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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서 추락 일장기 반도체 죽인 건 누구인가 / 7/14(일) / 동양경제 온라인
◇ 세계에서는 지금, 반도체가 「뜨겁다」
대만 적체전로제조(TSMC)의 시가총액은 한때 1조 달러에 달해 엘론·머스크 씨는 AI 개발을 위해 엔비디아제 반도체를 대량 구입. 트랜지스터가 탄생한 지 70여 년의 반도체 역사에서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고 있다.
「반도체의 부활 없이는, 일본의 미래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2023년까지 경제 동우회의 부대표 간사를 맡아 「업계의 키맨」으로서 알려진 코시바 미츠노부 씨다. 과거 세계시장 점유율 50%였던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미일 반도체 마찰에 의해 힘이 깎여 현재는 10% 아래로 떨어진다. 일본의 약진은 어떻게 막혔을까.
코시바 씨의 저서 「2040년 반도체의 미래」로부터 발췌·편집해 전달한다.
■ 반도체의 탄생
반도체가 발명되기 전 레이더나 초기 컴퓨터에는 전류를 제어하는 부품으로 유리로 만든 진공관이 사용됐다. 단지, 부품으로서는 너무 부피가 큰 데다가, 신뢰성이 없고, 소비 전력이 크다고 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던 중 1948년 미국 벨연구소가 접촉형 트랜지스터를 발명한다.
트랜지스터는, 전기를 통하는 도체와 통하지 않는 절연체의 중간의 물질인 「반도체」로 만들어져 있어, 그 성질로부터 전류를 스위칭(온/오프)하거나 증폭하거나 할 수 있다. 소비전력은 진공관의 50분의 1로 작아 순식간에 진공관을 구축했다.
그런데도 컴퓨터에 필요한 수천 개의 트랜지스터를 인쇄회로기판에 배열해 일일이 땜질로 배선하는 것은 너무 복잡했고, 전자기기를 소형화하는 데도 지장이 있다.
그래서, 배선을 간략화하려고 개발된 것이, 1개의 기판 위에 복수의 트랜지스터나 배선을 정리해 버리는 방법이었다. 1958년 집적회로(IC) 개념이 발표됐고, 이 이후 집적회로를 반도체 혹은 칩이라고 부르게 됐다.
당시 기술자 중 한 명이 페어차일드 반도체사의 고든 무어다.
무어는 1965년, 집적 회로의 미래에 대해 「일렉트로닉스」지로부터 논문을 의뢰받아 거기에 다음과 같은 예측을 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앞으로 10년간 IC 집적도는 1.5년 만에 2배, 3년 만에 4배가 될 것이다
집적도란 한 장의 실리콘 칩 위에 탑재할 수 있는 부품의 수를 말한다. 즉 집적도가 높아질수록 성능은 올라간다. 1975년에는 '2년에 두 배씩 성능이 올라간다'고 수정됐고, 이 말들은 나중에 '무어의 법칙'으로 알려져 간다.
1968년 무어 등은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떠나 인텔을 창업한다.
2년 뒤 첫 제품으로 내놓은 것이 세계 최초의 다이내믹 랜덤 액세스 메모리(DRAM)다.
그때까지 컴퓨터는 「자기 코어」라고 불리는, 금속의 링을 와이어로 연결한 것으로 데이터를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자기 코어의 용량 향상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예의 집적회로를 사용하여 개발된 기억장치가 DRAM이다. 전하를 저장하는 기능을 갖는 콘덴서라는 부품과 트랜지스터를 연결하여 기억소자(메모리 셀)를 구성하고 있다. 기억소자에 전하가 저장된 상태를 '1', 저장되지 않은 상태를 '0'으로 데이터를 기억한다. DRAM은 현재도 컴퓨터의 데이터 보존을 담당하는 중요한 반도체(메모리)이다.
■ D램으로 약진한 일본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1948년이라고 하면, 일본은 아직, 패전으로부터의 부흥에 발버둥치고 있던 무렵이다. 그런 가운데 미국 정부는 일본에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제품을 개발시키려고 지원했다.
그 일례가 소니(당시는 도쿄 통신공업)이다. WE(Western Electric)사로부터 트랜지스터의 제조 특허를 취득해 제조한 「소니 라디오」는, 저렴함과 성능으로부터 순식간에 세계를 석권했다. 자사에서 트랜지스터를 만들고 라디오를 만든 것은 소니가 세계 최초였다. 샤프(당시는 하야카와 전기)가 1964년에 재빨리 계산기에 탑재한 트랜지스터도 미국제다.
