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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의 언약
겔 34:25-31
25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26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27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28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도 아니하고 평안히 거주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29 내가 그들을 위하여 파종할 좋은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여러 나라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30 그들이 내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고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31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34:25-31 / 그때에는 내가 그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 그들이 평화와 안전을 누리게 해주겠다. 내가 그 땅에서 흉악한 짐승들을 없애서 그들이 어디서나 안심하고 살 뿐 아니라 숲 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누워 잘 수 있게 해주겠다. 26) 내 성전의 사방에 펼쳐진 땅에 언제나 알맞게 이슬비를 내려 주고 복된 소나기도 제때에 내리게 하여 그곳을 비옥한 곳으로 만들어 주겠다. 27) 그러면 모든 과일나무들이 많은 열매를 맺고 농토는 풍성한 수확을 내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이 고국 땅에서 안전하게 살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이 메었던 노예의 멍에를 부러뜨리고 탄압자들의 폭력에서 그들을 해방시키면, 그제서야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28) 그때가 오면 그들이 다시는 다른 나라 백성들에게 잡혀 죽거나 흉악한 짐승들에게 잡혀 먹히지 않고 아무런 두려움이나 근심 없이 자기들의 땅에서 살게 된 것이다. 29) 그때에 내가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아름다운 평화의 동산을 만들어 주면 아무도 더 이상 굶주리는 일이 없고 다른 민족들의 비웃음을 사는 일도 없을 것이다. 30) 그때가 오면 나 여호와가 바로 그들을 돕는 그들의 하나님이요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그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그대로 실천하겠다. 31) 너희는 바로 내가 돌보는 내 양 떼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으로 멸망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언약을 갱신하고 그들을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언약의 갱신(25-26)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언약의 갱신은 화평의 언약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언약은 포괄적인 회복으로 포로에서 돌아올 뿐만 아니라 척박해진 땅을 회복하시며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시므로 안전까지 보장하시고, 빈들에서 평안히 거하며 수풀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자연재해도 사라지고 때를 따라 산 사방에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므로 안정된 환경을 약속하셨습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임한다고 성경이 들려주고 있습니다.
평안을 약속(27-28)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기근으로 황폐했던 땅들이 때를 따라 소낙비가 내리며 밭의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소산을 내므로 풍요와 함께 평안을 누리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더 이상 이방의 노략거리가 되지 않고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도 않고 평안히 거주하며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여호와인줄을 알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총체적인 것으로 내적 평안과 함께 식생활과 환경적인 모든 측면에서 누려지는 진정한 평안입니다.
언약의 완성(29-31) 언약의 갱신을 통해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다시는’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여러 나라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고 하십니다. ‘다시는’ 이라는 말을 반복하시며 언약의 갱신을 확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이시며 그들과 함께 있으며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비유로 표현했던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이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라고 하시며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참 목자가 되신다고 선포하십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으로 멸망한 나라가 마침내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언약이 갱신되고 포로에서 돌아와 다시금 회복될 이스라엘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보여주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나라를 예표하고 있습니다(참고 겔 37:27).
적용: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때로는 자기의 사명을 망각하고 나약한 인간성을 노출시켜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받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종교 지도자들도 자기의 본분을 떠나서 일반 성도들과 같이 되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이 백성들이 타락할 때에 자신들도 타락하여 제사장직을 빼앗기는 불행한 일들도 있었습니다. 현재도 마찬가지로 지도자들이 타락하여 자기의 본분을 이탈하는 일들이 없지는 아니합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자들이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 설 교 >
복된 장마비
겔 34:21-31 / 박기완 목사
에스겔 34장은 '목자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살리시고 그들을 이끄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는 목자들은 도리어 백성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그들로부터 먹을 것을 빼앗았습니다. 백성들을 학대하고 억압하면서 강압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목자된 자들이 양들을 잘 돌보지 아니하므로.. 양들은 흩어져서 짐승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참된 목자... 우리를 진정으로 다스리고... 우리를 세우고 통치해 나아갈 진정한 참 목자를 우리에게 세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23절, 24절 말씀을 보면.. 그 참된 목자가 바로 '다윗'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내 종 다윗이라" 본문에 느닷없이 다윗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이때의 상황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 가운데 처해 있을 그 당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서는 다윗이 죽은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난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목자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목자가 바로 '내 종 다윗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다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 다윗이 아닙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 가운데 오실 이.... 훗날 우리에게 참된 목자가 되실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양들을 위해서 새로운 참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가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야말로 참된 목자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0:11-12절에서 우리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그랬습니다.
참으로 그분은 섬기는 왕으로 오셔서.... 양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까지 바치셨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목자를 모시고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의 말씀들을 약속해 주신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먼저 주님은 '화평의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25절에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지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이 언약....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고 하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중요한 언약의 증표들이 있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떠오른 그 무지개가 그들에게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언약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안식일을 지낼 때마다..... 이 안식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특히 남자들의 몸에는 할례의 흔적들이 있어서 바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확인하며 살았습니다.
사람들과 맺은 계약도 소중한데....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것이니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겠습니까?....
계약이란 체결한 그대로의 효력이 발생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집을 하나 구입한다고 할 때.. 전셋집을 얻더라도 계약서를 씁니다.
그런데 그 계약서를 쓰고 나면... 계약서를 쓰기 전과 쓴 이후에는 판이하게 다른 변화가 찾아옵니다.
계약서를 쓰고 나면 그 시간부터... 그 집이 원래 자기 집이 아닌데도 이제 자기 집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옷을 벗든지 소리를 지르든지 춤을 추든지... 놀고 쉬고.... 마음껏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집 주인이 그 집에 찾아올 때에도 자기 마음대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계십니까?.. 들어가도 될까요?..." 살고 있는 사람의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계약의 놀라운 힘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이 있어서.... 그들은 모든 백성들이... 언약의 백성... 계약 공동체로서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놀라운 계약이 체결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무슨 언약(계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바로 '화평의 언약' 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의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화평의 언약은 어떻게 해서 체결되어졌습니까?.....
바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참된 목자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평의 계약이 체결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은.... 전셋집 계약은 1년이나 2년.... 기한이 있지만.... 우리와 맺은 그 화평의 계약은 결코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바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 계약도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한 사실을 본문은 말씀합니다.
바로 이러한 화평의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그러셨습니다.
2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 비를 내리리라"
이 말씀을 보니까 그냥 비가 아니라 '복된 장마비' 라고 했습니다.
비가 복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와 축복을 가리켜서 복된 장마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비 자체로서도 대단한 복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정으로 보면 우리는 그렇게 장마비를 복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평상시에도 비가 잘 오는데... 장마철만 되어지면 더 퍼붓습니다.
얼마나 온 사방을 어지럽히고 참 힘들게 합니까?.... 그러나 유대 지방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 땅에서는 '장마비' 그러면 눈이 번쩍 뜨이는 그런 복된 소식입니다.
그곳에는 우기라고 하는 것이 1년에 두 번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전혀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씨를 뿌릴 때 오는 이른 비와, 추수기 때에 오는 늦은 비가 있는데.. 이 시기에는 반드시 비가 와야만 농사를 짓고 수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비오는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시기를 가리켜서 '단비' 라고 말하고 비가 많이 오면 '장마비' 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장마비란 1년의 농사를 판가름 짓는 생명수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장마비가 아니라 '복된 장마비'라고 했습니다. "복된 장마비..."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을 매우 좋아하죠...
덮는 이불에도 복자를 새겨서 복을 덮고 자고, 요에도 복자를 새겨 복을 깔고 잡니다. 또 베개에도 복자를 새겨 복을 베고 잡니다.
국그릇,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에도... 복자를 새겨서.... 복을 담고, 복을 퍼먹고.... 심지어는 요강에도 복자를 새겨 복을 깔고 앉습니다.
복을 깔고, 복을 덮고.... 복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삽니다.
산에서도 들에서도 개천에서도 바다에서도, 큰 바위만 보아도 복을 달라고 빌고... 큰 나무만 보아도 그 나무에게 복을 달라고 절하며 제사를 지냅니다.
우스개 소리로... 큰 나무일수록 속이 썩어 있거나 비어있는데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나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도 모두들 보기만 하면 복을 달라고 하니까... 하도 속이 상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복이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게 아닙니다. 복은 남의 것을 빌릴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므로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자'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가 복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시73:28).
