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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에돔의 심판
겔 35:1-9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네 얼굴을 세일 산으로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
3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세일 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네가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할지라
4 내가 네 성읍들을 무너뜨리며 네가 황폐하게 되리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5 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마지막 때에 칼의 위력에 그들을 넘겼도다
6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에게 피를 만나게 한즉 피가 너를 따르리라 네가 피를 미워하지 아니하였은즉 피가 너를 따르리라
7 내가 세일 산이 황무지와 폐허가 되게 하여 그 위에 왕래하는 자를 다 끊을지라
8 내가 그 죽임 당한 자를 그 여러 산에 채우되 칼에 죽임 당한 자를 네 여러 멧부리와, 골짜기와, 모든 시내에 엎드러지게 하고
9 너를 영원히 황폐하게 하여 네 성읍들에 다시는 거주하는 자가 없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 35:1-9 / [에돔 족속의 심판] 여호와께서 내게 또 말씀하셨다. 2) `너 사람아, 세일 산지를 바라보고 서서 내가 내리는 심판의 벌을 알려 주어라! 3) 너는 그곳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너는 이제 내가 내리는 벌을 받게 되었다! 너 에돔의 산지야, 내가 이제 너를 치러 가겠다! 네가 이제는 내 무서운 손안에 들어왔으니 너를 사람의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쓸쓸한 곳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4) 내가 네 도성을 모조리 무너뜨려 쓰레기더미로 만들고 네 온 나라를 황폐하게 뒤엎어 놓겠다. 그러면 네가 그제서야 내가 여호와인 줄을 깨닫게 될 것이다. 5) 너희 세일 땅에 사는 에돔 족속들은 옛날부터 원한을 품고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다녔다. 내가 유다 나라를 심판하여 그 땅을 황무지로 뒤엎어 놓았을 때에도 너희는 그들을 무자비하게 칼로 찔러 죽였다. 6)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확실히 살아 있음을 걸고 맹세하지만. 너희 에돔 족속은 이제 그 벌을 받을 것이다. 네가 남의 피를 흘리려고 뒤쫓아다니고 또 기어코 남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이제는 네 피를 흘리고 항상 너를 뒤쫓는 살인자의 손에 마침내는 죽게 될 것이다. 7) 내가 네 백성들을 모조리 살해하여 네 땅을 어느 누구도 발을 들여놓지 않는 적막강산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8) 내가 너희 세일 족속을 모조리 쳐죽여 온 나라가 시체로 뒤덮이게 하겠다. 산마다 칼에 찔려 죽은 시체가 널려 있고 언덕과 골짜기와 시냇가마다 시체가 쌓이지 않은 곳이 없게 하겠다. 9) 내가 이렇게 네 나라를 영영 황무지로 바꾸어 네 모든 성읍에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게 만들면 그제서야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대적으로 삼으심(1-4) 에돔에 임하는 심판이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내가 네 성읍들을 무너뜨리며 네가 황폐하게 되리니"(4) 에돔의 심판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에돔에 대한 심판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증하는 가시적인 증거로서 하나님의 주권 선언입니다. 에스겔 35장은 25장의 에돔에 대한 예언과 이어져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에스겔 35장은 뒤이어서 나오는 36장 1절부터 15절에 기록된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의 구원을 강조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백성 에돔을 하나님은 대적으로 삼으십니다.
옛날부터(5) 이스라엘과 에돔의 적대적 관계는 오랜 역사적 유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는 출생부터 지속적으로 갈등하였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나아갈 때에 적대세력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 사울과 솔로몬 그리고 여호사밧, 여호람, 아하스 시대에도 계속적으로 갈등관계였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한 에돔의 적대감은 마침내 이스라엘의 멸망 시기에 결정적으로 들어냈습니다. '칼의 위력에 그들을 넘겼도다'라고 합니다. 이는 에돔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에게 넘겨 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서 에돔은 회복할 수 없는 죄악을 행하였습니다(왕하 25:1-5).
