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야. 정말..사고 났을 때 니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
"미안해요..."
"됬어. 그나저나 사고낸 운전사가 병원비며 보상비며 다 해주겠다고 하더라. 졸음운전을 했나봐. 일단은 당사자가 깨워난 뒤에 다시 얘기하자고 말해놨어. 명함도 받아놨어. 경찰 앞에서 다 해주겠다고 했으니깐 내빼지는 못할꺼야. 하기사 내빼면 바로 콩밥신세인데...
맞다! 너희 부모님한테 연락 드려야지. 내가 전화해서 말씀드릴테니깐 부모님 연락처 좀 가르쳐 줄래?"
"아......그게......."
"왜? 지금 연락 못 받으셔?"
"아니요...그건 아닌데........"
"그건 아닌데?"
제현이 머뭇거리는 세현의 태도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현은 두 손을 올려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그런 세현의 행동에 더욱 더 의아해진 제현이 세현이에게 이유를 물으려 입을 떼는 순간...
작게 흘러나오는 낮은 울음소리.
두 눈을 가린 세현의 손이.....두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제현은 볼 수 있었다.
더불어, 세현의 창백한 뺨을 따라 옆으로 흘러내리는 무색의 눈물도............
"세..현아?"
".....흑."
"왜 그래? 왜 울어?"
"..미안해요...죄송해요..흐..으윽.."
"세현아. 진정해. 진정해봐. 도대체 왜 이러는거야? 집에...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거야?"
"흐읍.....후........이런 바보같은 모습 보여드려서 미안해요.."
"무슨....아니야."
제현은 뒷통수를 누군가에게 얻어 맞은 듯한 느낌이였다. 없다니..밝은 아이라 생각했다. 첫만남은 그닥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거기다 자신이 친동생처럼 아끼는 연지의 소중한 사람을 '빼앗은'이라고 할 수 있
는 아이였지만.
누군가를 상처 준 만큼 아파하고 미안해하고 슬퍼하는 모습에 착한 아이라고 그리고, 웃을 때엔 더없이
순진무구하게 보여서 분명 부모님들의 넘쳐 나는 사랑을 받으며 온실 속 화초처럼 곱디 곱게 자라왔을
것이라고...........
제현은 제멋대로 해버린 착각으로 인해서 세현이 받았을 상처에 너무나 미안해져버렸다.
그리고, 슬픔으로 젖어버린 눈동자로 자신은 괜찮다며 오히려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제현에게 장난스
레 웃어보이는 세현이 너무나 기특하게 보였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세현이 니가 더 기분이 상할까?"
"아니에요. 평상시라면 그런거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데...아프니깐...갑자기 울컥했나봐요...거기다, 오빠가 너무 다정하게 챙겨주시니깐 어리광이라도 한 번 부려보고 싶어졌었나 봐요."
"뭐...오늘이라면 어리광 정도야 얼마드지 OK."
제현의 장난스런 대답에 세현은 소리없이 웃었다.
그리고, 잠시 뒤 제현은 의문에 찬 눈으로 세현에게 물었다.
"그럼..혼사 사는거야? 아니면...."
"...아....연성이 언니네서............살아요."
"친척이랬지? 친가 쪽? 아니면..'황'씨니깐 친가 쪽인건가?"
"...그런 셈이죠..."
"아니 그러면 연성이한테 전화를 해야하는거잖아. 연성이가 아니면 연성이네 아주머니나.."
"안되요!"
"!"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올리는 제현의 행동에 세현은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든 제현의 손을 덥썩 잡았다.
세현의 손이 떨리는 것이 제현에게도 느껴졌다.
제현으로써는 이해 못 할 세현의 행동에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연성이에게 연락을 못하게 하는 것일까?
역시...연지 일 때문에?
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세현에게 물었다.
"연지 때문이야? 그 일 때문에? 아침에 연성이가 한 말 때문에?"
"........아뇨....."
"그럼 왜........?"
"......어차피......오지 않아요."
"뭐?"
"그건......연성이 언니가...사랑하는 사람들을 배신하는 일이기에...오지 않을 꺼에요."
"배신이라니?"
아프다며 미간을 찌푸리는 세현을 보며 제현은 더 이상 묻지 못한 채 간호사를 부르기 위해 자리에서 일
어 났다. 간호사를 부르러 자리에 일어 났지만 여전히 세현이 말한 것들에 대해서 하나도 이해를 하지 못
했다. 아니 이해하려 해도 지금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제현이었다.
일단 여기는 너무나도 부산스런 응급실 한복판이니깐.
간호사를 부르러가는 제현의 뒷모습으 보며 세현은 손을 올려 엄지손톱을 입에 댄다.
"올꺼야. 배신하는 일이라 해도 올꺼야. 짜증나도록 착해빠진 여자니깐..."
.
.
.
.
"...언니!..언니!! 일어나봐!!"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내 몽롱한 의식 세계를 거침없이 할퀴어낸다.
잠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눈을 억지로 벌리니 내 동생 연지가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서있었다. 실제로는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았지만 잠이 덜 깬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꽉 잠긴 목에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흠. 흠. 몇 번 헛기침을 내뱉으자 그나마 나오는 목소리는 쇳소
리처럼 듣기 싫은 목소리.