말씀을 읽는 자가 복되고, 듣는 자가 복되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계1:3).
한마디로 말해서... 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는 "복이란 무엇이냐?.. 복은 비와 같은 것이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복된 장마비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비는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호세아 6:3절 말씀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그랬습니다.
모든 식물은 물이 없이는 살수가 없습니다. 동물들도 물이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습니다.
혹, 베어진 풀이라 할지라도 비가 내리면 새롭게 싹이 납니다. 물로 인하여 소생합니다. 물로 인하여 생기를 되찾습니다.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72:6절에 보면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니"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생명의 생수.... 은혜의 소낙비.. 복된 장마비가.... 내려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심령에도... 우리의 가정에도.. 우리의 일터에도 복된 장마비가 내려야 합니다. 할렐루야!
비가 하늘에서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늘의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육신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상에서 보혈의 피를 소낙비처럼 쏟아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긍휼과 자비의 소낙비를 내리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찌는 듯한 사막 길, 불 속 같은 사막 길에서 모두들 지치고 갈하여... 목이 타들어 갔습니다. 마치 벤 풀잎처럼 되었습니다. 그때 '마라'라는 오아시스에 도착하게 되어 모두들 기뻐하며 물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물을 마신 사람들이 구토를 하며 배를 움켜잡고 뒹굴기 시작합니다. 그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는 독이 든 쓴물이었습니다. 물이 있는데도 마시지 못하고... 모두들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한 나무를 지시하셨고.... 모세는 그 나무 가지를 물에 던지매... 쓴 물이 변하여 단물로 바꾸어지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15:2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했습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 고쳐 주시는 하나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여기서 쓴물에 던져졌던 나뭇가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바로 인생의 쓴맛, 실패할 수밖에 없고... 절망과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살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야 삶이 달콤하고.... 그분을 만나야 우리를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을 인생을 살리시는 분.... 베어진 풀처럼 시들어 가는 인생에게 생기와 힘을 주시는 분... 그분이 바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실의와 좌절 속에 풀이 죽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의 소낙비를 맞자 용기를 갖고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복된 성령의 장마비를 맞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신명기 32:2절 말씀에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 그랬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단비와 같은 것입니다. 시들어 가는 풀잎, 누렇게 타들어 가는 잔디도 비를 맞으면 일어납니다. 생기를 찾습니다. 싹이 나고 성장합니다. 푸르러집니다. 새순이 돋아납니다. 싱싱해 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성령의 소낙비를 맞아 생기를 되찾고, 일어서고, 성장하고, 싱싱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에도 은혜의 복된 소낙비가 내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에도, 사업에도, 자녀들 위에도.... 축복의 장마비가 내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복된 장마비가 쏟아지면 어떤 복이 임하게 됩니까?....
1. 경제적인 복(육신의 복)
첫째로, 복된 장마비가 내리면 먼저 육신의 복으로 경제적인 복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복된 장마비가 내림으로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비가 흡족히 내려야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맺고 땅이 소출을 풍성하게 내게 됩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나무도 바짝 말라죽을 뿐 아니라 땅의 모든 식물들도 노랗게 타죽고 말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지에서는 오랜 가뭄과 기근과 내전으로 수천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와야만 살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은혜 받지 못한 심령. 성령 받지 못한 심령은 가물어 메마른 땅과 같습니다. 현대인들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겉모양은 화려한 것 같은데 속모양은 황폐한 벌판과 같습니다.
겉은 기름지고 윤택한 모습인 것 같으나.... 속은 메마르고 거친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한 인생들의 모습이 다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은혜받지 못한 심령은 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메마르고 거친 심령은 성령의 장마비를 맞아야 합니다. 은혜의 단비를 흠뻑 맞아야 합니다.
그래야 심령의 밭이 부드러워지고 옥토가 되어... 생명의 씨앗인 복음이 떨어질 때 싹이 돋아나고 줄기가 뻗고 꽃을 피워... 마침내는 탐스런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8절에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그랬습니다.
우리들이 열매를 많이 맺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말합니다.
우리들이 열매를 많이 맺을 때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과실을 많이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복된 장마비를 많이 맞아야 합니다. 복된 장마비가 내릴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열매를 맺고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복이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자유케 되는 복(영적인 복)
복된 장마비가 내리면 영적인 복으로서 자유케 되는 복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에 "내가 그들의 멍엣 목을 꺾고 자유케 하리라" 그랬습니다.
예배에 참석해도 은혜가 되지 않고, 그저... 무덤덤하고, 별로 감각이 없습니다. 이러한 황무함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죄의 세력, 악한 마귀, 사탄의 세력에 눌려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육신의 뜻을 좇고, 내 뜻과 내 방법대로 삽니다. 이런 모든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아모스 8:11절 말씀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랬습니다.
즉, 물질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모든 문제의 근원은 바로 우리의 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사는 인생은.... 이처럼 가뭄과 기근으로 황폐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7절 이하에 보면 "내가 그들의 멍엣 목을 꺾고 그들로 종을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겠고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갈대아 사람들과 같은 못된 압제자들로부터 구원받아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멍엣 목' 이란 말은. 소의 멍에가 닿는 목 부분으로... 멍엣 목을 꺾어 주신다는 것은 속박이나 고난을 풀어주시고 자유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목을 짓누르던 죄의 멍엣 목을 꺾어 버리시고..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참 자유는 주님의 십자가 은총으로 얻어진 자유입니다.
고린도후서 3:17절 말씀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그랬습니다.
요한복음 8:31-32절 말씀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랬습니다. 진리는 곧 예수님을 말합니다(요14:6).
참으로 주님 안에 살아갈 때... 참 자유가 있습니다. 물론 주님을 떠나 죄악 된 세상 속에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불행과 파멸에로의 자유입니다.
참 자유는 죄악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주님 안에서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행복과 영생에로의 자유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참된 자유를 누리시는 권속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평안의 복(심령의 복)
심령의 복으로 평안케 되는 복입니다. 복된 장마비가 내리면 이런 평안의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짐승의 삼킨바 되지 아니하고 평안히 거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승은 이스라엘백성을 괴롭혔던 적들... 곧 갈대아 사람, 에돔 사람, 블레셋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는 말씀이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사단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 받은 백성들을 사단의 세력과 대적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28절에 '놀랠 일(하라트)' 이란 말은 '공포에 떨다', '당황하게 하다', '깜짝 놀라게 하다', '떨다'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놀랠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시간이 되어 집에 들어와야 할 가족이... 조금만 늦어지기만 해도 집에 있는 가족은 걱정이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 연락이 없으면 불안해 지기 시작합니다. "교통사고가 나지 않았을까?" "나쁜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당황할 일이 많고 깜짝 놀랄 일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변의 이방나라들로 인하여 억압과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삶은 하루도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지켜주셔야만 됩니다. 주님이 붙들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놀랠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밤늦게 전화가 오면 어떻습니까?.. "웬일일까?.. 무슨 일일까?..." 그러면서 긴장부터 되실 겁니다.
좋은 일로 인하여 놀랠 일은 거의 없고, 안 좋은 일로 놀래는 일이 많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심장이 떨리고 깜짝 놀랄 일이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소망과 감사와 찬송의 일만 넘쳐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복된 장마비가 내리면 이런 놀랠 일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27절 말씀에서도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랬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에... 하늘의 평안을 주십니다. 그런 찬송이 있죠....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어린 아기를 낳지 못했던 한나는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의 모습은 한숨과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진 상태였습니다.
그의 영혼은 말할 수 없는 원통함과 격동함으로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동안 그녀의 심정이 하나님과 통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성전 문을 나서는 그의 모습은 전혀 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수색이 없고 평안과 기쁨만 가득했던 것입니다(삼상1:18).
오늘날도 하나님께 은혜 받고 나면 영혼에 말할 수 없는 평안이 찾아옵니다. 성령 충만한 생활 속에 걱정과 근심과... 슬픔 같은 현상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장마비란 소나기 비를 가리키는데 이 말은 gasham(가샴)이란 단어인데, '격렬하게 퍼붓다' 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은 쏟아 붓는 복이요. 퍼붓는 복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누가복음 6: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그러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주십니다. 복을 주시되 격렬하게 퍼부어 주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된 장마비가 충만히 임하셔서... 육신의 복과 영적인 복과 심령의 복을 누리며... 복되고 승리롭게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참 목자
에스겔 34:23-24 / 피영민 목사
서론
에스겔서는 48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반 24장과 후반 24장의 주제는 상반됩니다. 전반 24장의 주제는 언약을 어긴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신다는 것이고, 후반 24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구원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한 목자이신 메시아를 통해서 구원하신다는 것이 후반 24장의 핵심입니다.
