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86
12월28일[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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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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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7TOAT_x4ZfQ
[서울대교구 은성제 요셉(가톨릭청소년이동쉼터 서울A지구 소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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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무서운 시절의 소란이 끝나면...>
리더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자기 성찰과 기도, 희생과 봉사가 요청됩니다. 적절한 균형 감각과 보편적 상식을 지녀야 합니다. 작은 이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와는 정반대의 사람이 갑작스레 위로 툭 튀어 오르다 보니, 지금 나라 전체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의 말만 듣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데올로기나 무속에 깊이 빠져 백성들을 혼돈상태에 빠트렸습니다. 멀쩡하던 사람들, 무고한 사람들을 단체로 죽음의 골짜기로 내몰았습니다.
엉뚱하거나 그릇된 지도자들은 존재 자체로 페스트나 콜레라보다 더 무섭습니다. 히틀러가 그랬습니다. 네로 황제가 그랬습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나라 역사 안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무 부끄럽게도 그런 지도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까? 그 한 사람의 그릇된 생각,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역시 똑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즉흥적이고, 또 얼마나 포악한지, 얼마나 앞뒤 생각 않고 행동하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것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머리 뚜껑이 활짝 열리다 보니 이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해서는 안 될 명령을 내렸습니다.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수많은 성채와 수로, 극장과 공공건축물을 건설하며 유다를 발전시켰지만, 말년에는 정치적 음모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중심인물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헤로데에게는 10명의 아내가 있었으며, 14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한 아들에게 권력을 몰아준 것이 아니라 세 명의 아들에게 영토를 골고루 상속해주었습니다. 놀랍게도 세 명의 아들들은 모두 이복(異腹) 형제들이었습니다.
잔악하고 무자비하기로 소문났던 헤로데 가문으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만, 헤로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순교한 세례자 요한이 대표적입니다.
헤로데로 인해 베들레헴 인근에서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은 모조리 목숨을 잃었습니다. 집집마다 흘러나오던 아기들의 울음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대신 아기 잃고 슬퍼하는 부모들의 통곡 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이지만 성 쿠옷불트데우스 주교는 이렇게 아기들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갔고 그들의 부모들은 죽어가는 순교자들을 보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말을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했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어간 아기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없는 지도자, 정신 나간 리더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움직이는 것,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노력이 아닐까요?
“이 무서운 시절의 소란이 끝나면 우리에게 확신의 시절을 주십시오. 이 기나긴 어둠 속의 방황이 끝나면, 우리로 하여금 밝은 햇빛 아래로 걷게 하십시오. 거짓의 굽은 길이 끝나면, 우리에게 당신 말씀의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의 범죄를 씻어주실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디게 하여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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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KWZMQLx0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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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위해 죽는다. 다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게 문제다.>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 축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헤로데에게 대신 죽은 순교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헤로데는 그때 아기 예수님이 죽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위해 희생된 어린 영혼들은 교회에서 순교자 지위에 오릅니다.
제일 문제 되는 것은 아기들이 자기 의지로 순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공경받을 만 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만약 내가 산길을 차를 몰고 가다가 웅덩이를 피하려고 차를 비트는 바람에 길가에 있던 어미 새를 치어 죽였습니다. 내려보니 둥지에 새끼 새들이 있습니다. 어미가 없으니 이들은 다른 동물들에 잡아먹힐 것이 확실합니다. 이때 나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 새끼 새들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있어야 했고 그들의 영혼을 주님께서 책임져주셔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만약 어미 새가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고 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 독사는 새끼들도 잡아먹을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는 하느님께서는 사랑도 있고 능력도 있으십니다. 그러니 당신 아드님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을 당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십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 죽음이 누구를 위한 죽음이어야 그 보상을 받게 되는지 잘 깨닫게 해줍니다. 나에게 사랑을 지닌 분이시고 그 보답을 해줄 능력을 지니신 분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 내 죽음이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 대신 죽어주고 싶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여러분 방 안에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사 놓은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반드시 여러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매트릭스’(1999)란 영화에서 네오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 밤에는 해커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에게 모피어스란 자가 나타나 빨간 약과 파란 약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합니다. 파란 약을 먹으면 그냥 이전처럼 침대에서 깨어나겠지만 빨간 약을 먹으면 진실을 알게 되리란 것입니다.
