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복래의 人香萬里 ➒ 땅콩밭에서 피어난 지미 카터의 진정한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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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밭의 승리(Peanut Farmer's Victory)."
1976년 지미 카터가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 등
주요 언론의 1면을 장식한 인상적인 헤드라인이었다.
땅콩 농장주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은 카터의 소박하고 진솔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국민들에게 신선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워싱턴의 주류 정치와는 거리가 먼 '아웃사이더'였던 카터는 땅콩밭의 흙냄새를 맡으며 자라난 촌뜨기 정치인에 불과했다.
화려한 정치 무대와는 무관했지만, 평범한 미국인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특히 닉슨 대통령의 몰락을 초래한 ‘워터게이트 스캔들(Watergate scandal)’ 이후,
정직과 도덕성을 갈망하던 국민들은 카터에게서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
맑은 강물처럼 국민의 양심을 일깨우고 신뢰를 회복시킨 카터는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로 자연스럽게 부각됐다.
결국 그는 대통령에 당선됐고 새 시대를 여는 희망의 샴페인을 힘차게 터뜨렸다.
경륜과 지도력 부족 드러낸 카터, 잇단 정책 실패
하지만 카터는 재임 기간에 지도력 결핍과 위기대응 능력 부족, 연이은 정책 실패로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지 못했다.
거짓말과 부도덕으로 얼룩진 전임 닉슨에 대한 반발 심리와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해 운좋게 당선된 대통령으로 치부됐다.
결국 카터는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과 맞붙은 1980년 대선에서 참패하며 연임에 실패했다.
선거인단 538명 중 단 49명을 확보하며, 20세기 미 대선 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기록했던 것이다.
카터의 좌절은 무엇보다 경제정책의 실패가 주원인이었다.
취임 첫해 6% 안팎이던 물가상승률은 임기 말 13%를 넘었고 실업률 역시 7%대를 기록했다.
미국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에 빠졌고, ‘미국의 위기’라는 비판이 곳곳에서 제기됐다.
이는 카터의 리더십에 치명타를 가했다.
또한 1977년 파나마운하 조약을 통해 1999년까지 운하 관리권을 파나마에 반환했으나,
이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포기한 미숙한 결정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이 파나마운하의 주요 거점을 차지하며 미국의 안보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되찾기 위해 군사 조치까지 거론하는 상황이다.
카터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란 대사관 인질 사태(1979-1981), 주한미군 철수 추진, 그리고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 결정 등도 큰 패착으로 꼽힌다.
이처럼 카터의 정책은 이상주의와 윤리적 기준에 충실하려는 의도가 강했으나,
국제 정세의 냉혹한 현실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카터는 ‘유약한 리더십’의 상징으로 남게 됐다.
퇴임후 찬란한 ‘인생 2막‘...‘호리병 속의 작은 거인’
카터의 리더십은 그러나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 조지아에서 진정한 빛을 발했다.
방 두 칸짜리 소박한 집에서 생활하며 사치와 탐욕을 멀리하고,
전직 대통령으로서 누릴 수 있는 부와 명성을 단호히 거부했다.
고액 강연과 기업 컨설팅, 고문직 등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며 33권의 책을 집필해 스스로 생계를 해결했다.
또한 전직 대통령 연금과 경비마저 절약했고, 항공기도 늘 이코노미석을 이용했다.
돈보다는 삶의 가치를 추구했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등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삶을 몸소 보여주었다.
또한 카터센터를 설립해 글로벌 평화 증진, 인권 옹호, 질병 퇴치, 빈곤 감소 활동에 앞장섰다.
에티오피아 등 분쟁 지역에서는 평화 중재자로 활약하며 전직 대통령이라는 명함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1984년부터 30년 넘게 열악한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한 ‘사랑의 집짓기(해비타트)’ 운동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며
헌신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낙상으로 부상당하거나 흑색종 판정을 받았을 때조차 현장을 지키며 봉사에 임했다.
암 투병 중이던 2015년에도 해비타트 현장에서 망치와 톱을 든 모습은 진정한 봉사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이후 그는 암 완치 판정을 받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런 헌신은 그에게 2002년 노벨평화상의 영예를 안겼다.
국민을 향한 사랑, 인생 마지막까지 빛난 카터
지난해 말 100세를 일기로 타계한 카터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국민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화려한 장례 절차없이 고향 마을로 바로 보내져, 아내 로잘린 여사의 옆에 안장됐다.
뉴욕타임스는
“백악관을 떠난 후 40년간 이어진 인도주의 활동에 경의를 표한다”며
“그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은 아닐지라도, 가장 영향력 있는 대통령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카터의 삶을 돌아보면, 그의 재임기가 ‘인생 1막’이었다면 퇴임 후의 삶은 감동적인 ‘인생 2막’이자 완결편이었다.
그는 ‘평화의 농부’라는 애칭처럼 전 세계인의 존경을 받으며 전쟁을 막고 가난을 퇴치하며 병든 이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마치 호리병 속 작은 거인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호리병을 깨고 나온 듯,
그의 삶은 사랑과 평화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지를 증명하는 생생한 드라마였던 셈이다.
봉사와 헌신의 리더십, 카터가 한국 정치에 남긴 메시지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종종 권력의 끝자락에서 불명예와 치욕으로 얼룩진 역사를 남겼다.
감옥 문턱을 넘는 일이 반복되며 국민에게 깊은 실망과 상처를 안긴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흑역사와 대비되는 지미 카터의 삶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전한다.
카터의 리더십은 인권, 윤리, 사회적 기여, 관용과 나눔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꽃피웠다.
그는 권력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국민을 위한 봉사를 실천하며 진정한 리더십의 표본을 제시했다.
퇴임 후에도 끊임없이 봉사의 길을 걸으며 '진정한 땅콩밭의 승리‘를 이룬 그의 삶은 깊고 묵직한 메시지를 전한다.
조지아주의 작은 땅콩 농장에서 시작된 그의 인생은 '권력을 위한 정치'가 아닌 '국민을 위한 정치'가 진정한 길임을 일깨운다.
진정한 리더십은 권력을 내려놓은 순간부터 시작되며,
권력의 유혹을 이겨내고 국민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실천할 때 비로소 역사에 길이 남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출처 : 맑은뉴스(https://www.ccnn.co.kr)