에스겔 34장 1절부터 10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거짓 목자들은 왕들과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양 떼를 돌보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양 떼는 돌보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양들을 버리지 않고, 직접 목자가 되셨습니다. 에스겔 34장 11절에는.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34장 23절과 24절은 어떻게 목자가 되시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는데 당신의 종 다윗을 세워 목자가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34장은 예레미야 23장과 내용이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예언하고 있고,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예언하고 있지만, 예언을 주시는 분(하나님)은 한 분이시기에 메시지가 같은 것입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예언한 참된 목자에 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요 10:14). 우리가 구약 성경을 보게 되면 죄악에 빠진 인간을 구원할 메시아가 오겠다고 계속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범위가 점진적으로 좁혀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메시아의 예언은 점진성을 띄고 있습니다.
1. 메시아 예언의 점진적 계시
1. 원 복음(창 3:15)입니다.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직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에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통을 깨 놓고, 죄악에 빠진 인간을 건져낼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은 메시아가 천사가 아님을 말하고, 메시아는 짐승도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여자의 후손은 사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은 메시아는 사람 가운데서 나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2. 노아의 언약(창 6:15)입니다. 인간의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이 물로 심판하겠다고 하자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방주를 만들어서 노아와 여덟 식구와 짐승들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노아와 언약을 했습니다.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인류는 다시는 물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메시아가 인간 가운데 나와야 하기 때문에 인간을 보존하시겠다는 언약입니다.
3. 아브라함의 언약(창 22:18)입니다. 메시아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였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해석했습니다(갈 3:16). 점점 범위가 좁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 홀의 언약(창 49:10)입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메시아는 유다 지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5. 다윗의 언약(삼하 7:16)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아브라함 후손 중에서도 유다 지파, 유다 지파 중에서도 다윗의 집안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위가 영원히 견고케 되고, 다윗의 후손이 영원한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물론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솔로몬 왕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눅 1:32-33). 이 예언은 선지서에 반복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5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에스겔 34장 23절입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시는데, 인간 중에 보내시고, 아브라함 후손 중에 보내시고, 유다 지파 후손 중에 보내시고, 다윗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을 명확하게 예언했습니다. 계시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메시아가 어디서 올 것임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목자로 세우신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환생(reincarnation)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에스겔 선지자는 B. C. 580년에 예언을 하고 있고, 다윗이 왕에 오를 때가 B. C 1010년이고, 40년 6개월을 통치하고 죽었습니다. B. C. 970년에 죽은 것입니다. 에스겔은 다윗이 죽은 지 400년 후에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나올 것임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 성경을 보면 메시아는 인간일 것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일 것이며, 유다 지파에 속할 것이며, 다윗의 후손이 될 것이며, 메시아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양들을 구원해 내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점진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메시아의 예언에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는 유대인에게서 나오지만, 유대인만의 구원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 가운데 하나님의 참된 양도 있고, 이방인 가운데도 하나님의 참된 양이 있는 것입니다. 노아도 유대인이 아니고, 아담도 유대인이 아니고, 아브라함도 유대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씨로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메시아가 ‘천하 만민’을 구원하는 구원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Ⅱ. 메시아의 유일성
에스겔 34장 23절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한 목자’입니다. 목자는 여러 목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목자는 오직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뱀의 머리를 깨어 놓을 여자의 후손도 단수입니다. 단수일 뿐만 아니라 남성입니다. 남성 단수가 메시아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22장 18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씨도 단수입니다. 예레미야 23장 5절에도 ‘한 의로운 가지(one righteous Branch)’를 일으키겠다고 했습니다. 메시아는 한 존재뿐입니다. 이것을 신약 성경에서 한결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유일성(uniqueness of Messiah)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장 12절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구약 성경에서도 메시아는 한 분이고, 신약 성경에서도 메시아는 한 분이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34장 1절로 10절까지에 나오는 거짓 목자들은 복수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줄 목자가 많기를 원합니다(부처, 알라, 공자, 문선명 등). 저 또한 구원의 길이 많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옥 가기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 소망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에서 구원하고, 지옥에서 구원하고, 멸망에서 구원할 자는 한 분뿐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소원과 하나님의 말씀을 혼동하면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 참된 목자는 내 종 다윗이라고 불린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목자는 참된 목자가 아닙니다. 참된 목자는 내 종 다윗이라고 불렀지만,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목자인 척하는 피조물과는 비교하기도 기분 나쁜 것입니다. 비교 대상도 안 됩니다. 오늘날 신학계에 유행하는 종교 다원주의가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부처 믿어도 천국 가고, 알라 믿어도 천국 간다는 사상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소망이 될 수는 있지만, 진리가 아닙니다. 뱀(사단)에게서 나온 사상입니다. 인간의 거짓된 철학입니다.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Ⅲ. 메시아의 사역
본문 23절 중반에 보면 메시아를 가리켜 ‘내 종 다윗’이라고 했습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입니다. 메시아가 여호와의 종이라는 사상은 이사야 선지자가 많이 얘기했습니다. ‘이사야의 종의 노래’가 네 번 나오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도 같은 사상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1. ‘종(Servant)’이 갖는 의미는 세 가지입니다.
1)메시아는 겸손한 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겸손하셨습니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않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습니다(빌 2:6-8). 예수 믿고, 예수 닮은 사람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마귀를 닮은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그 속에 악령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을 이기고, 겸손하게 해달라고 3개월만 기도하면 막달라 마리아에게 붙었던 귀신이 칠십 배가 붙어도 다 떠나갈 것입니다.
2)성부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도 아버지 품속에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이라고 했습니다. 품속에 있다는 것은 극도의 친밀성을 말합니다.
3)선택된 종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고 했습니다(사 42:1).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을 먼저 택하시고. 예수 믿는 우리를 미리 그리스도 안에서 택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선택보다 선행적인 사건입니다.
2. 종이 하는 사역은 여덟 가지입니다. 에스겔 34장 11절부터 보면 ‘I will(내가 이렇게 하리라)’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종 되신 메시아가 오셔서 하시는 일은 I will 다음에 나오는 동사만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1)‘찾는다(search).’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겔 34:11) 예수님은 내 양을 찾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는 여호와 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하신 내 양을 찾으러 오신 분이시고 염소 찾으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셔서 모든 사람을 구원 못했으니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눅 19:10). 예수님이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고,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으면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 가운데 염소 사이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택한 양들을 찾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2)‘건져 낸다(rescue).’입니다.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찌라”(겔 34:12) 양들이 고난을 겪고, 죄악 가운데 멸망하는 양들을 건져 내겠다는 것입니다.
3)‘좋은 꼴로 먹인다(feed).’입니다. “좋은 꼴로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 위에 두리니 그것들이 거기서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산 위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겔 34:14) 우리 영혼의 꼴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4)‘상한 자를 싸매어 준다(bind up).’입니다.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겔 34:16)
5)‘병든 자를 강하게 한다(strengthen).’입니다.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겔 34:16)
6)‘양과 염소 사이를 구별한다(distinguish).’입니다. “내가 양과 양의 사이와 수양과 수염소의 사이에 심판하노라”(겔 34:17) 이 구별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완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양과 염소를 구별할 것입니다. 양은 오른편에 두어 창세로부터 예비된 영영한 나라를 상속할 것이며, 염소는 왼편에 두어 창세로부터 예비된 영영한 불 못에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마 25:46). 여러분은 예수님의 양이십니까? 예수님을 대항하는 염소이십니까? 염소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양으로 택하여 주셨습니다.
