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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아오름샘으로 가는 길. 비탈을 따라 쌓인 눈에 무릎까지 빠져들었지만 마냥 즐거운 시간이었다. 멀리 배경을 이룬 서귀포 앞바다가 햇살로 인해 은빛으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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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궂은 날씨를 보여 주던 12월 둘째 주, 운이 좋다면 최고의 한라산 설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서둘러 일정을 잡고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생각해 보니 2013년 한 해는 봄부터 가을까지 여러 번 제주를 찾았다. 그때마다 늘 가슴 설레는 풍광을 풀어놓아 평소 막무가내로 좋아하던 제주에 더욱 단단히 홀린 터였다. 이번 여행에서 눈 덮인 한라산을 만난다면 제주로 인한 열병은 무척이나 오래 지속될 것 같았다.
강풍 소식은 김포공항에서부터 들었지만 도착한 날은 종일 흐린 가운데 세찬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고, 그 비를 타고 우박까지 오락가락하며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날씨가 이어졌다. 다음날로 예정된 산행이 적이 걱정이었다. 두껍고 짙은 회색빛 구름에 휩싸여 어둑어둑하던 한라산 쪽은 아예 쳐다볼 생각도 못 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한라산 날씨는 ‘내일 흐림’…. 그러나 사방이 바다에 둘러싸인 제주도, 특히 한라산의 날씨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워,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 붓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맑아지기도 하니 그 예측불허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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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넓은드르 전망대에서 본 서귀포시와 앞바다, 그리고 섬, 섬, 섬. 2 병풍바위를 올라 만난 선작지왓 일대의 설경. 이때부터 백록담 화구벽 눈꽃의 감동이 내내 이어졌다.
- 영실로 가려면 스노체인은 필수!
오랜 서울살이를 하다가 고향인 제주로 내려와 범섬이 빤히 건너 보이는 서귀포시 법환포구에서 카페 ‘바당소풍’을 운영하고 있는 허재성 기자를 6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포구와 범섬이 떠 있는 제주 바다가 창 가득 펼쳐지는 그의 카페엔 허 기자의 고향 후배인 오상수씨도 와 있었다.
“내일 이 친구도 같이 갈 겁니다. 힘 좋은 제주 산악인이라 러셀 좀 하라고 불렀어요.”
허 기자와 오상수씨는 서귀포시 토평동이 고향으로, 제주의 사계를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풀어 낸 <한라산 편지>를 쓴 한라산국립공원의 오희삼, 산악인 고 오희준 형제와도 막역한 사이다. 그래서 한라산 일행은 넷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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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산행 출발 전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있는 취재진. 겨울산행은 바람이 파고 들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2 선작지왓의 눈길을 걷고 있는 이귀정씨. 2월쯤 되면 오른쪽 빨간 깃발을 매단 막대기가 거의 묻힐 만큼 눈이 쌓인다.
- 밤새 찬바람이 불어 재끼더니 다행히 새벽 하늘은 맑았다. 법환포구 주차장에서 다시 만난 우리는 영실로 오르는 1100도로가 얼어 있을 것이라 여겨 스노체인을 갖춘 오상수씨 차량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해발 650m의 거린사슴전망대에 이르자 예상했던 대로 빙판 길이다. 체인을 장착했다. 때마침 떠오른 아침 해. 섶섬과 위미항 사이 먼 바다에서 떠오른 태양에 서귀포 전체가 황금빛 아침을 맞고 있었다.
영실주차장부터는 차량출입을 통제하고 있어서 오백나한전이 있는 등산로 입구까지 2.5km를 걸어야 했다. 어제 염려와는 달리 하늘은 청명하다 못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렀고, 영실로 들어설수록 사방은 하얗게 바뀌어가며 환상적인 설경을 풀어놓고 있었다. 어제의 강풍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사방이 고요하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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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린사슴 전망대에서 만난 일출. 서귀포시가 황금빛 아침을 맞고 있었다.
- 영실기암 설경의 황홀함 잊지 못할 듯
“한라산 산행이 두 번째인데, 몇 해 전에는 1월이었어요. 그때도 날씨가 딱 이랬는데.”
“이야~ 오늘 이리 맑은 한라산을 만난 게 다 귀정씨 덕분이군요. 다음에 날씨 안 좋을 때 꼭 모시겠습니다.”
