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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 이사야 24:14~23】
14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
15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16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7 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 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 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21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22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 같이 모이게 되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
23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
【말씀 나눔】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나라가 망할 때. 그 세 번을 빼고는 울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우는 남자를 보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저 사람 왜 저렇게 약할까, 왜 저렇게 흔들릴까? 생각합니다.
믿음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려운 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우리는 은근히 그렇게 믿고 삽니다. 그래서 힘든 일이 닥쳐 눈물이 날 때,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오히려 스스로를 다그칩니다.
내가 믿음이 없어서 이런가? 내가 기도가 부족해서 이런가?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습니까? 봄바람에 흔들리고, 소나기에 젖고, 밤이슬에 고개를 숙였다가, 그렇게 흔들리면서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고, 그렇게 흔들리면서 결국은 피어나는 것이 꽃입니다. 흔들림이 꽃을 꺾는 것이 아니라, 그 흔들림을 통과해서 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우리 믿음도 그렇습니다. 흔들린다는 것과 뿌리가 없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놀라운 것을 하나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 이사야가 흔들립니다. 깊이 탄식합니다.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16절)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믿음의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사야 24장은 온 땅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장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1절부터 13절까지, 땅이 완전히 황폐해지고 사람이 포도원에 남은 몇 알처럼 극소수만 남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심판이 왜 임하는지, 얼마나 철저하고 확실한지를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14절부터는 그 심판 한가운데서도 들려오는 전혀 다른 소리를 보여줍니다.
14절부터 16절 상반절까지, 갑자기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14절) 동방에서, 바다의 모든 섬에서,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16a절)이 노래가 놀라운 것은 폐허 한가운데서 들리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이 찬양이 눈여겨볼 만한 것은, 그들이 무엇을 얻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형편이 좋아져서, 살림이 풀려서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위엄을, 그분의 이름을, 그분의 의로우심을 노래합니다.
참된 찬양은 늘 그렇습니다. 내 형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서 시작됩니다. 일이 잘되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넘어, 아직 다 풀리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절 중반에서, 본문의 흐름이 갑자기 뚝 끊깁니다. 방금까지 온 땅에서 울려 퍼지던 웅장한 합창이 갑자기 한 사람의 목소리로 좁혀집니다. 바로 이사야 자신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16b절)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는 정확히 무슨 뜻인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릴 만큼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힘이 다 빠지고, 생기가 다 빠져나간 상태, 존재 자체가 텅 비어버린 것 같은 상태, 무너진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것에는 의견을 같이합니다.
지금 이 자리는 방금 온 땅이 노래한 하나님의 충만하신 위엄과 정반대로 서 있는 자리입니다. 세상은 가득 찬 영광을 노래하는데, 이사야는 텅 빈 자신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더 뼈아픕니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6c절)
원문을 보면‘배신하다’라는 같은 어근이 거듭 반복됩니다. 말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같은 말이 되풀이됩니다. 마치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이 같은 말만 되뇌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사야는 지금 감당하기 힘든 배신 앞에 서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아본 적 있으십니까? 손을 내밀었는데 그 손이 나를 밀어낸 적 있으십니까? 배신은 다른 어떤 아픔보다 사람을 더 깊이 무너뜨립니다. 몸이 아픈 것보다, 형편이 어려운 것보다, 사람에게 배신당한 상처가 더 오래갑니다. 이사야는 바로 그 자리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17절과 18a절은 그 무너짐을 더 구체적으로 그립니다.
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한 위험을 피하면 또 다른 위험이 기다립니다. 함정을 피해 도망치면 올무가 기다립니다. 숨 돌릴 틈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종종 이렇지 않습니까? 하나가 해결되었다 싶으면 다른 문제가 터집니다. 겨우 한숨 돌리려는데 또 다른 짐이 얹힙니다. 병원 문제가 지나가면 자녀 문제가, 그것이 풀리면 또 다른 걱정이 찾아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믿음이 없어서 이런가?
그런데 성경은 이사야의 이 탄식을 믿음 없음으로 책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탄식하느냐, 믿음이 그것밖에 안 되느냐”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 탄식을 있는 그대로 본문 안에 담아두십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현실을 아프지 않은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에 어떻게 하실지를 믿으면서도, 지금의 악을 악이라고 말하고 아픈 것을 아프다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마지막을 바라보면서도, 아직 그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오늘의 악과 배신 앞에서 깊이 탄식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마음이 흔들린다고 해서, 그 흔들림 하나만으로 믿음이 무너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흔들리는 이사야를 끝까지 붙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은 계속해서 그 답을 향해 나아갑니다. 18절 하반절부터 장면이 다시 한번 바뀝니다.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18b ~ 20a절,) 여기서 히브리어 원문은 같은 동사를 두 번씩 겹쳐 씁니다. 깨지고 깨지며, 갈라지고 갈라지며, 흔들리고 흔들리며. 문장 자체가 지진처럼 떨립니다. 읽는 사람의 호흡까지 흔들어 놓는 문장입니다. 땅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립니다. 그리고 원두막처럼 흔들립니다. 원두막이 무엇입니까. 추수철에 밭을 지키려고 대충 얽어놓은 임시 오두막입니다. 튼튼한 기둥도, 견고한 벽도 없습니다. 바람 한 번 세게 불면 폭삭 주저앉는 구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이 견고해 보이는 세상을 그 원두막에 비유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붙들고 의지하는 것들, 돈이든 건강이든 지위든, 사실은 원두막처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20절은 왜 땅이 그렇게 흔들리는지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20b절)
여기서‘중하다’는 말은 죄악이 무거운 짐처럼 땅을 짓누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땅이 이유 없이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악을 짊어진 세계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붕괴 뒤에, 21절에서 하나님은 마침내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땅의 왕들만이 아닙니다. 보이는 권력이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든,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높은 데의 높은 군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에는 해석의 논의가 있지만,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밖에 있는 권세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흔드는 것이 눈앞의 사람이든, 그보다 더 깊은 어떤 어둠이든, 그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23절, 오늘 본문의 정점에 다다릅니다.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
달이 수치를 당합니다. 해가 부끄러워합니다.
