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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응(朴伯凝) | 1525 | 1587 | 무안(務安) | 혼원(混元) | 박안(朴晏) |
석천시집(石川詩集) 임억령(林億齡)생년1496년(연산군 2)몰년1568년(선조 1)자대수(大樹)호석천(石川), 하의(荷衣)본관선산(善山)특기사항박상(朴祥)의 문인. 성수침(成守琛) 등과 교유
石川先生詩集卷之三 / 五言四韻 / 思歸二章。寄姪朴伯凝。仲凝。
遠憶烏松裏。遙憐寡妹存。寬心唯二子。伯凝仲凝 慰寂是諸孫。自嘆長爲客。深嗟獨臥村。風分鴻雁序。沙晩脊令原。右寄姝[妹]
無聊抛竹屋。有病寄江村。舟楫多新興。溪山勝故園。歸心雖自切。世事不堪論。門戶須諸姪。詩書子細溫。右寄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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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촌서원(海村書院)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해리
최 부(崔 溥) 임억령(林億齡) 류희춘(柳希春) 윤 구(尹 衢) 윤선도(尹善道) 박백응(朴伯凝)
1652년(효종 3)
8월
해촌사는 최부(崔溥), 임억령(林億齡), 류희춘(柳希春), 윤구(尹衢), 윤선도(尹善道), 박백응(朴伯凝) 등 6현을 배향하고 있다. 본래1652년(효종 3) 임억령 선생 단독 사우로 건립하였으나, 그 후 1689년(숙종 15) 해남유림의 발론으로 최부, 류희춘 선생을 추배하여 오다가 1721년 윤구 선생과 윤선도 선생을 추배하여 5현사가 되었다. 1868년 조정의 영으로 훼철되었다가 1901년 설단, 제향하였으며 박백응은 1922년에 추배되었다. 구교리에 있던 것이 현재 해리 금강골 저수지 옆으로 옮겨 자리 잡고 있다.
1)주벽-최부(崔溥, 1454∼1504)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조선〛 문신.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 본관은 탐진(耽津), 진사(進士) 택(澤)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82년(성종 13) 진사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교서관(校書館)의 저작(著作) ‧ 박사(博士) ‧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 수찬(修撰)을 지냈다. 148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교리(校理)로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87년 제주추쇄경차관(濟州推刷敬差官)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도중 풍랑으로 중국 절강성 영파부(浙江省寧波府)에 표류, 온갖 고난을 겪고 반년 만에 귀국했다. 즉시 왕명으로 《표해록(漂海錄)》을 저술, 중국연안의 해로(海路) ‧ 기후 ‧ 산천(山川) ‧ 도로 ‧관부(官府) ‧ 풍속 ‧ 민요 등을 소개하였으며, 특히 수차(水車 蹈車)의 제작과 이용법을 배워 뒤에 충청도 지방의 한발(旱魃)때 이를 사용케 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1492년 지평(持平)에 올라갔다가 사간(司諫)으로 전임, 1497년 (연상군 3) 성절사(聖節史)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가. 이듬해 무오사화(戊午史禍)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봉당(朋黨)을 조직하여 국정을 비방했단 죄로 단천(端川)에 유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참형(斬刑)을 당했다.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2)임억령(林億齡, 1496∼156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대수(大樹), 호는 석천(石川). 득무(得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秀)이고, 아버지는 우형(遇亨)이며,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이다. 박상(朴祥)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진사가 되었고, 152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부교리·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간·전한·세자시강원설서 등 여러 직위에 임명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동생 백령(百齡)이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자책을 느끼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그 뒤 백령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보내오자 분격하여 이를 불태우고 해남에 은거하였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1552년 동부승지·병조참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가 되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며, 시문을 좋아하여 사장(詞章)에 탁월하였으므로 당시의 현인들이 존경하였으나 이직(吏職)에는 적당하지 않았던 것으로 사신(史臣)들이 평하였다. 전라남도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 해남의 석천사(石川祠)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석천집≫이 있다.
3)유희춘(柳希春, 1513∼157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해남 출신. 양수(陽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준(公濬)이고, 아버지는 계린(桂麟)이며, 어머니는 사간 최부(崔溥)의 딸이다. 처부(妻父)는 송준(宋駿)이며,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 간이다. 김안국(金安國)·최두산(崔斗山)의 문인으로서, 153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중종 39)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한 뒤 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 을사사화 때 김광준(金光準)·임백령(林百齡)이 윤임(尹任) 일파 제거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호응하지 않았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 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 때 국경 지방의 풍속에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교육을 베풀어 글을 배우는 선비가 많아졌다 한다. 1565년 충청도 은진에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삼정승의 상소로 석방되었다. 직강·응교·교리 등을 거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했으며, 이어 장령·집의·사인·전한·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5년(선조 8) 예조·공조의 참판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해 낙향하였다.
