이고 축(軸)은 은자의 서성그림이다.”라고 하였다.[주-D023] 송도(頌禱)의 노랫말을 펴네 : 집이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송도(頌禱)하는 노래를 말한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헌문자(獻文子)가 집을 이루었을 때 장로(張老)가 “아름답도다! 높고 큼이여, 아름답도다! 찬란히 빛남이여. 여기에서 노래하며 여기에서 곡하며 여기에서 국족을 모을 것이로다.〔美哉輪焉!美哉奐焉!歌於斯,哭於斯,聚國族於斯.〕”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下》[주-D024] 영지수(靈芝秀) : 훌륭한 자손이 나는 가문에 그 조상의 근원이 있음을 말한다. 신령한 지초는 한 해에 세 번 꽃 피우는데 이를 복용하면 장수할 수 있다고 한다.[주-D025] 이같은 …… 오니 : 장현광(張顯光)의 《여헌집(旅軒集)》 권4 〈부지암정사기(不知巖精舍記)〉에 “당(堂) 아래에 흐르는 강물은 바로 낙동강(洛東江)의 하류인데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는 송(宋)나라 제현(諸賢)들이 일어나신 지역이다. 강의 이름이 우연히 그것과 같으니, 정맥(正脈)이 흐르는 물줄기를 생각하여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의 연원(淵源)을 거슬러 올라가며……”라고 하였다.[주-D026] 한번 …… 이르기 : 《논어》 〈옹야〉에 “공자가 말하기를 제나라가 한 번 변화하면 노나라에 이르고 노나라가 한 번 변화하면 도에 이른다.〔子曰:齊一變,至於魯,魯一變,至於道.〕”라고 하였다.[주-D027] 흠모하고 …… 하소서 : 앙모하는 마음이 지극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옛날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 임금이 3년 동안 앙모하여 앉았을 때는 담장에서, 밥먹을 때는 국그릇에서 요 임금을 보았다고 한다.[주-D028] 훌륭하신 말씀 : 원문의 ‘警咳’는 ‘謦咳’의 오자인 듯하다. 경해의 원래 뜻은 ‘기침소리’라는 말이지만 남의 말이나 시문(詩文)의 미칭(美稱)으로 사용된다.[주-D029] 평소 …… 얼굴 : 원문의 ‘申燕’은 《논어》 〈술이〉에 “공자께서 한가로이 계실 적에 그 모습은 활짝 펴시며 온화하셨다.〔子之燕居,申申如也、夭夭如也.〕”라고 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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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헌집 제8권 / 상량문(上樑文) / 원회당중건상량문〔遠懷堂重建上樑文〕
종을 치듯이 나무를 다듬듯이 하는 학문의 풍도(風度)와 운치는 이미 옛날 일이 되었으나, 대나무의 우거짐과 소나무의 무성함 같은 서까래와 기둥은 거듭 새로워졌네. 폐함도 있고 흥함도 있으니, 중건을 이에 도모하고 이에 계획하네.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선조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께서는 교화는 흡족한 비가 내리는 것 같고 학문의 도는 조종을 전했네. 하물며 일선(一善 선산(善山))은 명유 석학들의 고장으로 이웃에 반드시 외롭지 않는 덕망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랴? 오직 원당(元堂)의 경치 좋은 터전은 현자도 또한 여기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네. 노경암(盧敬庵)이 월파(月波)의 상류에 지세를 살펴보았으니 완연히 주회암(朱晦庵)의 백록동(白鹿洞)과 같고, 박유당(朴遊堂)이 대장괘(大壯卦)의 원길(元吉)에서 상을 취하여 소요부(邵堯夫)의 행와(行窩)를 이루었네. 농암(籠巖)아들의 유허지와 아침저녁으로 서로 바라보고, 야은(冶隱)의 상덕묘(尙德廟)와는 지척에 두고 오히려 향기를 품네. 문미의 편액을 여헌(旅軒)으로 이름하여 드디어 만년에 서식하는 장소로 정하였고, 돌아가신 뒤에는 초상화를 받들어 모셔 아직까지도 많은 선비들이 귀의하네. 어찌 해마다 한번 제향을 올리던 사당이 나라 안의 모든 서원이 훼철되는 속에 들어갈 줄 알았겠는가. 초상화가 엄숙하게 있었던 터전은 갑자기 잡초로 무성해졌고, 유자들이 분주히 달려오던 장소는 풀에 덮여 있음을 차마 보겠네. 공의 생신날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 비록 예전처럼 거행하기는 어려우니, 별도의 집에서 받들어 모시는 도모를 하여 지금에서야 건물을 짓게 되었네. 성의가 있으면 사물이 있게 되니 힘이 미약하다고 말하지 말고, 옛 것을 일으키고 새로운 것을 일으키니 어찌 공이 배가 됨을 생각하지 않으리? 각자에게 임무를 주니 이 고을 저 고을 출신을 묻지 않고, 유교에 관계되는 일이니 다투어 목수와 도공을 모으네. 준공이 며칠만에 이미 이루어졌으니, 아름답게 높고 크며 아름답게 찬란히 빛나고, 의도가 실제로 화려하지 않은데 있으니, 그런대로 이만하면 모였고 그런대로 이만하면 갖추었다 하겠네. 처마와 기둥이 새롭게 세워지니 정령이 의지할 데가 있음을 기뻐하고, 강과 산이 빛남을 더하니 경물이 예전과 같음을 감격하네. 이에 대들보를 올리는 일을 도와 축원과 규계의 말을 펴네.
