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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예술 사임당 신씨는 1504년(연산군 10년) 10월 29일 강릉 북평촌(오죽헌) 외가댁에서, 고려 건국공신 장절공 신숭겸장군의 18대 손인 신명화공과 이사온공의 따님이었던 이씨부인의 사이에서 둘째 따님으로 태어나 외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사임당은 어려서 부터 조선조 화단의 태두 안견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산수, 포도, 초충도에 남다른 솜씨를 보였으며, 여성으로서의 교양과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19세 때 이원수공과 혼인한 후에 아버님이 일찍 별세 하셨으므로 홀어머니 이씨를 모시고 친정에 살면서 서울 시댁과 율곡리 (현 경기도 파주)를 내왕 하였다.
사임당이 33세 되던 해 1536년(중중 31년) 12월 26일 새벽에 검고 큰 용이 바다로 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에 이르러 문머리에 서려있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으니 그가 바로 율곡선생이다. 그 방을 몽룡실이라 하는데, 일설에는 사임당이 율곡선생을 잉태하신 곳이 봉평이라고도 한다. 그 까닭은 부군 이원수 공이 수운판관으로 여러 곳을 다니게 되었는데 지금의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의 속칭 판관대에 우거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38세 때에 강릉 친정을 떠나 서울 시가(수진방 : 현 청진동)로 옮겨 사시다가 삼청동에 돌아가시니 그 때 나이 48세 였다.
사임당은 일찍 학자의 집안에서 자라나 엄격한 교훈 밑에서 유학의 경전과 명현들의 문집을 탐독하여 시와 문장에 능하였다. 글시에도 고상한 정신과 기백이 넘쳐 흐르며 기품있는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림에 대한 예찬은 많은 사람들의 발문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여류의 으뜸이다. 또한 시, 서, 화에 걸친 수많은 걸작들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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