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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
현안 스님 승인 2022.05.11 09:00
[미쿡의 선과 정토 이야기(43)]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본래 어떤 얼굴이었나요?
카노 모토노부(狩野元信), ‘향엄격죽도(香嚴擊竹圖)’ 부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옛날에 중국에 백장 선사라는 아주 유명한 선승이 있었습니다. 백장 선사는 선 도량을 위한 규율을 세운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나타나서 제정한 『백장청규(百丈淸規)』 덕분에 자급자족할 수 있는 선 수행을 위한 도량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도량엔 많은 제자가 모여들었는데, 그중에서도 황벽 회운과 위산 영우가 가장 유명합니다. 뒷날 이들의 계통에서 바로 임제종(臨濟宗)과 위앙종(潙仰宗)이 시작된 것입니다.
위산 영우 선사는 후대에 위산 선사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그는 사실 백장 스님의 계승자로 선택받았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선사답게 아주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백장 스님의 도량에서 이미 수행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의 아래에서 계속해서 훈련을 이어 가고 싶어 하는지 물어볼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그 중엔 나이가 꽤 어린 승려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나이 어린 스님은 백장 스님 아래에서 약 2년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 스님도 영우 선사를 만났습니다.
영우 선사는 그를 보고 말했습니다.
“자네는 참으로 젊고 총명한 학생이구려. 많은 불교 경전에 대해서 아주 해박하다고 들었다.”
사실 이 젊은 승려는 모르는 경전이라곤 없었습니다. 그리고 새 주지 스님에게도 자신의 명성이 알려져서 매우 기뻤습니다. 이 젊은 승려는 백장 선사와 단 2년만 지냈지만, 도량 내에서 자신이 잘 알려졌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향엄 지한’입니다. 사실 이 일화는 중국, 일본 등 여러 불교 국가에서 매우 유명합니다. 여러분도 이 글을 읽다 보면 ‘아! 이 이야기 들어봤다’고 할 겁니다.
*향엄 지한(香嚴智閑, ?~898) 선사는 위산 영우(潙山靈祐) 선사의 제자로서 어렸을 때 백장 회해(百丈懷海) 선사에게 출가했다. 키가 7척이나 되고 아는 것이 많아서 학문에 있어서는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위산 영우 선사를 만난 후 교학 공부의 한계를 깨닫고 선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영우 스님이 말했습니다.
“그래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들었는데, 아주 박식하다고 하더군. 하지만 난 자네가 이런 혹독한 선 훈련을 계속하고 싶어 할지는 확실치 않더군. 자네는 불경을 읽고 싶어 하지만, 우린 선 수행을 하고 싶어 하거든. 그래서 난 이런 환경이 자네에게 적절한지 그게 확실치 않아.”
그러자 젊은 향엄 선사는 “아니에요,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받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요. 몇 년은 더 머물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위산 영우 선사는 젊은 향엄 선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질문하나를 주겠다. 네가 그렇게 많은 경전을 안다고 하니, 이걸 한번 물어봐야겠다. 네 부모가 너를 낳기 전에 네 본래 얼굴이 무엇이냐[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
여러분이 화두(話頭)를 해봤거나 화두에 대한 책을 읽어보셨다면, 이 유명한 화두를 들어 봤을 겁니다. 이렇게 위앙종에서도 화두를 합니다. 위앙종의 창시자인 위산 스님은 향엄 선사를 가르치기 위해서 화두법을 쓴 것입니다.
이 젊은 승려는 지금까지 외운 모든 경전을 떠올려보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경전을 외웠지만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위산 스님에게 “아! 모르겠습니다. 제발 며칠만 주십시오. 제가 돌아가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서책을 더 확인해봐야겠습니다. 3일만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향엄 스님은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자는 것도 먹는 것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책이란 책은 다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3일 후에도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향엄 선사의 방은 수많은 불경과 책들로 가득했고, 그는 그 내용을 다 읽고 파악하고 있었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새 주지인 영우 선사에게 돌아가서 “선사님, 죄송합니다. 답을 모르겠습니다. 답은 무엇입니까? 부디 그 답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위산 스님이 어떻게 했을 것 같나요? 영우 선사는 “물론 내가 답을 안다. 하지만 난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네가 혼자서 그 답을 찾아내길 바란다”라고 말했습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이 젊은 스님은 3일 동안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신경이 아주 팽팽한 상태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주지 스님은 자길 웃음거리로 만들고, ‘난 답을 알지만 너한테는 말해주지 않겠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젊은 스님이 어떤 반응을 했을 거로 생각합니까? ‘당신 왜 나한테 말 안 해줘!’ 그는 새로운 주지 스님의 멱살을 잡고, ‘당신 나에게 답을 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어! 빨리 불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향엄 스님은 ‘내 삶이 이렇게 무의미할 줄이야. 내 공부는 아무것도 아니였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런 간단한 질문조차 답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는 아마도 지난 세월 동안 했던 공부가 무의미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책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벌했습니다. 떠돌아다니는 승려가 됐습니다. 배고픔을 겪고, 목마름도 겪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비웃음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는 떠돌아다니면서 추위와 더위도 참아냈습니다. 그는 그렇게 수년을 떠돌아다녔습니다.