네오는 진리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빨간약을 먹습니다. 그랬더니 눈을 떴을 때 믿지 못할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계는 기계에 의해 프로그램된 조작된 세상이었고, 기계들이 인간들이 그렇게 허상의 세계에서 사는 동안 인간을 빨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오는 이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자아라는 기계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그것을 저지하려는 기계의 세력과 맞서 싸웁니다.
나를 위해 살 수는 없습니다. 착각입니다. 우리는 누구든 모두 누군가를 위해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과연 나의 생명을 바치는 값을 되돌려줄 대상인지 명확히 아는 게 중요합니다.
자아는 나를 이용할 뿐 나에게 자신을 위해 일한 값을 쳐주지 않습니다. 어차피 누군가를 위해 죽어야 한다면 내 죽음의 값을 되돌려줄 수 있는 분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그분이란 나를 만드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딸이 무덤에서 외롭지 않도록 무덤 속에 누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국 아빠의 사연이 있습니다. 중국 쓰촨성에 사는 장 리용씨와 딸 신레이의 사연입니다.
리용씨 딸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지중해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중해빈혈’은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적혈구 내 헤모글로빈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는 질병으로 중증의 경우 적극적인 수혈 요법이 필요하고, 15세가 되기도 전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리용씨는 가난한 농사꾼이었지만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가며 딸의 비싼 치료비를 감당해 왔습니다. 그간 치료비로만 10만 위안(약 1680만원)을 사용했지만, 딸의 병세에는 차도가 없었습니다.
리용씨 부부는 의사에게 “제대혈(탯줄혈액) 이식을 통해 딸을 살릴 수 있다”라는 소식을 접하고 둘째 아이를 뱄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비싼 수술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모든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엄마 뎅민 씨는 “우리에겐 이제 어떠한 선택도 남아 있지 않다”라고 토로했습니다. 부부는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리용씨는 딸의 묏자리를 알아보고 직접 무덤을 팠습니다. 이후 리용씨는 딸과 함께 이곳을 매일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딸이 죽은 후에도 이 장소를 무서워하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무덤 속에 누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리용씨는 “궁지에 몰린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 더 이상 돈을 빌릴 곳도 없다”라며 “2살 딸아이가 묻힐 이곳에 데려와 같이 놀면서 익숙해지게 하는 일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매일 같이 딸과 함께 이곳을 동행하는 것”이라며 “딸이 무덤을 편안하게 느끼도록, 죽는 순간이 다가오면 너무 두려워하지 않고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습니다.
리용씨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은 피어 비디오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온라인에서 퍼졌고 사연을 접한 중국 네티즌들은 신레이의 치료비를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딸의 병이 낫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가 죽을 때 그 책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 무덤에 함께 들어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하려는 마음을 지닙니다. 그 마음을 지니신 분이 하느님이라면 어떨까요?
우리는 누구나 누구를 위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나라를 위한 죽음일 수도 있고, 내가 믿는 신조를 위한 죽음을 수도 있으며, 가족을 위한 죽음일 수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내 목숨을 바치는 대상이 나에 대한 사랑도 없고, 비록 사랑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보답할 능력이 없는 대상이라면 나의 삶과 죽음은 헛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세상에 나의 죽음에 대한 보답으로 영원한 삶으로 되돌려줄 사랑과 능력이 있는 분이 하느님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심장이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심장을 하느님을 위해 썼기 때문일 것입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은 혀와 성대가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주님 말씀을 전하는 데 썼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오른손과 발이 썩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선교하기 위해 그것들을 희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온몸이 썩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심장에 받아들여 온몸이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찮은 새 한 마리를 어쩔 수 없이 죽였어도 그 새끼들에게라도 보답을 해준다면,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나의 목숨을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해 볼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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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사람>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하지 못한 많은 일을 접하게 됩니다. 기쁜 일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분하고 원통하기 짝이 없는 일도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 마음을 흔들어 괴로워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날이 지나면 괜찮을까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속이 쓰리고 아플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2,18).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헤로데 임금은 이스라엘의 두 살 이하의 아기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마태2,16). 그것은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을 잘라버리겠다고 한 행위입니다. 이런 일이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이 계집아이를 낳으면 살려두되 사내아이를 낳으면 모두 강물에 집어넣어라”(탈출1,22). 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파라오의 학살에서 구출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도 헤로데의 잔악한 행위에서 살아남으셔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십니다.
