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당시 당시 독립군의 활동무대는 '만주' 와 '연해주'였다.
만주의 상황 :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은 재만 조선인의 수색을 강화하고 학살을 감행했다.
당시 봉천군벌은 일본군의 활동을 묵인하다 1925년 미쓰야 협정으로 일본군과 독립군 색출에 공조했다.
연해주 상황 : 적백내전때 백군(러시아 구체제 옹호)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기에 당연히 독립군 입장에선 그 반대급부인 적군(소련 공산당, 사회주의 옹호)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중국 국민당의 지원도 있지 않나? 일단 연해주와 만주에서 일본군과 봉천군벌의 추적를 피해 중국 관내까지 이동이 가능했다.
거기에다 당시 중국 국민당은 군벌 토벌 문제로 예민해서 임시정부의 관내 무장활동도 부정적으로 보고 용인하지 않았다.
또한, 당대 중국 민중들의 사회 인식도 현실적으로는 조선 민족들을 일본군의 밀정으로 보는 시선이 강했다. 물론 윤봉길 의사의 1932년 홍구의거 이후 완전히 전환된 국면을 맞이하지만, 어디까지나 한참인 수년후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당시의 독립군 내에서도 러시아 적군과의 문제가 얽혀 자유시 참변(1921년)이 나기도 했지만 당시의 러시아 사회주의 세력, 이른바 소련 공산당은 레닌이 주장한 '민족 자결의 원칙' 을 내세우며 식민지배를 받는 약소민족들을 지원하겠다고 표명한 유일한 세력이었다.
* 당시 영국은 일본과 동맹관계였다.
* 당시 미국은 영일동맹과 우호관계였다.
즉,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이 시기에 주로 활동한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사회주의를 택한 것이다.
그에 반해 박정희는 어땠을까?
어디까지나 박정희가 남로당을 택한 시기(1946년 말)는 광복후 사상적인 대립이 성행했고 그에 따라 자신의 이념을 선택할 수 있는 시기였다.
물론 당시는 미 군정하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광복된 조국' 의 무대였기 때문에 진작부터 자신의 사상을 정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행동과 노선을 꾀할 수 있었다.
정치적 신념이 아닌 형의 죽음으로 인한 개인적 원한이 그 이유였다고는 해도 본인의 선택으로 남로당에 가입했으며 그 군사 총책을 맡았던 건 엄연한 사실이다.
애시당초 선택권이 없었던 상황과 선택권이 있는 상황의 비교가 합당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