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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주님
본 문 : 욥 17 : 1 - 16 2007/11/25주일 낮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인생의 굽이굽이 마다 고난과 좌절이 있고, 예기치 않은 고통과 환란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 고난에 대해 힘들어하고,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사람마다 고난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과 대처가 다양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는 고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본문에 나타난 욥의 모습을 통해서 고난에 직면한 성도의 올바른 자세를 이 시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욥이 그의 친구 엘리바스의 변론에 대해, 16장에 이어서 계속해서 답변하는 내용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 더 이상 도망갈 수조차 없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까지 내 몰린 욥에게, 그의 친구들은 위로는커녕 오히려 고통만 더해 줄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오히려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격동함을 보는구나” 하며, 한탄하고 있습니다. (2절)
욥기를 통해서 계속 반복되는 내용이지만, 욥은 너무나 큰 고통으로 인해, 죽음을 소망하게 되고, 급기야는 죽음마저 순수하게 받아들이려는, 다시 말하면, 죽음마저 초연한 것 같은 태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13절로 16절까지의 말씀들은 욥의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욥은 음부가 자신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구더기가 자신의 어미요, 무덤이 자신의 아비이며, 자매라고 표현합니다. 죽고 싶다는 것이죠.
그러나 욥은 이러한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 속에 있다는 의연함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욥이 죽음을 순수히 받아 드리는 태도에서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16절)
“흙 속에서 쉴 때에는 소망이 음부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그렇죠? 죽음마저도 이제 받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억울한 누명 속에서 죽게 된다면 결코 그 죽음을 순수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인간 본연의 심성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 본연의 심성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깊이 체험하고, 이미 그 섭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낙심하고, 괴로워했지만, 어차피 이 모든 인생의 여정이 하나님의 섭리요, 뜻일진대 이제 내가 죽음으로 끝이 나면 어떻고, 설령 소망이 사라진들 무슨 대수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욥의 이러한 죽음을 초연한 의연함은 놀랍게도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내 생명을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나를 음부에 내리기도 하시고, 구원하시기도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요. (3절 합독)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 친히 나의 보주가 되옵소서.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 자가 누구리이까” 할렐루야 !!
읽기는 읽었는데, 조금 어려운 문장이죠. 그래서 쉽게 번역된 표준 새번역과 개역개정역을 제가 다시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표준새번역, 욥17:3)
“주님, 주님께서 친히 내 보증이 되어 주십시오. 내 보증이 되어 주실 분은 주님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개역개정)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밖에는 우리의 보증이 되어 주실 분, 그리고 나의 손을 잡아 주실 분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욥을 생각해 보세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실의와 절망 가운데서 혼이 나가버린 욥에게, 그의 친구들은 옳은 소리를 해댑니다. 욥을 판단합니다. 정죄합니다. 죄를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믿었던 친구들마저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그 슬픔과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한단 말이에요. 억울해요. 너무 억울합니다.
이럴 때 누구라도 나서서, “아니야, 욥을 욕하지마. 저 사람도 알고 보면, 너무나 불쌍한 사람이야. 저렇게 바보처럼 앉아 있지만, 속은 얼마나 타겠어. 우리는 저 사람 마음 몰라. 우린 욥을 이해해 줘야 돼” 라고 말하면서 그를 위로하고, 변호해 주었으면 정말 좋겠는데, 누가 이처럼 욥을 보증하고, 변호해 주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진실로 내 마음을 헤아리고, 나의 형편을 알아주고, 내 마음을 이해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설령 이해하고 위로 해 준다 할지라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부분적으로 변호해 줄뿐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이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주님, 제게는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나의 이 고통과, 나의 이 슬픔과, 나의 이 괴로움과, 나의 이 찢어지는 가슴을 위로해 주고, 어루 만져주고,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결백을 증명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놀라운 신앙의 고백입니다. 사실 신앙은 매우 단순한데, 우리의 신앙을 한 문장으로 고백하라면, “주여!”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주님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도 주님, 나의 구원자도 주님, 나를 도와주실 분도 주님, 나를 장차 본향으로 인도하실 분도 주님, 내게 상급 주실 분도 주님, 그렇잖아요.
교회의 주인도 주님, 삶의 표준도 주님, 우리가 닮아갈 분도 주님, 나를 오늘 이 자리에 나오게 하신 분도 주님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만이 우리의 전부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34 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전설적인 가수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저 유명한 미국의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M. Anderson;1902-1973)은 정말로 세계 적인 가수였습니다. 그는 천재적인 가수로서의 노래 때문에 23개국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케네디 대통령 취임 식장에서는 미국 국가를 독창했습니다. 1958년에는 아이쟉 대통령이 그를 유엔 대표로 지명하기까지 했습니다. 1963년에는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상패를 받았습니다. 40년 간, 성악 가수로서 명예를 떨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그가 은퇴하는 자리에서 남긴 말은, 그가 현역시절에 끼친 영향과 감동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감동과 영향을 주었습니다.
“나는 보잘것없는 노예밖에 될 수 없는 인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내가 유명해진 것이지 결코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는 하나님께 명예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라고 했어요.