사람들은 파라오의 행동을 욕합니다. 헤로데 임금의 악한 행동에 분노합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전쟁으로 많은 이들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습니다. 어느 전쟁보다 더 큰 희생을 요구하는 소리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보호막이 되어야 할 어머니의 뱃속에서 많은 태아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공식 집계한 임신중절수술만도 1년에 35만에 가까운 태아들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어가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전쟁의 살상이 어디 있습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사형 제도를 찬성하거나 자기 결정권을 우선하고 낙태 합법화를 찬성하면서 누구를 악하다고 욕하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어린이들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 쿠옷볼트데우스는 헤로데 임금에 의해 살해된 무죄한 어린이들의 죽음을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가고 …그들은 아직 말을 하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 하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예기치 않은 일이 하느님께서 주신 벌입니까?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해야 합니까? 하느님께 책임을 물어야 합니까?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소유와 지배욕, 시기와 질투, 불필요한 욕심을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2,13).고 했을 때 요셉은 일어나 그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가르침을 줍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바로 그때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합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져야합니다. “인간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가 인간을 낳습니다.”무고한 아기들의 떼죽음, 그 비참한 학살의 소용돌이에서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혼돈 속에서 오셨습니다. 각 사람은 저마다의 역할이 다르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뿐입니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그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순교자들은 죽음으로 태어나고, 끝남으로 시작을 이루며, 죽임 당함으로 살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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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18: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큰 신비를 본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곁에 머물지 않은 이유와 성가정이 베들레헴에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만남의 기쁨을 누린 뒤 모두 다 도망자처럼 서둘러 달아나야 했다. 박사들은 페르시아로, 성가정은 이집트로 가야 했다. 왜 그랬을까? 헤로데는 구세주를 없애려고 박사들에게서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 명령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까지 미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사악함을 이미 알고 계셨다. 성가정을 이집트로 피신시키신다. 베들레헴의 아이들과 인근 마을의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도 대신 죽은 이 죄 없는 아기들은 그리스도의 첫 순교자들이 되었다. 이 아기들과 젖먹이들이 그리스도 대신 죽임을 당하며 순교자의 완전한 찬미를 바쳤지만, 하느님의 임금님을 거슬러 자신을 지키려고 아이들을 죽인 헤로데는 파멸했다. 이 아기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자격을 지녔던 첫 순교자들이었다.
마태오는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어머니들의 “통곡소리”를 표현한다. 아기들이 우는 것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이 우는 것은 마치 내장이 뜯겨 나가듯이 아기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아기들보다 남겨진 어머니들의 슬픔이 더 크다. 아기들의 슬픔은 죽음으로 인도되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니, 한순간의 슬픔이다. 그들은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들의 슬픔은 갑절이었다. 그들은 아기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는 이제 아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기들에게는 그들의 슬픔에 복된 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아기를 잊지 못해 슬픔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흔히 “왜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이런 일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하며 불평을 하고 신앙도 버리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은 분명히 인간의 잘못이다. 인간이 욕심이 저지르는 잘못이기에 인재이다. 우리 인간의 회개가 필요한 것이지 하느님께 탓을 돌릴 수가 없다. 나의 잘못으로 우리 가운데 나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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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동방 박사들이 찾아왔을 때,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마태 2,4) 그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구세주로 오신 그분을 경배하러 동방 박사들과 함께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탄생이 그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졌고, 결국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비극적인 일을 벌입니다.
헤로데가 이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자신의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질 하느님의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 그것들이 그에게는 ‘하느님’이고 ‘구원’이었습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의 최후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6,24)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 주님’은 누구이신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를 멈추게도 하고 움직이게도 하는 것, 절대로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하게도 하고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게도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실제 ‘주님’이십니다. 헤로데에게 그 주님은 ‘자신의 왕권’이었습니다.
