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
이 인 해
“ 오! 저거 봐 빨간 감자가 아직도 있네? ”
휴일 육거리시장을 떠돌다가 빨간 감자를 보고 옛 친구 만난 듯 반가워 했다. 1950 년 6,25 때 생각이 났다. 조부님 돌아가시기 직전 그분 생전에 우리 집 감자 씨의 대부분이 빨간 감자였다. 이것은 호랑이 같으시던 조부님의 내것을 지키던 고집 때문이었다. 그분은 닭도 조선 닭 (재래종이란 뜻) 이래야 맛이 좋다고 했다. 더러는 자주감자거나 흰 감자도 있었으나 그 후 조부님도 돌아가시고 품종 개량에 밀려 없어지고는 가끔 감자를 보면 그 시절 생각이 나곤 했는데 각 지역 농산물이 상품으로 몰려드는 전시장 같은 재래시장에서 그 아득하고 따사로운 옛날을 만난 것이다. 옷매무새가 다양하고 연령층도 다양한 상인과 손님 들이 무질서하게 법석거리는 재래시장 청주의 육거리 시장을 나는 휴일에 가끔 자전거를 끌고 돌아본다. 그 소박성과 다양성과 원시성이 과거와 현재를 뒤섞으며 묘하고 솔직하게 인간사의 진실을 활력화 하기 때문 인가 싶다. 외국에도 재래시장이 따로 있어서 몽골 여행 중 재래시장을 일부러 가 봤다. 그런데 가난한 나라라서 인지 집에서 쓰던 전기소켙 이나 전깃줄까지 팔고 쓰던 식도까지 팔고 있어서 짠 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아침 7시경 무엇을 사면 좋을까? 생각부터 하고 또 자전거를 타고 육거리 쪽으로 향했다. 코로나 여파로 아직도 생기를 찾지 못한 시장이지만 그래도 큰 보따리 나 박스들을 풀어 얼었거나 염장한 생선도 진열하고 옷가게들도 보기 좋게 옷을 내 걸고 있다. 떡집은 군침이 돌게 하는 반질반질 기름 바른 송편이나 김이 나는 시루떡을 좌판에 올린다. 오늘은 얼마나 팔릴까 기대에 찬 개점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저 운이 좋기만를 생각해야 하는 상인들의 표정은 이미 잘 연습한 배우들이 무대의 막을 열 때처럼 밝아 보인다. 나는 돼지 족발을 진열하는 단골집 아저씨와 스치며 인사를 하고 내가 좋아하는 닭발과 똥집을 파는 도매 집으로 갔다. 그 집도 자주 가는 단골집인데 그 집 아주머니는 용하게 고객인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며 “ 아저씨야 말로 맛을 아시는 분이라 팍팍 한 닭가슴살을 마다하시고 얼큰한 닭발 요리를 즐기시는데 나름대로 멋쟁이셔요.” 라고 슬쩍 추켜세워 주는 걸 잊지 않는다. 나는 남들이 웃을까 몰래 닭발과 똥집을 사며 나 스스로 식성이 좀 천박한 거 아닌가 때로는 창피한데 저렇게 알아주니 속으로 고마웠다. 다 장삿속이라 비위 맞추는 것일 수 있으나 그래도 틀린 얘기는 아니니 인간관계는 밝아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다음 구매 물건은 염장한 조기인데 그쪽으로 가다 보니 각종 모자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아! 자전거 탈 때 귀가 시려서 고생했는데 털모자도 사야겠다 싶어서 견물생심 (見物生心) 으로 털모자를 골랐다. 엷은 군청색 천에 예쁘게 털을 장식한 모자를 써보니 부드럽고 따스했다. 가격을 물으니 12000 원 이래서 으레 에누리가 붙은 가격인가 싶어 만원 만 하자니 그 늙수그레한 점주가 그렇게는 안되고 천원 깍아 준대서 그냥 샀다. 만약에 만 원에 하자고 빡 빡 우겼다면 천원 더 깍을 수 도 있을 눈치였으나 저 분들 도 이 어려운 상황 속을 벗어나야 하니 라는 생각에 양보하고 많이 팔으시라 는 인사를 하고 생선 가게로 갔다. 각종 물 좋은 생선들 속에서 나는 내 특유의 식성대로 소금물에 담겨 있다시피 한 제사상에 오르는 염장 조기를 샀다. 생각보다 무척 비싼데 이걸 석쇠에 굽거나 밥솥에 찐 건 내 괴팍스런 식성에는 딱 맞는다. 집에 가져 와 봐야 너무 짜다고 아무도 젓가락을 대지 않으니 얼마나 호젓하냐고 아내가 비꼬아 가며 조리를 해준다. 만 원을 주고 조기 두 마리 사고 채소 전으로 가서 내가 잘 먹는 미나리를 찾으니 늦가을은 시기가 미나리 나올 때가 아니라 있어도 엄청 비싸고 사도 질겨서 못 먹을 정도로 품질이 나쁘다 해서 사는 걸 포기했고 집으로 향하며 얼 큰 한 닭발 요리와 간조기 요리를 떠 올렸다.
육거리 시장 큰 도로변에는 시린 손을 모닥불에 쪼이며 커피를 마시거나 시켜온 국밥을 서서 떠먹으며 사세요! 사세요! 손님의 발길을 붙잡는 모습이 생생한 삶의 파노라마 였다. 이런 시장 복판에 섞여 그들의 대화와 인정에 얼키면 어떤 호젓한 삶의 정서만이 참다운 것은 아니고 대양의 물결처럼 함께 너울지고 파도소리처럼 어울리는 게 삶의 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시 잠겨 보는 것이다. 시골 할머니들이 이 손시린 초겨울 들에 나가 나물을 캐어 길가에 쪼그려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걸 으례히 본다. 돈이 되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조금이라도 용돈을 벌어서 떳떳 한 노년을 지내시려는 생각일 수 있고 또는 집에서 편하게 누워 계서도 되겠지만 이 재래시장 속 삶의 무리에 섞여 무언가 동화되고 기다림으로 하루를 보내는 게 더 그럴 듯 하니 저럴 것 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니 재래시장의 생리야 말로 측은하기도 하고 고귀한 아름다움이기도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