옛사람들에게 해와 달은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단순한 천체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민족이 해와 달을 신적인 존재로 섬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밝고, 가장 변하지 않는 존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그 순간, 그 위대해 보이던 해와 달조차 빛을 잃습니다. 그 어떤 피조물의 빛도 하나님의 영광과 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달을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달은 밤마다 저 홀로 빛나는 것 같습니다. 캄캄한 밤하늘, 유일하게 밝은 저 달을 보며 우리는 감탄합니다. 그런데 달은 사실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습니다. 달에게는 빛의 원천이 없습니다. 태양의 빛을 받아서, 그 받은 빛을 그대로 되비출 뿐입니다. 태양이 없으면 달은 그저 캄캄한 돌덩이입니다. 달이 밝은 것은 달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빛의 근원을 향하여 그 빛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믿음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가진 것들로 스스로 빛나려 합니다. 오래 버텨온 인내로, 쌓아온 경력으로, 흔들리지 않는 강한 모습으로 스스로 빛나려 합니다. 믿음이 좋으려면 내가 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힘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해야 믿음 좋은 사람처럼 보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지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빛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환하게 타오르도록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고 생명을 받고, 그분의 빛을 받아 세상 가운데 그 빛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강함은 얼마나 흔들리지 않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중에도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데 있습니다. 삶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배신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를 피했더니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리는 것 같은 날도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세상을 흔드는 때를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때에 더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스스로 타오르는 심지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빛을 받아야 비출 수 있습니다.
나는 쇠잔하였다고 탄식하던 이사야의 시선은 쇠잔한 자기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라고 고백합니다. 이사야가 강했던 것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흔들리는 중에도 끝내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왕이든, 보이지 않는 권세든, 이 세상 그 무엇도 남김없이 심판하시고 홀로 영광 가운데 다스리실 그날을 이미 정해 두셨습니다. 그 날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날 비로소 왕이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미 왕이십니다.
이사야는 6장에서 이미 그 사실을 보았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도 주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웃시야가 죽어도 하나님은 왕이셨습니다. 앗수르가 밀려와도 하나님은 왕이셨습니다. 땅이 깨지고 갈라지고 흔들려도 하나님은 여전히 왕이십니다.
다만 그날에는 지금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그 왕권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온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여전히 흔들리는 오늘을 삽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하나를 피하면 또 하나가 기다리는 것 같은 오늘을 삽니다. 이사야도 그 자리에서 탄식했습니다. 그러니 흔들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을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몰아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흔들리는 그 밤, 무엇이 우리를 밝히고 있는지를 오늘 말씀 앞에서 다시 보게 됩니다.
달의 빛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받았기에 비출 수 있는 것입니다. 받지 않으면 비출 것도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스스로 타오르려 애쓰다 지친 밤이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오히려 한 가지가 선명해집니다. 나는 스스로 타오를 수 없구나. 그러나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비추고 계시는구나. 우리가 가장 강한 때는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낼 때가 아닙니다.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을 때입니다.
흔들리지 않아서 강한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면서도 그분의 빛을 받고 있기에 다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편보다 먼저, 우리의 눈물보다 깊이, 우리의 흔들림보다 더 확실하게 왕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흔들리는 오늘도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비추임 받으며, 그 받은 빛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묵상 - 하시깨묵】
1. 어제, 혹은 오늘, 나는 무엇을 붙들고 스스로 빛나려 애썼습니까?
2. 어제, 혹은 오늘, 내가 흘린 눈물을 나는 믿음 없음의 증거로 여겼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증거로 여겼습니까?
3. 어제, 혹은 오늘, 나를 흔든 배신이나 실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앞에서 나는 마음을 닫았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아뢰었습니까?
4. 어제, 혹은 오늘, 하나를 피했다 싶었는데 다시 다른 올무에 걸린 것 같은 순간이 있었습니까?
5. 어제, 혹은 오늘, 내가 붙들고 있던 것 중에 원두막처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6. 어제, 혹은 오늘, 나는 눈앞의 문제만 바라보았습니까, 아니면 그 너머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까?
7.오늘 하루, 나는 누구의 빛을 받아 누구에게 되비추며 살아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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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찬송하는 소리 있어
【은혜의 찬양】
주만 바라 볼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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