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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는 학부생의 입장이자 교류사를 전공할 계획이 아닌 사람의 입장으로 쓴 글이므로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그러이 지적해주길 바랍니다.
Ⅰ. 서론
나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정말 모호한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굳이 우리나라 고대사에서의 맹점들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에 대해서 공부한다고 했을 때 그것에 대해서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 가능할까? 작년에 나는 서유럽 중세의 비슷한 시기를 3번 공부한 적이 있다. 첫째. 소빙기와 흑사병을 중심으로.. 둘째. 백년전쟁을 중심으로 셋째 고딕양식 및 플로티누스의 유출론에 입각한 미학을 중심으로.. 물론 말만 거창하고 별볼일없긴 하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를 각기 다른 주제로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한 시대를 완벽하게 꿰뚫어 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래서 나는 페로즈같은 새끼들이 역덕이랍시고 잘난척하고 다니는 자체가 병신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자신이 아는 것이 세상의 모든 진리인 마냥 깝치는 새끼들 ㅇㅇ
그러나 이러한 모호성만이 역사의 전부라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따라서 나는 모호성 이전에 하나의 정론으로써 완벽히 정리되기엔 부족할지라도 지향점자체가 틀렸다면 여기에 대한 지적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임나일본부설은 폐기되어야 마땅한 학설이다. 자료의 태부족으로 온전한 시대상을 상정할 순 없을지언정 왜의 한반도 남부경영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
대다수의 사람들이 임나일본부설을 믿지 않기는 하지만 인터넷에서나마 꾸준히 제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버젓이 일본극우 역사교과서에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정치범수용소에서의 글을 계기로 부족하나마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http://cafe.daum.net/posthoolis/Qcpf/3380
Ⅱ.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는 각 사례에 대하여
어떤 아이들은 어줍잖은 지식만을 믿고 임나일본부에 대한 제대로 된 반박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사료가 지극히 부족하여 전술했던 온전한 시대상을 우리가 파악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임나일본부만이 아니라 한국고대사를 관통하는 문제점이다. 하지만 그것뿐인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몇몇 책을 그대로 요약, 인용한 부분을 가지고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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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의 실체
가야와 왜의 관계사에서 한일학계간에 논쟁의 초점이 되어왔던 것이 임나일본부 문제였다. 임나일본부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연구를 대별해보면 ⅰ출선기관설 ⅱ분국설 ⅲ가야 왜인설 ⅳ 백제군사령부설 ⅴ외교사절설로 나뉜다.
출선기관설은 고대일본이 기원후 4~6세기 동안 한반도 남부를 근대의 식민지와 같이 지배하였고, 그 중심적 통치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는 설이다. [末松保和] 1945년 일본의 패전을 거쳐 1960년대 말에는 이미 일본학계에서도 부정되었으나, 일본이나 서양의 역사교과서에는 아직도 그 영향이 남아있다. / 중략 /
외교사절설은 1~4의 학설과 달리 임나일본부가 관청이나 군사령부가 아니라 왜에서 가야에 파견한 외교사절로 파악한 연구로 현재 한, 일 양국의 학계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의 기록에서 왜의 정치적 압박이나 백제의 군사적 강제는 확인되지 않는다. 둘째로 임나일본부의 활동은 외교에 국한되고 있다. 셋째로 일본부의 외교활동은 전반의 친백제, 반신라 노선에서 후반의 친신라, 반백제노선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는 신라[전기]와 백제[후기]의 침입을 막고자 했던 가야제국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결과다. 넷째로 일본부는 가야왕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으며, 직접적으로는 가야인에게, 간접적으로는 아라국왕[함안]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다. 다섯째로 일본부와 왜왕의 관계는 점차 멀어져 갔고, 뒤에는 왜왕의 명령이 백제와 신라를 통하여 전달되고 있다. 여섯째로 일본부인 가와치노 아타히[河內直]와 기비노오미[吉備臣]는 일본열도로 이주하였던 가야계 도래씨족의 일원이었다. 일곱째로 가야제국은 일본부를 신라와 백제의 침입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 한국고대사입문Ⅱ 김정배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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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
