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오면
심훈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로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시집 『그 날이 오면』, 1949)
♣어휘풀이
-삼각산 :서울 북한산의 다른 이름
-인경 : 밤에 통행금지를 알리기 위해 설치한 큰 종
-육조 앞 넓은 길 : 조선시대 육조(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 등의 관공서가 밀집해
있어 육조거리라고 불렀음. 지금의 세종로.
♣작품해설
출세작 「상록수」를 집필하기 3년 전인 1932년 간행하려 했던 『그 날이 오면』은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반 이상이 삭제됨으로써 중단되었다가, 그의 사후 10년도 더 지난 1949년에야 비로소 가족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상록수」를 이해하는 길목에 위치하는 『그 날이 오면』은 중국 항주(杭州) 지강(之江)대학에서 돌아와 1923년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면서 쓴 시와 수필을 묶은 작품입이다. 이 작품집의 표제시인 이 시는 1930년 3월 1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는, 제일고보에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 진두지희를 하다가 투옥된 바 있는 심훈의 투철한 현실 인식과 애국심을 집대성하 걸작으로 이육사의 「절정」과 함께 1930년대를 대표하는 저항시의 하나이다.
이 시에서 ‘그 날’이란 온갖 민족적 수난과 저항 끝에 죽음을 넘어서 획득하게 되는 조국 해방의 날을 의미한다. 화자는 ‘삼각산이 일어난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라고 하는 등 조국 해방의 날이 오는 순간을 상식적인 논리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상황으로 설정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져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 표현이지만, 화자가 ‘그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해 준다. 이러한 환각 속에서 화자는 죽음마저도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 이것은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 기뻐서 죽사오매’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나 있다.
2연도 1연과 거의 동일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그 날’이 올 때의 기쁨을 제시하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와 같은 죽음을 초월한 자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시는 격정과 환희라는 시 정신을 바탕으로 광복의 ‘그 날’을 염원하는 마음이 잘 표출되어 있다. 눈에 거슬리는 극한적 표현을 자주 씀으로써 다분히 관념적이고 격렬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절절한 호소, 강인한 의지, 도도한 의기(義氣)의 자세와 목소리, 비장감(悲壯感)으로 비롯된 치열한 저항성과 강렬한 역사성은 바로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사실 이와 같은 저항시에서는 세련된 정서나 아름다운 표현은 도리어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는 쓸데없는 장식물이 될 뿐이다. 한편 영국의 비평가 바우라(Bowra)는 그의 비평서 「시와 정치」에서 이 시를 세계 저항시의 한 본보기로 들며, “일본의 한국 통치는 가혹하였으나, 그 민족의 시는 죽이지 못했다.”고 평한 바 있다.
[작가소개]
심훈(沈熏)
본명 : 심대섭(沈大燮)
금강생, 금호어초(琴湖漁樵), 백랑(白浪), 해풍(海風)
1901년 서울 출생
1919년 경성 제일고보 재학시 3.1운동에 참가
1922년 중국 항주(杭州) 지강(之江)대학 극문학부 중퇴, 귀국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역임
1926년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발표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 공모에서 소설 「상록수」 당선
1936년 사망
(시집 『그 날이 오면』, 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