세일 산이 황무지와 폐허가 되게 하여(6-9) 2절과 7절에서 말하는 '세일 산'은 36장 1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산'과 대조되는 에돔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세일 산'은 에돔 족속의 거주지였습니다. 에돔은 그가 행한대로 보응을 받게 됩니다. 이제 심판을 받는 에돔의 모습은 마치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였던 죄악과 동일합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에게 피를 흘리게 하였으므로 그의 생명으로써 갚게 하시는 분입니다(창 9:5; 민 35:19, 21; 신 19:10-13). 또한 세일에서 왕래하는 자를 다 끊을 것이며 거주하는 자도 없게 되리라고 합니다. 모든 에돔 사람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 대상에 속해 있고, 그들은 모두 소멸 될 것입니다. 멧부리는 산봉우리를 의미합니다.
적용: 조상의 역사에 자손들이 한을 품는 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잠 25:21-22)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너는 이 모든 것들을 미워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말씀을 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최초로 느끼는 사랑, 즉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사랑을, 우리의 가장 귀중한 사랑 즉 우리 자신의 생명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W. Y. 플러튼
< 설 교 >
세일산과 에돔이 황무하리라
겔 35:1-15 / 손재호 목사
우리는 지난 시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겔로 하여금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오늘 말씀은 세일산과 에돔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무함을 보고 즐거워한 것같이 너희도 황무케 되리라”(15).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돔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을 심판하시는 말씀에서 살펴봤습니다. 에스겔서 25:12-14절에 보면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로인해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오늘 본문에서 에돔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36장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대비하기 위하여 다시 에돔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봅니다. 이런 대비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심판을 받지만 그 심판을 통과한 후에 돌이켜 주십니다. 그러나 에돔은 영원히 황폐하게 하심으로 이렇게 하신 분이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에돔이 왜 심판을 받는지 오늘 본문의 내용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25장에서 보았습니다만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네 얼굴을 세일산으로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세일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로 황무지와 놀라움이 되게 할지라. 내가 네 성읍들을 무너뜨리며 너로 황무케 하리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세일산을 향하여 예언하라고 합니다. 세일산은 에돔 족속이 사는 곳이기에 세일산이라고도 하고 에돔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일산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대적하신다고 합니다. 3절을 다시 보면 “세일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로 황무지와 놀라움이 되게 할지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에돔의 대적이 됨으로 그곳은 황무지와 놀라움 곧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4절을 다시 보면 여호와께서는 세일 곧 에돔의 성읍들을 무너뜨리며 황무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에돔 사람들이 이렇게 하신 분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에돔이 이런 심판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에 보면 에돔이 심판받는 첫 번째 이유가 나옵니다. “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끝 때에 칼의 권능에 그들을 붙였도다”(5). 이 말씀에 보면 에돔이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의 때 곧 죄악의 마지막 때에 칼의 위력에 그를 넘겼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에스겔서 25장을 살펴볼 때 봤습니다만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뱌다 1:10-14절을 보면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서 보면 에돔이 영원히 멸절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에돔이 여호와의 심판을 받아서 멸절되는 이유는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인한 것입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할 때에 에돔이 기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망가는 그들을 막아서서 원수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에돔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심판의 결과가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 6-9절을 보면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로 피를 만나게 한즉 피가 너를 따르리라. 네가 피를 미워하지 아니하였은즉 피가 너를 따르리라. 내가 세일산으로 놀라움과 황무지가 되게 하여 그 위에 왕래하는 자를 다 끊을지라. 내가 그 살육 당한 자로 그 여러 산에 채우되 칼에 살육 당한 자로 네 여러 멧부리에, 골짜기에, 모든 시내에 엎드러지게 하고 너로 영원히 황무케 하여 네 성읍들에 다시는 거하는 자가 없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는 그 내용은 에돔에게 피를 만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에돔이 피를 미워하지 아니하였기에 피가 너를 따르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에돔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피를 흘리게 하였기에 그들에게도 피가 흐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죄로 인해서 여호와의 심판을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세일산을 황무하게 하여 그 위에 왕래하는 자를 다 끊으신다고 합니다. 그 죽임 당한 자들을 여러 산과 멧부리와 골짜기와 시내에 엎드리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 엄청난 여호와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영원히 황폐하게 되어 다시는 그 성읍들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이렇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에돔이 심판을 받는 두 번째 이유는 10절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이 두 땅은 다 내게로 돌아와서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나 여호와가 거기 있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에돔이 두 민족과 두 땅을 자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두 민족이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말합니다. 