더없이 맑고 푸른 하늘에 반한 이귀정씨와 오상수씨의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등산로 입구 식당에서 아침을 사 먹고 출발하려니 시간은 벌써 오전 10시. 윗세오름대피소에서 돈내코코스로 입장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오후 1시여서 우리에게는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그러나 병풍바위와 오백장군바위가 펼쳐진 영실기암의 설경이 너무 아름다워 걸음은 자꾸만 느려졌다. 봄날의 연초록빛과 여름날의 무성한 신록, 금단청(錦丹靑)을 보는 듯 화려하던 가을 단풍이 그리도 아름답더니 눈에 덮여 숫제 하얗게 바뀐 겨울풍광을 대하고 보니 옛 사람들이 왜 이곳을 ‘하늘로 통하는 문(通天)’이니 ‘신들의 거처(靈室)’라는 예사롭지 않은 이름으로 불렀는지 수긍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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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영실기암의 절경으로 인해 걸음은 자꾸만 느려졌고, 카메라가 바쁘게 움직였다. 2 영실코스에 접어들자 온통 눈꽃세상이 펼쳐졌다.
- 주상절리를 이루며 하늘로 솟은 시커먼 병풍바위에 설화가 피어 신비롭기 그지없고, 오백장군 바위 하단부엔 겨우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한다는 빙폭들도 보였다. 이 구간에서는 그 누구도 서두름이 없었다. 불레오름, 이스렁오름, 돌오름, 영아리오름, 왕이메오름, 당오름, 정물오름, 원물오름(원수악), 산방산, 송악산, 범섬, 섶섬…. 발아래 펼쳐진 풍광들은 제주가 왜 오름의 왕국인지를 잘 보여 주었다.
영실기암 위, 키 큰 구상나무군락이 끝나고 관목지대가 나타나며 선작지왓의 비경이 펼쳐졌다. 봄철 너른 고산평원을 화려하게 수놓던 털진달래와 제주조릿대는 눈에 뒤덮여 흔적도 없어졌고, 그 끝에 날선 화구벽의 칼날능선을 눈꽃으로 장식한 백록담이 경외감마저 들게 했다. 하도 높아 하늘의 은하수를 붙잡을 정도여서 붙은 이름인 ‘한라(漢拏)’. 그에 걸맞게 해발 1,950m로 남한 최고봉인 한라산 백록담의 설경은 그 위용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윗세오름대피소에서 1,500원짜리 육개장 컵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서둘러 돈내코코스로 들어섰다. 등산로를 따라 설치된 로프와 빨간 깃발을 단 긴 막대엔 10cm가 넘게 상고대가 생겨나 눈길을 끌었다. 일대의 구상나무들은 아예 눈으로 범벅되어 본래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그대로 ‘스노몬스터’가 되어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설수록 화구벽의 설경은 감동의 크기를 더해 갔다. 모두 “대박~!”, “아~”, “끝내준다 끝내줘!” 같은 짧은 감탄사만 연발할 뿐, 뭐라 표현치 못할 경이로움에 몸서리쳤다.
서귀포 최고의 전망대를 지닌 돈내코코스
2009년 말, 15년 만에 재개방된 돈내코코스는 거대한 성채를 이룬 한라산 남벽의 위용을 가까이서 조망하며 걸을 수 있는 10km쯤의 등산로다. 특히 서귀포시 등 제주 남쪽 풍광이 한눈에 들어와 어느 코스 못지않게 조망이 즐겁다. 백록샘과 방아오름샘, 방아오름 전망대와 등터진괴, 남벽분기점 전망대, 넓은드르 전망대, 평궤대피소, 살채기도 등 이 코스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곳도 매력적이다. 그러나 들머리로의 대중교통 연결이 여의치 못하고, 승용차를 이용할 시 회수문제도 난감해 다른 코스에 비해 찾는 이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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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행에 앞서 방한화를 벗고 등산화로 갈아 신었다.