“헤로데는 ……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2,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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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지금도 이 세상에는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3-18)
1) 헤로데의 모습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7-20)
하느님께서는 헤로데 같은 자들도 구원하려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만일에 헤로데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면, 그도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을 거부했습니다. 구원을 거부한 것은 심판을 선택한 것입니다. 헤로데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자였고, 죄로 죄를 덮으려고 한 자였습니다. <오늘날에도 헤로데 같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빛보다 어둠을, 선보다 악을 더 사랑하는 것인지, 왜 구원을 거부하고 심판과 멸망을 선택하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이고,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2)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헤로데만 나쁜 것이 아니라, 그 명령에 복종한 군인들도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나는 군인이기 때문에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변명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변명은 하느님의 심판대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변명일 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악행을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군인은 로봇도 아니고 기계도 아닙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고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악행에 동참하는 것은 사탄 편에 서는 일이 될 뿐입니다. 사탄 편에 선 자들은 사탄과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우리 교회는 헤로데에게 살해당한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순교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아기들이 예수님을 알았던 것도 아니고, 믿은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목숨으로 신앙을 증언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은 분명하고, 하느님께서 그 아기들을 특별히 사랑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내는 것은, 또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고 믿는 것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물 한 잔을 주는 것과 같은 작은 선행도 잊지 않고 보상을 해 주시는 하느님이시라면,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베들레헴의 아기들에게는 그 희생에 합당한 보상을 해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았든지 몰랐든지 간에... 그리고 그 희생에 합당한 보상은 당연히 영원한 생명입니다.
혹시라도 “그 아기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목숨을 바친 것도 아니고, 신앙을 지키려고 죽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순교자 축일로 지내는 것은 맞지 않다.”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편협한 생각은 ‘선’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4) 인류 역사를 보면, 종교와 신앙이 무엇이든지 간에 ‘선’과 ‘사랑’과 ‘정의’를 위해서 일하다가 고통을 겪고 목숨을 잃은 이들이 많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모두 넓은 뜻에서 ‘베들레헴의 아기들과 같은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지금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 베들레헴의 아기들처럼 정말로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아기들이 실제로 많이 있는 것이 불행한 현실입니다.
그 아기들의 목숨을 빼앗는 자들은 모두 헤로데입니다. 우리 교회는(신앙인들은) 선과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선과 정의와 평화의 실현은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신앙인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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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성탄의 신비>
우리는 스테파노를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에 앞선 30여 년 전에도 순교 사건이 있었지요. 바로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죄 없는 아기들의 순교입니다. 이 아기들은 비록 자기 의지로 신앙을 고백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죽임을 당했고, 또 무죄한 어린양의 수난과 죽음을 어느 모로 미리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는 이름 없는 증거자들이 많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죽어가는 낙태아들, 나자렛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신했던 것처럼 생존을 위해 삶의 터전을 찾아다니는 난민들, 그저 가난에 찌들어 재난 같은 일상을 매일 버텨내는 사람들, 그리고 쉴 새 없이 파괴되는 하느님의 피조물 안에서 무죄한 순교자들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이가 엘리야처럼 하늘로 오르기를 바랄 때,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내려오셨고, 그것도 기대하던 힘센 군주의 모습이 아니라, 구유에 태어난 미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의 신비는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형제자매들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을 꿈꾸게 합니다.
성탄 안에서 당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어리석음을 묵상하며, 작은 이들을 더 존중하고 배려하는 그런 세상을 주님과 함께 꿈꾸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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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오.2,16)
아가들은 스스로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없기에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그대로가 그들의 모습이 됩니다. 아가들에게 보내는 우리의 작은 미소 하나는 그들의 기쁨이 되고 우리의 불안은 아가들의 불안으로 됩니다.
5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네 명의 형들과 집에서 주로 지냈습니다. 시장에서 하는 장사 때문에 낮에 부모님은 바빠 집을 비우고 맏형은 기술을 배우러 나가는 사이 막내인 나는 둘째 형의 등에 자주 업혀서 자랐습니다.
