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본으로 하는 성씨로는
유명한 강이식 장군의 후예라고 알려진 진주 강씨 가 있고,
고구려 왕족의 후예라는 횡성 고씨가 있습니다.
또 이문진의 후예가 있으며, 고구려를 거쳐간
당나라 8학사의 후예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당나라 8학사는 사실 고구려 출신이라고 내세우면 피해를 입을 것을 염려했다거나, 혹은 그 반대로 선조를 올리다 보니 고구려 시대까지 올린 것에 불과합니다.
성씨라는 것이 어차피 세계가 확실한 몇몇 가문을 제외하고는 앞 시대에 누구와 견강부회하여 족보를 만든 만큼, 고구려 후예임을 자처하는 가문이 적다는 것이 곧 고구려인이 이후 없어졌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 아래는 한메디지탈백과사전 검색 결과입니다
大
성(姓)의 하나. 1985년 경제기획원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115가구 499명으로 274개 성씨 가운데 제178위였다.
〔대산(大山)대씨〕 시조는 대문기(大文記). 조선세종 때 출생하였으며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고 한다. 《밀양대씨세보(密陽大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밀양대씨의 중시조인 대탁(大鐸)의 손자라고 하였다. 세계(世系)·본관을 알 수 있는 문헌이 없으므로 오늘날의 대산대씨가 발해를 세운 대조영(大祚榮)의 후예인지는 알 수 없다. 인구 81(1985).
〔밀양(密陽)대씨〕 시조는 대중상(大仲象). 발해태조인 대조영(大祚榮)의 아버지로 고구려의 무장이었다. 대조영이 발해를 세워 228년 동안 왕권을 유지하였는데 거란에게 멸망하자 애왕(哀王)의 아들 대탁이 자손을 이끌고 밀양에 정착,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 390(1985).
馬
성(姓)의 하나. 본관은 장흥(長興)·목천(木川) 2본이다. 시조는 마려(馬黎)로 그는 백제 창건 당시 온조(溫祚)의 심복 참모였다. 고구려에서부터 온조를 따라 남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조간(鳥干) 등 10명의 공신 가운데 으뜸이어서 좌보(左輔)의 벼슬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마씨의 계보는 끊어지며, 중시조 마육침(馬陸沈)으로부터 다시 세계(世系)를 잇기 시작하였다. 그는 백제가 망할 무렵인 7세기 사람으로 의자왕이 항복하자 나·당연합군에 항전하며 백제부흥운동을 폈다. 마씨는 육침의 9세손에서 목천과 장흥으로 분관하였다. 고려 문종 때 이부상서 (吏部尙書)를 지내고 목성군(木城君)에 봉해진 마점중(馬占中)의 두 아들 중 형인 현(鉉)은 목천을 본관으로 했으며, 동생 혁인(赫仁)은 장흥을 본관으로 쓰게 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7404가구, 3만 864명으로 총 274개 성 가운데 74위였다.
睦
성(姓)의 하나. 본관은 사천(泗川) 단본이다. 시조는 목효기(睦孝基). 고려 고종 때 낭장동정(郎將同正)을 지냈다. 고구려 영류왕 24년,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건너온 8학사 중의 한 사람인 목충이 사천목씨의 선시조(先始祖)라고 한다. 목충은 고구려에 온 뒤 사천에서 살아, 그 연유로 사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으며, 특히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라 성을 목씨라고 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시조는 목충이지만 그 뒤 고려 원종 때까지 약 600년 동안 세계(世系)가 분명하지 않아 목효기를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1721가구, 7088명으로 총 274개 성씨 가운데 114위였다.
房
성(姓)의 하나.본관은 남양(南陽)·수원(水原)·남원(南原)·온양(溫陽)·밀양(密陽) 등 23본이 있으나 시조를 알 수 있는 관향은 남양·수원뿐이다.남양방씨의 시조는 방계홍(房季弘)으로 당(唐)나라의 8학사 중 한 사람인 방준(房俊)의 9세손이다.방준이 고구려에 온 뒤 당성(唐城;지금의 남양)에 정착,남양을 관향으로 하사받았다고 한다.그러나 그 뒤 계대(系代)를 실전(失傳),방계홍을 시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수원방씨의 시조는 방정유(房貞儒)로서 본관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남양방씨에서 분적된 것으로 보인다.1985년 경제기획원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5371가구,2만 2519명으로 총 274개성 가운데 80위였다.