대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 拋樑東
동쪽에 새벽 해 돋아 창살에 오르네 / 扶桑曉旭上窓櫳
청명한 밤의 기운이 아침까지 나타나니 / 淸明夜氣終朝見
아득히 생각하니 참된 공부가 이곳에 있네 / 緬仰眞工在此中
대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 拋樑西
금오산(金烏山)의 한 줄기가 하늘과 가지런하네 / 金烏一抹與天齊
높고도 견고한 기상을 길이 쳐다보며 우러르니 / 高堅氣像長瞻仰
사문을 부지해 주어 길이 미혹되지 않네 / 扶植斯文路不迷
대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 拋樑南
낙동강의 물결이 흘러 도의 근원을 적시네 / 洛波滚滚道源涵
제사가 철회된 것이 지금까지 얼마나 오래였던가 / 蘋蘩一撤今何久
울울한 사람들의 마음이 절로 견딜 수가 없었네 / 抑鬱輿情自不堪
대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 拋樑北
눈이 아프도록 임금이 계시는 서울을 바라보았네 / 日下長安勞目力
나가고 물러남에 항상 나라 걱정 백성 걱정으로 / 進退常懷憂國憂
길이 선조의 묘소에 인사하고 동해를 밟았네 / 永辭先壠蹈東極
대들보를 위로 던지니 / 拋樑上
우러러 인자한 하늘을 보니 어찌도 넓고 넓은지 / 仰見仁天何蕩蕩
원하건대 은하수 만 섬의 물을 빌어 / 願乞銀河萬斛波
세상 사람들의 욕망을 통렬하게 씻어버리기를 / 痛洗人間之慾浪
대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 拋樑下
한 줌의 흙도 오히려 위대한 대지를 만드네 / 一撮土猶成地大
박후한 덕은 성실하여 변하지 않는데서 오니 / 博厚也從不貳來
성인이 되는 공부에는 절로 과정이 있네 / 聖功自是有程課
삼가 원하건대 대들보를 올린 이후로 풍우의 피해를 물리치고 토목 의 건물을 견고하게 해주소서. 경성(景星)과 북두처럼 후배들 모두가 더욱 절절이 우러르게 하시고, 흐르는 물과 높은 산처럼 당시의 여운을 무궁하게 하소서.
[주-D001] 원회당(遠懷堂) : 경북 구미시 선산읍 생곡리에 있는 것으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영정을 모시고 해마다 장현광의 생일인 음력 1월 22일에 향사를 올리는 사당이다. 1605년(선조38) 원회당(遠懷堂)을 낙성한 후 1643년(인조21) 유엄사(有儼祠)를 세워 영정을 모시고 배향하다가 1866년(고종3)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원회당을 중건하였고 1933년 영당(影堂)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주-D002] 종을 …… 하는 : 종과 나무는 가르침을 말한다. 《예기》 〈학기(學記)〉에 “질문을 잘하는 사람은 견고한 나무를 다듬는 것과 같아 그 쉬운 것을 먼저 하고 그 절목을 뒤로 한다. …… 질문을 기다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종을 치는 것과 같아 작게 두드리면 작게 울고 크게 두드리면 크게 운다.〔善問者,如攻堅木,先其易者,後其節目.……善待問者,如撞鍾,叩之以小者小鳴,叩之以大者則大鳴.〕”라고 하였다.[주-D003] 노경암(盧敬庵) : 노경임(盧景任, 1569~1620)을 말한다. 본관은 안강(安康), 자는 홍중(弘仲), 호는 경암으로 1591년(선조24) 문과에 급제했다. 저서로는 《경암집(敬庵集)》이 있다.[주-D004] 주회암(朱晦庵)의 백록동(白鹿洞) : 회암(晦庵) 주희(朱熹, 1130~1200)가 남강군(南康軍)을 맡아 다스릴 때 여산(廬山) 아래 백록동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건립하고 손수 이 서원의 학규를 정하고 여기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주-D005] 박유당(朴遊堂) : 박진경(朴晉慶)을 말한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명술(明述), 호는 와유당(臥遊堂)ㆍ소암(巢巖)이며 장인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다. 