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노트와 이런저런 이야기
80,000개의 드로잉, 600개의 모델시트
수작업으로 완성된 고품격 흑백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를 스크린으로 옮기기 위한 각색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마르잔 사트라피와 뱅상 파로노는 이 작품을 컴퓨터그래픽 이미지가 아닌 전통적인 수작업 방식을 통해 흑백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트레이스 애니메이터가 거의 사라진 요즘 전통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놀라운 도전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모험을 돕기 위해 ‘주 수이 비엥 콘텐트’와 ‘펌프킨 3D’라는 특별한 두 스튜디오가 나섰다. 마르잔 사트라피의 원작을 바탕으로 각기 다른 개성을 소유한 캐릭터와 수많은 엑스트라를 생생히 표현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 수치라 할 수 있는 600개가 넘는 모델시트가 만들어졌고 약 130,000개의 이미지를 위해 무려 80,000개의 드로잉이 사용되었다! 물론 이것은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 당연한 수치였다. 또한 흑백영화로 만들기 위한 작업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뱅상 파로노가 흑백기법을 사용해 몇 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경험자였고 프로듀서 마르크 앙투완이 영화 <일요일이 기다려진다> 시절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에게서 받은 흑백영화 명작 리스트는 그들의 예술적 실험을 위한 촉매가 되어주었다.
마르잔 사트라피,
그녀와 함께 그녀의 모든 것을 공유한 특별한 작업
<페르세폴리스>를 위해 수십 명의 애니메이터와 마르잔 사트라피는 함께 움직였다. 약 600개의 전혀 다른 캐릭터들을 위해 마르잔 사트라피는 캐릭터의 정면과 옆모습을 그렸고 애니메이터들은 모든 각도에서 그들의 얼굴 표정과 동작을 그렸다. 그녀는 애니메이터들이 작품을 만들 때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정확히 알려주었다. 자신의 작품을 위한 마르잔 사트라피의 헌신적인 모습은 애니메이터들에게도 새로운 도전 정신을 심어주었다.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 영화에서는 감독이 매일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드물지만 마르잔 사트라피는 그녀만의 뚜렷한 색깔을 지닌 작품을 만들기 위해 뱅상 파로노와 함께 매일 스튜디오에서 제작진과 의견을 교환했다. 심지어 그녀는 영화 속 한 장면을 생생히 재연해 보이기도 했고 이러한 그녀의 열정은 영화를 완성하기 위한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페르세폴리스>의 제작진은 제작기간 내내 실존하는 캐릭터인 마르잔 사트라피와 함께 그녀의 삶과 감정을 공유하며 오로지 그녀에게만 몰두한 채로 작업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영화 <페르세폴리스>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메리트인 진실성에 기여한 값지고 귀한 과정이다.
씨네21 리뷰
얼굴은 하얗고 머리는 까맣다. 눈은 길게 찢어진 타원에 작은 점 하나를 찍었고, 입은 한줄짜리 곡선이다. 기술의 진화를 과시하며 갈수록 치밀하게 실재를 모사하는 3D애니메이션의 호황 속에서 이 얼마나 뒤떨어진 모양새인지. 하지만 연습장을 북 찢어놓은 듯한 흑백의 셀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는 최첨단 기법을 동원해 범상한 교훈을 설파하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과는 정반대로 단순하고 간소한 그릇에 복잡하고 풍성한 이야기를 전한다. 이란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마르잔 사트라피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동명의 그래픽 노블에 담았고, 책이 성공을 거두자 언더그라운드 만화작가인 뱅상 파르노와 함께 생애 첫 애니메이션을 연출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6여년의 시간을 담는 <페르세폴리스>는 이란 소녀 마르잔이 혁명과 전쟁의 난기류를 헤치고 국경을 넘나들며 성장해가는 과정을 좇는다. 부유하고 진보적인 부모 밑에서 자유롭게 자란 마르잔은 이소룡과 마이클 잭슨을 숭배하고 감자튀김을 사랑하는 소녀다. 하지만 독재 왕정을 몰아내고자 했던 혁명의 이상이 이슬람 근본주의로 교체되고, 이라크 침공으로 나라가 전화에 휩싸이면서 마르잔은 부모의 품을 떠나 오스트리아를 향한다. 서구의 물질적 풍요에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잠시, 스스로가 이방인임을 절감한 마르잔은 마약과 노숙생활로 방황을 이어가다 다시 고국으로 향한다.