7)‘화평의 언약을 세운다(covenant of peace).’입니다.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겔 34:25)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와 화친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사람은 천국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8)‘복된 장맛비를 내린다(showers of blessing).’입니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겔 34:26) 메시아는 하나님이 택한 양들을 찾아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주시되 장맛비처럼 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번 추석에 비가 많이 왔습니다. 1908년 기상 관측 이래 10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축복이 그렇게 장맛비처럼 오면 감사하겠습니까? 화가 나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양을 찾아서 먹이시고, 고치시고, 치료해 주시고, 축복의 장맛비를 내려 주시는 구주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에도 ‘복된 장맛비를 내려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된 장맛비를 내리시기 때문에 구약의 복인 현세의 복, 자녀의 복, 장수의 복을 주시고, 신약의 복인 내세의 복, 영생의 복을 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결론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이 양으로 삼으신 택한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방황할 때에 찾아서 건져 주시는 분이시고, 고쳐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축복을 소낙비처럼 부어 주시는 메시아이십니다. 다른 목자는 없습니다. 메시아는 한 목자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좋은데 양이 나쁘면 안 됩니다. 살찐 양이 약한 양을 괴롭힙니다(겔 34:17-21). 우리는 좋은 양이 되어야 합니다. 또 어떤 양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마음은 이욕을 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겔 33:30-31). 우리는 좋은 목자를 둔 하나님의 양들입니다. 좋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요 10:27). 우리 성도님들은 항상 주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라가며, 순종하는 좋은 양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자를 본 받아 양육합시다
겔34:23 / 강성찬 목사
태초에 창조주께서 이 세상 만물을 지어내 놓자 크고 작은 물음과 부탁이 잇달았습니다. 그중에는 머리가 좋지 못한 당나귀도 끼어 있었습니다. 당나귀는 빈번히 제 이름을 잊어먹고 찾아왔습니다. "또 깜박 잊었습니다. 저의 이름을 뭐라고 하셨지요?" 창조주는 당나귀의 두 귀를 조금 늘어지게 잡아당겼습니다. "다음에도 네 이름을 잊어버리거든 귀를 생각해라. 나는 귀가 길다, 내 이름은 당나귀다 하고 말이야." 당나귀가 돌아가자 이번에는 벌을 에워싸고 여우와 오소리와 토끼가 징징거리면서 나타났습니다. "침을 가진 벌을 좀 어떻게 해주십시오. 조금만 뭐해도 침을 마구 쏘아대니 참을 수가 없습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벌의 침은 일회용이다. 침을 쏘아버리게 되면 생명도 끝나는 거야. 그러니 벌은 명심하거라. 네 목숨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 될 때만 침을 쓰도록 해야 할 것이야." 여우와 오소리와 토끼는 좋아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벌은 앵하고 볼이 부어서 돌아갔습니다. 창조주가 한숨을 돌리는데 또 발소리가 났습니다. 이번에는 양이었습니다. "아버지, 다른 짐승들이 저를 얕잡아 보고 못살게 굴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의 이 고통을 좀 덜어주십시오." "네 말도 맞다. 너를 너무 곱게만 빚었구나."창조주는 한참 있다가 은근히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의 이를 옥니로 하고 네 발톱을 갈퀴발톱으로 바꿔 줄까?" "아, 아닙니다. 저는 육식하는 맹수들과 같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의 풀을 뜯어먹고 사는 생활에 만족합니다.
"그럼 너의 입 속에 독을 감춰둘까?" "아이고, 그건 더 싫습니다. 뱀들처럼 미움을 받고 살기는 싫어요." "그렇다면 너의 이마에 뿔을 달아주면 어떨까?" "그것도 안되겠어요. 염소는 걸핏하면 뿔로 받으려 하거든요." 창조주는 말했습니다. "참, 딱하구나. 너를 해치려 하는 자를 막자면 너 자신이 그들을 해칠 수가 있어야 하는데..." "내가 그래야만 하다니..."양은 한숨을 쉬면서 쓸쓸히 말했습니다. "그러하시다면 아버지, 이대로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누구를 해칠 능력을 가지면 해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옳지 않은 일을 하기 보다는 옳지 않는 일을 당하고 사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습니다. 양은 돌아갔습니다. 이를 본 창조주는 어느 누구에게보다도 큰 축복을 양에게 내렸습니다. "오, 착하고, 착한 양아! 너는 힘이 없어도 땅에서 대우를 받고 살게 될 것이다. 너의 이름은 어진이들의 상징이 될 것이며 어느 힘센 짐승보다도 자자손손 번성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베론 포로로부터 해방시켜 고토인 유다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양'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목자' 같은 심정에 의하여 달성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에 넘치는 계획의 술회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23 절)하신 하나님께서는 목자 없이 흩어진 양들을 찾아 건져 낼 것을 약속하시고, '한 목자를 세워 그들을 먹이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릴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흩어진 양떼를 한 곳에 모으고 그들의 목자가 되어 평화와 번영의 황금시대를 열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고 하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유다와 바벨론, 그리고 열방에 흩어져 있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목자'로 나타나셔서 그들을 고토에 모으고 '좋은 꿀'을 먹이고 '좋은 우리'(14절)에 눕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 약속은 모든 인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방황하는 인생들에게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하고 진리의 꼴을 먹여 주시는 참 목자이십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되 목자를 본 받아 양육하는 달입니다. 목자를 본받아 양육합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며 은혜를 사모 하고자 합니다.
1. 양을 찾는 목자를 본 받아
우리는 양을 치는 목장이나 동물원 외에서는 양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양고기를 먹어 보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방에서는 양이 매우 중요한 동물로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양에 대한 얘기는 성경에 500번이나 언급되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은 오래 전부터 가축으로 길러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랫동안 귀중하게 다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당시에는 굵은 꼬리가 달린 양이 가장 흔했습니다. 그러한 종류의 양은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그 꼬리의 무게는4.5-6.5kg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꼬리가 동물의 가장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꼬리 먹기를 즐겨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양을 다 그렇게 중요한 동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양을 가지면 매우 기뻐했습니다. 양은 맛있는 요리가 되기도 하며 의복을 위해서는 털을, 아침에는 젖을 공급해 주기도 합니다. 만약 집이 필요하게 되면 사람들은 양의 가죽으로 튼튼한 천막을 만듭니다. 물건을 사고 싶으면 돈 대신에 양을 사용합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원하면 양 뿔로 나팔을 만들어 감미로운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양은 이렇게 유용한 동물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양이 혹사당하지 않을 수 있는 특별한 법칙을 주셨습니다. 그들도 사람과 같이 일주일에 하루는 쉽니다.
이스라엘에 양을 사육하는 많은 목자들이 있습니다. 양이 쓸모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진 이후 양은 소유주에 의해 조심스럽게 돌보아졌습니다. 그는 종종 양과 함께 들에서 잠을 자거나 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항상 살핍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늑대와 사람들이 양들을 훔치려 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지난밤에 없어진 양이 있나 살펴보고, 한 마리라도 잃어버렸으면 곧 찾으러 나갑니다. 그는 나머지 양들을 울타리 속으로 집어넣을 후, 밖으로 나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하루 종일 찾으러 다닙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그립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많은 양들을 놔두고 잃어버린 단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섭니다. 피곤하고 지쳐 있지만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온 산과 들을 찾아 헤맵니다. 그 마음에는 집도, 아흔 아홉 마리의 양도 먹는 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잃어버린 양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양을 부르고 또 부릅니다. 발이 부르트도록 이리저리 헤맵니다. 혹시나 도둑에게 잡혀가지나 않았을까? 맹수에게 잡혀 먹히지나 않았을까? 걱정하며 찾아 헤맵니다. 자기 자신의 모든 감각을 다 동원하여 오직 잃어버린 한 마리에 집중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은 즉 즐거워했습니다. 자기의 잃어버렸던 양을 찾자 그 양을 자기의 어깨에 메고 너무나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목자와 동료들을 잃어버리고 그 동안 어두움과 추위 무서운 맹수들의 위협에서 떨어야 했던 양은 오랜만에 목자의 품에서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집으로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눅 15:6)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잃은 양을 찾은 기쁨의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양들을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이 그 얼마나 깊고 큰 것인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양은 찾는 목자의심정은 단지 찾는 다는 것 보다는 구원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쉽게 길을 잃고 맹수들의 밥이 되고 맙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하는 시인의 고백처럼 양은 목자가 있어야만 안전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각 성과 촌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고치셨는데, 그들 불쌍한 무리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벧전 5:8), 그 양무리의 '연약한 것을 강하게 아니하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4 절)한다면 많은 영혼을 실족케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 우상을 섬긴 죄로 그 우상이 속해 있는 열방으로 사로잡혀 흩어져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방황하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포로 생활은 그들의 범죄에 대한 '징계' 이지 '유기' 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징계' 기간이 차면 그들을 다시 모아 고토로 돌아가게 하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배은망덕으로 타락한 본성을 표현하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찾아다니시는 긍휼의 목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든 열국으로부터 찾아 모으실 것입니다. 양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더욱 극명하게 표현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나타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목자를 본받아 양육합시다.