이 두 땅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에돔이 그 땅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고 그 빈 땅을 자기의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거기에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계시는 땅을 자기의 것이 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멸시한 행위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도 “네가 이스라엘 산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 산들이 황무하였으니 우리에게 붙이워서 삼키게 되었다 하여 욕하는 모든 말을 나 여호와가 들은 줄을 네가 알리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도 보면 이스라엘의 산들이 황폐하여 졌으니 그 산들이 자기들에게 넘겨졌다고 하면서 이스라엘을 욕하였습니다. 이 모든 말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고 합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대적하며 입으로 욕하는 것들을 여호와께서 다 들으셨기에 에돔을 심판하십니다. 그들이 어떤 심판을 당하는가 하면 온 땅이 즐거워할 때에 에돔을 황폐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렇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인줄 알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좀더 자세히 살펴볼 내용은 5절에 있는 “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입니다. 이 말씀은 에돔이 이스라엘을 대적한 내용입니다. 에돔의 조상이 에서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입니다. 이들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싸웠습니다. 창세기 25:22-23절을 보면 “아이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리브가는 뱃속이 너무 요동 치고 아파서 여호와께 어찌할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대답이 두 민족이 복중에서 나누어지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이 말씀대로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먼저 나온 아이가 전신이 붉다고 해서 에서라고 이름을 지었고, 뒤에 나온 아이는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해서 야곱이라고 지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사기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곧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미 이들은 모태에서부터 싸웠고 두 민족으로 나누어졌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행위도 하기 전에 서로 싸우는 민족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운명이 이미 결정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과정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에서가 사냥하러 나갔다가 허기가 져서 돌아옵니다. 야곱이 붉은 죽을 쑤고 있었는데 그것을 좀 달라고 합니다. 이때 에서가 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넘겼습니다. 야곱은 교활하였고, 에서는 경솔하였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권리를 판다고 해서 자신이 장자임이 어디 가겠느냐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나중에 에서가 받을 축복을 어머니와 공모하여서 가로챕니다. 이것을 안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택함을 받지 못한 에서가 죽이려고 합니다. 이를 눈치 챈 리브가는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난을 보냅니다. 나중에 둘 다 자기 기업을 이루지만 에서가 훨씬 더 강한자로 성장합니다. 에서는 고생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야곱은 죽도록 고생하였습니다. 노년에 바로 왕 앞에 선 야곱은 자신의 나그네 세월이 험악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창 47:9).
우리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에서와 야곱 중에 누가 더 복을 받은 삶으로 보입니까? 에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의 삶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는 세상에서 강하고 힘 있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없이 자신이 자신을 지켜야 하기에 자기 힘을 키울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야곱도 역시 자신이 자기를 지키기 위하여 불철주야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자기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십니다. 그래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곳에서 그의 환도 뼈가 위골이 됩니다. 더 이상 자기 힘을 의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약속만 의지하여야 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원한 언약에 참여하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가 세상에서 강한 자가되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를 공격하게 됩니다. 가인과 아벨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아벨을 택함을 입지 못한 가인이 죽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육체의 실력으로 낳은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이삭을 괴롭힙니다.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형 에서가 택함을 입은 동생을 미워하고 대적합니다. 이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일방적인 하나님의 택하심을 세상이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을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택하심의 은혜를 미워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택하셨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합니다. 