경전에 널리 통했고 제자(諸子)와 역사에도 능하였다. 시강원설서 재임 시에 세자(후의 인종)의 학문을 도왔고, 선조 초에는 경연관으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배웠던 선조는 항상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였다 한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經書)의 구결언해(口訣諺解)에 참여해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하다가 마치지 못한 채 죽었다.
성격이 소탈해 집안 살림을 할 줄 몰랐으나, 사람들과 세상 이야기나 학문, 정치하는 도리에 관한 말을 꺼내면 투철한 소견과 해박한 지식은 남들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 최보(崔溥)의 학통을 계승해 이항(李恒)·김인후 등과 함께 호남 지방의 학풍 조성에 기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미암일기≫·≪속몽구 續蒙求≫·≪역대요록 歷代要錄≫·≪속휘변 續諱辨≫·≪천해록 川海錄≫·≪헌근록 獻芹錄≫·≪주자어류전해 朱子語類箋解≫·≪시서석의 詩書釋義≫·≪완심도 玩心圖≫ 등이 있으며, 편서로 ≪국조유선록 國朝儒先錄≫이 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4)윤구(尹衢, 149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형중(亨仲), 호는 귤정(橘亭). 할아버지는 경(耕)이며, 아버지는 생원 효정(孝貞)이다.
1513년(중종 8)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다음해 주서에 이어 홍문관의 수찬·지제교(知製敎)·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삭직되었다. 주서로 있을 때 왕에게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드러나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538년에 복직되었으며, 남해향사(南海鄕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귤정유고≫가 있다.
5)윤선도(尹善道, 1587∼1671)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 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계를 이었다.
해남읍 해리에 있는 해촌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고, 입구에 삼문이 있고, 좌측에 교직사가 있다. 배향된 해남출신의 명현들은 고산 윤선도를 제외하면 거의 동시대의 인물들로 금남최부 는 충의, 석천 임역령은 풍(해남읍지 기록), 미암 유희춘은 경술, 귤정 윤구는 문장, 고산은 충헌으로 각각 칭송되어 오고 있다. 이들이 해남과 인연을 맺고 생활한 시기는 해진군에서 해남군이 분군 된지 불과 1백여 년도 안 된 시기이므로 이들의 활동과 영향은 이 지역 인사들에게 매우 크게 미쳤다고 보겠다. 맨 뒤에 추배된
6) 취죽헌,박백응도 석천 임억령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과거를 마다하고 학문에만 진력하여 학행으로 천거되었다. 만년에는 해남에 귀향하여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참고-해남군의 문화유적, 해남문화원, 1986.
해남의 문화유적, 해남문화원, 1995.
해남,정윤섭, 향지사, 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남군 문화관광 http://www.haenam.go.kr/
사진-다음블로그 ‘국화처럼 향기처럼’
http://blog.daum.net/segon53/ <김세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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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신문
해남향교 제향지 '해촌서원' 탐방
2020-01-13 오전 4:37:43손은수 기자
해촌서원, ‘육현사’라고도 하는 이곳은 금남 최부, 석천 임억령, 미암 류희춘, 귤정 윤구, 고산 윤선도, 그리고 취죽헌 박백응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해남향교에서 제향하고 있는 해촌서원, 해촌서원은 해남읍 전체를 너그러이 품고 있는 금강산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다.
해남의 진산 금강산은 몇 년 전부터 이슈가 되고 있는 금강산성의 축성과 그 용도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어 지표조사가 진행 중에 있다.
이 금강산은 산재한 여러 갈래의 등산로가 있는데, 그 옛날 서울에 이르는 삼남길에 견주어도 충분한 매력을 품고 있으며, 두 개의 만대산을 거느리며 일찍이 해남8경 중 ‘금강폭포’와 ‘미암청람’을 둔 해남의 보배로운 명산이다.
일설에 의하면 해남의 금강산은 만대(1만개의 작은 봉우리)를 두개나 거느리는 산으로, 일만이천봉에 그친 북한의 금강산보다 팔천봉이나 더 많은 것 아닌가한다는 일설도 있다.
옛날 해남은 한양과 멀다는 이유로 귀양지로 이름을 날린 고장이다. 그래서 해남 금강산은 유배문화의 향기가 서린 곳이며, 금강산의 지명은 이쯤 귀양자들의 입에서 북쪽의 금강산에 비교될 만하다는 향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추측도 해 본다.