이국의 관객에겐 생소하고 난해할 이란의 현대사는 소녀의 시선을 통해 좀더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순간들로 전달된다. 예컨대 팔레비 국왕의 실각과 뒤따른 정치적 격변은 ‘국왕은 신의 선택’이라고 가르치던 마르잔의 학교가 이내 교과서 첫장의 국왕 사진을 뜯어내도록 지시하는 모습을 통해서, 이슬람 근본주의는 인체소묘 수업에서 온몸을 검은 천으로 휘감은 모델을 스케치해야 하는 웃지 못할 고충으로 그려진다. 역사의 질곡들을 차례차례 밟아가는 소녀의 성장기는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임을 온몸으로 증명하지만, 그것이 결코 교조적이거나 계몽적이지는 않다. 마르잔은 힘없이 꺾이는 순수의 상징도 고결한 운동가도 아니다. 불합리한 권위에 야무지게 대꾸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영웅 대접해주는 패들에 혹해 방탕한 생활에 빠져드는 그녀는 용감하고 자유로운 만큼이나 성급하고 어리석다. 이상과 구호를 끊임없이 배반하는 역사의 아이러니와 한 인간의 모순된 발자취가 맞물려 <페르세폴리스>는 드라마적인 흥분과 짙은 정서적 감응을 동시에 이끌어낸다.
마르잔 사트라피와 뱅상 파르노가 사트라피의 아파트 겸 스튜디오에서 8만장의 드로잉을 그려 완성했다는 애니메이션은 2차원의 평면을 무한 확장하는 독창적이며 우아한 마법을 보여준다. 팔레비 정권과 서방세계의 밀월은 풍자적인 인형극으로, 반정부 시위와 전쟁 등 유혈의 순간들은 침통한 그림자극으로 표현됐다. 마르잔의 옷차림을 단속해 잡아가려는 혁명 수호대의 여성들이 거대한 뱀처럼 늘어나 소녀를 휘감고, 사랑에 빠진 연인을 태운 자동차가 오스트리아의 밤거리를 꿈결처럼 날아다니는 등 사트라피의 검은 펜은 자유로움과 재치, 상상력으로 반짝거린다. <페르세폴레스>가 “영광스러운 이슬람 혁명에 대한 비사실적인 묘사”라고 낙인 찍은 이란 정부는 영화의 상영을 막기 위해 프랑스 대사관에 서한을 보내는 등 압력을 행사했으나, 결국 <페르세폴리스>는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고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TIP/프랑스 자본으로 제작된 <페르세폴리스>는 불어로 더빙됐다. 마르잔의 어머니와 마르잔의 목소리는 재미있게도 카트린 드뇌브와 그녀의 딸인 키이라 마스트로이안니가, 할머니 목소리는 <8명의 여인들>에서 드뇌브와 모녀 관계를 맺었던 프랑스 원로 여배우 다니엘 다리유가 연기했다.
<페르세폴리스>는 어떻게 탄생했나? 마르잔 사트라피는 1969년 이란에서 태어났다. 테헤란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오스트리아의 프랑스계 학교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그녀의 삶은 <페르세폴리스>에 충실하게 담겨 있다. 이후 결혼에 실패하고 1994년 프랑스로 이주한 사트라피는 파리에 머무르며 일러스트레이터 겸 동화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이란을 “이슬람 근본주의자, 테러리스트, 악의 축”과 동일시하는 프랑스인들의 편견과 맞부딪혔고, 갈등하던 사트라피는 마침 친구의 소개로 유대인 학살을 다룬 아트 슈피겔만의 그래픽 노블 <쥐>를 읽게 된다. <쥐>를 처음 접했을 때 “오, 하느님. 이런 방법이 있었다니!” 탄성을 터뜨렸다는 그녀는 즉각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그래픽 노블 작업에 착수한다. 2000년 첫권을 시작으로 4년간에 걸쳐 총 4권의 <페르세폴리스>가 탄생했고,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 전미도서협회상 등을 휩쓸면서 사트라피는 일약 주목받는 작가로 떠오른다. 미국에서 <페르세폴리스>가 출판된 뒤 그녀는 자연스레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았다. 심지어 제니퍼 로페즈와 브래드 피트를 내세운 영화화 제안도 받았지만, 사트라피는 <페르세폴리스>를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흑백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자 결심한다. 프랑스에서 ‘윈쉬뤼스’(Winshluss)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던 언더그라운드 만화작가 뱅상 파로노가 파트너가 됐고, 두 사람은 공동 각본·연출로 성공적인 감독 데뷔를 마쳤다. <페르세폴리스> 이후에도 <엠브로이더리> <치킨 위드 플럼스> 등의 그래픽 노블을 출간하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사트라피는 <뉴욕타임스>의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하다. <페르세폴리스>는 국내에도 2권으로 묶여 번역, 출간됐다. 글 최하나 2008-05-07
수상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