우리는 또 한 사람, 세기적인 작곡가 하이든 (Franz J. Haydn)을 잘 압니다. 그가 작곡한 저 유명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연주되던 연주회장에서의 일이었습니다. 그날 밤, 하이든이 작곡한 ‘천지창조'는 거기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을 실로 감동의 도가니, 감동의 터널로 이끌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연주회가 끝났을 때 사회자가, “이 곡을 작곡한 하이든 선생님이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셨습니다." 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때 모든 청중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그에게 보냈습니다. 청중들의 그칠 줄 모르는 박수 소리에 하이든이 벌떡 일어나 무대로 나가서는 손을 흔들어 자리를 정돈시켰습니다. 그리고 하이든은 청중 앞에서 손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을 했어요.
“이 작품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저 높은 곳에 살아 계시는 나의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 날 밤에 나에게 보낸 여러분의 찬사와 박수를 모두 하나님께 다시 되돌려 보냅니다.”
이렇게 그 세기를 밝혔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사용한 재능을 자기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재능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수많은 찬사와 영광을 오로지 하나님께만 돌렸습니다. 그렇기에 저들의 삶이 복을 받았고, 어두운 세상에 빛을 뿌렸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 중심의 삶을 결단하고, 살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아가다가도 때로는 넘어 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판단 때문에 넘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욥 역시도, 그의 친구들의 적절치 않는 판단과 변론으로 인해 심각한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친구들로 인해서 근심하게 되었고, 그 근심은 욥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한탄합니다. (6,7절)
“하나님이 나로 백성의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여러분, 누군가에게 판단 받는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칭찬이라면 모르겠지만, 혹평을 받는 다든지, 비판을 받을 때는 견디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낙심하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고, 실족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마저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은 주님 중심의 판단과 비판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온전한 판단자가 되신다는 생각입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실까?, 주님은 나를 어떻게 보실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나를 판단하는 것보다, 이웃이 나를 판단하는 것보다, 오직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거장 미켈란젤로가 씨스틴 채플의 천장 벽화, 프레스코를 거의 완성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작품은 이제 끝난 것으로 보여 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천장을 향해서 마지막 터치를 위한 손질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도왔던 조수들 가운데 한 사람 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선생님, 이젠 끝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자네 눈에는 끝난 것으로 보이는가? 내 눈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네, 내 눈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리고 몇 달을 더 그는 계속해서 이 작품에 매달렸습니다. 마침내 작업은 완전히 마쳐진 것으로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작업 도구를 치우지 않고 계속 천장을 응시하면서 그 장소를 맴돌았습니다. 다시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제는 정말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미켈란젤로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내 눈에는 다 끝났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지” “주님 보시기에는 어 떨지 모르지”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정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걸작을 낳은 일종의 프로 정신입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이것은 철저한 청지기 정신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평가할 때 중요한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관점에서 내 인생을 평가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1세기의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체험했고 또 성령의 풍성한 은사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자라지 못했고 그 사회 속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끝없는 분열과 불화가 계속 되고 있었어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일이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자기들의 인생에 대한 ‘냉정한 결산',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전서 4장 3절과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고전4:3,4)
여러분! 충고는 필요한 것입니다. 이웃의 관점에서 내 인생에 대한 그 맹목성을 진단하고 비판할 때 우리는 겸허히 귀를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참고 사항일 뿐, 내 인생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이 잘못될 수가 있는 것처럼 종종 이웃들의 나를 향한 판단도 거기에 편견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판단 할 때도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욥을 판단함에 있어서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판단의 해악을 경계합니다. 판단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이웃을 비판하는 비판으로 도리어 비판을 받을 것을 각오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로마서14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판단 때문에 우리의 관계가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판단에는 항상 편견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심히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비판을 무조건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일이라도 귀담아 들어야 하고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치면 내게 유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인생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이나 판단이 될 수는 없어요. 욥의 친구들의 판단이 욥에 대한 최종적이고 정확한 판단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에 대해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 누군가 여러분에게 정성어린 충고를 하거나, 조언을 했을 때, 소중하게 참고 하십시오. 그러나 내 인생의 결정적인 마지막 선언처럼 모든 판단을 수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떤 관점에서 내 인생은 판단되어야 마땅할까요? 오늘 본문인 욥기에서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고린도 전서 4장에서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관점입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온전하게 평가하시고, 정확하게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욥도,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자가 누구리이까?”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이십니다. 내 삶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신 바로 그 분, 나를 창조하신 그 분, 나를 섭리하시는 그 분이야말로 가장 완벽하게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가장 공정하게 나를 판단하실 주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욥의 훌륭한 믿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친구들의 비판과 독설 때문에 심히 괴로워하고 근심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판단에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러므로’라는 말의 의미는 욥이 당한 여러 환란과 친구들의 냉혹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즉 욥에게 닥친 상황은 심한 회의와 좌절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탈선의 길로 가지 않고 끝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도를 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 줍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의로운 자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그의 올바름이 드러나고 그에 따라 더욱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모든 일에 공의로 판단하시고,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판단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중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큰 영광 돌려 드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