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만큼 ‘문제적 인간’도 드물다. 그는 저주받은 신탁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는 비극적 인물이다. 그는 존속살인과 근친상간이라는 전과 탓에 숱한 연극무대의 주인공으로 호출되거나 정신분석학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혁혁한 족적을 남겼다. 그리스 극작가 소포클레스도 오이디푸스와 그 가족의 비극사를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이 오이디푸스-안티고네’ 3부작으로 극화했다.
오이디푸스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안티고네」의 작품구성은 비교적 단순하다. 안티고네가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요구하며 벌어지는 갈등 구조가 서사의 중심 얼개다. 오이디푸스 왕이 반미치광이 상태로 유랑을 떠나자 두 아들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테베의 왕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인다. 둘은 1년씩 돌아가며 왕 노릇을 하기로 약속했지만 먼저 왕이 된 에테오클레스는 전혀 그럴 맘이 없었다. 약속 파기에 화가 난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의 군대를 빌려 테베를 침략하지만 둘은 전쟁 중에 모두 죽고 만다.
새로 왕이 된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를 테베의 수호자라며 성대하게 장사를 치러준다. 반면 폴리네이케스에게는 반역자의 낙인을 찍어 시신이 짐승 밥이 되도록 방치하고 장례금지 명령까지 내린다. 안티고네는 동생 이스메네에게 오빠의 장례를 치르자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결국 혼자서 오빠의 장례를 치른 안티고네는 크레온에게 끌려가 고초를 받다 자살을 선택한다.
지난해 10월3일부터 13일까지 부산의 ‘공간소극장’에서는 연극 『안티고네』가 상연됐다. 대만의 극작가이자 연극 연출가인 왕모린(王墨林)이 오이디푸스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안티고네」를 원작삼아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연극무대에서 만나는 것은 이제 별반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왕모린의 『안티고네』는 공연 전부터 많은 화제를 뿌렸다. 한국․중국․대만 세 나라 배우가 공동 작업을 한다는 사실 외에도 파격적인 형식과 내용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왕모린의『안티고네』는 신화와 역사를 오가며 동아시아 세 개 나라가 공통으로 경험했던 비극의 현대사를 변주한다. 1947년 2월28일 중국본토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에서 벌인 백색테러 사건, 1980년 5월18일 군사독재가 광주에서 벌인 피의 학살극, 그리고 1989년 6월4일 중국공산당이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는 민중들을 무참하게 진압한 천안문사건이 극의 배경이다. 이들 사건은 시공간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가폭력이 자행됐다는 역사적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연극 『안티고네』는 신화 속에 웅크린 유령들을 현실세계로 소환하면서 시작된다. 역사의 무대에 불려나온 안티고네(홍승이 분)는 크레온 왕(백대현 분)에게 폴리네이케스(하우번 분)의 시신을 방치한 이유를 따져 묻고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한다. 장례는 인간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신성불가침의 권리라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크레온은 앵무새처럼 ‘법대로 정신’만 되뇌며 시신의 방치를 정당화한다.
여기서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은 ‘망각’된 사건을 은유한다. 시신유기에 대한 안티고네의 책임추궁은 세 나라에서 각기 경험했지만 망각된, 끔찍한 국가폭력의 실상을 환기시킨다. 극중 크레온은 테베의 독재자이자 동아시아에서 수많은 민중을 학살한, 타락한 권력을 의미하는 중의적 캐릭터다. 이에 맞서는 안티고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민중성의 한 전형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이 상징하는 바는 자명하다.
동아시아 세 나라가 공유했던 역사적 경험을 고려할 때 현실 속 안티고네의 외침은 결코 평탄치 않아 보인다. 한국과 중국, 대만은 과거 식민지배라는 아픈 역사를 경험했고 60년 이상 분단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분단과 냉전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강제하고 내재화시킨 유구무언의 실어(失語)적 상황은 민중들의 삶을 철저하게 왜곡한다. 특정한 논리와 틀에 고정된 언술은 ‘차이’를 드러내는 것에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극중 4명의 배우가 한 무대에 서서 공통의 기억을 말하지만 자기만의 언어를 사용한 탓에 소통불가해한 상황이 빚어지는데 연출자가 정확히 의도한 바다. 자막의 도움을 받아 타인의 언어를 해독하는 관객들의 사정도 매한가지다. 구체적 사건이 지배 언어의 맥락에 갇히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고로 보면 된다.
무대에 배치된 높이가 다른 세 개의 단은 각각 한국과 중국, 대만을 상징하는 공간적 배경이다. 각각의 단은 뒷면에서 앞면으로 경사가 져있는데 자못 위태롭게 보인다. 배우들은 경사진 부분에서 미끄러지거나 추락한다. 경사면을 굴러 내린 돌이나 흙은 관객들 발밑까지 굴러가기도 한다. 이때 단의 경사면은 추락을 의미한다. 국가폭력으로 희생당한 뭇 생명과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나’도 그 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제가 아닐 수 없다.
『안티고네』의 배역들은 자신이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 상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독백의 형식을 빌려 여러 문학적 텍스트들을 관객에게 전달할 뿐이다.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의 일부 단락들이나 홍성담의 5․18 「판화시집」, 국가폭력에 대한 각국의 전언들이 그렇다. 극중 배우들은 맡은 배역 외에도 코러스로 등장해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수많은 민중들에게 운율적 제의를 벌이고 장엄한 레퀴엠을 헌정하기도 한다.
극중에서 갈등의 또 다른 한축은 안티고네와 동생 이스메네(쳉윈첸 분)가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두고 보이는 상반된 입장이다. 안티고네는 결단을 통해 죽음을 선택하지만 이스메네는 살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삶을 수용한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죽음과 삶을, 진실과 거짓의 이분법적 틀에 고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유토피아적 미래를 설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안티고네의 희생이 이스메네의 새로운 각성을 이끌어내고 있어서다. 그때 안티고네의 희생은 단절이 아니라 이스메네의 삶과 일상으로 전이돼 지속가능한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준다. 지금 당장은 비루한 현실을 감내해야 하겠지만.
‘순간에 / 모든 것이 찢어져 바람에 날려가 버린다 / 그 동안 읽었던 수많이 많은 책들이 / 그토록 그리던 고향의 아름다운 산하가 / 무수히 속삭였던 연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 모두 모두 찢어져 / 갈기갈기 찢겨져 / 바람에 날려가 버렸다 / 순간에’(홍성담 판화시집 중)
그래도 일상은 계속된다. 일상이 지속되는 한 저항은 살아남고 민중은 미래를 전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