더욱이 근래 일본학계에서는 영산강유역을 『송서』왜국전에만 보이는 모한慕韓 지역으로 비정하고 이 지역의 전방후원분과 관련시켜 해석하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모한론은 ‘임나일본부’설의 유력한 근거의 하나로 제시되어 온 『송서』왜국전에 보이는 왜의 주장을 실재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된다. 왜냐하면 영산강유역을 그때까지도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모한으로 보고, 이 지역에 전방후원분이 집중되는 현상을 왜의 영향력이 한반도 남부에 미쳤다는 해석으로까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른바 임나사현을 호남으로 비정하는 관례에 따라 이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전방후원분을 임나일본부와 관련하여 해석하려는 극단적인 견해까지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시각은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이 6세기 초에 돌연 출연하는 점, 정치적 중심지인 고분군을 형성하지 못한 점, 그리고 1세대에 한해 조영된다는 점과 더불어 백제 왕권과 관련된 위신재를 보유하고 있는 고고학적인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그 타당성은 인정할 수 없다. -새로쓰는 고대 한일 교섭사 박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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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 /
그러나 80년대 이후 일본학계에서 임나일본부에 대한 전론을 낸 연구자들의 견해는, 가야측 입장을 중시하는 쪽으로 점차 견해가 모아지고 있다. 주요 학설을 살펴보면, 왜는 가야의 별칭이라는 결론에 기초해서 임나일본부는 가야의 재지호족에 의해 구성된 합의체라는 설, 왜왕권이 파견한 관인이라는 설, 가야제국이 대왜외교를 위해 설치한 외교기관이라는 설, 가야제국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가야제국의 왕과 일본부 관인이 합의체를 구성했다는 설, 왜왕권이 파견한 관인, 사자로서 일정의 군사적 기능을 갖는다는 설 등이다. 국내에서도 백제에 의핸 지배기관설을 제외하면, 가야제국의 독립보존을 위해 활동한 가야재지의 인간집단설, 가야계 왜인이 중심이 된 가야 독립보존설, 가야와 왜의 교역기관에서 독립보존을 위한 외교기관으로 변질되었단느 설 등이 제기되었다.
이들 제 설의 공약수는 대체로 대화정권에 의한 가야지배설의 부정이다. 이는 임나일본부 연구사상 중요한 의의를 가지며, 가야와 왜의 관계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시기도 6세기 전반대로 한정하고 공간적으로는 안라국을 중심으로 한 사건으로 보는데에 거의 의견일치를 보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기능 면과 일본부 구성분자의 출자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가야제국의 이익을 보존하는 쪽으로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대세를 점하고 있다.
이들 연구가 대부분 80년대 이후에 나왔다는 것은 가야지역에 대한 발굴조사와 고고학적 연구가 진행되는 시점과 일치한다. 고고학상에서 대화정권의 가야지배설이 입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구례의 임나일본부설은 존재하기가 어려웠다고 보인다. ///////////////
- 고대한일교류사 연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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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논고를 살펴보면 한국 및 일본의 사학자들의 연구동향에 대해서 대략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솔직히 나도 일일이 모든 것을 대조하여 설명하려면 너무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고 글도 엄청나게 길어지므로 중요 포인트만을 집어서 썼지만, 대략 한, 일의 연구동향에 대한 간단한 파악 및 우리나라 및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가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는 정도는 알 수 있다. 더불어서 큰 틀에서 기존의 임나일본부가 폐기되었다는 점도 말이다.
이번에는 폐기될 수밖에 없던 임나일본부설의 주요근거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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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는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아는 비석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여기엔 일본인의 관심도 함께 했는데, 그 유명한 신묘년조 구절 때문이다. 요약에 요약을 거듭했지만 신공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조차 없으며 임나일본부가 멸망하기 10년 전에만 기록이 집중되어 있다. 수백년간 다스렸다면서 중간기록은 고스란히 날아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발견된 것이 바로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조였다.
왜이 신묘년래 도해파 ~~ 바로 왜의 한반도 상주가능성 및 군사력투사 가능성을 열어주는 글귀가 신묘년조에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시라토리는 조선 남부경영의 증거로서 가야지역은 직접지배를, 백제는 간접지배를 했다고 주장했다.
