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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삼국 구도의 종말과 고려의 민족통일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이듬해 1월 도성을 송악(개성)으로 옮긴다.철원은 궁예의 터전이기에 대다수의 철원 주민들은 왕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
었고,이러한 반감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기에 왕건은 자신의 지지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도성을 옮겨 왕권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왕건의 입지는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다.태봉은 궁예를 구심점으로 이뤄진 호족연합국가였는데,궁예가 사라지면서 자연히 호족들간의 결집력
은 약해졌다.왕건은 이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항상 호족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였고,외부적으로는 더욱 강성해진 후백제를 상대해야만 했다.하
지만 왕건의 특유의 유화적인 성품을 앞세워 이러한 내외적인 문제를 능숙하게 해결해 나간다.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각 지역의 유력한 인물들과
결혼을 통한 인척관계를 맺는 한편,후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왕건의 유화정책에 견훤도 호의를 보였다.호전적인 궁예보다는 왕건이 상대하기 편하다고 판단한 견훤은 고려 건국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고,몇 번에 걸쳐 신하들간의 교류를 추진하기도 하였다.견훤은 내심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중국,일본 등
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국가적 면모를 일신하여 자신을 한반도 지역의 맹주로 인식시키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
한편 신라도 왕건에게 호의를 보였다.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신라는,신라 장수 출신으로서 반역한 견훤보다는 호족 출신인 왕건
을 더 믿을 만한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고,그 때문에 은근히 고려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내비쳤다.
고려 건국 이후 2년 동안은 이러한 평화가 지속되었다.하지만 920년 견훤이 신라 지역인 합천을 침범함에 따라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합천의 대야
성이 무너지자 신라는 진주,거창,산청 등의 경상 서부와 북부지역에 대해 위협을 느꼈고,후백제의 통일정책은 더욱 가속화되는 경향을 띠었다.이 때
문에 경상 북부지역의 호족들이 불안을 느낀 나머지 고려에 투항하였다.
후백제의 신라 침공에 대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던 고려는 925년 조물성(경상북부: 상주.안동 사이)싸움을 시작으로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전쟁에 돌입한다.하지만 이 전쟁은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며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이에 고려와 후백제는 휴전을 선언하고 화의를 맺었다.화
의조건으로 서로 인질을 교환했는데,견훤은 처의 친족인 진호를 고려에 보냈으며,왕건은 6촌 동생인 왕신을 후백제에 보냈다.
그러나 두 나라간의 화의조약은 이듬해 고려로 갔던 진호가 병으로 죽으면서 깨지고 만다,견훤은 진호의 죽음을 독살로 규정하고 인질로 잡고 있던
왕신을 죽인 후,공주성을 기습하였다,이로써 고려와 후백제간의 본격적인 통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싸움이 시작되자 신라는 고려를 응원했다.경애왕은“견훤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키면 하늘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
서 왕건을 지원할 뜻을 비쳤다.
고려와 후백제가 막 전쟁 상태에 돌입했을 때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침입하여 발해를 멸망시켰고,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몰려들었다.발해 유민이 고려
로 몰려든 덕분에 왕건은 병사의 수를 늘릴 수 있었고 견훤과의 싸움에도 그들을 동원하게 된다.
한편 전쟁과정에서 견훤이 경주를 침범함에 따라 신라 백성들의 감정은 고려에 더욱 우호적으로 변해갔다.927년 9월 견훤은 경상북부를 공략하다가
갑지기 진로를 바꾸어 영천을 거쳐 경주를 기습하였다.경주를 장악한 그는 경애왕을 비롯하여 많은 왕족들을 죽이고,김부를 신라왕으로 앉힌다.
신라는 견훤이 경주로 향해 온다는 전갈을 받은 즉시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지만,고려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경주는 함락되고 말았다.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 원병을 의식한 나머지 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던 중 공산(팔공산)에서 고려군과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된다.
견훤은 공산싸움에서 고려군을 대파한다.고려군은 이 싸움에서 수천 명의 군사를 잃고 개국공신 신숭겸,김락 등의 뛰어난 장수들도 전사했다.왕건은
이 싸움에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개경으로 후퇴하였다.
공산싸움 이후 고려의 힘은 열세에 놓이게 되고,경상도 서부 일대가 견훤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된다.하지만 견훤은 오히려 경상도 주민들의 원성
을 사게 되어 더 많은 적을 양산하는 결과를 빚는다.견훤 병사들의 노략질에 분노를 느낀 경상 북부 일대의 호족들이 대거 고려로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한동안 열세에 놓여 있던 고려는 경상도 고창(지금의 안동)병산 싸움을 계기로 전세를 바꿔놓는데 성공한다.후백제는 크고 작은 전투에서 계속 승리
하면서 견훤은 북진을 거듭하게 되고,마지막 경상도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고창(지금의 안동)공략을 준비하게 된다.