2. 인도하는 목자를 본받아
동방의 나라를 다녀온 이가 한 목자가 그의 양떼에게 냇물을 건너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합니다. 그 목자는 시냇물로 들어가서 양떼를 불렀지만 양떼는 목자를 따라 물에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그 목자는 어떻게 해야했을까요? 그는 자세를 단단히 갖춘 다음 양팔에다가 어린양하나씩을 끼고 시냇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시냇물을 건넜습니다. 목자가 어린양을 치켜들자 나이 많은 한 양이 그 쪽을 바라보더니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양은 시냇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자 어미 양들이 그 뒤를 따라 물로 뛰어들고 그리고는 양떼 전체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이리하여 양떼가 시냇물을 다 건너왔을 때 그 목자는 어린양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때 어린양은 재빨리 어미 양에게로 다시 가서 기쁨의 상봉을 하였습니다.(목자의 뜻-예화뱅크)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13 절)인다고 합니다.
양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우리는 자기가 전에 살던 그 우리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의 가장 좋은 우리는 자기가 임무를 수행하는 장소이며, 보다 더 좋은 주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집입니다(요 14:2, 3). 거기에는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거주지는 고국 유다입니다. 자기 나라 이상 살기 좋은 나라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푸른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목자를 본 받아 양육합시다.
3. 좋은 꼴로 먹이시는 목자를 본받아
양들에게는 묘한 습성이 있는데, 생리상 조건을 충족시켜 주지 않는 한 양들은 절대로 눕지 않으며... 목자라도 양을 눕게 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합니다. 첫째, 양들은 본래 겁이 많은 동물이기에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누우려 하지 않는다 합니다. 둘째, 양들은 집단 안에서 사회적 행동을 하는 동물이기에 저희 들간에 싸움이 쉬지 않으면 누우려 하지 않는다 합니다. 셋째, 만일 파리나 기생충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받는 경우에도 양들은 누우려 하지 않는다 합니다. 넷째, 배부르게 꼴을 먹지 않는 한 양들은 누우려 하지 않고 일단 자신의 배가 불러야만 자리에 눕는 법이다라고 합니다.(필립 켈러-W. Phillip Keller 양과 목자-A Shepherd Looks at Psalm 23-인터넷정보클럽)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은 굶주리고 집 없는 아이들을 모아 커다란 캠프 안에서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거기서 아이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며 보살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밤이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심리학자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이들이 침대 속에 들어간 후에 각자가 손에 쥐고 있을 빵을 한 조각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그냥 손에 들고 있도록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그마한 빵 한 조각이 놀라운 효과를 가져 왔습니다. 아이들은 내일 먹을 것이 있다는 안도감에서 평안히 잠들었던 것입니다.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해야만 했던 이 아이들이 내일 염려를 해결 받았을 때 비로소 평안히 잠들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급을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고 묘사했습니다. 푸른 초장에 누워 있는 겁니다. 왜요? 배가 이미 너무 부르기 때문에 앞에 푸른 초장이 있어도 더 먹을 수가 없습니다. 속이 꽉 찼어요. 포만감으로 이제는 더 이상 먹을 수 없어서 그 음식 위에 쭉 누워있는 양의 모습을 봅니다.
'좋은 꼴로 먹이고…살진 꼴을 먹으리라'(14 절)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의 '좋은 꼴' 은 '율법'입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의 '좋은 꼴'은 '복음'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의 '좋은 꼴' 은 신. 구약성경 말씀입니다.
좋은 꼴 말씀으로 먹이며 양육합시다.
흩어진 양을 찾는 목자 인도하는 목자 좋은 꼴을 먹이는 목자를 본받아 양육합시다.
복된 소낙비
겔34:24~31 / 이영택 목사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모든 성도들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부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편은 어떻게 된게 속옷만 벗었다 하면 아무데다 버려두고 양말도 한번 제대로 벗은 것을 본 일이 없답니다. ‘아비가 그러니 아이들도 애비를 닮아 그 모양’이라며 남편과 아이들이 등교를 하고 나면 여기저기 흩어진 속옷가지를 집어 드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안 되자 그 부인은 큰 빨래바구니를 몇 개 샀습니다.세탁기까지는 아니라도 제발 빨래 통에만 넣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그런데 안 산 것보다 더 못하더라는 것입니다.아무데나 집어던지는데 어떤 것은 들어가고 어떤 것은 바구니에 걸쳐 있고 어떤 것은 떨어지고… .부인이 낙심이 돼 식탁에 멍하게 앉아 있는데 남편이 습관대로 옷을 벗어 휙 집어던지는데 그 옷은 쏙 들어갔습니다.그래서 부인이 “여보, 어떻게 당신이 그것을 거기다 집어넣었어요. 실력이 대단하네요.”라고 말 했답니다.그런데 그때부터 남편에게 당장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빨래를 집어던지는 것은 안 변하는데 던져서 안 들어가면 들어갈 때까지 다시 집어던진다는 겁니다.
칭찬으로 못 고치는 습관은 어떤 것으로도 못 고친다고 합니다.
사람이 칭찬을 받으면 더 잘 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고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열배의 능력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칭찬은 그래서 귀로 먹는 보약이라고도 합니다. 칭찬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훈련된 사람의 고품격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칭찬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그만한 안목을 가졌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잠 27:2)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라 고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칭찬받는 믿음의 충실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는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충실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이나 칭찬받는 일이나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의 상급이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철학자 「세네카」는 ‘그림의 떡은 떡이 아니요, 붙지 않은 불은 불이 아니며, 간절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라고 했다.
믿음의 기도는 목숨을 건 전투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야곱의 기도에서 이를 엿볼 수 있고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역사가 「H.C 월즈」가 쓴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어느 대주교가 그날 밤에 습관처럼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눈앞에 빛이 보이면서 신비한 음성이 들리더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 기도를 듣는데, 그래 무슨 일이냐?”하는 음성이었는데 그 소리에 너무 놀란 나머지 대주교는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평생을 기도했던 대주교지만 자신의 기도가 형식적인 기도에 불과했던 까닭에 막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자 놀라서 죽어 버리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같이 분초마다 은혜를 주시고 감동하시고 인도하시지만 문제는 인간이 영적으로 무디어져서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과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은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고 그렇게 인도해오셨고 그렇게 하셨으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느끼지 못한 인간들이 문제였습니다.
(신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고 하셨는데 우리에게는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1. 평안의 은혜(24-15절)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이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이 은혜로 이스라엘은 복을 받았고 구별되었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였고, 깨닫지 못하였고, 믿지 못하였고, 순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고 불순종의 삶을 살았고 역행의 길로 빠졌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철저하게 고통을 배우게 되었고, 아픔을 배우게 되었고 망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 그곳에서 눈물과 고통으로 세월을 보낸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그러한 처절하게 망하게 되고 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하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철저한 회개로 돌이키게 하시면서 그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또 하나는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다윗이 왕이 되리라는 은유적 메시지입니다.
은유법“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비겨서 표현하는 비유법의 하나”입니다.
다윗은 이미 에스겔 선지자가 활동하기 전의 먼 옛날 아주 오래전의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2대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는 것은 또 다시 과거의 그 다윗이 나온다는 의미보다는 메시야의 약속의 대한 메시지입니다.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은 전쟁하러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평안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런데 마태복음에 기록한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여러분 이 말씀을 무슨 전쟁의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않되는 일입니다.
복음전파로 인하여 일어나는 어두움과 빛의 대립 같은 개념으로 생각을 해야지 피를 흘리며 싸우는 전쟁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나라는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의 가정과 마음에는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에너지입니다. 능력입니다. 평안힘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28)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도 아니하고 평안히 거주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29) 내가 그들을 위하여 파종할 좋은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여러 나라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고 하였습니다.