중간에 재일사학자들에 의해 조작설이 대두되기도 했지만 결론은 원석탁본의 발견으로 인해 글자자체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임나일본부를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파악하는 것은 대단히 무리가 있다. 애초에 일본사학자들의 근거가 되는 신묘년조 외에도 수많은 기사가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왜라는 존재는 백제나 신라 혹은 가야에 의해 어용된 분산적 존재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애초에 광개토대왕비가 세워진 목적이 고구려적 중화세계의 선포 및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신묘년조와 같은 명분 및 과장이 섞인 뒤 광개토대왕에 의해 퇴/출/멸되는 이유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왜/왜인/왜적/왜구 등으로 표현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는 점 또한 당시의 왜가 통일세력으로서 존재하지 않았음을 유추하게 해준다. 이러한 고구려적 세계관은 같은 비석 내에 국연, 간연으로 설명이 되는 수묘인제도를 통해서도 파악이 가능하다. 중국에서도 왕 혹은 황제의 수묘인이 40호 정도였는데 광개토대왕은 국연 30 간연 300호 총 330호의 수묘인 즉 묘지기를 두었다. 이러한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선포한 광개토대왕비에서 신묘년조 하나만을 가지고 임나일본부에 대한 해석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무리가 따른다고 볼 수 있다.
② 칠지도
백제가 헌상했다고 주장하면서 임나일본부의 또 하나의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칠지도이다. 주요 쟁점은 간단하다. 연호로 파악되는 泰□라 새겨진 명문을 기준으로 몇 년도에 제작이 되었는지 그리고 백제가 일본에게 헌상/하사 했는지다. 일반적으로 일본 사학자들은 뒷글자를 太和로 파악하여 동진의 연호로 임나일본부설에 끼워 맞추는 경향이 강한데, 369년은 동진과 백제가 통교하기 전이며, 위의 태와 동진연호의 태는 통음이기는 하나 새기기 어려운 금속상감을 하는데 굳이 어려운 글자로 새긴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더불어 바쳐진 시기가 하필이면 백제 최전성기? 삼국사기 근초고왕 24년의 기사에는 누런 깃발만을 사용했다고 적혀있는데 이는 황제의 상징이다. 학자마다 좀 의견이 많이 갈리는 부분이나 최근의 사례를 말하자면, 몇 차례의 엑스레이 촬영에 대한 재검토로 날짜에 대한 명문이 ‘길상구’(의례적인 표현)이라 생각했던 것이 연구에 의해 전지왕 4년일 가능성이 열림과 동시에 백제 고유의 연호로 파악하려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물론 제일 아쉬운 사실은 한성백제기 명문은 저 칠지도가 유일하기 때문에 언제부터 쓰였고 언제 폐기되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은 있지만 현재로선 가장 유력하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파악하면 독자연호를 사용했다면 일본에게 헌상내지 조공의 개념으로 다가가는데 상당한 무리가 따를뿐더러 시기도 차이가 나게 된다. 어쨋거나 이외에도 무령왕대의 일로 파악하는 등 다양한 견해는 존재하되 백제독자연호에 조금 더 힘을 보탠다. 실례로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이나 영강명 광배등의 존재는 한반도 내 독자연호사용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③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
전방후원분에 대한 설은 분분하다. 재지수장설 , 왜인설(왜계백제관료설) 등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왜계 백제관료설을 조금 더 지지하는 편이지만 말이다.
