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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일사랑의 쉼터 (일운회) 원문보기 글쓴이: 만주를 찾아서
제갈량(諸葛亮, 181~234)
자는 공명(孔明).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출신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세상을 피해 은거했음에도 그 명성과 학식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불렸다. 207년에 삼고초려를 통해 유비에게 발탁된 후 천하 삼분지계를 준비한다. 다음 해에 오나라의 손권(孫權)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였고, 적벽대전에서 계략을 써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다. 유비는 점점 더 제갈량을 신임했고 황제에 오른 후에는 그를 승상으로 삼았으며 세상을 떠날 때에는 나라와 자식을 모두 부탁했다. 유비는 자신의 아들 유선(劉禪)이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황제에 올라도 좋다고 유언하였으나 제갈량은 끝까지 유선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두 번에 걸쳐 출사표를 쓰고 직접 군을 지휘하여 출병하였으나 전쟁 도중 사망하고 만다. 그의 출사표는 지금까지도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문장으로 꼽힌다.
생애
제갈량의 생애는 크게 형주 시절, 입촉과 유비가 죽기 전, 그리고 유선대에 이르러 남정과 북벌을 할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출생과 형주 시절
181년 낭야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諸葛珪)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친형은 제갈근(諸葛謹)이고, 친동생은 제갈균(諸葛均)이다. 15세가 되기 전에 양친을 여의어 한동안 백부 제갈현(諸葛玄)이 예장에서 제갈량을 돌봤다. 제갈현이 죽자 형주로 온 제갈량은 스스로 농사를 짓고, 양보음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당시 형주는 난세를 피해 온 명망 높은 선비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인맥을 넓히고 지식을 쌓았다.
당시 유비도 여남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 유표(劉表)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삼고의 예를 하여 결국 제갈량을 영입하게 된다. 이때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안을 한 계책이 그 유명한 '천하삼분지계' 이다.
하지만 원소(袁紹)를 정벌하고 남하하는 조조에게 맞설 수 없던 유비로서는 남으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제갈량은 손권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이 되었다. 손권은 제갈량의 요청에 응해 유비와 동맹을 맺었으며, 적벽에서 조조를 격파한다.(적벽대전) 209년 겨울의 일이다.
연의에서와 달리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어떠한 일을 했는지는 나와있지 않으나, 《선주전》에서는 조조를 적벽에서 격파하고 남군까지 추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산양공재기》또한 화용까지 유비가 조조를 추격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본다면, 이때 제갈량은 유비의 군사참모로서 활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당시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음을 들어 삼국지연의에서와 같은 그러한 활약은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후 유비의 형남 4군 정벌에서도 제갈량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 군사중랑장이 되어 내정에 힘썼다는 기록을 본다면, 내정에서의 수완은 이미 유비군 내에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입촉 및 유비 사망 전까지
연의에서는 방사원(龐士元)이 죽자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정사에서는 유비와 방통이 부수관에서 성도로 향할 때에 형주에서 호응하여 서쪽으로 진군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214년 유장(劉璋)이 항복한 후에는 '군사장군'에 임명이 되는데, 제갈량은 이후 유비가 황제가 되어 승상이 되기 전까지 이 직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위나라에서 한중 공방전을 치르기 전까지 제갈량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점 등을 들어 제갈량이 입촉 당시 혹은 유비가 죽기 전까지 중용이 안되었다고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가후전에서는 이미 조조가 한중을 공략하기 전에 제갈량의 정치가 뛰어났다고 평가했다는 점, 또한 유비가 한중왕이 되기 전까지 좌장군이었지만 황충(黃忠)은 한중전 당시 하후연(夏侯淵)을 전사시켜 좌장군보다 높은 정서장군이 되었다는 점에서, 군사장군이라는 직위도 유비가 임시로 만들긴 했으나 그 권한이 상당했으리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새로운 법률인 촉과를 만드는 등 익주의 구조조정에 노력했다.
