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바람에 휩쓸려 실종된 저출산 대책
헝가리식 저출산 해법, 언급도 못 할 정도인가
세계는 안간힘인데 ‘꼴찌’ 한국은 왜 한가한가
“출산하면 대출 원금도 일정 부분 탕감할 수 있는 부분은 없나 들여다보고 있다.”
지난달 초 나경원 당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의 발언은 눈길을 끌 만했다. 현실 가능성 등은 차치하더라도 ‘노이즈 마케팅’으론 충분해 보였다. 대출 탕감이란 파격, 낯선 ‘헝가리식 해법’의 신선함, 거기에 나경원이라는 거물급 정치인의 무게감이 더해졌다. 심각한 저출산 상황을 해결할 묘수를 찾을 다양한 논쟁이 벌어질 기회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노이즈는 대책이 아닌 나 전 의원에게만 집중됐다. 발언 다음 날 대통령실은 “사견일 뿐 정부 정책과 무관하다”고 일축해버렸다. ‘자기 정치’ ‘새빨간 거짓말’ 등 험한 말도 나왔다. 당 대표 출마의 뜻을 꺾지 않던 나 전 의원은 부위원장에서 해임됐다. ‘저출산 논쟁’은 사라지고 ‘나경원 사태’만 남았다.
‘헝가리 모델’은 말도 못 꺼낼 만한 내용일까. 2019년 2월 헝가리 정부는 ‘미래 아이 대출’이라는 정책을 내놨다. 40세 미만 신혼부부는 최대 1000만 포린트(약 3400만 원)를 저리로 대출받을 수 있다. 첫째를 낳으면 대출 이자 면제, 둘째는 대출 원금 30% 감면, 셋째를 낳으면 대출금 전액을 탕감해준다. 올해 들어 보따리를 더 풀었다. 지난해 말 종료 예정이던 ‘미래 아이 대출’ 상품의 기한을 2년 연장했다. 30세 미만 자녀가 1명만 있어도 엄마는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 사실상 평생 면제에 가깝다. 2010년부터 출산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한 헝가리는 2011년 합계출산율이 1.23명으로 바닥을 찍은 뒤 2021년 1.59명까지 올랐다. 같은 기간 한국이 1.24명에서 0.81명으로 주저앉은 것과 대조적이다.
저출산 대책에 진심인 건 헝가리만은 아니다. 한땐 반면교사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우리보다 출산율이 높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30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대책”을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2020년 국내총생산(GDP)의 2%였던 아동 관련 예산을 2배인 4%로 늘리겠다고 했다. 소득세를 개인이 아닌 가구별로 부과해 자녀가 많을수록 세금이 줄어드는 ‘N분(分) N승(承)’ 방식도 논의 중이다.
이런 절박한 움직임을 우리는 흥미로운 해외토픽쯤으로 여긴다. 정작 출산율 꼴찌인 우리는 기발하거나 파격적인 대책은 하나도 내놓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16일 한덕수 국무총리는 “기존 대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다”며 “모든 부처가 세밀하고 효과적인 대책을 강구해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대출 탕감’ 같은 아이디어가 불호령을 맞은 상황에서 부처들이 들고 올 건 뻔하다. 돈 안 들고 논란 없는 안전한 대책, 아니면 기존 정책의 포장지를 저출산으로 바꾼 대책. 학교 앞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면 부모 안심, 자녀 안심의 저출산 대책이 되는 식이다. 정작 아이를 낳고 싶은 난임 부부들은 소득 제한, 횟수 제한에 걸려 시험관 시술비를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현금 지급식의 단기 대책이 아닌 고용, 주거, 보육, 교육 등 전 생애를 유기적으로 고려하는 종합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맞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단칼에 해결할 근본적인 대책만 찾고 있기엔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 단기 대책과 장기 대책, 종합 대책과 핀포인트 대책 등 다양한 정책적 조합이 필요하다. 부작용과 시행착오부터 걱정하기보단 선제적이고 과감한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저출산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놓고 백가쟁명식으로 온갖 아이디어를 내서 치열하게 토론하는 과정도 있어야 한다. 저출산이 심각하다면서 논쟁도 아이디어도 없는 한국. 우리는 뭘 믿고 이렇게 한가로운가.
김재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