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안동) 3태사
고려 개국연으로
향하는 사절은
4일 만에 고창(안동)에
도착했다.
그들을 환영하는 고창 호족은
3태사인 김선평(金宣平 ∙ 안동김씨의 시조)과
권행(權幸 ∙ 안동권씨의 시조),
장길(張吉 ∙ 나중에 장정필 ∙ 안동장씨의 시조)이
고창성에서 남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들이 지난 현승의 반란 때에
우리를 도와준 분들이군요.
그때 수고 많았습니다.”
박위응이
세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그간의 공적에 대해
치하하며 사례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신라 백성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했을 뿐이지요.”
세 사람은 겸손히
자신들을 낮추었고
그들은 사행단을 모시고
고창성(안동성)으로 들어갔다.
고창은
현승의 군사가 들어와서
한번 불타는 변을 겪었고
그 때에야 겨우 복구되었다.
신라 조정에서 발령한 고창성주는
20년 전의 소판 김처량(金處良)이었다.
그가 과도한 전세 징수로
고창 백성들과 대립되어 물러났고
이후 공백기에
견훤왕이 보낸 후백제 장수
문영(文英)이 침입하자,
조정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싸워
쫓아내면서 고창은 신라의
통치를 벗어나 버렸다.
이후에 고창은 실력을
스스로 키워
철저한 자위 체제를 갖추었으니
고을 백성들이
모두 무기를 갖추고
말을 키워 언제든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후삼국 중에 어느 나라든
고창(안동) 진입을 꺼렸다.
901년(효공왕5)
태봉국 궁예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창에 침입했다.
그 해에 궁예가 왕을 칭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 일컫고
옛 고구려 땅인
내이군(영주),
고사마(古斯馬 ∙ 봉화),
야시홀(영덕)을 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왔다.
궁예가 이들 지역을 아우르는데는
성공했지만
고창에서 많은 군사를
잃고 돌아서야 했다.
그 때 화가 난 궁예는
귀국 길에
영주 부석사에 모셔진
신라왕의 화상을
칼로 치기도 했다.
사행단이
고창(안동) 읍내로
들어가는데 낙동강 강가에
십수 척의 돛범선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 배들의 펄럭이는
삼베 돛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소경(김해)에서 온
소금배들입니다.”
3태사 김행이 말했다.
달마다 김해에서 소금배가
올라온다고 했다.
소금을 부리는
김해사람들이
보이는데 그들은 옛 금관가야
사람들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창(안동)도 옛날에
고녕가야라 하였으니
그들도 원래 가야국의 하나였다.
고창(古昌)은
고녕(古寧)이 변하여
생긴 이름이었다.
“객관이 크구나.”
사행단이 고창 객관에 들었다.
고창 객관은
의외로 크고 깨끗이
유지되고 있었으니
고창 읍내가 병화를 입을 때에
동헌은
3태사의 수호 노력으로
소실 피해를 입지 않았다.
사행단은 저녁 식사 후에
동헌의 정자인
관풍루에 앉았다.
3태사가 주안상과 함께
들어오자
박위응이 그들에게 말했다.
“지금 고창태수가 비어있습니다.
서라벌에서 발령을 낼 형편도
안 되니
여러분 중에 누가 태수가 되어
주었으면 합니다.”
그가 신라의 변방을
지킬 태수를
맡기려는 것이다.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3태사는 서로 사양했다.
첫댓글 서로 사양하는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