유비와 조조의 일생일대의 격전이었던 한중 공방전 역시 연의에서는 신산귀모의 지략을 펼쳐서 조조를 격파한 것으로 묘사가 되어있으나 실제 유비를 수행한 참모는법정(法正), 황권(黃權)이며 이때 제갈량은 성도에서 유비를 위해 군사물자를 조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승자(위/진)의 입장에서 쓰이는 것이니 정사라고 해서 모두 사실로 믿을 수도 없으며, 병참 또한 전쟁에 중요하므로 제갈량이 중용되지 못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유비가 한중왕이 된 후에도 계속 군사장군으로 머물러 있었지만, 황제가 된 후에는 조정의 수장인 승상(丞相)이 된다.
223년 유비가 이릉 대전에서 패하자마자 성에서 놀라 죽을 때 이엄(李嚴)과 함께 탁고를 받는다.
남정
유비(선주)가 죽고 유선(후주)이 황제로 즉위했을 때에도, 그리고 죽기 전까지 줄곧 제갈량은 승상으로 14년간이나 있었다. 당시 익주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雍闓),고정(高定), 주포(朱褒) 등이 손권으로부터 암약을 받고 소란을 피우고 있었으므로, 제갈량은 225년 봄에 남정을 개시하여 그 해 가을에 반란을 평정한다.
올돌골이나 목록대왕 등의 일화는 연의의 창작이지만 맹획(孟獲)은 실존인물로 남중 반란은 유언(劉焉)과 유장 부자 때의 중앙 통제에서 벗어난 남부 지역 이민족과 토착 호족들이 반란이며 유비가 한중을 정벌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당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엄에게 평정됐고, 유비 사후 손권의 사주로 일어난 반란은 제갈량이 그 유명한 칠종칠금 일화를 남기며 평정하였다. 나중에 또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분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지나친 법치주의에 대한 불만이었기 때문에 역시나 금방 평정되었다.
하지만 연의에서 묘사된 것처럼 올돌골의 오과국 군을 지뢰로 격퇴하였다는 것은 허구이며 정사에서는 칠종칠금에 관한 설명을 포함하여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다만 칠종칠금은 남만까지의 여정 등을 고려할 때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북벌
227년 제갈량은 유비에게 부탁받은 후사를 실현하려고 위나라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출진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은 원문 350자로, 이것이 그 유명한 ‘출사표’이다. 이는 제갈량이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황제에 대한 여러 가지 훈계를 적어넣은 명문이다.
228년 봄 제갈량이 기산을 침공하자 남안과 천수, 안정 3군이 호응하고 강유(姜維)가 제갈량에게 귀순한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마속(馬謖)이 제갈량의 지시에 어긋난 행동을 해 장합(張郃)에게 대패, 마속을 처형하고(읍참마속 또는 휘루참마속)(삼국지연의) 스스로 우장군으로 지위를 낮추면서 승상의 사무를 대행한다. 같은 해 겨울 제갈량은 다시 위나라를 침공해 진창을 포위하지만, 학소(郝昭)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식량이 다 떨어져 귀환했다. 이때 추격해온 왕쌍(王雙)을 물리친다.
229년 제갈량은 또다시 위나라의 영토를 침공해 곽회(郭淮)를 격파하고 무도와 음평을 평정하여 그 공로로 승상에 복직했다.
231년에도 기산을 침공하여 상규에서 사마의와 싸워 대파시킨다. 그러나 식량이 다하여 퇴각했고, 그때 추격한 장합을 목문에서 사살시킨다.