각 설은 조금씩 상반된 견해를 가진다. 백제관료설의 경우 한성백제가 남하하면서 약해진 지방지배력을 왜계 관료들을 영입해서 지방수장 견제하는 형태로 보는 것이며 재지수장설의 경우 이러한 남하에 대해 지방세력이 대응하기 위해 일부러 왜계무덤을 차용하여 견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토착세력 중심지 주변에 전방후원분이 분포해 있는데 압박이라고 볼지 견제로 볼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등장했다는 설외에도 3세기까지 소급가능한 주구묘가 점차로 발전해서 전방후원분까지 갔다고 보는 견해도 있기에 ( 일본보다 주구묘는 1세기 앞선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결국 한세대에 걸쳐 짧게 나타난 전방후원분 외에 수백년간 지배했다고 하는데에 대한 근거자체는 부족하여 전방후원분에 대한 연구는 임나일본부는 오래전에 GG치고 매장주체가 백제였는지, 토착세력이었는지 큐슈와 독자적인 무역루트를 통한 것인지 등등 보다 세부적인 분야로 진행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왜계 유물이 분명히 나오지만 백제계 위신재와 공반한다는 점등을 함께 생각하길 바라며, 저 고분외에 기타 생활유적이나 군사활동에 대한 흔적이 전무하다는 점을 덧붙이면 왜 영산강 전방후원분만으로 임나일본부설이 등치되지 않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임나일본부의 근거라면서 성립 발전한 시대에는 하나도 만들어지지 않은 것일까? - 미안하다 쓰다보니 나도 지친다ㅠㅠ
④ 가야세력
책의 내용 요약본에도 나오다시피 가야는 아쉽게도 한국사에 기록의 주체로서 나온 것이 없다. 일본서기의 경우도 백제본기를 바탕으로 쓰여졌다고 하여 백제를 중심으로 움직여온 것으로 파악이 된다. 하지만 발굴이 시작되면서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복천동 지산동 등등 가야고분군이 집중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세력권이나 발전양상이 보다 명확해지기 시작하는 바, 임나일본부가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임나일본부를 증명하기 위한 수차례의 발굴과정 속에서도 그 흔적을 찾지 못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림자료는 존내 귀찮지만 가야지역의 제사용 토기를 살펴보면 투창이라 하여 모양을 내어 뚫어놓은 구멍들이 있는데 신라와도 다르며 각 가야지역마다 특성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초기부터 멸망직전까지 분명한 발전양상이 그대로 발견되기 시작하므로 수백년간 일본이 지배했다는 말이 개소리라는 것은 사실 결정적으로 가야의 고분과 유적들을 발굴하기 시작하면서 깨진 것이다. 영산강유역의 고분과 대비되는 점을 하나 덧붙이자면 그토록 일본을 대표하는 무덤이 가야지역에는 단 한기조차 나오지 않는다. 무려 수백년간을 지배했음에도 말이다. 덧붙여 가야의 중심세력은 멸망까지 유지되었던 것이 고고학상으로 증명 되었으며 특히, 대가야의 경우 상부(하부였나?)라는 명문이 새겨진 토기가 발견되어 적어도 2부이상의 체제를 가진 보다 발전된 왕국으로 성장했을 가능성까지 내비치고 있다.
여기에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라는 말 외에 안라일본부라는 용어도 등장하는 바, 최근에 가장 유력한 사신관설 및 가야의 독자성을 증명해준다. 우선 일본이라는 용어는 7세기 이후에나 쓰이며 일본서기는 720년에 편찬되었다.
거기에 일본부라는 표현은 앞서 말한 것처럼 541~554년이라는 짧은 기간에만 나타나며
일본부에서 부에 주석으로 어사지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는 바로 사신이라는 뜻이다.
부=사신=미코토모치=1회성사신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서기를 편찬하기 전 야마토의 미코토모치를 일본이라는 국명을 사용하던 편찬당시에 일본부로 개명했을 가능성이 일본문헌사학자들로부터 제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더 설명하기도 귀찮다. 일본지역 내에 가야계 유적은 한반도내 일본계 유적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Ⅲ. 결론
솔직히 나도 정리하고 보려니까 복잡하고 지금 이글도 매우 조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쩔수 없다. 이게 내 한계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댓글로 보충하겠으며 따로 더 추가할 점이 있다면 추가하도록 노력하겠다. 원래 쓰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수능출제위원의 [하씨발 병신들이 단체 나들이 나오셨네 왜 하나하나 반박 다하지도 못할 거면서 까부는 거야 무슨 자신감으로? ㄲㄲㅋㅋㅋㅋㅋㅋ ]
라는 댓글을 보자 너무 얼척이 없어서 일단 최대한 정리해서 이런 병신새끼들이 어줍잖은 고고학적 어쩌고로 지랄하기 전에 눌러야겠다고 생각해서 쓰다보니 막판에 집중력을 존나게 잃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임나일본부설의 변용된 내용이 여전히 일본고고학계에서 숨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적 의미의 임나일본부는 일본학계에서도 가야의 재발견으로 깨져버렸다. 그렇다고 한국의 영산강유역이나 가야지역의 역사가 온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고 어쩌면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일지도 모르는 가야사, 백제 영산강유역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편협한 사고방식에 의한 문제제기에 의해 무너져내리는 꼴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앞으로 다른 훌리들도 인터넷찌라시 따위에 현혹되지 말고 건전한 역사관을 가지고 (우리나라만 짱이야 이런걸 말하는게 아니다.) 편견없이 한국사 뿐만아니라 일본사, 세계사를 바라봤으면 좋겠다.
ps. 조잡한글 끝까지 읽어줬다면 감사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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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란 애매한 퍼즐과도 같아서 여기 끼워도 저기 끼워도 어느정도 말만들기 나름인거같음ㅜ 그래서 역사를 철저하게 기록한 조선시대를 매우 위대하다고 느낌....