미국은 자국의 반도체를 이용하게 함으로써 일본 기업을 조기에 부활시켰고, 이를 통해 소련, 중국 등 공산주의 세력과 연계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기대를 훨씬 넘는 속도로 성장했다. 그것이 양국에 마찰을 야기한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히타치제작소, 도시바, 후지쓰, NEC 등은 D램 제조로 세계를 석권하기 시작했다. 끓는 물을 마시던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일본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보호받고 있으며 부당한 혜택을 받고 있다고 불평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와 내셔널세미컨덕터도 D램 부문 정리해고에 몰렸다. 위기감을 느낀 미국 기업들은 정부에 맹렬한 로비를 벌여, 1984년에 「반도체 칩 보호법」이 성립한다. 반도체 관련 지적재산 보호를 강화하는 법률이다.
그 그늘에서 인텔은 1985년 D램 사업에서 조용히 철수한다.
■ '미일 반도체 협정' 체결
1986년에 일본이 반도체 생산량에서 미국을 제치고, DRAM에서 8할의 세계 점유율을 획득한다. 사실 이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최후의 한 수를 놓았다. 1987년 미일 반도체협정 체결을 일본에 압박한 것이다.
이 협정은 일본산 D램의 대미 수출량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반도체 수량은 줄었지만 가격은 오히려 급등했기 때문에 일본 기업들은 경영적으로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다.
1988년에는 일본이 세계 반도체 생산액의 50%를 넘을 정도로 성장한다. 그래서 1991년 새 협정에서 일본 내 외국산 반도체 점유율을 기존 10%에서 20%까지 끌어올린다는 엄격한 조항이 포함됐다.
반도체를 제압한 일본의 원동력이 된 것은 민생용 전기기기, 이른바 가전제품이다. 소니 라디오에서 시작해 계산기, TV, 비디오 덱, 포터블 오디오 플레이어 등 고품질 저가의 메이드 인 재팬은 전 세계에 수출됐고 여기에 들어가는 반도체도 증산됐다. 미국의 가전은 세계에서 구축되고, 그에 따라 미국제 반도체도 일본 기업에 그 지위를 빼앗긴다는 구도였던 것이다.
도중부터는, 메인 프레임이라고 불리는 대형 범용 컴퓨터에, 품질이 높고 깨지기 어려운 일본제 DRAM이 잇달아 탑재되어, 일본의 반도체 점유율 확대를 지지했다.
그 한편, 1981년에는 IBM의 PC가 세계적으로 히트해, 컴퓨터에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애플은 1984년에 초대 매킨토시를 발매. 이듬해인 1985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PC용 운영체제(OS)를 개발한다.
그래서 숨을 돌린 것이 인텔이다. D램에서 철수한 이후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전념한 것이 주효했다. 그때까지의 엔저 달러 강세가 일전, 엔고 달러 약세가 되어, 수출 가격이 상대적으로 싸진 것도 순풍이 되었다.
1992년에는 미국 컴팩컴퓨터가 인텔 칩과 마이크로소프트 OS를 얹은 PC를 IBM PC보다 훨씬 싸게 내놓는다. 이것을 계기로 세계의 PC 출하 대수는 격증해, 인텔도 한층 더 기세가 오른다.
1995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OS 윈도95를 내놓으면서 PC가 일반 가정에도 침투하기 시작했고 인텔은 반도체 제조업체로서의 위상을 완전히 되찾았다.
■ 인텔, 삼성 '일본 때리기'
이 무렵부터, 한국의 삼성 전자가 대두해 간다. 1980년대에 반도체 제조에 나선 삼성에, 인텔은 기술이나 라이센스를 아낌없이 공여했다. 당시 한국의 비용과 임금이 일본보다 크게 낮았기 때문에 한국산 D램이 일본산 D램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이 "일본 찌그러뜨리기"는 멋지게 맞았다.
D램의 큰 고객이었던 메인프레임은 1990년대가 되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주역은 PC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 심장부에, 인텔·브랜드를 붙인 삼성제 D램이 잇달아 채용되어, 일본의 반도체 각사를 직격한 것이다.
일본의 세계 점유율은 질질 후퇴해, 반대로, 일본 국내에서의 외제 반도체의 점유율은 1996년이 되어 20% ―― 즉 예의 신협정으로 설정된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미일 반도체 협정은 실효됐다.
