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말씀: 이사야 25:1 ~ 12】
1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2 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3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
4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5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
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7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9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에서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11 그가 헤엄치는 자가 헤엄치려고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그의 손을 펼 것이나 여호와께서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이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누르실 것이라
12 네 성벽의 높은 요새를 헐어 땅에 내리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시리라
【말씀 나눔】
수술실 안에 들어가 보신 적 있으십니까?
문 안은 공기가 다릅니다. 나 혼자 침대에 실려 안으로 들어가면 의료진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보이고, 기계음과 여기저기 달린 링거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마취를 설명하는 의사의 손길을 느끼며, 우리는 한 가지를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여기서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사도, 가족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끝내 자기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자리가 있습니다. 바로 사망 앞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붙잡고 삽니다. 건강을 붙잡고, 계획을 붙잡고, 사람을 붙잡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확실하게 붙잡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이사야 24장은 참혹합니다. 성읍이 무너지고, 땅이 황폐해지고, 이사야 자신도 탄식합니다.
그런데 25장에 들어서면 갑자기 노래가 터져 나옵니다. 1a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이 노래는 폐허 한가운데서 부르는 찬양입니다.
이 노래가 어디까지 가는지, 오늘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사야는 노래를 시작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1b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히브리어로 성실함과 진실함(에무나 오멘: אֱמוּנָה אֹמֶן)은 뿌리가 같은 두 단어입니다.
하나로도 충분한데 굳이 둘을 겹쳐 씁니다.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래전에 정해 두신 뜻을 끝까지 이루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신실하심이 실제로 어떻게 일합니까?
교만한 성읍은 돌무더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손이 정반대의 일도 합니다.
4절,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갈 곳 없는 사람에게는 성벽이, 뜨거운 볕 아래 선 사람에게는 그늘이 되어 주셨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도 이런 순간을 압니다. 감당이 안 되던 시절, 자녀 문제로 밤을 새우던 시절, 사업이 무너질 것 같던 시절. 그때 우리를 붙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성실하게 우리 곁에 요새로 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도 그 신실하심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를 하나 더 보여줍니다.
노래의 장면이 바뀝니다. 무대는 시온 산, 하나님이 만민을 위해 잔치를 여시는 자리입니다.
6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당시에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풍성한 잔칫상입니다.
그런데 이 잔치가 향하는 곳은 음식이 아닙니다.
7절과 8a절을 보면,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그런데 여기 “가리개”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이미지입니다.
문맥상 죽음과 애도의 장막, 곧 온 인류를 덮고 있는 죽음의 수의를 떠올리게 합니다.
온 인류의 얼굴에, 예외 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2010년, 칠레 산호세 광산이 무너졌을 때, 33명의 광부가 지하 700미터에 매몰됐습니다.
지상에서는 그들이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69일 동안 그들은 매 순간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마침내 한 사람씩 끌어올려질 때, 온 세계가 숨죽이며 지켜봤습니다. 33명 전원 생환.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광부들이 얻은 것은 죽음의 취소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뚫고 나온 것입니다. 그날 죽지 않았을 뿐입니다.
언젠가는, 그들도 다시 그 그림자 앞에 서게 됩니다.
이사야 25장은 이보다 훨씬 큰 것을 말합니다.
개역개정은 “가리개와 덮개를 제하시며”라고 번역하는데, 이때 사용된 동사는 ‘삼키다’(בָּלַע, 발라)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8절에서도 같은 동사가 반복됩니다.
“사망을 영원히 삼키실 것이라.” 하나님은 죽음이 드리운 덮개만 치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덮개를 만들어 내는 사망 자체를 삼켜 없애십니다.
광산에서 나온 사람은 다시 죽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노래하는 그 산 위에서는, 다시 죽을 그림자조차 남지 않습니다.
여기서 “영원히”(נֶצַח, 네짜흐)는 끝없이, 완전히라는 뜻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훗날 바울은 이 말씀을 부활의 승리와 연결하여 “사망을 삼키고 이기었으리라”라고 선포합니다(고전 15:54). 이사야가 보았던 사망의 영원한 제거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사망에 대한 승리로 선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자리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수술대 위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그 자리 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손을 놓지 않으신다고 노래합니다. 성읍을 무너뜨리시고 요새가 되어 주신 그 신실하심이, 인간이 결코 어찌할 수 없는 마지막 자리, 사망 앞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기서 완성됩니다.
그래서 이 산에서는 사망이 더 이상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8b절,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눈물이 씻기는 것도, 수치가 제해지는 것도, 그 앞에서 먼저 사망이 삼켜졌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삼켜지지 않으면, 눈물도 마르지 않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이 무엇을 합니까. 9절,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기다렸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오래 기다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의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산에서 전혀 다른 장면이 벌어집니다. 모압입니다. 10절,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에서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모압은 헤엄치듯 손을 펴서 발버둥 칩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능숙함으로 어떻게든 살아 보려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말합니다. 11절,
그가 헤엄치는 자가 헤엄치려고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그의 손을 펼 것이나 여호와께서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이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누르실 것이라
손이 능숙한 것과 상관없습니다. 자기 손을 의지하는 한, 가라앉습니다.
같은 산입니다. 같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한쪽은 잔치를 누리고, 한쪽은 짓밟힙니다. 잔치의 문은 만민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들어간 사람과 들어가지 않은 사람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수술대 위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맞습니다.
그 순간, 우리 손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사야 25장은 우리 손이 미치지 못하는 바로 그 자리에, 다른 손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읍을 무너뜨리고 요새를 세우셨던 손입니다. 수의를 삼키고, 사망을 삼키신 손입니다. 그 손은 어제오늘 갑자기 나타난 손이 아닙니다.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지금까지 일해 오신 손입니다.
그 손을 의지하는 사람은 잔칫상에 앉습니다.
자기 손을 의지하는 사람은 발버둥 치다가 가라앉습니다.
오늘 새벽, 우리는 어느 손을 붙잡고 있습니까?
지금 병상 곁을 지키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문득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천국 소망을 가진 사람도 그 자리는 여전히 두렵습니다.
두렵지 않다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자리가 더 이상 하나님의 손이 닿지 않는 자리는 아니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주님은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망을 삼키시고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도, 저와 여러분을 삼키는 것은 사망이 아니라 사망을 삼키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붙들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묵상 - 하시깨묵】
① 어제와 오늘, 내가 손댈 수 없다고 느꼈던 자리는 어디였습니까?
② 그 자리에서 나는 누구의 손을 더 의지하려 했습니까— 나의 손입니까, 하나님의 손입니까?
③ 지금까지 살아오며 하나님이 요새와 그늘이 되어 주셨던 구체적인 순간을 떠올려 봅시다.
④ 죽음이라는 말 앞에서 나의 마음은 오늘 어떠했습니까? 그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아뢰었습니까?
⑤ “사망을 삼키신다”는 말씀이 오늘 나에게 실제로 어떤 위로로 다가왔습니까?
⑥ 나는 지금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발버둥 치는 사람입니까?
⑦ 오늘 하루, 이 신실하심을 붙잡고 누구에게 나아가야 합니까?
【추천 찬송가】 105장 오랫동안 기다리던
【은혜의 찬양】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https://youtu.be/JXioLi7N4vo?si=NCJFY4lgWKGHbbdJ
【새벽예배영상】
https://youtube.com/live/KxubTvGLb5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