- 돈내코코스의 최대 경관인 남벽은 거대한 절벽을 이룬 가운데 삐죽삐죽 솟은 검은 바위들이 붙어 있어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옮겨놓은 듯 화려했다. 남벽 앞으로 펼쳐진 방아오름 일대는 더없이 평탄한 지형을 보여 주는 광활한 고산평원으로, 희귀한 고산식물들로 가득한 곳이다. 남쪽으로 시선이 간 곳엔 서귀포 앞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졌다. 삼면이 바다인 대한민국에서 바다란 참 흔한 풍광이다. 그러나 제주의 바다는 다르다. 맑고 푸른 제주의 바다는 어디서도 보기 힘든 빛깔과 매력을 지녀 사철 많은 여행객을 불러 모은다. 한라산에 올라 조망하는 제주의 남쪽 바다는 은비늘마냥 찬란했다. 태양빛의 각도에 따라 오색 무지갯빛을 띠어 신비롭기도 했다.
남벽분기점을 지난 얼마 후 남벽이 잘 보이는 곳에 있는 작은 돌무더기 앞에서 오상수씨와 허 기자가 걸음을 멈췄다.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몇 개의 돌을 쌓은 작은 탑이었다.
“희준이 형을 추억하며 쌓은 겁니다. 참 좋은 형이었죠. 남벽을 특히 좋아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떠나간 악우를 잊지 않고 있었다. 잠시 묵념하는 그들의 모습에 코끝이 찡해 왔다. 그러고 보니 시리도록 푸른 남벽 위의 하늘빛이 그가 오르던 히말라야의 하늘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닿은 동그란 데크의 넓은드르 전망대. 뒤돌아 본 백록담과 남벽은 여전히 감동적이었고, 앞바다에 섶섬, 문섬, 범섬, 새섬을 품은 서귀포시가 수많은 오름들 너머로 딴 세상인양 까마득했다.
- 교통(지역번호 064)
제주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서귀포시 중문(하나로마트 맞은편 정류장)을 오가는 버스가 영실매표소와 어리목매표소를 들른다. 동절기(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1일 7회(제주 출발 08:00, 09:00, 10:00, 11:00, 12:20, 13:40, 15:00 / 중문 출발 09:15, 10:15, 11:15, 12:15, 13:35, 14:55, 16:15) 운행하며, 제주에서 어리목까지는 35분(1,500원), 영실까지는 50분(2,500원) 걸린다. 중문에서 영실은 20분(1,000원), 어리목은 40분(2,000원). 승용차를 이용해 영실이나 어리목으로 가려면 반드시 스노체인을 장착해야 한다.
돈내코탐방안내소로 가는 길은 좀 복잡하다. 서귀포 시내서 돈내코유원지까지 30분 간격으로 시내버스가 다니지만 유원지에서 탐방안내소까지가 멀어 불편하다. 택시나 승용차를 이용하는 게 좋다.
숙박(지역번호 064)
영실 입구에 ‘서귀포자연휴양림(738-4544)’이 있다. 숲속의 집 5인실은 4만 원(성수기 7만4,000원), 6인실 5만 원(9만 원), 8인실 6만 원(1만4,000원)이며, 산림휴양관 4인실은 3만2,000원(5만7,000원), 5인실 4만 원(7만3,000원), 6인실 5만 원(8만9,000원), 8인실 6만 원(1만2,000원)이다. 캠프장 야영데크는 1일 6,000원.
제주올레가 지나는 서귀포 일대의 해안가에 게스트하우스가 많다. ‘루시드봉봉’(대정읍, 010-6388-8037), ‘율 게스트하우스’(법환동, 010-9716-3416), ‘가름 게스트하우스’(법환동, 010-9411-4490).
맛집(지역번호 064)
서귀포시 대정읍의 송악산 입구(마라도 유람선 매표소 앞)에 ‘뼈 없는 은갈치 조림’을 전문으로 하는 ‘춘심이네(794-4010)’가 있다. 뼈 없는 은갈치 조림은 5만 원(2인), 6만 원(3인), 7만 원(4인)이고, 통갈치구이는 4만5,000원이다. 100% 제주 서귀포 앞바다에서 잡은 최상품의 은갈치만 사용한다. 은갈치 조림에는 고등어구이와 갈치회가 함께 나오며, 등뼈를 발라낸 후 숟가락을 이용해 통째 떠먹는 통갈치구이가 특히 일품이다. 갈치죽(1만 원)과 갈치회덮밥(1만 원), 갈치회(3만 원)도 인기다.
돈내코에서 가까운 법호촌과 토평에는 상록식당(762-4974), 동성식당(733-6874), 토평골(732-929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