이 현상이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을 통하여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들로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3절을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선택사상이 바로 아들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그 아들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9:7-18절을 보면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됨을 말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3-6절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이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곧 이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구원 얻을 자와 구원 얻지 못할 자가 선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내가 믿어주는 그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곧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세 전에 택하심을 입었는지 택하심을 입지 못하였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가인과 이스마엘과 에서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대하여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어떤 일을 행하기도 전에 미리 하나님께서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를 정하여 두셨다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는 자들이 바로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서도 창세 전에 택하심을 입은 자라면 나중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믿지 않는 자들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습니다만 우리도 다 그 가운데 있었고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도 그 가운데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앞에서 본 로마서 9:7-18절의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의 씨가 다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식 중에 하나는 육신의 자녀요, 하나는 약속의 자녀라고 합니다. 곧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녀요, 이삭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육신의 자녀는 인간의 가능성이 들어간 자녀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는 인간의 가능성을 단절시키면서 나오는 자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에서와 야곱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로마서 9:11-13절을 다시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9:14-18절을 다시 보면 여기에 대해서 항의가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불의 합니까?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14).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합니다(15). 그러므로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요, 달음박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일어난다고 합니다(16).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이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이를 완악하게 하십니다(18).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따른 긍휼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새 언약의 시대입니다. 이 복음에 대하여 대적하는 자들이 바로 에돔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에돔 족속과 같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항의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입었기에 일한 것도 없이,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오직 예수님께 관심이 있습니다. 구원은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한 구원입니다. 그런 구원을 받은 자는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드러낼 뿐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에돔의 황폐화
겔 35:1-15 / 배영진 목사
오늘은 에돔의 황폐화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지난 금요일 매일성경 본문인데요, 유독 황무지, 황폐하게 하신다 이 말씀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이 에돔 민족을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묵상을 해봤습니다. 왜 하나님은 에돔족속을 황무지가 되게 하시는가? 왜 이들을 무겁게 다루셨을까? 오늘날 에돔족속은 흔적도 없습니다. 한 민족이 있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바벨론이나 앗수르, 이런 나라들 이름이 세계 역사에 없어졌어요. 그런가 하면 이집트같은 나라는 구약성경 몇천년 전부터 있던 나라인데 지금까지도 이름이 있습니다. 어떤 나라, 어떤 인생이든, 떠오르는 시기만 있지 않습니다. 뜨기도 하고 지기도 합니다. 이집트는 지금 세계에서 별 힘이 없지만 흔적이 없어지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바벨론이나 에돔이나 모압 암몬 블레셋 이런 민족들은 지금 자취가 없어졌습니다. 우리나라 한민족은 5천년동안 민족의 정체성, 이것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생각해보면 대단한 것입니다. 민족이 기나 긴 세월동안 다른 민족에게 묻혀버리지 않고, 정체성이 남아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크게 복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에돔족속의 장래를 다루시는데, 에돔을 매우 안좋게 평가하십니다. 에돔을 황무지와 폐허로 만들겠다는 말씀을 네번, 황폐하게 하신다는 말씀도 네번, 왜 하나님은 이렇게 에돔을 무섭게 책망하시는가? 어떤 인생은 황폐화되는 것인가? 황폐화, 황무지, 이것은 그 인생 자체가 흔적이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민족 그 인생에 복을 아예 거두어가시면, 누구든지 황폐화가 됩니다. 인생이 시들해져버리고, 그 잎사귀가 말라버립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인생에 어떠한 메시지가 있는 것일까요? 어떤 인생은 점점 황폐하게 되어버리는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에돔이 가진 생각, 그 인생관을 악하다고 보십니다. 에돔아 가진 생각이 뭐였나? 본래 에돔이란 붉다는 뜻인데 이삭의 첫째 아들 에서의 후손입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오래 기도하여 쌍둥이를 낳았는데 에서와 야곱이었죠. 둘이 쌍둥이 형제였는데,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뒤따라 나왔습니다. 야곱은 약았고 꾀가 많았고, 에서는 선이 굵고 용감무쌍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형이 아니라 동생 야곱을 택하셨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사건이 나오죠. 야곱이 잔머리를 써서 두 번이나 형을 속입니다. 한번은 팥죽으로 형의 장자권을 차지하고, 한번은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의 축복권을 차지합니다. 이것을 알아차린 에서가 통곡하며 울어요. 야곱에 대한 미움, 분노, 적개심이 솟아올라, 저 야곱을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합니다.