234년 제갈량은 10만 대군을 일일이 통솔해 오장원에 본거지를 구축하고 사마의와 대치했다. 제갈량은 손수레(목우와 유마)를 사용해 식량을 수송하고, 식량 공급이 끊어지지 않도록 병사를 나누어 둔전시킨다. 사마의와 대치한 지 100일이 넘어 그해 8월 병으로 쓰러져 진중에서 54살의 나이에 죽는다. 유언대로 한중의 정군산에 매장되는데, 청렴하고 축재를 하지 않아 집에는 뽕나무 800그루와 척박한 농토 15경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때 제갈량은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북두를 향해 기도한 뒤 7일간 등불이 꺼지지 않으면 수명이 12년 연장된다는 의식을 행했지만, 6일째 되는 날 위나라군이 침공한 사실을 알리려고 달려온 위연(魏延)이 등을 밟아 불이 꺼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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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볼거리]
북벌 가기전 올린 실제 출사표 전문
제갈량의 실패한 인재 임용
1. 마속 : 제갈량은 1차 북벌에서 천수 등 3군의 호응을 받아내고, 곽회와 조진 등 제갈량을 맞아 싸워야 했을 위군을 상대로 별동대를 운용하여 엉뚱한 지역에 묶어놓는 등 선전을 펼쳤다. 그러나 가정에서 적장 장합을 맞아 싸울 인물을 선정하면서 주위에서 추천한 위연, 오의 등을 보내지 않고 마속을 보냈다. 마속은 제갈량의 군령을 어기고 산에 올라 싸웠기에 패배하였고, 여기서 기인한 파장 효과로 제갈량의 북벌 계획은 무너졌으며 제갈량의 군대가 한중으로 총퇴각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마속은 군령을 어긴 죄로 참수.
2. 이엄 : ( 본래는 유비가 임용하고 간 인물이지만 ) 상서령, 표기장군 등 고관직을 역임하며 제갈량이 북벌을 하는 동안 뒤에서 군량과 물자를 보급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그는 제갈량에게 구석을 받고 왕이 되기를 권하거나, 익주에서 군을 떼어 내 파주를 만들고 자신이 자사가 되려는 등의 이상 행동을 보이다가 제갈량에게 여러 차례 제지당한 바 있다. 이후 군량 운송에 실패하고, 그 죄를 덮기 위해 부하 관원을 죽이고 황제와 승상에게 거짓말을 하였다가 모든 일이 들통나자 삭탈, 유배됐다. 아들 이풍은 중랑장으로 계속 복무했다.
3. 요립 : ( 이 녀석도 ; ) 제갈량이 방통과 더불어 큰 일을 이룰 만한 선비라고 칭찬한 바 있으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조정의 인재 임용을 업신여겨 관우를 비롯한 수많은 촉한의 인재진을 모욕한 끝에 비방죄로 삭탈당했다.
4. 내민 : ( ... 흠 -_- ; ) 요립과 비슷한 케이스. 후배 인사들을 업신여기고 과도한 언사를 남발하여 여러 번 쫓겨났다.
제갈량의 성공한 인재 임용
1. 장완 : 미말관직에 있을 때 술만 마시고 일을 게을리 한 죄를 들어 유비가 죽이려 했을 때, 제갈량이 극구 만류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후 제갈량에 의해 조정 중신으로 발탁됐으며, 장예와 더불어 제갈량이 누구보다 믿고 아끼는 인재로 활약했다. 촉한 조정을 다잡고 후방 수송 업무도 도맡아 처리했으며, 제갈량 사후에는 위연의 난을 수습하고, 조정을 비방한 양의를 삭탈하는 등 적절한 사후 조치를 취했다. 이후 공정하고 훌륭한 정치를 펼쳐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2. 장예 : 옹개 등이 난을 일으켰을 때 사로잡혀 오나라로 보내졌다. 제갈량이 오나라와의 국교를 회복하면서 장예의 석방을 요구했는데, 이에 손권이 잠시 장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본 바 언변이 훌륭하고 고사에 밝아 큰 인재로 생각했다. 손권은 장예를 석방하였으나, 이내 후회하여 그를 쫓았다. 그러나 장예는 무사히 도망쳐 제갈량에게 중용됐다. 장완과 더불어 익주의 중심 인사로 활약했다.