고시바 미쓰노부 : JSR 전 회장, 경제동우회 경제안전보장위원회 위원장
https://news.yahoo.co.jp/articles/d596672e489feb5a90b52b076f36e29c82817a3c?page=1
「世界一から転落」日の丸半導体を殺したのは誰か 業界のキーマンが語る「日米半導体摩擦」の顛末
7/14(日) 13:32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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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経済オンライン
かつては世界シェア50%だった日本の半導体産業。なぜ凋落したのか(写真:nouvelle/PIXTA)
世界ではいま、半導体が「熱い」。
台湾積体電路製造(TSMC)の時価総額は一時1兆ドルに達し、イーロン・マスク氏はAI開発のためエヌビディア製半導体を大量購入。トランジスタの誕生から70年あまりの半導体の歴史の中で、かつてないほどの注目を浴びている。
「半導体の復活なくして、日本の未来はない」と語るのは、2023年まで経済同友会の副代表幹事をつとめ「業界のキーマン」として知られる小柴満信氏だ。
かつては世界シェア50%だった日本の半導体産業は、日米半導体摩擦によって力を削がれ現在は10%を割り込む。日本の躍進はどのようにして阻まれたのか。
【写真を見る】半導体業界「キーマン中のキーマン」が提言する「日本再生戦略」の本
小柴氏の著書『2040年 半導体の未来』より抜粋・編集してお届けする。
■半導体の誕生
半導体が発明される前――レーダーや初期のコンピュータには、電流を制御する部品として、ガラス製の「真空管」が使われていた。ただ、部品としてはかさばりすぎるうえ、信頼性がない、消費電力が大きいといった問題があった。そんな中、1948年、アメリカのベル研究所が接触型トランジスタを発明する。
トランジスタは、電気を通す導体と通さない絶縁体の中間の物質である「半導体」でつくられており、その性質から電流をスイッチング(オン/オフ)したり増幅したりできる。消費電力は真空管の50分の1と小さく、あっという間に真空管を駆逐した。
それでもコンピュータに必要な数千個のトランジスタをプリント基板に並べ、1つひとつはんだで配線するのは複雑すぎたし、電子機器を小型化するうえでも支障がある。
そこで、配線を簡略化しようと開発されたのが、1つの基板の上に複数のトランジスタや配線をまとめてしまう方法だった。1958年に集積回路(IC)の概念が発表され、これ以降、集積回路のことを半導体あるいはチップと呼ぶようになった。
当時の技術者の1人が、フェアチャイルドセミコンダクター社のゴードン・ムーアだ。
ムーアは1965年、集積回路の未来について『エレクトロニクス』誌から論文を依頼され、そこに次のような予測をしたためた。
「少なくとも今後10年間、ICの集積度は、1.5年で2倍、3年で4倍になっていくだろう」
集積度とは、1枚のシリコンチップ上に搭載できる部品の数を表す。つまり集積度が高くなるほど性能は上がる。1975年には「2年に2倍ずつ性能が上がる」と修正され、これらの言葉は、のちに「ムーアの法則」として知られていく。
1968年、ムーアらはフェアチャイルドセミコンダクターを離れ、インテルを創業する。
2年後に最初の製品として発売したのが、世界初の「ダイナミック・ランダム・アクセス・メモリ(DRAM)」だ。
それまでコンピュータは「磁気コア」と呼ばれる、金属のリングをワイヤーでつないだものでデータを記憶していた。ただ、磁気コアの容量アップには限界があった。
そこで、例の集積回路を使って開発された記憶装置がDRAMだ。電荷をためる機能を持つコンデンサという部品とトランジスタをつないで記憶素子(メモリセル)を構成している。記憶素子に電荷が蓄えられた状態を「1」、蓄えられていない状態を「0」としてデータを記憶する。DRAMは、現在でもコンピュータのデータ保存を担う重要な半導体(メモリ)である。
■DRAMで躍進した日本
トランジスタが発明された1948年といえば、日本はまだ、敗戦からの復興にもがいていたころだ。そんな中、アメリカ政府は、日本にトランジスタを使った製品を開発させようと支援した。
その一例がソニー(当時は東京通信工業)である。WE(Western Electric)社からトランジスタの製造特許を取得して製造した「ソニーラジオ」は、安さと性能からまたたく間に世界を席巻した。自社でトランジスタを製造し、ラジオをつくったのはソニーが世界最初だった。シャープ(当時は早川電機)が1964年にいち早く電卓に搭載したトランジスタもアメリカ製だ。