야곱이 형이 자기를 죽이려는 것을 알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칩니다. 그후 20년만에 돌아올 때, 야곱이 엄청 두려워하여 얍복강가에서 밤새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두사람이 화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 에서가 무슨 마음이었나? 에서가 자기 후손들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에돔족속이 이 과거문제를 어떻게 갖고 있었는가? 오늘 본문보면 에돔족속은 이것을 말끔히 해결하지 못합니다. 뭡니까? 에돔족속은 피해의식을 갖고 살아요. 지난 날 있었던 그 사건, 그 문제를 마음으로 정리하지 못합니다. 오늘 에돔족속의 깊은 문제가 5절에 나옵니다. 네가 옛날부터 이스라엘에 한을 품고 있었다! 마음의 원한입니다. 영어성경은 오랜 시간의 적개심이라고 말했어요. 야곱에 대한 원한입니다. 내가 복받지못한 것은 저놈 때문이야, 이 원한이 에서에게 뿌리가 깊어요. 내 인생 이렇게 된 건 그때 그 사건 때문이야, 내가 잘 안된 모든 것은 저놈 때문이야! 과거 일, 이거 해결을 못하고 그게 마음의 위장에서 소화가 안되고 얹혀버렸어요. 과거 일이 내 속에서 체해버리는 것입니다. 5절 6절 보면 지독합니다. 한 사람이 마음 속 깊이 원한을 품고 사는 경우의 모든 문제를 에돔족속이 다 갖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한을 품고, 뭘 말할까요? 동생에 대한 미움과 원한이죠. 피비린내, 피투성이, 이것은 다 보복을 말합니다. 응어리와 한이 가득하여 보복의 칼을 품고 살아요. 그래서 에돔은 늘 피해의식입니다.
제가 이 문제를 오늘 우리 모두가 한번 돌아보기를 원하는 면이 바로 이것입니다. 난 어떤 사건이 마음에 체했나? 우리는 살면서 어린시절이나 지난 과거에, 내가 원하는 대로 안된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먹을 것이든, 집에 돈이 없어서였든, 에서처럼 동생이나 형 때문에 뭔가 빼앗긴 일이든, 차별을 받거나, 소외를 받거나, 엄마나 아빠를 어떤 이유에서든 박탈당한 일이건, 그야말로 너무 다양한 사건이죠.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요. 상실감, 박탈감, 그때 우리 내면 감정이 쓰라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종류가 다른,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어떤 상실감없이, 아무 박탈감없이 어린 시절 완벽히 풍성하게 채움을 다 받고 살지 않았어요. 어린 시절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실망이 되고, 좌절이 되고, 상처로 남게 됩니다. 저는 어릴 적에 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엄마를 잃은 거죠. 아이가 엄마를 잃으면 엄청난 상실입니다. 집도 무척 가난해졌습니다. 이층 빨간벽돌집이 사라졌어요. 그리고 사춘기 때 새어머니가 오셨고, 거기서 따뜻한 사랑?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죠. 우리 중에는 저보다 더 크게 박탈과 상실을 경험하신 성도들도 많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한 경우, 부모불화가 극심한 경우, 폭력을 경험한 경우, 애정을 받지못한 경우, 칭찬을 받지못한 경우, 혼자 있는 시간, 모두 종류와 정도가 다를 뿐, 우린 다 뭔가를 빼앗기거나 잃어본 사람입니다. 자 이것을 소화했는가? 체했는가?
에돔족속의 문제를 봅시다. 창세기에서 에서는 뭘 잃었나요? 아버지의 축복입니다. 에서가 하나님의 축복을 그렇게 사모한 사람은 아닙니다. 팥죽 한그릇에 장자권을 가볍게 넘겨버렸어요. 하지만 아버지 이삭이 자기를 사랑했기 때문에, 에서는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 이건 자신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의 특명을 받아요. 아들아 네가 사냥해서 잡아온 요리를 아버지는 무척 좋아한다, 그렇게 해와라. 내가 죽기 전 너에게 모든 축복을 해주마! 열심히 사냥해서 집에 왔는데 집이 이상해요. 아버지의 축복을 동생 에서가 몽땅 가로채 받아간 것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아버지 집문서, 적금통장 도장 비밀번호를 다 가로채 간 것입니다. 오늘날도 아버지 돌아가실 때, 재산같은 것이 모두 누군가에게 가는 일도 있습니다. 엄청난 박탈감입니다. 그때 에서가 아버지께 울면서 말합니다. 아버지 내게 주실 축복 남은 것이 없나요? 없다! 그날부터 에서가 마음에 원한을 품어요. 저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구나. 그날 이후 오랫동안 에서의 후손, 에돔은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에게 한을 품어요.