3. 비의 : 본래 관직도 명성도 낮았으나 제갈량이 특별히 그를 우대하고, 동화도 그를 두고 자신의 아들보다 훌륭한 인재가 될 것이라는 뉘앙스의 평가를 하였다. 외교 사신으로 오나라에 갔을 때 훌륭한 언변과 태도로 나라의 명예를 욕보이지 않았고 손권으로부터 " 천하의 미덕을 갖춘 사람 " 이라고 평해졌다. 위연과 양의의 관계를 중재하는 일에도 힘썼고, 제갈량 사후 양의와 더불어 군을 수습했다. 조상이 한중을 침공했을 때 대군을 인솔하여 맞싸워 조상군에 큰 피해를 입히는 군사적 전과도 올렸다. 진수는 비의전에서 " 비의의 국가를 위한 공적과 명성은 장완과 필적한다 " 고 언급했다.
4. 등지 : 제갈량이 오나라와의 외교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 특별히 제갈량과 상의하여 외교관으로 선발됐다. 등지는 오나라와의 국교를 성공적으로 회복시켰고, 손권은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여 양국의 외교가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성을 얻었다. 1차 북벌에서는 조운과 더불어 조진과 싸웠고, 248년에는 부릉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했다. 천성이 강직하여 많은 이들과 화합하지 못했다고 하나, 누구보다도 청렴했으며 상벌 판단에 명확하고 병사들을 잘 진휼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5. 왕평 : 위나라에서 항복한 항장으로, 마속이 패배한 후 장합의 추격을 막고,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무사히 돌아와 제갈량이 그를 중용했다. 노성전에서는 오부영군을 이끌고 장합과 맞서 싸워 그를 퇴각시키는 전공을 올렸고, 제갈량 사후 군이 퇴각할 때 위연이 난을 일으키자 그의 병사들을 흩어버리는 대공을 세웠다. 이후 오의의 후임으로 한중을 맡아 지켰으며, 조상이 한중을 침공하자 3만에 불과한 병력으로 10여 만의 조상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수비전을 펼쳐 한중을 지켜냈다. 북쪽 경계를 지키며 명성과 치적을 드러냈다 평해졌고, 성품이 강직했으나 행동이 독실하고 농담을 하지 않는 등 훌륭한 면모도 많았다.
6. 여예 : 신도, 면죽에서 현령을 지내면서 백성들로부터 최고의 정치를 펼친다는 극찬을 받았다. 이전 염부교위, 전조도위의 관직에서 소금과 철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또한 여러 군에서부터 보내지는 병사들이 화합하지 못하자 여예가 이들을 위로하고 엄격히 감독하여 탈영병을 없게 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제갈량 사후 탈영병이 늘어나자 여예가 이를 방지하고 지도하여 잘못된 기풍을 단절시켰으며, 상서령에 취임하여 동윤이 힘들여 처리했던 사무를 맡아 보며 " 각종 사무가 남지 않고 문 앞에서 기다리는 빈객들이 없을 " 정도로 훌륭한 행정 능력을 선보였다. 대단히 법률에 엄격하여 불평을 받기도 했으나, 성품은 청렴하고 겸허하였다.
7. 마충 : 유비가 죽기 전 현인으로 평가한 바 있다. 제갈량이 남중의 반란을 평정할 때 문하독 신분으로 참여했으며, 장가군을 수복하고 지역을 위무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장익의 뒤를 이어 남중 지역을 관리했는데 훌륭한 치적을 쌓고 깨끗한 명성을 날려 만족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여러 지역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는 군공도 겸하였다. 마충이 죽자 장례식에 참석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묘당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는 관대하고 도량이 크며 결단력이 있고 위엄과 은혜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8. 장익 : 유비의 익주목 시절 하급 관리인 서좌에 있었다. 231년 내강도독에 임명됐으나, 엄격한 법 집행으로 만족들의 환심을 사지 못해 마충과 교체됐다. 그러나 그는 마충이 도착하기 전 물자를 축적하고 반란을 진압할 토대를 마련하는 공을 세워 마충이 난을 진압하는 데 간접적으로 공을 더했다. 제갈량은 이로 인해 장익을 높게 평가하였다. 장익은 장완, 비의, 강유 대에까지 활약했으며 강유의 북벌에 함께 행동했다. 강유에게 옳은 간언을 올리는 등 노력했으나 강유와 화합하지는 못했다. 검각에서 종회를 상대로 최후까지 항전했으나, 유선이 항복하자 따라 항복하였다. 이후 성도에서 종회의 난에 휘말려 죽었다.