元
성(姓)의 하나. 본관은 원주(原州) 단본이다. 시조는 원경(元鏡)으로 중국 당(唐)나라에서 고구려로 건너와 양국의 국교를 다시 트는 데 공헌하고 보장왕의 책봉에 힘써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 그 뒤 약 1000여 년 동안의 세계(世系)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원경을 시조로 하는 운곡계(耘谷系), 원극유(元克猷)를 시조로 하는 원성백계(原城伯系), 원익겸(元益謙)을 시조로 하는 시중공계(侍中公系), 원충갑(元沖甲)을 시조로 하는 충숙공계(忠肅公系)의 4파가 있으나 모두 본관이 같음이 밝혀졌다. 1985년 경제기획원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2만 4858가구, 10만 4472명으로 총 274개 성 가운데 51위였다.
〔익산(益山)이씨〕 시조는 이문진(李文眞). 고구려 영양왕 때 대학박사 문부전서 오경박사(大學博士文部典書五經博士)로 공신후(功臣侯)가 되었고, 백제공주와 혼인하여 백제로부터 익주(益州;익산의 옛이름)를 식읍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 뒤 익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제를 이어왔다. 인구수 1624(1985).
형
성(姓)의 하나. 중국계 귀화성씨로 본관은 진주(晉州)·장흥(長興) 등이다. 시조는 형옹으로, 고구려 영류왕 때 8학사의 한 명으로 건너와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輔國)을 지내고 남양(南陽)에 정착하였다. 그 뒤 13세손 방이 고려 충목왕 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진주 반성(班城)에 세거하였다. 주요 인물로는 방의 손자 공미(公美)가충렬왕 때 문하시중으로 도원수가 되어 왜구를물리쳐 진양군(晉陽君)에 봉해졌다. 그 밖의 인물로는조선세종때병마사를지낸군철(君哲), 효종 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협(浹) 등이 있다. 전라북도 남원(南原)·임실(任實), 전라남도 화순(和順)·구례(求禮) 등지에 집중분포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1291가구, 5430명으로 총 274성 가운데 117위였다.
남양홍씨〕 당홍계 시조는 홍은열. 당홍계에서는 고구려 영류왕 때 당나라에서 건너온 8학사(學士) 중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河)를 도시조(都始祖)로 보고 있으나 그 이후의 계대(系代)가 확실치 않아, 고려 개국공신 홍은열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세계는 홍은열의 손자대에서 1파, 증손대에서 다시 1파, 6세손에서 1파가 갈리고, 13세에서 또 13파가 갈려 모두 16파로 나뉘었다. 그 가운데 벼슬을 지낸 내력과 후손의 수가 많은 파로는 남양군(南陽君)파·문정공(文正公)파·판중추(判中樞)파·익산군(益山君)파·예사공(禮史公)파·중랑공(中郎公)파 등 6파이다. 6파 가운데 홍주(洪澍)를 파조(派祖)로 하는 남양군파와 홍언박(洪彦博)을 파조로 하는 문정공파가 당홍 전체의 70%를 차지할 만큼 자손수도 많고 융성하였다. 특히 남양군 홍주의 7대손인 홍춘경(洪春卿;조선 명종 때 漢城右尹)의 자손에서만 조선시대에 상신 5명과 문형(文衡) 2명, 왕비 1명, 판서급 20여 명을 배출하였다. 고려조의 인물로는 시조 홍은열 외에 이자겸(李資謙)의 난 때 충절을 지켜 순사한 명필 홍관(洪灌), 충렬왕 때 3번이나 수상직에 오른 홍자번(洪子藩), 공민왕 때 수상을 지낸 홍언박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개국공신 홍길민(洪吉旼;호조판서)과 그의 아들 여방(汝方;이조판서), 세조 때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된 홍윤성(洪允成)과 홍달손(洪達孫)·순손(順孫) 형제가 있다. 성종·연산군 때 호조참판 등을 지낸 홍흥(洪興)은 당대 제 1 의 풍채로 선망을 받았으며, 그의 형 홍응(洪應)은 좌의정에 올랐다.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영의정·대제학에 오른 홍서봉(洪瑞鳳)과 그의 아버지 홍천민(洪天民), 숙부 홍성민(洪聖民), 할아버지 홍춘경(洪春卿)은 따3대4호당(湖堂)딱의 명예를 누렸다. 