이에 왕건 역시 견훤을 막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향하지만 929년 12월 견훤은 마침내 고창을 포위하게 된다.이에 고창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의 군대 3천은 후백제의 군대에게 포위된 상황이 된다.그러나 고창 인근의 재암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 장군 선필이 군대를 이끌고 귀순하고,
여기에 김선평.김행.장정필 등 지방호족들이 속속 왕건을 돕겠다고 나서기 시작했다. 이 전투는 3-4일간 계속되는데,후백제가 처음에는 고려군을 밀
어내는 것으로 보였으나,앞에 말한 신라호족들이 고려를 돕고,유금필이 정예기병을 이끌고 견훤의 군대를 박살내면서 후백제군은 그야말로 대패를
하게 된다.후백제의 전사자가 8천명에 이르렀으며 견훤은 홀로 낙동강을 건너 퇴각하게 된다.
이 고창전투를 계기로 신라는 완전히 고려를 의지하게 되고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신라의 성들이 일제히 투항하였으며,지금의 경북 칠곡,구미등의
호족들은 왕건을 따르게 되니,그야말로 왕건과 견훤의 전세가 뒤바뀐 어마어마한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전투에서 이긴 왕건은 고창지역을 동쪽(신
라 경상도)을 평안하게 했다고 해서 안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후삼국의 전세를 뒤바뀐 고창전투의 승리는 단연 유금필과 신라호족들 덕분이라 할 수 있다.이를 알고 있었던 왕건은 그 어느때보다 기뻐하였고,자
신을 도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신평,김행,장정필에게 삼태사(三太師 왕의 스승)라 칭하며 안동을 본으로 하는 안동김씨,안동권씨 안동장씨의 3성씨
를 하사했다.그중 김행은 ‘능히 기마술에 밝고 권도(목적달성을 위하여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도)에 통달하다’는 뜻
으로 ‘능병기달권(能兵技達權)’이라 하며 안동권씨의 성을 하사하여 권행으로 불리게 되고 이가 바로 안동권씨의 시조가 된다.
고창 병산싸움이후 급격히 힘이 약해진 후백제는 이러한 힘의 열세를 회복하기 위해 서해안 일대를 공략하지만 그다지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그러
는 가운데 양국간의 전쟁은 한동안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이때를 이용하여 왕건은 고려에 투항해온 재암성 장군 선필의 주선으로 경주를 방문하는
성과를 올린다.
왕건이 경주를 방문하자 경순왕 김부를 비롯한 신라세력들의 고려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높아져 강릉과 울산의 110여 성이 고려에 투항하는 등,호
족들의 투항도 줄을 이었다.
고려가 이처럼 유화책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시키고 있을 무렵 후백제에서는 견훤 아들들간의 내분이 가속화된다.견훤에게는 장남 신검을 비롯하여
양검,용검,금강 등의 네 이들이 있었는데,넷째 아들 금강에 대한 견훤의 신뢰가 두터웠다.이를 시기한 나머지 세 아들은 935년 3월 급기야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견훤을 김제 금산사에 유폐시켜 신검을 왕위에 올린다.
금산사에 갇혀있던 견훤은 그 해 6월 간신히 탈출하여 나주의 고려 진영에 몸을 맡긴다.왕건은 고려에 투항해온 견훤을 유금필로 하여금 데려오게
하여 환대하고 개성에 머물도록 하였다.
고려에 투항한 견훤에게 후한 대접을 하는 것을 목격한 경순왕도 그 해 11월에 고려에 항복하므로써 신라의 천년 왕국도 종막을 고하게 된다.상황
이 이렇게 되자 왕건은 통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936년 9월 8만7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검을 응징하기 위해 출병한다.
이때 출병한 왕건의 군사는 고려군 4만 3천 명과 지방 호족 및 발해 유민으로 구성된 연합군 4만4천 명으로 명실공히 민족 연합군이었다.