해남 관동에서 금강산성을 바라보고 오르자면 해남읍내 전경이 내려 다 보이는 팔각정 공원에 이른다.
여기서 곧장 금강산 정상을 향하지 않고 조금 오르다가 이정표를 따라 바로 우회전하여 수양대군에 의한 단종애사가 서린, 당시에는 처절하고 철저한 아픔을 안고 충신 민신을 배향하고 있는‘ 미암서원’을 만나게 된다. 이곳 미암서원 역시 해남향교에서 제향하고 있다.
미암서원 뒷쪽으로 난 ‘미암길’을 따라 금강곡(금강골)까지 가다보면 금강저수지 둑 건너에 순간 ‘해촌서원’이 바라다 보인다.
해촌서원, ‘육현사’라고도 하는 이곳은 금남 최부, 석천 임억령, 미암 류희춘, 귤정 윤구, 고산 윤선도, 그리고 취죽헌 박백응 선생 등 6현을 배향하고 있다. 해남향교에서 제향하고 있는 해남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해촌사로도 불리는 해촌서원은 1652년(효종 3년) 임억령 선생 단독 사우로 건립됐으나 1689년(숙종 15년) 해남유림 중지가 모아져 최부 , 류희춘 선생이 추배되고 1721년 윤구, 윤선도 선생을 추배하여 5현사라 했다.
이후 조선말에 이르러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1년 지역유림에 의해 다시 설립되어 제향하게 되었고, 1922년 박백응 선생이 추배되었다. 원래는 구교리에 있던 것이 현재 이곳 금강골 저수지 옆으로 이설되었다.
먼저 금남 최부 선생은 김종직의 제자로 나주에서 태어나 처가 고을인 이곳 해남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뛰어난 학자 관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춘추관편수관·예문관응교 등 여러 청요직을 거친 사람이었다.
1487년 제주 추쇄경차관으로 파견되었다가 제주도에서 아버지 상을 당하여 급히 귀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에까지 표류하여 해적으로 오인 받아 억류되었지만 조선의 고위층으로 밝혀지면서 중국을 유람하고 돌아와 그 유명한 ‘표해록’을 남긴 큰 학자였다.
조선의 마르코폴로(동방견문록 지은이)라고도 불리는 최부의 ‘중국기행문‘은 이곳 해촌서원에 함께 배향된 외손자 유희춘에 의해 ‘표해록’으로 간행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주자학자 기요다군긴이 번역하여 1769년 ‘당토행정기’라는 이름으로 간행되기도 했다.
연산군의 패정에 격분하며 공경대부들의 비리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했던 그는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이른바 훈구파의 의해 김종직과 함께 사림파로서 배척되어 함경도 단천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 10월24일 유배지에서 갑자사화를 맞아 결국 해배되지 못하고 51세를 일기로 참수되어 끝내 세상을 떠난 강직하고 청렴한 관료였다.
안타까운 그의 죽음에 대해 조야 모두가 애석해 하던 중 2년 뒤인 1506년 중종의 즉위와 동시에 신원되어 승정원도승지로 추증되었으며 문집에 ‘금남집’이 있다.
한편, 요즘 공무원 세계의 화두인 ‘청렴’을 이야기하면 곧장, ‘최부와 송흠의 청렴’을 이야기 하는데 송흠의 선배였던 최부, 후배였던 송흠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요즘 말하면 관용차에 대한 것이다.
송흠이 관직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라에서 휴가차 귀향하는 관리에게 내주는 말을 타고 서울에서 고향 영광으로 왔을 때, 그 때 마침 최부도 귀향에 있음을 안 송흠이 선배 최부의 집을 찾았다.
선후배의 정을 나누고자 한 자리에서 최부는 “우리 집까지는 어떤 말을 타고 왔느냐” 묻고 같은 말을 타고 왔다는 송흠에게 “고향까지는 공무라 관계없지만 우리 집까지는 사무인데 왜 나라의 말을 타고 왔느냐”며 크게 꾸짖고는 나라에 고발하여 송흠이 처벌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송흠은 최부 선배의 꾸지람과 징계의 충고를 잊지 않고 항상 초심을 기억하며 관료생활 내내 공사를 철두철미하게 지키며 모범적인 청백리가 되어 지금까지 청백리의 대표적 인물로 세상에 높은 이름을 날리고 있다.
이는 요즘, 위정자나 공무원들에게 국민의 세금인 관용차 사용에 대해 큰 교훈을 던져주는 사례로서 청렴은 구호가 아닌 공사구분을 선택하는 사사로운 생각에서부터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를 청백리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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