그래봐야 결국 주관적인 기록이잖아
Atheist// 그래도 조선의 기록은 중립성을 상당히 잘 지켰고 지키려고 노력했음 분명히 높게 살 부분이지.
조선의 기록이 주관적인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치고는 중립성을 감안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보인자료임. 그것때문에 다른나라의 역사학자들도 많이 감탄했고... 가령 정도전이 이방원한테 강제운지 당하는 장면을 보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장면이있는데, 사관들이 나중에 여기 뒤에 목숨앙망해보자고 주장했던 자기 아들한테 정도전이 그렇게 비겁하게 살면안된다고 호통친 부분을 추가시킴.. 이런식으로 다른 소문이나 의견도 첨삭이 되어있는 국가기록이니.. 나름의 가치가 있지
삭제된 댓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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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좌빨이랑 임나일본부설이랑 무슨 상관이 있음?? 논리회로도 상병신이네.
하씨발 병신들이 단체 나들이 나오셨네
왜 하나하나 반박 다하지도 못할 거면서
까부는 거야 무슨 자신감으로? ㄲㄲㅋㅋㅋㅋㅋㅋ
.. 라고 해놓고 이지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너같은 보기힘든 개좆병신들도 있어야 훌천이지~
좆발린 기억이 없는데 여기서 발라주면 안될까^^?
게지기가 개씹좌빨이라도 니가 답변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도록 부탁드릴텡께
ㅋㅋㅋㅋㅋ 글고 사실 애초에 이런걸로 개싸움나도 토게지기는 별말 안해 씹등신새끼야 ㅋㅋㅋㅋㅋ
지켜보면서 흐뭇해하겠지 개싸움나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꼭 논리적으로 병신인새끼가 그외의 요소로 지랄하드라 ㅎㅎ
제발 뭐라도 씨부려줘봐 니보다 훨씬 길게 쓰고 직접인용이랑 직접작성한 글인데 어디가 어떻게 부실한지
조목조목 따져주면 좋겠는데^^?
솔직히 나도 내글이 완벽하다는 생각 추호도 한적은 없는데,, 어디서 인터넷찌라시 줏어온 니보단 낫겠다는 생각은 한다 ^^;; 그래놓고 하는 소리부터가 가관이어서 솔직히 안쓰려다가 너무 얼척이 없어서 쓴거라서 ^^
그리고 내 주서식지가 여기고 니 의견에 반대하는 내 견해를 제시하는데 정치범수용소가 맞니 아니면 토게가 맞니? 웬만하면 조용조용히 있긴 하지만 나라고 개싸움을 못하는게 아니란다 상병신새끼야. 그리고 그 개싸움은 주로 토게에서 이뤄졌거든^^? 그럼에도 가입이후 단한번도 접금은 커녕 강등도 안당했는데 어쩌라고 씹등신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여간 논리가 안되는 새끼들이 꼭 이렇게 역사 조금 안다고
개깝추면서 좆도 안되는 역사지식 나불거리면서 지잘난줄 알지. 그래서 나오는게 환빠 아니면 너같은 극단적 일빠정도 수준이랄까.. 답변할 일고의 가치도 못느꼈다만 막판에 karls의 댓글에조차 제대로 답글 하나 못다는 주제에 그딴식으로 댓글 달리니까 얼척이 없어서 정성껏 달아줬는데 개새끼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걸 보고 좆병신이라고 하는거겠지? 억울하면 반박글 좀 달아주렴 ^^
제발... 부탁이다 ㅠㅠ 좀 달아줘 씨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야이겈ㅋㅋㅋㅋㅋ
얘 페로즈 동생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위에 댓글 싼놈은 왜 여기와서 좌빨드립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