바쁜 엄마와 충분한 정서적 교감은 못하였지만 든든한 둘째 형의 등은 그나마 어린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절실했던 어린 나의 정서적 욕구를 바쁜 부모님이 다 채워주실 수 없었지만 둘째 형의 따뜻한 등과 부모님의 그 한계는 지금 나에게 삶의 선물이 되어 남아있습니다.
어린시절 겪은 아픔은 우리가 커서 가해자도 되게도 하지만, 아픔이 치유되면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엄마의 애정을 기다리며 부족했던 어린시절 나의 아픔은, 감성을 돌보게 도와주는 임상사목교육에 투신하는 원천적 선물이 되었습니다.
태어나 두 살까지 아가들이 배우는 것은 세상에 대한 기초 신뢰입니다. 사람과 세상에 대해서 아가들이 배우는 기본적인 신뢰는 엄마 품에서 나옵니다. 따뜻한 엄마의 품은 자신감과 믿음을 심어주는 신앙학교입니다.
사람들과 세상이 아기들에게 거칠어지는 것은 아기때의 상처가 불신과 두려움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서로에게 따뜻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그 아기들이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치유되지 않아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헤로데 내면의 아기가, 무죄한 아기들을 냉혹하게 죽였습니다. 권력을 잃는 헤로데의 두려움이 죄없는 아기들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가해자로 만들었습니다.
정치 권력을 무모하게 휘두른 헤로데에게 희생된 무죄한 아기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드리며 무모한 국가 지도자가 낳은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희생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엄마의 품처럼 따뜻한 정치 지도자가 더욱 그리워지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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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입니다. 자신의 권력을 더 오래 유지하고자 한 헤로데의 탐욕 때문에 아무 죄 없이 죽어간 어린 영혼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며, 우리가 늘 깨어있는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따름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그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을 되새기는 날이지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오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하십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그런 불의를 보고만 계셨느냐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들의 희생을 두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이 세상의 권력자들과 뭐가 다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어린 영혼들을 죽게 만드는 건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헤로데가 자신의 욕망에 휘둘려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잘못을 저지른 결과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수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한 해에 오십 만명이 넘는 소중한 생명이 낙태로 희생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른들이 성적 욕망을 무분별하게 표출하지 않도록 조절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결정권’과 이익만 내세우는 사이 소중한 생명들이 세상에 태어나보지도 못한 채 죽어가고 있으니 억울하게 희생된 그 아기들의 슬픔은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이미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조차 부모로부터 학대당하고 사회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채 외로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의 상처받은 영혼은 또 누가 달래줄 수 있을지요?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4)
이 말씀은 헤로데가 일으킨 아기 학살 사건에 대한 마태오 복음사가의 해석에 해당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수많은 아기들의 희생을 ‘묵인’하셨다는 뜻이 아니지요. 오히려 우리를 구원하시어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그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막을 수 없다는 그분의 의지를 드러내는 겁니다. 자비가 넘치시는 하느님께서는 무고하게 희생당한 아기들의 영혼을 당신 품 안에 받아들이시어 위로해 주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결하시는 식으로만 끝나서는 안되지요.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해야 합니다.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져 우리 사회의 작고 약한 이들을 위험과 고통 속에 방치하지 않는 것, 재물을 우선으로 여기는 잘못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사람의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나의 안위와 편안함만 생각하며 부정과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주님께서 보여주신 진리의 빛에 비추어 ‘예’할 것은 ‘예’하며 따르고, ‘아니오’ 할 것은 단호하게 배격하는 것, 그렇게 주님의 뒤를 충실히 따라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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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뇌과학의 관점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은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때 도파민이 분비될까요? 사실 우리의 뇌는 아주 큰 욕심쟁입니다. 그래서 늘 ‘더 많이’를 추구합니다. 어제와 똑같은 삶에서는 결코 도파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지금에 만족하고 있지 못하다면 도파민을 분비할 새로운 일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일을 찾지 못하면 좌절과 절망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됩니다. 종종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도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이 있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시련에 그냥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불행 속에 머무는 것입니다.