그런데 여기부터가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돔을 안좋게 보셨다는 근거가 있어요.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에돔족속은 어떤 원한을 마음에 품고있다 실행을 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재난을 당하는 날에, 그때 쫒아가서 칼을 휘둘러야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어려운 시간이 오면, 그 어려움을 이용하여 공격하여 한을 풀리라. 이런 결심을 했고, 기회를 보고 있었고 마침내 그 시간이 오자 그걸 실행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미약해지고 예루살렘이 바벨론군대의 공격을 세차례나 받고 무너집니다. 이 힘없는 시간에 에돔은 기뻐합니다. 와 이거 너무 좋네, 최고의 기회가 아니냐? 에돔이 바벨론군대와 이스라엘을 총공격합니다. 칼을 마구 휘둘러요. 6절에 보세요. 에돔이 이스라엘을 치고 거침없이 피를 흘립니다. 에돔은 피해의식을 갖고 있어요. 자기 과거에 마음에 원한을 갖고있어요. 한이 많아요. 그러면 반드시 보복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이 보복은 좀 엉뚱하게 일어납니다. 오늘 에돔은 이스라엘에게 보복했는데, 보통의 경우 에돔의 보복이 야곱에게 가는 게 아닙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 내가 박탈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마음에 원한이 남아있어요. 그러면 내가 다 커서, 엉뚱하게도 지금 내 가족, 지금 내 배우자에게 한을 풀어요.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어릴 때 서러움이 잔뜩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그 서러움을 부부싸움할 때 막 쏟아놓습니다. 어릴 때 소외감이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그 감정을 지금 가까운 사람에게 뒤집어 씌워요. 이것을 심리치료에서 투사라고 부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지금 화가 난다구! 당신이 나를 지금 서럽게 만들고 있잖아? 사실은 이미 내 안에 서러움이 잔뜩 체한 채로 있는 건데, 다 저 사람 때문 같은 거죠.
오늘 에돔족속은 단지 이스라엘에게 보복의 화풀이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0절, 에돔은 유다와 이스라엘, 두 민족 두 나라를 자기 것으로 하려는 마음까지를 품어요. 이것은 심리치료로 풀어보자면, 아직 너무 배가 고픈 거예요. 히딩크가 2002년 월드컵 때 그런 말 했죠. 난 아직 배고프다! I'm still hungry! 뭡니까? 에돔은 그때 아버지의 축복을 야곱이 빼앗아가서 지금도 너무나 배가 고픈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유다가 힘이 없어진 것을 보니까 아 이때 내가 다 먹어야겠어! 이렇게 탐욕을 부립니다. 우리가 지난 날 서러움이 해결이 안되면 심리적으로 배가 너무 고파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나 배고파 이것도 내놓고 저것도 내놔 말합니다. 문제는 그게 너무 과하다는 겁니다. 왜 나를 더 따뜻하게 안받아주는 거야? 왜 나 위로를 안해주냐고? 거기서 내게 할 말이 그것 밖에 없어? 왠만하면 화가 납니다. 짜증이 나고 우울해집니다. 11절 네가 미움과 분노와 질투를 터뜨리며 사는구나!
여기서 문제가 무엇일까요? 이렇게 에돔처럼 살아가는 인생은 황폐화가 시작됩니다. 복되게 살 수 없습니다. 왜냐?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복주시지 않습니다. 자기 옛날 삶에서 한을 품고 서럽고 상처받고 억울함이 아직도 남으면 보복의 삶을 살아요. 왜 그러냐? 그렇게 예전에 안좋은 경험을 가득 간직하면, 오늘 지금의 삶을 살 때, 이렇게 됩니다. 다 좋은 거! 아니면 다 나쁜 거! 영어로 하면 All or nothing! 그런데 내 주변 사람을 보면, 그가 완벽하게 좋기만 할까요? 그런 경우가 없습니다. 그런데, 완벽하게 좋지 않으면, 이 사람은 어떻게 느껴져요? 이 사람은 나쁜 사람! 이 사람은 다른 사람 평가할 때 조정능력이 없어요. 100% 좋은가? 100% 나쁜가? 그러면 내게 안좋은 사람, 맘에 안드는 사람이 천지예요. 왠만하면 다 나쁜 사람! 그러면 어떻게 생각을 반전시켜야 하는가? 완전 좋은 거 아니면 다 나쁜 거, 이게 아니고, 저 사람은 그런 대로 괜찮아! 우리 엄마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 정도면 훌륭하셨어! 우리 아빠 그래도 애쓰셨어! 이것을 영어로 good enough라고 합니다.