9. 양홍 : 본래 이엄보다 낮은 관직에 있었으나, 제갈량은 그와 여러 문제를 상의한 후 그의 식견을 높게 평가하여 그를 촉군의 태수로 삼았다. 당시 이엄이 건위군의 태수였으므로 동렬에 놓인 셈, 또한 여러 사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익주치중종사로 전임했다. 유비가 이릉에서 패한 후 황원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으며, 제갈량과 장예, 상랑 등의 인재 임용에 관한 상의를 하기도 했다.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공사를 자신의 집안일처럼 걱정하며 돌봤고 효성스럽다고 칭해졌다.
10. 하지 : 문하서좌의 관직에 있을 때 양홍의 추천을 받아 제갈량에게 임용됐다. 당시 양홍이 촉군태수였는데, 제갈량은 몇 년 그의 재능을 살펴본 후 광한태수로 임명하였으므로 두 사람이 동렬에 서게 됐다. 전에 양홍이 낮은 관직에 있었을 때 이엄과 동렬이 되고, 다시 하지가 낮은 관직에서 양홍과 동렬이 되니 서쪽 땅의 사람들은 제갈량이 인재를 선발하고 활용하는 데 능란하다며 감탄했다.
11. 강유 : 1차 북벌 당시 천수군에서부터 제갈량에게로 항복했다. 제갈량은 그의 군사적 재능과 성품에 대해 극찬했으며, 승상부 창조연으로 삼았다. 이후 정서장군 등을 역임하며 성장했고, 대장군부 사마가 되어 수 차례 위나라와 교전을 벌이는 등 전과를 올렸다. 비의 사후 북벌을 주도하여 위나라와 격전을 펼쳤으며, 양무에서 서질군을 대파하고 하관 일대를 휩쓸어 수많은 성을 점령시켰으며, 조수에서는 왕경을 상대로 수만 명의 위군을 참하는 등 대전공을 세웠다. 단곡에서 등애에게 대패하였으나, 이후 다시 출병하여 교전을 계속했다. 한중 방어선을 계획하여 대 위군 방어 체계를 만들었으나, 유선과 황호가 병력 배치를 씹어버리는 바람에 무산 ( -_- ) , 그러나 모든 방어선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불과 5만에 불과한 군대로 13만 대군의 종회를 상대로 선전하는 기염을 토했다.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하자 강유는 종회에게 투항, 그를 이용하여 나라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마침내 위군 장수들의 난에 휘말려 죽었다. 문무를 겸비하였고 대단히 청렴했으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이라 평해진 한편, 진수는 그를 병력을 남용하였다며 비판했고 손성은 강유가 능력도 없고 효성도 없는 인물이라는 혹평을 가했다. 그러나 자치통감에 주를 단 호삼성은 한진춘추의 기록에 의거, 강유의 마음이 시종일관 나라를 위해 노력하였는데 진수와 손성 등이 그를 깎아내림은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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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에게 버금가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제 생각엔 사마의, 주유, 곽가, 순욱, 가후, 방통, 서서 정도가 된다 봅니다. 그러나 곽가는 제갈량과 겨뤄본 기록이 없습니다. (곽가는 38에 병사했습니다) 하지만 공손강의 항복 등 여러가지 일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본디 몸이 약한지라 하북의 풍토병에 걸려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병사하기 전 남긴 편지입니다.
" 원상과 원희는 반드시 공손강한테 도망갔을 것이니 승상께선 그들을 공격하시면 그들은 힘을 합쳐 대항해 올 것입니다. 하지만 기다리신다면 원하시는 바를 이루실 것입니다."
곽가가 남긴 편지입니다. 모든 것을 틀림없이 예상했군요. 또한 하비의 여포전에서는 배수진을 사용할 것을 권하여, 여포를 성 안에 잡아 놓았습니다. 정말 아까운 인재입니다. 조조와 10살정도 차이난 것을 보면 죽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활약을 했겠군요.