성당에서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어서 조금 쉬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지쳤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그 안에서 새로운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일을 계속 찾는 일,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도 너무나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저의 경우는 책 읽고 글 쓰는데 새로움을 얻습니다. 똑같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책을 계속 읽고 있고, 똑같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글을 쓰고 있으니 새로움을 얻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항상 똑같은 기도를 하고 있다면 기도 안에서 행복을 느낄까요? 아닙니다. 매번 다른 기도를 하는 사람만이 다양한 주님을 새롭게 느끼면서 행복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기준안에만 살면 새로움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순간의 만족에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준안에서 사는 사람은 늘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간의 만족을 벗어나 계속된 만족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헤로데 왕이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 사는 아기들을 무자비하게 죽입니다. 왕의 위치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께서 장차 유다의 왕이 되시리라는 예언을 듣고는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했기에, 이런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자기 왕위를 유지하려고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과연 행복했을까요? 정적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잠시의 평화와 기쁨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안에서 최악의 왕으로 기록될 뿐입니다. 당연히 하느님께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헤로데 왕처럼 세상의 기준만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늘 새로움으로 지금을 기쁘게 살 수 있는 주님의 기준인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큰 행복을 차지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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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떠나온 이들과 함께>
마태오 2,13-18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떠나온 이들과 함께>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마태 2,14-15ㄱ)
떠날 수 없어
떠나지 못하고
쓰러지는 이들의
애끊는 울부짖음과
흩뿌려지는 붉은 피
여린 가슴에 새기고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질질 끌며
가고 싶지 않은 길
쫓겨나듯 떠나야하는
서러운 이들이 있으니
곁에
떠나온 이들 있거든
정성스레 함께할 일이다
떠나 살아남은 이들과
떠나지 못해 죽은 이들을
참으로 살리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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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사람>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하지 못한 많은 일을 접하게 됩니다. 기쁜 일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분하고 원통하기 짝이 없는 일도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 마음을 흔들어 괴로워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날이 지나면 괜찮을까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속이 쓰리고 아플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헤로데 임금은 이스라엘의 두 살 이하의 아기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마태 2,16) 그것은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을 잘라버리겠다고 한 행위입니다. 이런 일이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이 계집아이를 낳으면 살려두되 사내아이를 낳으면 모두 강물에 집어넣어라.”(탈출 1,22) 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파라오의 학살에서 구출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도 헤로데의 잔악한 행위에서 살아남으셔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십니다.
사람들은 파라오의 행동을 욕합니다. 헤로데 임금의 악한 행동에 분노합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전쟁으로 많은 이들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습니다. 어느 전쟁보다 더 큰 희생을 요구하는 소리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보호막이 되어야 할 어머니의 뱃속에서 많은 태아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공식 집계한 임신중절수술만도 1년에 35만에 가까운 태아들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어가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전쟁의 살상이 어디 있습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사형 제도를 찬성하거나 자기 결정권을 우선하고 낙태 합법화를 찬성하면서 누구를 악하다고 욕하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어린이들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 쿠옷볼트데우스는 헤로데 임금에 의해 살해된 무죄한 어린이들의 죽음을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가고 … 그들은 아직 말을 하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 하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예기치 않은 일이 하느님께서 주신 벌입니까?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해야 합니까? 하느님께 책임을 물어야 합니까?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소유와 지배욕, 시기와 질투, 불필요한 욕심을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고 했을 때 요셉은 일어나 그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가르침을 줍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바로 그때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합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져야합니다. “인간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가 인간을 낳습니다.”무고한 아기들의 떼죽음, 그 비참한 학살의 소용돌이에서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혼돈 속에서 오셨습니다. 각 사람은 저마다의 역할이 다르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뿐입니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그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순교자들은 죽음으로 태어나고, 끝남으로 시작을 이루며, 죽임 당함으로 살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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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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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역사는 반복한다>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계속되는 성탄축제중 오늘은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얼마전 12.3 비상계엄 내란사태를 보면서, 어제 국무총리 탄핵 사건을 보면서, 또 오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내면서 새삼스러이 깨닫는 진리는 ‘역사는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늘 거룩한 반복, 새로운 반복이 있을 뿐입니다.
