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주도의 가을풍경
가을은 소리 없이 깊어간다. 가을이 깊어가는 것을 눈치 채기는 어렵다. 원래 가을은 조용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을에 숨을 죽이고, 가을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을은 어느덧 저 혼자 깊어가다가 우리 곁을 떠나가게 된다. 한 없는 아쉬움만 남기고 말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고 차를 탔다. 집에서 6시에 출발했다. 새벽이 밝아오는 올림픽대로를 달렸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시간은 감동을 준다. 새로운 변화가 다가오고, 우리가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다. 오른쪽으로 길게 한강이 눈에 들어왔다. 한강을 끼고 달리는 기분은 남다르다. 서울의 새벽풍경이다. 강물에도 가을빛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그윽한 가을빛을 유심히 살펴보려고 했다.
이른 시간이라 올림픽대로는 전혀 막히지 않았다. 김포공항까지 50분도 안 걸렸다. 공항에 도착하니 7시가 조금 넘었다. 8시까지 기다려야했다. KAL 라운지에 서 커피를 마셨다.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이 지은 ‘인간의 굴레에서’라는 소설을 읽었다. 송무 교수가 번역한 책으로 1988년 민음사에서 출간한 것을 읽었다. 두권으로 되어 있는 책이다. 조용한 장소에서 책을 읽고 있는 느낌도 괜찮았다. 소설이 재미있어서 요새 틈틈이 읽고 있는 책이다. 서머싯 몸이 지은 소설 ‘달과 식스펜스’는 7월에 이미 읽었다. 둘 다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다.
소설가는 온 힘을 다 바쳐 소설을 쓴다. 엄청난 집중력이 있어야 소설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취미로 소설을 써보니 그런 사정을 알게 되었다. 아무 것도 없는 백지의 상태에서 어떤 스토리를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나름대로 많은 재미가 있는 일이다. 혼자서 무엇인가 새롭게 창조하는 기분이다. 인물도 만들고, 그에게 특별한 성격도 부여하고, 개인적으로 세상에 대해 느끼는 생각과 감정도 표현할 수 있다.
8시에 비행기를 탔다. 비즈니스 클래스라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사실 국내선에서는 비지니스 클래스가 별 의미가 없다. 그런데 이번에 갑작스러운 출장계획을 잡다 보니 이코노미 클래스는 자리가 없다고 해서 그냥 비지니스로 잡았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 출발시간에 이코노미도 많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체적으로 아주 힘이 든 여행이 아니면 나는 여전히 이코노미를 즐겨 타는 편이다. 짧은 시간에 공연히 돈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비행기를 타고 잠시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에 일찍 운전을 하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눈을 뜨니 제주공항에 거의 다 가있었다. 미국에서 여행할 때를 떠올리면 한국은 참 좁은 나라다. 영토가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다. 한 시간 비행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자동차로 달려도 5시간 이내면 거의 다 갈 수 있다. 미국에서는 5시간을 달려야 별로 많이 가는 거리도 아니다.
곧 바로 제주지방법원으로 갔다. J 변호사 사무실을 들러 차를 마셨다. 사무실이 꽤 넓었다. 91년에 개업을 했다고 한다. 원래 제주 출신이다. 제주도 인구는 55만여명이고, 변호사는 30여명이 개업해 있다고 한다. 법원 검찰 청사를 새로 잘 지어놓았다. 광주고등법원제주지부도 함께 있었다.
10시 30분 재판을 마치고 Y사장님 사무실에 갔다. 한라신문사 바로 옆 건물에 있었다. 어느 일식당으로 갔다. Y사장님 단골이라고 해서 다금바리를 특별 주문해 놓았다고 한다. 다금바리는 제주도 연해에서 사는 토착어라고 한다. 깊은 바위 부근에서 살면서 전복을 먹고 산다고 한다. 점심식사를 마시고 바닷가 호텔로 갔다.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라마다프라자 제주호텔이었다. 바로 바다 옆에 있어서 로비라운지에서 바다가 바로 보였다. 시원한 바다를 보고 있는 호텔은 무척 컸다. 바다가 보이는 넓은 창가에서 커피를 마셨다. 멀리 바다 위로 배가 몇 척 보였다. 시원한 바다는 어디에서 보아도 똑 같다. 제주도 바다는 그야말로 가을을 품안에 품고 있었다. 가을의 정취가 바다 속에 깊이 잠기고 있었다.
제주시 시내를 관광하고 오래된 제주목관아를 둘러보았다. 제주목관아(濟州牧官衙)는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로 관덕정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이미 탐라국시대부터 성주청 등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관덕정은 보물 322호로서, 병사의 훈련과 무예수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종 30년(1448년)에 창건된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연희각은 목사(牧使)가 집무하던 곳이다. 옛날 관리들이 제주도에서는 근무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워낙 거물들이 귀향와서 머물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오래된 성곽이 있었다. 제주성지를 둘러보았다. 짧은 일정에 많은 구경을 했다. 4시에 제주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대화상대가 없어 고독하다. 그 고독까지 혼자 즐길 수 있다면 대단한 경지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혼자 많은 시간을 길에서 보내고 있으니 머릿속에는 많은 상념들이 떠올랐다. 가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든지 자신들만의 삶이 존재한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작은 성을 쌓아놓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방인의 눈으로 그 성을 피상적으로 보고 지나가는 것은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