2. 복된 소낙비의 은혜(26-27절)
하나님의 그의 백성들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산 사방에 복을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시는데 복된 소낙비를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소낙비는 장마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원뜻은 격렬하게 퍼붓다에서 유래한 것이고 복을 내린다는 이 복은 히브리어 &r"B; barak 라고 하는 무릎을 꿇다. 찬양하다. 하나님을 송축하다의 예배와 관련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된 소낙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에게 격렬하게 퍼붙는 장마비처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내리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살핌과 도우심을 통하여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노력하여 복을 받는 것은 복을 받는 다는 것보다는 노력한 것에 대한 대가로 살아갈 뿐입니다.
(창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땀이 흘러야 먹고사는 정도가 인간의 노력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에만 있지 아니하고 그 복을 누리는 것이 복입니다. 받기만 하고 누리지 못하면 노동자만도 못합니다.
(전 5: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아 부자소리는 들을지 몰라도 누리는 복은 아닙니다. (잠 10:22)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복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되게 하시는 축복입니다.
이를테면 사막에서 꽃이 핀다는 것은 사람의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쉽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 35: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사 35: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영적 의미는 사막화 되어버린 사람의 마음의 대한 변화를 표현한 말씀입니다.
복된 장마비로 만물을 살아나게 하시고 꽃이 피게 하시고 생명이 살게 하시고 아름다운 세계로 만드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복된 장마비에 해당하는 것은 교회시대에 주께서 택하시고 불러내시고 구원하시는 주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신 11: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시 84: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욜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렘 5: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비의 상징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결론(30-31절)
그들이 내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고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31)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시 100: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시 1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곧 나의 하나님 되시며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해야 하고 믿어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 속에서 나의 삶을 이끄시어 세속에서 끌어내시고 구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겔 34:25-31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이 시간 옆에 있는 분들을 한번 쳐다 보십시다. 모두 다 신동처럼 생기셨죠? 여기에서 신동이란 ‘신기한 동물’을 뜻합니다. 제가 봐도 모두 다 참으로 신동처럼 생기셨습니다.
농담인 줄 아시죠? 저와 여러분 모두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걸작품 중 최고 걸작품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 서로를 향해 이렇게 인사합시다. “당신은 하나님의 걸작품이십니다.” 한 번 더 이렇게 인사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미십시다. “당신의 하나님 걸작품 중 최고 걸작품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스겔 34장은 '목자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시고 그들을 이끄시기 위해서 지도자들을 목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자기들의 배만 불리 우고 양들은 돌아보지 아니하므로 백성들이 들짐승들의 밥이 되어버리고야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저들에게 놀라운 기대와 소망의 소식이 전해집니다. 23절과 24절 말씀입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을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실패한 지도자들을 다 파하시고 참된 목자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참된 목자가 누구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는 내 종 다윗이라."
여러분? 느닷없이 다윗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여러분? 지금 에스겔서 말씀을 기록한 때가 언제 인줄 아십니까? 다윗이 죽은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난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 가운데 처해 있을 바로 그 당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한 목자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내종 다윗이라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2번째 왕이었던 다윗 왕을 지칭하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다윗은 누구를 말할까요?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 가운데 오신 참된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양들을 위해서 참된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가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야말로 진정 우리를 목양하시는 분이십니다. 참으로 우리를 먹이고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우리를 끝까지 섬기시는 왕이십니다. 양들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까지 바치시는 참된 목자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 그 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들을 하나씩 하나씩 발견하면서 그것을 바로 우리의 것으로 누리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로, 화평의 언약을 세우리라.
다같이 따라합시다. “화평의 언약을 세우리라.” 다같이 25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시작)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지라."
여러분? 언약 즉 계약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전세 집을 구입할 때 계약서라는 것을 씁니다. 그런데 이 계약서를 쓰고 나면 계약서를 쓰기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변화가 찾아옵니다.
계약서를 쓰고 나면 그 집이 원래 자기 집이 아닌데도 이제 자기 집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 안에서 옷을 벗든지, 소리를 지르든지, 춤을 추던지, 놀고 쉬고 자면서 마음껏 생활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집주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 집에 찾아올 때에도 자기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고, 살고 있는 사람의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계약의 놀라운 위력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는 이러한 계약이 있었기에 그들 민족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계약 공동체로서의 삶을 영위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놀라운 계약이 체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오늘 이 말씀에서 무슨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화평의 언약" 여러분?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평의 언약이 체결된 것입니다. 이 화평의 언약이 어떻게 체결되어졌습니까? 우리가 계약서를 썼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평의 언약이 체결되어진 것은 참된 목자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생명과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아낌 없이 내어 주신 예수그리스도 바로 그 분을 믿을 때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미 화평의 계약이 체결되어진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계약에는 기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전세 계약을 했다가 기간이 지나게 되면 그 계약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2년 계약이 끝나고 나면 주인이 찾아와서는 "방 빼"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만약 그랬다면 세입자가 핑계 댈 수 있습니까? "방 빼"라면 빼야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계약 기간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약 기간이 끝나게 되면 그 계약서는 종이 조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어진 이 화평의 언약은 계약 기간이 과연 언제까지일까요? 계약 기간이 한시적으로 정해져 있을까요? 참으로 우리를 감격케 하는 사실은 그 화평의 언약은 결코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 안에서 영원하신 것처럼, 바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어진 화평의 언약도 영원한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입니다. 마찬가지로 한번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를 영원토록 지켜 보호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한번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한번 광성교인은 영원한 광성교인입니다.” 여러분? 이 외침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화평, 평안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화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샬롬'입니다. '샬롬'의 동사형은 '샬람'인데 이 '샬람'은 그 뜻이 "완성하다. 끝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계약의 모든 조건들을 다 완성하고 끝내셨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샬롬' 평강, 화평의 관계가 맺어지게 되었으며, 그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평화 그 자체이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영원한 평화, 영원한 평강을 우리의 심령 가운데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화평의 언약 가운데 살아가는 백성들이기에, 이제 우리의 모습이나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 평안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삶의 특징이 되어야만 합니다.
어떤 조건과 어떤 상황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예수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그러한 평안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흘러 넘쳐나야만 합니다.
여러분? 얼굴이라고 하는 것이 뭡니까? 제가 젊었을 때는 한 인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이를 먹어가니깐 그렇게 잘생겼던 얼굴이 지금 이렇게 되었습니다.잘생긴 얼굴.... 그거 별거 아닙니다. 이 얼굴이라는 것이 그 말의 근원을 따져 보면 '얼의 꼴'이라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얼의 꼴'이 얼굴입니다.
여러분? ‘얼’이 무엇입니까? 이 ‘얼’이라는 것은 바로 ‘영혼’을 말합니다. ‘심령’을 말합니다. 결국에 우리의 심령, 우리의 영혼의 꼴, 그 영혼의 모습이 우리의 얼굴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얼굴이 점점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심령 가운데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그 놀라운 평안이 그를 지배하기 에, 영원토록 그를 사로잡고 있기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얼굴에서 '얼의 꼴'에서 예수님처럼 평화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스코리아들이 자신들이 ‘평화의 사절단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들의 외모만으로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과 평화의 계약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진정, 이 땅 가운데서 참된 평화의 사절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집에 가셔서 거울로 여러분의 얼굴을 보시면서 '샬롬'하고 한번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내 얼굴이, 내 마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그 평화의 모습의 꼴이 되어가고 있는가?’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얼굴이 우리의 가정 속에서 서로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나누어 줄 수 있는 얼굴, 그래서 우리의 가정을 하나님의 평화가 넘쳐나는 가정으로 세워 나가는 얼의 꼴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목은 ‘아내는 나보고 쇠(?)가 되라고 하네!’ 참으로 제목이 신기하죠? 제가 읽습니다. “아내의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하는 충성심 강한-돌쇠, 일하고 돈 벌 때는 개미처럼 부지런한-마당쇠, 아내의 단점이나 잘못은 절대 말하지 않는 철통같은-자물쇠.
아내의 마음이 닫혀 있을 때에는 언제나 활짝 열어 주는-만능열쇠, 모진 풍파에도 끄덕 없이 가정을 잘 지키는 강인한-무쇠, 아내가 아무리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려도 그저 둥글둥글 잘 굴러가는 -굴렁쇠.