이런 향엄 스님의 여정은 그를 혜충 국사의 무덤으로 데려다줬습니다. 그런데 혜충 국사의 무덤이 너무 황폐하고 흉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향엄 스님은 결심했습니다. ‘내 삶의 남겨진 마지막 일로 삼고, 여기 남아서 국사님의 무덤을 돌봐야겠다.’ 그는 그때부터 무덤과 주변을 치우고 정리해서, 보기 좋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만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낳아주기 전 내 본래 얼굴은 어땠을까?” 그는 오직 딱 한 가지 주제만 심사숙고하고 있었습니다.
이 젊은 승려가 얼마나 비참해야 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그는 오직 그 한 가지만 숙고했습니다. 그 외의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인생의 의미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앉아서 명상할 때도 ‘집에 가서 돈을 더 벌어야지’라고 말합니다. 향엄 스님은 달랐습니다. 오직 본래면목에 대한 답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우선순위였습니다. 하루는 빗자루로 마당을 쓸다가 돌 하나가 대나무에 날아가 부딪쳐서 “탁” 소리를 냈습니다. 그는 즉시 깨달았습니다. 그때 그는 깨달은 순간에 대해서 시를 지었습니다. 그게 당시 깨달은 스승들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는 전통에 따라서 바로 그 순간의 광경을 표현하기 위한 시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은 허운 화상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완전히 전념해서 열심히 하면 놀랍게도 무언가 깨지는 소리, 새가 날아가는 소리,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로 꿰뚫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향엄 선사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주 아주 중대한 개인적 대가로써 깨닫기 위해 이런 일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수행할 법의 문도 없었습니다. 그가 온종일 한 것은 ‘내겐 질문이 있어. 이 문제가 있어서 해결해야 해!’가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선(禪)입니다.
그리고 그는 깨달은 후 오두막에 돌아가서 목욕했습니다. 그리고 장삼을 입고, 밖에 가서 위산을 향해서 스승께 고마움의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곤 가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이야기에서 봤듯 그의 스승은 그를 수년간 고문했습니다. 하지만 끝에 그는 스승님께 감사했습니다.
<향엄 지한의 오도송>
一擊忘所知(일격망소지) / 한번 던지매 알던 것 잊으니
更不自修持(갱불자수지) / 다시 더 닦을 것 없구나.
動容楊古路(동용양고로) / 속내를 움직여 옛길을 드러내고
不墮悄然機(불타초연기) / 근심의 갈림길로 떨어지지 않도다.
處處無蹤迹(처처무종적) / 이르는 곳마다 자취가 없으니
聲色外威儀(성색외위의) / 성색 밖의 위의로다.
諸方達道者(제방달도자) / 제방의 도를 아는 이라면
咸言上上機(함언상상기) /모두가 나를 일러 상상기라 부르겠지.
참고법문: 영화 스님 ‘본래면목이 무엇이냐?(What is your original face)’ 2013년 5월 29일.