문득 생각나는 “시지프의 신화”입니다. 시지프가 형벌로 산꼭대기까지 돌을 굴려 올려 놓으면 떨어뜨리고, 또 올려 놓으면 떨어뜨리고...참으로 무의미하고 단조로운 반복의 인생이 흡사 형벌같기도 합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믿지 않는 이들의 삶이기도 할 것입니다. 수도원에서 42년동안 정주의 삶을 통해 늘 새롭게 깨닫는 엄중한 삶의 진리가 반복입니다.
늘 읽어도 늘 새로운, 26년전 한 여름에 써놨던 ‘담쟁이’란 애송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다시 써내려 가면서도 시공을 초월하여 불끈 샘솟는 초록빛 열정을 느낍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종신불퇴, 백절불굴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정주의 반복의 삶에 항구할 수 있음은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느님 향한 희망에서 샘솟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의 열정이요 무한한 인내력입니다.
역사는 반복합니다.(History repeats itself.) 역사가 지속되는 한 반복은 계속될 것입니다. 조선 500년 역사의 실록을 보면서도 보복의 악순환의 반복의 역사이기에 한 권으로 족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해방 80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반복되는 좌우의 첨예한 증오와 배척의 극단적 대결입니다. 세계 곳곳에서도 여전히 반복되는 불의의 전쟁의 현실입니다.
무지의 죄로 인한 악순환의 반복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빛 속에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바로 그 좋은 모범이 오늘 이집트로 피신하여 예수 아기를 살린 요셉 마리아 성가정 부부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의 말씀이 깊은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길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하느님은 빛이시며,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빛속에서 회개와 화해,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과 친교를 누리며 사는 것이 반복의 악순환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고통과 고난의 악순환에 함몰되지 않게 합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가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봄과 겨울이 모두 계절이듯, 살아가며 겪었던 고통과 고난 또한 나를 이루는 것이다.”<다산>
참으로 주님을 믿는 우리는 무의미한 반복의 고통과 고난이 아니라, 세월과 더불어 연륜의 나이테처럼 모두가 참나의 완성에로 이끄는 거룩한 반복임을 깨닫습니다.
“근심과 고난이 나를 살게 하고, 편안함과 즐거움이 나를 죽음으로 이끈다.”<맹자>
참으로 살려면 안락함을 추구하지 말고, 근심과 고난을 일상의 벗으로 삼으라는 충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의 폭정을 피하여 이집트로 도주하는 요셉의 모습이, 헤로데와 요셉의 싸움같지만 실은 헤로데와 하느님의 싸움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요셉을 어둠속에 살아가는 헤로데가 결코 이길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헤로데 보다 몇걸음 앞서가는 요셉입니다. 그 누구도, 무엇도 주님의 빛 속에서 살아가는 요셉을, 우리를 이길수는 없습니다.
헤로데는 가상현실, 과대망상속에 살아가는 편집증 환자입니다. 그에게는 일상도 없고 상식도 없고 무도, 무법, 무지, 무능합니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지 않습니다. 2인자를 허락하지 않는 권력자들입니다. 권력욕의 화신같은 헤로데는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식도 둘이나 처형했고, 이어 화근이 될 수 있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의 죄없는 아이들을 죽여버리니 대략 20여명 안팎으로 추정합니다. 당신 주민 인구는 1000명쯤 됐을 거라합니다.
그 아득한 옛날 이집트 폭군 파라오의 폭압치하에서 모세의 탄생과 더불어 많은 히브리 아기들이 살해되었듯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 탄생과 더불어 많은 아이들이 희생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예수님도 빌라도에 의해 희생될 것입니다. 새삼 역사는 반복됨을 깨닫습니다. 반복되는 순교의 역사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이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들뿐 아니라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은 물론 모든 인류의 생명을 보호해 주십사 기도와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성무일도 화답송 후렴도 “무죄한 어린 순교자들의 화관이신 그리스도 나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기도하며 이들을 주님을 위한 순교자들로 기립니다. 예수님이 아니곤 이들의 억울한 죽음의 비극과 신비를 해명할 길이 없습니다. 아, 인류역사상 얼마나 무죄한 이들이 억울하게 비참하게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죽어가겠는지요!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빛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의 악순환은 계속됩니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가 내 주변에서는 재현되지 않도록, 오늘 복음의 성 요셉처럼 늘 주님의 빛 속에 깨어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여러분 모두를 무지의 죄악에서 보호해 주시어 주님의 빛 속에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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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죄 없는 아기 죽음의 큰 뜻>
“헤로데는 예루살렘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줍니다.”