병자호란 때 의병장이었으며, 사후 남강서원(南岡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동명현록(海東明賢錄)》과 《상례휘보(喪禮彙補)》가 있다.[주-D006] 대장괘(大壯卦)의 원길(元吉) : 대장괘(大壯卦)는 우레를 상징하는 진(震)과 하늘을 상징하는 건(乾)이 합해 이루어진 괘로 양(陽)이 건장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상고(上古) 시대에는 사람들이 바위구멍에서 살고 들판에서 거처하였는데 후세에 성인(聖人)이 궁실(宮室)로 바꾸어 위에는 들보가 있고 아래에는 기둥이 있게 하여 비바람을 대비하였으니, 이는 대장괘에서 취해온 것이다.”라고 하였다.[주-D007] 농암(籠巖) : 김주(金澍)의 호이다. 본관 선산(善山), 자는 택부(澤夫)이다. 1392년(태조1) 중국에 하절사(賀節使)로 갔다가 돌아오며 압록강을 건널 때 이씨 조선이 세워졌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에 제향되었다.[주-D008] 아들 : 원문의 ‘懸弧’는 아들이 태어난 것을 말한다. 옛 풍습에 아들이 태어나면 문에 활을 거는데, 남아는 활을 쏘는 도리가 있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禮記 內則》 김주가 중국에서 이씨 조선이 건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 유씨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가 압록강을 건너가면 몸둘 곳이 없다.”라는 편지를 쓰고, 또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양수(揚燧)라 할 것과 조복(朝服)과 신을 부치니, 부인이 죽은 뒤에 합장할 것을 부탁하였다.[주-D009] 그런대로 …… 하겠네 : 《논어》 〈자로〉에 “공자께서 위나라 공자형을 두고 논평하기를 그는 집에 거처하기를 잘 한다. 처음 가재도구를 소유했을 때는 ‘그런대로 이만하며 모여졌다.’라 하였고, 다소 갖추어졌을 때에는 ‘그런대로 이만하면 갖추어졌다.’라 하였고, 많이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런대로 이만하면 아름답다.’라 하였다.〔子謂衛公子荊,善居室. 始有,曰苟合矣,少有,曰苟完矣,富有,曰苟美矣.〕”라고 하였다.[주-D010] 길이 …… 밟았네 : 여헌이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노중련(魯仲連)의 도해(蹈海) 고사를 본받아 동해가의 입암(立巖)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말한다.[주-D011] 경성(景星) : 고대 순(舜) 임금의 태평한 시대에 나타난 경사스러운 별이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4
四未軒文集卷之八 / 上樑文 / 遠懷堂重建上樑文
鍾如撞木如攻。風韻已昔。竹之苞松之茂。榱桷重新。有廢有興。爰謀爰度。恭惟我先祖文康公。敎洽化雨。學傳道宗。况一善名碩之鄕隣。必有不孤之德。惟元堂形勝之地。賢亦有樂此之心。盧敬庵相地於月波上流。宛如朱晦庵鹿洞。朴遊堂取象於大壯元吉。仍成卲堯夫行窩。籠巖縣弧之墟。朝夕相望。冶隱尙德之廟。咫尺猶薰。扁楣以旅軒號。遂定晩年捿息。歿世爲影像奉。尙有多士依歸。那知逐歲一薦之祠。混入擧國均撤之院。神座肅穆之所。奄成榛蕪。儒紳駿奔之場。忍見艸沒。晬辰苾芬之享。縱難依前擧行。別業奉守之營。惟在及今肯搆。有誠則有物。勿謂力綿。起舊而起新。盍思功倍。各授其任。無問此鄕彼鄕。有關斯文。爭募斲者陶者。功已成於不日。美輪焉美奐焉。意實在於無華。苟合矣苟完矣。簷楹新創。喜精靈之有依。江山增輝。感物態之如故。玆助楣樑之擧。用伸祝規之辭。拋樑東。扶桑曉旭上牎櫳。淸明夜氣終朝見。緬仰眞工在此中。拋樑西。金烏一抺與天齊。高堅氣像長瞻仰。扶植斯文路不迷。拋樑南。洛波滚滚道源涵。蘋蘩一撤今何久。抑鬱輿情自不堪。拋樑北。日下長安勞目力。進退常懷憂國憂。永辭先壠蹈東極。拋樑上。仰見仁天何蕩蕩。願乞銀河萬斛波。痛洗人間之慾浪。拋樑下。一撮土猶成地大。博厚也從不貳來。聖功自是有程課。伏願上樑之後。風雨辟除。土木鞏固。景星北斗。彌切後輩之具瞻。流水高山。不盡當日之餘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