현안(賢安, XianAn) 스님
출가 전 2012년부터 영화(永化, YongHua) 스님을 스승으로 선과 대승법을 수행했으며, 매년 선칠에 참여했다. 2015년부터 명상 모임을 이끌며 명상을 지도했으며, 2019년 미국 위산사에서 출가했다. 스승의 지침에 따라서 2020년부터 한국 내 위앙종 도량 불사를 도우며 정진 중이다. 현재 분당 보라선원(寶螺禪院)에서 상주하며, 문화일보, 불광미디어, 미주현대불교 등에서 활발히 집필 중이다. 국내 저서로 『보물산에 갔다 빈손으로 오다』(어의운하, 2021)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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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채널인간관계가 어렵다면 상황을 바로 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도이법사의 위빠사나 수행기
“대승의 지혜, 붓다의 지혜와 동일”<br>“禪에서는 경계에 걸림 없으면 悟道”
도이법사 | 2014-06-03 10:37:18
조회수 : 1,297
4.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깨달음의 관점(觀点)
대승불교에서는 3보 중 불보 하나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불교의 경우 예식을 할 때 ‘삼보의례’로서 지심귀명례, 거불, 삼보통청문을 독송하는 정도이지 실제 신행생활에서는 법보나 승보에 대한 인식이 상좌부 불교와 같이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믿음의 측면에서 테라와다 불교는 불(Buddha)·법(Dhamma)·승(sangha)에 대한 깊은 존경과 신뢰의 바탕위에서 수행의 길로 나아가는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구체적인 믿음, 확신에 찬 믿음보다는 법신불(法身佛) 사상을 통해 붓다의 개념을 세우는 형태에서 확장시키고 그분 붓다들의 원력과 지혜에 대한 믿음과 증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또 수행의 근본체계로서는 바라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수행의 근본인 6바라밀 정상에 ‘지혜바라밀’이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실천적 이념의 바탕위에서 존재의 공성(空性)을 지혜바라밀로서 완전하게 깨달아 구경열반에 도달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불이요, 부처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에서 부처(buddha)는 고유명사인 붓다(Buddha)와는 구별되는 것이나, 지혜의 격에서는 동격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불의 지혜를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anuttara sammā samBuddha)’ 즉 무상 정등 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하고 범부가 6바라밀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깨닫고 나면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다”라고 하며 그 깨달음에 이르게 한 지혜를 여래지(如來智)라고 합니다. 그래서 근기가 수승한 수행자는 단박에 깨달아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여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란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여래지에 이른 수행자 혹은 보살은 무량복덕을 갖춘 부처님과는 차별되지만 지혜의 측면에서 고따마 붓다께서 증득한 완전한 지혜와의 동격을 의미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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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불교인 중국, 한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선(禪)불교의 전통에서는 붓다께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지를 못합니다. 붓다를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라고 인식하고는 있으나 중론(中論)이나 유식(唯識) 등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나 지혜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습니다, 설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스승이나 선지식은 다만 수행자로 하여금 “자성청정(自性淸淨)~,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등으로 제시되고 있는 마음의 본성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 뿐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체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지양합니다. 그 어떤 이해나 선입견 혹은 앎(알음알이)이나 분석 등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곧바로 들어가 보고 깨닫는 것이지 사량 분별해서 깨달아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헤아림과 분별이 끊어지고 마음의 길이 소멸된 곳, 나아갈래야 더 나아 갈수 없고 뒤로도 물러설 수 없는 곳, 그곳에서 오히려 한걸음 더 나아가도록 유도합니다(百尺竿頭進一步). 게다가 “부처님의 경계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의 경계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개념(Sañña)이나 알음알이에 빠지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몰록’ 스스로 견성(見性, 明見佛性)했다고 판단되면 견성의 감흥을 오도송(悟道頌)이라는 형식에 담아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확인받습니다. 이를 일러 “한소식 했다”라고도 하고 “화두를 타파했다” 혹은 “마음을 밝혔다”라고도 하며, 생각마다 일체 경계에 대해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면 “확철대오(廓徹大悟)했다”라고도 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인가의 확인과정에서 ‘견(見), 견성(見性), 득도(得道)’라는 한자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고, 한글로서는 한결같이 ‘깨달음’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열반, 혹은 구경열반이라고 하는 궁극의 상태를 깨달음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계속〉
도 이/ 서울 약수원 연방죽 선원 상임법사
첫댓글 <향엄 지한의 오도송>
一擊忘所知(일격망소지) / 한번 던지매 알던 것 잊으니
更不自修持(갱불자수지) / 다시 더 닦을 것 없구나.
動容楊古路(동용양고로) / 속내를 움직여 옛길을 드러내고
不墮悄然機(불타초연기) / 근심의 갈림길로 떨어지지 않도다.
處處無蹤迹(처처무종적) / 이르는 곳마다 자취가 없으니
聲色外威儀(성색외위의) / 성색 밖의 위의로다.
諸方達道者(제방달도자) / 제방의 도를 아는 이라면
咸言上上機(함언상상기) /모두가 나를 일러 상상기라 부르겠지.
참고법문: 영화 스님 ‘본래면목이 무엇이냐?(What is your original face)’ 2013년 5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