アメリカは、自国の半導体を利用させることで日本企業を早期に復活させ、それによって、ソ連や中国など共産主義勢力との結びつきを持たせないようにしたのだ。
しかし、日本はアメリカの思惑をはるかに超えるスピードで成長した。そのことが、両国に摩擦を引き起こす。
1970年代から1980年代初頭にかけて、日立製作所、東芝、富士通、NECなどは、DRAMの製造で世界を席巻し始めていた。煮え湯を飲まされていたアメリカの半導体企業は、「日本企業は日本だけでなくアメリカでも保護されており、不当な恩恵を受けている」と不平を隠さなかった。
テキサス・インスツルメンツ(TI)やナショナルセミコンダクターも、DRAM部門のレイオフに追い込まれた。危機感を覚えたアメリカ企業は政府に猛烈なロビー活動を行い、1984年に「半導体チップ保護法」が成立する。半導体関連の知的財産の保護を強化する法律だ。
その陰で、インテルは1985年にDRAM事業からひっそりと撤退する。
■「日米半導体協定」が締結
1986年に日本が半導体生産量でアメリカを抜き、DRAMで8割の世界シェアを獲得する。ことここに至り、アメリカはついに最後の一手を打った。1987年に「日米半導体協定」の締結を日本に迫ったのだ。
この協定は、日本製DRAMの対米輸出量を制限するものだった。だが、これによって半導体の数量は減ったものの価格はむしろ高騰したため、日本企業は経営的にほとんどダメージを受けなかった。
1988年には、日本が世界の半導体生産額の50%を超えるまでに成長する。そのため、1991年の新協定で、「日本国内の外国製半導体のシェアを従来の10%から20%まで引き上げる」という厳しい条項が盛り込まれた。
半導体を制した日本の原動力になったのは、民生用電気機器、いわゆる家電製品だ。ソニーラジオから始まり、電卓、テレビ、ビデオデッキ、ポータブルオーディオプレーヤーなど、高品質・低価格の「メイド・イン・ジャパン」は世界中に輸出され、それに搭載される半導体もがんがん増産された。アメリカの家電は世界から駆逐され、それにともなってアメリカ製の半導体も日本企業にその地位を奪われる、という構図だったのである。
途中からは、メインフレームと呼ばれる大型汎用コンピュータに、品質が高くこわれにくい日本製DRAMがつぎつぎと搭載され、日本の半導体シェア拡大を後押しした。
その一方で、1981年にはIBMのパソコンが世界的にヒットし、コンピュータに革命が起こり始めていた。アップルは1984年に初代マッキントッシュを発売。翌1985年にはマイクロソフトがパソコン用のオペレーティングシステム(OS)を開発する。
そこで息を吹き返したのがインテルだ。DRAMから撤退して以降、パソコン向けのマイクロプロセッサーに専念していたことが功を奏した。それまでの円安ドル高が一転、円高ドル安となり、輸出価格が相対的に安くなったことも追い風になった。
1992年には米コンパック・コンピュータが、インテル製チップとマイクロソフトOSを乗せたパソコンを、IBMのパソコンよりはるかに安価で売り出す。これをきっかけに世界のパソコン出荷台数は激増し、インテルもさらに勢いづく。
1995年にはマイクロソフトがOS「ウィンドウズ95」を発売し、パソコンが一般家庭にも浸透し始め、インテルは、半導体メーカーとしての地位を完全に取り戻した。
■インテル、サムスンによる“日本潰し”
このころから、韓国のサムスン電子が台頭していく。1980年代に半導体製造に乗り出したサムスンに、インテルは技術やライセンスを惜しげもなく供与した。当時、韓国のコストや賃金は日本より大幅に低かったため、韓国製DRAMが日本製DRAMを駆逐できるのではないかと考えたのだ。
この“日本潰し”は見事に当たった。
DRAMの大口顧客であったメインフレームは1990年代になるとすっかり影を潜め、主役はパソコンに完全に替わっていた。その心臓部に、インテル・ブランドを冠したサムスン製DRAMがつぎつぎと採用され、日本の半導体各社を直撃したのである。
日本の世界シェアはずるずると後退し、逆に、日本国内での外国製半導体のシェアは1996年になって20%――つまり例の新協定で設定された水準に達した。これによって日米半導体協定は失効した。
小柴 満信 :JSR前会長、経済同友会経済安全保障委員会委員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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