또한 홍성민의 후예는 그로부터 6대에 걸쳐 7명이 대과(大科)의 영예를 쌓았고, 홍춘경의 아버지 홍계정(洪係貞)부터 따지면 9대 대과라는 조선조 유일무이의 기록을 세웠다. 청백리로 유명한 홍기섭(洪耆燮영조 때 공조판서)은 그의 일화가 《명심보감(明心寶鑑)》에 실려 있고, 그의 아들 홍재룡(洪在龍)의 딸은 헌종의 계비(繼妃)가 되었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洪淳穆)은 아들 홍영식(洪英植)이 김옥균(金玉均)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 대역죄인으로 몰리자 자결하였고, 그의 큰 아들 홍만식(洪萬植의정부 贊政)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못 이겨 음독 자결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만주에서 활발한 항일 무력투쟁을 벌인 홍범도(洪範圖) 장군을 비롯하여 임정(臨政) 연락원으로 활약하다 신의주감옥에서 순국한 홍익성(洪益成), 독립군 사령부 제 3 영장(營長)이었던 홍식(洪植),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순국한 홍학순(洪學淳) 등이 있다.
따토홍계딱 시조는 홍선행. 흥선행의 9대 또는 12대손에서 문희공(文僖公)·정효공(貞孝公)·참의공(參議公)·주부공(主簿公)·대호군공(大護軍公)의 5파가 갈렸다. 문희공파에서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희공 홍언필(洪彦弼)과 그의 아들 홍섬(洪暹)이 유명하다. 특히 홍섬은 선조 때 영의정을 3번 지내며 명상(名相)·청백리로 칭송되었다. 정효공파의 파조인 홍담(洪曇)은 홍언필의 조카로서,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손자 홍희(洪憙)는 인조의 이모부가 된다. 참의공파로는 광해군 때 명신 홍가신(洪可臣;이조판서)이 있고, 홍우원(洪宇遠)은 숙종 때 남인(南人)의 중진으로 이조판서를 지냈다. 대호군공파에서는 홍숙(洪淑)이 대사헌, 예조·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을 지냈고, 손자 홍려(洪礪)는 중종의 사위가 되었다. 병자호란 3학사(三學士)딱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홍익한(洪翼漢)은 홍숙의 현손(玄孫)이다. 이밖에도 조선후기 실학자로 유명한 홍대용(洪大容)을 비롯하여, 근대에 들어와 독립협회의 간부였던 홍정후(洪正厚), 따봉선화딱의 작곡가 홍난파(洪蘭坡), 시인 홍사용(洪思容) 등이 있다.
첫댓글강이식장군은 대동운해,서곽잡록에서만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책이 현재 전하지 않는데 과연 실존인물로 볼수 있을지요? 그리고 진주강씨가 언제부터 시조를 강이식으로 생각했는지요? 행여나 신채호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강이식을 인용한 이후부터 아닌가요? 진주강씨분들께서는 너무 기분나쁘게 듣진 말아주세요. 순수한
첫댓글 강이식장군은 대동운해,서곽잡록에서만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책이 현재 전하지 않는데 과연 실존인물로 볼수 있을지요? 그리고 진주강씨가 언제부터 시조를 강이식으로 생각했는지요? 행여나 신채호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강이식을 인용한 이후부터 아닌가요? 진주강씨분들께서는 너무 기분나쁘게 듣진 말아주세요.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으로 질문했을뿐입니다. 그리구여 김용만선생님 백제계성씨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역사 스폐셜에서 실존인물로 밝혀진걸로 알고 있습니다...
실존인물이라는 근거를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구.. 중국의 요양고씨가 고구려왕족의 후손이라고 하는데요.. 것두 사실일까요?? 요양고씨가 주로 만주에만 거주하는지두 궁금하구요..
진주강씨 보존회에서 요녕성에 강이식장군의 묘소까지 갔다온 기록도 있답니다. 당시에는 강이식장군의 묘가 존재하였는데....몇십년이 지난 현재는 묘소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지명만 남아버렸지요. 이건 중국의 관리 잘못으로....
횡성고씨, 요양고씨가 고구려왕족의 후손인지 여부는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