아내와 대화 할 때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수액의-고로쇠, 친구들과 밖에서 어울릴 때는 아내와 가정의 재정적인 형편을 생각해서 돈 한 푼 안 쓰는 -구두쇠, 마지막으로 아내가 울적할 때는 달콤한 노래로 달래 주는-이문쇠(?) 아내는 나보고 쇠가 되라고 하네.”
이처럼 오늘날 우리 남편들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쇠라도 되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 여러분? 이러한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잠언 21장 19절에 보면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죽하면 광야에서 혼자 산다고 할까요? 사랑하는 아내들이여? 가정에서 남편에게 바가지만 긁지 마시고 방긋 방긋 웃으며 가정의 평화를 위해 평화 사절단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참된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두렵게 하거나, 얽어매거나, 억압하거나, 우리를 괴롭게 하는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하늘의 참된 평화가 영원토록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덮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그렇습니다. 이제 후로는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가 영원토록 우리 영혼을 덮어 주심을 믿고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담대히 세상을 헤쳐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찾아가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인 줄 아십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바로 ‘샬롬’의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화평의 언약이 우리 큰빛광성교회와 저와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의 삶 속에서 늘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복된 장마 비를 내리리라.
다같이 따라합시다. “복된 장마 비를 내리리라.” 다같이 26절 말씀을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 비를 내리리라." 여러분? 이 말씀 속에 "복된 장마 비"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가리켜서 복된 장마 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장마 비를 그렇게 복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평상시에도 비가 많이 오는데 이 장마철만 되면 더 많은 장대비가 쏟아 퍼붓습니다.
여러분? 장마 비가 얼마나 온 사방을 어지럽히고 참으로 힘들게 합니까? 그래서 우리 같으면 앞에 '복된 장마 비'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장마 비'이렇게 표현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땅에서는 장마 비라고 하면 눈이 번쩍 뜨이는 그런 복된 소식입니다. 그곳에는 우기라고 하는 것이 1년에 두 번, 제한되어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 오는 이른 비가 있고, 또 추수기 때에 오는 늦은 비가 있습니다. 그때는 비가 정말이지 흡족하게 내립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때오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가리켜서 단비라고도 하고, 또한 복된 장마 비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들에게 있어서 장마 비란 1년의 농사를 판가름 짓는 생명수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 가운데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 비를 내리리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축복 받은 나라입니다.
이집트만 봐도 영상 40도를 오르내리는 가운데 제대로 마실 물이 없어서 쩔쩔맵니다. 물 한 병 값이 기름 값보다 더 비싼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는 팔레스타인 땅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식당을 가서 밥을 먹는데 우리 같으면 물은 실컷 공짜로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땅에 가면 밥을 먹는데 물도 돈을 내고 사 먹어야 됩니다.
그처럼 물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이러한 때에 장마 비라는 것, 단비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물, 생수로 많이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도 "복된 장마 비"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는 그저 자기 입만 축일 정도의 그런 은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때를 따라서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 비를 내리시겠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복된 장마 비를 흠뻑 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의 단비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 심령에 단비와 복된 장마 비를 흠뻑 내려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성령을 가리켜서 ‘우리 안에 흘러넘치는 생수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에 생수의 강이 터져서 솟구쳐 나온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성령충만한 가운데 기쁨이 솟아나고 믿음과 감사와 놀라운 열심을 품고서 진정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어집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과거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고 누리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더 많이 가졌고 더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점점 그 마음속에는 기쁨이 사라져 갑니다. 평안이 줄어듭니다. 은혜가 점점 메말라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 무엇이 부족해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때마다 시마다 복된 장마 비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는데 하지만 우리 안에는 그런 성령을 향한 간구와, 사모하는 심령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심령 가운데 이런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복된 장마 비의 은혜의 역사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내려 주시는 복된 장마 비에 흠뻑 젖는 기쁨과 감격을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 주의 날 주님 앞에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예비하신 이 복된 장마 비를 내 심령 가운데 부어 주시옵소서. 메마른 심령 가운데, 평안이 사라지고 있는 이 심령 가운데, 하나님! 은혜의 단비를 풍족히 부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이러한 은혜의 장마 비를 경험하므로 소금 맞은 배추같이 축 늘어져 왔던 우리들, 주일날 교회 나올 때마다 정말 소금절인 배추 잎사귀처럼 축 쳐져 가지고 시들시들하면서 살아왔던 우리의 심령들이 이슬 맞은 풀잎처럼, 단비 맞은 풀잎처럼, 파릇파릇 돋아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때를 따라 복된 장마비를 맞으며 싱싱하고 탐스런 열매를 맺어서 풍성한 삶의 소산을 거두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너희는 하나님 초장의 양이라.
다같이 따라합시다. “너희는 하나님 초장의 양이라.” 다같이 31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시작)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내 양, 내 초장의 양’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초장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목자가 되셔서 가꾸시는 바로 그 초장에서, 양으로써 안식을 누리며 풍성한 꼴을 먹으면서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성경 상에 보면 하나님의 그 모습에 대해서 기가 막힌 표현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하나님의 보좌로 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하나님의 발 디딤돌로 삼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을 보좌로 삼고 앉아 계시고 이 땅을 발 디딤돌로 삼고 계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을 사람의 머리 속에 어찌 가두어 둘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어느 책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정말이지 제 마음 가운데 깊이 새겨지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찌 보면 태산의 귀퉁이를 호미로 긁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라고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대단히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아니 거의 전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태산의 한 귀퉁이에 앉아서 호미로 긁적대고 있는 정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어느 대학에서 무신론자 교수 한 분이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했다고 합니다. 늘 학생들에게 ‘신은 없다. 신은 죽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교수였습니다. 하루는 그 교수가 학생들을 데리고 해변 가로 갔다고 합니다. 거기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 그리스도인 학생이 놀지는 아니하고 바가지 하나를 가지고서 바닷물을 푸더니 자꾸 밖으로 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 교수가 그 학생에게로 다가가서 "학생, 도대체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학생의 어리석은 행동을 비웃으며 말을 걸었습니다. 그때 이 학생이 하던 일을 멈추고 교수님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교수님, 제가 하는 일이 참으로 어리석어 보이지요? 그런데 교수님, 교수님은 어째서 그 바가지만한 머리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하신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자꾸만 하나님을 인간 세상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은 인간의 땅을 떠나라."는 책까지 나왔습니다. ‘왜? 자꾸 신이 이 땅 가운데 있어서, 인간이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데도 자꾸 신에 매이게 하느냐? 신은 제발 좀 떠나가라. 우리 인간들끼리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이렇게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진정 우리가 안다면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도 압니다. "내 초장의 양"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떠날 때 자유와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자이신 주님의 그 푸른 초장에서 양으로써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 주님 안에서 살아갈 때에 여기에 참된 안전과 자유와 행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이제 우리 모두를 놀라운 축복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화평의 언약"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시마다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된 장마 비"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 초장의 양”이라 말씀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러한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2번)
이제 후로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믿고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들을 누리며 온 세상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쁨으로 전하는 샬롬사절단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때를 따라 부어주시는 장마비 축복
이동아 목사
어떤 중년을 넘긴 분이 한번은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 분이 교회에 나오게 된 이유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삶과 자기의 삶을 비교해보고 무언가 심각하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교회에 나오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로는 예수 믿는 자기 친구는 어릴 때부터 하루를 쉬면서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하였는데, 자기는 일주간이 얼마나 바쁜지 이레 동안 공부하고 사업을 해도 모자란다고 생각하면서 악착같이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50이 넘어서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악착같이 쉬지 않고 살아온 자기나, 7일 중 하루를 쉬면서 살아온 자기 친구나 사는 형편이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친구는 어려워도 늘 감사하며 사는데, 자기는 인생이 점점 더 힘들고 내가 왜 사는가 인생이 무엇인가 회의가 찾아오고 매사에 자신이 없어 이러다가는 자기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 이제야 교회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일주일 다 일하고도 요모양이고 자기 친구는 일주일에 하루를 꼭꼭 쉬고도 저 정도라면 결국 자기만 멍청한 생활을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예수 믿는 재미가 무엇이고 주안에 누리는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모르고 인생을 힘들게 소모하면서 살 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바울사도는 부활하신 예수 믿고 항상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주신 은혜로 날마다 있는 것으로 만족하며 나누며 누리며 살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구약 에스겔 오늘 본문의 저자는 오실 그분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부어주실 장대비와 같은 축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본 적도 없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엄청난 화평의 언약을 세우십니다. 평강의 왕 한 목자이신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겔34:23-24)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 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 호와의 말이니라"
한 목자를 보내주신다고 합니다. 그가 다윗이라고 말합니다.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바로 그 분이 죄와 마귀의 사슬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분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제물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속량하신 것을 믿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 으니(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의 언약을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평강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내 자신과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이웃과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이것이 화평의 언약인 것입니다.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화평케 하는 직책을 받아 태어난 것입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우리 모두는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으로 화평의 언약을 맺게 된 것입니다. (겔34:25)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지라"
예수를 나의 주 나의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누려야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때에 따른 장마비(26절)
(겔34:26)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때를 따라 시기 적절하게 장마비를 내리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dal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이른 비" "늦은 비" 그리고 "장마 비"(겨울비) 등 세 종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른 비"는 대개 10월말에서 11월에 내리는 '비'로써 여름동안 달아 오른 대지를 식혀주고 토양을 부드럽게 하여 경작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이른 비가 내리면 신년이 시작되고 이 비가 충분히 내려야 풍년이 약속됩니다.