고려 연합군과 신검의 부대가 처음 싸운 곳은 일선(선사)이었다.이곳에서 신검은 연합군에 대패하고 완산주로 퇴각했다.그리고 연합군이 추격을 계속
하여 황산(논산)의 탄령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검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왕건은 완산주에서 정식으로 신검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마침내
민족통합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신라의 통일이 당나라의 외세를 빌어 이룬 것이라면,고려의 통일은 민족 대화합적 차원의 자주적 민족통일이었다.이 민족통일의 주도세력은 왕건을
중심으로 한 고려 건국세력이었다.고려군을 포함 926년에 거란에게 멸망당한 발해 유민이 합세했고,또한 신라 왕실과 백성들도 이에 호응하여 연합
군에 가담했으며,후백제를 세운 견훤까지 끌어안음으로써 명실공히 민족 대화합을 이룬 가운데 통일을 성사시켰다.고려는 이처럼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일궈낸 최초의 통일국가였다.
고려의 통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단일민족으로 단일문화를 형성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으며,한반도의 문화중심지도 경주에서 개성으로 옮겨가게 되
었다.개성이 문화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은 경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신라문화를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는 의미이자,동시에 고구려 문화를 회복
할 기회를 맞이했다는 뜻이다.뿐만 아니라 고려가 고구려의 고토회복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꾸준히 북진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는 것
도 고려 건국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의태자-935년 10월 경순왕이 나라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에 바치는 항복을 논하는 자리에서 마의
태자 김일은 동생 덕지 왕자 및 이순유 등과 함께 불가함을 극력 간하였으나 결국 경순왕의 뜻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935년 11월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옮겨가자 그의 동생 덕지 왕자와 함께 금강산에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로된 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초근목피하였고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금강산 비로봉 정상에서 외금강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비탈길에 무덤이 있는데,이 무덤을 마의태자릉이라고 부른다.
마의태자의 아들인 김행 혹은 김준은 법명이 김함보로써 삼형제인데 김함보는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고려에 두고 혼자서 갔다.거기에서 여
진족 추장의 딸을 고쳐준 인연으로 여진족 추장의 사위가 되었다.그런데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핵리발인데 핵리발은 여진족을 통합한 오야속을
낳았고,오야속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를 낳았다.그러니까 경순왕-->마의태자-->김함보-->핵리발-->오야속-->아골타가 된다.
금나라를 계승한다는 후금(나중에 청나라)의 누르하치는 성이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이 말은 신라를 사랑하고 마음속에 잊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즉,자기들의 조상이 신라인임을 나타낸 것이다.
※.발해의 멸망-10세기 초(907년) 중국에서 당이 후량을 세운 당 절도사 주전충에 의해서 멸망하고 5대 10국시대의 혼란이 일어나자,당의 지배를 받
고 있던 거란족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야율아보기’는 거란부족을 통합하고 나라이름을 ‘요’라고 칭하며 대규모 정복활동을 시작하였다.그는 926년
본격적인 고려 북쪽에 있는 발해 원정에 나선다.발해부는 부여부가 함락된 지 6일만에 수도 상경성이 포위당하자 왕이 항복하므로써 멸망하고 말았
다.발해가 멸망한 후 요는 발해의 상경 용천부를 수도로 한 동란국을 세웠으나, 발해 유민의 끈질진 저항으로 요나라 동경(지금의 요양)으로 옮겼으
나,요나라 성종 때인 982년에 없어졌다.
한편,발해 멸망 후 각지에서 항쟁이 이어져 발해왕조를 다시 세우려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그 결과 후발해,정안국,흥요국,대발해국 등이 나타났으
나,부흥운동은 모두 실패했다.위기에 처했을 때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고려 왕건은 국내 사정에 여의치 않아 도움을 주지 못한 점 안타깝다.뜻
을 이루지 못하자 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이주하였다.
첫댓글 부족한 저의 게시에 그래도 적으나마 관심 가져 주시는
여러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감을 느낍니다.
'고려왕조실록'이라는 책에서 이기하고 있는데,
그외 인터넷에서 참고자료를 찾아서 첨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려역사를 다시 가볍게 공부한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오늘은 마음이 딴곳에 있어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네요~
나중에 찬찬히 다시 읽어 볼께용~ㅎㅎ
추천이라도 꾹!! 누르고 나갑니다
고려의 시작과 과정을 자세히
알 수있어서 역사를 다시 인식하게도
되어 좋습니다
난세에 태여나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다는 것은 진실로 힘든 과정인데 이렇게
편안히 글로 읽지만 당시의 영웅들의
삶이 얼마나 치열한지 짐작해 봅니다
안동권씨의 탄생도 알게 하고
누르하치의 성이 애신각라 라는
신라인의 핏줄이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추일슬풍님
감사합니다〰〰🙏
고려역사를 다시 공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