"흠!...으음..왜?"
"지금이 몇 시인 줄 아는거야?"
"아침은 아니길 빌어..."
"아침은 아니야! 그보다..그년 봤어?"
"...세현이?"
"걔 이름 내가 알 바 아니고. 봤어?"
"...내가 걔 보디가드냐? CCTY냐?"
"못봤다는거야?"
"응.."
"민기랑 같이 있는건가? 흥! 개년..아주 살판 나셨구만."
독기 어린 음성에 어설프게 달라붙으려던 잠들이 확 달아나버렸다.
나는 침대에서 어기적 일어나 방에서 나가려던 연지를 불러 세웠다. 잠이 들기 전 들어온 건 역시 연지였
던건가?
세현이는 아직 안 들어온 모양이군. 연지 말대로 민기와 같이 있는건가?
연지를 불러 세운 채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다.
밖은 깜깜해질대로 깜깜해졌있었다. 이래선, 정말 빗방울들이 검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자신을 불러 세운 채 아무 말이 없자 답답했는지 연지는 소리를 내어 나를 부른다.
알아. 안다고. 재촉하지마.
"연지야."
"왜?"
"너...세현이가 민기 빼앗은거 아직도 분하니?"
"..........분하냐고?"
그렇게 되묻는 연지의 표정은 내가 봐도 흠칫 놀랄 정도로 너무나도 차분해보였다. 눈에 불을 킬 줄 알았
는데...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차라리, 증오하냐고 묻는게 더 나아. 이건 분하냐의 정도가 아니야. 나...엄마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 뺏기고는 못 살아. 그럴 바엔 차라리 다 망쳐버릴꺼야. 한 번이면 족해. 두 번 다 뺏길 순 없어."
"그거.......사랑 아니야. 연지야 다시 생각해."
"..........그럼 집착이야?"
"어?"
"집착이라도 내겐 상관없는거 모르겠어? 언니....나한텐 민기가 나 인거야. 민기를 이대로 잃어버린다면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거와 같은거야........"
"연지야......"
"나 알아. 언니가 그 계집애를 불쌍하게 여기는거 상처 주지 않으려 하는걸...."
"!"
욱씬.
심장에 누군가 바늘 수천개를 던진 것 같다. 알고 있었구나...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 그렇게 못해. 언니는 다 받아들일 수 있니? 언니가 부처님이야? 하나님이야? 화도 안 나니? 손톱만큼도 안 밉니? 걘 우리한테..엄마한테! 아빠를 빼앗아 갔다고!...내게서......가족을 빼앗아 갔다고! 불쌍한걸로 치면.......우리가 더 불쌍한거라고.......니 동생 황연지가 더 불쌍하다고. 난........................난...................또 빼앗겨버렸으니깐...............또........."
끝내 젖어드는 연지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 부처님 아니야. 하나님 아니야.
사실은 제대로 된 위선도 떨 수 없었던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야.
차라리, 너와 엄마의 상처를 감싸주면서 못된 언니나 할껄.
꼴같지 않게 착한 인간이고 싶은 여자라 인정도 사실 못했으면서 동생이라고 끊임없이 내 동생이라고 상
처 주면 안된다고 위선 아닌 위선을 떨고 있었어.
너무 우습지.
무어라 말을 해야하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사과를 해야하는건가? 변명을
해야하는건가? 부정을 해야하는건가? 머릿 속의 실타래들이 또 한 번 엉켜버렸다.
안 그래도 엉켜버린 실들이 제멋대로 또....
등을 돌려 나가려는 연지를 나는 붙잡을 수 없었다. 얼굴을 볼 수 없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연지의 얼굴을 보기엔 나는 어느 것 하나도 솔직한게없으니깐.
지금도 한데 소용돌이 치는 감정이..나도 모를 무수한 감정들이..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누구를 향하고 있
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작은 내 안에서 이 비좁은 곳에서 휘몰아 치고 있을 뿐이야.
"후.......황연성 너 혼자 뭐가 이렇게 복잡한거니?"
투둑.
투둑.
투둑.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줄기에 수그렸던 고개를 든다.
저 빗물에 온 몸을 얻어 맞으면 정신이 번쩍 들래나? 그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모든 걸 정리 할 수 있을래
나?
찰칵.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찰박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작은 정원을 지나 큰 대문을 밀치고 완전히 집
밖으로 나왔다.
우산 없이 나온 굵은 빗줄기는 생각했던 대로 인정사정 없이 나를 두드려대고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
나는 담벼락에 몸을 웅크린 채 그렇게 앉아버렸다.
가을비. 춥다.
얼어 죽지 않을 만큼만 비에게 맞고 들어가도 분명히 감기에 들릴 것은 뻔하다.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을 정리 할 수 있을만큼 정신이 번쩍 든다면야.
손을 뻗어 하늘 위로 올려 본다.
검은 하늘 빛을 띄며 내리는 빗물들이 손에 닿자 나에 살색을 잠시 머금고 후두둑 밑으로 추락한다.
첫댓글 ㅋㅋ 잼있어요..담편 기대
감사감사!!다음편은 아무래도 알바 때문에..월요일 날 올리게 될 것 같아요.ㅠ 죄송.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