자 에돔의 인생은 어떤 것인가? 지금 내 앞의 사람들은 거의 다 나쁜 사람, 아니면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결국 보복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에돔같이 사는 인생을 하나님이 좋지않게 보십니다. 11절 하나님이 에돔을 심판하십니다. 나도 너에게 보복하리라. 에돔처럼 사는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의 평가가 안좋아요. 12절부터 15절까지 하나님께서 에돔의 이 모습에 대하여 황폐화를 선언하십니다. 에돔을 황무지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14절, 내가 너를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15절 세일산아 에돔땅아, 네가 황폐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입니다. 에돔같이 인생을 살면, 에돔같은 인생결과가 옵니다. 내 인생의 황무지화! 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설명합니다. 왜 지난 날 서러움을 한으로 간직하고 분노를 품고 살면 인생 황폐하게 되는가? 그 사람은 살면서 너무 자주 내가 불행하게 느껴져요.안좋을 때가 많아요. 행복하지 않을 때가 너무 많아요. 불행징크스에 빠져버립니다. 왜 나는 이렇게 불행하지? 그런데 누가 나를 불행하게 하지? 아 저 사람이 그랬어!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자기 가까운 주변사람과 갈등이 많아요. 모두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같이 여깁니다. 이렇게 계속 살면 어때요? 그의 주변사람이 지쳐버립니다. 그래서 하나 둘 그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 돌아보니 내 주변에 사람이 남아있지 않아요. 어디 갔나 보니까, 내가 짜증내고 내가 분노를 터뜨려, 내가 멀리 쫒아버린 겁니다. 왜 나를 힘들게 해? 왜 나한테 따뜻하게 안해 줘? 왜 나를 보듬아주지 않는거야? 이렇게 계속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따뜻하게 보듬아주는 사람이 없어집니다. 아 내 곁에 아무도 없어! 인생이 황폐하게 됩니다.
우리가 요셉의 인생을 볼 때, 요셉이 하나님께 가장 축복을 받은 이유가 있습니다. 요셉은 보복을 하지 않았어요. 자기를 팔아넘긴 형들을 품어줍니다. 지난 날 갑자기 들판에서 형들이 달려들러 옷을 벗기고 집단린치를 가하고 노예로 팔아 넘겨버린, 그때 형들에게 당한 일, 너무나 서럽고 무섭고 마음이 쓰라린 일이 아닐 수 없어요.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 문제를 풀어요. 형들은 나를 이집트를 팔았으나 그 악한 일을 하나님은 선하게 바꾸셨다! 그래서 나를 이집트 총리로 높이시고 내 동족을 돕고 구원하는 일에 쓰셨구나! 그 나쁜 일을 요셉은 마음으로 소화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한을 품지 않습니다. 요셉은 17살부터 30까지 13년을 기다립니다. 그동안에 점점 안좋은 일이 많아요. 일이 꼬이고 틀어져 그가 감옥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주시고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요셉이 총리가 되어 형들을 만났을 때, 요셉은 가장 강력한 권세를 가졌고 형들은 기근이 들어 배가 고픈 상태였습니다. 요셉이 보복을 하지 않습니다. 형들을 품어주고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줍니다. 믿음으로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서러운 일이 있고, 지난 날 박탈감을 경험했습니다. 마음에 풀리지 않는 과거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매여있으면, 한을 품어요. 그 서러움이 쌓인 채 오늘을 삽니다. 그러면 누군가에게 보복합니다. 그때 그 사건과 아무 관계없는 오늘 내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고 정당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에돔의 인생입니다. 에돔의 문제가 내게 없는가? 지난 날 인생 서러운 일, 박탈감, 상실감, 소외감의 피해의식이 속에서 해결했는가? 하지 못했으면, 해야 합니다. 에돔은 안했고 요셉은 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지난 날 한풀이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에돔의 황폐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