그럼 주유를 볼까요? 주유는 한마디로 문무 모두를 겸비한 맹장입니다. 손책이 죽을 때, 손권에게 한 말입니다.
"안에 문제가 생기거든 장소에게, 바깥에 문제가 생기거든 주유에게 물어보라."
손책도 주유를 신임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게다가 주유는 용모도 수려한데다 음악과 시 등에도 소질이 있었다 하군요. 하지만 역시 일찍 죽어서인지 적벽대전 제외하고는 큰 활약이 없습니다. 주유가 남긴 공들은 곡아 함락, 적벽대전 승리 (사실은 공명의 활약도 크지만) 등이군요. 말년에는 화병을 얻어 얕은 술수만 쓰다 죽고 말았습니다.
순욱을 살펴보겠습니다. 순욱은 제갈량과 가장 비슷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둘 다 원하는 바가 '한실부흥' 이였으니까요. 하지만 조조에게 속은 건지, 평생 조조를 돕다가 조조가 위왕이 되자 크게 실망하고는 음독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조조는 크게 슬퍼하며 순욱의 장사를 후하게 치러 주었습니다. 순욱의 진언들을 보겠습니다.
"유비는 여포 따위에 비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한 마리 용이므로 지금 손을 써 두지 않으면 큰 화가 될 것이옵니다."
"유비와 여포의 사이를 갈라놓으시려면 유비에게는 황제의 명을 빌어 원술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리십시오. 그럼 의리 없는 여포놈이 그 사이를 노려 유비를 배신할 겁니다."
"제갈량은 보통 인물이 아니므로, 힘으로는 쉽게 제압할 수 없습니다. 신중을 가해 움직이셔야 합니다."
"원소가 칠십만 대군이 있다 하나, 그들은 오합지졸이고 원소는 결단력이 없습니다. 또한 모사 간 화합도 되지 않으므로 승상께서 가히 이기실 수 있습니다."
많은 계책, 승패 등을 예언했군요. 특히 유비와 공명에 대해선 평가를 잘 하고 있습니다.
사마의는 말 안해도 아시다시피 처음으로 공명을 누른 자입니다. 전면전보다는 지구전을 택해 제갈량이 지치게 하여 오장원에서 병사하게 만든 장본인이지요. 조조 또한 그를 알아보고 몇 번을 찾아가서 부탁했다고 합니다. 제갈량 사후에는 권력 싸움에 이겼습니다.
가후는 본디 이각과 곽사의 모사꾼이었으나 그들이 자신을 무시하자 장수에게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조조에게 항복한 뒤 조조가 장수의 아버지, 장제의 전 처를 자기 여자로 만들자 장수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가 다시 쳐들어옵니다만 조조의 계책을 간파하고 후퇴하는 병사들의 움직임까지 예상하여 큰 승리를 거둡니다. 후에 조조에게 항복하여 많은 진언을 합니다.
방통은 외모는 추하나 훌륭한 모사라서 유비에게 중용됩니다. 처음에 유비가 자신을 홀대하자 뇌양현의 일은 반나절만에 처리하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에 놀란 유비는 방통을 부군사로 삼고, 익주 정벌에 군사로 데려갑니다. 하지만 흔히 낙봉파
[落鳳坡] (봉이 떨어지는 언덕) 에서 장임의 공격을 받고 죽고 맙니다. (사실 낙봉파는 가짜 지명이죠) 어쨌든 역시 아까운 모사입니다. 적벽대전에서는 연환계로 조조를 속여 적벽대전 주요 역할을 하지요.
서서는 의리도 깊고 효자라서 조조가 정욱을 통하여 부모의 상태를 속이자 조조에게 갑니다만 어머니는 서서를 한심해하며 죽고 서서는 조조에게 들어갑니다만 조조를 위해서는 하나의 계책도 쓰지 않는다고 유비에게 약속한지라 큰 활약이 없었습니다. 여상, 여광의 침략을 막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