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춘천 이야기2
구국의 길에 앞장섰던 춘천 선비들
<선비의 길을 간 춘천사람들>
“이용도 그만하고 재주도 그만 부려라. 좋은 말로 달랠 적에 너희 나라로 가거라. 대장놈들아,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
이 구절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며 여성 독립운동가인 윤희순 의사가 지은 격문 <왜놈 대장 보거라>의 마지막 내용이다. 우리는 여기서 ‘조선 선비의 아내’라는 단어가 주는 강렬한 힘을 읽을 수 있다. 왜 윤희순은 굳이 ‘조선 선비의 아내’라는 말을 왜놈들에게 주는 글에 넣었을까?
선비라는 단어는 <용비어천가>에 처음 등장한다. <용비어천가>에서 선비는 한국인의 정신이며 한국을 이끌어온 근본정신으로 보았다. 선비는 평소에 학문을 익히며 공동체의 올바른 유지를 위해서 사랑[仁愛]을 실천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목숨을 걸고 의리(義理)를 행하였다. 비록 벼슬하지 않았지만, 공동체와 나라의 위기를 가장 선봉에서 지켜낸 사람이었다. 그렇게 삼국시대에도 조선조 임진왜란과 구한말 일제 침략에도 선비가 의병으로 나서 나라를 구하였다. 유학자며 승려 구분 없이 모두 선비가 되고자 했던 원인이다.
춘천 남면 가정리를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제 강점에 맞서 싸운 주체가 선비정신의 소유자였다.
<피눈물을 흘린 투쟁>
“슬프고도 슬프도다 이내신세 슬프도다 이국만리 이내신세 슬프고도 슬프도다 보이는눈 소경이요 들리는귀 막혔구나 말하는입 벙어리요 슬프고도 슬프도다 이내신세 슬프도다”(<신세타령>)
윤희순의 가사 <신세타령>에 나오는 구절이다. 국내에서 의병을 하다가 안 되자, 해외에서 의병 활동을 하면서 신세를 한탄한 내용이다. 위 구절에서 얼마나 어렵게 의병 활동을 이어갔는지 읽을 수 있다.
유인석, 유홍석, 이소응 등 춘천의 주요 의병장들이 중국과 러시아 등에서 끝까지 의병과 독립운동을 했다. 이때 윤희순도 시아버지, 남편, 두 아들과 같이 죽을 때까지 싸웠다.
<의병의 본향 춘천인의 구국정신>
<춘천 아리랑>은 의병의 노래이다.
“춘천아 봉의산아 너 잘 있거라/ 신연강 배터가 하직일세// 우리나 부모가 날길으실제/ 성대장 주려고 날길으셨나// 귀약통 납날개 양총을 메고/ 벌업산 대전에 승전을 했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로구나/ 아리랑 고개 넘어로 나를 넘겨주제”(춘성의 맥)
어쩌면 세상에서 아리랑으로 의병가를 부른 지역은 춘천이 유일할 것이다. 여기서 성대장은 1896년 서면 주길리 벌업산에서 의병을 했던 성익환[현] 의병장을 일컫는다. 이렇게 의병 내용이 들어간 노래를 지역 <춘천 아리랑>으로 부를 정도이니, 춘천이 의병의 본향이라 일컬어도 무방하리라.
매년 4월 12일이면 춘천 가정리에서 의암제를 행한다. 이날은 해외에서 의병을 하다가 돌아가신 13도의군도총재 의암 유인석의 유골을 1935년 우리나라로 옮겨온 날이다. 이날은 춘천의 수많은 의병을 비롯해서 전국 의병의 구국정신을 기리는 날이다. 그 대표로 의암을 앞세웠다. 춘천사람들이 가진 정체성이 구국정신이요, 선비정신에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춘천사람들은 공동체의 의(義)를 먼저 실천하고, 사사로이 이(利)를 앞세우지 않는 선비정신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