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4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루카 15,3-7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사제는 예수님의 성심을 본받으면 성화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더 자세히 보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방치합니다.
도대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맹수가 우글거리는 광야에 방치하는 것이 왜 사랑일까요?
우리는 가끔 버릇없는 아이를 감싸는 어머니를 볼 때가 있습니다.
왜 남의 애 기죽이냐고 되레 화를 냅니다.
그것이 사랑일까요?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자신을 무는 개까지도 감싸는 어머니를 나무랍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그 개가 다른 사람을 물게 될 것을 용인하는 범법자나 다름없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정말 누가 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물리면서까지도 잘해주는 주인일까요, 아니면 강 훈련사일까요?
강 훈련사는 개를 물속으로 끌고 갑니다.
물속에 들어가면 일단 살아야 하는 게 우선이 되어서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개에게 입마개도 하고 조금씩 개를 주인에게 의지하고 순종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광야로 끌로 나온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아의 압제에서 구해주고 싶으셨습니다.
당신께, 혹은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하는 백성을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강 훈련사가 물속으로 개를 끌고 들어간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의 척박한 곳으로 끌고 나오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어깨 위에 그대로 있으려 하지 않고 본인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방치하신 것도 이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어깨에서 무슨 일에나 자신을 죽이고 순종할 수 있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성심입니다.
사랑의 목적입니다. 사제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나라 카리사마 대표 배우인 최민식 씨를 길들인 사람이 있습니다.
캐나다에 살다 와서 최민수 씨와 혼인한 강주은 씨입니다.
강주은 씨는 빚이 지금 시세로 30~40억 있는 최민수 씨와 결혼하여 힘겨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소유욕이 지나치게 강했던 최민수 씨에게 최대한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계속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야 했지만 참았습니다.
한국말도 잘하지 못할 때라 만화를 그려가면서 소통해야 했습니다.
사고를 칠 때도 참아내며 그의 편을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결국 강주은 씨는 지금 연매출 600억 상당의 홈쇼핑 사업을 하고 있어서 재정적으로 안정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반면 최민수 씨는 월 40만 원의 용돈을 타서 씁니다.
기름값 하면 남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강주은 씨는 최민수 씨가 돈 개념이 없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광야를 선사합니다.
그래도 최민수 씨는 강주은 씨에게 어쩔 수 없이 순종합니다.
사람의 이기심을 없애려면 환경의 결핍을 주어서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임을 자각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해주어서 기를 살려주면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습니다.
구원을 보장받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결핍을 선물하십니다. 당신의 결핍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궁핍과 결핍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물에 빠진 개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장 자기가 사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핍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못된 아이를 감싸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아이가 나에게 앙심을 품더라도 순종을 가르치는 게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어깨에서 꼼짝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 존재로 키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결핍을 주시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기 전에 주님께 의지합시다.
그냥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아멘!” 하겠다고 고백합시다.
그래야 결핍 훈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순종만이 살길입니다.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순종해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4일 [예수 성심 대축일]
루카 15,3-7
부단히 넘어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어서는 사제!
오늘 우리 교우들은 무척 바쁜 날입니다. 사제성화의 날을 맞이하여 저희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주시는 날인 동시에, 우리 인간의 죄악과 방황 때문에 상처입은 예수님의 성심(聖心)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행해진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성장을 위해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조사 결과는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교회의 쇄신과 발전을 위해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사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대답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사제들의 지속적인 회심과 쇄신, 성화 없이 교회의 쇄신과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는 답이 되풀이되어왔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착한 목자로 살아가시는 사제들도 부지기수인데,
그런 사제들은 억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사제도 어쩔 수 없이 근본적인 한계와 결핍을 지닌 한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틈만 나면 대대적인 삶의 변화를 꿈꾸지만, 마음과는 달리 행동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멋진 모습의 착한 목자로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지만, 희망 사항과는 다른 초라한 스스로의 모습에 좌절도 많이 합니다.
생각과 행동이 따로따로인 모순된 삶을 살아가며 가슴을 치고 후회합니다.
한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신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나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신기루 같은 하느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예수성심대축일을 사제성화의 날로 지정하고 사제들을 위한
특별한 기도를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사제들이 인간적 부족함과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넘어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어서서 하느님께로 또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내공을 지니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최우선적 선택의 대상으로 여기고,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느님만으로 행복하고, 하느님께만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은 또 다른 한 가지 지향을 두고 기도를 해주셔야 합니다.
통상 우리가 바치는 대부분의 기도는 우리 인간 측에서 하느님께 청하며,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하기보다 하느님께 위로를 드리는 기도를 바쳐야 마땅합니다.
우리 인간의 부족함, 우리 인간의 죄악, 우리 인간의 배신으로 크게 상처입은 예수님의 성심께
송구한 마음으로 그분의 부서진 마음을 위로해드리는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사랑이 제대로 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상호 통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이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흘러가야 하고, 다시 또 되돌아가야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이겠지요.
한쪽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에 불이 붙고, 밤잠도 제대로 잘 못 이루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조금도 그 사랑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짝사랑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그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우리가 아무리 그분께 대들고 반역해도, 우리가 그렇게 배신을 때려도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향한 당신 사랑의 불꽃을 태우고 계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 성심은 우리의 반역과 배신으로 인해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구세주의 상처 입은 성심에서 우리 교회가 탄생되었고,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고 있습니다.
그 부서진 예수 성심에서 7가지 성사가 흘러나왔으며, 그 성사는 큰 강이 되어 메마른 사막을 비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소원 한 가지를 들어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간절한 바람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이가 당신 성심께로 기꺼이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퍼마시는 것.’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제>
2022. 06. 24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 성화의 날)
루카 15,3-7 (되찾은 양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사제>
사제는
하늘빛을 땅에 드리우도록
땅기운을 하늘에 들어 높이도록
그리하여 하늘과 땅을 곱게 잇도록
부르심 받음 사람입니다
사제는
여린 마음과 작은 몸으로
하느님께서 정성껏 빚으신
온 누리 보듬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한 몸 추스르기 버거워도
하느님 사랑 가득 담은
함께 사는 세상 가꾸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저 홀로 머물 울타리 허물어
하느님의 아픔과 슬픔 가득한
여리고 찢긴 거친 세상 담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홀로 거룩함의 꿈에서 깨어나
더러운 것 깨끗하게 하고자
온 삶 아낌없이 던지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하느님 손길 닿은 세상 모시되
세상에 짓눌리고 세상이 버린
하느님의 작은 이 품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살기 위해 벗을 희생시키지 않으며
벗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죽으라고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기에
약하고 추하고 부족한 사람이기에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부끄럼 없이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나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몸과 마음에
핏빛 사랑의 상처 가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순간부터 끝 모를 마지막까지
앞서 가시고 함께 하시기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용기 내어 또 한 걸음 내딛는 이
바로 주님의 사제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