"늦은 비"는 보통 3월에서 4월 사이에 내리는 비로 곡식의 성장과 결실을 돕습니다. 그리고 "장마 비"는 12월 하순에서 이듬해 2월 사이에 내리는 큰비로써. 때로는 뇌성과 번개를 동반하며 폭풍우가 몰려 올 때도 있습니다.
이 비는 여름동안 타버린 대지를 충분히 해갈시킬 뿐아니라 샘과 웅덩이를 넉넉히 채워줍니다. 비가 내리면 각 가정에서는 물통을 준비하여 옥상에 놓고 빗물을 받아 놓았다가 사용하기도 하고.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어 그곳에 물을 저장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물이 귀한데다가 기온이 높기 때문에 누구나 비에 대해서 고맙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비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신11:13-14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 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50일째가 되는 날이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던 때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복된 장마 비를 흠뻑 내려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 님의 강림이신 것이죠. 성령 님을 통해서 우리 심령에 단비와 복된 장마 비를 흠뻑 내려 주신 것입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성령 님을 가리켜서 우리 안에 흘러 넘치는 생수와 같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속에 우리의 영혼에 생수의 강이 터져 솟아나옵니다. 우리의 심령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 기쁨이 솟아나고 믿음과 감사와 놀라운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삶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자리로 나아와야 합니다. 예배, 말씀, 기도해야 합니다. 때를 따라 이른비와 늦은 비를 맞아야 우리의 심령이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감정이 성령의 장마비로 적셔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즉각적인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낙심하거나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식이 구하면 좋은 것으로 주듯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렇게 해주실 줄로 믿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마7:11). 우리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마6:3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꼭 필요로 할 때 은혜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적당한 시기에, 또한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때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희랍 신화 중에 [마이다스]라는 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황금에 눈이 어두웠던 이 왕은 어느 날 낯선 신(神)의 방문을 받고 소원을 말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왕은 내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이 다 금이 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자기 손으로 만지는 것마다 다 황금으로 변한다. 의자도 책상도 그릇도 기둥도....... 너무 흥분하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사랑하는 자기 딸이 와서 안기니 그의 손이 닿는 순간 황금으로 변했다. 아내도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잘못했으니 원래대로 해주십시오.
어떤 사람 만나도 어떤 형편에 있어도 재수 없다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나를 연단하시는 엑스트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어떤 일을 당해도 형통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요셉도 믿음이 없었다면 다 재수 없는 일 재수 없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아버지도 재수 없고 (편애해서 형들 미움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노예로 팔려갔으니까) 형들도 재수 없고 장사꾼도 재수 없고 보디발 장군도 재수 없고 그 아내도 재수 없고 감옥에 간 것도 재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주님은 평안할 때뿐만 아니라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려운 때에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병들었을 때에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실패하고 무기력하고 약할 때 더욱 강한 은혜를 주십니다.
지난 주일에 어느 집사님이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때를 따라 적적하게 환경과 모든 것을 예비하심을 고백했습니다. 날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앞에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2)열매를 맺는 나무(27절)
(겔34:27)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찌라 내가 그들의 멍엣목을 꺾고 그들로 종을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겠고"
장마비는 나무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은 참포도나무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단비를 맞고 자란 나무는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3)좋은 땅의 풍성한 소산(27절)
(겔34:27)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찌라 내가 그들의 멍엣목을 꺾고 그들로 종을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겠고"
장마비는 땅의 소출을 많게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다른 사람에게 공급할 영적인 양식을 말합니다.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한참 역사를 일으키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지방에 가서 연합 집회를 열고 있는데 사람들이 구름 떼 같이 모였습니다. 첫날 '여러분, 할 수 있는 한 많은 복을 받으십시오' 사람들이 아멘 아멘 난리도 아닙니다. 대단히 좋아들 합니다. 둘째 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에게 설교하기를 '여러분 할 수 있는 한 많이 저축하십시오' 아멘 아멘 교인들이 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셋째 날은 더 많이 모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것을 줄 수 있는 한 많이 주십시오' 그런데 설교 중간쯤 되니 양조장을 하여 돈을 제일 많이 번 사람이 얼굴 색이 달라지더니 슬그머니 일어나 나갑니다. 그러자 여기 저기 사람들이 빠져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산은 나누어 줄 수 있는 풍성한 영적인 소산입니다.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복음을 줄 수 있습니다. 평강과 자유와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행3:4-10)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 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예수 안에 사는 자는 좋은 땅에 소산이 많은 것처럼 평강이 넘칩니디ㅏ.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4)유명한 식물을 일으킴(29절)
(겔34:29) "내가 그들을 위하여 유명한 종식(種植)할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 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열국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풍성한 공급자인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좋은 땅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을 넘치도록 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뒤로 물러나 타락할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림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좋은 땅으로 되돌려 놓으시는 것입니다. 고토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우리의 약속의 땅인 그리스도에게로 회복시켜 놓은 것입니다.
(골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땅과 흙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8:7-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噴泉)과 샘이 흐르고(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9)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10)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측량할 수 없는 부어주시는 풍성-가나안의 예표이며 -그리스도 예표입니다.
5)기근이 없고 풍성한 양식(29절)
(겔34:29) "내가 그들을 위하여 유명한 종식(種植)할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 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열국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적인 풍성한 양식이 있을 것입니다. 생명의 떡상 앞에 나아와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인 것입니다.
(수5:11-12)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12)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 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좋은 땅 -만나의 계속으로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시1:1-3) "복(福)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 (傲慢)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2) 오직 여호와의 율법(律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晝夜)로 묵상하는 자로다(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평생을 동역 하신 조지 베브리 쉐아(George B. Shea)라는 복음 성가 가수의 간증입니다.
1931년 미국의 보험회사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있던 그는 NBC의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들려준 저음의 바리톤은 방송을 통해 전 미국 국민에게 울려 퍼졌고 노래에 매료된 사람들이 그에게 끝없는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갑자기 그는 유명 스타가 되어 여러 방송사에서 끊임없는 계약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앞으로의 그의 인생은 출세와 돈이 보장된 스타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왠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밀려들어와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머리 숙여 기도하였습니다. 그가 기도하던 그 시간에 그의 어머니도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의 마음에도 아들의 출세의 길이 눈앞에 보였지만 기쁨은 없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의 책상 위에 조그마한 쪽지 하나를 갖다 놓았습니다. 그가 종이를 펼쳐보니 어머니가 자주 애송하던 밀러 부인의 성시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 성시를 조용히 읽다가 감동을 받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멜로디를 종이에 써 내려갔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그는 지금 여든이 넘는 나이에도 백발을 휘날리면서 전도와 간증과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1983년 네덜란드의 암스텔담에서 전세계의 전도자들이 모두 모였을 때, 그는 특별 찬양을 했습니다. 찬양이 끝나자 장내의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끝없는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 박수가 끝난 후 그가 남긴 한마디는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오랫동안 숙연케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주신 박수 갈채와 그리스도를 바꾸지 않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때를 따라 부어주시는 이 복을 누린 바울 사도처럼 저와 여러분은 (고후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 축복을 날마다 고백하며 간증하며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