죄 없는 아기들이 예수님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는 우리 교회가 순교라고 포장하지만 가혹하고 잔혹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서 죄 없는 그 많은 아이가 죽어야만 하는가? 그런 하느님의 처사가 옳다고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런 처사를 어떻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죄 없는 어린 아기들이 죽임당한 사건이 옳은 일일 뿐 아니라 사랑이기 위해서는 다음의 문제가 풀려야 합니다.
어떠한 죽음이든 죽음은 모두 불행한 것이라는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죽음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행한 죽음이 불행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것이 행운이고 행복이 아니라 행복해야지 살아있는 것이 행운이고 축복이지 불행하면 살아있는 것이 결코 행운도 축복도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일찍 죽으면 불행한 죽음이라는 생각도 바뀌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기준으로 하면 행복한 삶을 오래 살다 죽어야 행복한 죽음이고 그런 죽음을 호상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기준을 천국 행복에의 참여라고 하면 사실 일찍, 빨리 참여할수록 좋은 거지요.
죄 없는 사람은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바뀌어야 합니다. 죄 없는 사람도 죄 있는 사람도 다 죽는 것입니다. 죄 있는 사람만 벌을 받아 죽는 거고, 그들만 일찍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죄 없는 아기들이 예수님을 위해 죽임당한 것은 죽음이 죄의 벌만이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증거 하는 것이며,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의 예표입니다.
그러니까 죄 없으신 당신 아들을 우릴 위해 죽게 하신 하느님께서 죄 없는 아기들을 당신 아들을 위해 죽게 하신 것입니다.
죄 때문에 죽지 말고 사랑 때문에 죽으라는 하느님의 큰 뜻이 오늘 우리가 지내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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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6)
<죄 없는 아기들의 순교!>
오늘 복음(마태 2,13-18)은 '아기 예수님께서 부모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하신 말씀'과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는 말씀'입니다.
왜, 헤로데는 베드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였을까?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데,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2,2)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은 헤로데가 자신의 권력에 대한 탐욕을 드러낸 사건으로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학살 행위입니다.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은 아기 예수님 때문에 죽은 순교이며, 아기 예수님을 대신하여 희생된 순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래전부터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성대한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는 헤로데와 같은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정적 죽이기 행위를 서슴지 않으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헤로데와 같은 대통령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헤로데와 같은 사람들과 싸우셨고, 끝까지 그런 그들과 싸우시다가 마침내는 그들 손에 의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 대리자로 살아가는 사제들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이유이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이들의 잘못에 대해 외치는 이유입니다.
그런 사제들에게 좌파니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헛소리를 하면 안 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한다는 신자들의 입을 통해서도 그런 소리를 쉽게 듣습니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내면서, 독재자들의 손에 죽어간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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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 16)
소중한 생명의
새싹을 무참히
짓밟는 너무나
아프고 슬픈 사건이
우리의 역사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똑같은
아픔을 반복합니다.
성찰(省察)속에서
성탄이 빛납니다.
살인으로도
막을 수는
없는 구원의
강생입니다.
살인의
역사 안으로
우리의 역사 안으로
하느님께서
탄생하십니다.
사랑으로 가는 길은
이토록 아프고 힘겹고
고통스럽습니다.
하느님 모상을
닮은 사람이
하느님을 잃어버리면
한없이 잔인한
살인자로 추락합니다.
하느님의 소중한
하느님의 생명은
우리의 욕망을 위한
희생물이 결코 아닙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살인의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성탄을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올바른 믿음이
허황된 욕망을
정화합니다.
우리모두는
생명을 위한
사람이 될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다시금 생명으로
돌아가는 성찰과
감사의 시간입니다.
역사의 과오를
멈추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죄 없는 아기들의
순교를 기억합시다.
죄 없는 아기들의
순교가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눈물겨운 성탄입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
소중한 아기를 잃은
부모들의 통곡 소리를
기억합니다.
성탄은 이와같이
인간의 역사를
비추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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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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